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까락스는 1961년 11월 21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유럽 주둔 직업군인인 미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를 두고 있다. 어린 시절의 까락스-그의 본명은 알렉스 뒤퐁-는 평범한 장난꾸러기 골목대장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12살이 된 소년 뒤퐁은 파리의 시네마데끄에서 로베르 브레송의 1945년 작품인 흑백영화 『볼로뉴 숲의 귀부인』을 보았다. 당시 이 영화는 플롯의 변화가 적고 차가운 추상적 이미지로 가득한 이 영화는 당대 관객들로부터는 외면 당했지만 이 어린 천재에게는 영감을 불어넣어 영화감독이 될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이 영화를 본 후 대화를 중단한 채 복화술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는 이름을 알렉스 뒤퐁에서 레오 까락스로 바꾸고 침묵과 사색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12살 이 경험 이후는 시네마데끄 프랑세즈를 찾는 영화매니아가 되었고 그는 그리피스, 장 비고, 그리고 장 엡스타인의 무성영화에 빠져들었다. 이때 그에게 깊은 영향을 준 감독으로 로베르 브레송과 장 꼭도, 오즈 야스지로, 안드레이 타르곱스키를 꼽고 있다.
그러다가 16살에는 학교도 그만두고 17살에는 『사랑 받는 소녀』란 단편영화를 찍고, 18살에는 로베르 브레송에 대한 장편의 논문을 발표, 영화평론가로 데뷔한다. 여기서 모은 원고료로 그의 두 번째 단편영화『교수형 블루스』를 완성시켰다. 그의 나이 19살 때 이 영화는 이에르 단편영화제에서 1981년 그랑프리를 받았고, 아비렌에 의해 포름 디스트리뷔시옹 영화사로부터 장편영화를 찍을 기회를 잡았다. 다시 학교에 마음을 두어 대학 입학 시험 바까로레아에 통과하여 파리 3대학 영화과에 진학하여 공부를 계속한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한편으로 졸업논문 쓰랴, 시험준비하랴, 다른 한편으로는 틈틈이 밤에만 촬영을 나가 장편 극영화 데뷔작『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완성하여 깐느 영화제에 출품하였다.
그러나 무명의 신인감독에게 신경을 쓸 만큼 자상하지 못했던 깐느영화제 집행부는 그의 영화를 새벽 3시 30분에 상영하도록 프로그램을 짜버렸다.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는 신인 프랑스 감독의 흑백영화를 보기 위해 기다릴 수 있는 인내심을 지닌 영화광은 정말 극소수일 것이다. 깐느 영화제는 80년대 영화의 천재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러나 「까이에 뒤 시네마」와 「포지티프」의 영화기자들은 행운을 잡을 수 있었고, 그들은 흥분에 찬 어조로 '제 2의 고다르 등장! 깐느는 또다시 후회한다.'라는 타이틀의 기사를 실었다. 영화평론가들의 의혹스러운 표정과 함께 파리 개봉날짜인 11월 21일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소문은 점차로 증폭되어졌다. 아무도 레오 까락스를 만날 수가 없었다. 일체의 인터뷰도 거절하였고, 더구나 사진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거만하게도 세계 최고의 영화잡지「까이에 뒤 시네마」의 인터뷰 제의도 거절하였고, 그 뿐만 아니라 세계적 권위를 지닌 「르몽드」와 「리베라시옹」의 제안도 역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기자들은 그의 이름을 찾아 백방으로 수소문을 냈지만, 아무도 그의 정체를 확인하지 못했다. 그리고 드디어 소문의 『소년, 소녀를 만나다』가 개봉되었다. 소문은 단 하루만에 신화가 되었고, 레오 까락스라는 이름은 프랑스 영화의 영웅이 되었다.
까락스가 결정적으로 프랑스 영화계를 뒤흔든 것은 1986년 『나쁜 피』의 개봉 이후 였다. 촬영이 진행될 때부터 천재의 걸작이 탄생하고 있다는 풍문이 흘러 나왔지만 그 누구도 영화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단 한 분의 시나리오도 외부에 배포되지 않았으며 촬영은 '관계자외 출입금지'의 팻말을 걸고 밀폐된 스튜디오 안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까락스는 매스컴의 쇄도하는 인터뷰 요청을 거부하였다. 『나쁜 피』가 개봉되자 사람들은 흥분하였다. 누구도 새로운 오손 웰즈가 탄생했다고 평했으며, 다른 누구는 까락스를 고다르에 비견되는 천재라고 말했다.
