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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신경림
3월(月) 1일(日)
골목마다 똥오줌이 질퍽이고
헌 판장이 너풀거리는 집집에
누더기가 걸려 깃발처럼 퍼덕일 때
조국은 우리를 증오했다 이 산읍에
삼월 초하루가 찾아 올 때.
실업한 젊은이들이 골목을 메우고
복덕방에서 이발소에서 소줏집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음모가 펼쳐질 때
조국은 우리를 버렸다 이 산읍에
또다시 삼월 일일이 올 때.
이 흙바람 속에 꽃이 피리라고
우리는 믿지 않는다 이 흙바람을
타고 봄이 오리라고 우리는
믿지 않는다 아아 이 흙바람 속의
조국의 소식을 우리는 믿지 않는다
계집은 모두 갈보가 되어 나가고
사내는 미쳐 대낮에 칼질을 해서
온 고을이 피로 더럽혀질 때
조국은 영원히 떠났다 이 산읍에
삼월 초하루도 가고 없을 때.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4월 19일, 시골에 와서 신경림
4월 19일, 시골에 와서
밤새워 문짝이 덜컹대고
골목을 축축한 바람이 쓸고 있다.
헐린 담장에 어수선한 두엄더미 위에
살구꽃이 피고 어지럽게
피어서 꺾이고 밟히고
그래도 다시 피는 4월.
나는 남한강 상류 외진 읍내에 와서
통금이 없는 빈 거리를 헤매이며
어느새 잊어버린
그날의 함성을 생각했다.
티끌처럼 쏠리며 살아온 나날.
돌처럼 뒹굴며 이어온 세월.
다시 그날의 종소리가 들리리라고
아무도 믿지 않는 밤은 어두웠다.
친구를 생각했다. 찬 돌에 이마를 대고
깊은 잠이 들었을 친구를
그 손톱에 배었을 핏자국을.
4월이 와도 바람은 그냥 차고
살구꽃이 피어도 흐느낌은 더 높은데
축축한 바람은 꽃가지에 와 매달려
친구들의 울음처럼 잉잉댔다.
진달래도 개나리도 피고
꺾이고 밟히고 다시 피는 4월
밤은 좀체 밝아오지 않았다.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가객 신경림
가객
내 앵금 영 넘어가는 산새소리
내 젓대 가시나무 사이 바람소리
내 피리 밤새워 우는 산골 물소리
무서리 깔린 과일전
가마니 속 철늦은 침시
푸른 달빛에 뒤척이던 풋장꾼도
이른 새벽 눈 비비고 나앉아
골목 끝의 한뎃가마에
시래기국은 끓고
무서리 마르기 전 봇짐 챙겨
돌아가리라 새파란 하늘
잔풀 깔린 성벽을 타고
여기 한 개 그림자만 남겼네
내 앵금 이승 떠나는 울음소리
내 젓대 동무해 가는 가는 벌레 소리
내 피리 나를 보내는 노랫소리
달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가난한 북한 어린이 신경림
가난한 북한 어린이
엄마는 돈 벌러 서울 가서 이태째 소식 없고
아빠도 엄마 찾아 집 나간 지 여러 달포
이제 보름만 더 있다 온다는
어쩌다 전화로 듣는 아빠 목소리는 늘 취해 있다
두동생 아침밥 먹여 학교 보내고
열두살 난 언니 하루 안 거르고 정거장에 나와 서지만
진종일 서울 땅장수만 차를 오르내리고
다 저녁때 지쳐 돌아오면
저희들끼리 끓여 먹은 라면 냄비 팽개쳐둔 채
두 동생 텔레비전 만화에 넋을 잃었다
다시 밥 대신 라면으로 저녁을 끓이고
열두살 난 언니는 일기에 쓴다 전화도
텔레비전도 없는 북한 어린이들이 가엾다고
가난한 북한 어린이들이 불쌍하다고
엄마 아빠 돈 벌어 돌아올 날을 믿으면서
* 지도: 신안의 어촌으로 옛날에는 섬이었으나 지금은 다리로 육지와 연결돼 있음
길, 창작과비평사, 1990
가난한 사랑노래 신경림
가난한 사랑노래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난한 사랑노래, 실천문학사, 1988
갈구렁달 신경림
갈구렁달
지금쯤 물거리 한 짐 해놓고
냇가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볼 시간……
시골에서 내몰리고 서울에서도 떠밀려
벌판에 버려진 사람들에겐 옛날밖에 없다
지금쯤 아이들 신작로에 몰려
갈갬질치며 고추잠자리 잡을 시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목소리로 외쳐대고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몸짓으로 발버둥치다
지친 다리 끄는 오르막에서 바라보면
너덜대는 지붕 위에 갈구렁달*이 걸렸구나
시들고 찌든 우리들의 얼굴이 걸렸구나
* 갈구렁달: 황해도, 충청도 바닷가에서 쪽박같이 쪼그라든 달을 말함
난한 사랑노래, 실천문학사, 1988
갈 길 신경림
갈 길
녹슨 삽과 괭이를 들고 모였다
달빛이 환한 가마니 창고 뒷수풀
뉘우치고 그리고 다시 맹세하다가
어깨를 끼어 보고 비로소 갈 길을 안다
녹슨 삽과 괭이도 버렸다
읍내로 가는 자갈 깔린 샛길
빈 주먹과 뜨거운 숨결만 가지고 모였다
아우성과 노랫소리만 가지고 모였다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갈대 신경림
갈대&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강 신경림
강(江)&
빗줄기가 흐느끼며 울고 있다
울면서 진흙 속에 꽂히고 있다
아이들이 빗줄기를 피하고 있다
울면서 강물 속을 떠돌고 있다
강물은 그 울음소리를 잊었을까
총소리와 아우성소리를 잊었을까
조그만 주먹과 맨발들을 잊었을까
바람이 흐느끼며 울고 있다
울면서 강물 위를 맴돌고 있다
아이들이 바람을 따라 헤매고 있다
울면서 빗발 속을 헤매고 있다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강물 1 신경림
강물 1
한 이레 하늘과 땅 갤 줄을 모르고
새와 벌레 서러워
울음 멈추리라 생각했다, 그이 가면
가게들 첩첩으로 문 닫아 걸고
나무에 저자에 인적 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보라, 그 화려한 꽃상여
고샅 돌아 산길 오르기도 전에
계집들 눈웃음으로 사내들을 홀리고
사내들 구전 찾기에 눈에 핏발이 섰다.
대장간에서 어물전에서 난장판에서
계집 사내 어우러져 시새우고 다투고
가다간 어깨 너머로 눈 맞추는구나,
그 큰 뜻 그 바람 시들었는데도.
한밤에 깨어 강물소리를 듣는다.
사람 사는 일이란 무릇 이러한 건가,
빗소리 천둥소리에 잠시 귀 기울이고
꽃샘 잎샘에 잠시 몸 움츠릴 뿐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 같은 건가.
달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개치 나루에서 신경림
개치 나루에서
이곳은 내 진외가가 살던 고장이다
그 해 봄에 꽃가루가 날리고
꽃바람 타고 역병이 찾아와
마을과 나루가 죽음으로 덮이던 고장이다
다시 전쟁이 일어
내 외로운 친구 숨죽여 떠돌다가
저 느티나무 아래
몰매로 묻힌 고장이다
바람아 다 잊었구나
늙은 나무에 굵은 살구꽃이 달려도
봄이 와서 내 친구 꽃에 붙어 울어도
바람아 너는 잊었구나 그 이름
그 한 그 설움을
이곳은 내 진외가가 살던 고장이지만
죽음 위에 꽃가루 날리던 나루이지만
원통하게 내 친구 묻힌 고장이지만
모두 다 잊어버린 장바닥을 돌다
한산한 대합실 나무의자에 앉아
읍내로 가는 시외버스를 기다린다
바람아 너는 잊었구나 그 이름
그 한 그 설움을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겨울밤 신경림
겨울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헐꺼나.
술에라도 취해 볼꺼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 볼꺼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 볼꺼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 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 다오 우리를 파묻어 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 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 편지라도 띄워 볼꺼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 볼꺼나.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고향에 와서 신경림
고향(故鄕)에 와서
아내는 눈 속에 잠이 들고
밤새워 바람이 불었다
나는 전등을 켜고
머리맡의 묵은 잡지를 뒤적였다
옛 친구들의 얼굴을 보기가
두렵고 부끄러웠다
미닫이에 달빛이 와 어른거리면
이발소집 시계가 두 번을 쳤다
아내가 묻힌 무덤 위에 달이 밝고
멀리서 짐승이 울었다
나는 다시 전등을 끄고
홍은동 그 가파른 골목길을 생각했다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고향길 신경림
고향길
아무도 찾지 않으려네
내 살던 집 툇마루에 앉으면
벽에는 아직도 쥐오줌 얼룩져 있으리
담 너머로 늙은 수유나뭇잎 날리거든
두레박으로 우물물 한 모금 떠 마시고
가위소리 요란한 엿장수되어
고추잠자리 새빨간 노을길 서성이려네
감석 깔린 장길은 피하려네
내 좋아하던 고무신집 딸아이가
수틀 끼고 앉았던 가겟방도 피하려네
두엄더미 수북한 쇠전마당을
금줄기 찾는 허망한 금전꾼되어
초저녁 하얀 달 보며 거닐려네
장국밥으로 깊은 허기 채우고
읍내로 가는 버스에 오르려네
쫓기듯 도망치듯 살아온 이에게만
삶은 때로 애닯기도 하리
긴 능선 검은 하늘에 박힌 별 보며
길 잘못 든 나그네되어 떠나려네
달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고향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신경림
고향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옛 친구와 벌이는 술판이 늘 즐겁지만은 않다
좋은 세월 다 보내고 놓치고 늘그막에
면사무소 앞에 다방을 차리고 들어앉아
젊은 애들 잡고 우스개나 던지는 친구야
활갯짓으로 세상을 떠돌다가 돌아와 산허리에서
닭을 치는 것으로 바람을 잡은 친구야
너희 작은 행복 자잘한 꿈을 알 리 없는
내 얘기야 끝없이 겉돌기만 하겠지
서둘러 술자리를 파하고 도망치듯 빠져나와
너희 땀과 눈물이 섞인 강물을 들여다본다
세상은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라고
사람살이란 모이며 흩어지며 흘러가는 것이라고
부질없는 혼잣말은 해서 무엇하랴
강물에 비친 내 얼굴만 달보다 더 섧구나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 1993
곯았네 신경림
곯았네
곯았네* 곯았네
뎅이*만 슬슬 굴려라
새금파리 유리조각
찾기도 좋게 곯았네
못 본 체 넘어가면
우리 발이 밟힌다
샅샅이 찾아내고
구석구석 뒤져내자
곯았네 곯았네
뎅이만 슬슬 굴려라
잡풀 여뀌 엉거시풀
뽑기도 좋게 곯았네
피새놓이 웃음에
속아서는 안된다
슬그머니 내민 흰 손
잡아서도 안된다
곯았네 곯았네
뎅이만 슬슬 굴려라
골골마다 헤집어라
썩은 것 마른 것 골라내자
숨겨주고 덮어주고
넘어갈 때 아니니
곯았네 곯았네
뎅이만 슬슬 굴려라
지금은 가려낼 때
속인 자를 가려낼 때
지금은 뿌리칠 때
거짓 손길 뿌리칠 때
곯았네 곯았네
뎅이만 슬슬 굴려라
지금은 찾아갈 때
내 형제 찾아갈 때
지금은 손잡을 때
내 친구만 손잡을 때
곯았네 곯았네
뎅이만 슬슬 굴려라
새금파리 유리조각
찾기도 좋게 곯았네
* 곯았네: 포천․철원․가평․여주 지방의 두벌 김맬 때 부르던 들노래로, 땅이 김매기 좋게 곯았다는 뜻의 노래.
