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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신라왕실과 고려왕실의 칭호
김창현(고려대학교 강사)
1. 머리말
2. 왕실 남성의 칭호
3. 왕실 여성의 칭호
4. 맺음말
1. 머리말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였지만 고려 건국 때 고구려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시간적으로 이어지는 신라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고려는 신라의 문물을 바탕으로 중국의 문물을 수용해 새로운 문물을 창출했다.
왕조시대에 왕실은 국가를 대표하는 존엄한 위상을 지녔으니 왕실 구성원의 칭호는 역사성, 정치성, 사회성을 강하게 띠었다. 왕실 구성원의 칭호는 신라, 고려, 조선이 비슷한 점도 있었고 다른 점도 있었다. 신라와 고려는 역사적으로 이어지므로 왕실 구성원의 칭호에서 영향을 주고받은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본고에서는 신라왕실과 고려왕실의 구성원 칭호를 비교해 고찰하려 한다. 왕실 구성원을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되 남성은 왕, 왕자, 왕의 형제를, 여성은 왕비, 왕녀, 왕의 자매를 다루려고 한다.
2. 왕실 남성의 칭호
1) 신라 왕실
신라 왕실의 칭호를 남성인 임금, 임금의 형제, 임금의 아들에 한정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신라의 임금은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王(大王, 太王, 國王 포함) 등의 순서로 호칭이 변화했다. ‘왕’은 마립간 시기와 그 이전에도 사용되었다. 중원 고구려비에는 寐錦으로, 울진 봉평비에는 ‘寐錦王’(牟卽智寐錦王: 법흥왕)으로 표현되었는데 연구자들은 대개 그것을 마립간과 같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지증 마립간 4년에 신하들이 上言하여 사라, 사로, 신라 등으로 불리던 국호를 ‘德業日新 網羅四方’의 뜻을 지닌 ‘新羅’로 고정하기를 요청하고, 옛적부터 국가를 가진 자는 모두 稱帝․稱王한다며 시조 이래 22世 동안 방언으로 칭해 온 尊號를 바로잡기를 요청하면서 ‘新羅國王’이라는 칭호를 올렸다. 이리하여 신라의 임금은 신라국의 왕 내지 신라의 국왕으로 탈바꿈하였다. 이후 신라의 임금은 왕, 대왕, 국왕 등으로 불려졌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왕을 칭하기 전에 거서간을 칭한 자가 1명, 차차웅을 칭한 자가 1명, 이사금을 칭한 자가 16명, 마립간을 칭한 자가 4명이었다. 이사금이 압도적인 다수였고, 마립간도 이사금의 변형으로 보인다. 이는 이사금이 신라 임금의 위상을 결정지은 주요 요소였음을 시사한다.
이사금은 대개 齒理로 상징되는 나이로 결정되었다. 왕족에서 사위를 포함한 연장자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곤 했다. 임금의 자리가 부자상속보다 연장자 상속, 형제상속(자매의 남편 포함)으로 이어졌다. 이는 신라가 기본적으로 부족연합적인 정권 내지 귀족연합적인 정권이었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었다.
신라의 왕권은 법흥왕(지증왕의 원자) 이래 진덕여왕까지 불교식 왕명을 사용하면서 고양되어 갔다. 삼국유사 황룡사구층탑 항목에 따르면 신라국왕은 天竺刹利種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진흥왕이 고구려와 백제를 물리쳐 영토를 크게 확장하면서 신라 중심의 천하관이 고양되었다.
불국토를 다스리는 신라왕은 전륜성왕 혹은 제석천(天帝)으로 인식되었고 석가모니의 부친으로 설정되기도 했다. 이처럼 신라를 중심으로 보는 불교식 천하관은 유교식으로 말하면 신라가 천자국 내지 황제국이고 국왕이 천자 내지 황제로 인식된 것이었다. 특히 선덕여왕은 도전받는 여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측면이 있지만 ‘聖祖皇姑’라 불렸고 天帝釋 즉 天帝의 분신으로 간주되었으니 바로 황제였다.
법흥왕~진흥왕 때 大王興輪寺가, 진흥왕 때 皇龍寺가, 선덕여왕 때 芬皇寺와 황룡사 9층탑이 창건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의상이 皇福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문무왕의 동생 車得公이 거처한 대내(대궐)가 황룡사와 皇聖寺 사이에 있다고 삼국유사에 되어 있는데, 황성사는 聖法興大王 즉 법흥왕이 창건한 대왕흥륜사로 여겨진다. 이러한 사원들에는 신라 국왕의 천자 내지 황제로서의 위상이 투영되었다. 특히 불교식 왕명 시대인 이 시기에 신라의 독자적 연호가 각 왕마다 자주 반포되었음이 주목된다. 이 시기는 建元을 했고, 稱帝를 한 것과 다름 없었다.
신라는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 때 삼국 통일을 이루면서 왕권이 강화되고 유교식 천하관이 확산되었다. 문무왕은 고구려의 귀족 안승을 금마저의 고구려왕 내지 보덕왕에 책봉해 거느렸다. 문무왕이 누이를 보덕왕 안승과 결혼시키자 안승이 帝女와 결혼하게 되었다며 감사를 올렸다. 신라 국왕은 황제 내지 천자로도 인식되었던 것이다. 신라가 쇠퇴한 후삼국 시대에도 신라는 여전히 천자의 나라로 인식되었다. 이는 고려의 왕 왕건이 후백제 왕 견훤에게 보낸 문서에 신라를 周에 비유하여 尊周․尊王을 표명한 데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신라인들이 자신의 임금을 직접적으로 天子 내지 皇帝로 표현한 사례는 잘 찾아지지 않는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 때에는 공식적으로 칭제건원할 만한 기회였는데 그러하지 못했으며 그 이후도 그랬다. 진덕여왕 때 독자적인 연호를 쓰다가 당으로부터 원군을 얻기 위해 연호를 중단했는데 무열왕이나 문무왕도 독자적인 연호를 쓰지 못했고 그 이후도 그랬다.
신라는 당과의 전쟁을 수행해 당의 세력을 몰아내긴 했지만 당에게 큰 빚을 졌고 세계를 제패한 당과의 충돌을 원하지 않았다. 삼국통일로 국가와 국왕의 위상은 올라갔지만 그러한 사정으로 인해 신라는 공식적으로 칭제건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황제나 천자라는 표현은 잘 쓰이지 않았다. ‘祖宗’의 표현은 김씨 왕의 시조를 太祖, 무열왕을 太宗이라 한 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임금의 사망을 薨이라 표현했으며, 신라 임금의 자칭을 寡人, 명령을 교敎, 존칭을 殿下라 표현했는데, 下代에는 자칭을 간간이 朕, 中代 이후에는 문무왕의 유언을 ‘遺詔’라 표현한 사례처럼 왕명을 간간이 詔라 표현했다. 진흥왕은 순수비에서 자신을 朕이라 칭했다. 진성여왕 때 최치원이 찬술한 숭복사비는 진성여왕을 大王殿下라 표현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임금의 사망이 崩, 자칭이 朕, 명령이 詔․勅, 존칭이 陛下로 표현되어 있다. 삼국의 임금을 本紀에 넣고 임금의 방언 칭호까지 수록한 김부식이 일부러 왜곡했던 것일까? 삼국유사의 그러한 표현은 고려 때 분위기가 어느 정도 반영된 것일까?
신라의 왕들은 하대로 가면서 권위가 도전받고 당이 쇠퇴하자 황제와 관련된 용어를 때때로 써서 권위를 과시하려 했다고 여겨진다. 애장왕 때 건립된 高仙寺 서당화상비에는 궁궐이 帝闕로 표현되었다. 경문왕의 명령에 의해 세워진 대안사 적인선사탑비에는 신라 왕경이 京師로 표현되었다. 금석문에 왕명이 敎로 표현되어 왔는데, 헌강왕 10년에 건립된 건립된 보림사 보조선사탑비에는 헌강왕의 명령을 敎와 詔로 표현하였다. 정강왕 때 건립된 사림사 홍각선사비, 진성여왕 때 건립된 월광사 원랑선사탑비에는 임금의 명령이 詔로 되어 있다. 최치원이 찬술한 숭복사비는 헌강왕과 진성여왕 오누이를 日弟兄과 月姉妹라 표현했고, 寶雨經과 大雲經을 인용하면서 여왕의 즉위를 합리화했다.
신라에서 임금의 형제는 어떻게 불렸을까? 나이를 중시한 신라에서 형을 제치고 동생이 임금이 되는 경우는 잘 확인되지 않으니 임금의 동생이 무슨 칭호를 받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임금의 동생은 ‘王弟’ 내지 ‘太弟’로 불렸는데, 王弟는 자동적인 호칭이었고 太弟는 그러했을 수도 있고 책봉이었을 수도 있다. 임금의 동생은 통일 이전에는 葛文王에 책봉되었다. 대개 갈문왕은 왕이 되지 못한 왕의 부친, 王母의 부친, 왕비의 부친, 왕의 동생에게 주어졌다고 한다. 신라에는 국왕 외에도 여러 왕이 존재했으니 이는 신라의 국왕이 천자의 위상을 지녔음을 시사한다.
임금의 아들은 王子로 불렸는데 이는 책봉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아들을 의미해 자동적으로 불려지는 것이었다. 왕자들 중의 첫째는 長子, 元子로 불리고 적통을 강조해 嫡子로 불리기도 했다. 왕자들 중의 제일 연장자는 대개 太子에 책봉되었다. 왕자들 서열에 嫡庶가 구별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드물지만 효성왕이 王弟인 파진찬 憲英(후의 경덕왕)을 태자에 책봉하고 진성여왕이 조카 嶢(후의 효공왕)를 태자에 책봉한 예처럼, 국왕의 동생이나 조카가 태자에 책봉되는 경우도 있었다.