1991년 『퐁네프의 연인들』 5년간의 사투 끝에 완성한 작품이다. "『퐁네프의 연인들』은 빛을 볼 것이다." 주인공 줄리엣트 비노쉬의 말이다. 정말로 이 영화는 빛을 보았고 세계 영화계는 모두 까락스의 신화에 찬사를 보낸다.
돌연히 까락스가 다시는 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하였다. 까락스 스스로가 "물론 확고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 나는 영화를 만들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언제까지일지 나도 모른다.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떠오를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드니 라방이 입었던 팔꿈치가 헤진 옷을 입고 한국에 다니러 온 레오스 까락스감독은 그의 필름처럼 '자유주의자'의 모습이었다. 빅터 한트게처럼 꿈을 팔아 실업을 면해보겠다는 대답이 자못 진지한 까락스감독은 , 대학로와 압구정동, 종로와 생애2번째 가본 나이트클럽, 항구도시 부산 등을 돌아보고 예정을 늦춰 파리행 비행기에 올랐다. 사진 찍기를 싫어하고 낯선 사람과의 대화에 두려움을 느낀다는 특이한 성격, 하루에 두갑 이상의 담배를 피우며 이젠 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선언한 레오스 까락스 감독을 영화평론가 유지나 씨가 만난다.
유지나(이하 유) : 공동 기자회견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당신에 대한 이야기들-예를 들어 16세에 학교를 그만 뒀다던가 어떤 기자에게 당신이 천재이기 때문에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는 식의 이야기들-은 선정적인 영화 저널리즘이 만들어낸 근거 없는 소문이라고 느꼈다. 다소 악의적이면서도 당신을 신화화하는 이런 소문이 왜 나돈다고 생각하는가?
레오스 까락스(이하 까) : 인터뷰를 좋아하지 않는 건 사실이다. 프랑스에선 TV에 출연한 적도 없다. 프랑스 영화계와 영화기자들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어울린 적이 없다.
그러나 파리와 떨어진 외국, 서울과 같은 곳에선 오히려 편하게 인터뷰를 할 수 있고, 『나쁜 피』처럼 10년이 된 영화에 대해서는 그 시간적 거리 때문에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또 한국에서 『퐁네프의 연인들』이 흥행에서 성공했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이 생겨서 오게 되었다.
유 : 우선 당신 이름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본명은 알렉스 뒤퐁(Alex Dupont)인데, 레오스 까락스라는 성까지 다른 이름이 돼 필요했는지, 그리고 알렉스 오스카(Alex Oscar)의 철자를 뒤집은 것이라는 말도 있다.
까 : 레오스 까락스란 이름을 지은 건 13세때다. 앞으로 영화를 할 것이란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알렉스 뒤퐁이란 이름을 뒤집은 것이란 말은 나도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해도 되지만 사실은 아니다. 왜 그런 이름을 지었는지는 나 자신의 비밀이어서 말한 적도 없고 앞으로 밝히고 싶지 않다. 기자나 관객도 상상할 권리가 있지 않을까?
유 : 당신의 13세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새 이름으로 바꾸고 외부세계와 대화를 끊고 침묵의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 모두 13세 무렵이 아닌가. 당신의 13세는 분명 흥미로운 구석이 있는데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기억할 수 있는가?
까 : 그건 매우 개인적인 일들이다. 내겐 일종의 사춘기였다. 왜 외부세계와 대화를 중지했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고, 지금도 그 대답을 찾고 있는 중이다. 당시 나는 부모, 누이들과 살았다. 아버지는 남프랑스에서 농장을 하기 때문에 떨어져 살았고 나는 어머니와 파리근교에서 살았다. 어머니는 기자였다. 10세때 나는 매우 외향적인 성격이었고 마치 불량배처럼 거들먹대기도 했다. 그때 처음으로 비르지니란 소녀에게 사랑을 느꼈다. 그리곤 13세 무렵부터 매우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그보다 어렸을 땐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같은 책들을 즐겨 읽었다. 시 같은 건 아직 읽지 않았다.
유 : 16세때 고등학교를 나온 후 영화를 만들기 전까지 어떻게 지냈나? 대학 같은 공식적인 교육기관에서 공부를 계속할 생각은 전혀 없었나?
까 : 고등학교 졸업후 막연히 전쟁이나 외국에 취재 다니는 모험적인 대기자가 되고픈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대학 역사학과에 등록했지만 첫해 강의를 들으며 계속 할 수 없다고 느꼈다. 그건 16세짜리 꼬마가 IBM같은 거대한 기업에서 일하는 것처럼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짓이었다.
유 : 영화를 만들기 전-물론 단편영화를 제외하고-「까이에 뒤 시네마」에 영화 평을 기고하기도 했는데 어떤 영화들에 대한 것이었나?
