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안내
위치 북위 37°29′, 동경 130°54′
면적 72.56㎢
크기 동서길이 10km, 남북길이 9.5km, 해안선 길이 56.5km
인구 1만 426명(2000)
경상북도 울릉군(鬱陵郡)의 중심을 이루는 섬. 면적 73㎢. 인구 1만 426(2000). 포항에서217㎞, 독도(獨島)에서 92㎞ 떨어져 있다. 신생대의 화산작용으로 형성된 이중의 종상화산으로 조면암·현무암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면적 73㎢. 인구 1만 721(1999). 포항에서217㎞, 독도(獨島)에서 92㎞ 떨어져 있다. 신생대의 화산작용으로 형성된 이중의 종상화산으로 조면암·현무암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형은 섬의 중앙부에 솟은 성인봉을 중심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나 해안은 90m 이상의 절벽으로 되어 있어 항구의 발달이 어려워 교통이 불편하다. 기후는 온화한 해양성기후이며, 연평균기온 12℃, 1월평균기온 0.6℃, 8월평균기온 23.9℃이다. 연강수량 1485㎜이며,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 울릉도는 512년(지증왕 13) 신라의 이사부(異斯夫)가 독립국인 우산국(于山國)을 정복한 뒤 무릉도(武陵島)·가지도(可支島) 등으로 불리다가, 1915년 울릉도로 개칭되어 경상북도에 편입되었다. 식생은 향나무·박달나무가 대표적이다. 주민은 어업과 농업을 겸하며, 축우·양잠·약초재배도 이루어진다. 주요 농산물은 감자·옥수수 등이며, 근해에서 오징어·꽁치 등이 잡힌다. 교육기관은 초등학교 8개교, 중학교 4개교, 고등학교 1개교가 있다. 포항간 정기여객선이 매일 운행된다.
[역사]
청동기시대(기원전 1000~300년) 또는 철기시대 전기 (300년~1년)에 울릉도에 최초로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함
지석묘, 무문토기, 갈돌, 갈판(현포, 남서, 저동리) 「삼국지 위지동이전 옥저조」의 고구려 동천왕 20년(246년)에 관한 기록에서 언급된 동해안의 섬이 울릉도라는 견해가 있음
512년 지증왕 13년 신라장군 이사부에 의한 우산국 정벌
(울릉도가 최초로 문헌에 등장)
930년 고려 태조 13년 조공을 바친 우릉도(芋陵島)주민에게 작위를 하사함
1018년 현종 9년 여진족의 침입을 받고 농업을 폐하게 되어 이원구를 보내어 농기구를 하사함
1032년 덕종 원년 우릉성주가 아들을 보내어 조공함
1157년 의종 11년 우릉도 주민을 이주시킬 계획으로 명주도 감창사 김유립을 보내 조사케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함
1379년 우왕 15년 왜구가 무릉도(武陵島) 주민들을 본토로 귀환케 함
1417년 태종 17년 김인우를 안무사로 파견하여 주민들을 귀환시킴
1614년 광해군 6년 대마도주에게 울릉도(鬱陵島)에 왜인들의 왕래를 금지하는 금약을 준수하라는
서계를 보냄
1693년 숙종19년 울릉도에서 안용복 일행과 일본 어부들의 충돌로 조선과 일본사이 외교분쟁 발생
(안용복 1차 도일)
1694년 숙종 20년 삼척첨사 장한상 울릉도 수토
1696년 숙종 22년 안용복 2차 도일 일본 백기주(伯耆州) 태수와 담판, 울릉도가 조선영토임을 인정
(일본인의 출어.벌채금지서계 조선에 전달)
1881년 고종 18년 이규원 검찰사 임명 울릉도를 순찰함. (공도정책 포기)
1882년 고종 19년 울릉도 개척령 공포, 주민이주 장려, 전석규 도장에 임명
1895년 고종 32년 삼척영장 겸임 도장제에서 전임도장을 임명하고 도장을 도감으로 개칭
1900년 광무 4년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개칭하면서 강원도에 편입하고 행정구역을 남면과 북면으로
나눔(도감->군수)
1906년 광무 10년 서면을 신설
1907년 융희 원년 울도군을 울릉군으로 개칭, 경상남도에 편입.
(1914년 경상남도 -> 경상북도 이속)
[전설과 풍습]
개척기실정
울릉도 개척 100년이 넘었다.그때의 이야기를 자세히 아는 사람도 거의없다.다만 전해 오는 이야기로 남았을 뿐이다.
개척당시에도 본토와 왕래는 있었다.주로 쌀을 가져오고 고기를 실어 나르는 일이었다.
배는 돛단배이므로 날싸가 순조로우면 왕복 5일이 걸리지만 파도가 심하면 석달을 잡아야 했다.
그 때 닻줄은 40발이 되었고 돛과 노를 사용했는데 주로 노래를 주고 받으며 일을 했다고 한다.
항해에는 규율이 매우 엄하여서 몸을 다쳐도 아프다는 소리를 못했으며 병이 났다는 소리를 하면 옷을 벗기고 바다에 쳐 넣었다고 한다.
항해가 여러날 걸리므로 어른들은 배안에 술을 빚어 넣어서 먹기도하고 아이들은 돛을 짜기도 하고 신을 삼기도 했다 한다.