신라에서 태자는 국왕 계승권자였지만 그 위상이 절대적․초월적이지는 못했다. 국왕의 태자가 나이가 어리면 국왕의 동생이나 사위가 태자를 제치고 다음 국왕에 올랐다. 중대로 가면서 태자의 위상이 상승하지만 하대로 가면서 하락한다. 태자의 위상이 이러했으니 다른 왕자들의 위상은 더욱 절대적이지 못했다. 왕자들은 고위이지만 관등을 띠었고 관직도 맡았는데, 정치에 참여하는 달콤한 맛을 보았지만 다른 귀족들과 경쟁해야 했다. 왕자들보다 관등과 관직이 높은 귀족들이 꽤 존재했다. 이러한 특징들은 신라가 연장자와 공로가 중시되는 귀족연합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생겨났다. 진흥왕은 법흥왕의 조카이자 외손으로서 어린 나이에 즉위했는데 모친인 태후가 섭정해 국왕의 역할을 대리함으로써 나이의 문제를 해결했다.
王子와 王弟의 위상은 태종 무열왕의 왕자들을 통해 엿볼 수 있다.1) 무열왕 김춘추는 즉위하자 원자인 法敏을 파진찬 병부령으로 삼았다. 둘째 아들인 仁問은 진덕여왕 때 이래 파진찬(4등)을 띠고 당에서 숙위하고 있었다. 무열왕은 2년에 元子 법민을 태자에 책봉하고, 庶子 文王을 伊湌(2등)으로, 老且(老旦)를 海湌(4등)으로, 仁泰를 角湌(1등)으로, 智鏡․愷元을 각각 伊湌(2등)으로 삼았다. 5년에 文王을 中侍로 삼았다. 7년 6월에 파진찬 金仁問과 당의 蘇定方이 당나라 군사 13만을 이끌고 왔다. 왕이 태자와 대장군 이찬 庾信, 장군 品日 등에게 명령해 병력 5만으로 백제를 공격하도록 했다. 8년에 백제의 ‘殘賊’이 사비성을 공격하니 이찬 品日을 大幢將軍으로, 迊湌(3등) 文王 등을 副로 삼았다.
문무왕 원년에 왕이 백제의 餘衆을 없애기 위해 이찬 品日, 蘇判(3등) 文王 등에게 공격하기를 명령했다. 문무왕 5년에 이찬 文王이 卒하니 王子 禮로 장례했다. 7년에 당 황제가 智鏡과 愷元으로 장군을 삼아 遼東의 役에 나아가게 하니, 왕이 智鏡으로 파진찬(4등)을, 愷元으로 대아찬(5등)을 삼았다. 8년 3월에 파진찬 智鏡으로 中侍를 삼았다. 8년 6월에 劉仁軌가 당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당항진에 이르니 왕이 角干(1등) 김인문에게 맞이하게 했다. 大角干 김유신으로 大幢大摠管을 삼고, 각간 金仁問․欽純 등과 파진찬 智鏡, 대아찬 良圖․愷元․欽突로 大幢摠管을 삼고, 이찬 仁泰로 卑列道摠管을 삼았다. 신문왕이 3년에 이찬 文潁․愷元을 一吉湌 金欽運의 宅에 보내 그 少女를 자신의 夫人으로 책봉했다.
무열왕 2년에 김인문은 파진찬(4등), 김문왕은 이찬(2등), 김노차는 해찬(4등), 김인태는 각찬(1등), 김지경과 김개원은 각각 이찬(2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김문왕이 무열왕 8년에 잡찬(3등), 문무왕 원년에 소판(3등)으로 나타나니 기록대로라면 이찬(2등)에서 강등된 것이 된다. 김문왕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것일까. 무열왕이 아들 김문왕을 멀리했던 것일까.
문무왕 7년에 김지경이 파진찬(4등)을, 김개원이 대아찬(5등)을 받았고 8년에도 이 관등을 띠고 있었으며, 김인태는 8년에 이찬으로 나타난다. 기록대로라면 김지경은 이찬(2등)에서 파진찬(4등)으로, 김개원은 이찬(2등)에서 대아찬(5등)으로, 김인태는 각찬(1등)에서 이찬(2등)으로 강등된 것이 된다. 문무왕이 자신의 태자를 위해 이들 동생들을 격하시켰던 것일까. 아무리 중대에 王弟의 위상이 이전보다 하락했다고 하지만 그들의 경우 지나치다.
무열왕 2년에 왕자들에게 부여한 관등은 그들이 후대에 띠는 관등과 혼동되어 기록된 것으로 판단된다. 무열왕의 둘째 아들로 중국에서 활약한 김인문이 파진찬으로 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더욱 그러하다. 당시 김인문․김문왕․김고차․김인태는 4등인 파진찬(해찬) 정도를, 김지경과 김개원은 5등인 대아찬 혹은 6등인 아찬 정도를 띠었을 것이다. 물론 이들은 이후에 승진을 했다. 김인문은 문무왕 때 각간에 올랐고, 김문왕은 잡찬(소판)을 거쳐 문무왕 때 이찬에 올랐고, 김인태는 문무왕 때 이찬에 올랐고, 김개원은 문무왕 말엽 내지 신문왕 초엽에 이찬에 올랐다. 王弟는 통일기에 갈문왕을 받지는 못했지만 일반 왕자보다는 서열이 높았다.
갈문왕은 王爵이므로 신라에 封爵 제도가 시행된 것이고 그 대상에 王弟가 포함되었지만 일반 왕자들은 王爵을 받지도 않았고 公․侯 작위를 받지도 않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인명 뒤에 붙은 ‘公’이 자주 등장하지만 작위이기보다 존칭으로 보여진다. 王弟는 王子보다 서열이 높았으며, 통일기에는 태자보다 서열이 낮았다. 갈문왕을 받는 시절의 王弟가 태자와 서열이 어떠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갈문왕은 통일기에 대개 ‘大王’ 칭호로 변화한다고 한다.
영일 냉수리비에 의하면, 斯羅의 喙 斯夫智王과 乃智王, 이 二王이 敎하여 珍而麻村의 節居利에게 재물을 주라고 했고, 계미년에 沙喙의 至都盧 갈문왕․斯德智 阿干支․子宿智 居伐干支와 喙의 尒夫智 壹干支․只心智 居伐干支와 本彼의 頭腹智 干支와 斯彼의 暮斯智 干支, 이 ‘七王等’이 함께 논하여 前世 二王의 敎로써 증명하여 節居利에게 재물을 주라고 敎하였다. ‘七王等’의 ‘王等’을 왕들로 보는 시각, 왕과 等(관직)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전자를 따른다면, 신라의 국왕은 갈문왕과 여러 왕(干)을 거느리는 천자의 지위를 가진다.
2) 고려 왕실
고려왕실 남성의 칭호를 살펴보자. 임금의 칭호로는 왕, 대왕, 국왕, 천자, 황제 등이 쓰였다. 천자와 황제 칭호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조선초 편찬과정에서 삭제되어 버렸지만 고려시대 문서와 금석문에는 남아 있다. 광종은 공식적 혹은 대외적으로 稱帝를 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는 대개는 내부적으로 칭제를 했는데, 중국과 북방강국을 제외한 여진, 일본, 탐라 등에 대해서는 칭제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의 신하들은 임금을 칭할 때에 ‘神聖帝王’이라는 호칭을 즐겨 사용했는데 금을 사대하는 인종 시절에 한 때 그 호칭을 중단한 적도 있었다.
고려 임금의 자칭은 朕, 존칭은 陛下였다. 명령은 詔와 制를 사용했다. 유교화 정책을 폈던 성종 시절에 한 때 敎를 사용한 적이 있지만 곧 詔와 制를 사용했다. 왕의 사망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薨’으로 되어 있지만 조선초에 ‘崩’ 대신으로 집어넣었다. 고려 때는 국왕의 사망은 물론 태후의 사망도 崩으로 표현되었다. 신라의 왕은 眞興王처럼 생시의 명칭인 경우가 있지만 고려에서는 그러한 예는 발견되지 않는다. 고려의 왕은 사망하면 왕건이 시호 ‘神聖(神聖大王)’과 묘호 ‘太祖’를 받고, 王徽(王緖)가 시호 ‘仁孝大王’과 묘호 ‘文宗’을 받은 예처럼 諡號와 廟號를 받았다. 신라의 태조와 태종 사례를 참고했을 것이다.
독자적인 연호는 고려를 처음 세운 궁예 임금이 즐겨 사용했다. 武泰, 聖冊, 水德萬歲, 政開 등이 그것이다. 그는 稱王했다고 나오지만 稱帝했을 가능성도 있다. 왕씨 고려에서는 태조 왕건이 天授, 광종이 光德과 峻豊 연호를 반포했다. 인종 때 금에 대한 사대를 반대하고 금을 정벌하기를 주장하면서 서경세력과 윤언이에 의해 칭제건원이 제기되었다. 윤언이는 칭제건원을 반대하는 김부식 등의 견해를 반박하는 근거로 태조와 광종의 建元과 신라와 발해의 建元을 들었다. 신라의 建元은 고려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고려 임금의 아들은 왕자․皇子로, 동생은 王弟․皇太弟로 표현되었다. 고려는 왕위계승에서 부자상속, 장자상속을 원칙으로 했지만 형제상속의 경향이 강했다. 태조 왕건은 訓要에서, 왕위 계승을 嫡子가 우선적으로 가짐을 밝히면서도 元子가 不肖하면 次子가, 次子도 不肖하면 兄弟들 중에서 추대받은 자가 가짐을 밝혔다. 定宗과 광종이 전왕의 형제로 왕위를 계승했고, 성종과 현종이 전왕의 사촌형제로 계승했고, 靖宗과 문종, 선종과 숙종, 명종과 신종이 전왕의 형제로 계승했다.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면 정변이 종종 발생했다. 이제현의 贊에 따르면, 현종의 세 아들 형제(덕종, 靖宗, 문종)가 서로 이어받았음에 익숙한 고려인들은 선종이 다섯 동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孺子(헌종)를 세운 것을 잘못이라고 인식했다. 이처럼 고려인들은 형제 계승, 연장자 계승의 사고방식을 지녔는데, 이는 신라 때의 그러한 관습을 이어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왕위 계승자는 ‘太子’로 불려졌다. 그런데 초기에는 태자가 여러 명이어서 왕위 계승자는 별도로 ‘正胤’이라 칭해졌다. 태조 왕건의 아들들은 太子 혹은 大君․君․郞君 등으로 불렸다. 태자는 태자 泰(신명순성태후 劉氏 소생), 元莊太子(정덕왕후 柳氏 소생), 壽命太子(헌목대부인 평씨 소생), 孝穆太子․孝隱太子(동양원부인 庾氏 소생), 元寧太子(숙목부인 소생), 孝成太子․孝祗太子(천안부원부인 林氏 소생), 太子 稷(흥복원부인 홍씨 소생), 孝悌太子․孝明太子(성무부인 박씨 소생) 등이었다. 君 유형은 王堯君․王昭君(신명순성태후 劉氏 소생), 王位君․仁愛君․助位君(정덕왕후 柳氏 소생), 황주원낭군(신태후 황보씨 소생), 광주원군(소광주원부인 왕씨 소생), 法登君․資利君(성무부인 박씨), 義城府院大君(의성원부인 홍씨) 등이었다.
