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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19일(일요일)
남부지방엔 비가 내린다고 하는데 이곳 강원도 영월은 무척 더운 여름 날씨를 보인다.
부산의 "유유자적 여행자 클럽" 회원들과 함께
강원도 영월땅, 조선의 6대 왕 단종의 슬픔을 간직한 육지속의 작은 섬 "청령포"와
그곳 근처에 모셔진 단종의 능(사적 제 196호로 지정)이 있는 "장릉"까지 역사 기행을 다녀왔다.
부산에서 오전 07;00시 출발하여 4시간쯤 버스로 이동하니 역사가 살아 숨쉬는 땅 "영월"에 도착한다.
높고 가파른 산이 겹겹히 솟아있는 영월땅엔 그옛날 슬픔을 아는양 동강과 서강은 말없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국가지정 명승 제 50호로 지정된 - 청령포(淸泠浦)
조선 제 6대 왕인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상왕으로 있다가,
그 다음해인 1457년 성산문 등 사육신들의 상왕복위의 움직임이 사전에 누출됨으로써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첨지중추원사 어득해가 거느리는 군졸 50인의 호위를 받으며 원주, 주천을 거쳐 이곳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청령포는 동, 남, 북 삼면이 물로 둘러싸이고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 없는 마치 섬과도 같은 곳이다.
단종은 이 적막한 "물의 감옥"에서 여름 두달을 나고,
그 해 뜻밖의 큰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기게 되자
영월 동헌의 객사인 관풍헌(觀風軒)으로 처소를 옮겼다가 음력 10월 24일 사약을 받는다
소나무들이 짙게 우거져 서늘한 그늘을 만들고 있는 청령포에는 단종이 기거했던 "단종어소"와
영조 임금의 친필로 음각된 "단묘재본부시유지", 금표비와 관음송 노산대 그리고 망향탑 등이 그옛날 단종의 슬픔을
아는양 말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영월군 홍보사이트에서 일부 발췌함)
유유히 흐르는 앞에 보이는 서강을 건너야 육지 속의 작은 섬인 "청령포"에 도착한다
함께한 일행이 84명이라서 쉽게 나룻배를 건너는것도 어렵고 힘이든다.(강 건너 청령포가 보인다)
소나무들이 짙게 우거져 서늘한 그늘을 만들고 있는 청령포의 "단종어소"에 도착하였다.
단종어소(端宗御所)란 단종이 머물던 곳으로 일행이 어소 본체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이 고장 출신의 해설사(이갑순)로 부터 이곳에 얽힌 슬픈 이야기를 숙연하게 경청하고 있다
대청마루 입구에 걸려있는 사적 제196호로 지정된 단종의 심정을 노래한 "어제시"(御製詩)(아래 사진)
적막강산인 이곳에서 단종(端宗)의 외롭고 슬픈 삶을 한편의 시로 편찬되어 걸려 있었다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
단종이 계셨던 옛 터는 1763년에 세워졌으며, 총 높이 162cm 크기의 화강석 비좌 위에 오석으로 제작되어
앞면에는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 라고 영조대왕이 친필로 음각하셨고,
그 뒷면에는 "황명숭정무진기원후삼계미계추읍체경서 영원영수석"(皇命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秋泣涕敬書 令原營石
영조 39년 계미년 가을 울면서 받들어 쓰고, 어명에 의하여 원감영에서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영월군 홈페이지에서)
단종어소를 향하여 큰절을 올리듯 굽어있는 소나무들
삼면이 강물로 둘러싸여 있고 나머지 한쪽은 험준한 산과 절벽으로 막혀 있어
나룻배로 강을 건너지 않고서는 드나들 수 없는 바다 한가운데에 섬 처럼 외로운 "청령포"
청령포 안의 단종 어소(御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면서
마주한 소나무들 중 몇 그루는 담장을 넘어 큰절을 올리듯 절묘하게 굽어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노라니 내가 걷는 걸음마다 단종의 애끊는 마음이 알알이 닿는 느낌이다.
