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 토마스의 무덤
1866년 병인교난 중 일어난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순교한
토마스의 시체가 묻힌 곳이다.
옹천포구
임진왜란 중(1594) 한국에 온 최초의 서양 신부 세스페데스가
상륙한 곳으로 추정되는 경남 웅천
귀츨라프
1831년 한국에 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충청도 고대도에 상륙하여
한국어를 배우고 주기도문을 번역하기도 했다
한국교회사(30)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Ⅰ. 선교사들의 입국
2. 언더우드의 입국
2) 언더우드의 한국선교 준비
언더우드가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네 살 때였다. 언더우드는 인도에서 온 어떤 사람의 설교를 듣고 선교사가 될 결심을 했었는데, 선교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자 이 결심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는 의학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오지의 선교부에서 일할 충분한 준비를 갖추는 데 필요할지 모르기 때문에 의학도 공부할 계획을 세웠다.
뉴욕대학교에서의 4년 그리고 뉴 브룬스윅신학교에서 3년간 그가 경험한 배고픔과 어려움, 고학과 면학, 근면과 성실은 후에 목회자로서, 선교사로서의 성공을 위한 토대를 다지는 중요한 훈련과정이었다. 언더우드가 한국에 관해 처음 접한 것은 신학교 2학년 때인 1882-1883년 겨울이었다. 그의 급우 가운데 한 사람인 앨버트 올트먼스(Albert Oltmans)가 뉴 브룬스윅신학교 선교지원자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한국과 미국 사이에 한미조약이 체결되었지만, 1,200만 내지 1,300만의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살고 있어 이곳에 복음의 문이 열리도록 기도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을 때였다.
한국에 대한 선교를 촉구한 또 하나의 계기는 한국에 대한 윌리엄 그리피스의 도전을 통해서였다. 1882년, 언더우드의 뉴 브룬스윅신학교 10년 선배인 그리피스는 그 유명한‘조선:은둔의 나라’(Corea: The Hermit Nation)를 출판해 한국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방대한 자료의 섭렵과 예리한 필치가 조화를 이룬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당시로서는 한국에 관한 가장 무게 있는 서적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었고, 달레의‘한국교회사’나 로스의‘한국의 역사, 고대와 근대’(History of Corea, Ancient and Modern)와 더불어 한국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서적으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에 관한 역사, 문화, 사회는 물론 한국의 대 외국교류관계, 그리고 선교 전망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주제를 일목요연하게, 그러면서도 국제 정세와 선교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기술했다. 당시 세계무대의 뒤안에 가리어져 있던 은둔의 나라 한국을 역사의 장으로 끌어낸 작품이었다.
또한 신학교에서 마지막 3학년을 보내던 1883년과 1884년 사이 뉴 브룬스윅신학교 학생들 앞에서 행한 복음주의운동의 대변자 피어선(A. T. Pierson)의 강연은 언더우드에게 많은 유익이 되었다. 뉴 브룬스윅에 재학하는 동안 언더우드는 점점 더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이미 인도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하고 오랫동안 준비한 터였기 때문에 선교지를 한국으로 바꾸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많은 난관과 어려움들을 통과해야만 했다.
신학교의 마지막 학년인 1883년의 여름 동안, 언더우드는 뉴저지주 폼프돈의 한 교회를 담임하였다. 그는 선교의 명분을 강조하여 줄기차게 선교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기 때문에, 당회는 만일 외국 선교지에 너무 많은 돈을 내어 놓는다면 그의 보수도 지급할 수 없을지 모른다고 경고하였다. 그는“걱정마십시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나는 보수를 받지 않아도 괜찮습니다.”라고 답했고, 이렇게 되어 선교에 할당되는 예산은 엄청나게 증가하였고(4배), 그도 목회를 마칠 무렵에는 두 배의 보수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1884년 봄에 신학교를 졸업했고, 1884년 11월에는 뉴브룬스윅 노회로부터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즈음 그는 비록 인도에 가기로 결정은 했지만, 한국과 한국이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오고 있었다.