까 : 19세때 한 일년간 부정기적으로 「까이에 뒤 시네마」에 글을 썼는데, 중요한 것들이 못된다. 고등학교를 나온 후 영화에 관심이 있었는데, 대학에서 무료 영화시사회가 있다고 해서 갔다. 고다르 영화를 본후 「까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인 세르주 다네가 학생들과 토론을 했는데, 나 혼자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까 세르주가 글을 써보라고 했다. 당시 세르주 다네나 뚜비아나는 젊었고 매우 친절했는데, 요즘은 변한 것 같다. 아마 너무 중요한 인물이 돼서 그런가 보다. 어쨌든 난 영화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저 내가 본 영화들에 대한 것들을 썼다. 실베스타 스텔론(『록키』전에)감독한 첫 영화나 스위스에서 작업하던 고다르에 대한 글, 폴란드 영화에 대한 글 등 10편을 썼는데 글재주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만 뒀다.
유 : 처음에 당신은 프랑스 영화계와 영화인들을 좋아하지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다고 했는데, 영화는 촬영이나 조명등 기술인력에서부터 다른 영화인과의 공동작업이 필요하다. 어떻게 스탭진을 만들어 나갔는가?
까 : 내 영화촬영을 계속 해온 장 이브 에스꼬삐에, 내 영화 속의 배우들, 그리고 감독으로는 고다르와 필립 카렐을 제외하곤 누구와도 만나거나 이야기조차 나눈 적이 전혀 없다.
유 : 고다르와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
까 : 고다르가 『나쁜 피』를 본후 나를 만나고 싶어했다. 당시 나는 『나쁜 피』의 인도상영을 위해 뉴델리에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고다르에게 편지를 썼다. 고다르는 내게 전화해서 만나자고 했고 후에 파리에서 만나자 『리어왕』의 에드워드 역을 제안했다. 난 영화를 만들고 나면 그 영화에 대한 심한 혐오감에 시달리기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연기를 하면 그런 상태에서 벗어날 것 같아 고다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고다르는 스위스에서 텐트를 치고 스탭과 연기자 모두 거기에 살면서 촬영했는데, 영화작업 전체가 마치 어린이들의 놀이처럼 자연스럽고 즐겁게 이루어졌다. 『리어왕』이후 그와 만난 적은 거의 없고 각자 영화가 완성된 후 그 영화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는 정도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유 : 고다르와 콕도는 당신에게 영감을 준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까 : 물론 고다르의 누벨 바그 초기작들을 좋아한다. 그리고 안나 까리나와 같이 작업한 시대도 좋아한다. 콕도는 한 10년 전에 좋아했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어떤 것에 대한 사랑은 어느 시기 정지되었다가 다시 시작되기도 하는 것이며 나 역시 마찬가지다.
유 : 17세때 『데자뷔 Deja Vu』란 시나리오를 쓰고 곧이어 『꿈속의 소녀 La Fille Revee』(『사랑하는 소녀』라고 소개된 것은 잘못이다)란 단편영화를 찍었는데, 당신이 영화를 하게 된 계기, 그러니까 플로랑스란 짝사랑하는 소녀 때문에 그녀를 위해 그녀와 함께 찍은 영화일텐데, 어떤 이야기인가?
까 : 시나리오는 돈이 필요해서 쓴 것이고, 『꿈속의 소녀』는 찍기만 하고 편집을 하지 않아서 보여준 적이 없다. 지금도 앞으로도 편집해서 완성할 생각은 없다(그는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그후 『교수형 블루스 Strangulation Blues』라는 단편영화를 만들어서 영화제에 출품했고 상도 받았다. 그 덕에 『소년, 소녀를 만나다』의 제작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유 : 『교수형 블루스』는 어떤 영화인가? 흔히 단편영화 제작이 그렇듯이 당신이 연출, 카메라, 편집은 일인 다역을 한 것인가?
까 : 35mm흑백영화로 15분에서 20분 사이 정도 분량의 영화인데, 좀 바보 같은 이야기다. 한 소년이 한 밤에 사랑하는 소녀의 목을 졸랐다고 생각하면서 왜 그녀를 그렇게 했는지 고통스러워하는 이야기다. 편집과 카메라 등 다른 스탭이 있었는데, 형편없었고 연극배우가 연기를 했지만 전체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 : 그리곤 『소년,...』역시 흑백필름으로 찍었는데, 굳이 흑백영화를 선택한 것은 제작비 때문인가, 아니면 초기영화인 흑백영화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반영한 것인가?
