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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덕이 죽 끓듯 하는 늙은이?
순간적인 의중의 변화가 있었다.
황당한 과장(誇張)에 충격과 실망이 컸기 때문인데, 일어선 김에 파띠마를 아예 떠나려는 생각이 든 것.
문일지십(聞一知十)이라는 말이 있다(論語 公冶長).
하나를 들으면 열 가지를 미루어 안다는 뜻인데, 중요한 하나를 불신하게 되면 일체가 미덥지 않게 된다는
뜻으로 확대해도 되지 않을까.
노르떼 길 빌바오(Bilbao)의 알베르게에서 3박했다.
뽀르뚜 길의 뽄떼베드라(Pontevedra)와 가이아(Vila nova de Gaia)에서는 친구의 집(뽄떼베드라는 친
구의 꺄패 지근에 소재한 알베르게)에서 2박씩 했다.
전자(3박)는 심한 디아레아(diarrea/泄瀉)로 인해 걸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고, 후자(각2박)는 친구들의
지극한 권유를 뿌리치기 난(難)했기 때문일 뿐 그 밖에는 1박 이상 한 적이 없다.
이 곳(Fatima)도 당연히 1박 케이스(case)다.
그럼에도 2박으로 늘렸다.
충분한 휴식 후 떠나라는 오스삐딸레라의 진심어린 권유가 어찌나 진지했던지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다만, 그녀의 3박 권유를 2박으로 조정해서.
한데, 이 어처구니없는 부풀리기가 실망보다 엄청 나쁜 혐오감을 갖게 하였기 때문에 아예 떠나버리려는
충동이 일게 되었을 것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1박과 2박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충분한 휴식은 커녕 정신적인 갈등을 부추길 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 자명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경당을 뛰쳐나왔을 것이다.
당장에 실행하려고.
심하게 구부러진 허리를 펴지 못하고 어렵사리 걸어가는 노(老) 수녀들과 마주쳤다.
거동이 자유롭지 못할 뿐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느껴지는 모습의 고령 수녀들.
온 얼굴을 가득 덮은 왕 주름살마다 반가움을 알리는 잔잔한 미소가 담뿍해 보였다.
1917년 성모 마리아 발현 이후 파띠마에는 호텔 다음으로 많이 들어선 건물이 수도원(수녀원)일 것이다.
특히 고령의 수녀들이 집단으로 이주되었는가.
가장 많이 마주하게 되는 사람이 늙은 수녀들이니까.
비록 찰라였지만, 애오라지 신앙으로 살아온 연륜을 헤아리게 하는 고령의 수녀들을 바라보는 사이에 노
기(怒氣/anger)는 진정되고 평상심을 되찾게 되었는지 길 떠나려는 충동이 사라져가는 듯 했다.
걷던 길도 중지를 준비할 석양이 되었기 때문에 충동을 따를 시기도 놓친 것이다.
"변덕이 죽 끓듯 한다"
거듭 고백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즈음(당시)의 내가 그 꼴이었다.
늙으면 어린애가 된다?
어제 저녁에 가려다가 그만 둔 대형 슈퍼마켓(Pingo Doce Minde)에 가기 위해 경당을 떠났다.
파띠마의 남서쪽이며 행정구역이 다른(지자체Alcanena의 프레게지아 Minde) 위치다.
오스삐딸레라는 왜 대형 슈퍼마켓들이 인근에 있는데도 상거가 꽤 되는 거기까지 가라 했을까.
그 까닭이 궁금해서 강행했다 할까.
설마, 친절하고 헌신적인 오스삐딸레라가 이 늙은이를 많이 걷게 하려거나 골탕을 먹이려 함이었겠는가.
상당히 멀고 외진 곳인데도 넓은 주차장을 드나드는 많은 차량이 그 이유를 증언하는 것 아닐까.
뽀르뚜 길을 걷는 중에 들른 슈퍼마켓 중에서는 드물게 없는 것이 없는 초대형이다.
알베르게에 널직한 식당은 있으나 주방 시설이 없기 때문에 완제품만 사야 하는데 원하는 것을 빠짐 없이
구입했을 만큼 고루 갖춘 슈퍼마켓.