이들 태자와 君은 책봉 형식을 거쳤을 것이다. 효은태자는 혹은 東陽君이라 칭해졌다는 것으로 보아 동양군이라 불리다가 효은태자로 격상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부터 태자에 책봉된 경우도 있었을 수 있지만, 대개는 일정한 나이가 되어 군에 책봉되었고, 그 이후 일정한 기간이 흐른 후에 태자에 책봉되었을 것이다. 태자가 되지 못한 君들은 세력이 약하거나 주류가 아닌 이유로 인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지만 대개는 나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태자와 군은 부왕의 사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었으니 王弟의 명칭, 王叔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君, 태자, 정윤 체제는 태조 사후에도 성종 무렵까지 유지되었다. 혜종은 태조의 정윤으로서, 경종은 광종의 정윤으로서, 성종(경종의 사촌)은 정윤으로서 즉위했다. 광종 때에도 정윤(경종) 외에 孝和太子(경종의 친형제)가 있었다. 광종은 치세 16년에 아들 伷(11살)를 元服을 입히고 王太子 內史諸軍事 內議令 正胤에 책봉했다. 伷는 태자이자 정윤이었다.
정윤이 꼭 태자를 띠거나 거쳐야 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종대에는 君은 유지되지만 정윤은 사라지고 오직 1명의 태자가 후계자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君이 현종 이전에는 대개 모친의 고향 명칭에서 유래한 궁원의 칭호를 붙여 정해져 왔는데, 현종 이후에는 대개 도읍이나 국호를 붙여 정해진다. 현종의 장자는 모친 延慶宮主의 호칭에서 유래한 延慶君(덕종)에 책봉되었다가 태자에 책봉되었고, 다른 아들들은 平壤君(靖宗), 樂浪君(문종) 등에 책봉되었다.
고려의 왕자, 王弟․王兄의 칭호는 문종 때에 가서 封爵制로 전환한다. 문종은 동생 基를 平壤公에, 조카(靖宗의 아들)를 낙랑후와 개성후에, 아들들을 國原侯, 朝鮮侯, 鷄林侯, 平壤侯, 金官侯, 卞韓侯, 扶餘侯, 樂浪侯(追封)에 책봉했다. 문종대에 아들 국원후는 國原公으로, 아들 조선후는 朝鮮公으로, 아들 계림후는 雞林公으로 승진한다. 조카를 책봉한 것은 특수한 경우이다.
靖宗이 11년 동안 재위하다가 아들들을 미처 封君하지 못하고 세상을 뜨자 문종이 그들을 封爵했던 것이니, 정종의 아들들은 문종의 조카로서보다 정종의 아들로서 봉작되었다고 보여진다. 인종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명종)은 부왕대에 미처 봉작되지 못하고 형인 의종의 치세 2년에 大寧侯와 翼陽侯에 책봉되지만 형의 꺼림을 받아 公으로 승진하지 못했다.
태자가 아닌 왕자는 처음에 侯를 받았는데, 부왕의 치세가 길면 부왕 때에 公으로 승진하기도 했고, 부왕대에 미처 侯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왕자는 부왕의 사후에 태자․원자 혹은 다른 왕자가 국왕에 오르면 王弟․王兄이 되는데 봉작이 없으면 侯를 받았고, 아직 侯인 경우 큰 갈등이 없으면 대개 公으로 승진했다. 왕제는 대개 侯보다 公을 띠게 되는 것이다. 왕의 부마는 公․侯가 아닌 경우 伯을 띠었는데, 侯․公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公侯伯의 아들은 司徒․司空(정1품)을 받았다.
고려 왕실의 公侯伯은 諸王․親王으로 불려졌는데, 여기에 넓게는 공후백의 아들인 사도․사공까지 포함될 수 있다. 諸王인 公侯伯은 宮과 府를 지녔다. 왕자, 왕제, 부마는 공후백이면서 제왕․친왕으로서 왕이기도 했다. 고려 국왕은 제왕․친왕을 거느렸으니 천자 내지 황제의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국왕의 형제 중에서 대개 사후이지만 실제로 王爵을 받은 사례도 발견된다. 광종의 친동생 貞은 文元大王인데, 封贈한 이유를 역사에서 빠뜨려 모르겠다고 고려사 종실전에 적혀 있다. 處女 왕씨는 그의 묘지명에 따르면, 定懿公 梓의 處子(딸)이고, 良僖公의 손녀, 낙랑공 瑛의 증손녀, 현종 第四子 靖簡王의 5世孫, 숙종 第三子 大原公의 外孫으로 마땅히 王者妃가 되어야 했지만 적당한 짝이 없어 혼인하지 않고 지내다가 43세로 卒했다. 靖簡王은 현종의 아들이자 문종의 동생인 평양공 基의 추증이었다. 평양공 基는 문종 23년에 卒하고 후에 靖簡王으로 追封되었다.
源은 그의 묘지명에 따르면 문종의 손자이고, 朝鮮國 禳憲王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는 숙종의 第三女인 順貞公主와 결혼해 숙종 때 廣平伯에 책봉되고, 인종 때 廣平侯를 거쳐 廣平公에 책봉되었다. 문종의 아들 조선공 燾가 숙종 4년에 卒해 시호 ‘襄憲’을 받았으니, 朝鮮國 禳憲王은 숙종의 형제 朝鮮公 燾의 추증이었다.
이처럼 고려 국왕의 형제로서 왕작을 받은 사례들은 그들의 높은 위상을 말해준다.2) 이러한 사례와 친왕(제왕)의 존재는 고려가 황제국 체제를 운영한 데에서도 기인하지만, 신라 때 왕제가 갈문왕을 받았던 데에서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특히 부친이 왕이 아닌 국왕이 선조를 왕으로 추증한 것과 왕의 형제를 왕으로 추증한 것은 신라의 전통을 이어받은 측면이 크다.
고려의 왕자, 왕의 형제는 관직체계를 벗어난 초월적인 존재여서 일반 관료와 경쟁하지 않았다. 관직을 갖더라도 명예 최고직인 내사령, 중서령, 상서령 등을 띠었다. 태자를 제외하면 원칙적으로는 정치 참여가 제한되었다. 물론 때때로 정치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고려는 중국이나 북방강국을 형식적으로 사대하면서도 고려 중심의 천하관을 지녔다. 고려 임금은 천명을 받은 天子, 용의 자손인 龍孫으로 간주되어 신성시되었다. 왕실 칭호, 대묘 제도, 궁궐 제도, 관직 제도, 의례 등 여러 면에서 황제국 체제를 운영했다. 여기에는 중국 제도의 영향을 받은 측면도 있고, 신라 중심의 천하관이 일정하게 수용된 측면도 있고, 고려 나름의 측면도 있다.
3. 왕실 여성의 칭호
1) 신라 왕실
신라 왕실 여성의 칭호를 살펴보기로 하자. 임금의 딸은 ‘王女’, 누이는 ‘王妹․王姊’로 표현되었는데 이는 자동적인 칭호이다. 신라 임금의 딸과 누이가 公主에 책봉되었을까?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공주가 확인되지 않는다.
삼국유사 탈해왕 항목에서는 남해왕이 長公主를 탈해의 妻로 삼았는데 이가 阿尼夫人이라고 했다. 삼국유사에는 승려 아도가 미추왕의 成國公主의 질병을 치료한 이야기, 진평왕의 第三公主 善花 즉 宣化公主가 백제의 薯童(武王)과 결혼한 이야기, 태종 무열왕 때 瑤石宮의 寡公主가 원효를 궁으로 들여 관계하여 薛聰을 낳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진평왕의 딸이 장녀 선덕여왕, 천명부인, 선화공주이고 선화공주가 제3 공주이니, 선덕여왕은 즉위 이전에 第一 공주 즉 長公主였고, 천명부인은 第二 공주였고, 선화공주가 제3 공주였다. 최치원이 정강왕 원년(886)에 찬술한 「奉爲憲康大王華嚴經結社願文」에, ‘北宮長公主’가 나온다고 한다. 今上(정강왕)과 북궁장공주가 兄인 헌강대왕을 위한 結社를 일으킨 것이었다. 경문왕의 자녀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이 차례로 즉위하니 여기의 북궁장공주는 잠저시의 진성여왕이다. 삼국유사 경문대왕 항목에 따르면 헌안대왕의 2女에서 맏딸은 上公主 내지 長公主로, 둘째딸은 第二公主 내지 弟主로 표현되었다.
