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평양에서 목재상에 종사하고 있을 무렵, 이재명(李在明)의 을사오적(乙巳五賊) 처단계획에 적극 동조하여 동지를 규합하는데 앞장섰다.
1909년 11월 하순, 이재명·김정익(金貞益) 등 8명의 동지와 함께 암살대상을 이완용과 이용구로 우선 압축하여 그에 따른 준비를 논의하였으며 이어 1909년 12월 6일밤, 평양(平壤) 박태은(朴泰殷)의 집에서 동지들과 다시 모여 세부계획을 논의하여 이재명·이동수(李東秀)·김병록(金丙錄)은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을 처단하고, 김정익·조창호(趙昌鎬)는 일진회의 이용구(李容九)를 처단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오복원(吳復元)·박태은·이응삼(李應三) 등은 거사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며, 조창호와 그는 권총과 단도 등을 구입, 서울로 운반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1909년 12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이재명은 명동성당을 나서는 이완용과 그 차부를 자살(刺殺)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그와 이재명 등 동지들은 일경에 피체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