언더우드는 선교본부에 올린 선교 제25주년 기념식 연설(문)에서 당시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882년과 1883년에 걸치는 겨울, 지금은 토오쿄오의 명치학원에 계시지만 그 당시에는 학생이었던 엘트먼 목사(Rev. Dr. Altman)가 뉴 브룬스윅의 선교 지원자들을 모아 놓고 한 보고서를 읽어주었습니다. 그 보고서는 조약에 의해 서양 세계에 마침내 문호를 개방하게 된 은둔의 나라에 관한 것으로, 그분이 직접 작성한 것이었습니다. 천이백만 내지 천삼백만의 사람들이 복음 없이 살고 있다는 것, 교회가 문호개방을 위해 기도했고, 결국 1882년 슈펠트 제독을 통해 맺은 조약에 의해 미국에 문호가 개방되었다는 간단한 이야기를 듣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는 선교를 위한 아무런 준비활동도 없이 일 년여를 보냈다는 생각 때문에, 저는 한국에 갈 사람을 찾는 일에 착수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저 자신은 인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고 있었고, 이런 신념하에 그곳에 갈 특별한 준비를 하기 위해 일 년 동안 의학 공부를 해온 터였습니다. 때문에 저는 누군가 기꺼이 한국에 갈 사람이 달리 있으리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능한 한 서둘러 한국에 갈 사람을 물색해보았지만, 한 사람도 발견하지 못한 채 일 년이 흐르고 말았습니다.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려는 교회는 한 군데도 없었으며, 외국 선교 사업의 지도자들도 한국에 들어가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하는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왜 너 자신이 가지 않느냐?’이런 메시지가 제 가슴에 울려온 것은 바로 이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도, 인도가 필요로 하는 것, 인도에의 특별한 부르심에 대한 저의 믿음 그리고 그 소명을 위해 각별히 준비해 오던 일들이 떠올라 제가 한국으로 가고자 하는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저는 개혁교회 선교부(The Reformed Board)에 두 차례나 신청을 했으나 그들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자금이 없다고 했습니다. 또 장로교에도 두 번 신청했으나 소용없는 일이라는 답변을 들었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한국으로 가는 문은 굳게 닫혀 있고, 미국에 남아있거나 인도로 가는 문은 넓게 열려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혁교회의 요청을 수락하는 서신을 써서 그것을 막 우체통에 넣으려는 찰나, 어떤 목소리를 들은 듯했습니다.‘ 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그래서 언더우드는 서신을 보내는 것을 일단 보류하고, 재차 장로교 선교부에 신청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갈 때 막 문을 나서는 우체부를 지나쳤다. 엘린우드 박사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박사는 방금 편지 한 통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것은 선교부가 원래 파송하려 했던 사람이 사정상 갈 수 없게 되어 언더우드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수일 내에 임명을 받게 될 것을 알리는 편지였다.
이 무렵 브루클린(Brooklyn)의 라파예트 장로교회의 맥윌리엄(Mr. McWilliam)씨는 미국 선교부의 위원 한 사람이 한국의 문호는 아직 개방된 것이 아니라고 쓴 글을 읽고, 엘린우드 박사에게 한국의 상황을 문의하였고, 엘린우드 박사는 맥윌리엄에게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할 때가 무르익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맥윌리엄은 한국 선교 사업을 시작하는 데 써 달라고 그 자리에서 6천 달러짜리 수표를 끊어주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따라 한국 선교를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미지의 나라였다. 해서 언더우드의 형제들은 만일 그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저 어두운 지역으로 꼭 가야 하겠다면, 최소한 영국에 가서 그곳에 살고 있는 친척들에게 작별 인사는 해야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1884년 여름, 언더우드는 대서양을 건너 삼촌, 숙모, 사촌들을 짧은 기간 동안 방문하였다. 언더우드는 런던 선교회(The London Missionary Society)의 총무직을 맡고 있던 삼촌인 에드워드 존스 목사(Rev. Edward Jones)를 방문하여 그곳에서‘거의 20년 전에 우리도 그곳으로 한 사람을 보냈는데, 그 후론 소식을 못 들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언더우드는 그런 끔찍한 이야기에도 결코 낙심하거나 한국 선교를 포기할 수 없었다.
