(노상추 일기에서) 대궁의 기록
노상추 일기에서 대궁(大弓 = 육량궁)에 대한 기록을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1. 노상추 일기에서의 대궁
1) 31세, 1776년(영조 52) 5월 22일
5월 22일(임진) 볕이 나고 오후에 우레가 치고 비가 조금 내림.
양촌리陽村里로부터 지나가면서 중평리中坪里를 거쳤다.
대궁大弓에 활시위를 걸어서 활쏘기를 하고 저녁 뒤에 집에 돌아왔다.
여차余次의 김선金繕·김순金純 형제가 와서 묵으면서 밤에 이야기를 나누었다.
☞ 출처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776년 5월,
http://db.history.go.kr/id/sa_089r_0010_0240_0050
노상추 공은 23세에 (1768년 영조44년) 문과에서 무과로 뜻을 바꾸었는데,
35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무과에 급제하였습니다.
31세이면 무과시험 준비가 한창이었을 시기입니다.
따라서 육량궁 연습에도 매진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노상추 공이 무과에 응시한 기록입니다.
26세 (1771년 영조 47년) 무과에 응시했으나 2번의 정시에서 모두 낙방.
30세 (1775년 영조 51년) 영조의 승하로 인하여 정시가 취소됨.
32세 (1777년 정조 1년) 초시에는 합격했으나, 복시에서 낙방.
33세 (1778년 정조 2년) 알성시와 정시에서 낙방.
34세 (1779년 정조 3년) 식년시에 합격.
35세 (1780년 정조 4년) 대구에서 선무도시를 치루고, 한양에서 정과에 급제.
2) 33세, 1778년(정조 2) 6월 18일 ~ 20일.
6월 18일(병자) 볕이 남.
중평리中坪里로부터 양탄陽灘을 건너 양촌陽村에 도착하니
친구 장동준張東浚·장천택張天澤 및 여러 친구가 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張 우후虞候가 갖고 있는 대궁大弓은 강진康津註 001에서 병마 우후로 있을 때 만든 것으로
신포新浦의 정화경鄭和卿이 사기를 원했기 때문에 27냥으로 가격을 정하였고,
또 상각평궁常角平弓 1장은 내가 쏘려고 사 왔다.
대궁과 평궁을 모두 가지고 왔다. 오후에 양촌에서 출발해 우소寓所에 도착하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6월 19일(정미) 볕이 남.
문동文洞에 갔다.
정화경鄭和卿이 고남古南에 도착했으므로 그에게 들러서 서로 만났고 대궁大弓을 가지고 갔다.
나는 문동에 묵었다.
6월 20일(무신) 볕이 남.
신포新浦에 가서 여러 친구들과 함께 활을 쏘았다.
대궁大弓에 시위를 얹어서 정화경鄭和卿이 활을 쏘니 130여 보의 거리에 도달하였다.
저물녘에 문동文洞으로 돌아와서 묵었다.
☞ 출처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778년 6월,
http://db.history.go.kr/id/sa_089r_0010_0280_0060
3일 동안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궁을 파는 사람 : 장 우후.
대궁을 사는 사람 : 신포의 정화경.
대궁을 전달한 사람 : 노상추.
대궁을 쏜 사람 : 정화경.
고남, 신포 등은 현재 경북 구미시에 있었던 고을의 이름입니다.
강진은 현재의 전라도 강진군입니다.
병마 우후는 종3품으로, 병마절도사의 부관입니다.
위 기록에서 조선의 무인들은 대궁을 개인적으로 소지하고 연습하였고,
대궁의 매매도 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약 대궁(육량궁)을 매매하였다면,
당연히 철전(육량전)의 매매 또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3) 33세, 1778년(정조 2) 7월 30일.
7월 30일(정사) 흐림.
후천동後川洞에 머물렀다.
친구 채한보蔡翰甫가 대궁大弓을 갖고 도성 안으로 들어와서 동대문 밖 성 모퉁이에서 보사步射하였다.
채蔡 친구는 반촌泮村에서 묵었다.
☞ 출처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778년 7월,
http://db.history.go.kr/id/sa_089r_0010_0280_0080
무과를 치르기 위해 한양에 와서도,
대궁으로 습사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4) 50세, 1795년(정조19) 윤2월 12일.
윤2월 12일(계사) 볕이 남.
청교靑橋에 가서 갑산甲山 수령 황태언黃泰彦과 이야기를 하였다.
그 막내아들 황협기黃恊基가 회시會試를 볼 때 대궁大弓을 당기다가
어깨뼈를 삐끗해서 활을 쏘지 못하고 지금 누워있다고 하는데, 이것 또한 운수이다.
☞ 출처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795년 윤 2월,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220_0030
황협기가 대궁을 다루다가 어깨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육량궁을 무리하여 당기려다가 몸을 다치는 폐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 대궁 27냥의 가치
지금도 서울의 전세값은 비싸지만, 당시에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노상추 공이 51세가 되어서도 전세 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노상추 공은 직동(지금의 경기도 광주시)의 초가집을 팔고,
주동(지금의 충무로 부근) 허윤의 집 사랑채를 27냥에 계약했습니다.
나가라는 집주인을 달래려고 3냥을 더 주었지만,
사기를 맞고 결국 10냥만 돌려받았습니다.
20냥을 떼인 것입니다.
다음은 51세인 1796년 (정조 20) 4월 21일의 일기입니다.
4월 21일(병신) 볕이 남.
수군절도사 조치우趙致雨 령令 및 5, 6인과 함께 인왕산의 필운대弼雲臺에 갔다.
술을 가지고 가서 함께 이야기하고 저녁에 돌아왔다.
허림許霖 생生이 며칠 전에 “사당 안에 있는 사랑에 지금 온돌을 놓았으니
허질許晊 승지와 서로 방을 바꾸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내가 답하기를, “이사가는 것은 괜찮으나, 방을 서로 바꾸는 것은 안 된다.”라고 하니,
허許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도로 무르는 것 이외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본래의 세전貰錢을 내주십시오.”하니,
허許가 말하기를, “돈을 이미 다 써서 10냥 밖에 남지 않았으니, 이 수량을 가지고 가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사람을 대하는 일을 아이들 놀이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니 허許가 사과하였다.
오늘 또 사당 안의 청사를 다른 이에게 팔아서 30냥을 내주었다.
허許라는 사람의 처사는 사류士類의 도리로 꾸짖을 수 없으니, 혀를 차며 한탄할 따름이다.
☞ 출처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796년 4월,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240_0040
27냥의 대궁은 지금 서울 도심지의 원룸 전세값 만큼의 가치가 있었을까요?
이러한 사기 사건을 채널A 천일야사에서 다루기도 하였습니다.
51세의 노상추 공은 천일야사에서 청년으로 등장합니다.
<동영상 1~ 4. 채널A 천일야사 165화 중에서>
첫댓글 혹자는
노상추 공이 사기를 당하여 낙심한 끝에,
시름을 달래려고 야간에 습사를 하다가,
우연히 정조대왕의 눈에 발탁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정조대왕에게 발탁된 시점은
3년 전인 정조 16년(1792년) 11월 2일이고 보면,
야간 습사 발탁은 스토리 텔링일 뿐입니다.
현재의 9급 말단 공무원이 3급 고위 공무원으로 벼락 승진한 셈이니,
노상추 공의 파란만장한 경력만큼이나,
다양한 스토리 텔링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