** 뎅이: `덩이'의 속음(俗音)
달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군자에서 신경림
군자(君子)에서
협궤열차는 서서
기적만 울리고 좀체 떠나지 못한다
승객들은 철로에 나와 앉아
봄볕에 가난을 널어 쪼이지만
염전을 쓸고 오는
바닷바람은 아직 맵차다
산다는 것이 갈수록 부끄럽구나
분홍 커튼을 친 술집문을 열고
높은 구두를 신은 아가씨가
나그네를 구경하고 섰는 촌 정거장
추레한 몸을 끌고 차에서 내려서면
쓰러진 친구들의 이름처럼 갈라진
내 손등에도 몇 줄기의 피가 배인다
어차피 우리는 형제라고
아가씨야 너는 그렇게 말하는구나
가난과 설움을 함께 타고난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형제라고
역 앞 장터 골목은 누렇게 녹이 슬고
덜컹대는 판장들이 허옇게 바랬는데
석탄연기를 내뿜으며 헐떡이는
기차에 뛰어올라 숨을 몰아쉬면
나는 안다 많은 형제들의 피와 눈물이
내 등뒤에서 이렇게 아우성이 되어
내 몸을 밀어대고 있는 것을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귀로 신경림
귀로(歸路)&
온종일 웃음을 잃었다가
돌아오는 골목 어귀 대폿집 앞에서
웃어 보면 우리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서로 다정하게 손을 쥘 때
우리의 손은 차고 거칠다
미워하는 사람들로부터 풀어져
어둠이 덮은 가난 속을 절뚝거리면
우리는 분노하고 뉘우치고 다시
맹세하지만 그러다 서로 헤어져
삽짝도 없는 방문을 밀고
아내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의 음성은 통곡이 된다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그날 신경림
그날&
젊은 여자가 혼자서
상여 뒤를 따르며 운다
만장도 요령도 없는 장렬
연기가 깔린 저녁길에
도깨비 같은 그림자들
문과 창이 없는 거리
바람은 나뭇잎을 날리고
사람들은 가로수와
전봇대 뒤에 숨어서 본다
아무도 죽은 이의
이름을 모른다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그날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그림 신경림
그림
옛사람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때가 있다
배낭을 멘 채 시적시적
걸어들어가고 싶은 때가 있다
주막집도 들어가보고
색시들 수놓는 골방문도 열어보고
대장간에서 풀무질도 해보고
그러다가 아예 나오는 길을
잃어버리면 어떨까
옛사람의 그림 속에
갇혀버리면 어떨까
문득 깨달을 때가 있다
내가 오늘의 그림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나가는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두드려도 발버둥쳐도
문도 길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오늘의 그림에서
빠져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배낭을 메고 밤차에 앉아
지구 밖으로 훌쩍
떨어져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길, 창작과비평사, 1990
길 신경림
길&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 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곳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은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땀을 식히게도 한다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 1993
길음시장 신경림
길음시장
여기는 서울이 아니다
팔도 각 고장에서 못 살고 쫓겨온
뜨내기들이 모여들어 좌판을 벌인 장거리
예삿날인데도 건어물전 앞에서는 한낮에
윷이냐 샅이냐 윷놀이판이 벌어지고
경로당 마당에서는 삼채굿가락의
좌도 농악이 흥을 돋군다
생선장수 아낙네들은 덩달아 두레삼도 삼고
늙은 씨름꾼은 꽃나부춤에 신명을 푸는데
텔레비전에서 연속극이라도 시작되면
일 나간 아낙들이 돌아올 시간이라면서
미지기로 놀던 상쇠도 중쇠도 빠지고
싸구려 소리가 높아지면서
길음시장은 비로소 서울이 된다
난한 사랑노래, 실천문학사, 1988
꿈의 나라 코리아 신경림
꿈의 나라 코리아
때와 먼지에 절은 술상에는
신 김치와 두부 무침
목에 켜켜로 쌓인 탄가루를 씻어내려고
부지런히 소주 주발을 들어올리는
시커먼 손들
진폐증으로 입원한
아들을 보러 간 주모 대신
굴속 같은 술청을 드나들던 쥔사내가
광부들보다도 먼저 취했다
광산살이 서른 해에
얻은 것은 가난한 병뿐이라고
셈날 아직 멀어
하나둘 외상을 긋고 나가는
문밖에 내리는 비도 검고
꿈의 나라 코리아
꿈의 나라 코리아
텔레비전 속 여가수의 하얀 목소리가
대낮인데도 밤처럼 검은
집과 사람들을 놀려대고 있다
길, 창작과비평사, 1990
끊어진 철길 신경림
끊어진 철길
끊어진 철길이 동네 앞을 지나고
`금강산 가는 길'이라는 푯말이 붙은
민통선 안 양지리에 사는 농사꾼 이철웅씨는
틈틈이 남방한계선 근처까지 가서
나무에서 자연꿀 따는 것이 사는 재미다
사이다병이나 맥주병에 넣어두었다가
네댓 병 모이면 서울로 가지고 올라간다
그는 친지들에게 꿀을 나누어 주며 말한다
ꡒ이게 남쪽벌 북쪽벌 함께 만든 꿀일세
벌한테서 배우세 벌한테서 본뜨세ꡓ
세밑 사흘 늦어 배달되는 신문을 보면서
농사꾼 이철웅씨는 남방한계선 근처 자연꿀따기는
올해부터 그만두어야겠다 생각한다
`금강산 가는 길'이라는 푯말이 붙은 인근
버렸던 땅값 오르리라며 자식들 신바람 났지만
통일도 돈 가지고 하는 놀음인 것이 그는 슬프다
그에게서는 금강산 가는 철길뿐 아니라
서울 가는 버스길도 이제 끊겼다
길, 창작과비평사, 1990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신경림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차고 누진 네 방에 낡은 옷가지들
라면 봉지와 쭈그러진 냄비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너희들의 힘으로 살쪄가는 거리
너희들의 땀으로 기름져가는 도시
오히려 그것들이 너희들을 조롱하고
오직 가난만이 죄악이라 협박할 때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벚꽃이 활짝 핀 공장 담벽 안
후지레한 초록색 작업복에 감겨
꿈 대신 분노의 눈물을 삼킬 때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투박한 손마디에 얼룩진 기름때
빛 바랜 네 얼굴에 생활의 흠집
야윈 어깨에 밴 삶의 어려움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우리들 두려워 얼굴 숙이고
시골 장바닥 뒷골목에 처박혀
그 한겨우내 술놀음 허송 속에
네 울부짖음만이 온 마을을 덮었을 때
들을 메우고 산과 하늘에 넘칠 때
쓰러지고 짓밟히고 다시 일어설 때
네 투박한 손에 힘을 보았을 때
네 빛 바랜 얼굴에 참삶을 보았을 때
네 야윈 어깨에 꿈을 보았을 때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네 울부짖음 속에 내일을 보았을 때
네 노랫 속에 빛을 보았을 때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나무 1 신경림
나무 1&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는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나고 큰 나무는
제 치레하느라 오히려
좋은 열매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한 군데쯤 부러졌거나 가지를 친 나무에
또는 못나고 볼품없이 자란 나무에
보다 실하고
단단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우쭐대며 웃자란 나무는