북장로교 선교사로 임명을 받은 언더우드는 1884년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 한 달 후인 1885년 1월 25일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언더우드는 자신이 많은 돈을 가지고 떠난다고 생각했으나, 그가 손수 커다란 카메라와 타자기 그리고 가방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짐의 화물비가 너무 비쌌기 때문에 가지고 있던 현금을 거의 다 써버렸다. 그나마 남아 있던 돈도 샌프란시스코에서 호텔 비용으로 다 나가버렸기 때문에 요코하마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빈털터리 상태였다.
언더우드는 하나같이 한국선교를 염원하고 후원하던 헵번(J. C. Hepburn)을 비롯, 그곳의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의 환영을 받았다. 동양에서는 어디서든 선교사끼리 만나면 그들은 곧 형제를 만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 사람의 집, 지갑, 시간 등 모든 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돈 문제에 관한 한, 선교사 신임장을 갖고 있기만 하면 누구든 얼마만큼의 돈이라도 빌려주는 것이 통례였다. 그 이유는 첫째로, 선교사는 그 돈을 갚아줄 수 있는 미국의 커다란 선교부의 대표자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선교사들은 오래된 동양의 전통에 따라 그들의 정직함에 대해서는 아무도 뒤흔들 수 없는 확고한 명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더우드는 돈 문제에 관해서는 걱정이 없게 되었다.
한국과 같이 외떨어진 곳에 가는 증기선은 자주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다리는 동안 언더우드는 배 위에서 그리고 선원들의 집에서 특별예배를 드리고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러던 중, 한국인 이수정을 만났는데, 그는 한국으로 전령을 보냈고, 언더우드는 그와 함께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한국에 들어갈 때 그가 번역한 신약 마가복음을 들고 입국할 수 있었다. 몇 달이 지나자 웬만한 예인선보다 별로 클 것이 없는 증기선이 한국으로 출항할 준비를 갖추었으므로 언더우드는 배를 타기 위해 항구도시에서 며칠 밤을 머물게 되었는데, 일본말도 모른 채 낯선 집에서 일본인들과 함께 묵던 어느 날 밤, 아주 경이로운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다. 지갑을 머리맡에 두고 잠을 청했을 때, 일본말로 불려지는‘만세 반석’(Rock of Ages)의 부드러운 곡조가 한밤의 정적을 타고 은은하게 흘러나왔고, 뒤를 이어 엄숙한 기도 소리가 들어 왔던 것이다. 뜻밖에도 자신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흐뭇한 희열을 느끼며 언더우드는 소지품을 지키려고 깨어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단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는 한국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도처에서 들었다. 로마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라든가, 한국인의 야만성이라든가, 한 그루의 나무도 없고 지저귀는 새도 없으며 한 포기의 꽃도 없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최근에 서울에서 일어난 무시무시한 폭동(갑신정변) 때에는 일단의 혁명가들과 일본인들이 간신히 항구로 도망쳐 나와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 등이었다. 그럼에도 언더우드는 한국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믿고,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확신 가운데 한국행을 단행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한국교회사(31)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Ⅰ. 선교사들의 입국
2. 언더우드의 입국
3) 언더우드의 입국과 활동
언더우드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주일 아침에 아펜젤러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했다. 아펜젤러는 아내가 임신 중에 있었기때문에 입국을 연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미국 공관 폴크의 제의를 받아들여 일주일 후 아내를 데리고 일본에 돌아갔다가 2개월 후 다시 입국했다. 이렇게 해서 그리피스가 말한 바,“ 이 땅에 상주한 첫 안수받은 선교사”가 된 언더우드는 4월 7일 서울에 도착해 4월 10일부터 광혜원에‘약제사’로 들어가 의학생들에게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면서 한국어를 배우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고, 동시에 마가복음의 번역과 사전 편찬에 착수하였다. 언더우드가 입국한 후 장로교 선교회의 헤론(Heron) 의사 부부가 6월에 도착하였고, 에니 엘러스(Annie Ellers)는 국립학교 교사들과 함께 1886년 6월에 도착하였다.