통닭과 보까디요(bocadillo/스페인 샌드위치)를 비롯해 흰 쌀밥까지 고루 샀다.
묵직하도록 잔뜩 구입했는데도 10€가 넘지 않는 저렴한 값이 오스삐딸레라의 마음을 읽게 했다.
이베리아반도에서 확인된 것은 외곽지대에 자리한 대형 마켓은 걸음품 값을 충분히 보상한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저렴하니까.
또한 다음날 새벽같이 떠날 사람의 음식으로는 너무 많은 것이 무얼 의미하는가.
하루 더 묵으려 하는 것 아닌가.
당장에 떠나려 했던 마음이 하루 더 머무는 쪽으로 기울어진 까닭은 또 무엇인가.
단지 죽 끓듯 하는 변덕 때문만은 아니지 않은가.
도보 순례자에 한해서 3박을 허용하고 있는 규정의 이 알베르게(Santuário de Fátima Acolhimento S.
Bento Labre)
오스삐딸레라는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에서 여기(Fatima)까지 걸어온 늙은이의 누적된 피로에 하루의
휴식은 안하느니만 못하리라 생각하고 3박을 권했을 것이다.
그녀야말로 현명했다.
77세(2011년)의 체력과 4년 후인 81세(2015년)의 그것(체력)이 판이하게 다름을 그녀(hospitalera)도 아
는데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다니.
"늙으면 애가 된다"고 한다.
생각과 행동거지가 유사함을 뜻하지만 늙은이(老年)와 어린이(少年)는 공히 사람의 일생에서 급격하게 변
해가는 시기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한 시점을 기준으로 어린이는 왕성하게 성장하고 발전해 가는 시기라면 늙은이에게는 각각으로 퇴화하고
쇠락해 가는 때라는 것이다.
서로 정 반대의 결과를 향해 질주하는 과정이라 할까.
{흙에서 나온 것처럼 흙으로 돌아가는 사람(구약성서 창세기3: 19, 전도서3: 20).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덧 돌아갈 차례가 돼가는 것 같다.
신체가 자유롭지 못한 유소년기를 보낸 한(恨) 때문이었는가.
이를 극복하게 된 후로는 오로지 걷는 것 만이 삶의 목적인 듯 걷고 또 걷는 동안에 1c의 90%가 가버렸다.
현재의 집으로 들어올 때인 1969년에 "관(棺)으로 나간다"고 다짐을 두었다.
당시에는 장수인 80 수(壽)를 예상하고 한 다짐이었건만 예상치를 10년이나 더 넘겼다.
일생이 살 같이 빠르고, 나이가 들수록 더욱 빠르게 느껴지는 것이 세월이라고 말한다.
10대의 시속은 10km, 30대는 30km의 저속인가 하면 60대는 60km, 90대는 고속도로의 속도인 90km의
빠른 속도를 느끼게 된다는데 이미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느낌이다.
이 느낌을 완화하기 위하여 코로나19에 묶여있을 때도 서울둘레길(157km)을 매월 1주, 년 12회의 완주를
했으며 매일 25.000보~30.000보를 걸었건만 휠체어(wheelchair) 없이는 거동할 수 없는 지금이다.}
내로남불의 프랑세사 외에는 아무도 시비하지 않을 텐데.
돌아온 숙소(Santuário de Fátima Acolhimento S. Bento Labre)의 사정이 달라졌다.
나이 든 오스삐딸레라는 젊은 남자(hospitalero)로 교체되었다.(24시간 근무제?)
젊은 오스삐딸레로는 나이 든 여인과 달리 나와 함께 묵을 동숙자를 이미 배정했다.
리스보아에서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로 가는 중에 들렀다는 알레만의 젊은 부부 중 남편이다.
빈 방이 여러개나 있으므로 젊은 부부에게 한 방을 주는 융통성(아량?)을 발휘할 수는 없는가.
남녀 숙소를 구분하고 있는 룰(Rule) 때문이기는 해도, 홀로 들어있는 여인 숙소를 이 한밤에 한해서 부부
숙소로 전환하는 재량 말이다.