배에서 주고 받는 의사표시는 모두 노래로 하였다.
햇솔나무(주목)
큰 나무를 한 그루만 베면 기둥. 서까래. 마루. 문 할것없이 만들수 있었다고 하는 데 지금은 주로 정원수로 알고 귀하게 여기는 햇솔나무(주목)이라 한다.
나무를 벤 그루터기에 7 ~8명이 둘러 앉아 식사를 할수 있었다고 한다.
나무 하나를 베어서 배하나 만들고 나무의 속을 파내고 옥수수를 저장하는 두지(곡식저장고)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후박나무
몇아름씩 되는 후박나무가 많이 있었으며 독도에는 이나무가 섬 가득히 있었지만 해방전후해서 이나무를 모두 베고 지금은 작은 나무들이 있는데 이 나무 껍질을 벗겨서 한약재로 활용했다고 한다.
전복
바닷가에는 온갖 나무들이 바닷물에 잠겨 있었는데 이 나무가지나 줄기에 손바닥만한 전복들이 머루송이 달리듯이 붙어 있었다 한다.
깍새
깍새는 마치 갈매기 같이 바닷물에도 놀고 산에서도 논다는데 알은 주로 산에서 낳는다. 개척당시에는 식량이 부족하여 이깍새를 잡아 먹었다는데, 어두운 밤이 되어 장작을 해다가 불을 놓으면 이 깍새들이 불에 날아 들었다. 그러면 사람들이 몽둥이로 이새를 잡아서 나무에 꿰어서 불에 구웠다 많이 잡으면 소금을 쳐서 간해 두었다가 양식으로했다
갈매기알
바닷가에나 바다 가운데 바위에 갈매기가 알을 낳았는데 한번에 수백개씩 주워서는 양식으로 삼을 정도로 많았다.
옥수수와 쥐
처음 이섬에 와서 옥수수를 심었는데 퍽 잘되었다. 그런데 막상 수확기가 되니 쥐들이 몰려와서 한톨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 버렸다. 그래서 겨울에는 깍새를 잡아먹다가 봄이 되면 명이로 명을 이었다한다.
오징어
개척당시 뿐만 아니라 해방전에만 하여도 손으로 잡을수 있을 만큼 육지 가까이에도 많았다. 이 오징어가 육지 가까이 오면 바다물빛이 희끄므레 할 정도 였다고 한다 .
산염소
성인봉. 송곳산. 형제봉일대에는 산염소가 여러마리 있었다. 개척당시에는 본토에서 가져다가 기르던 것이 산으로 가서 번식한한 것일거라고 하는데 어찌나 날래고 산을 잘 타던지 수십명이 둘러 싸고 잡으려해도 잘 잡지 못했다. 이 산염소는 영양이 좋고 약이 된다고 하여 매우 비쌋는데 주로 총으 로 잡았다. 지금도 산중에 여러마리 있다한다.
성하신당
조선 태종시(1417년) 삼척인 김인우를 울릉도 안무사(按撫使)로 명하여 울릉도 거주민의 쇄환(刷還)을 위하여 병선 2척을 이끌고 이곳 태하동에 도착하여 이곳을 유숙지로 하고 도내 전선(全船)에 대한 순찰을 마치고 내일이면 출발 귀임(歸任)할 작정으로 취침 중 이상하리만치 기이한 꿈을 꾸었던 것이다.
해신이 현몽하여 일행 중 남녀 2명(童男童女)을 이 섬에 남겨두고 가라는 계시가 있어서 안무사는 의아스럽게 생각했으나 별로 그 일에 대해서 관심이나 구애됨이 없이 다음날 출항할 것을 결심하고 날이 밝아짐을 기다리는 중 예기하지 않던 풍파가 돌발하여 출발을 중지하고 풍파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바람은 멎을 기세 없이 점점 심해 가기만 하였다.
수일간은 이렇게 기다리던 중, 안무사는 문득 전일의 현몽이 생각나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일행 전원을 모아놓고, 동남동녀 2명에게. 일행이 유숙하던 곳(가옥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니 유숙하던 장소로 추측됨)에 필묵을 잊고 왔으니 찾아올 것을 명하였다.
아무 것도 모르는 둘은 발길을 재촉하여 총총히 밀림사이로 사라지자 그렇게 심하던 풍랑은 거짓말처럼 멎어지고 항해에 적당한 바람만이 불어오는 것이었다. 안무사는 결국 일행을 재촉하여 급히 출항할 것을 명하니 배는 순풍을 받고 일시에 포구를 멀리하게 되었다.
이 무렵 속은 줄도 모르는 어린 남녀는 아무리 찾아도 필묵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냥 해변으로 돌아와 보니 배는 벌써 수백리 해상에서 쾌조로운 순풍을 타고 육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이 두 동남동녀의 심경은 오죽했으랴? 땅을 구르며 고함을 쳤으나 배는 어느 듯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원망스러워 울부짖던 두 어린 남녀는 이제는 지쳐 어쩔 수 없이 본래 유숙하던 자리로 돌아왔으나, 날이 감에 따라 공포와 추위, 그리고 굶주림에 시달리다 결국은 죽어갔을 것이다.