(1) 교육 사역
언더우드는 처음에 수술을 집도하는 알렌을 도우려고 했으나 피를 보고 두 번이나 기절해 할 수 없이 내과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거의 동시에 경신학교의 전신인 존 디 웰즈 학교(John D. Wells School)를 설립해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독립 운동가이며 해방 후 입법의원 원장을 지낸 김규식이 부모를 잃고 가난에 굶주리고 있을 때 언더우드를 만난 것이 바로 경신학교에서였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양반으로서 관직에 있었는데 정치적 사건으로 말미암아 귀양을 갔고, 모친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삼촌들은 생활이 궁핍하여 이 아이를 돌보려 하지 않았으므로 새로 건립된 고아원으로 그를 데려왔다. 그러나 네 살짜리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어서 그 아이는 다시 친척들에게 돌려보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이가 몹시 아픈데도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언더우드는, 자기 몸 역시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분유와 약을 들고 가마를 타고서 아이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그 아이는 너무 굶주려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필사적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아이가 죽을 경우 언더우드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사들과 선교사들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언더우드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다가 극진히 간호하였다. 결국 그 어린 생명은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이 아이는 빠른 속도로 영어를 익혔으며, 마침내 한국 그리스도인 교역자 중에서 가장 성실하고 유능한 한 사람이 되어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가르쳤고 교회나 YMCA(1900년 설립)에서도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었으며, 몇 년 동안 언더우드의 비서로서 일을 보기도 하였다.
(2) 성경번역사역
학교사업 외에 1887년에는 성서번역을 추진하기 위해 상임성서실행위원회를 결성했고, 1890년에는 문서 선교를 위해 기독교서회의 전신인 조선성교서회를 조직했다. 성서번역은 언더우드의 필생의 사업이었다.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성서번역에 온 정성을 기울였지만 특히 언더우드, 게일, 레이놀즈, 아펜젤러, 스크랜톤의 노력은 대단했다.
한국에 도착한지 일 년 남짓 되어 언더우드는 아펜젤러와 공동 작업으로 마가복음의 임시 번역판을 출판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성경을 번역·출판·보급하는 데 열심이어서, 아주 빠른 시기에 상임성서실행위원회(The Permanent Executive Bible Committee)를 조직하였다. 이 위원회는 여러 선교회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었다. 위원회는 산하의 번역위원회를 통하여 번역 사업을 지도하고 통제하였으며, 성서공회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인쇄와 출판을 지도하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와 스크랜톤은 번역위원회 소속이었으며, 언더우드는 일생 동안 위원장직을 맡았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죽을 때까지 아니 죽기까지 이 일을 감당하였다. 그들은 주님이나 한국을 위해 일하는 데 목숨을 아끼지 않았으며, 둘 다 이 일에 값비싼 희생을 지불했다. 아펜젤러는 번역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에 익사하였으며, 언더우드는 1915년 여름 휴가 때, 가을과 겨울에 닥칠 과중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건강을 회복해 두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개의치 않고 번역 일에 몰두함으로써 결국 건강을 회복할 기회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언제나 성경 번역을 그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로 생각하였다. 사람의 수중에 있는 성경이 가장 훌륭한 설교를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그는 한국을 누비며 많은 성경을 배포, 판매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인 권서인들과 여자 권서인들을 지도하는데 많은 관심을 보였고, 성심으로 그들을 격려하였다.
