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십경(大邱十景) - 대구십영(大丘十詠)
대구풍경 서거정의 대구10영(大邱十詠)
대구십영은 조선시대 서거정 선생이 대구에서 가장 경치가 빼어난 열 곳을 읊은 한시이다.
제1경 금호범주(琴湖泛舟)
琴湖泛舟(금호범주) : 금호강의 뱃놀이
琴湖淸淺泛蘭舟(금호청천범란주) : 금호강 맑은 물에 놀잇배 띄우고,
取次閑行近白鷗(취차한행근백구) : 슬렁슬렁 더디 저어 백구랑 같이 놀다.
盡醉月明回掉去(진취월명회도거) : 달 아래 한껏 취하여 노 저어가니,
風流不心五湖遊(풍류불심오호유) : 오호에서 노는 것만이 풍류가 아니라네.
금호강은 경상북도 포항시 죽장면과 시북면에서 발원하여 낙동강에 흘러 들어가는 대구의 젖줄로 동서로 걸친 장방형 형태를 이루고 있다. 금호강에 있었던 복현나루터 자리에는 현재 콘크리트 제방이 있어 나루터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비록 지금은 돛단배가 없지만, 그 운치는 여전히 금호강에 녹아있다.
제2경 입암조어(笠巖釣魚)
笠巖釣魚(입암조어) : 입암에서 고기낚기
煙雨空濠澤國秋(연우공호택국추) : 가을 냇 굽이에 안개 비 부슬부슬
垂綸獨坐思悠悠(수륜독좌사유유) : 낚시 드리우고 홀로 앉아 생각이 하염없네.
纖鱗餌下知多少(섬린이하지다소) : 미끼 아래 잔고기 많은 거야 알고 있지만,
不釣金鼇鈞不休(부조금오균불휴) : 금자라 낚지 못해 멈출 수가 없다네.
‘입암’은 바위모양이 삿갓을 쓴 늙은이의 모습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서거정이 낚시를 통해 잡고자했던 금자라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생각해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제3경 귀수춘운(龜岫春雲)
龜岫春雲(귀수춘운) : 거북산의 봄구름
龜岑隱隱似鼇岑(귀잠은은사오잠) : 거북 봉우리 은은함이 자라 뫼 닮았는데,
雲出無心亦有心(운출무심역유심) : 구름이 무심히 나온다 해도 뜻이 있어라.
大地生靈方有望(대지생령방유망) : 땅 위의 생물들이 바야흐로 비를 바라니,
可能無意作甘霖(가능무의작감림) : 단비를 내릴 뜻이 없지는 않으리라.
경상도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 의하면, 연귀산은 대구의 진산으로 건읍(建邑) 초기에 돌거북을 만들어 머리는 남쪽으로, 꼬리는 북쪽으로 향하도록 하여 앞산의 불(火) 기운을 막았다고 한다. 중구 봉산동 제일중학교 교정에는 지금도 이 바위가 있고, 연귀산의 봄 구름은 날씨가 맑고 화창한 날에 교정에서 바라볼 수 있다.
제4경 鶴樓明月(학루명월)
학루명월(鶴樓明月) : 금학루의 밝은 달
一年十二度圓月(일년십이도원월) : 한 해에도 열두 번 보름달이 뜨지만,
待得仲秋圓十分(대득중추원십분) : 추석이 되어서는 한껏 더 둥그렇다.
更有長風箒雲去(경유장풍추운거) : 긴 바람 불어와 구름을 쓸어 가니,
一樓無地着纖氣(일루무지착섬기) : 누각엔 작은 먼지도 붙일 곳이 없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금학루는 금유(琴柔)가 세종때 건립하였는데, 중구 대안동 일대에 자리 잡고 있었던 구 달성관 동북쪽 모퉁이에 위치한다. 경상도도관찰출섭사인 김조(金金+兆)가 쓴 기문에 의하면 누각 모양이 학이 춤추는 듯하다고 하여 금학루가 금호의 학이라는 뜻으로 명명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제5경 남소하화(南沼荷花)
남소하화(南沼荷花) : 남소의 연꽃
出水新荷疊小錢(출수신하첩소전) : 물 위의 새 연잎 동전 포갠 듯하더니,
開花畢竟大於船(개화필경대어선) : 꽃이 피자 마침내 배보다 더 크다네.
莫言才大難爲用(막언재대난위용) : 너무 커서 쓰기 어렵다 말하지 말게,
要遣沈痾萬姓痊(요견침아만성전) : 만백성 고질병 고칠 수 있으리.
남소란 남쪽 못이란 뜻으로 서문시장 자리에 있던 천왕당지라는 설도 있으나 지금의 영선시장이 들어선 영선못(蓮信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못에는 아름다운 연꽃이 있었는데, 이 연꽃은 백성들을 위한 약재로 사용되었다. 백성들의 아픔에 애정을 가진 서거정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제6경 북벽향림(北壁香林)
北壁香林(북벽향림) : 북벽 향나무 숲
古壁蒼杉玉槊長(고벽창삼옥삭장) : 옛벽에 푸른 측백나무 옥창같이 길고,
長風不斷四時香(장풍부단사시향) : 긴 바람 끊임없어 사시에 향기로워라.
慇懃更着栽培力(은근경착재배력) : 은근히 정성모아 힘들여 가꾼다면,
留得淸芬共一香(유득청분공일향) : 맑은 향 머물러 온 고을에 가득하리.
과거 대구 도동 측백나무 숲은 대구와 경주를 잇는 길이 있어 절벽 아래를 흐르는 계곡수와 더불어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어 길을 가는 행인들의 피로를 덜어주었다고 한다. 동구 도동 산 180번지 일대의 불로천변 하식애에 자생하는 측백나무 숲으로 천연기념물 1호이다.