한편 안무사는 무사히 본국으로 귀착하여 울릉도 현황을 복명하였으나 당시 연민의 정과 죄의식이 마음 한구석에서 떠날 날이 없었다.
그러다 수년 후 재차 울릉도 안무(按撫)의 명을 받고 입도(入島)하여 혹시나 하는 기대에 태하동에 착륙하여 수색을 하였던 바 전년에 유숙하던 그 자리에 두 동남동녀가 꼭 껴안은 형상으로 백골화(白骨化)되어 있었던 것이다.
안무사는 이 정황을 보고 회한에 찼으나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
그래서 혼령을 달래고 애도하기 위해 그 곳에다 간단한 신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고 귀임하였다.
그 후 매년 음력 2월 28일에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며 농작이나 어업의 풍년도 소원하고 위험한 해상작업의 안전도 빌었다. 그리고 신조 선박의 진수(새로 만든 배을 처음으로 물에 띄움)가 있으면 꼭 태하의 성하신당(성황당)에 제사하여 해상작업의 무사안전과 사업의 번창을 기원한다.
촛대바위
지금의 저동마을에 어느 노인이 살고 있었다. 아내는 일찍이 죽고 딸과 둘이 살았습니다.
조그마한 배 한 척과 손바닥만한 밭이 재산의 전부였습니다.
겨울 양식이라고는 옥수수뿐이었는데 옥수수가 흉작이 되었으니 하는 수 없이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아야만 했습니다.눈이 오는 날이라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작은 배로 바람 부는 날 바다에 나간다는 것은 참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눈이 온다고 쉬고, 바람이 분다고 쉴 수는 없었습니다.작은 배로 바람 부는 날 바다에 나간다는 것은 참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눈이 온다고 쉬고, 바람이 분다고 쉴 수는 없었습니다.
눈이 뿌리고 바람이 이는데도 배를 타고 고기잡이에 나가야만 하는 아버지의 얼굴에도 수심이 떠올랐습니다.
배가 나갈 때는 파도가 심하지 않더니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기울 때쯤에는 파도가 세고 눈발도 거세어졌습니다.
아버지를 바다에 보낸 딸은 걱정이 되어 "굶더라도 오늘은 쉬셔야 했는데... 옥수수 농사나 잘 되었던들..." "바다가 원수다" 하며 한숨을 쉬면서 기다렸으나 밤이 되어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바다에 잃고 딸은 먹는 것도 잊고 바다를 바라보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찾아 와서는"산사람이나 살아야지" 하고 마음을 달랬으나 막무가내였습니다.
몇 일을 굶은 그 노인의 딸은 효성이 지극해서인지 몇 일 뒤에는 아버지가 돌아온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오시니 바닷가에 나가보자 싶어서 바닷가로 나갔습니다.
파도와 파도 사이에 돛을 단 배가 떠오고 있었습니다.
"배가 들어온다!" 그 노인의 딸은 기뻐서 외쳤습니다.
`저 만큼에 보이니까 얼마 뒤에는 뭍에 닿겠지'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배는 오는 것 같기는 하나 뭍에는 닿을 줄을 몰랐습니다.
자꾸 보고 부르노라니 배에서 "곧 간다."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딸은 기다리고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중을 나가야지' 싶어서 배가 있는 쪽으로 갔습니다.파도를 헤치고 갔습니다.
때는 겨울이요 눈발이 시름시름 뿌리는데도 파도를 헤치며 배가 있는 쪽으로 갔습니다.
효성도 바다를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더 이상 갈 수가 없었습니다.
지치고 지쳐서 우뚝 서서 기다리다가 마침내 돌이 되어 버렸습니다.
`촛대바위' 또는 `효녀바위' 라고 부르는 바위가 곧 이 노인의 딸인 효녀의 화석이라고 합니다.
돌아온다던 아버지는 실은 헛것이 보였던 것이었습니다.
이 촛대바위는 현재 저동 어업전진기지 방파제의 한 부분으로 우뚝 솟아 있습니다.
도동의 약수터
도동에는 맛이 이상하고 약이 되는 약수가 있다.그 맛은 사이다 맛이고 쇠냄새가 난다.
자주 마시면 위장병을 낫게 하는 물이라고도 하며 나병환자가 몇 달 동안 마시고 목욕하여 완치되었다고도 한다.
옛날 옛적 일본과 싸우던 장군이 돌아가신 뒤에 그 장군이 입고 싸우던 갑옷이 이 근처에 묻혔는데 그 갑옷은 쇠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갑옷이 삭아서 흘러내리는 쇳물이 약수가 되었다고도 한다.
성인봉
비가 많이 오기로 유명한 울릉도에 석달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물이 귀해져서 야단이었습니다.
"이상도 하다.""비가 너무 와서 애타던 곳인데." "무슨 큰 난리가 나려나 보다."
"울릉도도 이제 못 살겠다."
하는 소리가 나돌고 민심이 뒤숭숭해졌습니다.이 섬의 노인들은 큰 걱정을 하였습니다.
무슨 일로 계속 가무는지 점을 치기로 했습니다.
"성인봉 꼭대기를 파 보라" 고 점장이가 말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괭이 삽 곡괭이 등을 가지고 모여들었습니다.
