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현 킬리만자로 정상에 서다
박광현 정상에 서다
시내에서 바라본 킬리만자로
사라저 가는 만년설
지난 12월 27일 박광현동기가 7순넘은 나이에 아프리카 최고봉 6000m인 킬리만자로 정상에 올랐다.
이는 일반산악인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봉으로 전세계 산악인들의 꿈을 이룬 것이다.
등산 경력 22년에 1700여회등산으로 전국 의 모든산을 올랐고 일본, 중국에도 여러산을 등산하고 왔으며 동남아에서 가장 높은 보르네오섬에 있는 4100m의 키나바루산까지 등정한 대단한 산악인이다.
이번 킬리만자로 등정에 참가한 원정대는 16명으로 대부분 30세이상 젊은 산악인들인데 4명이나 정상을 오르는데 실패하였는데도 최고령자인 박광현은 당당히 등정한 것이다.
25시간 장거리 열악한 항공기편과 등산빽의 지연도착 그리고 폭우등으로 악조건하에서 출발한 산행은 처음부터 두려움과 설레임속에 고전한 등산이었던 것이다.
고산에 점점 높이 오르면서 숨이 멈추고 심장이 터질것 같은 고통, 머리가 어지럽고 띵하는 느낌의 산소 부족에 따른 고산증세 와 이뇨제를 먹어야 배뇨가 되는 고산지대 의 고통은 상상하기 힘들다.
하루에 21km 2000m고도를 오르는 강행군, 칠흑같은 어둠속에 야간 산행 , 피로와 쏟아지는 졸음에 그는 주저 앉아 몇번을 절망속에 포기하려 했던 순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마다 그는 깊은 신앙심과 불굴의 육사정신으로 이겨 낸것이다.
이번 등산에 함께 가기로 했다가 마라톤과 고산등반의 준비부족등으로 취소한 두 동기생 (공준식과 정유희)이 아쉬움 속에 찬사를 드린다.
이번 박광현의 쾌거는 육사 동창 최초의 킬리만자로 등산으로 또 하나의 자랑스런 육사17기 인이 탄생한 것이다 .
다음 그의 등정기를 통해 그의 생생한 체험을 느껴 보기 바랍니다.
박광현
킬리만자로 정상에 서다
추가;
88올림픽을 1년 앞둔 1987년 봄 어느날 아내가 갑자기 남산을 걷자고 제안했다 둘째 아들까지 대학에 진학하고 나니 큰일을 끝낸듯 홀가분하면서 이제는 부부가 건강을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해야겠다는 아내의 뜻에따라 남산을 걸어 오르던게 산행의 시작인것 같다
몇번 남산을 오르다가 등산장비를 갖추고 관악산에 오르면서 매주 한번씩 산행하기로 결심하게 ?다
아내와 함께 설악부터 한라까지 전국 유명한 산들을 빠짐없이 두루 다녔다
1999년 산이 직장이 되면서 매주 3-4회 본격적으로 산행을 하면서 나라밖에도 눈을 돌려 일본 중국에도 여러 산을 올랐다
일반산악인들의 꿈인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5895m)등정을 꿈꾸면서 지난해 6월에 는 동남아 최고봉인 보르네오에 있는 4100m 키나바루산에 올라 고소적응 첫시험에 무난히 합격했다
그후 주5회 강훈련을 통해 지구력을 키우고 11월에는 1박2일동안 40km 구간의 지리산 대종주를 통해 마무리훈련을 마치고 12월 22일 아프리카를 향해 출발했다
방콕 ,케냐 나이로비를 거쳐 25시간 만에 탄자니아 킬리만자로공항에 도착했을때 그곳 시간은 12월 23일 낮 12시. 자로 원정대17명의 등산장비를 넣은 카고백 일부가 도착하지 않았다. 나이로비에서 실리지 않은 것이다.
오는 첫날 산행은 어쩔 수 없이 취소되고 모쉬시내 스프링랜즈 호텔에 짐을 풀었다. 그러는 사이 한 4시간정도 억수 같은 폭우가 쏟아져 도로가 범람했다.
카고백이 한꺼번에 도착했으면 이 폭우속에 산행은 시작되었을 것이고 첫날부터 장비와 신발이 모두 젖어 6일간의 산행이 무척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하나님이 예비하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24일 아침 마랑구게이트(1970m)에서 입산신고를 마치고 등산장비카고백(20kg), 주 부식, 그리고 취사도구를 20명의 포터가 머리에 이고 가이드 5명, 쿡6명을 포함, 48명의 원정대는 9시 두려움과 설레임을 간직 한채 밀림속 잘 가꾸어진 등산로를 따라 대망의 산행을 시작했다.