그랬다고(재량을 발휘하였다고) 시비할 뻬레그리노스라면, 내 까미노 체험으로 보면 프랑세사(Francesa/
프랑스여인)가 유일한데 이 밤의 이 곳에는 그들이 없지 않은가.
까미노에서는 지구촌민이 인종과 종교, 이데올로기(Ideologie) 문제를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만난다.
그럼에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은 프랑세사다.
내가 까미노에서 만난 세계 각국인들 중에서 '내로남불'식 독선과 이기적인 사람은 프랑세사 뿐이니까.
자기네는 온갖 부도덕하고 공동생활의 예의에 반하는 짓들을 서슴없이 자행하면서도 남이 하는 아주 작은
허물도 너그러이 양해하지 않고 시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경계 대상이지만.
융통성 없는 젊은 오스삐딸레로가 마뜩치 않기는 해도 이미 1박 연장을 허락받은 상태라 나와는 무관했다.
다만, 사려 깊은 오스삐딸레라였다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내게는 동숙자를 배정하지 않아도 되고 그들(알레만) 부부에게는 큰 아량을 베푸는, 일석 이조되는 선행을
하지 않았을까.
한데, 평일(월요일)의 밤인데도 순례자숙소 이용자가 이 부부와 나 뿐일 만큼 한가로운 것은 2만명 안팎의
탐방자들이 모두 당일치기였거나 호사스러운 호텔을 선호하기 때문인가 원천적으로 적은 까닭인가.
체류자가 연간 600만명의 10%라 해도 모든 숙박소가 하루도 빠짐 없이 차고 넘쳐나야 할 것이건만.
나로 하여금 각각으로 달라지는 변덕을 잠재우고 3박까지 하게 한 이유는 피로의 충분한 회복에 있지 않고
한 밤 보다 두 밤이, 두 밤 보다는 세 밤이 진실 파악에 더 가까워진다는 생각이었다.
나를 안타깝게 하고 떠난 이색적인 알레만
부부가 이산 가족이 된 알레만 청년과 동숙하게 됨을 알았을 때 이미 짐작하고 각오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임을.
예상대로 청년은 불만 부터 토로했다.
파띠마가 주는 이미지에 실망이 큰 듯 경유하지 않고 직행하였느니만 못하다며.
나를 화나게 한 것은 터무니없는 과장 홍보지만 버스편으로 파띠마에 도착한 후 알베르게에 직행하였다는
그들에게 불만을 안겨준 것은 무엇일까.
버스를 타고 왔기 때문에 어차피 1박 이상은 안되지만 새벽같이 떠나겠다는 그.
알레만(alemán/독일인) 답게 묻기 시작했고 지참한 두툼한 노트에 빠짐 없이 적는 듯 했다.
내게는 어차피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 아닌가.
차라리 잘 되었다 싶은 시간(문답)이므로 성의를 다했다
까미노에서 나는 알레만에게는 늘 채무자(빚쟁이)가 된 느낌이니까.
리스보아 ~ 뽀르뚜의 내륙길 안내는 끝났지만 해안과 내륙의 두 루트 중 택일해야 하는 뽀르뚜 ~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 길이 남았는데도 끝없이(without end) 계속되는 질문에 자정이 훌쩍 넘었다.
졸리는 표정이 역력하며 감기기 직전의 실눈이 되면서도 이야기(묻기)를 계속하는 그가 딱해 보였다.
안쓰러운 생각에 양 루트 중 택일에 도움이 될 책자를 건네주는 것으로 문답을 대신하자는 내 제의에 그는
환호하면서도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자기 베드(bed)로 갔다.
자리에 누우면서도 "고맙습니다"(Danke Schön)를 연발했는데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버린 그.
나를 위해서라면 길어질수록 좋은 심야의 대화지만 그를 위해서는 그래야 했다.
그가 곤히 잠든 시간에도 나는 자리에 눕지 못하고 서성거리고 있지 않은가.