단종어소 밖에 세워진 처소
단종의 시중을 들던 하인들이 기거하던 곳을 복원하여 만들었다.(사진 위)
관음송(觀音松)
수령 600여년이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30m정도이며,
가지는 동, 서쪽으로 22m, 남, 북쪽으로 19.5m라고 한다
지상에서 1.6m정도 되는곳에서 두갈래로 우람하게 자란 관음송은
그 옛날 단종이 그 나무에 걸터앉아 상념에 젖곤 했던 모습을 늘 보고(觀)
때로는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音)는 뜻에서 관음송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관음송을 지나서 노산대와 망향탑이 있는 곳으로 계단을 향하였다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이 굽이치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이곳에 올라 한양을 그리워했다는 노산대(魯山臺)(위 사진)
한양에 두고온 아내 "정순왕후" 송씨를 그리워 하며.....하나, 둘, … 돌탑을 쌓았다는 망향탑(아래 사진)
어린 나이에 작은 돌탑만큼 애잔한 그 마음은 세월마저 비켜간채 한이 되어 서려 있는듯 하다.
금표비(禁標碑)
묘비 앞면에는 청령포 금표(淸泠浦 禁標)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동서 300척, 남북 490척'이라는 글씨가 뚜렷하게 새겨진 금표비
조선 시대 영조 2년인 1726년에 세워진 이 금표비는 왕이 계시던 곳이므로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표식이다.
하지만 '동서 300척, 남북 490척'이라는 지역 제한은 단종에게 내려진 행동반경의 제약이기도 하여 애절함이 더해진다.
청령포 수림지(천년의 숲으로 지정됨)
영월군 남면 광천리 청령포에 위치한 이 수림지는
수십 년에서 수백 년생의 거송들이 들어찬 수림지로 단종의 유배처를 중심으로 주위에 울창한 송림을 이루고 있다.
나룻배가 없으면 쉽게 나올 수 없는 절해고도 청령포
강에 떠있는 작은 모래섬 같은 아름다운 청령포가 어쩐지 더 애잔하게 느껴진다
청령포를 뒤로 하고 단종의 시신이 잠들어 있는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의 "장릉"으로 발길을 옮겼다.
청령포는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단종의 유배지로, 2008년 12월 국가지정 명승50호로 지정 되었으며,
수려한 절경으로 인하여 사시사철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곳에 얽힌 단종의 비화를 아는 사람이 몇명이나 될까
숙부 수양대군에게 어린나이에 목숨을 잃은 단종이 지었으며 "장릉지"에 실렸다는 "자규시"란 단종의 시(詩)를 생각케 한다
자규시(子規詩 = 소쩍새 시) - 단종(端宗)
一自寃禽出帝宮 (일자원금출제궁) : 한 마리 원통한 새 궁중을 나와
孤身隻影碧山中 (고신척영벽산중) : 외로운 몸 외짝 그림자 푸른 산중을 헤맨다
假眠夜夜眠無假 (가면야야면무가) : 밤마다 잠을 청하나 잠은 이룰 수 없고
窮恨年年恨不窮 (궁한년년한불궁) : 해마다 한을 다하고자 하나 한은 끝이 없네.
聲斷曉岑殘月白 (성단효잠잔월백) : 자규 소리도 끊긴 새벽 묏부리 달빛만 희고
血流春谷落花紅 (혈류춘곡낙화홍) : 피 뿌린 듯 봄 골짜기 떨어진 꽃이 붉구나.
天聾尙未聞哀訴 (천롱상미문애소) : 하늘은 귀머거리라 슬픈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
何乃愁人耳獨聽 (하내수인이독청) : 어찌해서 수심 많은 내 귀만 홀로 듣는가.
무엇이 열일곱 소년으로 하여금 그토록 절절한 시를 남기게 한것일까?
잠시 옛 기록을 따라 500여년전 영월로 돌아가 단종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늘 어린 손자를 등에 업고 궁정을 거닐며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할아버지 세종과의 추억도 떠오르고
집현전 학사들에게 세자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비명에 간 아버지 문종의 인자한 얼굴도 떠오른다.
자신을 낳은지 3일만에 세상을 떠났다는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의 복위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사육신의 눈물도 생각난다.
무엇보다 청계천 영도교에서 생이별한 아내 정순왕후의 그리운 얼굴이 사무치게 보고싶다.
그러나 단종은 살아서 영월을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라고 이미 체념했을지도 모른다.