1시경 이슬비 내리는 가운데 첫번째캠프인 만다라대피소(2700m)에 도착, 출발시 나눠준 도시락(구운닭다리, 딱딱한빵,삶은계란, 음료수등)을 먹고 제2캠프로 출발한지두어시간 지났을 즈음 머리가 띵하고 어지럽고 속도 불편하고 자꾸 발이 헛딛어 졌다. 참으로 이상했다. 6개월전 동남아 최고봉 보르네오에 있는 키나바루봉(4100m)을 올랐을 때도 고산증세를 느끼지 않았는데 겨우 2900m고도에서 고산 증세라니.....? 한편 급체했지 않나 싶어 자가처방을 했더니 다소 누그러 졌다.
주위는 어두워지고 헤드랜턴으로 발길을 비추며 밤 8시30분경 제2캠프인 호롬보대피소(3700m)에 도착했을 때 안도감과 함께 순간 정상은 커녕 내일 산행이 몹시 걱정되었다.
어제 폭우로 평소 이틀동안 해야 할 산행을 오늘 하루에 21km 11시간을 걸어 고도 2000m를 높인 것이다. 고산에서 하루 올릴 수 있는 고도범위를 2배 정도 넘었기에 무척 힘들었다.
한국에서 공수한 식재료(원산지표시;한국)로 정성것 쿡들이 저녁식사를 마련했지만 국물만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다.
"하나님, 저는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온전히 주님께 맡기오니, 주님! 저를 앞에서 끌어 주시고 뒤에서 밀어 주셔서 정상까지 올려 주시옵소서" 눈물로 애타게 간구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포터가 대야에 따뜻한 물을 부어 주면서 세수 하란다.
이때만은 양반이 되 살아난 듯 했다. 기분이 상쾌해 졌다.
25일 크리스마스 비 때문에 오전은 대피소에서 쉬고 오후에 고소 적응을 위해 4100m Zebra Rock 까지 3시간 정도 천천히 왕복하고 다시호롬보로 돌아 왔다. 잠을 청했지만 이뇨제 덕분에 1시간 간격으로 화장실에 다녀야 했다. 그래도 감사했다. 만약 고산에서 배뇨가 안되면 복수가 차서 큰일 날 수 있기 때문이다.
26일 아침 8시 이슬비 속에 호롬보를 떠난지 2시간이 지났을까 끝없이 펼쳐진 화산제 사막길,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지 않았으면 뙤약볕에서 4시간동안 군고구마가 됬을 것이다.
몸상태는 비교적 좋았다. 오후3시쯤 마지막 대피소인 키보(4700m)에 도착했다. 5시쯤 미역국으로 속을 다스리고 잠시 쉰다음 밤10시에 누릉지로 밤참을 먹었다.
4일 동안 계속 내리던 비는 눈으로 옷을 갈아입고 뿌렸지만 신기하게도 출발시간 전에 깨끗이 개이고 반달도 별도 그리고 은하수(60여년만에 다시본 은하수)까지 눈부시게 빗났다.
주님의 경이로운 축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름(비)기둥으로 달기둥으로 산행내내 이렇게 환상의 날씨를 주시니.그저 감사,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
밤11시 30분 광부가 갱속으로 들어가듯 헤드랜턴을 머리에달고 정상도전이 시작되었다. 최고령인 나는 가이드 싸이디(Sai-D)의 뒤를 따라 1번을 배정받는 특전을 누렸다. 한동안 이 대열은 유지됬지만....
아무리 올라가도 끝이 없고 숨은 턱에 차고 30발자욱도 앞으로 나아 갈수 없었다. 칠흑같은 밤에 몇번이고 앞을 올려다 보았지만 불빛인지 별빛인지 분간이 안된다.
올라가도 올라가도 얼마나 높은지 줄어들지도 않고 앞서간 사람들의 불빛이 마치 하늘의 별빛처럼 보이니 힘이 팍 팍 빠지는 느낌이 었다. 눈위나 바위나 아무데나 털석 주저앉아 헐떡거린다. 숨이 곧 끊어지는 느낌이다. 이러다가 심장이 터지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가이드 싸이디가 옆에서 애처러운지 내 배낭을 지겠 단다 . 염치 없지만 배낭을 벗어주니 한결 쉬워젔다.