"무엇을 뜻한 말인가?" " 그 점장이 말이 용하다는데." "보면 알겠지."
"큰 구렁이가 나올지도 몰라.""아니, 무슨 글이 나올지도 몰라."
하며 모여들었땅을 파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서로 먼저 삽질하기를 싫어했습니다.
"나는 팔을 다쳐서..." "나는 설사를 해서 기운이 없네.""나이 많은 분이 먼저 파야지."
"아니 島師(도사격)가 먼저 파야 해."
결국 도사(島師)가 먼저 삽질을 했습니다. 한길쯤 파들어가니 김이 물씬 솟았습니다.
"이상하다." "이상하지." "이상해." 하면서 호기심에 자꾸 더 깊이 파들어갔습니다.
얼마후 묻은지 오래되지 않은 시체가 나왔습니다.
"에그머니" "이것 때문에 비가 안왔구나."
하며 시체를 개울로 굴려 버렸습니다.
그러자 비가 내리더니 소나기로 변하여 쏟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온 섬사람들은 그 점장이가 용하다고 걸핏하면 그 점장이를 찾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울릉도에 조금 이상이 생기거나 가뭄이 계속되면 섬사람들은 이 성인봉 꼭대기를 파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대개 관이나 시체가 나온다고 합니다.
이 성인봉이 명산이고 이 꼭대기에 조상의 묘를 쓰면 자손이 잘된다는 풍수설에 의해서 그런 일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성인봉의 장군터
성인봉에는 장군의 발자국이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한쪽 발자국뿐이다.
그것은 왼쪽 발자국이며 한 발자국인 오른쪽 발자국은 육지의 어느 곳에 있다고 하니 그 장군의 한 발자국의 크기는 상상하기에도 어마어마한 것이다.
하루는 육지에서 사자(使者)가 왔다.
성인봉에서는 큰 장군이 날듯하며 그 장군이 나게 되면 육지가 위협받을 것이니, 미리 그 장군이 태어날 만한 땅의 지혈을 끊는다는 것이다.
사자들은 성인봉에 올라갔다. 지리풍수설을 잘 아는 사람이 "여기다" 하고 가리키자,
사신들은 거기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한길쯤 파니까 무엇이 불끈 솟았다. 핏줄기였다.
장군이 태어날 혈맥을 끊은 것이다.
피는 흐르고 흘러서 바다에까지 흘러 내렸다.
이때부터 울릉도에는 큰 장군이 나지 않게 되고 말았다.
이 혈맥을 끊은자들은 일본인들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동백꽃의 사연
어느 마을에 금슬(琴瑟)이 좋은 한쌍의 부부가 살고 있었다.그런데 남편이 육지에 갈 일이 생겨서 육지로 가게 되었다.그리하여 하루 이틀 날짜가 지나가서 남편이 돌아온다는 날이 다가왔다.
그러나 남편이 돌아오겠다는 날이 지나가고 하루 이틀 날이 거듭되어도 배는 오지 않았다. 하루 이틀의 기다림이 쌓여 여러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남편은 돌아올 줄 몰랐다.
아내의 간절한 기다림은 어느 듯 가슴에 병이 되어 응어리져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내는 기다림에 지쳤는지 병져 눕고 말았다.
이웃 사람들의 정성어린 간병에도 불구하고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숨을 거두면서 마지막 남긴 말은
"내가 죽거든 남편이 돌아오는 배가 보이는 곳에 묻어 주세요."
하고는 고요히 눈을 감았다.
마을 사람들도 너무 정장(情狀)이 가여워 죽은 여인의 넋이라도 위로해 주려고 바닷가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
장사를 치르고 돌아오니 그 집 앞뜰에 있는 후박나무에 수없이 많은 흑비둘기 떼가 와서 우는데
" 아이 답답 열흘만 더 기다리지 넉넉잡아 온다.온다.남편이 온다.죽은 사람 불쌍해라. 원수야, 원수야, 열흘만 더 일찍 오지넉넉 잡아서.
"하는 것처럼 울어대어서 마을 사람들은 기이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날 저녁에 육지에서 남편이 배를 타고 돌아왔다.
남편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아내의 죽음을 알고 아내가 묻힌 묘지로 달려가 목놓아 울었다.
" 왜 죽었나. 일년도 못 참더냐. 열흘만 참았으면 백년회로 하는 것을. 원수로다.저 한바다 원수로다. 몸이야 갈지라도 넋이야 두고 가소. 불쌍하고 가련하지."
하고 아내의 무덤 앞에서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이 남편은 아내 생각에 매일 같이 아내의 무덤에 와서 한 번씩 서럽게 울고 돌아가곤 했는데 하루는 돌아서려니 아내 무덤 위에 보지 못하던 조그마한 나무가 나있고 그 나무가지에는 빨간 꽃이 피어 있었다.
이 꽃은 눈이 하얗게 내린 겨울에도 얼지 않고 피어 있었다. 바로 이 꽃이 지금 울릉도 전체에 분포되어 있는 동백꽃이라고 한다.
호박엿
이 울릉도를 개척할 당시의 일이다.
처음에는 태하의 사달령 고개를 중심으로 하여, 모두 열대여섯 가구가 여기 저기에 산재해 살고 있었다.