이처럼 신라의 왕녀와 왕의 누이가 공주의 지위를 띤 사례들이 발견된다. 왕녀와 王姊․王妹가 모두 공주를 띠었는지, 일정한 나이가 되면 누구나 공주에 책봉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왕녀 때에 공주에 책봉되는지, 王姊․王妹 때에 책봉되는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대개는 왕녀 때에 책봉되고 王姊․王妹 때에도 유지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공주가 결혼을 하면 공주 신분을 유지하는지 않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태종 무열왕은 왕녀 智照를 김유신에게 下嫁시켰다. 문무왕은 王妹를 보덕왕 安勝과 결혼시켰다. 헌안왕은 장녀를 왕족 膺廉(僖康王子 啓明 아찬의 아들)과 결혼시켰고, 응렴은 사위로서 왕위에 오르자 헌안왕의 둘째딸을 次妃로 삼았다. 그녀들이 공주였는지, 공주였다면 결혼 후에 그 신분을 유지했는지 불확실하다.
경덕왕 때에 娚姉妹 3인이 갈항사 탑을 세웠는데 娚은 영묘사 언적법사였고, 姉는 照文皇太后(원성왕의 모친)였고, 妹는 敬信‘太王’(太主로 판단됨)이었다. 開仙寺의 석등은 경문대왕, 文懿皇后(경문왕의 배필), 大嫏(잠저시의 진성여왕)의 발원에 의해 세워졌다. 심원사 수철화상탑비에는 진성여왕이 端儀長翁主에게 敎勅해 수철화상을 심원사에 머물기를 요청하게 했다.
최치원이 진성여왕 때 찬술하고 경명왕 때 건립된 봉암사 지증대사탑비에는 경문왕 때 未亡人 端儀長翁主가 단월로서 불교행사를 후원했다. 왕의 딸과 자매는 太主, 大嫏, 翁主 등으로도 불려졌는데, 太主와 大嫏은 長公主를, 옹주는 후궁 소생을 의미했을 것이다.
유리 이사금 치세에, 왕(유리)이 6부를 中分해 王女 2인으로 하여금 각기 部內 여자를 거느리고 가을 7월 旣望부터 매일 일찍 大部의 뜰에 모여 績麻 즉 길쌈을 하였다. 8월 15일에 그 공로의 다소를 고찰해서 진 쪽이 술과 음식을 갖추어 이긴 쪽을 대접했고, 歌舞百戲가 공연되었다. 이를 嘉俳라 했다. 이는 왕녀들이 왕경의 여자들을 통솔하는 위치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신라 임금의 배필은 무엇이라 불렸을까? 삼국사기에 따르면 혁거세 거서간이 閼英을 納하여 妃로 삼았고, 거서간이 6부를 巡撫할 때 妃 閼英이 따라갔다. 또한 남해 차차웅의 母는 閼英夫人이고, 妃는 雲帝夫人(一云 阿婁夫人)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후 임금의 편에서도 이러한 형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妃’는 임금의 여성 배필을 일반적으로 일컫는 경우와 임금의 여성 배필의 특정한 지위를 일컫는 경우가 있다. 삼국사기에 “妃는 누구이다” 라고 하면 전자의 경우이다. 누구를 妃를 삼았다고 하든지, 納妃했다고 하면 전자인지 후자인지 애매하다.
혁거세 거서간의 妃는 閼英夫人이었다. 삼국유사 신라시조 항목에서는 진한 6촌 사람들이 그들이 키운 男(혁거세)을 王으로, 女(알영)를 后로 삼았다고 되어 있다. 남해 차차웅의 비는 雲帝夫人, 유리 이사금의 비는 日知 갈문왕의 딸(혹은 박씨 許婁 갈문왕의 딸), 탈해 이사금의 비는 阿孝夫人(남해 차차웅의 장녀), 파사 이사금의 비는 김씨 史省夫人(허루 갈문왕의 딸), 지마 이사금의 비는 김씨 愛禮夫人(갈문왕 摩帝의 딸), 일성 이사금의 비는 박씨 支所禮王의 딸, 아달라 이사금의 비 박씨는 內禮夫人(지마 이사금의 딸), 나해 이사금의 비 昔氏는 조분 이사금의 妹, 조분 이사금의 비는 阿爾兮夫人(나해 이사금의 딸)이었다.
미추 이사금의 妃는 昔氏 光明夫人(조분 이사금의 딸), 奈勿 이사금의 비 김씨는 미추 이사금의 딸, 실성 이사금의 비는 미추 이사금의 딸이었다. 눌지 마립간의 비는 실성 이사금의 딸이었다. 자비 마립간이 舒弗邯 未斯欣의 딸을 納하여 妃로 삼았다. 照知 마립간의 妃는 善兮夫人(乃宿 이벌찬의 딸)이었다. 智訂 즉 지증 마립간의 비는 삼국유사 왕력에 따르면 迎帝夫人이었다. 삼국유사 지철로왕 항목에는 지철로왕(지증왕)이 牟梁部 相公의 딸을 궁중에 맞아들여 책봉해 皇后로 삼았다고 되어 있다.
법흥왕의 비는 박씨 保刀夫人이었다. 삼국유사 原宗興法에 따르면 법흥왕의 妃는 巴刁夫人이었다. 진흥왕의 비 박씨는 思道夫人이었다. 王妃가 왕을 본받아 영흥사의 비구니가 되었다. 삼국유사 原宗興法에 따르면 진흥왕의 妃는 思刀夫人 박씨인데 牟梁里 英失 각간의 딸이었다. 진지왕의 비는 知道夫人이었다. 삼국유사 桃花女 鼻荊郞 항목에 따르면, 사륜왕은 시호 진지대왕으로 姓이 김씨이며, 妃는 起烏公의 딸 知刀夫人이었다. 사륜왕은 御國한지 4년에 政亂하고 황음하여 國人이 그를 폐위했다고 한다.
진평왕의 비 김씨는 摩耶夫人(갈문왕 福勝의 딸)이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先妃는 摩耶夫人 김씨이고, 後妃는 僧滿夫人 孫氏였다. 선덕여왕의 배필은 삼국유사에 따르면 飮葛文王이었다. 황룡사 구층목탑 사리함기에는 선덕여왕이 監君인 伊干 龍樹에게 명령해 황룡사탑을 조성하게 했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무열왕이 眞智王子 龍春(一作 龍樹) 卓文興葛文王의 아들이라 되어 있다. 용춘(혹은 용수)과 飮갈문왕은 혹시 동일인이 아니었을까?
태종 무열왕의 비는 文明夫人(김서현 角湌의 딸: 삼국유사에는 訓帝夫人)인데 文明王后(삼국유사 왕력에 따르면 시호)로 되었다. 삼국유사 太宗春秋公 항목에 따르면 태종대왕의 妃는 文明皇后 文姬(庾信公의 季妹)였다. 문무왕의 비는 慈儀王后(파진찬 善品의 딸)였다. 신문왕의 비 김씨는 蘇判 金欽突의 딸로 태자 때에 納했는데 치세 원년에 김흠돌의 모반 사건에 연좌되어 出宮당했다.
신문왕은 3년 2월에 一吉湌 金欽運의 少女를 納하여 夫人으로 삼았다. 이찬 文潁과 파진찬 三光을 보내 결혼 날짜를 정하고, 대아찬 智常을 보내 納采하게 했다. 5월에 이찬 文潁․愷元을 그 宅에 보내 그 딸을 夫人에 책봉했다. 수레에 탄 좌우 侍從官人 및 嫏嫗가 심히 성했다. 왕궁 북문에 이르러 수레를 내려 入內했다. 신문왕의 妃는 삼국유사에 따르면 神穆王后(金雲公의 딸)였다.
성덕왕이 3년 5월에 乘府令 蘇判 金元泰의 딸을 妃로 삼았다. 15년에 成貞(一云嚴貞) 王后를 出하여 彩 500필, 田 200결, 租 1만석, 宅 1區를 하사했는데, 宅은 康申公의 舊居를 매입해 하사한 것이었다. 19년 3월에 이찬 順元의 딸을 納하여 王妃를 삼았고, 6월에 王妃를 王后에 책봉했다.
23년 12월에 炤德王妃가 卒했다. 삼국유사에는 先妃가 陪昭王后(元大의 딸)로 시호가 嚴貞이고, 後妃가 占勿王后(順元 각간의 딸)로 시호가 炤德이라 되어 있다. 炤德王妃는 炤德王后가 되어야 한다.
효성왕이 즉위하자 당 현종이 嗣王(효성왕)을 신라왕에 책봉하면서 王妃 박씨를 책봉했다. 효성왕이 3년에 이찬 順元의 딸 惠明을 納하여 妃로 삼았다. 4년에 당이 사신을 파견해 夫人 김씨를 王妃에 책봉했다. 삼국유사에는 효성왕의 妃가 惠明王后(眞宗 각간의 딸)로 되어 있다. 경덕왕은 妃가 이찬 順貞의 딸이었다. 경덕왕이 2년 4월에 舒弗邯 金義忠의 딸을 納하여 王妃를 삼았다.
삼국유사 왕력에는 先妃 三毛夫人은 出宮 無後했고, 後妃는 滿月夫人(依忠 각간의 딸)으로 시호가 景垂(景穆) 王后였다. 삼국유사 찬기파랑가 항목에 따르면, 왕(경덕왕)이 子가 없자 (왕비를) 폐하여 沙梁夫人을 책봉했다. 後妃는 滿月夫人인데 시호는 景垂太后로 依忠 각간의 딸이었다. 滿月王后가 태자를 낳았지만 8세에 왕이 崩하자 태자가 즉위했는데 이가 혜공대왕이었다. 少帝(혜공대왕)가 幼冲했기 때문에 태후가 臨朝했는데, 政條가 다스려지지 않아 도적이 봉기했다고 한다.
혜공왕의 元妃는 新寶王后(이찬 維誠의 딸), 次妃는 이찬 金璋의 딸이었다. 삼국유사에는 先妃는 神巴夫人(魏正 각간의 딸), 妃 즉 後妃는 昌昌夫人(金將 각간의 딸)으로 되어 있다. 정변으로 즉위한 宣德王의 妃는 具足夫人(각간 良品의 딸 혹은 아찬 義恭의 딸)인데, 왕이 즉위하자 妻를 王妃로 삼았다. 그녀는 원성왕 원년 3월에 前妃(선덕왕의 妃) 具足王后를 外宮에 내보냈다는 기사로 보아 왕후로 승진했다. 정변에 참여해 즉위한 원성왕의 비 김씨는 神述 각간의 딸이었다.