숙부 세조의 서슬 퍼런 기운은 어린 그가 넘보기에는 너무나 높고 강한 것이였다.
죽음 앞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던 사육신의 마음을 잊을 수 없다.
자신이 숙부에게 옥쇄를 내어줄 적에 애통함을 참지 못하고 연못에 뛰어들어 죽으려 했다는 박팽년의 마음,
그리고 세조의 달콤한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끝끝내 단종을 향한 충정을 보여줬던 성삼문의 마음,
두 사람의 흐트러짐 없는 절개를 표현한 시는 지금도 후세에 전하여 진다.(영월군 장릉 관리소에서 옮김)
박팽년의 시 성삼문 - 충의가
까마귀 눈 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 고 하니
야광명월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이 되어서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정하리라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자리한 "장릉"(莊陵)으로 자리를 옮겼다.
장릉은 어린 단종의 능이 있는곳으로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하여
단종의 혼과 충신들의 넋을 기리며, 발길 닿는곳 마다 그분들의 한과 넋이 남아 있는곳이다
2009년 6월 30일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내용이 장릉입구 화강석에 새겨져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조선왕릉답게 재실(齋室)이 가장 먼저 눈에 보인다(위 사진)
재실이란 재사와 관련한 전반적인 준비를 하는곳으로 왕릉을 관리하던 능참봉이 상주하는 곳이다.
"엄흥도정려각"
1726년(영조 2년)에 어명으로 세운 비각으로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는 정여문(旌閭門)
어린 나이에 죽임을 당한 단종은 동강에 버려졌으며. 시신을 거두는자는 죽임을 당할거라는 어명이 있었지만
영월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한밤중에 몰래 시신을 거두어 지게에 지고 동을지산(冬乙旨山)으로 향하여
시신을 암장했던 높은 뜻을 기려 엄흥도정려각을 이곳 장릉 입구에 세웠다고 한다
"홍살문"(紅살門)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문으로 붉은 칠에 둥근 기둥 2개를 세우고 위에는 살을 박아 놓았다.
홍문 또는 홍전문이라고 하는데.....이곳 출신 해설가의 설명에 의하면 단종능 앞에는 홍살문이 새워져 있지 않다고 함
홍살문 처럼 만들어진 붉은 기둥의 문이라고 설명한다
배식단(配食壇)
이곳은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 조사위, 환자군노위, 여인위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매년 단종제향을 올린 후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었다..(사진 위)
신도(神道)
앞에 보이는 돌(石)로 만들어진 길이 신도라고 하며, 신도는 신이 다니는 길이라고 함
일반인들은 좌측 흑길로 걸어다녀야 하는데....신이 아니면서 신처럼 이길을 걷고 있다니.....
위 사진중 맨 오른쪽의 누각은 "장판옥"이라 하며
장판옥엔 충신위 32인, 조사위 186인, 환관군노위 44인, 여인위 6인의 합동 위패를 모셔놓은 곳이며,
가운데 누각은 "수복방"으로 능과 경내를 관리하는 능지기가 기거하던 곳으로 영조 9년에 정자각과 함께 세운 것이며
왼편 누각은 "비각"으로 주인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 등을 모시거나 세워두는 곳이라고 한다
비각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담았다(사진 위)
비각 내부에는 아래 사진에서 처럼 커다랗게 "조선국 단종대왕장릉"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정자각 앞에 커다란 느릅나무가 자리하고 있다.(위 사진)
수령 370년 된 느릅나무로 수고(높이)는 22m, 나무둘레 3.9m
2003년 11월15일에 강원 영월 41호로 지정된 보호수라는 팻말이 있다.