이웃 나무가 자라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햇빛과 바람을 독차지해서
동무 나무가 꽃 피고 열매 맺는 것을
훼방한다는 것을
그래서 뽑거나
베어버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이 사는 일이 어찌 꼭 이와 같을까만
길, 창작과비평사, 1990
날개 신경림
날개&
강에 가면 강에 산에 가면 산에
내게 붙은 것 그 성가신 것들을 팽개치고
부두에 가면 부두에 저자에 가면 저자에
내가 가진 것 그 너절한 것들을 버린다
가벼워진 몸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훨훨 새처럼 하늘을 나는 꿈을 꾼다
그러나 어쩌랴 하룻밤새 팽개친 것
버린 것이 되붙으며 내 몸은 무거워지니
이래서 나는 하늘을 나는 꿈을 버리지만
누가 알았으랴 더미로 모이고 켜로 쌓여
그것들 서서히 크고 단단한 날개로 자라리라고
나는 다시 하늘을 나는 꿈을 꾼다
강에 가면 강에서 저자에 가면 저자에서
옛날에 내가 팽개친 것 버린 것
그 성가신 것 너절한 것들을 도로 주워
내 날개를 더 크고 튼튼하게 만들면서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 1993
농무 신경림
농무(農舞)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주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눈길 신경림
눈길
아편을 사러 밤길을 걷는다
진눈깨비 치는 백 리 산길
낮이면 주막 뒷방에 숨어 잠을 자다
지치면 아낙을 불러 육백을 친다
억울하고 어리석게 죽은
빛 바랜 주인의 사진 아래서
음탕한 농짓거리로 아낙을 웃기면
바람난 뒷산 나뭇가지에 와 엉겨
굶어 죽은 소년들의 원귀처럼 우는데
이제 남은 것은 힘없는 두 주먹뿐
수제비국 한 사발로 배를 채울 때
아낙은 신세 타령을 늘어놓고
우리는 미친 놈처럼 자꾸 웃음이 나온다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늙은 소나무 신경림
늙은 소나무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여자를 안다고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사랑을 안다고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세상을 안다고
늙은 소나무들은
이렇게 말하지만
바람소리 속에서
이렇게 말하지만
길, 창작과비평사, 1990
다시 남한강 상류에 와서 신경림
다시 남한강(南漢江) 상류에 와서
헐벗은 가로수에 옹기전에 전봇줄에
잔비가 뿌리고 바람이 매달려 울고
나는 진종일 여관집 툇마루에 나와
잿빛으로 바랜 먼 산을 보고 섰다
배론땅은 여기서도 삼십 리라 한다
궂은 날 여울목에서 여자 울음 들리는
강 따라 후미진 바윗길을 돌라 한다
목 잘린 교우들의 이름 들을 적마다
사기가마 굳은 벽에 머리 박고 울었을
황사영을 생각하면 나는 두려워진다
나라란 무엇인가 나라란 무엇인가고
친구들의 목숨 무엇보다 값진 것
질척이는 장바닥에 탱자나무 울타리에
누룩재비 참새떼 몰려 웃고 까불어도
불과 칼로 친구들 구하려다
몸 토막토막 찢기고 잘리고 씹힌
그 사람 생각하면 나는 무서워진다
번개가 아우성치고 천둥이 울부짖을 때
추자도 제주도 백령도로 쫓기며
그 아내 원통해 차마 혀 못 깨물 때
누가 그더러 반역자라 하는가
나라란 무엇인가 나라란 무엇인가고
헐벗은 가로수에 옹기전에 전봇줄에
잔비가 뿌리고 바람이 매달려 우는
다시 남한강 상류 궁벽진 강촌에 와서
그 아내를 생각하면 나는 두려워진다
내 친구를 생각하면 나는 무서워진다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달, 달 신경림
달, 달
마당에 자욱한 솔잎 내음
가마솥에 송편을 세 번 쪄내도록
객지 나간 딸들 왜 기별 없을까
늙은 양주 민화투도 시들어질 쯤엔
노란 국화꽃 감으며 드는
어스름 땅거미도 서럽고
문득 문밖에 인기척 있어
반색하고 문 열어 내다보니
달이 눈부시게 차려 입고
대문을 밀고 들어서고 있다
그 뒤로 또하나 달이
눈물과 한숨으로 나무에 걸린 어스름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 1993
달 넘세* 신경림
달 넘세*
넘어가세 넘어가세
논둑밭둑 넘어가세
드난살이 모진 설움
조롱박에 주워담고
아픔 깊어지거들랑
어깨춤 더 흥겹게
넘어가세 넘어가세
고개 하나 넘어가세
얽히고 설킨 인연
명주 끊듯 끊어내고
새 세월 새 세상엔
새 인연이 있으리니
넘어가세 넘어가세
언덕 다시 넘어가세
어르고 으르는 말
귓전으로 넘겨치고
으깨지고 깨어진 손
서로 끌고 잡고 가세
넘어가세 넘어가세
크고 큰 산 넘어가세
버릴 것은 버리고
챙길 것은 챙기고
디딜 것은 디디고
밟을 것은 밟으면서
넘어가세 넘어가세
세상 끝까지 넘어가세
* 달 넘세: 흔히 `달람새'라고도 하는데 경북 영덕 지방에서 하는 여인네들의 놀이 `월워리 청청'의 한 대목으로, 손을 잡고 빙 둘러앉아 하나씩 넘어가면서 `달 넘세' 노래를 부름. `달을 넘어가자'는 뜻의 `달 넘세'는 어려움을 극복해가는 일을 상징한다고 함.
달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두물머리 신경림
두물머리
부제: 두물머리에서 만난 북한강과 남한강이 주고받는 노래
ꡒ조심조심 지뢰 사이를 지났지
긁히고 찢기면서 철조망도 넘었지
못다 운 넋들의 울음소리도 들었지
하얀 해골 덜 삭은 뼈에 대고
울면서 울면서 입맞춤도 하였지ꡓ
ꡒ내 몸에 밴 것은 눈물뿐이라네
쫓겨난 농투산이들 한숨뿐이라네
눈비 바람은 갈수록 맵차고
온 벌에 안개 더욱 짙어가지만
나는 보았네 땅 뚫고 솟는 빛살을
노래처럼 힘차고 굵은 빛살을ꡓ
ꡒ얼싸안아보자꾸나 어루만져보자꾸나
너는 북에서 나는 남에서
온갖 서러운 일 기막힌 짓 못된 꼴
다 겪으면서 예까지 흘러오지 않았느냐
내 살에 네 피를 섞고
네 뼈에 내 입김 불어넣으면
그 온갖 것 모두 빛이 되리니
춤추자꾸나 아침햇살에 몸 빛내면서ꡓ
난한 사랑노래, 실천문학사, 1988
먼 길 신경림
먼 길&
버릴 것은 버리고 줄일 것은 줄이자
아까울 것 없다 자를 것은 자르자
어둡고 먼 길을 떠나야 하니까
다가오는 어둠 끝내 밝지 않으리라
생쥐들 설치는 것쯤 거들떠도 볼 것 없다
불어닥칠 눈보라와 비바람 이겨내자면
겉에 걸친 것 붙은 것 몽땅 떨쳐버려야지
간편한 맨몸으로만 꺾이지도 지치지도 않고
먼 길 끝까지 갈 수 있지 않겠느냐
다 버리고 가지와 몸통만이 남거든
그래 나서자 젊은 나무들아
오직 맨몸으로 단단한 맨몸으로
외롭고 험한 밤길을 가기 위해서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 1993
명매기 집 신경림
명매기 집
옛고장 사람들은 우리들더러
도망질쳤다 종주먹질하고
이 고장 사람들은 또
숨어들어왔다 눈흘긴다
저쪽에선 되돌아오지 말라 침 배앝고
이쪽에선 발 들여놓지 말라
금줄 쳐 막는다
달구지에 용달차에 화물차에 실려온
누더기라 헌 짐짝 서덜에 풀어놓고
산비알에 까맣게 움막을 치니
그래도 좋아라 갈갬질치는 내 새끼들아
이게 간데없이 명매기* 집이로구나
우리가 왜 모르겠느냐
너희 눈에 담긴 눈물이 머잖아
파랗게 불꽃으로 번득일 것을
활활 세상을 태우는
불꽃으로 타오를 것을
* 명매기:여름 한철 개울가 바위 벼랑에 집을 짓고 사는 새. 불길한 새라 하여 사람들이 동네 안에 들어오는 것을 꺼리는제, 그 눈에서 파란 빛이 일면 큰 재앙이 온다는 얘기가 있음.
난한 사랑노래, 실천문학사, 1988
목계장터 신경림
목계장터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무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묘비 신경림
묘비(墓碑)&
쓸쓸히 살다가 그는 죽었다.
앞으로 시내가 흐르고 뒤에 산이 있는
조용한 언덕에 그는 묻혔다.
바람이 풀리는 어느 다스운 봄날
그 무덤 위에 흰 나무 비가 섰다.
그가 보내던 쓸쓸한 표정으로 서서
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러나 비는 아무것도 기억할 만한
옛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언듯
거멓게 빛깔이 변해 가는 제 가녈픈
얼굴이 슬펐다.