까 : 제작비 때문은 아니다. 당시 난 초기 영화인 무성영화를 사랑했고, 특별히 흑백영화를 사랑한 건 아니다. 『소년,...』역시 내겐 초기 영화이다. 또 당시 나는 색채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잘 해낼 자신이 없었다. 반면 흑백으로 실수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흑백필름을 선택했다. 아마 나는 영화의 탄생과 내 영화의 탄생을 혼동해서 생각했던 것 같다.
유 : 『소년,...』의 시나리오는 당신의 개인적 삶의 초상인 것 같은데...
까 : 물론 그런 요소가 있다. 『데자뷔』의 일부를 다시 취하기도 했고 내 자신의 이야기, 그리고 사람들을 관찰하고 생각한 것을 일기에 적은 것등, 내 영화들이 전부 그렇듯 이 무든 요소를 섞어 재구성한 것이다. 내 젊은 날의 자서전적 이야기지만 주인공이 나 자신은 아니다. 드니 라방이 맡은 알렉스란 인물과 미레유 빼리에란 여자-당시 내가 사랑에 빠져 같이 살았던-에 대한 것으로, 내 영화는 늘 그런 식이다. 따라서 내 자신의 내면적 삶이 반영된 것은 사실이다.
유 : 그래서인지 당신의 영화는 본질적으로 같은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늘 빗나간 사랑이야기가 중심이 되는데, 한 남자가 여자를 정열적으로 사랑하는데, 그 여자는 다른 남자를 사랑하면서 생기는 갈등에 초점이 맞춰진다. 물론『소년,...』은 그 양상이 다소 다르게 펼쳐지긴 한다.
까 : 세편 모두 같은 종류의 사랑이야기지만 그 사이에는 도약이 있고, 그 도약은 소년이 소녀에게 다가가는 감정이다. 난 그런 도약을 즐긴다. 사람들은 삶이 변하기를 원하고, 나 역시 내 삶이 변하기를 원하지만 그게 여의치 않으니까 영화 역시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것 같다. 어쨌든 지금 나는 영화를 만들 생각이 없기 때문에 다른 영화에 대해 말하기는 힘들다. 영원히 영화를 안 만들겠다는 뜻은 아니다. 앞날의 삶에 대해 확실히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유 : 당신의 주인공은 고아나 걸인처럼 버려진 자, 소외된 자로 설정되는데, 그건 당신의 정신적인 상태가 그렇다고 느끼기 때문인가?
까 : 물론 내 영화 속 인물들이 낯선 인물인 건 사실이다. 『퐁네프의 연인들』의 경우 한 남자와 여자의 사랑을 적나라하게 그리기 위해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인물 설정이 필요했다. 팩스, 자동응답기, TV, 아파트 같은 것을 소유하지 않은 채 공기와 물만을 가진 도시 속의 걸인의 사랑은 훨씬 볼만한 것이다. 게다가 빈곤함은 리얼리티이다. 걸인들은 도처에 존재하며 당신이나 나 우리 모두 각자(정신적 차원에서)빈곤함을 경험하고 있다. 의사나 변호사 같은 인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내겐 불가능하다. 그러나 걸인은 좀 더 나 자신과 동일화할 수 있는 불쌍한 점과 쇠진함 같은 것들을 갖고 있다.
유 : 『퐁네프의 연인들』의 첫 시퀀스에 등장하는 파리거지들의 삶은 다큐멘터리 적인 연출로 묘사되고 있다. 굳이 이런 방식을 선택한 이유라면?
까 : 촬영감독 장 이브 에스꼬삐에, 드니 라방, 줄리에뜨 비노쉬와 함께 파리 걸인들의 삶을 관찰하기 위해 일년간 돌아다녔다. 때로 그들과 같이 거리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매우 힘들었지만 걸인의 시각에서 표현하고 싶었다. 일년간의 관찰후 일주일간 촬영했는데, 16mm로 찍어 35mm로 확대했다. 걸인들이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찍어야 했기 때문에 다큐멘터리 적인 방법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맨 정신으로 얘기했다가 다음날이면 완전히 취한 상태가 되는 그들에게 촬영협조란 불가능했고, 난 그들 사이에 카메라를 둔 채로-카메라를 숨기지 않고-찍었는데, 어떤 이미지들은 훔친 것이다.
유 : 지난 번『나쁜 피』에 대해 말했을 때, 너무 모든 면-카메라 색채, 조명 등-에서 통제한 영화라서 마음에 안 든다고 했는데, 전반작업이나 촬영 중에는 그런 생각이 없었는지?