당 덕종이 신라왕과 妃 등에게 선물을 보냈다. 진성여왕 때 최치원이 찬술한 숭복사비에는 파진찬 김원량이 肅貞王后(원성왕의 배필)의 外祖로 나오니, 원성왕의 비는 왕후에 올랐다. 소성왕의 妃 김씨는 桂花夫人(대아찬 叔明의 딸)인데 왕의 치세 2년에 妃 김씨를 王后에 책봉했다. 당이 소성왕의 처 叔氏(김씨의 오류)를 왕비에 책봉했다. 삼국유사 䥐藏寺 항목에 따르면 소성대왕의 妃는 桂花王后였다. 애장왕이 6년에 妃 박씨를 王后에 책봉했고, 당의 순종이 애장왕의 妻 박씨를 妃에 책봉했다.
소성왕의 同母弟로 정변을 일으켜 즉위한 헌덕왕(彦昇)의 妃는 貴勝夫人(禮英 각간의 딸)인데, 당의 헌종이 헌덕왕의 妻 貞氏(?)를 妃에 책봉했다. 헌덕왕의 妃는 삼국유사에 따르면 貴勝嫏(忠恭 각간의 딸)으로 시호가 皇娥王后였다. 흥덕왕이 원년 12월에 妃 章和夫人(삼국유사에 따르면 소성왕의 딸 昌花夫人)이 卒하자 定穆王后를 追封하고 잊지 못한 나머지 더 이상 納妃하지 않았다.
2년 정월에 당의 문종이 흥덕왕의 妻 박씨를 妃에 책봉했다. 흥덕왕이 11년에 薨하니 유언에 따라 章和王妃의 릉에 합장되었다. 희강왕의 妃는 文穆夫人(갈문왕 忠恭의 딸)이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妃가 文穆王后(忠孝 혹은 重恭 각간의 딸)였다. 민애왕은 정변을 일으켜 즉위하자 妻 김씨를 允容王后라 했다. 삼국유사에는 妃가 无容皇后(永公 각간의 딸)로 되어 있다. 神虎王(神武王)의 妃는 삼국유사에 따르면 繼大后였다.
문성왕 3년에 당이 문성왕의 妻 박씨를 王妃에 책봉했다. 문성왕이 4년에 倂湌 魏昕의 딸을 納해 妃로 삼았다. 7년 3월에 청해진 大使 弓福의 딸을 次妃로 삼으려 했지만 朝臣이 海島人의 딸을 왕실의 배필로 삼을 수 없다며 반대하자 그만두었다. 삼국유사에는 문성왕의 妃가 炤明王后로 되어 있다. 헌안왕이 4년 9월에 王后와 함께 임해전 모임에 참석했다.
경문왕의 妃 金氏 寧花夫人(헌안왕의 장녀)은 왕의 즉위 전에 결혼했고, 왕은 치세 3년에 寧花夫人의 동생을 納해 次妃로 삼았다. 5년에 당이 왕과 王妃와 王太子 등에게 선물을 하사했다. 6년에 夫人 김씨를 文懿王妃에 책봉했지만, 10년에 王妃가 卒했다. 삼국유사에는 경문왕의 妃가 文資皇后(헌안왕의 딸)로 되어 있다. 開仙寺의 석등은 경문대왕과 文懿皇后의 발원에 의해 세워졌다.
헌강왕의 妃는 懿明夫人이었는데, 삼국유사에는 一云 義明王后라 되어 있다. 최치원이 진성여왕의 명령으로 찬술한 성주사 낭혜화상탑비에는 낭혜화상이 轂下 즉 왕경에 오자 先大王이 절하여 師로 삼고 君夫人, 世子 및 太弟相國(세주: 追封尊諡惠成大王), 郡公子公孫이 우러렀다고 되어 있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고사에 따라 즉위한 진성여왕의 연인은 숙부인 각간 魏弘이었는데, 그가 卒하자 惠成大王이라 追諡했다. 삼국유사에는 위홍이 왕의 배필로 되어 있다.
황룡사 구층목탑 사리함기에는 今上(경문왕)이 11년에 親弟인 上宰相 伊干 魏弘에게 명령해 새롭게 수리하게 했다. 삼국유사 진성여왕 항목에는 진성여왕이 臨朝함에 乳母 鳧好夫人과 여왕의 夫 魏弘 匝干 등 3, 4 寵臣이 권력을 마음대로 하여 정치를 어지럽혔다고 되어 있다.
효공왕이 3년에 이찬 乂謙의 딸을 納해 妃로 삼았다. 박씨로 왕이 된 신덕왕의 妃 김씨는 헌강대왕의 딸이었는데 신덕왕이 원년에 妃를 義成王后라 했다. 경애왕이 4년에 妃嬪과 더불어 포석정에서 연회하고 있었는데 견훤이 들이닥쳤다. 왕과 妃가 後宮으로 도망해 들어갔다. 왕과 妃妾 數人인 後宮에서 잡혀 끌려나왔다. 견훤이 王妃를 强淫하고 휘하에게 마음대로 妃妾을 亂하도록 했다.3)
신라 임금의 배필은 혁거세 거서간~태종 무열왕 기간에는 대개 ‘夫人’으로 불렸다. 혁거세 거서간의 배필인 알영부인이 삼국유사에 ‘后’로 나오지만 훗날의 인식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지증왕의 배필이 夫人 혹은 황후로 나오는 현상도 있었다.
뒤에 언급하듯이 법흥왕 무렵에 왕의 배필이 妃로 표현되기도 했다. 무열왕~문무왕 때에 변화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으니, 무열왕의 妃 文明夫人(김유신의 누이)이 文明王后라는 시호를 받은 것, 문무왕의 妃가 慈儀王后라 칭해진 것이 그것이다. 이후 남성 임금의 元妃는 대개 王后를 생존시에 띠거나 사후에 추증받았다. 처음부터 왕후를 받는 경우가 있었고, 夫人 혹은 王妃․妃를 띠다가 왕후로 승진하는 경우가 있었다.4)
대체로 임금의 여성 배필은 통일 이전에는 夫人으로, 통일 이후에는 夫人․妃․王妃, 王后․皇后 등으로 불렸다. 이는 중국의 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수나라까지는 后-夫人 체계를 사용했고, 당나라 이후에는 后-妃 체계를 사용했다. 그러니까 신라는 왕실 여성의 호칭에서 통일 이전에는 수나라까지의 제도를 수용했고, 통일 이후에는 수나라까지의 제도를 기본으로 하면서 당나라의 제도를 수용해 혼용했던 것이다.
통일기에 당이 신라 임금의 여성 배필을 妃 혹은 王妃에 책봉한 것도 당 제도의 수용을 촉진시켰는데, 신라는 妃․王妃에 만족하지 않고 천자의 배필에 해당하는 ‘后’를 써서 王后를 즐겨 사용하고 나아가 皇后까지 사용해 신라 중심의 천하관을 표현했다. 여성 임금의 경우, 선덕여왕의 배필은 飮葛文王이었고, 진성여왕의 배필은 위홍 각간으로 사후에 大王을 추증받았다.
신라 임금의 모친은 무엇이라 불렸을까? 남해 차차웅의 母는 閼英夫人(혁거세 거서간의 妃), 유리 이사금의 母는 雲帝夫人(남해 차차웅의 妃), 지마 이사금의 모는 史省夫人(파사 이사금의 비), 아달라 이사금의 모 박씨는 지소례왕의 딸, 벌휴 이사금의 모 김씨는 只珍內禮夫人, 나해 이사금의 모는 內禮夫人(아달라 이사금의 비), 조분 이사금의 모 김씨는 玉帽夫人(仇道 갈문왕의 딸)이었다.
미추 이사금의 모 박씨는 갈문왕 伊柒의 딸, 유례 이사금의 모 박씨는 갈문왕 奈音의 딸, 흘해 이사금의 모는 命元夫人(조분 이사금의 딸)이었다. 奈勿 이사금의 모친은 김씨 休禮夫人, 실성 이사금의 모는 伊利夫人(昔登保 阿干의 딸)이었다. 눌지 마립간의 모는 保反夫人(혹은 內禮吉怖夫人: 미추 이사금의 딸), 자비 마립간의 모 김씨는 실성 이사금의 딸, 照知 마립간의 모 김씨는 舒弗邯 未斯欣의 딸이었다. 智訂 즉 智證 마립간의 모친은 烏生夫人(눌지 마립간의 딸)이었고, 법흥왕의 모친은 延帝夫人(삼국유사 迎帝夫人: 지증왕의 비)이었다.
진흥왕의 모는 夫人 金氏(법흥왕의 딸)인데 왕이 어렸기 때문에 王太后로 섭정했다. 그녀는 삼국유사 왕력에 따르면 只召夫人(법흥왕의 동생 立宗 갈문왕의 배필)이었다. 삼국유사 진흥왕 항목에서는 진흥왕이 즉위하자 태후가 섭정했는데 태후는 법흥왕의 딸이자 입종갈문왕의 妃였으며 임종시에 삭발하여 法衣를 입고 서거했다고 한다.
진지왕의 모는 思道夫人, 진평왕의 모 김씨는 萬呼夫人, 선덕여왕의 모는 김씨 마야부인, 진덕여왕의 모 박씨는 月明夫人이었다. 태종 무열왕의 모는 天明夫人(진평왕의 딸)인데, 무열왕이 즉위하자 母를 文貞太后라 했다. 문무왕의 모 김씨는 文明王后(소판 김서현의 季女: 무열왕의 비), 신문왕의 모는 慈儀王后(문무왕의 비)였다.