정자각(丁字閣)
장릉의 맨 안쪽에 자리한 누각으로
능의 제향을 올리는 정(丁)자 모양으로 지은 집으로 제향을 올릴때 왕의 신주를 이곳에 모신다고 한다
해설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곳에서 한가지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많은 관람객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소원을 빌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래 사진은 위 정자각 내부의 모습
제사를 올리때는 여러가지 필요하겠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재단모습
위 사진 정자각 위로 호장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지게에 지고 와서 묻었다는 "단종릉"이 보인다
이곳 정자각의 참배를 마치고 단종릉으로 걸음을 옮길것이다
영천(靈泉)
정자각 아래에 만들어진 샘물로
단종제를 올리는 한식때 제정(祭井)으로 사용했던 우물
샘물안에는 맑은 물이 고여 있으며.....누군가 동전을 넣어서 제사를 지낼때는 새로 물을 받아야할 뜻
(이런곳에 다니면서 제발 동전이나 이물질 넣지 맙시다)
장릉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단종릉"을 찾았다
엄흥도기 단종의 시신을 지게에 지고 이곳에 도착하였을때
언덕위 소나무 밑에 숨어있던 노루 한마리가 놀라 달아났는데
그 자리를 보니 눈이 녹아 있어 그곳에 지게를 내려놓고 쉬었는데,
깊은 산골로 옮기려 했으나 지게가 움직이지 않자 노루가 있던 이곳에 시신을 암장했다고 한다
역사상 가장 슬프고도 애환이 많은 단종의 능은
처음부터 택지된 곳에 조성한 능이 아니기 때문에 여느 조선 왕릉의 구조와 다른 점이 많다고 하며
조선 왕릉은 한양 100리 안에 모시는 것이 관례였지만 단종의 능은 지방에 모셔진 유일한 능이라고 한다
그러나 장릉 주위의 소나무들은 모두 이곳 단종 능을 향해 절을하듯 굽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경이로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칡줄다리기
위 칡줄은 2011년 제 45회 단종 문화제때 20일 동안 동편(영월역)과 서편(문화예술회관)에서
각각 제작하여 칡줄다리기에 사용되었던 것을 이곳을 찾는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이곳 장릉에 전시하고 있다는 표지석이 이곳에 함께 세워져 있다.
칡줄다리기는 단종이 복위되던 숙종 임금때부터 시작되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 중단되었던 칡줄다리기는 1967년 단종문화제 때 다시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칡줄의 길이 35m, 무게 6톤에 달하는 칡줄을 200여명의 장정이
동강을 중심으로 동, 서 양편으로 나뉘어 줄다리기를 하는데, 그 광경이 국내 최대 규모라고 한다.
칡줄을 잘라 품에 간직하면 아들을 낳는다는 비방이 알려지면서 줄다리기가 끝나면
많은 부녀자들이 칡줄을 자르기 위해 모여 든다고 한다(요즘은 딸을 선호 한다는데.....과연 그럴까?....ㅎ)
(장릉 입구에 세워진 "단종 역사관"의 모습)
비운의 왕 - 단종(端宗),
단종은 1441년 7월 23일 (세종23년)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 權氏) 사이에서 원자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홍위(弘暐) 이다. 8세가 되던 1448년(세종30년)에 왕세손에 책봉 되었고,
예문관제학 윤상(尹祥) 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450년 2월(세종32년)에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하게 되자 그해 7월 20일 왕세손이었던 홍위는 10세의 나이로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452년 5월 18일 문종이 승하후 단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12세의 어린 나이로 제6대 왕에 즉위하였다.
계유정난(癸酉靖難) 이후 1455년 6월 11일 단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5세에 상왕이 되었으며(재위기간1452~1455년), 뱍팽년, 성삼문 등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모두 죽임을 당하는 사육신사건이 일어나 1457년(세조3년) 노산군으로 강봉된 뒤 1457년 윤 6월 22일 창덕궁을 출발하여, 7일 후인 윤 6월 28일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그해 9월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 가 다시 그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사되자 단종은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내려지고 결국 죽음을 강요당해 1457년 10월 24일 유시에 17세의 어린 나이로 관풍헌에서 승하하였다.(이상 영월 장릉관리소 홈페이지 부분 옮김)
이상으로 울창한 송림과 단종의 슬픔을 간직한 육지 속의 작은 섬 "청령포"와
조선 제 6대 단종의 단종의 왕릉이 모셔진 "장릉"의 이야기를 마치고
다음편은 영월군 방절리에 있는 "선돌" 모형과 대한민국 지형과 너무도 닮은 "한반도 지형" 모습과
한국의 100선에 선정된 주천강의 아름다운 "요선정"과 적멸보궁이 자리한 "법흥사"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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