그 중 한 집에 과년한 처녀가 있었는데 이른봄이 되어 육지에서 가져온 호박씨를 울타리 밑에 심었다.
이 호박은 나날이 자라나서 호박이 열매를 맺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호박이 익기도 전에 그 처녀는 혼처가 생겨 그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처녀가 시집을 가고 나서 호박넝쿨에는 큼직큼직한 호박이 탐스럽게 익어갔다.
호박은 이 집에서 따먹어도 따먹어도 자꾸만 열렸다.
그리하여 가을에는 누렇게 익은 호박을 따다가 방안 가득히 채웠다.
그리하여 겨울이 닥쳐와 눈이 내리고 일없는 날들을 보내게 된 어느 하루는 그 호박으로 죽을 쑤었는데 그 맛이 그야말로 엿과 같이 달았다.
그것은 호박맛이 아니고 엿맛이었다.
그래서 해마다 호박을 많이 재배하게 되었고 겨울에는 그 엿맛과도 같은 호박죽을 쑤어 먹게 되었다.
이로써 "호박엿"이란 말이 생겨나게 되었고 호박을 많이 생산하게 되었다.
명이
울릉도에서 아주 이른봄에 눈속에서 자라는 나물. 바로 "명이"라고 부르는 맛 좋은 산채(山菜)이다.
옛날 개척 당시에는 식량이 모자라 긴 겨울을 지나고 나면 식량이 모두 바닥이 나서 굶주림에 시달리곤 했는데 눈이 녹기 시작하면서 모두가 산에 올라 눈을 헤치고 이 <명이>를 캐어다 삶아먹고 끼니를 이었다.
그래서 이 나물을 먹고 생명을 이었다고 해서 '명이'라고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 명이 -> 산마늘 )
사자바위/투구봉
서면 남양리에 자리하고 있는 이 사자암과 투구봉은 서기 500년전 울릉도를 우산국이라 부를 때, 우산국의 비화를 담고 있다.
우산국의 우해왕은 대마도에서 풍미녀를 데려와 왕후로 맞고부터는 나라일은 돌보지 않고 풍미녀의 환심사기에만 급급하였다.
또 별님이란 딸을 얻고부터는 도가 심해져 갔다.
왕후의 사치를 위해 백성과 신하의 생명까지도 돌보지 않고 신라까지 노략질을 뻗쳤다.
한편 신라백성들은 왕에게 우산국을 토벌해 달라고 호소했다.
신라왕은 강릉군주 이사부를 보냈고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으나 우산국 군선에 패하고 말았다.
이사부는 군사를 재훈련하고 계략을 세워 이듬해 다시 토벌의 길에 올랐다.
이사부가 먼저 항복을 권했지만, 우해왕은 한번 이긴터라 이를 업신여기고 사자(使者)마져 죽여 싸움을 부추겼다. 이에 신라군은 짜여진 전략대로 전투를 이끌었다.
군선의 뱃머리에 목사자부터 일제히 불을 뿜게하고 또 화살을 쏘개하며 군선을 몰게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짐승이 입에서 불을 뿜으며, 신라군사들이 큰소리로 창과 칼을 즉시 거두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 섬사람을 몰살시키겠다고 하자, 우해왕을 축출하고 신라의 속국으로 매년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우해왕이 투구를 벗고 이사부에게 항복했다.
결국 목각사자 때문에 싸움에 지고 만 우산국왕은 "내가 죽더라도 그 불사자로 하여금 영원히 우산국을 지키게 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신라 이사부는 우해왕의 소원을 덜어주기 위해 목각사자를 물에 띄웠고, 그 순간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쳐 목각사자와 우해왕이 던진 투구가 돌로 변해서 사자암과 투구봉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울릉팔경]
1.도동모범(暮帆) - 도동항 석양 오징어배 출어 모습
2.저동어화(魚火) - 저동야간 오징어잡이 불빛
3.장흥망월(望月) - 사동에 뜨는 달
4.남양야설(夜雪) - 겨울철 달밤 남양의 눈꽃
5.태하낙조(落照) - 태하의 저녁 해지는 모습
6.추산용수(湧水) - 추산에 솟는 물
7.나리금수(錦繡) - 나리동 비단단풍
8.알봉홍엽(紅葉) - 알봉의 붉은 단풍
[상세안내]
성인봉
산의 모양이 성스럽다 하여 성인봉이라 부른다.
연평균 300일 이상 안개에 쌓여 신비로움을 더하며 제단처럼 된 바위에는 장군 발자국이라고 전하는 족적이 있다.이 발자국은 왼발로 본토 어딘가에는 오른쪽 발자국이 있다고 한다.
해발 984m 성인봉은 형제봉, 미륵산, 나리령 등 크고 작은 산봉우리를 거느리며 섬피나무, 너도밤나무, 섬고로쇠나무 등의 희귀수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정상부근은 천연기념물 제 189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동항
포항과 묵호에서 3시간.
만남의 설레임과 이별의 아쉬움이 파도처럼 밀려드는 곳으로 왼쪽에는 개척민들의 망향가를 대신 불러주던 망향봉, 오른쪽에는 2,500년의 울릉도 지킴이 향나무가 서있는 행남봉이 오가는 이를 맞는다.