무엇인가 들릴 듯도 하고 보일 듯도 한 것에
조용히 귀를 대이고 있었다.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무인도 신경림
무인도(無人島)&
너는 때로 사람들 땀냄새가 그리운가 보다
밤마다 힘겹게 바다를 헤엄쳐 건너
집집에 별이 달리는 포구로 오는 걸 보면
질척거리는 어시장을 들여다도 보고
떠들썩한 골목을 기웃대는 네 걸음이
절로 가볍고 즐거운 춤이 되는구나
누가 모르겠느냐 세상에 아름다운 게
나무와 꽃과 풀만이 아니라는 걸
악다구니엔 짐짓 눈살을 찌푸리다가
놀이판엔 콧노래로 끼어들 터이지만
보아라 탐조등 불빛에 놀라 돌아서는
네 빈 가슴을 와 채우는 새파란 달빛을
슬퍼하지 말라 어둠이 걷히기 전에 돌아가
안개로 덮어야 하는 네 갇힌 삶을
곳곳에서 부딪치고 막히는 무거운 발길을
깃과 털 속에 새와 짐승을 기르면서
가슴 속에 큰 뭍 하나를 묻고 살아가는
너 나의 서럽고 아름다운 무인도여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 1993
밤길 신경림
밤길&
강 하나 건너왔네 손도 몸도 내어주고
갯비린내 벽에 쩌른 엿도가집 행랑방
감나무 빈 가지 된서리에 떨면서
내 여자 몸 무거워 뒤채는 그믐밤
고개를 넘어섰네 뜻도 꿈도 내던지고
협궤차 삐걱대던 면소재지 그 새벽도
못 박힌 손바닥에 팔자로 접어뒀네
내 여자 숨이 차서 돌아눕는 시린 외풍
험한 산길 지나왔네 눈도 귀도 내버리고
엿기름 달이는 건넌방 큰 가마솥
빈내기 화투 소리 늦도록 시끄러운
내 여자 내 걱정에 피말리는 한자정
강 하나 더 건넜네 뜻도 꿈도 내던지고
험한 산길 또 지났네 눈도 귀도 내버리고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북으로 간 친구 신경림
북으로 간 친구
우리는 사이좋은 친구였다
골마루에서 벌도 같이 서고
깊드리에서 메뚜기도 함께 잡았다
그러다가 우리는 싸웠구나
할퀴고 꼬집고 깨물면서
힘센 아이들의 시새움 때문에
큰 아이들의 꼬드김 때문에
우리는 물어뜯고 발길질하고
서로 붙안고 딩굴었구나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리고
눈과 귀가 찢어져 도깨비춤 추었구나
크고 힘센 아이들의 이간질에 넘어가
꼬임수에 빠져서 아우성에 넋이 나가
눈에 핏발 세우고 이 뿌드득 갈았구나
힘센 아이들한테 주머니 세간 바치고
발길질을 배우고 주먹질을 배웠구나
쇠꼬챙이 얻어 품속에 감췄구나
고샅에서 모퉁이에서 바위너설에서
마주치면 찌르고 할퀴었구나
숫돌에 벽돌짝에 쇠꼬챙이 갈았구나
그리고는 우리는 헤어졌다
너는 북으로 나는 남으로
전쟁에 쫓겨서 죽음을 피해서
쇠꼬챙이 대신 어느새 우리 손에는
총과 칼이 쥐어져 있구나
주먹으로 치고 발길로 차는 대신
피를 흘리며 싸웠구나
쏘고 찌르고 죽였구나
크고 힘센 아이들의 으름장에 속아서
음흉하고 욕심 많은 아이들 용심 때문에
우리는 의좋은 친구였는데
땅 끝 하늘 끝까지 같이 가자던 친구였는데
이빨 뿌드득 갈며 노려보고 서 있었구나
친구의 피로 얼룩진
부끄러운 주먹 휘두르며 날뛰었구나
앞곤두 뒷곤두에 외발걸음으로 설쳤구나
이승 저승 험한 고개도
함께 넘자던 친구였는데
죽살이라 돌밭길도
발 맞추어 넘자던 친구였는데
크고 힘센 아이들의 눈웃음에 넘어가
아우성 손뼉 소리에 얼마저 빼앗겨
가진 것 모두 내주었구나
우리 것 모두 빼앗겼구나
발길질에 주먹질 총질에 칼질만 배웠구나
그러는 사이 삼십 년이 갔구나
사십 년이 갔구나
이제는 서로 눈에 눈물 그득 담고
바라보고 서 있구나
그리운 이름 소리쳐 부르는구나
힘센 아이들한테서 얻은 쇠꼬챙이 버리는구나
주머니 세간 바치고 배운
발길질을 주먹질을 버리는구나
몸에 밴 것 몸에 걸친 것
그 모든 더러운 것들을 팽개치는구나
손에 얼룩진 피 서로의 입김으로 닦는구나
찢어지고 깨어진 눈과 귀에 입맞추는구나
부러지고 꺾어진 머리에 뼈에 입맞추는구나
우리는 사이좋은 친구였다
따지기때 풀개떡도 나눠 먹고
장마 지나 도랑뒤짐도 함께 했다
그러다가 우리는 싸웠구나
크고 힘센 아이들의 시새움 때문에
크고 힘센 나라들의 장난질에 넘어가
달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북한강행 3 신경림
북한강행 3
왜 날 억지로 일으켜 세우는가
팔다리 잘려나간 험한 몸통으로
원수 앞에서 뒤뚱걸음치게 하는가
용서하라고 모든 걸 용서하라고 하는가
목에 들여댄 칼 앞에서 웃으라는가
강바람 산바람 매운 줄 너는 모른다
온갖 새 울음 짐승 울음 서러운 줄 너는 모른다
욕지거리 발길질 아픈 줄도 너는 모른다
서른 해 그 긴 죽음 지겨운 줄 너는 모른다
왜 그 모든 걸 다 잊으라는가
인연 없는 낯선 이의 팔에 매달려
우쭐우쭐 허재비춤*을 추게 하는가
원수들의 큰 웃음소리 속에서
원통한 날 왜 두 번 죽게 하는가
내 누웠던 강가로 되보내다오
그 차디찬 흙 속으로 되보내다오
밤마다 팔다리 없는 몸통 흙 털고 일어나
천리 만리 원수 찾아 날아가리니
원수의 칼날 앞에서 억지로 웃는 내 입에
날 선 낫 한 자루 물린 걸 너는 모른다
* 허재비춤: 젊은 원혼을 짝지어줄 때 하는 허재비굿 속의 춤의 하나.
난한 사랑노래, 실천문학사, 1988
비 오는 날 신경림
비 오는 날&
물 묻은 손바닥에
지난 십년 고된 우리의 삶이 맺혀
쓰리다
이 하루나마
마음놓고 통곡하리라
아내의 죽음 위에 돋은
잔디에 꿇어앉다
왜 헛됨이 있겠느냐
밤마다 당신은 내게 와서 말했으나
지쳤구나 나는
부끄러워 우산 뒤에 몸을 숨기고
비틀대는 걸음
겁먹은 목청이 부끄러워
우산 뒤에 몸을 숨기고
소매끝에 밴 땟자국을 본다
내 둘레에 엉킨
생활의 끄나불을 본다
삶은 고달프고
올바른 삶은 더욱 힘겨운데
힘을 내라 힘을 내라고
오히려 당신이 내게 외쳐대는
이곳 국망산 그 한 골짜기 서러운 무덤에
종일 구질구질 비가 오는 날
이 하루나마 지쳐 쓰러지려는 몸을 세워
마음놓고 통곡하리라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빛 신경림
빛&
쓰러질 것은 쓰러져야 한다
무너질 것은 무너지고 뽑힐 것은 뽑혀야 한다
그리하여 빈 들판을 어둠만이 덮을 때
몇 날이고 몇 밤이고 죽음만이 머무를 때
비로소 보게 되리라 들판 끝을 붉게 물들이는 빛을
절망의 끝에서 불끈 솟는 높고 큰 힘을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 1993
산 1번지 신경림
산(山) 1번지(番地)
해가 지기 전에 산 일번지에는
바람이 찾아 온다
집집마다 지붕으로 덮은 루핑을 날리고
문을 바른 신문지를 찢고
불행한 사람들의 얼굴에
돌모래를 끼어얹는다
해가 지면 산 일번지에는
청솔가지 타는 연기가 깔린다
나라의 은혜를 입지 못한 사내들은
서로 속이고 목을 조르고 마침내는
칼을 들고 피를 흘리는데
정거장을 향해 비탈길을 굴러가는
가난이 싫어진 아낙네의 치맛자락에
연기가 붙어 흐늘댄다
어둠에 내리기 전에 산 일번지에는
통곡이 온다. 모두 함께
죽어 버리자고 복어알을 구해 온
어버이는 술이 취해 뉘우치고
애비 없는 애기를 밴 처녀는
산벼랑을 찾아가 몸을 던진다.
그리하여 산 일번지에 밤이 오면
대밋벌을 거쳐 온 강바람은
뒷산에 와 부딪쳐
모든 사람들의 울음이 되어 쏟아진다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산동네 신경림
산동네
집에서는 왕자처럼 살고
나와서는 잡초로 행세하는 자들이 싫어서
일년 내내 동네 밖을 안 나가는
딸기코 대서방 서사는 내 바둑동무다
남 앞에서 옳은 소리만 하고
전문지식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면서
자기 자식들은 몰래
외국으로 빼돌려 공부시키는 자들이 미워
신문도 방송도 안 본다는
허리 굽은 양복점 주인은 내 술동무다
한 스무 해 징역을 살고 나와보니
온갖 잡짓으로 돈벌고
또 여편네 앞장세워 출세한 것들이
투사가 되고 지사가 된 세상이 어이없어
두문불출 골방에 엎드려 한서나 뒤적이는
이가 다 빠진 늙은이는 내 걸음동무다
그래서 산동네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지만
그래서 산동네 사람들은 아무것도 안 보는 줄 알지만
아아 그래서 산동네 사람들은
눈도 코도 없는 줄 알지만……
길, 창작과비평사, 1990
산에 대하여 신경림
산에 대하여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어떤 산은 크고 높은 산 아래
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즈막히 엎드려 있고
또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부러운 듯 사람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그리고는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순하디순한 길이 되어 주기도 하고
남의 눈을 꺼리는 젊은 쌍에게 짐즛
따뜻한 사랑의 숨을 자리가 돼주기도 한다.
그래서 낮은 산은 내 이웃이던
간난이네 안방 왕골자리처럼 때에 절고
그 누더기 이불처럼 지린내가 배지만
눈개비나무 찰피나무며 모싯대 개쑥에 덮여
곤줄박이 개개비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듣는 기쁨은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서 잡아죽일 듯
이빨을 갈고 손톱을 세우다가도
칡넝쿨처럼 머루넝쿨처럼 감기고 어울어지는
사람사는 재미는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이 다 크고 잘난 것만이 아니듯
다 외치며 우뚝 서 있는 것만이 아니듯
산이라 해서 모두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모두 흰 구름을 겨드랑이에 끼고
어깨로 바람 맞받아치며 사는 것은 아니다
난한 사랑노래, 실천문학사, 1988
산읍기행 신경림
산읍기행(山邑紀行)
장날인데도 무싯날보다 한산하다.
가뭄으로 논에서는 더운 먼지가 일고
지붕도 돌담도 농사꾼들처럼 지쳤다.
아내의 무덤이 멀리 보이는
구판장 앞에서 버스는 섰다.
나는 아들놈과 노점 포장 아래서
외국 자본이 만든 미지근한 음료수를 마셨다.
오랜만에 보는 시골 친구들의 눈은
왜 이렇게 충혈돼 있을까.
