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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저의 책 <대승기신론 속의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내용 일부를 옮깁니다.
5. 멈춤과 관찰을 함께 닦는 지관(止觀)수행
- 지관겸수(止觀兼修)
1) 멈춤(止)과 관찰(觀)의 정의 및 관계
‘멈춤(止)’과 ‘관찰(觀)’이란 어떤 것이며, 그것은 또한 어떻게 닦는 것인가?
‘멈춤’은 일체 대상에 대한 생각을 멈추는 것으로서, 사마타수행을 의미한다.
구역 ; 云何修行止觀門。所言止者。謂止一切境界相。隨順奢摩他觀義故。
신역 : 云何修止觀門。謂息滅一切戱論境界是止義。
또 ‘관찰’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인연에 의해 일어났다 사라지는 모습을 분명하게 보는[分別,明見] 것으로서, 위빠사나의 관찰수행을 의미한다.
구역 : 所言觀者。謂分別因緣生滅相。隨順毘缽舍那觀義故
신역 : 明見因果生滅之相是觀義。
* (해설) 이 부분은 ‘멈춤’과 ‘관찰’의 정의를 내려놓은 곳이다. 위의 원문의 의미를 이런 뜻으로 옮기기까지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기존 번역들도 이 부분에서 어려움을 보이고 있다. 기존 번역자들은 이 정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해독 불가능한 번역을 해 놓고 있다..
위의 정의를 다시 정리해보면 “‘멈춤[止]’은 범어 ‘śamatha’의 번역어로서 ‘일체 대상[境界]에 대한 모든 생각을 쉬는[止, 息滅] 것’이고, ‘관찰[觀]’은 범어 ‘vipassanā’의 번역어로서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인연에 의해 일어났다 사라지는 여러 가지 모습을 밝게 보는[分別, 明見]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禪)이다. 불교는 열반, 해탈, 즉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추구하는 종교다. 열반도, 해탈도 깨달음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그 깨달음은 선(禪)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 선(禪)을 닦지 않고서는 지혜도 깨달음도 얻을 수 없다. 선을 닦는다고 해서 모두 다 깨닫는 것도 아니다. 올바른 선을 닦아야 깨달을 수 있다. 올바른 선(禪)이란 멈춤(止)과 관찰(觀)을 함께 닦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아함경에서 “마땅히 멈춤과 관찰을 닦아야한다”고 했고, 또 “비구 비구니는 멈춤과 관찰이 하나로 융합되게 하여 함께 닦는다”고 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선법(禪法)은 멈춤과 관찰을 함께 닦는 방법이다.
생생한 부처님의 육성이라 할 수 있는 잡아함경의 내용 중 90%이상이 선(禪), 즉 멈춤과 관찰에 관한 내용이다. 선을 닦는 방법, 선의 효과, 선을 닦아, 깨닫게 되었을 때의 깨달음의 내용, 깨달음의 결과를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석가모니의 가르침 중에서 선(禪)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인도에는 부처님 이전부터 선을 닦는 요기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선을 닦는 목적과 방법을 조금씩 달리하고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그 당시 전해오던 방법들을 하나하나 닦아, 그것의 최고봉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생사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방법으로 생로병사의 근본 문제에 대해 명상하기 시작했다.
부처님께서는 고도로 집중된[止] 가운데 생사의 근본문제에 대해 골똘히 관찰해[觀] 들어갔다. 한 주제에 대해 그렇게 골똘히 관찰해가는 것은 부처님 특유의 방법이었다. 그렇게 관찰해감으로써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그 깨달음으로 인하여 모든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기대 밖의 엄청난 결과였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내용과 결과,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을 주변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그 가르침이 바로 불교(佛敎)이다.
부처님의 선정법 - 사마타와 위빠사나
부처님의 선정법에는 두 개의 축이 있다. 그것은 멈춤(止)의 사마타와 관찰(觀)의 위빠사나이다.
사마타(śamatha, 止)
사마타는 마음을 멈추는[止] 것이다. ‘마음을 멈춘다’고 할 때 거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 뜻은 마음을 한 대상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고, 두 번째 뜻은 생각작용 자체를 아예 멈추도록 하는 것이다.