봉래폭포
저동에서 2Km에 위치한 3단폭포로, 상단부분이 높이 25m이다.
원시림 사이로 떨어지는 폭포라 보는 이들은 자리를 떠날 줄 모른다.
1일 수량은 약 2,500톤정도.울릉읍 주민들의 수원이다.
봉래폭포 내에는 풍혈, 투막집, 삼림욕 장 등이 있다.
독도 전망대 케이블카
독도 박물관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3~5분정도 가면 독도전망대에 도착한다.
도동이 한눈에 보이는 삭도전망대와 해상전망대로 이뤄져있다.
낮에도 그 모습이 좋지만 번화한 도동과 오징어 불배의 야경도 더할나위없이 아름답다.
전망대에서는 울릉팔경의 하나인 오징어잡이배 어화(漁火)를 감상하며 날씨가 맑은 날은 독도를 볼 수 있다.
독도 전망대 케이블카 이용료 왕복 4,500원
약수공원
공원내에는 약수터, 향토사료관, 독도박물관, 독도전망대케이블카, 안용복장군충혼비, 청마 유치환의 '울릉도 시비' 등이 있는 역사체험장이다
약수공원 관리사무소 : (054)790-6421
가는길 : 도동여객선 터미널에서 도보로 15분 소요
토류탄산철천으로 철분, 마그네슘, 염소, 탄산이온등의 성분을 함유 빈혈, 생리장애, 류머티스성 질환, 습진 등 피부병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전설 : 옛날 옛적 왜인과 싸우던 장군이 돌아가신 뒤에 장군의 갑옷을 이 근처에 묻었는데 이 갑옷이 삭아서 흘러내리는 쇳물이 약수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물로 밥을 지으면 푸른색을 띤다.
촛대암
옛날 지금의 저동마을에 한 노인이 아내와 일찍 사별하고 딸과 함게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조업을 나간 노인의 배가 심한 풍랑을 맞아 돌아오지 않았다. 상심한 딸은 바다를 바라보며 눈물로 며칠을 보낸 후 아버지가 돌아온다는 느낌이 들어 바닷가에 가보니 돛단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딸은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어서 배 있는 쪽으로 파도를 헤치고 다가갔다. 그러나 파도를 이길 수 없어 지쳤고, 그 자리에 우뚝 서 바위가 되었다.
그 후 이 바위를 촛대바위 또는 효녀바위라고 부른다.
일출이 뛰어나게 아름다운 곳으로, 부근은 낚시터로 개발되어 있다.
죽도
울릉도의 부속섬 중 가장 큰 섬으로 대나무가 많이 자생한다. 저동항에서 동북방으로 4Km, 도동항에서 7Km, 섬의 면적 62,880평, 높이 106m, 현재 1가구 3명이 거주하고 있다.
행남
도동부두 좌해안을 따라 개설된 산책로가 절경이다. 자연동굴과 골짜기를 연결하는 교량 사이로 펼쳐지는 해안비경을 감상할 수 있다. 해안산책로는 행남이라는 마을과 이어진다. 이 마을 어귀에 큰 살구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고 해서 살구남으로도 전해오고 있다. 마을에서 400m 정도의 거리에 있는 행남등대는 먼 뱃길을 밝혀준다.
해송 사이로 이어지는 등대오솔길은 가을철에 노란 털머위 꽃이 군락을 이루어 장관을 연출한다. 등대에서는 저동항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해안산책로와 행남등대 코스는 왕복 1시간 30분 정도 소요
거북바위
행정구역상 서면 남양 3리, 지형이 양쪽으로 산이 높이 솟아골짜기가 깊고 좁아 통처럼 생겼다하여 桶邱尾라 부르기도 하며, 마을앞 거북모양의 바위가 마을을 향해 기어가는듯한 모양을 하고 있어 거북 이가 들어가는 통과 같다 하여 桶龜尾라 부른다.
포구앞 바위가 거북이를 닮았다고 하여 거북바위라 부르며, 낚시터로 유명하다.
사자바위
신라왕은 강릉군주 이사부를 보내어 우산국 토벌길에 올랐다. 신라군은 군선의 뱃머리에 목사자를 싣고 몰살시키겠다고 하자 우산국의 우해왕은 투구를 벗고 신라의 이사부에게 항복했다. 우산국은 멸망했지만 전설은 남아, 그때의 목사자가 사자바위로, 우해왕이 벗어 놓은 투구가 지금의 투구봉이 되었다 한다. 일몰이 아름다운 곳이다.
투구봉
우산국 우해왕이 신라의 이사부에게 항복을 결심하고 벗어 던진 투구가 바위가 되었다고 전해온다.
비파산
남양리 마을 뒤편에 위치.
암석의 주상저리현상으로 산 한쪽면이 국수를 말리는 모양 또는 비파모양을 하고 있다.
옛날 우산국의 왕녀 풍미녀가 딸 하나를 남기고 죽자 우해왕은 사랑하는 왕비의 죽음을 슬퍼하여 뒷산에 병풍을 치고 대마도에서 데려온 열두 시녀에게 매일 비파를 뜯게 하고 백일제사를 지내서 비파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통구미
서면 남양 3리.
거북이가 마을 향해 기어가는 듯한 모양을 보고 거북이가 들어가는 통과 같다 하여 통구미라 부른다.