말이 없다. 그저 손을 잡고
흔들기만 한다. 그 거짓된 웃음.
돌과 몽둥이와 곡괭이로 어지럽던
좁은 닭전 골목. 농사꾼들과
광부들의 싸움질로 시끄럽던 이발소 앞.
의용소방대원들이 달음질치던 싸전 길.
장날인데도 어디고 무싯날보다 쓸쓸하다.
아내의 무덤을 다녀 가는 내 손을
뻣뻣한 손들이 잡고 놓지를 않는다.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산읍일지 신경림
산읍일지(山邑日誌)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인가
눈 오는 밤에 나는
잠이 오지 않는다
박군은 감방에서 송형은
병상에서 나는 팔을 벤
여윈 아내의 곁에서
우리는 서로 이렇게 헤어져
지붕 위에 서걱이는
눈소리만 들을 것인가
납북된 동향의 시인을
생각한다 그의 개가한 아내를
생각한다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인가 이 산읍에서
아이들의 코묻은 돈을 빼앗아
연탄을 사고 술을 마시고
숙직실에 모여 섰다를 하고
불운했던 그 시인을 생각한다
다리를 저는 그의 딸을
생각한다 먼 마을의
개 짖는 소리만 들을 것인가
눈 오는 밤에 가난한 우리의
친구들이 미치고 다시
미쳐서 죽을 때
철로 위를 굴러 가는 기찻소리만
들을 것인가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인가 이 산읍에서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새벽 신경림
새벽&
보이나, 저 사람들이 보이나.
화해의 시대라고 야단들을 치는군.
배에 기름 끼면 간사한 꾀만 늘지.
죽도록 고생한 자들까지 왜 덩달아 맞북 치지.
늙고 지쳤으니까.
암, 늙고 지쳤으니까.
우리도 이렇게 함께 앉았으니 이것이 화해인가.
서로 쏘고 찌른 상처 매만지며 함께 앉았으니까.
아닐세, 우린 서로 미워한 일이 없지.
아닐세, 우린 옛날로 돌아가면 되지.
자 떠나세, 동이 트네.
저, 떠나세, 날선 낫 하나씩 들고.
자, 떠나세, 원수를 찾아서.
―이른 새벽 휴전선 부근,
경지정리로 파헤쳐진 무덤 속에서
두개골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달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새벽 눈 신경림
새벽 눈
서해바다를 건너서
질퍽이는 개펄을 지나서
하늬바람은 달려와
사납게 창을 흔들고
정류장 대합실엔
불이 꺼진 연탄 난로
펄펄 뛰는 고기가 담긴
플라스틱 자배기 옆에서
젖은 발을 구르는
아낙네가 넷
새벽장 보러 가는
장꾼을 실을 시골 버스는
늙은 당나귀처럼
잠이 덜 깨어
운전사의 주름진 이마
검은 손등에 떨어지는
소금기 머금은 새벽눈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 1993
세월 신경림
세월&
흙 속을 헤엄치는
꿈을 꾸다가
자갈밭에 동댕이쳐지는
꿈을 꾸다가……
지하실 바닥 긁는
사슬소리를 듣다가
무덤 속 깊은 곳의
통곡소리를 듣다가……
창문에 어른대는
하얀 달을 보다가
하늘을 훨훨 나는
꿈을 꾸다가……
달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소리 신경림
소리&
너는 나를 칼날 위에 서게 한다
너는 나를 불 앞에 서게 한다
너는 나를 물 속에 뛰어들게 한다
한밤에 길을 떠나게 한다
외로운 고장 썰렁한 장바닥에서
진종일 떨며 서성거리게 한다
귀먹은 땜쟁이 길동무삼아
산마을 갯마을을 떠돌게 한다
지는 해 등에 업고 긴 그림자로
꿈 속에서 고향을 찾게 한다
엿도가에서 옹기전에서 달비전에서
부사귀 몽달귀 동무되어 뛰게 한다
새벽에 눈뜨고 강물소리를 듣게 한다
너는 나를 불을 두려워하게 한다
물 속에 뛰어들기를 물리치게 한다
그래서 한밤에 다시 돌아오게 한다
골방에 깊이 숨어서 떨게 한다
그러나 너는 나를 되떠나게 한다
비틀대고 절뚝거리는 이들 데불고
버려진 포구에서 썩어가는 갯벌에서
마파람 하늬바람에 취하게 한다
너는 나를 다시 칼 날 위에 서게 한다.
달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시골 큰집 신경림
시골 큰집
이제 나는 시골 큰집이 싫어졌다.
장에 간 큰아버지는 좀체로 돌아오지 않고
감도 다 떨어진 감나무에는
어둡도록 가마귀가 날아와 운다.
대학을 나온 사촌형은 이 세상이 모두
싫어졌다 한다. 친구들에게서 온
편지를 뒤적이다 훌쩍 뛰쳐 나가면
나는 안다 형은 또 마작으로
밤을 새우려는 게다. 닭장에는
지난 봄에 팔아 없앤 닭 그 털만이 널려
을씨년스러운데 큰엄마는
또 큰형이 그리워지는 걸까. 그의
공부방이던 건넌방을 치우다가
벽에 박힌 그의 좌우명을 보고 운다.
우리는 가난하나 외롭지 않고, 우리는
무력하나 약하지 않다는 그
좌우명의 뜻을 나는 모른다. 지금 혹
그는 어느 딴 나라에서 살고 있을까.
조합 빚이 되어 없어진 돼지 울 앞에는
국화꽃이 피어 상그럽다 그것은
큰형이 심은 꽃. 새 아줌마는
그것을 뽑아내고 그 자리에 화사한
코스모스라도 심고 싶다지만
남의 땅이 돼 버린 논뚝을 바라보며
짓무른 눈으로 한숨을 내쉬는 그
인자하던 할머니도 싫고
이제 나는 시골 큰집이 싫어졌다.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시외버스 정거장 신경림
시외버스 정거장
을지로 육가만 벗어나면
내 고향 시골 냄새가 난다
질퍽이는 정거장 마당을 건너
난로도 없는 썰렁한 대합실
콧수염에 얼음을 달고 떠는 노인은
알고 보니 이웃 신니면 사람
거둬들이지 못한 논바닥의
볏가리를 걱정하고
이른 추위와 눈바람을 원망한다
어디 원망할 게 그뿐이냐고
한 아주머니가 한탄을 한다
삼거리에서 주막을 하는 여인
어디 답답한 게 그뿐이냐고
어수선해지면 대합실은 더 썰렁하고
나는 어쩐지 고향 사람들이 두렵다
슬그머니 자리를 떠서
을지로 육 가 행 시내버스를 탈까
육 가에만 들어서면
나는 더욱 비겁해지고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시인의 집 신경림
시인의 집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데도
마당에 피워놓은
모닥불은 훨훨 탄다
삼십 년 전 신혼살림을 차렸던
깨끗하게 도배된 윗방
벽에는 산 위에서 찍은
시인의 사진
시인의 아내는 옛날로 돌아가
집 앞 둠벙에서
붉은 연꽃을 딴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옛 백제의 서러운 땅에
그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
모닥불 옆에서 훨훨 타오르고 있는
몇 개의 굵고 붉은 낱말들이여
난한 사랑노래, 실천문학사, 1988
씻김굿* 신경림
씻김굿*
편히 가라네 날더러 편히 가라네
꺾인 목 잘린 팔다리 끌고 안고
밤도 낮도 없는 저승길 천리 만리
편히 가라네 날더러 편히 가라네.
잠들라네 날더러 고이 잠들라네
보리밭 풀밭 모래밭에 엎드려
피멍든 두 눈 억겁 년 뜨지 말고
잠들라네 날더러 고이 잠들라네.
잡으라네 갈가리 찢긴 이 손으로
피묻은 저 손 따뜻이 잡으라네
햇빛 밝게 빛나고 새들 지저귀는
바람 다스운 새 날 찾아왔으니
잡으라네 찢긴 이 손으로 잡으라네.
꺾인 목 잘린 팔다리로는 나는 못 가,
피멍든 두 눈 고이는 못 감아,
못 잡아, 이 찢긴 손으로는 못 잡아,
피묻은 저 손을 나는 못 잡아.
되돌아왔네, 피멍든 눈 부릅뜨고 되돌아왔네,
꺾인 목 잘린 팔다리 끌고 안고
하늘에 된서리 내리라 부드득 이빨 갈면서.
이 갈가리 찢긴 손으로는 못 잡아,
피묻은 저 손 나는 못 잡아,
골목길 장바닥 공장마당 도선장에
줄기찬 먹구름되어 되돌아왔네,
사나운 아우성되어 되돌아왔네.
* 씻김굿: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하는 굿으로, 원통한 넋을 위로해서 저 세상으로 편히 가게 하는 것이 목적임.
달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아우라지 뱃사공 신경림
아우라지 뱃사공
산과 물이 지겨워 아우라지* 뱃사공의 아내는
제 아들딸을 두고 대처로 떠났다.
아우라지 뱃사공은 산과 물이 싫다.
산과 물을 좋아하는 대처 사람이 싫다.
종일 배를 건너 손에 쥐는
천 원 안팎의 돈 그것이 싫다.
세상이란 잘난 사람들끼리 그저
잘난놀음으로 돌아치는 곳,
그를 가엾다고 말하는 세상 사람들이 그는 싫다.
딸애는 바람막이도 없는 난달에서
구호미를 삶아 저녁밥을 짓고
아들놈은 단칸 셋방 맨바닥에 엎드려
몽당연필로 제 어미에게 편지를 쓴다.
보낼 수도 없는 서러운 편지를.
아우라지 뱃사공은 그들을 보는 세상의 눈이 싫다.
정선아라리의 구성진 가락이 싫다.
* 아우라지: 정선읍에서 220여 Km 떨어진 나루로, `정선아라리' 에 많이 나오는 고장.