첫 번째 뜻의 멈춤은 마음으로 하여금 현재 여기에 있는 ‘나’이외의 다른 대상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호흡이나 마음에 집중함으로써 거기에 마음을 묶어둔다. 그리하여 제멋대로 돌아다니며 온갖 바깥 대상을 상대하고 있는 마음을 내 안으로 거둬들여, 지금 현재의 ‘나 자신’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다.
이 때 마음은 ‘과거의 나’나 ‘미래의 나’에 머물러서도 안 되고, 바깥 대상을 향해 달려 나가서도 안 된다. 또한 마음이 생각이나 상상 속을 헤매고 있어도 안 되고, 지금 여기에서의 ‘나 자신’에 단단히 고정(定)되어 있어야 한다. 바깥 것은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생각하거나, 상상하지도 않는다. 마음은 깨어 있는 상태로 오로지 내 안에 머물러 있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간단하지가 않다. 정말 어렵다. 내 안에 잡아둔 마음이 이내 곧 달아나버리기 때문이다. 달아나고, 잡아오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마음은 점점 길들여져 더 이상 달아나지 않고 내안에 머물게 된다. 그러면 마음은 고요해지고, 편안해진다. 이것을 많이 닦아 익히면 마음은 조금의 움직임도 없게 된다. 그리하여 그 상태가 30분 이상 지속되면 삼매를 이루었다고 한다.
마음이 한 대상에 정확하게 모아져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不動心(부동심)’이라 하고, 그렇게 마음이 한 대상에 고정(固定)되어 있다고 해서 ‘定(정)’이라고 한다. 또 마음이 그렇게 한 곳에 멈춰 있다고 해서 ‘止(지)’라고 한다. 그렇게 마음이 하나로 모아져 움직이지 않는 것을 범어로 ‘사마타(śamatha)’라 하고, 이 사마타 상태가 지속되는 것을 ‘삼매(samādhi)’라 한다. 이와 같이 ‘不動心(부동심)’, ‘定(정)’, ‘止(지)’, ‘사마타’, ‘삼매’는 모두 같은 것이다.
여기까지가 첫 번째 뜻의 멈춤이다. 이 멈춤 수행의 목적은 산란(散亂)하게 움직이는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集中] 데 있다.
두 번째 뜻의 멈춤은 생각 및 모든 감각작용이 완전히 멈추는 것을 의미한다. 정말로 깊은 선정에 들어가면 생각작용 자체가 완전히 정지해버린다. 생각뿐 아니라 눈, 귀, 코, 혀, 몸 등의 모든 감각작용도 멈춘다. 그러면 머무는 마음도 없고, 머물 대상도 없어진다. 고요함도 평온함도 없고, 즐거움도 괴로움도 없다. 또한 옳고 그름도 없다. 거기에는 그 어떠한 생각이나 분별심도 없다. 오직 생각 이전의 맑은 마음만 있다. 이것이 두 번째 뜻의 멈춤이다.
기신론에는 첫 번째 뜻의 멈춤은 없고, 두 번째 뜻의 멈춤만 있다. 기신론은 처음부터 생각작용 자체를 완전히 정지시켜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태로 바로 들어가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기신론에서는 내안의 어느 한 대상에 마음을 묶어 매어 그 곳에 머물도록 하는 멈춤은 없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기신론은 첫 번째 뜻의 멈춤을 부정하는 입장이다. 이 책 91쪽, “호흡에도 의지하지 말고, 형태나 색깔 가진 그 어떠한 것에도 의지하지 말라”고 한 부분에서 그러한 입장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음이 하나로 모아져, 고요하면서도 깨어있음의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되면, 번뇌 망상이 힘을 잃게 되고, 온갖 업장이 녹아내리고, 심식(心識)이 맑아진다. 심식이 맑아지면 미세한 것들조차 볼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정진해가면 그 지혜가 점점 더 자라고, 밝아져 강력한 힘을 얻게 된다. 그러면 집중력은 더 강해지고, 알아차림은 더욱 예리해진다.