효소왕의 모는 김씨 神穆王后(일길찬 김흠운의 딸: 신문왕의 비)였다. 성덕왕 때 조성된 皇福寺 금동사리함 명문에는 신문대왕이 천수 3년(692) 7월에 乘天하니 神睦太后(신문왕의 배필. 효소왕의 모친), 孝照大王(孝昭王)이 聖靈을 위해 禪院伽藍에 3층석탑을 건립했다. 성력 3년(효소왕 9년: 700) 6월에 신목태후가 長辭하여 淨國에 高昇했고, 대족 2년(702)에 孝照大王이 登霞하니, 신룡 2년(성덕왕 5년)에 今主大王(성덕왕)이 불사리 4개와 6寸 金미타상 1軀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을 석탑 제2층에 안치해 신문대왕, 신목태후, 孝照大王의 명복을 빌었다. 또한 隆基大王(성덕왕)과 王后와 內外親屬의 행복을 빌었다고 한다. 효성왕과 경덕왕의 모는 炤德王后(성덕왕의 비)였는데, 삼국유사에는 炤德大后로 나온다. 경덕왕이 돌아가신 태후와 성덕대왕을 위해 종을 만들기 시작했고 혜공왕이 완성시켰는데 이것이 성덕대왕신종이다.5)
혜공왕의 모 김씨는 滿月夫人(舒弗邯 金義忠의 딸: 경덕왕의 王妃)인데, 왕의 즉위시 나이가 8세여서 太后로 섭정했다. 삼국유사에는 滿月王后로 되어 있다. 혜공왕 4년에 당의 代宗이 왕을 신라왕에 책봉하고, 王母 김씨를 大妃에 책봉했다. 16년 2월에 정변이 일어나 왕과 后妃가 해를 입었다.
宣德王의 모 김씨는 四炤夫人(성덕왕의 딸)인데 왕이 즉위하자 모 김씨를 貞懿太后로 올렸다. 원성왕의 모 박씨는 繼烏夫人인데, 왕이 즉위하자 모 박씨를 昭文太后라 했다. 진성여왕 때 최치원이 찬술한 숭복사비에는 옛적에 파진찬 金元良이 炤文王后(원성왕의 모친)의 元舅로 나온다. 경덕왕 때에 갈항사 탑을 照文皇太后(원성왕의 모친)가 후원해 세웠다.
소성왕의 모는 김씨였는데 소성왕 원년에 모 김씨를 聖穆太后에 追封했다. 당이 소성왕의 모 申氏(김씨의 오류)를 大妃에 책봉했다. 애장왕의 모 김씨는 桂花夫人(소성왕의 비. 소성왕 때 왕후에 책봉되었음)인데, 왕의 나이가 13세여서 숙부 彦昇이 섭정했다. 애장왕이 6년에 모 김씨를 大王后에 책봉했고, 당의 순종이 애장왕의 모친 叔氏(김씨의 오류)를 大妃에 책봉했다. 애장왕의 모친이 삼국유사에는 桂花王后로 되어 있다.
흥덕왕 2년 정월에 당의 문종이 흥덕왕의 모친 박씨를 大妃에 책봉했다. 희강왕의 모는 包道夫人인데, 2년 정월에 모 박씨를 順成太后로 올렸다. 삼국유사에는 희강왕의 모가 美道夫人 혹은 深內夫人 혹은 巴利夫人이고 시호는 順成大后로 忠衍 大阿干의 딸이라 되어 있다. 민애왕은 정변을 일으켜 즉위하자 모 박씨 貴寶夫人을 宣懿太后라 올렸다. 신무왕은 정변으로 즉위하자 모 박씨 眞矯夫人을 憲穆太后라 올렸다. 문성왕의 모는 貞繼夫人(一云 定宗太后)이었는데, 삼국유사에는 貞從大后로 나온다. 헌안왕의 모는 照明夫人(선강왕의 딸)이었다.
경문왕의 모친은 光和(一云光義) 夫人인데, 왕이 치세 6년에 모친 박씨 光和夫人을 光懿王太后라 올렸다. 헌강왕의 모친은 文懿王后(경문왕 때 文懿王妃였음)였는데, 삼국유사에는 文資皇后로 나온다. 효공왕이 모친 김씨를 義明王太后(헌강왕이 사냥갔다가 帷宮에서 野合한 미인)로 올렸다.
아달라왕의 遠孫인 朴乂謙의 아들로 즉위한 신덕왕의 모친은 貞和夫人이었는데, 신덕왕은 원년에 모친을 貞和太后라 했다. 경명왕의 모친은 義成王后였다.
경순왕 金傅의 모는 桂娥太后인데, 왕이 원년 11월에 모친을 王太后로 올린 것이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태조 14년 2월에 왕(왕건)이 신라의 왕경을 방문하고 5월에 羅王 太后 竹房夫人과 相國 裕廉 등에게 선물을 주고 돌아왔다. 이 태후는 경순왕의 모친 계아태후였다.
신라의 王母는 夫人이라 칭해지다가 진흥왕 때에 太后가 등장했다. 무열왕이 모친 천명부인을 文貞太后로 올렸다. 이후 왕모는 王后 혹은 太后(大后)로 칭해졌는데 하대로 가면서 대개 太后(大后)로 칭해졌다. 하대에 大王后로 칭해지는 경우도 보이는데 太后(大后)와 유사한 개념이다. 태후는 국왕이 어렸을 때 섭정을 하는 등 왕실의 어른으로서 권위가 컸다.
신라는 법흥왕 이래 국력이 신장되자 신라 중심의 천하관을 형성했다. 진흥왕 때에 王母를 태후라 부르더니 통일기에 일반되었다. 또한 통일기에 임금의 元妃가 대개 王后로 칭해졌다. 하대에는 정변이 자주 발생해 왕위의 교체가 심했으므로 새로 즉위한 왕은 자신의 정통성과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생시에 왕을 지내지 않은 부친에게 大王 칭호를 올렸을 뿐만 아니라 모친에게 태후를, 배필에게 왕후 혹은 황후를 부여했다. 王母와 왕비의 칭호가 대체로 통일 이전에는 ‘夫人’이었고, 통일 이후에는 太后-王后-妃(혹은 夫人)의 서열로 구성되었다. 태후나 왕후가 된 후에도 기본적으로 ‘夫人’의 칭호를 유지했는지는 좀더 규명이 필요하다.
后는 황실․왕실 여성의 최고위 칭호로 천자에 해당하는 황제나 국왕의 배필․모친에게만 주어졌다. 이는 신라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妃나 夫人은 황제나 국왕의 배필이 아니더라도 주어졌다. 妃는 헌덕왕이 14년 3월에 각간 忠恭의 딸 貞嬌를 太子妃로 삼은 데 드러나듯이 태자의 배필에게도 사용되었다. 삼국유사 文虎王 法敏 항목에는 庶弟 車得公이 문호왕을 陛下라 불렀으며, 차득공이 무진주에 갔다가 州吏 安吉의 妻와 자고 그녀를 데리고 왔는데 차득공의 妃로 표현되었다. 妃는 국왕, 태자, 갈문왕, 王弟 등 극히 소수의 왕족남성의 배필을 의미했다고 여겨진다.
반면 夫人은 妃보다 넓게 주어져 상당수 귀족 여성이 夫人을 띠었다. 그렇다고 귀족 여성이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삼국유사 나물왕 항목에 따르면 歃羅郡太守 堤上이 일본에 인질로 간 美海(눌지왕의 동생)를 구출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니 堤上의 夫人이 세 娘子를 데리고 鵄述嶺에 올라 통곡하다가 죽었다. 美海가 탈출해 오자 눌지왕이 親弟 寶海와 더불어 맞이하고 미해의 妻를 國大夫人에 책봉하고 미해의 딸을 美海公夫人에 책봉했다. 夫人에도 등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 원성대왕 항목에 따르면 왕의 孫(자손)은 5인이었는데 惠忠太子, 憲平太子, 禮英匝干, 大龍夫人, 小龍夫人이었다.
삼국유사 김유신 항목에는 舒玄公夫人이, 삼국사기 김유신전에는 舒玄의 처 萬明夫人(갈문왕 立宗의 아들 숙흘종의 딸), 김유신의 처 智炤夫人이 나온다. 무열왕은 왕녀 智照를 김유신(智照의 외삼촌)과 결혼시켰고, 성덕왕이 김유신의 처를 夫人에 책봉하고 해마다 곡식 1000석을 하사했다. 지소가 왕녀이자 김유신의 처임에도 夫人 책봉이 늦어진 이유는 잘 알 수 없다.
어쨌거나 夫人은 귀족 여성 중에도 일정한 자격을 갖춘 여성에게만 책봉의 형식을 갖추어 주어졌던 것인데, 미혼 여성은 해당되지 않았을 것이다. 황남대총에서 ‘夫人帶’라는 명문이 쓰여진 銀製 帶端金具가 발견된 것은 ‘부인’의 높은 지위를 시사한다.
울주 전천리 書石에 따르면, 을사년(법흥왕 12년)에 沙喙部 斯夫知갈문왕(입종갈문왕)과 妹 於史․鄒安郞, 셋이 유람했다. 作食人은 榮知智 一吉干支(7등)의 妻 居知尸奚夫人, 眞穴智 沙干支(8등)의 妻 阿兮牟弘夫人이었다. □巳年에 왕이 과거의 王妃 只沒尸兮妃를 사랑하여 생각했다. 기미년(법흥왕 26년)에 妹와 함께 계곡으로 왔는데, 另卽知太王妃 夫乞支妃와 斯夫知王子郞이 동행했다.
作食人은 眞穴知 波珍干支(4등)의 婦 阿兮牟呼夫人, 尒夫知 居伐干支(9등)의 婦 一利等次夫人, 居礼次 □干支의 婦 沙爻功夫人이었다. 을축년에는 沙喙部 于西□夫智 波珍干支(4등)의 妻인 夫人 阿刀郞女가 계곡을 보러 왔다. 계해년에 沙喙部 □凌智 小舍(12등)의 婦 非德刀가 놀러왔다. 또한 이 서석에 豆世夫知 夫人이 새겨져 있다. ‘王妃 只沒尸兮妃’, ‘太王妃 夫乞支妃’가 여러 ‘夫人’들과 구별되었음이 주목된다.