달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어둠으로 인하여 신경림
어둠으로 인하여
복사나무 노간주나무 아래
여자들이 울고 있다
잡목숲 넝쿨 사이 스쳐온 한숨
모랫벌에 뱃전에 부서지는 물소리
고샅에 디딜방앗간에
어둠이 엉겨 붙고 술렁이고
소용돌이치고 서로 부르고
원귀가 되어 잡귀가 되어
밤새껏 미친듯이 맴을 돌고
춤을 추고
여자들이 울고 있다
형제들을 부르고 있다
노간주나무 물푸레나무 아래
어둠으로 인하여
원통한 죽음들로 인하여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어머니 나는 고향땅에 돌아가지 못합니다 신경림
어머니 나는 고향땅에 돌아가지 못합니다
어머니
나는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땅에 돌아가지 못합니다.
밤나무숲 오솔길을 지나 산기슭에
아버지와 함께 묻히신 그 고향땅에 돌아가지 못합니다.
내가 묻힌 땅, 내 피가 스민 흙을 밟고 지나갈
수백만 형제들의 발자국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탱크소리가 아닌, 군화발소리가 아닌
춤추듯 가벼운, 기쁨에 들뜬 발자국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어머니
나는 만세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터지는 포탄소리 총탄소리 아닌
감격과 기쁨의 만세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내 뼈와 살이 썩은 흙 위에서
형제들 얼싸안고 뒹구는 통곡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긴 사십 해 그리웠던 그리웠던 이름 외쳐 부르며
목놓아 우는 울음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어머니
나는 보아야 합니다.
어른 아이 늙은이 젊은이 사내 계집 얼려
월워리청청 강강수월래에 맞춰 빙빙 돌아가는
끝없이 멀리 뻗친 크고 큰 춤을 보아야 합니다.
내 뼈를 쿵쿵 울릴 그 힘찬 춤을 보아야 합니다.
우릴 업수이 본 자들을 우릴 속인 자들을
두려워 떨게 할 그 춤을 보아야 합니다.
바다 밖 멀리 내쫓을 형제들의 춤을 보아야 합니다.
어머니
나는 노랫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어둠 따위 가시밭 따위 불바다 따위 단숨에 몰아낼
그 큰 노랫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 노랫소리에 놀라 도망칠
비겁한 무리들의 초라한 뒷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어머니
이 춥고 어두운 땅 속에 묻혀서
또는 구만 리 적막한 황천을 떠돌며
그날이 오기까지 나는 고향땅에 돌아가지 못합니다.
그 발자국소리 그 노랫소리 듣기까지
형제들의 그 큰 춤 보기까지
나는 어머니가 계신 고향땅에 돌아가지 못합니다.
달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어허 달구 신경림
어허 달구
어허 달구 어허 달구
바람이 세면 담 뒤에 숨고
물결이 거칠면 길을 옮겼다
꽃이 피던 날은 억울해 울다
재넘어 장터에서 종일 취했다
어허 달구 어허 달구
사람이 산다는 일 잡초 같더라
밟히고 잘리고 짓뭉개졌다
한 철이 지나면 세상은 더 어두워
흙먼지 일어 온 하늘을 덮더라
어허 달구 어허 달구
차라리 한 세월 장똘뱅이로 살았구나
저녁 햇살 서러운 파장 뒷골목
못 버린 미련이라 좌판을 거두고
이제 이 흙 속 죽음 되어 누웠다
어허 달구 어허 달구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언덕길을 오르며 신경림
언덕길을 오르며
이 언덕길 따라 올라가면
백두산까지 가겠지.
머리에 하얀 눈 뒤집어쓰고
두 동강난 내 땅
눈물로 굽어보고 서 있는
백두산까지 가겠지.
더러운 것 온갖 먼지에 쓰레기
총이며 칼 따위까지도
몸 한 번 크게 흔들어
털어 버리고 싶어 몸살난
백두산까지 가겠지.
산자락에 호랑이며 곰도 기르고
바위 틈서리에 푸섶에
새며 벌레도 키우면서
잘린 허리 다시 아물 날
이빨 악물고 손꼽아 보는,
턱 아래 산마을에서
멀리 제주 갯마을까지
보듬고 싶어
어루만지고 싶어
밤낮으로 눈물 마를 날 없는,
이 언덕길 따라 올라가면
그 백두산까지 가겠지.
난한 사랑노래, 실천문학사, 1988
여름날 신경림
여름날
버스에 앉아 잠시 조는 사이
소나기 한 줄기 지났나보다
차가 갑자기 분 물이 무서워
머뭇거리는 동구 앞
허연 허벅지를 내놓은 젊은 아낙
철벙대며 물을 건너고
산뜻하게 머리를 감은 버드나무가
비릿한 살냄새를 풍기고 있다
* 마천: 경남 산청군에 속하는 지리산 아랫마을.
길, 창작과비평사, 1990
열림굿* 노래 신경림
열림굿* 노래
네 뼈는 바스라져 돌이 되고
네 팔다리 으깨어져 물이 되어
이루었구나 이 나라 한복판에
크고 깊은 산과 강 이루었구나
네 살은 썩어 흙이 되고
내 피 거름되어 흙 속에 배어
피웠구나 산기슭 강가에
붉고 노란 온갖 꽃 피웠구나
내가 쏜 괴로움에 네게 찔린 아픔에
아흔아홉 고비 황천길
되돌아오기 몇만 밤이던가
울고 떠돌기 몇만 날이던가
이제는 형제들 모여 붙안고 울 때
네 바스라진 머리통에 내 혀를 대고
내 깨어진 어깨에 네 입술을 대고
마음 활짝 열어제껴 통곡할 때
못나고 어리석었던 한세월을 우는구나
우리를 갈라놓고 등져 세우고
갈가리 찢은 자들 찾아 길 나서는구나
너를 쏜 총과 나를 찌른 칼을 버릴 때
우리 몸에 붙은 더러운 먼지를 털 때
원수들에게 더럽혀진 마음을 씻을 때
이제는 울음을 멈추고 몸에 붙은
우리들 몸에 붙은 때와 얼룩을 씻을 때
서로 찌르고 쏜 형제들 다시
아픈 상처 어루만지며 통곡하는구나
썩어 문드러진 팔다리 쓸어안고 우는구나
크고 깊은 산과 강이 따라 우는구나
붉고 노란 온갖 꽃들이 우는구나
들판을 덮은 갈대들이 우는구나
그러나 지금은 우리들 길 나설 때
원수들 찾아 눈 부릅뜨고 우는구나
* 열림굿: 여주․원성․중원 지방의 정원놀이로, 지난 한 해의 다툼과 갈림을 씻는 화해놀이. `열림'은 연다는 뜻과 풍요의 뜻 둘을 함께 가지고 있었으며, 굿을 무당이 주재하지 않고 마을 젊은이들이 자유로운 형식으로 하는 것이 특색임.
달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엿장수 가위소리에 넋마저 빼앗겨 신경림
엿장수 가위소리에 넋마저 빼앗겨
죽은 아이들이 돌아들 오는구나
비석치기 사방치기 자치기 하면서
늦콩 열린 들길 산길을 메우고
엿장수 가위소리에 어깨춤을 추는구나
어허 넘자 요령소리에 비칠걸음 치는구나
사라졌던 것들이 돌아들 오는구나
가시내들 삼베치마 삼승버선 입고 신고
올곡 선뵈는 장골목을 메우는구나
엿장수 가위소리에 덩더꿍이 뛰면서
휘모리 숨찬 가락 흥이 절로 나는구나
잃어진 것 잊혀진 것들이 돌아들 가는구나
살아 있는 것들 데불고 가는구나
도가(都家)집 사랑, 깊은 골방마저
엿장수 가위소리에 넋마저 빼앗겼구나
들판을 고갯길을 선창을 메우면서
가는구나 살아 있는 것들
죽은 아이들 사라진 것들 따라가는구나
달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오월은 내게 신경림
오월은 내게
오월은 내게 사랑을 알게 했고
달뜨는 밤의 설레임을 알게 했다
뻐꾹새 소리의 기쁨을 알게 했고
돌아오는 길의 외로움에 익게 했다
다시 오월은 내게 두려움을 가르쳤다
저자거리를 메운 군화발소리 총칼소리에
산도 강도 숨죽여 웅크린 것을 보았고
붉은 피로 물든 보도 위에서
신조차 한숨을 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마침내 오월에 나는 증오를 배웠다
불없는 지하실에 주검처럼 처박혀
일곱 밤 일곱 낮을 이를 가는 법을 배웠다
원수들의 이름 손바닥에 곱새기며
그 이름 위에 칼날을 꽂는 꿈을 익혔다
그리하여 오월에 나는 복수의 기쁨을 알았지만
찌른 만큼 찌르고 밟힌 만큼 밟는 기쁨을 배웠지만
오월은 내게 갈 길을 알게 했다
함께 어깨를 낄 동무들을 알게 했고
소리쳐 부를 노래를 알게 했다
난한 사랑노래, 실천문학사, 1988
오지일기 신경림
오지일기(奧地日記)
거리에는 아직 가을볕이 따가웠다.
수수밭에 바람이 일고
미류나무가 누렇게 퇴색해도
활석광산으로 가는 트럭이 온 읍내를
먼지로 뒤덮는 추분.
그 탁한 먼지 속에서 나는
한 여자를 알게 되었다.
우리는 사랑을 하게 되었나보다
지치고 맥빠진 그 따분한 사랑을.
사과가 익는 과수원을 돌아
거기 연못을 찾아가면 여자는 이내
말을 잃고 나는 그 곁에서
쓴 막소주를 마셨다.
어디에도 내 친구들은 없었다.
연못 위에는 낮달이 떴으나
떠도는 것은 숱한 원귀들뿐이었다.
여자는 더욱 말을 잃었지만
삶은 갈수록 답답하고 가을이 와도
읍내는 온통 먼지로 뒤덮였다.
물가 술집 마루에 와 앉으면
참빗장수들 구성진 노랫가락
물바람 타고 오고
바라보면 멀리 뻗친 고갯길
타박대는 외지 장꾼들 또 일소들.