제7경 동사심승(桐寺尋僧)
동사심승(桐寺尋僧) : 동화사의 중을 찾음
遠上招提石徑層(원상초제석경층) : 멀리 절 오르는 층층의 돌계단 길,
靑縢白襪又烏藤(청등백말우오등) : 푸른 행전 흰 버선에 검은 지팡이로다.
此時有興無人識(차시유흥무인식) : 이 시절 흥겨움을 아는 이 없으리니,
興在靑山不在僧(흥재청산부재승) : 청산에 흥이 있지 스님에게 있지 않네.
동화사는 소지왕 493년에 극달화상이 유가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으나, 흥덕왕 832년 중건할 때 겨울인데도 사찰 주변에 오동나무 꽃이 만발하여 이를 보고 동화사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경내에는 대웅전, 극락전 등을 비롯하여 마애불좌상, 비로암 석조비로 자나불좌상, 금당암3층 석탑, 석조부도군 등이 있다.
제8경 노원송객(櫓院送客)
櫓院送客(노원송객) : 노원에서 손님 보내기
官道年年柳色靑(관도년년류색청) : 해마다 벼슬길에 버들 빛 푸르고,
短亭無數接長亭(단정무수접장정) : 가깝고 먼 역이 수없이 이어졌네.
唱盡陽關各分散(창진양관각분산) : 이별 노래 다 부르고 서로 헤어지니,
沙頭只臥雙白甁(사두지와쌍백병) : 모래밭엔 흰 술병 두어 개 누웠구나.
현재 대구 팔달교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옛날 대노원(大魯院)으로 노원이라 줄여 불렀다. 노원은 대구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의 첫 나루터에 있어서 과거를 보기 위해 떠난 선비나 길손들이 쉬어 가는 곳으로 떠나는 사람과 떠나보내는 사람들의 이별의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제9경 공령적설(公嶺積雪)
公嶺積雪(공령적설) : 팔공산에 쌓인 눈
公山千丈倚峻層(공산천장의준층) : 천길 팔공산 층층이 험준한데,
積雪漫空沆瀣澄(적설만공항해징) : 쌓인 눈 하늘 가득 이슬처럼 맑구나.
知有神詞靈應在(지유신사령응재) : 신사에 신령님 계심을 알겠거니,
年年三白瑞豊登(연연삼백서풍등) : 해마다 서설 내려 충년을 기약하네.
팔공산은 신라 때는 부악(北岳)이라 하였다가, 나라의 중앙에 있다하여 중악(中岳)이라고도 불렀다. 그 후 왕건과 견훤의 공산전투에서 왕건을 대신해 장렬히 전사한 여덟 명의 신하, 또는 여덟 마을에 걸쳐 있다고 해서 팔공산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사계절이 모두 아름답지만 특히, 팔공산에 쌓인 눈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음력 정원에 사흘 동안 내리는 눈을 삼백(三白)이라 하여 이를 풍년의 조짐으로 보았다.
제10경 침산만조(砧山晩照)
砧山晩照(침산만조) : 침산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
水自西流山盡頭(수자서류산진두) : 물은 서쪽으로 흘러 산머리에 이르고,
砧巒蒼翠屬淸秋(침만창취속청추) : 침산 푸르러 맑은 가을빛 띠고 있네.
晩風何處春聲急(만풍하처춘성급) : 해질녘 바람에 어디에서 방아소리 급한고,
一任斜陽搗客愁(일임사양도객수) : 저물녘 나그네 시름 저 방아로 찧어볼까.
침산은 대구의 신천하구를 지키는 수구막으로 도시의 북쪽에 위치하며 마을 앞에는 흰모래가 많아서 침산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넓은 백사장과 금호강의 금빛 물결이 어울려 장관을 연출했을 것이다. 현재의 ‘침산정’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은 서거정이 이 시를 읊을 때 정취를 아련하게나마 떠올리게 한다.
대구10경을 번역한 노산 이은상 선생 약력 :
호 노산(鷺山). 경상남도 마산(馬山) 출생. 1923년 연희전문학교 중퇴, 1926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사학과를 청강하였다. 1970년 경희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1974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1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가 되고, 1945년 호남신문사의 사장을 지냈으며, 1950년 이후 청구대학(靑丘大學)·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영남대학교 등에서 교수를 역임하였다.
1954년 예술원 회원에 선임되었고 1959년 충무공 이순신장군 기념사업회장에 취임하였으며 1965년 민족문화회장, 안중근의사숭모회장 등을 맡아 다년간 민족적 위인에 대한 현창사업을 전개하였다.
1967년 시조작가협회장, 한글학회 이사에 취임하고 1966년 문화재 위원에 추대되었다. 1969년 한국산악회장, 독립운동사편찬위원장에 취임하고 1972년에는 숙명여자대학교 재단이사장에 추대되었다.
1974년 노산시조문학상을 제정하고, 그 해 한국·네팔 협회 이사장이 되었으며 1976년 성곡학술문화재단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역시 그 해 총력안보국민협의회의장, 시조작가협회 종신회장이 되고 1978년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으며 1981년 국정자문위원(國政諮問委員)에 위촉되었다. 예술원 공로상, 5 ·16민족상 학예부문 본상 등을 수상하였다.
가곡으로 작곡되어 널리 불리고 있는 《가고파》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등 많은 시조가 있다. 저서로는 《노산사화집》 《노산시조집》 《노산시문집》 《이충무공 일대기》 《난중일기해의(亂中日記解義)》 《나의 인생관》 《민족의 향기》 등이 있다. 일생을 통하여 시조(時調)와 민족의식 앙양이라는 두 길을 위해 진력하였다.
[출처] 이은상 [李殷相 ] | 네이버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