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화산 성지순례 이야기-1
5년 전인가 구례 화엄사 성보박물관에서 소임 살 때입니다. 차 시배지 논란이 있었습니다. 한국에 처음 차씨를 심은 차 시배지가 하동 쌍계사가 아니라 구례 화엄사라는 주장이었죠. 화엄사 산문을 지나서 한 20m 오르다 보면 오른쪽에 나타나는 장죽전이 하동 쌍계사가 아니라 진정한 한국 차 시배지라는 주장이죠. 차 시배지의 이야기가 어디서 나왔나 봤더니 삼국사기에 신라 흥덕왕 3년인 828년에 당나라 사신 대렴이 황제가 하사한 차씨를 왕이 지리산에 심도록 했다는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이건 아닌 거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828년 이전 신라에는 차 문화가 있었다는 자료들이 있는데, 당나라 차씨를 심은 곳을 갖고 차 시배지 다툼을 하고 있으니까요. 이미 신라에서는 차를 심고 있었던 것이죠. 시배지 주장은 구례가 바로 옆 하동에 비해 차 문화가 뒤 쳐진 것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들이겠죠.
그러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교각(김지장)스님이 신라에서 가져가서 중국 구화산에 심었다는 ‘금지차(金地茶)’를 다시 가져와서 ‘1300년 신라 차의 귀환’이라는 내용으로 홍보하면서 재배하면 구례 차를 알리는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때부터 기회가 되면 구화산 김교각 스님의 등신불이 모셔진 육신보전(肉身寶殿)에 가서 참배하고 금지차 씨앗을 얻어와야지 했는데 이제야 4월에 가게 되었습니다.
구화산에 처음 절을 세운 구화산의 개산조사(開山祖師) 김교각스님은 김지장스님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696년에 신라의 왕자로 태어나 99세가 되는 794년에 입적하였습니다. 입적하실 때 산이 울리고 땅에는 빛이 번쩍였으며 새들이 울고 법당은 무너졌습니다. 이때 화성사의 범종을 치는데 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교각스님의 법체를 돌로 만든 함에 앉아 입적하신 모습 그대로 모셨는데 3년 후에 열어보니 살아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고 합니다. 김교각스님의 법체를 건드리니 쇠소리가 나는 겁니다. 이러한 신비로운 모습에 모든 스님과 신도들이 지장보살의 화현으로 여겨 옻칠과 금칠을 하며 등신불로 모셨습니다. 이후 3층의 육신보전탑을 세우고 그 위에 육신보전을 건립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김교각스님의 진신(眞身) 등신불을 모신 화성사는 중국 지장보살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당나라의 비관경이라는 사람이 김교각 스님의 입적 후 19년이 되는 813년에 저술한 구화산화성사기(九華山化成寺記)에 나옵니다. 현재에도 구화산에는 김교각스님의 등신불 이후 9존의 등신불이 모셔져 있다고 합니다. 1998년에는 1982년 입적한 비구니 명정스님의 등신불이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중국에는 사대 보살님이 계신 사대 불교 명산이 있습니다. 지혜의 문수보살님이 계신 산서성 오대산, 자비의 화신 관세음보살님이 계신 저장성 보타산, 크게 행하시는 보현보살이 계신 스촨성 아미산,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위촉을 받아 미륵불이 출현하기까지 모든 중생을 보살피고, 지옥의 중생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 서원을 세운 지장보살님이 계신 안휘성의 구화산입니다. 이 구화산의 지장보살님이 바로 지금도 등신불로 불자들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신라의 왕자 김교각 스님이신 것이죠.
무엇보다 한국의 신도들이 와서 김교각스님께 기도하고 기원하면 후손들이 왔다고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우리말로 기도하고 기원하면 신라의 김교각스님이시니 다 알아들으시고 이해하셔서 소원 하나씩은 꼭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저도 이루고 싶은 소원 하나 간직하고 참배 가려 합니다.
밤이 늦어서 ‘구화산 성지순례 이야기 2탄’은 내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