통구미향나무자생지는 천연기념물 제 48호로 지정되어 있다.
포구 앞 바위는 거북이를 닮았다고 하여 거북바위라고 부른다.
남양몽돌해수욕장
울릉도 특유의 몽돌 해수욕장으로 가족과 함께 지내기에 적당한 장소이다.
특히 검은 조약돌 위에 달빛이 부서지고 하얀 파도가 속삭이듯 밀려오는 여름밤의 풍경은 찾는 이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해변연장 1Km, 수심 1~3m
남서리고분
경상북도 기념물 72호 지정.
남양 버스정류장에서 1.5Km 지점에 위치.
인근에 찬물내기라고 하는 물맛 좋은 샘이 있어 쉬어 가기에 제격이다.이 일대는 울릉도에서 고분이 가장 많이 밀집. 분포하고 있는 유적지이다.
무덤은 지형의 제약을 받아 산록경사면에 괴석으로 위가 편평하게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시신을 안치하는 돌덧널을 만든 후 돌로 봉분을 만든 석총이다. 개석으로 큰 장방형의 화강암을 사용했는데 돌덧널 입구 전면이 수직벽으로 되어 있는 형태는 삼국시대 울릉도 고분에서만 볼 수 있다.
성하신당
조선 태종 때 삼척인 김인우는 울릉도 안무사를 명받아 울릉도 거주민의 쇄한을 위하여 병선 2척을 이끌고 이곳 태하동에 도착했다. 관내 전역에 대한 순찰을 마치고 출항을 위해 잠을 자던 중 해신이 현몽하여 일행 중 동남동녀 2명을 이 섬에 남겨두고 가라고 했다. 안무사는 일행 중 동남동녀 2명을 섬에 남겨두고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갔다.
몇 년 뒤 다시 울릉도 안무사의 명을 받고 태하동에 도착하여 수색을 했는데, 그때 유숙하였던 곳에서 동남동녀가 꼭 껴안은 형상으로 백골화되어 있었다. 안무사는 동남동녀의 고혼을 달래고, 애도하기 위해 그곳에다 간단한 사당을 지어 제사지내고 돌아갔다.
그 후 매년 음력 2월 28일에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며 풍어, 풍년을 기원하고 선박의 진수가 있으면
반드시 여기에서 제사를 올려 해상작업의 안전과 사업의 번창을 기원한다.
태하황토굴
황토굴에 많은 양의 황토가 있어 황토구미라하고 조선시대에는 이곳의 황토와 향나무가 섬 순찰 증거품이었다.
태하리 광서영 각석문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음각한 것으로 울릉도 개척 무렵 공이 많은 사람들의 공덕을 기리고자 1890년 4월 오위장을 지낸 손주영이 세웠다.
나리분지
면적 1.5 ~ 2.0㎢(2.0㎢ = 605,000평). 동서 약 1.5km 남북 약 2km 울릉 도 유일한 평지로 성인봉의 북쪽의 칼데라화구가 함몰하여 형성된 화구원으로 그안에 분출한 알봉(611m)과 알봉에서 흘러내린 용암에 의 해 다시 두 개의 화구원으로 분리되어 북동쪽에는 나리마을 남서쪽에 는 지금은 사람이 살지않는 알봉마을이 있다.
우산국때부터 사람이 살았으나 조선조에 이르러 공도정책으로 수백년 비워오다가 고종때 개척령에 따라 개척민들이 이곳에 왔는데 옛날부터 정주한 사람들이 섬말나리뿌리를 캐어먹고 연명하였다하여 나리골이라 부른다. 개척당시 거주민 93호에 500여명이 거주한 적이 있는 울릉도 제1의 집단부락이였다.
투막집
울릉도의 흙냄새, 나무냄새가 물씬 풍기는 향수 어린집. 개척민들의 전통 주거양식으로 육지에서는 이를 귀틀집, 또는 너와집으로 부른다. 투막집은 섬에서 많이 나는 솔송나무와 너무 밤나무를 우물정자 모양으로 쌇고, 틈은 흙으로 메워 자체온습도 조절이 가능하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것이 특징이다. 나리분지에 너와집 1곽, 투막집 4곽을 도지정 문화재로 보호하고 있다.
알봉
화산구로 생긴 나리분지의 서쪽에 위치하며 화산이 2차로 폭발하여 알모양으로 생긴 크고 작은 봉우리가 많이 생겼다. 이곳을 개척하여 많은사람이 살았는데 큰알봉. 작은 알봉이 있다
죽암
바닷가를 중심으로 골짜기에 동네를 이루고 있는데 이마을은 오죽. 장 죽. 왕죽등 대나무가 많은 동네라 하여 대바우라 부르고 한자로 竹岩. 죽암 막걸리가 유명함.
죽암(竹岩)딴바위라하여 북면 천부리 산 4-3번지, 임야 산림청소유 면 적 2,400평. 높이 105m이 있다.
죽암 앞바다는 진초록 바다가 투명하게 펼쳐져있고 주변 해변에서는 맑은물이 흘러내려 편의시설은 없으나 주민들과 관광객이 즐겨찾는 해변이기도 하다.