낮 동안은 대부분의 경우 식사(점심/빵 기타간이식)도 걸으면서 할 정도로, 식사시간까지 걷기에 투입하며
온종일 걸으므로 고통을 느낄 겨를마저도 없지만 밤에는 신새벽까지 이 꼴이니까.
{90살인 지금(2024년)도 81살이었던 당시(2015년)와 다를 것이 없다.
걷기는 커녕 홀로는 일어서기조차 거북한 이즈음.
걷기를 대신해 종일 마당 가꾸기에 골몰하는 낮과 달리 밤의 시간들은 여전히 잔혹한 형벌에 다름 아니다.
당시에는 극복할 수 있는 체력이 남아있었지만 그것마져 고갈된 지금은 더욱 처참하다}
한 지붕 아래에서 아산 부부가 된 젊은 아내는 남편이 동양 늙은이를 붙들고 이야기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
일찍 잠들었던가.
공언한 대로 새벽에 와서 곤히 잠든 남편을 깨웠다.
비몽사몽, 허둥대는 남편의 짐을 챙기는 아내는 수면량의 절대 부족 때문인 남편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또한, 마치 원한의 땅인 것처럼 새벽 버스가 없으면 택시를 이용하겠다며 알베르게를 나서는 젊은 부부.
그들은 내가 까미노에서 겪으며 이해하게 된 독일인들과 왜 다를까.
까미노의 알베르게에서 자기가 차지한 좋은 베드(bed/2층벙크의하층)를 내게 선뜻 양보한 자발적 호의의
서양 젊은이들 중 대부분이 알레만이었다.
간밤에도 그 호의에의 보답이라는 생각에 나는 성의를 다했으며 그래서 그의 잠 부족이 나 때문이라 생각
되어 미안한 마음이기도 했지만 내 기억 속의 알레만은 큰 머리의 소유자다(냉철하고 이성적이다)
파띠마에 대한 불쾌한 감정이라면 원인의 규명부터 하려 할 텐데 이 부부는 달아나려고만 했으니까.
나의 새벽 만유를 중단시킨 꼬헤이우(Correio)와 대학관계인 순례증서의 파장
아무튼 그들은 본의 여부에 관계 없이 내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떠났다.
겨우겨우 불려와서 막 들려 하는 새벽잠마저 달아나게 북새를 떨고.
이미 떠나버린 잠을 다시 불러올 수 있는가.
차라리 걷자.
알레만 부부의 선물일 수 있다고 생각해 보며 파띠마의 다운타운으로 나갔다.
대부분의 가로등을 비롯해 비약중인 도시를 지켜주고 있는 모든 질서가 아직 휴무, 휴식 중이라 그랬을까.
먼동이 터오기 전, 새벽의 어스름 속에 거무스레하게 드러나고 있는 도시의 실루엣(silhouette)이 순간적
이나마 소름을 느끼게 했다.
설마 이런 꼴을 겪게 하려 함이겠는가.
자기네는 불운한 방문자가 되었지만 3박이나 하는 나에게는 파띠마 체류의 유 무익의 판을 가르는 중요한
날이며 소중한 시간들임을 새벽의 산책을 통해서 깨닫게 하려 함이라면 수긍할 수 있다.
지나간 어제나 오지 않은 내일은 아무 소용이 없고 해결의 키(key)는 당장인 오늘에 있으니까.
동서남북 방위의 개념 없이 발 가는대로 내버려 두었다.
목적지가 없는 만유(漫遊)의 걸음이 돌연 빨라졌으며 무질서하게 대형 로터리를 마구 건넜다.
어렴풋이 보이는 한 간판을 본 직후였다.
까미노의 아무 곳에서나 내 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는 디자인의 간판이다.
날로 더 무겁게 느껴지며, 실제로 무거워지고 있는(무거워질 수 밖에 없는) 내 백팩의 무게를 줄여주는 곳,,
꼬헤이우(Correio/우체국/스페인語:oficina de correos 오피시나 데 꼬래오스)다.
그(우체국) 앞에서는 탁송할 것이 없나 생각해 보느라 잠시 멈추는 것이 까미노에서 길들여진 내 습관인데 이
새벽의 우체국은 만유를 중단하고 즉시 숙소로 백(back)하게 했다.