까 : 『나쁜 피』는 비교적 쉽게 촬영했다. 3주간의 준비작업을 통해 나는 색채, 조명, 카메라 배우의 움직임등 모든 것을 계산해서 이미지들을 구성했고 3일간의 촬영으로 끝냈다. 그리고 나를 위시해서 배우들-특히 줄리에뜨 비노쉬-도 이 영화와 사랑에 빠졌고 아마 그게 잘못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 약간 야릇한 영화가 만들어졌고 10년이 지난 지금 내겐 혐오감이 들 정도의 답답한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다음 작품을 다르게 만들고 싶었다.
유 : 그렇다면 그후 만든『퐁네프...』에선 장면들의 구성을 통제하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했다는 뜻인가?
까 : 어느 정도 그렇지만 즉흥적으로 연출했다는 뜻은 아니다. 『나쁜 피』는 폐쇄된 스튜디오에서 완전히 촬영되었고, 모든 것-심지어 성냥개비 색깔이나 재떨이도-이 흑백바탕 속에 명확한 색채로 연출되었지만, 『퐁네프...』에선 처음으로 파리란 도시 자체, 다리주변, 뤽상부르공원등-을 색채로 찍었고 카메라 기법도 훨씬 단순했다. 어느 순간 몽타주가 있고 또 자연스레 카메라 이동도 있고 하는 식으로...
유 : 당신 영화의 음악은 이미 존재하는 것들이지만 사용방식에 있어서 독특한 효과를 낸다. 『나쁜 피』에서 데이빗 보위의 《모던 러브》가, 『퐁네프...』에선 코디아의 첼로연주가 이미지들을 이끌고 나가 몽타쥬시키는 정도에 이르고 있다. 어떻게 음악을 선택하는가?
까 : 처음에는 기성음악가를 만나 같이 할 생각도 했지만 마음에 드는 사람을 못 만났다. 그래서 오리지널 영화음악을 사용한 적은 없고 늘 이미 존재하는 음악을 사용한다. 이미지를 구성하다가 음악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음악을 듣다가 이미지를 떠올리기도 한다. 『퐁네프...』는 코다이의 첼로연주를 듣다가 떠오른 이미지로, 그의 연주리듬 같은 영화를 찍고 싶었다. 첼로는 어느 순간 높은 음에서 매우 강하면서도 유연하게 흐르는 음색을 갖고 있다. 『나쁜 피』는 촬영 중에 음악을 생각해냈다. 데이빗 보위는 내가 미국에 갔을 때(11∼12세)아주 유명했던 음악가이기 때문에 그의 판을 사서 알게 되었다. 또 12살경 나는 마릴린 몬로에게 빠져있던 시기기도 하다.
유 : 몬로이야기가 흥미롭다. 그녀의 사진이나 영화를 보고 반했다는 이야기일텐데, 그후 당신이 영화 속에서 남자가 영자를 사랑하는 방식에도 같은 구석이 있는 듯하다. 첫눈에 보고 반하는 사랑, 즉 그 사람을 잘 모르면서 그 이미지만을 보고 달려드는 이런 사랑에는 물신주의적인 면이 엿보인다.
까 : 몬로가 나오는 영화는 다 봤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그런 일은 정상적으로 벌어지는 신비스런 일이며 일종의 열병 같은 것이다. 여자의 이미지를 보고 사랑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어릴 적부터 사랑은 그런 식으로 시작됐다. 지금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 영화 속에서 한 여배우의 이미지를 10초간보고 완전히 사랑에 빠진 적이 있는데, 베를린에서였다. 스위스 여배우였는데 스크린에서 그녀의 이미지를 본 순간 매우 강한 감정을 느꼈고 그녀를 일년간 찾아다녔던 적도 있다.
유 : 『나쁜 피』에서 비노쉬의 클로즈업 쇼트들에서도 당신의 그런 강한 감정이 관객에게까지도 전달되는 듯하다. 고다르가 찍은 안나 까리나의 클로즈업 쇼트를 상기시키는 면도 있다.
까 : 당시 비노쉬는 프랑스영화계에 약간 알려진 존재였다. 그러나 그녀는 여성으로서 역할을 맡지 못했고 자신이 여성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난 그녀에게서 매우 여성적인 이미지를 발견해서 구성해냈고 그게 바로 안나이다. 『나쁜 피』에서 비노쉬는 자신이 여성적이며 아름답다는 것을 느꼈고 나는 그런 그녀의 이미지를 즐겼고 그녀도 그랬다. 실제로 영화사에는 감독이 아름다운 여성을 클로즈업 업 쇼트로 담아내는 커다란 전통이 있다. 고다르의 안나 까리나 이전에 가르보나 디트리히도 남성인 감독이 여성의 클로즈업 쇼트를 구성하는 걸 즐겼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유 : 그럼 당신이 남성으로서 남자 주인공을 카메라에 담을 때 어떤 감정이 개입되는가? 드니 라방은 당신의 분신 같은 역을 계속 맡아왔는데...