삼선암
삼선암은 멀리서는 2개로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3개로 되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바위의 빼어난 경치에 반한 세 선녀가 이곳에서 자주 목욕을 하고 하늘로 올라가곤 했다. 한번은 놀이에 열중하다가 돌아갈 시간을 놓쳐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산 세 선녀가 바위로 변했다는 전설이 있다. 나란히 붙은 두 개의 바위에는 풀과 나무가 자라고 있으나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끝이 가위처럼 벌어져 있는 가위바위라고 불리는 일선암에는 풀 한포기도 자라지 않는다. 삼선암 중 이 바위가 막내 선녀이며, 이 막내가 좀더 놀다 가자고 졸라대는 바람에 하늘로 올라가는 시간을 놓친 탓에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가장 많이 받아 풀도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울릉도 3대 절경 중 제 1경으로 꼽힌다.
관음도(깍새섬)
섬의 높이 106m, 면적은 21,600평으로 동백나무, 억새풀, 부지갱이, 쑥 등 각종식물이 자생.
섬 아래쪽에 2개의 동굴이 있다.
옛날 해적들 의 소굴이었다는 관음쌍굴은 높이 약 14m로 해적들이 이곳에 배를 숨기고 있다가 지나가는 선박을 약탈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개척당시 경주에서 입도한 월성 김씨라는 분이 고기를 잡다가 태풍을 만나 이 섬에 피해 올라와 추위와 굶주림에 떨다가 밤에 불을 피워 놓으니 깍새가 수없이 날아와서 잡아 구워먹었더니 맛이 좋았다고 하며, 옛날 깍새가 많았던 곳이었기에 깍새섬이라 함.
두 동굴의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배 위에서 받아먹으면 장수한다는 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송곳산
높이 430m. 성인봉의 한줄기 산봉우리가 송곳처럼 뽀족하게 생겼다고 하여 송곳산 인근 마을도 송곳산의 한자명인 송곳 錐 메山 자를 써서 추산 정상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큰 구멍이 있다.
공암(코끼리바위)
바위 모양이 코끼리가 코를 물속에 담그고 물을 마시는 모양을 하고 있다.
표면은 주상저리현상에 의해 장작을 패어 차곡차곡 쌓아놓은 듯한 형체로 코부분에 직경 10m의 구멍이 있어 소형선박이 드나들 수 있다.
추산
추산해변에는 해수욕장과 부근에 통나무민박집(791-7788)등 편의시설이 있다.
시설용량1,400KW. 해발고도270m에서 솟아나는 용출수를 이용한 추산 발전소도 이곳에 있다.
1966년 준공
현포고분
현포(玄圃),가문작지. 거문작지. 흑소지. 현소지 동쪽에 있는 촛대암의 그림자가 바다에 비치면 바닷물이 검게 보이는 데서 유래한다.
18세기에 제작된 해동지도(海東地圖)의 울릉도부분을 보면 이 지역에 석장 20여기와 탑이 있는 사찰터가 있다고 적혀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이곳은 촌락기지 7개소와 석물. 석탑등이 있었다고 하며 성지. 나선장. 선돌과 같은 유물. 유적이 많아 고대 우산국의 도읍 지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에 있는 현포리 고분은 경상북도 기념물 73호 지정되어 있고, 완만한 경사면에 40여기가 분포한다.
남서리 고분과 비슷한 형태로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타
[성인봉등산]
성인봉등산코스(8시간정도소요)
성인봉은 울릉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해발 984m이다.
울릉도산행의 매력은 원시림 사이로 가파른 듯 이어지는 산길과 길 옆으로 펼쳐진 섬 특산식물, 산정상에서 사방으로 다가오는 망망대해를 향해 호연지기를 기르는데 있다.
간편한 차림으로 산행의 즐거움을 맛볼수 있지만, 자만은 금물.
눈이 많이 쌓이는 겨울철 산행은 특히 주의가 필요하다.
연중 등산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성인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수평선이 절경이다
대원사코스(소요시간 : 6시간)
도동 → 대원사 → 팔각정 → 성인봉 → 신령수 → 나리분지 → 천부
KBS중계소 코스(소요시간 : 6시간)
도동 → KBS울릉중계소 → 팔각정 → 성인봉 → 신령수 → 나리분지 → 천부
안평전 코스(소요시간 : 10시간)
도동 → 사동(안평전) → 성인봉 → 신령수 → 나리분지 → 천부 → 석포 → 저동 → 도동
[행남산책]
도동부두 좌측해안을 따라 개설된 산책로가 절경이다.
자연동굴과 골짜기를 연결하는 교량사이로 펼쳐지는 해안비경을 감상할 수 있다.
해안산책로는 행남이라는 마을과 이어진다.
등대에서 저동항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해안산책로와 행남등대 코스는 왕복 1시간 30분정도 소요
[여행시 주의사항]
1.배편예약을 우선하여 실시해야 한다.
배의 좌석이 없으면 계획을 새워 놓고도 진행할수 없다.
다음 숙박등 나머지 예약을 한다.
2.울릉도 도동에서 필히 행남산책로를 가보기를 권한다.
도동의 좌측으로 진행. 우측의 해안로도 좋음.
3.독도는 지금 입도가 허용되어 자세한 내용은 문의후 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