위빠사나(vipassanā, 觀)
이렇게 마음을 한 대상에 고정시켜, 그 대상을 계속 관찰해 간다. 관찰대상은 인연에 의해 일어났다 사라지는 여러 가지 모습들이다. 몸동작, 호흡, 몸과 마음의 느낌, 마음에서 일어났다 사라지는 여러 현상들을 관찰해 간다.
‘위빠사나(vipassanā)’의 ‘vi'는 '분리(off)한다'는 뜻이고, ’passanā'는 '본다'는 뜻이다. 곧 위빠사나는 ‘나’를 대상화시켜 관찰한다는 뜻이다. 나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내 육신과 생각과 감정에 몰입되지 않고, 그것 밖으로 나와, 나의 육신, 생각, 감각, 감정, 의도 등이 어떠한 것인지 이해해 들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동작과 느낌과 생각을 계속 관찰해가야 한다.
부처님 말씀에 따라 호흡관찰법으로 선정을 닦는다. 조용히 앉아 호흡을 지켜본다. 숨을 들여 쉴 때 들숨을 관찰하고, 내 쉴 때 날숨을 관찰한다. 이와 같이 마음의 초점을 호흡에 맞춰, 잠시도 호흡에서 마음의 눈을 떼지 않고 계속 관찰해간다. 호흡의 전 과정을 지켜본다. ‘그것이 어떠한 모습이며, 호흡할 때 몸의 느낌이 어떠한지’를 관찰해간다. 그렇게 집중해서 관찰해가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여 오기 시작한다. 그러면 마음에는 환희심과 함께 신기하다는 생각이 일어난다. 일어나는 즉시 느낌과 생각의 일어남을 바로 알아차린다. 알아차리면 그것들이 사라진다. 그러면 사라짐을 알아차린 뒤 다시 호흡으로 돌아가, 호흡을 관찰한다. 그렇게 관찰해가면 마음은 호흡의 겉모습을 뚫고 점점 깊이 들어가게 된다. 그러면 호흡의 모양과 성질을 더 세밀하게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그것의 실체를 꿰뚫어 본다. 이렇게 꿰뚫어 보는 것을 ‘통찰(洞察)’이라 하고, 그것을 빨리어로 ‘위빠사나’라고 한다.
위빠사나(觀)는 자신을 관찰하는 공부이다. 자신의 몸동작과 호흡, 생각, 느낌 등을 관찰해 간다. 그러한 관찰을 통하여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차린다. 제대로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세밀한 관찰이 요구된다. 세밀하게 관찰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도 강력한 집중이 요구된다. 마음을 집중하여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있으면 관찰 삼매를 얻는다. 이 삼매가 점점 깊어지면서 지혜의 눈이 열리기 시작한다. 지혜의 눈으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色受想行識]을 꿰뚫어 보아[明見,照見], 그 속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게 된다. 그 이해를 통하여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를 깨닫게 된다. 그 깨달음으로 인하여 모든 탐욕과 집착심을 여의고, 결국에는 열반을 이루게 된다. 이와 같이 위빠사나 수행의 목적은 자신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의 실체를 정확하게 꿰뚫어보아 열반을 이루는 데 있다.
여기서 자신의 몸과 마음의 실체를 꿰뚫어 보는 것이 핵심이다. 그럼 꿰뚫어 본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인가? 『잡아함경』제12경인 <인연경>을 통하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꿰뚫어 봄[觀]이 과연 어떤 것인지 살펴보도록 한다.