여자의 치마에 개흙이 묻어 돌아오는
미류나무가 누렇게 퇴색한 언덕길에서
우리는 사랑을 하게 되었나보다
지치고 맥빠진 그 따분한 사랑을.
수수밭에 바람이 일고 추분이 와도
거리에도 지붕에도 간판에도 가슴에도
온통 뿌옇게 먼지만 쌓였다.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옥대문 신경림
옥대문(玉大門)
하양병 던져라 열두 강 갈라지고
노랑병 던져라 불바다 재가 되네
열려라 돌대문 참칡 거적 위
내 아이들 무릎 안고 새벽잠이 든.
아이들 들쳐업고 열두 강을 건넜네
뇌성벽력 여우꾐에 혼이 빠져도
바위에 찢기고 가시에 긁히면서
빨강병 던졌네 불바다 다시 열어
파랑병 던졌네 열두 강 도로 막혀.
동네 밖에 금줄 쳐 잡귀 막아 놓고
닫혀라 옥대문 떡갈나무 밑
내 아이들 새소리에 눈뜨는 아침.
투전방 뒷전에서 빨강병을 얻었네
떠돌이 책전에서 파랑병을 얻었네
헐린 시골 정거장 대목밑 장날
눈먼 계집 장타령에 노랑병을 얻었네.
강물을 가르고 불바다를 지나
돌대문 열고 가서 내 아이들 업었네.
닫혀라 옥대문 눈뜬 내 아이들
머리 한 올 바람조차 넘볼 수 없게.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우리가 지나온 길에 신경림
우리가 지나온 길에
불기없는 판자 강의실에서는
교수님의 말씀보다
뒷산 솔바람소리가 더 잘 들렸다
을지로 사 가를 지나는 전차소리는
얼음이 깨지는 소리처럼 차고
서울에서도 겨울이 가장 빠른 교정에는
낙엽보다 싸락눈이 먼저 와 깔렸다
그래도 우리가 춥고 괴롭지 않았던 것은
서로 몸을 녹이는
더운 체온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강당 앞 좁은 뜰에서
도서관 가파른 층계에서
교문을 오르는 돌박힌 골목에서
부딪히고 감싸고 맞부비는
꿈이 있어서 다툼이 있어서 응어리가 있어서
겨울은 해마다 포근했고
새해는 잘 트인 큰길처럼 환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지나온 길에
붉고 빛나는 꽃들이 핀 것을 본다
우리들 꿈과 다툼과 응어리가
부딪히고 감싸고 맞부비는 속에
화려하게 피워놓은 꽃들을 본다
난한 사랑노래, 실천문학사, 1988
원격지 신경림
원격지(遠隔地)
박서방은 구주에서 왔다 김형은 전라도
어느 바닷가에서 자란 사나이.
시월의 햇살은 아직도 등에 따갑구나.
돌이 날으고 남포가 터지고 크레인이 운다.
포장친 목로에 들어가
전표를 주고 막걸리를 마시자.
이제 우리에겐 맺힌 분노가 있을
뿐이다. 맹세가 있고 그리고 맨주먹이다.
느티나무 아래 자전거를 세워 놓은
면서기 패들에게서 세상 얘기를 듣고.
아아 이곳은 너무 멀구나, 도시의
소음이 그리운 외딴 공사장.
오늘밤엔 주막거리에 나가 섰다를
하자 목이 터지게 유행가라도 부르자.
사이렌이 울면 밥장수 아주머니의
그 살찐 엉덩이를 때리고 우리는
다시 구루마를 밀고 간다.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밀린 간조날을
꼽아 보고. 건조실 앞에서는 개가
짖어 댄다 고추 널린 마당가에서
동네 아이들이 제기를 찬다. 수건으로
볕을 가린 처녀애들은 킬킬대느라
삼태기 속의 돌이 무겁지 않고
십장은 고함을 질러 대고 이 멀고
외딴 공사장에서는 가을 해도 길다.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유아 신경림
유아(幼兒)
□ 1
창 밖에 눈이 쌓이는 것을 내어다보며 그는
귀엽고 신비롭다는 눈짓을 한다. 손을 흔든다.
어린 나무가 나무 이파리들을 흔들던 몸짓이 이러했다.
그는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이다.
눈이 내리는 까닭을, 또 거기서 아름다운 속삭임들이 들리는 것을
그는 아는 것이다―충만해 있는 한 개의 정물이다.
□ 2
얼마가 지나면 엄마라는 말을 배운다. 그것은 그가
엄마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비밀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르고 있다.
꽃, 나무, 별
이렇게 즐겁고 반가운 마음으로 말을 배워가면서 그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비밀을 하나 하나 잃어버린다.
비밀을 전부 잃어버리는 날 그는 완전한 한 사람이 된다.
□ 3
그리하여 이렇게 눈이 쌓이는 날이면 그는
어느 소녀의 생각에 괴로와도 하리라.
냇가를 거닐면서
스스로를 향한 향수에 울고 있으리라.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잔칫날 신경림
잔칫날
아침부터 당숙은 주정을 한다
차일 위에 덮이는 스산한 나뭇잎.
아낙네들은 뒤울안에 엉겨 수선을 떨고
새색시는 신랑 자랑에 신명이 났다.
잊었느냐고, 당숙은 주정을 한다.
네 아버지가 죽던 날을 잊었느냐고.
저 얼빠진 소리에 귀 기울여 뭣하랴.
마침내 차일 밑은 잔칫집답게 흥청대어
새색시는 시집 자랑에 신명이 났다.
트럭이 와서 바깥 마당에 멎었는데도
잊었느냐고, 당숙은 주정을 한다.
네 아버지가 죽던 꼴을 잊었느냐고.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장자*를 빌려 신경림
장자(莊子)*를 빌려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발 아래 구부리고 엎드린 작고 큰 산들이며
떨어져나갈까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언덕과 골짜기에 바짝 달라붙은 마을들이며
다만 무릎께까지라도 다가오고 싶어
안달이 나서 몸살을 하는 바다를 내려다보니
온통 세상이 다 보이는 것 같고
또 세상살이 속속들이 다 알 것도 같다
그러다 속초에 내려와 하룻밤을 묵으며
중앙시장 바닥에서 다 늙은 함경도 아주머니들과
노령노래 안주해서 소주도 마시고
피난민 신세타령도 듣고
다음날엔 원통으로 와서 뒷골목엘 들어가
지린내 땀내도 맡고 악다구니도 듣고
싸구려 하숙에서 마늘장수와 실랑이도 하고
젊은 군인부부 사랑싸움질 소리에 잠도 설치고 보니
세상은 아무래도 산 위에서 보는 것과 같지만은 않다
지금 우리는 혹시 세상을
너무 멀리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너무 가까이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장자(莊子)』 추수편(秋水篇)에 `대지관어원근(大知觀於遠近)'이라는 글귀가 있음.
길, 창작과비평사, 1990
전야 신경림
전야(前夜)&
그들의 함성을 듣는다
울부짖음을 듣는다
피맺힌 손톱으로
벽을 긁는 소리를 듣는다
누가 가난하고
억울한 자의 편인가
그것을 말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달려 가는 그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쓰러지고 엎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그 죽음을 덮는
무력한 사내들의 한숨
그 위에 쏟아지는 성난
채찍소리를 듣는다
노랫소리를 듣는다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제삿날 밤 신경림
제삿날 밤
나는 죽은 당숙의 이름을 모른다.
구죽죽이 겨울 비가 내리는 제삿날 밤
할일 없는 집안 젊은이들은
초저녁부터 군불 지핀 건넌방에 모여
갑오를 떼고 장기를 두고.
남폿불을 단 툇마루에서는
녹두를 가는 맷돌 소리.
두루마기 자락에 풀 비린내를 묻힌
먼 마을에서 아저씨들이 오면
우리는 칸데라를 들고 나가
지붕을 뒤져 참새를 잡는다.
이 답답한 가슴에 구죽죽이
겨울비가 내리는 당숙의 제삿날 밤.
울분 속에서 짧은 젊음을 보낸
그 당숙의 이름을 나는 모르고.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진드기 신경림
진드기
지금 우리는 너무
쉽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너무 편하게만 살려고 드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먹고 자고 뒹구는 이 자리가
몸까지 뼛속까지 썩고 병들게 하는
시궁창인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짐짓 따스하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이 자리가
암캐의 겨드랑이나 돼지의
사타구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음습한 그곳에 끼고 박힌 진드기처럼
털과 살갗의 따스함과 부드러움에 길들여져
우리는 그날 그날을 너무 쉽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시큼한 냄새와 떫은 맛에 취해
너무 편하게 살려고만 드는 것은 아닌가,
암캐나 돼지가 타 죽는 날
활활 타는 큰 불길 속에 던져져
함께 타 죽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서.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 1993
찔레꽃 신경림
찔레꽃&
아카샤 꽃냄새가 진한 과수원 샛길을
처녀애들이 기운없이 걷고 있었다
먼지가 켜로 앉은 이파리 사이로
멀리 실공장이 보이고 행진곡이 들리고
기름과 오물로 더럽혀진 냇물에서
아이들이 병든 고기를 잡고 있었다
나는 한 그루 찔레꽃을 찾고 있었다
가라앉은 어둠 번지는 종소리
보리 팬 언덕 그 소녀를 찾고 있었다
보도는 불을 뿜고 가뭄은 목을 태워
마주치면 사람들은 눈길을 피했다
겨울은 아직 멀다지만 죽음은 다가오고
플라타나스도 미류나무도 누렇게 썩었다
늙은이들은 잘린 느티나무에 붙어앉아
깊고 지친 기침들을 하는데
오직 한 그루 찔레꽃이 피어 있었다
냇가 허물어진 방죽 아래 숨어 서서
다가오는 죽음의 발자욱을 울고 있었다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철길 신경림
철길
내 형제들의 피를 빨고
땀을 짜서 놓은 철길을 타고 가서
구경하는 금강산은 아름다울까
내 친구들의 졸라맨 허리와
앙상한 갈비뼈를 짓밟은 발들과 나란히
밟아보는 북녘 들판은 부드러울까
내 이웃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피묻은 손에 이끌려
잡아보는 동포들의 손은 따스할까
길, 창작과비평사, 1990
파도 신경림
파도&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저 바다 언제까지나
잠들어 있으리라 생각했으니.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저 파도 일제히 일어나
아우성치고 덤벼드는 것 보면.