까 : 난 드니 라방을 찍는 것을 갈수록 더욱 즐기게 되었다. 그는 무섭게 노력하는 배우다. 감독이 요구하는 대로 체중조절을 할 수 있고 무용수처럼 매우 잘 움직인다. 그는 말론 브란도 이후 최고의 찬사를 받을만한 배우이다. 영화 속의 그는 지금의 내 모습, 내가 될 수 있는 모습, 내가 되고 싶지 않은 모습을 다 표현한다. 『소년,...』을 만들 때 소녀 역으로 미레유 빼리에는 정했지만 소년 역을 못 찾았다. 많은 배우들과 음악가들을 만났지만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루는 실업중인 배우 리스트를 보다가 아주 이상하게 생긴 드니 라방을 발견했다. 너무 이상하게 생겨서 만났지만 안될 것 같아 그냥 돌려보냈다. 그러다가 촬영을 시작하면서 아무 그를 써도 괜찮을 것 같아 결정했지만 매우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성공적이었고『나쁜 피』에서는 매우 만족했다. 그는 더욱 풍부한 연기를 했다.
유 : 당신 영화에서 늘 춤이 나오고 또 배우들의 움직임도 특별한 형태로 나타난다. 전문적인 안무가와 같이 작업을 하면서 얻어낸 제스처들인가?
까 : 전문적인 안무가를 찾아봤지만 음악처럼 적당한 전문가를 만나지 못했다. 결국 나와 배우들이 서로 의논해서 춤과 제스처를 만들어냈다. 특히 드니는 자신의 감정을 동작과 춤으로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배우이며 그가 움직이면 카메라가 따라 움직인다.
유 : 당신과 함께 세편의 영화를 촬영한 장 이브 에스꼬삐에와의 작업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까 : 그는 나보다 열살 많은데 십년간 매일 만날 정도로 서로 가장 가까운 친구이다. 그 역시 드니나 나처럼 작은 키인데 같은 사이즈인 우리 셋은 늘 함께 다닌다. 우린 같이 그림과 사진을 보고 의견을 나누고 모든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너무 서로를 잘 안다. 또 그는 내 영화를 찍기 위해 10년간 거의 다른 영화를 찍지 않았다. 우린 영화를 찍을 때 색채, 조명 등 모든 것을 매일 만나 조금씩 발전시키면서 함께 의논해 나간다.
유 : 당신 영화는 매우 개인적인 영화로 평가되는데, 사실 당신 영화에는 걸인이나 고아, 소외된 자가 등장한다. 사회 속에서 영화의 기능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까 : 난 매우 개인적인 이유로 영화를 시작했다. 영화는 개가 나 자신에서 벗어나 외부세계와 만나게 해줬다. 그리고 후에 영화를 만들며 영화가 세상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사회변화를 도울 수 있다. 특히 사람들의 감수성과 반항의 욕구 같은 걸 열어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노동자와 주인이 나오는 좌파나 우파 이데올로기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영화는 싫어한다. 내 영화를 좋아하는 이도 있고 싫어하는 이도 있겠지만 나는 내 영화가 자신의 본질적 삶을 추구하며 다르게 사는 방식을 보여주기 원한다. 혁명을 꿈꾸는 이들에게 『나쁜 피』를 보라고 권할 순 없다. 내 영화는 그런 점에서는 무력하다.
유 : 영화계와 당신 영화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까 : 지난 3년전부터 나는 실업자다. 『퐁네프...』를 찍으며 마지막 영화라고 이미 생각했다. 지금으로서는 내가 밤마다 서너 번씩 일어나 녹음한 꿈을 책으로 펴내, 꿈을 팔아먹고 사는 일만이 가장 실현 가능한 대책이다. 물론 그걸 사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만, 그건 내가 갖고 있는 비밀의(전부가 아닌)일부인 꿈을 파는 일이기도 하다.
『나쁜 피』는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하나의 커다란 충격파였다. 그렇게 영화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자그마한 체구의 천재 레오스 까락스(그는 자신을 이렇게 불러 달라고 말했다, 원래 프랑스식 발음으로 이름 뒤 'S'는 묵음. 그러나 그는 '프랑스식 고집을 거부한다'며 자기 이름을 비정통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감독이 서울을 시작으로 부산, 경주를 거치며 한국경험을 하고 12일만에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서울. 그는 파리에서 영화작업을 하던 동안보다 더 많은 인터뷰를 해야 했다는 부담감을 토로했다. 침묵은 수다스러운 영화에 대한, 인간에 대한 방어이자 공격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침묵 속으로 잠적해 버리기도 했던 그에게 서울행은 너무나 수다스러운 그것이었다.
