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재 ~ 노치마을 <제44구간>
1. 산행 정보
1) 일 시 : 2013. 03. 02. (토) 10:55 ~ 17:40(날씨 : 맑음)
2) 주요산 : 고남산(846.4), 수정봉(804.7)
3) 소재지 :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및 이백면
4) 코 스 : 유치재 – 고남산 – 여원재 – 수정봉 – 노치마을(가재)
들머리 : 전북 남원시 운봉읍 매요리
날머리 : 전북 남원시 운봉읍 노치마을(가재)
2. 유치재 ~ 노치마을(가재), (도상 : 16.3km) - 남진
유치재(490m) – 5.0km – 고남산 – 5.0km – 여원재 – 4.5km - 수정봉(490m) – 1.8km – 가재(550m)
매요리 마을을 감싸고 있는 야트막한 능선을 따라서 백두대간으로 들어선다. 좌측으로는 운봉고원의 드넓은 평지가 펼쳐지며 여느 농촌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우측으로는 깊고 깊은 산속이다. 운봉고원이 해발 약500m에 자리 잡고 있어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뒷동산을 걷듯이 산행을 하다가 고남산으로 힘차게 오르면 남원시와 운봉읍을 조망할 수 있다. 이곳에서 여원재로 올라온 만큼 다시 내려가야 한다. 여원재에서 여원재의 유래를 음미하며 다시 힘을 모아서 산봉우리를 넘어가면 수정봉이다. 이후 가재로 내려서면 소나무가 우아한 자태로 마을을 지키는 광경을 볼 수 있다. 노치샘에서 땀을 식히고, 백두대간이 유일하게 마을을 지나며 한마을 두 행정구역을 만드는 장소에 안착한다.
3. 산행의 흐름과 메아리
1) 들머리에서
매서운 겨울 추위로 1~2월은 백두대간 산행이 없었다. 겨울이 서서히 물러가며 초록의 싱그러움이 봄을 맞이하는 시점에 백두대간을 만나는 것이 기쁘다. 휴식을 취하며 움츠려들었던 시간들을 떨쳐내고 생명력을 불어 넣을 수 있다는 것이 감격스럽다. 봄의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성삼재로 가니 출발여건이 좋지 않다. 오늘 산행과 내일 산행을 바꾸어서 유치재에서 노치마을까지 실시하기로 하고, 유치재에서 출발을 준비한다.
2) 유치재 - 고남산 – 여원재 (10:55 ~ 14:30)
말의 허리를 닮은 매요리에서 매화를 찾았으나 매화는 없고, 봄 농사를 준비하는 농부들의 얼굴이 매화로 피어난다. 검게 그을린 얼굴과 손이 겨울을 봄옷으로 단장시키는 힘이 있기에 우리는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백두대간을 탐방할 수 있는 것도 그분들이 계시기에 가능하고, 행복을 만들 수 있는 것이리라. 농부들의 얼굴에서 묻어나오는 정다움을 뒤로하고 이정표를 만나니 고남산까지 4.5km이다.
능선우측으로 88고속도로 교각이 쭉 뻗어 올라와도 발아래 교량이로다. 운봉고원과 저 멀리 아랫마을과 경계를 이루는 산 능선에서 지형적 특수성에 신비함을 발견한다. 자연은 일정한 패턴으로 움직이면서, 상황에 따라 색다른 변화도 보여준다. 자연이 전하는 변화를 배우며 유치재(573.2)이정표를 지나고, 불당제에 담긴 햇살로 몸을 녹이니 몸이 노근하다. 낙엽이 은은하게 깔린 카페트에서 졸리는 눈을 걷어 올리며 통안재에 이른다.
울창한 잡목에서 겨울을 걷어내며 임도와 산길을 교차하다가 통신소에 이른다. 겨울이 녹아내리는 질벅하고 어수선한 능선을 헤쳐가면 헬기장이다. 이끼가 덥힌 바위들과 시들은 억새에서 지난겨울의 흔적을 지워가며 고남산에 다다른다.
남원의 진산, 고남산. 들이 낮으면서 높고, 산이 높으면서 낮다. 운봉고원과 지리산이 이웃마을로 친근하게 다가오고, 남원시는 끝없이 멀고 먼 이국땅으로 보인다. 지형적 여건으로 많은 전쟁이 벌어지고 전설이 만들어졌을 법한 곳이다. 운봉고원과 남원시내의 표고차이는 약400m이상은 될 것 같다.
바위능선과 소나무의 어울림에서 휴식을 취하고, 수려한 주변경관도 조망하며 내려가니 철사다리와 로프가 재미를 즐기란다. 깊은 산 속이면서도 뒷동산처럼 친근한 산세를 빠져나오니 들과 밭이 고랑을 만들어서 여원재로 안내한다.
3) 여원재 – 수정봉 – 노치재 (14:55~17:40)
이성계장군의 업적과 동학농민혁명의 한이 서린 여원재에서 한 민족의 서글픈 역사들이 안타깝다. 침략과 수난의 시대를 떨쳐내고 시원시원하게 역사를 써 내려갈 수는 없었을까? 지금도 한 솥밥을 먹으며 서로 못 잡아먹어서 난리인 현실. 갈등과 이간질로 편을 가르면서 최고의 군자인양 웃음을 머금는 정치인들의 사악함. 그리고 그에 놀아나는 백성들. 그래도 우리는 한 민족이기에 하나로 뭉치는 희망을 찾고자 새싹이 피어나는 봄에 함께 웃는다.
무너지는 등산로를 정비하고자 나무계단을 만들어 놓아도 흙은 무너져서 사방으로 흩어진다. 백두대간의 흩어짐을 소나무 향기와 대죽으로 가두며 고도를 높여가니 저 멀리 남원이 낮은 자세로 임한다.