이 太王이 법흥왕이라면 이 무렵에 왕(갈문왕 포함)의 正妃가 다른 夫人과 구별해 妃로 표현된 것인데, 그 후 당 제도의 영향도 받고 해서 통일기에는 대개 后․妃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어느 왕의 妃(혹은 母)는 무슨 夫人이다’ 라는 부분의 夫人이 왕비 혹은 왕모가 되기 이전의 칭호를 의미했을 수도 있다.
성덕왕 때 重阿湌 金志誠이 亡考인 仁章 一吉湌과 亡妣인 觀肖里夫人을 위해 감산사의 아미타상과 미륵상을 조성했는데, 동생인 金良誠 小舍와 玄度師, 姉 古巴里, 前妻 古老里, 後妻 阿好里, 庶兄 及漢 一吉湌․一憧 薩湌(8위)․聰敬 大舍, 妹 首盻買里 및 법계의 일체중생을 축원했고, 國主大王의 장수와 愷元 伊湌公의 행복을 빌었다. 성덕왕 때 단월인 有休大舍宅夫人 休道里 등의 후원에 의해 범종(현재 상원사 종)이 완성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경덕대왕 때 황룡사종이 주조되었는데 시주가 孝貞伊王 三毛夫人이었다.
三毛夫人은 경덕왕의 왕비였다가 出宮된 여성이었다. 삼국유사 水路夫人 항목에 따르면, 성덕왕대에 純貞公이 강릉태수로 부임했는데 公의 夫人 水路가 따라갔다. 9세기에 金立之가 찬술한 성주사비에는 允興 이찬의 아내로 보이는 宣和夫人이 나온다. 夫人 칭호는 대개 干(湌) 층의 아내 중에서 일정 자격을 갖춘 자에게 부여된 듯하다.
信廣夫人君, 令妙寺 日照和上 등이 후원한 종(강원도 양양 禪林院 터에서 출토)이 애장왕 때 완성되었다. 헌강왕 10년에 건립된 건립된 보림사 보조선사탑비에는 禪師 體澄은 宗姓 金으로 熊津 사람이라 소개하면서 모친을 尊夫人으로 표현했다. 삼국유사 후백제 견훤에 따르면, 신라말에 상주의 자칭 장군 阿慈介의 제1 妻는 上院夫人, 제2 妻는 南院夫人이었다. 신라말, 후삼국으로 감에 따라 夫人의 사용이 확산되면서 지방 호족의 아내도 夫人을 칭하는 경우가 생겨났다고 여겨진다.
신라 왕실의 여성은 궁을 소유했을까? 원효를 파계시킨 공주는 요석궁에 거처했으니 요석궁은 그녀의 소유였을 것이다. 경덕왕 7년 8월에 太后가 永明新宮으로 移居했는데, 이 궁은 태후의 소유였을 가능성이 크다. 원성왕 원년 3월에 前妃(선덕왕의 妃) 具足王后를 外宮에 내보내고 租 3만 4천 석을 하사했는데, 이 외궁은 구족왕후의 소유였을 가능성이 있다. 진성여왕은 즉위 전에 北宮長公主였고, 양위 후에 북궁에서 지내다가 세상을 떴는데, 이 북궁은 그녀의 부친인 경문왕의 잠저시 거처이거나 모친인 문의왕후(헌안왕의 장녀)의 거처였다가 진성여왕이 물려받은 것이 아닐까.
삼국유사 射琴匣 항목에 따르면, 비처왕이 天泉亭에 행차했다가 入宮해 琴匣을 보고 화살을 쏘니 內殿 焚修僧과 宮主가 몰래 간통하고 있었으며, 그 두 사람은 伏誅되었다. 삼국유사 백율사 항목에 따르면, 효소왕 때 大玄 薩湌의 아들 夫禮郞 國仙이 유람하던 중에 오랑캐에게 잡혔다가 돌아오자 왕이 부례랑을 대각간으로 삼고, 부친 大玄 아찬을 태대각간으로 삼고, 모친 龍寶夫人을 沙梁部 鏡井宮主로 삼았다. 이들 궁주는 자신의 궁을 소유했기 때문에 궁주로 불렸을 것이다. 大岾城(關門城) 석각에 金京 元千毛主가 作한 北堺(界)라는 부분이 있는데 毛主는 宅主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宅主도 존재했던 것이 된다.
2) 고려 왕실
고려 왕실의 여성 칭호는 어떻을까? 먼저 임금의 배필을 살펴보자. 태조 왕건은 29~30명의 배필을 거느렸는데, 신혜왕후 柳氏․장화왕후 吳氏․신명순성왕태후 劉氏․신정왕태후 황보씨․신성왕태후(김씨 혹은 이씨)․정덕왕후 柳氏, 이상 6명이 왕후와 태후로 되어 있다. 나머지 배필은 ‘夫人(大夫人 포함)’으로 되어 있다. 后-夫人의 체제로 이루어졌다.
신명순성왕태후는 아들 정종과 광종이 즉위한 후, 신정왕태후는 손자 성종이 즉위한 후, 신성왕태후는 손자 현종이 즉위한 후 사망 후에 주어진 것이었다. 신정왕태후는 태조 때 황주원부인이었고, 경종 때 명복궁대부인이었다. 신명순성태후와 신성왕태후도 태조 때 夫人이었을 것이다. 신혜왕후 柳氏, 장화왕후 吳氏, 정덕왕후 柳氏 중의 누군가가 죽기 전에 태조 때 王后 혹은 王妃였을 가능성이 있다.
혜종의 배필은 의화왕후 林氏, 後廣州院夫人 왕씨, 淸州院夫人 김씨, 궁인 哀伊主(太子 濟의 모친)였다. 定宗의 배필은 문공왕후 박씨, 淸州南院夫人 김씨였다. 광종의 배필은 대목왕후 황보씨(이복형제), 慶和宮夫人 林氏(혜종의 딸)였다. 경종의 배필은 헌숙왕후 김씨(경순왕의 딸), 獻懿王后 劉氏(문원대왕의 딸), 應天啓聖靜德王太后(천추태후) 황보씨, 獻貞王后(孝肅王太后) 황보씨, 大明宮夫人 柳氏(원장태자의 딸)였는데, 응천태후(천추태후)와 대명궁부인만 생존시 칭호였고, 나머지는 사후의 시호였다.
경종의 배필은 1명의 왕후, 다수의 夫人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성종의 배필은 문덕왕후 劉氏(광종의 딸), 연흥궁주(현덕궁주: 시호 문화왕후: 金元崇의 딸) 김씨, 延昌宮夫人 최씨(崔行言의 딸)였다. 목종은 선정왕후 劉氏(홍덕원군의 딸), 궁인 김씨 邀石宅宮人이었다. 혜종~성종대에도 后-夫人의 체제로 이루어졌는데, 妃 내지 王妃로 불려진 경우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后-夫人의 체제는 원래 중국에서 온 것이지만 수나라까지의 제도이기 때문에 중국보다 신라의 제도를 계승한 측면이 강하다.
왕실 여성의 제도는 현종대에 들어와서 대폭 개편되었다. 현종의 배필은 성종의 딸인 현덕왕후(시호는 원정왕후) 김씨, 항춘전왕비(시호는 원화왕후) 최씨, 왕비 연경궁주(←연경원주←궁인) 김씨(김은부의 딸), 안복궁주 김씨(김은부의 딸), 妃 柳氏(시호는 원용왕후), 淑妃 흥성궁주, 김은부의 딸(시호는 원평왕후), 德妃 김씨(元順淑妃: 김인위의 딸), 元質貴妃 왕씨(왕가도의 딸), 貴妃 庾氏(←궁인), 궁인 한씨(한인경의 딸), 궁인 이씨(이언술의 딸), 궁인 박씨(박온기의 딸)였다. 왕후 1명, 왕비 2명 정도, 궁주․諸妃, 궁인으로 구성되었다. 왕실에서 夫人 칭호가 사라지면서 后妃 체제가 성립했다.
后-妃 체제는 당나라 때 성립한 제도였다. 고려왕조는 성종 때 당의 3성 6부를 받아들여 관제를 개편한 데 이어 현종 때 당의 제도를 받아들여 왕실 제도를 개편한 것이었다. 后妃 체제는 통일신라기에 다소 정도 스며들기 시작했는데 후삼국과 고려초를 거쳐 현종 때 정착한 것이었다.
고려 국왕의 모친과 조모는 고려초부터 생존시 혹은 사후에 태후로 올려졌다. 고려의 태후는 천추태후와 사숙태후가 섭정을 한 사례에 보이듯이 위상이 높았으며, 사숙태후 이래 府를 지녔다. 성종의 배필이자 현종의 장모인 현덕궁주(현덕왕후의 모친)는 현종 때 大妃에 책봉되었고, 사후에 시호 문화왕후를 받았다. 大妃는 태후를 받지 못하는 왕실의 여성 어른에게 주어졌던 것인데 왕후보다 지위가 낮았다.
현종 이후 后妃는 왕태후(황태후), 왕후(황후), 왕비(황비), 궁주, 諸妃, 원주, 택주, 궁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왕후는 1명이거나 없을 수도 있었다. 왕비는 1~3명 정도였고, 나머지는 다수였다. 태후와 왕후와 왕비는 대체로 궁주였고, 諸妃는 대체로 궁주 내지 원주였다. 선택받은 궁인은 宅主가 되었다. 왕녀 출신은 대개 왕후나 왕비에서 시작했다. 일반인 출신은 왕비 이하에서 시작해 출산 등으로 왕을 기쁘게 해야 승진했다. 대개 승진 단계는 궁인-諸妃-왕비-왕후-태후이거나, 궁인-원주-궁주-왕비-왕후-태후였는데 각 단계를 반드시 거처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현종 때 왕실에서 夫人 칭호가 사라졌다. 현종은 8년에 항춘전왕비 최씨의 외조 최행언을 상서좌복야에 추증하면서 외조모 김씨에게 豊山郡大夫人을, 모친 최씨에게 樂浪郡大夫人을 주었다. 11년에 거란에 억류된 장작소감 王佐暹의 妻를 開城郡君에 책봉했다. 13년에 연경궁주 김씨의 부친 김은부에게 安山郡 開國侯를, 모친에게 安山郡大夫人을 추증했다.