나는 일반 순례자여권(Credencial del Peregrino) 외에도 대학관계인 순례자여권(Credencial Jacobea
Universitaria)도 소지하고 있다.
프랑스길의 초반인 빰쁠로나(Pamplona/Navarra) 소재 나바라대학교 동문회(Alumni Universidad de
Navarra)에 있는 대학관계인 순례자협회 본부를 방문해 받은 문서다.
순례증서는 각 까미노에서 100km 이상(최소 100km)의 계속 보행이 순례자여권의 세요(sellos/stamps)
를 통해서 확인되는 모든 사람(peregrinos/종교와 관계 없이)에게 교부하는 문서다.
이와 달리 대학관계인(전 현직을 망라,교수와 학생 직원 등)이 까미노상의 대학들을 방문하여 받은 세요가
확인되면(대학관계인 순례자여권에서) 보행 거리와 무관하게 받는 문서가 대학관계인 순례증서다.
한데, 세요 받는 일을 성실하게 이행하겠다는 이 약속의 이행에는 적지 않은 애로가 있다.
대학의 문전까지 찾아가기는 어렵지 않으나 주말 연휴 또는 국경일, 지역이나 그 대학의 각종 축일과 임시
휴일 등으로 휴업 휴무의 날에는 스탬프는 커녕 대학의 방문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날들로 인한 일정의 차질 때문에 낭패당하지 않으려면 세밀한 조사를 세심하게 반영한 스케줄(sch
edule)을 작성하고 철저하게 실행해야 한다.
한 번의 차질이 도미노 현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얼핏 생각하기 보다 엄청 어려운 이 방문들이 단지 세요 하나 받기 위함이라면 참으로 크게 밑지는 장사다.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달리 얻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대학 행정을 맡아 운영한 경력의 탓인가.
대학의 설립 목적과 표방하는 주요 과제 등 연혁(沿革/歷史)과 교세(校勢/중요 학과, 교수와 학생의 수와
비례 관계 등), 도서관, 입시 제도와 장학 제도 등에 대해 묻는 것이 기본이다.
한국인 방문자들은 대개 세요 하나 받고 돌아가는데 세뇨르(señor/어르신:스페인어,senhor!/뽀르뚜갈어)
는 왜 다르냐고 되물어 오기 일쑤일 정도로 나는 파고들었다.
연구와 교수, 봉사 등 대학의 사명이 얼마나 이행되고 있는지 함께 리뷰할(review) 때는 뿌듯했으니까.
대화가 순조롭게 발전하면 그 대학교 전체의 예산을 건드리기도 한다.
사립대학교의 경우는 자금원인 재단의 전출금을 비롯하여 각종 기부금 등 수입금을 총체적으로 살펴보며
학생의 등록금(연간 총액)과 그 등록금이 대학의 편성 예산(연간)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산출해 본다.
인건비를 비롯해 경직성 경비에 해당하는 금액과 연구비, 장학금, 도서관 운영비(신간 및 연구도서의 구입
등) 등의 대비관계 까지 두루 티치(touch)하다 보면 꽤 많은 시간을 뺏기도 한다.
{한국인 뻬레그리노스 중에는 상당수가 이 대학 방문 프로그램도 병행하고 있단다.
유감스러운 것은 대학의 스탬프 받는 일에만 올인하고 있다는 점인데, 그 이유가 황당하다.
대학관계인순례자협회는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의 순례자사무소가 까미노 순례증서를 발부하는 것 처럼
대학 방문 스탬프를 확인한 후 완주증서를 본인(완주자)에게 발송한다.
한데, 어이없게도 그 증서가 한국에는 '학위증서' 로 소개됨으로서 파장이 이반저만 아닌 것 같다.
대학 학위에 심히 목마른 한국인들로 하여금 꿩 먹고 알도 먹는 까미노 열풍(Let's go go go to Camino)
을 타게 한 것이다.
방문하는 대학들에서 내가 앞에서 언급한 관심사들을 충족한다면 인문학 분야에서는 대학 학위 획득자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인정)하는 기관이 유럽에는 더러 있는 정도인데}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