부산. 그는 도피를 했고 즐거웠다. 겨울바다를 보면서 한 두잔의 청하를 마시고 거리의 사람들을 만나고 노래방에도 갔다. 'My Way'와 'Tears in Heaven'을 멋들어지게 불렀다. 서울의 디스코텍은 비싸기만 했다던 그는 싸구려 디스코텍도 넘보았다. 춤추기를 싫어하기에 스테이지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흔들리는 사람들을 보는 그의 눈동자는 흥겨웠다.
그리고 경주. 조용해서 그는 그 동양적인 마을이 좋았다.
자신의 영화를 '죽도록' 사랑한다는 관객을 만나기 위해 한국 행을 결심했던 레오스 까락스감독은 그 와중에 로드쇼 독자 대담, 단독 인터뷰에 응해 주었고 부산 친구를 통해 자신의 일정을 전달해 주기도 했다. 그의 진솔한 영화 이야기의 모음을 전해본다.
로드쇼(이하 로) : 여기 레오스 까락스 감독의 팬으로부터 건네 받은 메모가 있다. '당신은 다시 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 결심은 확고한 것입니까? 이 세상에서 당신의 영화를 다시 볼 수 없음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당신의 구체적인 회답을 부탁한다.
레오스 까락스(이하 까) : 물론 확고한 것은 아니다. 그런 현재 나는 영화를 만들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언제까지일지 나도 모른다.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떠오를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내 작품이 아는 것을 제작할 계획은 있다. 92년 베를린에서 열린'펠릭스 상'시상식에서 나와 공동수상을 했던 리투아니아의 신인감독 사루나스 바르테스의 두 번째 영화를 제작해보고 싶다. 아직 시놉시스정도만 준비되어 있다. 파리로 돌아가면 구체적으로 일을 진행할 것이다. 물론 자본가를 만나야만 일이 완성될 것이다. 그 감독을 선택한 이유? 그는 여배우를 다룰 줄 아는 감독이다. 그 점이 내겐 가장 큰 매력이다.
로 : 십대, 이십대 그리고 삼십대까지 당신의 영화관, 인생관은 어떻게 변해 왔다고 생각하는가?
까 : 열세 살부터 나는 타인과 대화를 거부했고 거의 영화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영화는 말없는 내가 세상과 교감을 나누는 매체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나는 짝사랑하던 소녀 플로랑스에 접근하기 위해 영화를 시작했다. 그렇게 아름다운 매체와 함께 나의 인생은 바뀌어 온 것이 사실이다. 다만 소수의 인원과 저 자본으로 시작한 내 영화에의 꿈은 『퐁네프의 연인들』과 함께 무너지기 시작했다. 법률, 행정, 영화산업의 속성을 알기 시작하면서 나는 영화작업에 대한 혐오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인생관? 너무 영악하게 살지 않겠다는 것이다.
로 : 당신은 『소년, 소녀를 만나다』,『나쁜 피』,『퐁네프의 연인들』까지 사랑의 삼부작이 모두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밝혔다. 각각의 작품에 대한 평가를 해달라.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까 : 그 세 작품들은 내가 20대부터 30대까지 겪어온 사랑과 인생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기에 닮아 있다. 특히 '사랑'의 관점에 있어서 여자를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는 것이 공통적이다. 하지만 이들은 또한 다르다. 인물의 성격, 사랑의 전개 방식 등이 독립적이다. 세작품은 각각 전작에 대한 연출방법의 뒤집기로 진행했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에서는 주로 정면 얼굴을 포착했고 『나쁜 피』에서는 뒷모습에 관심을 두었다. 특히 두 번째 작품은 화면구성, 색채, 조명, 연기, 음악까지 내가 모든 것을 계산적으로 움직였다. 하지만『퐁네프의 연인들』에서는 모든 연출적 제약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즉흥적이었지만 직관이 주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로 : 다시 묻는다. 왜 당신은 스스로 세 작품 모두를 만족스러워하지 않았는가? 당신의 영화들에 쏟아진 격찬들은 허구였다고 생각하는가?
까 : 수많은 칭송들이 부담스럽고 감사하다. 내 불만족은 다소 본능적인 수줍음을 바탕으로 한 듯 싶기도 하다. 세상의 어떤 아름다운 여자도 자신의 외모에 불만을 갖고 있다. 물론 내 영화가 그렇게 완벽해야한다는 자만은 아니다. 다만 아쉽다.