17년에 숙비 흥성궁주의 모친 최씨에게 利川郡大夫人을, 繼母 鄭氏에게 利川郡大君을 추증했다. 20년에 성종의 배필 현덕궁주 김씨의 부친 김원숭을 和義郡開國侯에 추증하면서 모친 왕씨와 조모 김씨에게 각각 和義郡大夫人을 주었다. 이제 夫人은 왕실 여성이 아니라 관료 집안의 여성에게 주어지는 여성작위로 변모했다. ‘君’도 夫人보다 낮은 단계로 관료 집안의 여성에게 주어졌는데 왕자와 왕제에에게 주어지는 경우와 동거하는 기묘한 형태였다. 하지만 문종 때 왕제와 왕자가 공후를 받으면서 해결되었다.
왕녀의 경우를 살펴보자. 태조의 배필인 신명순성태후 劉氏의 딸은 安貞淑儀公主(낙랑공주: 神鸞宮夫人→夫 신라왕 金傅)와 흥방공주(→원장태자)였고, 황주원부인(신정왕태후) 황보씨의 딸은 대목왕후(→광종)였고, 정덕왕후 柳氏의 딸은 문혜왕후(→문원대왕)와 선의왕후(→대종 旭)와 어떤 공주(→의성부원대군)였고, 정목부인 왕씨의 딸은 順安王大妃였고, 흥복원부인 홍씨는 공주 하나(→태자 泰)를 낳았고, 성무부인 박씨는 공주 하나(→金傅)를 낳았다.
혜종의 배필 의화왕후 林氏는 慶化宮夫人과 貞憲公主를 낳았고, 궁인 哀伊主는 明惠夫人을 낳았다. 定宗의 문성왕후 박씨는 공주 하나(→孝成太子)를 낳았다. 광종의 대목왕후 황보씨는 千秋殿夫人(→千秋殿君)과 寶華宮夫人과 공주 하나(문덕왕후)를 낳았다. 성종의 현덕궁주(문화왕후) 김씨는 貞元王后(元貞王后)를 낳았고, 연창궁부인 최씨는 항춘전왕비(원화왕후)를 낳았다. 고려초에는 왕녀들이 공주 혹은 夫人을 칭했다. 夫人을 칭한 경우는 그녀들이 근친 왕족과 결혼했기 때문에 부여된 것으로 보인다.
현종의 항춘전왕비(원화왕후) 최씨는 積慶公主(시호는 孝靖公主 혹은 孝惠公主)와 天壽殿主를 낳았고, 연경궁주 김씨(원성태후)는 인평왕후와 景肅公主를 낳았고, 안복궁주 김씨(원혜태후)는 효사왕후를 낳았고, 원평왕후 김씨는 孝敬公主를 낳았고, 원순숙비 김씨는 敬成王后를 낳았고, 궁인 박씨(전주 박온기의 딸)는 1女 阿志(→檢校少監 井民相)를 낳았다. 덕종의 敬穆賢妃 왕씨는 殤悔公主(일찍 사망)를, 劉氏(충주 劉寵居의 딸)는 공주 하나(→檢校太師 王忠)를 낳았다. 靖宗의 용목왕후 이씨가 낳은 딸은 문종 11년에 卒하여 悼哀公主를 시호로 받았다. 왕녀는 공주 혹은 殿主를 칭했고 공주를 추증받기도 했으며, 夫人 칭호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문종의 연덕궁주 이씨(인예순덕태후)는 積慶宮主(→부여공)와 保寧宮主(→낙랑공 瑛)를 낳았다. 그 나머지 인예태후 소생의 두 공주와 仁淑賢妃 이씨 소생의 두 공주와 仁穆德妃 김씨 소생의 공주는 모두 일찍 卒했다. 선종의 정신현비 이씨는 경화왕후를 낳았고, 사숙태후 이씨는 공주 하나(일찍 사망)와 遂安宅主를 낳았다. 수안택주는 태어나면서 눈이 멀었고 나이 40이 되어도 결혼하지 않았고 인종 6년에 卒했다.
숙종의 연덕궁주 柳氏(명의태후)의 딸은 大寧宮主, 興壽宮主, 安壽宮主, 福寧宮主였다. 대녕궁주와 흥수궁주는 숙종 8년에, 안수궁주는 숙종 10년에, 복녕궁주는 예종 9년에 公主에 책봉되었다. 이들 궁주는 예종에 의해 부여된 칭호였다. 예종은 부왕 숙종이 치세 10년 10월에 세상을 뜨자 즉위한 며칠 후에 모친 柳氏를 왕태후로 존숭하였고, 壽寧宮을 大寧宮으로, 長慶宮을 崇德宮으로, 延平宮을 安壽宮으로 개칭해 長公主에게 대녕궁을, 二公主에게 숭덕궁을, 三公主에게 안수궁을 하사했다.
그러니까 숙종의 첫째딸과 둘째딸과 셋째딸은 숙종 때 공주가 되었고, 예종이 즉위하자 궁을 하사받아 궁주가 되었는데 공주이기도 했다. 숙종의 넷째딸은 예종 9년에 공주에 책봉되었는데, 그녀가 복녕궁주에 책봉된 시기는 이 때인지 그 이전인지 그 이후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녀는 天子의 女로 晋康伯과 혼인했다. 성품이 婉順해 兩宮의 총애를 받았고, 부유하기가 종실의 제일이었고, 佛法을 崇信해 塔廟를 營飾하는 데 심히 힘썼다. 인종 11년(1133)에 公主 福寧宮主의 신분으로 卒해서 시호 ‘莊簡’을 받았는데 38세였다.
예종의 연덕궁주 이씨(문경태후)는 承德宮主와 興慶宮主를 낳았다. 인종이 2년 8월에 王妹 승덕궁주를 長公主에 책봉하고 재추․侍臣과 밤새도록 曲宴했으며, 2년 10월에 王妹 흥경궁주를 公主에 책봉했다.6) 인종의 연덕궁주 任氏(공예태후)는 承慶宮主, 德寧宮主, 昌樂宮主(의종 5년에 궁주에 책봉됨), 永和宮主를 낳았다. 의종의 莊敬王后 김씨(강릉공의 딸)는 敬德宮主, 安貞宮主, 和順宮主를 낳았다. 의종은 11년 11월에 長女를 敬德宮主에, 第二女를 安貞宮主에, 第三女를 順和宮主(和順宮主)에 책봉하고, 이날 밤에 재추․近臣을 불러 天寧殿에서 曲宴했다.7) 경덕궁주는 의종 16년에 司空 評과, 안정궁주는 17년에 咸寧伯과, 화순궁주는 광릉후와 결혼했다.
명종의 義靜王后 김씨(광정태후: 강릉공의 딸)는 延禧宮主, 壽安宮主를 낳았다. 연희궁주는 명종 3년에 공주에 책봉되고 9년에 寧仁伯과 결혼했으며, 수안궁주는 명종 3년에 공주에 책봉되고 9년에 昌化伯과 결혼했다. 신종의 元妃 김씨(선정태후: 강릉공의 딸)는 孝懷公主와 敬寧宮主를 낳았다. 河源公과 결혼한 효회공주가 신종 2년에 17세로 卒하니 왕과 后가 심히 애도하고 興德宮主에 追封했다.
경녕궁주는 신종 2년에 공주에 책봉되고 4년에 始興伯과 결혼했다. 희종의 왕비 함평궁주(성평왕후: 영인후의 딸)는 安惠太后(承福宮主), 永昌宮主, 德昌宮主, 嘉順宮主, 貞禧宮主를 낳았다. 희종은 7년에 딸을 承福宮主에 책봉했다. 강종의 사평왕후 이씨(이의방의 딸)는 壽寧宮主를 낳았는데, 강종 원년에 궁주에 책봉되었고, 河源公과 결혼했다. 고종의 承福宮主 柳氏(안혜태후: 희종의 딸)는 壽興宮主를 낳았다. 원종의 왕후(慶昌宮主) 柳氏는 慶安宮主와 咸寧宮主를 낳았다.
고려의 왕녀는 주로 宮主나 公主를 칭했고 드물게 殿主나 宅主를 칭했다. 고려의 왕녀는 일정한 나이가 되면 공주에 책봉되거나 궁을 받아 궁주에 책봉되었다. 공주는 궁주인 경우가 많았다. 공주가 궁주에 책봉되어도 공주 신분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궁주가 공주에 책봉되어도 궁주 신분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공주와 궁주 중에 어느 것을 먼저 책봉해야 한다는 원칙은 없는 듯하다.
궁주는 하사받을 궁이 필요하기 때문에 궁이 확보되어야 책봉될 수 있었다. 궁주를 책봉받는 당사자가 상속 등으로 궁 내지 저택을 소유하고 있다면 궁주를 책봉받기가 수월했을 것이다. 공주․궁주 칭호는 왕녀일 때 받기도 하고, 왕의 자매일 때 받기도 했다. 왕녀나 왕의 자매는 대개 결혼 전에 공주나 궁주에 책봉되었고 결혼 후에도 그 신분이 유지되었다.
고려 때 국왕의 배필은 宮․院을 받은 경우 宮夫人, 院夫人, 宮主, 院主 등을 칭했고, 왕의 딸과 자매도 대개 궁을 받아 궁주가 되었다. 궁원에는 宮院田과 노비가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궁원을 소유하면 재력을 지니는 것이었다.8) 신종이 즉위 이전부터의 배필인 元妃를 3년에야 궁주에 책봉한 예처럼, 자격이 되어도 궁이 부족해 제 때에 궁주에 책봉되지 못하고 늦어지는 경우도 발생했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 후기로 가면서 점차 늘었던 것 같다. 고려 왕실의 여성이 宮․院․宅을 소유해 궁주, 원주, 택주 등으로 불린 것은 신라 왕실 여성이 궁을 소유해 궁주로 불린 전통에서 영향을 받았지 않았나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