소나무와 어우러진 바위절경에 피로를 풀면서 갓바리재로 내려선다.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만나는 재를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오고갔을 것이다. 고장과 고장을 잇는 재에 얽힌 사연들도 많으리라. 재의 방향에 따라서 달라지는 고장의 풍습과 문화들... 어쩌면 그 재들이 또 다른 문화를 만드는 교두보였으리라. 문화의 흐름 대한 흔적을 상기하며 나아가니 헬기장이다. 헬기장에서 쌓아올린 돌계단에 드린 정성이 있기에 편히 길을 갈 있음을 감사드리며 오르니 수정봉이다.
수정봉에서 수정을 찾아보니 수정은 이마를 타고 흐르면서 빛을 발산한다. 수정을 찾을 것이 아니라 수정을 만들며 백두대간을 가자구나. 누구나 보석을 품고 있어도 그 보석을 꺼내어 갈고 닦지 않으니 병들고 아프다. 보석을 캐내어 찬란한 빛을 발산하며 자연으로 빨려든다.
바위들의 흩어짐과 모임, 바위들의 응집과 나눔이 일어나는 사이를 요리저리 빠져나오며 하산을 재촉한다. 소나무 숲의 그윽한 향기에 노치마을 뒷동산에 이르니 소나무 다섯 그루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윽한 자태에 절로 몸이 숙연해진다. 지리산 정령치에서 바래봉으로 뻗어가는 늘씬한 능선을 마주하며 노치샘에서 여정을 정비한다. 마을에도 고목이 있는데, 노치마을에서 보호수로 지정하였다. 노치마을을 지나는 백두대간을 따라서 좌는 경상도 낙동강으로 우는 전라도 섬진강으로 비방울이 흘러간단다.
4) 날머리에서
남원에서 한정식으로 고장의 맛을 볼 수 있다니. 그 옛날 남원 골의 사또에게 대령한 진수성찬을 떠올리며 하루를 마감한다.
4. 문화유적과 전설
1) 여원재(여원재, 470m)
전북 남원시 운봉읍과 이백면의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의 고개로서, 산줄기는 고남산과 수정봉을 잇고, 물줄기는 낙동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이다.
고려말(1380. 우왕 6년) 이성계가 황산전투에 임할 때 어느 노파가 꿈에 나타나 고남산 산신단에 올라 3일간 기도하고 출전하라고 알려 주어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한다. 이성계는 꿈속의 노파가 고갯마루에서 주막을 운영하다가 왜구의 괴롭힘으로 자결한 주모였다고 믿고 노파를 위로하기 위하여 사당을 짓고 ‘여원(女院)이라 불렀는데 그때부터 이 고개 이름이 여원재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여원재의 서쪽 약 200m 지점에는 황산대첩 승리에 대한 보은의 뜻으로 만들어진 마애불상(전북유형문화재 제162호)이 있다. <서부지방산림청>
2) 동학농민혁명유적지 백두대간
1891년 갑오년 당시 남원의 서부 평야지대는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이 장악하고 있었고 동부 고원지대는 박봉양이 민보군을 조직하여 수성군과 함께 이 능선 백두대간을 경계로 대치하고 있었다. (음) 11월 중순 남원의 대점주 김홍기를 비롯한 유복남, 남응삼 등의 전라북도 농민군은 영남지방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방아치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으나 영남지방의 지원을 받은 민보군과 수성군에 의해 수 많은 사상자를 내고 좌절되었다.
갑오년 당시 이 능선을 경계로 겨루었던 농민군이나 민보·수성군 모두가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분들이기에 그 분들을 추모하면서 그 정신을 계승하고 영원한 평화와 상생을 다짐하고자 이곳 백두대간에 표석을 세운다. <남원시>
3) 수정봉(804.7)
수정봉은 운봉읍 행정리와 이백면 양가리 경게에 있는 수려한 산으로 산 중턱에 수정이 생산되던 암벽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기암절벽이 장관을 이루고 섬진강유역과 낙동강 유역의 분수계가 되며, 이백에서는 650m의 높은 산이 운봉읍 주촌리 서는 250m의 낮은 산이 된다. 입망치를 사이로 양지산성 남쪽에 위치한 수정봉은 운봉읍 주촌리와 이백면 과립리를 경계로 두 개의 산봉우리를 포함하여 성의 평면 형태는 표주박 형태를 이룬다. 확인된 성의 길이는 150m 정도 된다. 성의 부대시설은 망대와 우물로 추정되는 웅덩이가 있었으면 망대는 성의 중앙부와 서쪽에 원형의 석축형태로 남았고 동쪽 산봉우리의 남쪽 경사면에 위치한 우물지는 원형의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석재를 이용하여 우물 시설을 마련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판>
4) 노치(蘆峙)마을
조선조 초에 경주 정씨가 터를 잡고 이어 경주 이씨가 들어와 형성되었다는 이 마을은 해발 550m의 고랭지로서 본래 이름은 갈재이다. 마을 앞 지리산의 관문인 고리봉과 만복대에 억새가 많이 있어 갈재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노치로 쓴다. 한국전쟁 때는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으로 완전히 불타버린 아픔이 있는 이 마을은 전국에서 백두대간 능선이 유일하게 통과한다. 백두대간이 통과하는 동쪽은 운봉읍에, 서쪽은 주천면에 속해 한마을에 두 개의 행정구역이 존재한다.
마을 뒷산에는 삼국시대 때 축성된 노치산성이 있다. 이 마을은 당시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서 중요한 방어지역이었으며, 아영면 아막성에서 정령치 고리봉에 있는 산성까지를 연결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지금은 백두대간을 찾는 사람들의 지친 발걸음을 거두어 주는 따뜻함이 있는 곳이다. <노치마을 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