<인연경(因緣經)>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아바스티이국 제타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했다. “물질[色,육신]은 항상됨이 없다. 혹은 인(因)으로, 혹은 연(緣)으로 말미암아 모든 물질[色]이 생겨났더라도 그것은 항상됨이 없다. 항상됨이 없는 인(因)과 항상됨이 없는 연(緣)으로 말미암아 생긴 그 모든 물질이 어찌 항상됨이 있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느낌[受], 생각[想], 의도[行], 앎[識]도 또한 항상됨이 없다. 혹은 인(因), 혹은 연(緣)으로 말미암아 생긴 그것들도 항상됨이 없다. 항상됨이 없는 인(因)과 항상됨이 없는 연(緣)으로 생긴 그것들이 어찌 항상됨이 있겠는가?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물질은 항상됨이 없고, 느낌, 생각, 의도, 앎도 또한 항상됨이 없다. 항상됨이 없는 것은 곧 괴로움이요, 괴로움은 곧 ‘내’가 아니며, ‘나의 것’도 아니다. 이렇게 꿰뚫어 보는[觀] 것을 진실한 꿰뚫어 봄이라고 말한다. 거룩한 제자로서 이렇게 꿰뚫어 보면 그는 곧 물질[몸]을 싫어하고, 느낌, 생각, 의도, 앎도 또한 싫어하게 된다. 싫어하면 즐기지 않게 되고, 즐기지 않으면 해탈하고, 해탈하면 지견(知見)이 생기나니, 이른바 ‘나의 태어남[生]은 이미 다하고, 청정한 수행[梵行]은 이미 성취되었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음 존재[有]를 받지 않을 줄 스스로 안다’고. 때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위의 내용에 의하면 꿰뚫어 본다는 것[觀]은 나의 육신[色身]과 마음작용[受想行識]을 관찰하여 그것의 성격을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집착을 여의어, 괴로움과 윤회로부터 영원히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 중생들은 자신의 육신, 생각, 감정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잘못 보고 있다.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고 한다. 우리는 전도몽상에 속아, ‘나’와 ‘나의 것’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에 집착하고, 괴로워한다.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지혜의 눈으로 바로 보아 더 이상 속지 않게 되면 모든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해탈하게 된다.
또 『잡아함경』 제13, 미경(味經)을 보자.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중략)....말씀하셨다. “만일 중생들이 물질에 맛들이지 않으면 그는 물질에 물들지 않을 것이다. 중생들이 물질에 맛들이기 때문에 곧 거기에 물들어 집착한다. 이와 같이 중생이 느낌, 생각, 의도[行], 앎[識]에 맛들이지 않으면 그는 그것에 물들지 않을 것이다. 중생이 그것에 맛들이기 때문에 그것에 물들어 집착한다. .....(중략).......비구들이여 만일 내가 물질[色], 느낌[受], 인식[想], 의도[行], 의식[識]에 대해 올바로[如實] 알지 못했다면 나는 모든 하늘에서 혹은 악마, 거룩한 사문, 바라문이나 하늘, 사람들 가운데 있으면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랫동안 잘못된 생각[顚倒]에 머물러, 스스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지 못 했을 것이다.......(중략)........내가 그 다섯 가지[五蘊]에 대해 실답게 알게 됨으로써 저절로 벗어나게 되었고, 나오게 되었고, 떠나게 되었고, 결박에서 해탈하게 되었고, 오랫동안 잘못된 생각에 머물지 않게 되었고, 또한 스스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때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위의 내용에 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육신과 마음작용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如實] 바로 보아[見], 해탈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반야심경>의 내용과 일치한다. <반야심경>의 첫 머리에서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관찰]바라밀을 닦아갈 때 오온[色受想行識]의 무상[空]함을 꿰뚫어 보시고[照見]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하는 내용과 일치한다. 위의 미경에서 “지혜로 꿰뚫어 보는[觀] 것이 없었다면 깨달음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고 부처님께서 분명하게 밝혀 놓으셨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말씀을 종합해보면, 위빠사나에서 말하는 꿰뚫어봄[觀]은 자신의 육신[色]과 느낌[受], 인식[想], 의도[行], 의식[識]을 반야지혜로 관찰하여 그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그렇게 무상을 알아 그것들에 대해 조금도 집착하지 않게 되고, 그것들에 대한 모든 집착을 버리게 됨으로써 열반에 이르게 되고, 열반을 이룸으로써 모든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첫댓글 지극한 정성으로 뜻하심이 이루어지시기를 두손 모읍니다. ()()()
모든 집착을 버릴 수 있는 길과 방법을 배웠으니 오직 행하고 또 행할 따름입니다.
게으름과 나태함과 싸워가며......
네, 기원 감사합니다. 또한 님도 함께 이루시길 빕니다.
집착과 무지을 태우고 ....여실하게 수행을 쭈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