로 : 그렇다면 당신은 계속 자신의 이야기를 그릴 예정인가? 원작소설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까 : 원작의 영화화에는 관심이 없다. 언젠가 영화를 다시 한다면 역시 내 이야기일 것이다. 내 꿈의 세계도 하나의 소재일 수 있다. 나는 꿈을 꾸고 난 아침이면 녹음기에 그 내용과 이미지를 떠오르는 대로 녹음해 놓는다.
로 : 『나쁜 피』에서 알렉스는 리즈로부터 도망치듯 떠난다. 그리고 그녀는 죽음의 끝까지 그를 쫓는다. 당신의 사랑의 관점을 바탕으로 한 해석을 해달라.
까 : 알렉스는 부모도 모르는 고아이다. 첫사랑이었던 리즈에 의해 그의 외로움이 채워졌다. 알렉스는 그녀와 같이 있으면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녀를 사랑하지만 본질적 두려움으로 그녀를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로 ; 『나쁜 피』에서 알렉스가 안나에게 던진 질문, '불꽃처럼 타올라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이 있을까'에 대한 당신의 답은 무엇인가? '내가 사랑한 여인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는 당신 자신의 독백인가?
까 : 당신이 희망한다면 영원한 사랑은 있다. 내 영화는 '사랑 없음'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사랑에 대한 간절한 추구를 바탕으로 한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물론 내가 한 때 느낀 절망을 표현한 것이다.
로 : 『나쁜 피』의 색채 대비는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원색과 무채색의 대비를 통해 당신이 꿈꾸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색채감각의 힘은 무엇이었나?
까 : '의도','상징','의미'등등에 대한 수많은 질문을 받아왔다. 그러나 영화는 의도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그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색채에 대한 나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 단지 그때마다의 느낌과 욕구에 의해 색을 선택했을 뿐이다.
로 : 당신은 프랑스의 누벨바그세대를 선호했다. 『나쁜 피』에서는 그들이 버린 세트공간으로 돌아왔다.
까 : 그랬다. 조명과 색채, 그리고 연기까지도 세트에서는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퐁네프의 연인들』로 부터는 실내 세트를 떠났다.
로 : 『나쁜 피』에서 알렉스가 죽어 가는 와중에 다시 보는 흰 옷 입은 여인의 나타남과 사라짐을 통해 당신이 그리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까 : 모든 영화들이 그려온 사랑은 거짓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여인은 그 거짓에 대한 패러디였다. 또 다른 사랑을 찾는 알렉스의 욕망의 표현이기도 했다.
로 : 마지막 장면이자 포스터의 장면인 달려가는 안나의 이미지는?
까 : 욕망의 새로운 도약을 의미한다.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로 : 타이틀을 '나쁜 피'로 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까 : 랭보의 시에서 발췌한 것이다. 82년 이 시나리오를 준비할 때 에이즈에 대한 기사를 보았고 그에 대한 헐리우드식 공상과학 영화의 느낌을 추구했다. 에이즈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나쁜 피'란 모든 관계에 대한 두려움이며 혈통관계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로 : 영화광으로서의 경험이 당신의 영화연출에 미친 영향은 어떠한가?
까 : 대화의 수단이기도 했던 영화는 '여자'의 이미지를 내게 심어준 매체였다. 그리피스와 릴리안 기쉬, 고다르와 카르나 등을 떠올리며 나와 여배우와의 관계를 꿈꾸기도 했다. 무성영화시절부터의 영화사는 내 영화 전반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요즘은 별로 영화를 보지 않는다.
로 : 당신이 현실 속에서 가장 사랑한 여인은 누구였나?
까 : 미레유 빼리에와 줄리에뜨 비노쉬이다. 줄리에뜨를 나는 아직도 사랑하며 그녀와 지속적으로 만나고 있기도 하다.
로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물 속에서 살아난 연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결론은 줄리에뜨 비노쉬의 요구에 의해 당신이 노선을 바꾼 것이다. 그만큼 줄리에뜨 비노쉬는 당신에게 영향력이 있었나?
까 : 『퐁네프의 연인들』은 내 삼부작의 마지막이라는 점에서 쉽게 내 주장을 철회할 수 있었다. 완결의 의미에 있어서는 줄리에뜨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배우를 즐겁게 하는 것이 나와 죽도록 고생하던 그들에 대한 보답일 수 있으며 또한 열린 결론을 내리고 싶었다. 줄리에뜨는 테크닉에 의존하지 않는 천부적인 감성의 연기자이다. 나는 '메소드'등 배우의 기술적 연기를 싫어한다.
로 : 서울부터 부산까지 당신의 경험을 말해달라.
까 : 시멘트 바닥과 콘크리트 건물뿐인 서울은 삭막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부산은 편했고 자유로웠다. 한국인 친구를 만나서 특히 좋았고 영화를 사랑하는 젊은이들과 대화가 뜻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