얼마나 신바람나는 일인가
그 성난 물결 단번에
이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
씻어내리리 생각하면.
길, 창작과비평사, 1990
파장 신경림
파장(罷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폐광 신경림
폐광(廢鑛)
그날 끌려간 삼촌은 돌아오지 않았다.
소리개차가 감속을 날라 붓던 버력 더미 위에
민들레가 피어도 그냥 춥던 사월
지까다비를 신은 삼촌의 친구들은
우리 집 봉당에 모여 소주를 켰다.
나는 그들이 주먹을 떠는 까닭을 몰랐다.
밤이면 숱한 빈 움막에서 도깨비가 나온대서
칸데라 불이 흐린 뒷방에 박혀
늙은 덕대가 접어 준 딱지를 세었다.
바람은 복대기를 몰아다가 문을 때리고
낙반으로 깔려 죽은 내 친구들의 아버지
그 목소리를 흉내내며 울었다
전쟁이 끝났는데도 마을 젊은이들은
하나하나 사라져선 돌아오지 않았다.
빈 금구덩이서는 대낮에도 귀신이 울어
부엉이 울음이 삼촌의 술주정보다도 지겨웠다.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폐촌행 신경림
폐촌행
떨어젼 나간 대문짝
안마당에 복사꽃이 빨갛다.
가마솥이 그냥 걸려 있다.
벌겋게 녹이 슬었다
잡초가 우거진 부엌바닥
아무렇게나 버려진 가계부엔
콩나물값과 친정어미한테 쓰다 만
편지
빈집 서넛 더 더듬다가
폐광을 올라가는 길에서 한 늙은이 만나
동무들 소식 물으니
서울 내 사는 데서 멀지 않은
산동네 이름 두어 곳을 댄다.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 1993
함성 신경림
함성(喊聲)
한때 우리는 말을 잃었다.
눈을 잃고 귀를 잃었다.
짙은 어둠이 온 고을을 덮고
골목마다 안개가 숨을 막았다.
웃음을 잃고 노래를 잃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우리는 몰랐고
누구를 찾고 있는가 우리는 몰랐다.
꽃의 아름다움 저녁놀의 서러움도
우리는 몰랐다.
그러나 우리는 보았다 그날
이 어둠 속에서 일어서는 그들을.
말을 찾아서 빛을 찾아서
웃음을 찾아서 내달리는 그들을.
어둠을 내어모는 성난 아우성을.
구름 사이로 내비치는 햇빛을 보았다.
먼 숲 속의 새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은 거리를 메우고
이제 이 땅에 봄이 영원하리라 했으나
그러나 아아 그러나
모진 폭풍이 다시 몰아쳤을 때
우리는 잊지 않으리라 비겁한 자의
저 비겁한 몸짓을 거짓된 웃음을.
용기 있는 자들은 이 들판에 내어쫓겨
여기 억눌린 자와 어깨를 끼고 섰다.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를 듣고 섰다.
저것이 비록 죽음의 종소리일지라도.
한 사람의 노래는 백 사람의 노래가 되고
천 사람의 아우성은 만 사람의 울음이 된다.
이제 저 노랫소리는
너희들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어깨를 끼고 섰다.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허재비굿*을 위하여 신경림
허재비굿*을 위하여
잡아주오 내 손을 잡아주오.
흙 속에 묻힌 지 삼십 년
원통해서 썩지 못한 내 손을 잡아주오.
총알에 으깨어지고 칼날에 찢어진
내 팔다리를 일으켜주오.
밤마다 내 어머니 흐느껴 우는 소리 들리지만
나는 갈 수 없어,
산과 들을 헤매이며 나를 찾는
어머니 통곡소리 들리지만 나는 못 가.
철적은 비 구죽죽이 내리는 밤이면
머리 쥐어뜯으며 흐느끼기도 하고
늑대 애터지게 울어쌓는 찬 새벽이면
엉금엉금 흙 속을 기어보기도 하지만,
내 형제가 내 가슴을 쏜 것이
나는 원통해,
내 친구가 어깨 찌른 일을
나는 믿을 수가 없어.
복사꽃처럼 붉던 두 볼에 젖무덤에 허벅지에
검푸른 풀 돋으리라 어이 알았으리.
잡아주오 내 손을 잡아주오
원통해서 썩지 못한 내 손을 잡아주오.
잡으리라 내 그대 손 잡으리라.
나 또한 어깨에 등허리에 머리통에
총알이 박힌 채 대창이 꽂힌 채.
우리가 쏘고 맞고 찌르고 찔리면서
죽던 그날을 나는 잊지 못해.
새빨간 노을 속으로
가마귀떼 날아가던 그 가을 언덕을
나는 잊지 못해.
피 쏟으며 쓰러지던 그대 그
붉은 입술을 나는 잊지 못해.
삼천 날 삼천 밤을 뉘우쳤지,
흙 속에서 통곡하며 뉘우쳤지.
우리는 원수가 아니라오, 미워하지도 않았다오.
잡으리라 내 그대 손 잡으리라.
원통해서 썩지 못한 그대 손 잡으리라.
아직 더운 내 입김으로 내 혓바닥으로
그대 상처 녹이리라.
그리하여 날아가리라 함께 날아가리라,
그대 어머니 내 어머니 울음소리 들리는 곳,
내 친구들 형제들 노랫소리 울음소리
가득한 곳으로.
잡으리라 원통해서 썩지 못한
그대 손 잡으리라.
햇빛 온 누리에 가득한 곳으로
그대 손 잡고 날아가리라.
* 허재비굿: 동해안 지방에서 젊은 원혼의 인연을 맺어줄 때 하는 굿으로, 화해의 뜻이 깊음.
달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홍천강 신경림
홍천강
뒷짐을 지고 서양개처럼 뛰면서 받아먹어야
초콜릿과 비스킷을 던져주는 조지나 톰보다도
레이션 한 상자를 훔치고서 집차 뒤에 쇠줄로 묶여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연병장을 도는 못난 어른들이 나는 미웠다
그해 겨울엔 유난히 눈이 많이 와
내가 베네트라는 백인 장교의 양말을 빨고 구두를 닦고
야전침대에서 발치잠을 자다가
멀리서 들리는 야포 소리에 잠이 깨어
천막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보면
눈발이 모래알을 몰아다가 얼굴을 때렸다
나는 담배 한 가치에 드로프스 한 알에 누런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동네 할아버지들이 꿈속에서도 미웠다
달밤이면 승냥이 우는 소리에 섞여
중공군이 분다는 호적 소리도 들리는데
기계충 오른 아이들만을 모아 사진을 찍고
통조림 깡통을 강물에 던져
허기진 아이들을 허겁지겁 살얼음 언 물 속에 뛰어들게 하는 그
백인 장교는 한국을 사랑한다고 했다
한밤에도 그는 금발의 딸 사진을 꺼내보며 훌쩍대고
나는 머지않아 양키 대신 오랑캐의
양말을 빨고 구두를 닦게 될지도 모른다는
부질없는 걱정에 잠 설치는 밤이 많았다
잔치 구경을 가는 날은 장난으로 총질을 해서 손님을 쫓고
심심풀이로 암소를 쏘아죽이는 흑인병사보다
말끝마다 이들을 은인이라 두둔하고
술대접에 허리가 굽는 동네 어른들이 나는 미웠다
유난히 밤이 춥고 무서워 한밤중에
꺾어진 미류나뭇가지가 천막을 후려치고
얼음이 죽은 병사들의 웃음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홍천강이 그해 겨울 내게 가르친 것은 미움뿐이었다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읍내를 어슬렁거리며
삽작을 밀어보기도 하고 거적대기를 들쳐보기도 하는
지아이보다도 읍내 처녀애들이 더 미워
영어 마디나 배우겠다고 따라다니는 여학생 애들이 더 미워
좀체 잠이 안 오는 그런 달밤이면 등너머에서는 승냥이가 울고
눈 위로 미끄러지며 호적소리가 들리고 머지않아 이 고장에도
중공군이 온대서 홍천강은 겨우내 뒤숭숭했다
난한 사랑노래, 실천문학사, 1988
화톳불, 눈발, 해장국 신경림
화톳불, 눈발, 해장국
새벽 장바닥에 화톳불이 탄다
누더기가 타고 운동화가 탄다
구두닦이와 우유배달이 서서 불을 쬔다
매운 바람은 불꽃을 날리고
널조각이 탄다 삭정이가 탄다
가겟문 여는 소리 가래 뱉는 소리
이른 장바닥에 눈발이 날린다
부드럽고 가는 눈발이 날린다
신문배달 오토바이와 쓰레기차에 날린다
방범대원의 움츠린 어깨 위에 날린다
포장마차에 날리고 채소더미에 날린다
채소더미 뒤 대폿집에서 해장국이 끓는다
담뱃자국 곰보식탁에 미장이가 앉았다
운전수가 앉았고 청소원이 앉았다
뜨거운 국물들을 훌훌 마신다
밝아오는 장바닥에 화톳불이 탄다
화톳불 위에 눈발이 날린다
눈발 속에서 해장국이 끓는다
삐걱대는 걸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뜨거운 국물들을 훌훌 마신다
언청이도 마시고 곰배팔이도 마신다
낚시꾼도 마시고 장꾼도 마신다
들이치는 눈발 머리칼에 맞으며
더러는 언 어깨들을 기댄다
새봄 이른 새벽 화톳불이 탄다
지난 겨울의 쓰레기들이 타고
너절한 것들 더러운 것들이 탄다
부끄러운 것들이 탄다 잊고 싶었던 것
버리고 싶었던 것들이 탄다
화톳불 위에 눈발이 날리고
눈발 속에서 해장국이 끓는다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