6시간의 사투끝에 여명이 밝아 오고 Gilmans Point(5685m) 간판이 눈에 들어 왔다
18세기말 독일인 길만스가 이곳에 올라 탈진했다는 곳으로 그후 여기까지만 오르면 등정 증명서를 받을 수 가 있단다.
나도 여기서 더는 못 가겠다고 주저 앉았다. 순간 만감이 교차하면서 나를 이곳에 보내신 분들의 얼굴이 스쳐간다. 기운을 내자! 정상은 2시간만 더 가면 된다. 가져간 태극기가 배낭속에서 웃는다.
앞에서 끌어 주시고 뒤에서 밀어주시는 분이 계시지 않나? 다시 일어 섰다.
본래 정상부근은 만년설로 덮혀 있었는데 점점녹아 한참 아래만 남아 있고 정상은 자갈밭으로 변했다고 한다. 간밤에 내린 눈 때문에 온통 설원이 되었고 햇볕이 쏟아 지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이런때 고글을 쓰지 않으면 설맹에 걸려 영원이 볼 수 없게 된단다. 김윤집사가 선물한 고글을 꺼내 쓰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태양을 등에지고 만년설을 왼쪽에 끼고 우후르피크정상(5895m)을 향해 한발자욱씩 천천히 천천히 (pole pole).....
드디어 정상이다!
그렇게 쏟아지던 졸음도 오간데 없이 사라젔다. 전날 팀은 악천후로 정상에 오를 수 없어 길만드에서 발길을 돌렸다는데 눈덮힌 정상은 눈 부신 햇볕으로 "빛나는 하얀산(킬리만자로의 원 뜻)이란 이름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 이런날은 1년에 한 두번밖에 없다는데 어떻게 내가 이런 큰 축복을 받았는지 ....
담임목사님, 사모님,그리고 여러 성도님의 기도와 성원에 감사, 감사했다.
한동안 정신없이 샷다를 눌러 댔다. 배낭속에 태극기도 제때를 만났다.
키보 대피소에서 누룽지 한 두 숫갈 먹은지 10시간이나 지나 배는 등에 붙었는데 아무것도 속에서 받지 않는다.
내려오면서.환할때 뒤돌아보니 얼마나 경사가 높고 험한지 어떻게 이길을 올라 갔을까 한밤중 앞사람의 발뒷굼치만 보고 올랐으니 망정이지 낮이 었으면 올라갈 사람이 얼마나 됬을까?
해가 뜨면 고산에서는 산소량이 더욱 부족해 져서 그렇단다.
8시간 올라갔던길을 내려오는데는 3시간반만에 키보대피소로 되돌아왔다. 27일 낮11시가 되었다.
점심식사를 하는둥 마는둥2시짐키브를 떠나 저녁6시 호롬보대피소에 도착했을때 졸음이 쏟아져 눈을 뜰 수가 없었고 다리는 천근만근 , 어제 이곳을 떠난후 계속되는 22시간의 산행끝에 돌아 왔으니 말이다. "내가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두번의 위기를 겪으면서 되새겨 보았다. 대 자연 앞에서 너무 미약하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머리숙여 졌다.
이틀밤의 잠을 한꺼번에 모아 정신없이 잠에 떨어졌는데 새벽5시 모닝콜에 깨어나 아침식사를 마친다음 28일 아침6시30분 호름보 대피소(3720m)를 출발 하산을 계속했다.
정상을 밟았다는 사실이 새삼 느껴지면서 여유롭게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샤터를 누르며 어느듯 10시30분, 첫번째 대피소 만다라(2700m)에 도착 , 잠시 쉬면서 "기도와 격려로 정상을 찍고 하산완료 3시간전" 오랬만에 핸드폰을 꺼내 열심히 문자를 만들어 정상정복의 첫메세지를 한국으로 띄웠다.
이때 이기쁨과 감격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이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다.
그리고 3시간뒤 나는 5일전 두려움과 설레임속에 출발했던 마랑구게이트(1920m)에 살아서 내 발로 돌아온 것이었다.
지난 1년동안 밥먹듯이 준비하고 기다렸던 아프리카 최고봉, 일반 산악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봉 킬리만자로를 칠순넘어서 등정하고 돌아 온 감격은 산 사나이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을 것 같다
위기 때마다 앞에서 끌어 주시고 뒤에서 밀어주신 하나님, 환상의 날씨로 축복해 주시고 무사히 등정을 허락해 주신하나님께 영광과 찬양를 드립니다.
산행 내내 기도로 용기와 힘을 보내주신 담임목사님 내외분 그리고 여러 성도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