성경을 번역함에 있어서 번역자들이 정확을 기하기 위해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 불어, 독어, 중국어로 된 성경과 영어 개역 성경을 참고서로 사용했다고 언더우드는‘코리언 미션 필드’(The Korean Mission Field)에서 밝힌바 있다. 또한 언더우드는 ''첫 개신교 선교사들이 이 땅에 도착한 지 4 반세기도 안 되어 성경 전체가 한국인들의 수중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은 결코 늦은 일이라 볼 수 없다.’고 하면서,‘ 어떤 사람이 그만두게 되었을 때 다른 사람을 택해 보내 주시고, 지혜와 은혜를 주시고,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지도하신 위대하신 조력자와 교사셨던 주님이 없었다면, 이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큰 은사를 주신 주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린다.’고 하였다.
(3) 전도사역
언더우드는 개신교 선교사로는 최초로 세례를 베푼 인물이다. 언더우드에게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인물은 노춘경이다. 그는 외국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찬 한국의 양반으로, 특히 외국 종교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 종교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남들이 아는 것을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했다. 바로 얼마 전에 그의 많은 동포들이 신앙을 고백하여 고문을 당하고 목이 잘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알렌 박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자신은 영어를 배우는 체 하면서, 언제나 이 금단의 열매를 따먹을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서재 책상에서 두 복음서를 훔쳐보게 되었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이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낄 새도 없이 급히 그 두 권의 책을 넓은 소매 속에 넣은 다음 훔친 보물을 들고 집으로 달려왔다. 그는 이 책의 놀라운 매력에 사로잡혔다. 이것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그의 마음에도 그저 아름다운 것일 뿐 아니라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밤새 그 책을 읽고 아침에는 그것이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완전히 확신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언더우드의 서재에서 용감하게도 복음이 좋고 웅대하며, 죽든 살든 믿음을 갖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하였다.
언더우드는 후에 이 일을 회고하면서“이 사람을 보면, 우리는 마치 그를 뒤따를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어두운 한국에 동이 틀 날이 오리란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 한 사람의 신자는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시려고 작정하신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임을 확실히 믿고 있었다.”고 하였다.
노춘경은 1886년 7월 11일 비밀리에 세례를 받았으며, 다음해 봄에는 또 3명이 세례를 받아, 이로부터 첫 교회가 조직되었다. 1887년 12월 언더우드의 집에서는 7명의 세례교인만이 참석한 한국 최초의 성찬 예배가 드려졌다.
그 외에도 언더우드는 남장로교 선교회와 캐나다 선교회의 한국선교의 문을 열어 준 인물이며, 연합 선교의 이상을 통해 한국선교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한국선교의 개척자였다.
191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선교사로서’,‘ 학자로서’,‘ 교육가로서’, ‘성경번역자로서’, ‘편집가로서’, ‘여행가로서’, ‘정치가로서’그리고‘평화의 사도로서’그가 이룩한 업적은 가히 경이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초기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한국선교의 계획 이면에 언더우드의 신앙과 이상과 아이디어가 얼마나 많이 반영되어 있는가를 발견할 수 있다.
언더우드는 1889년 3월 명성황후의 시의였던 의료 선교사 릴리아스 호톤 양과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전도여행으로 떠날 만큼 복음의 열정에 불타고 있었다. 언더우드의 생애에는 화란의 개혁파 경건주의, 화란개혁교회 교단과 뉴 브룬스윅신학교의 개혁파 복음주의 전통 그리고 당시 미국에서 일고 있던 19세기 부흥운동의 전통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었다.
한국교회사(32)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Ⅰ. 선교사들의 입국
2. 언더우드의 입국
4) 언더우드 뒤를 이어 입국한 북장로교 개척 선교사들
언더우드의 뒤를 이어 6월 20일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 헤론(J. W. Heron) 부부가 일본에 체류하던 스크랜톤 어머니, 스크랜톤 아내, 아펜젤러와 함께 입국하고 이어 훈련된 간호사 앤니 앨러스(Annie Ellers)와 후에 언더우드의 아내가 된 의료 선교사 릴리아스 호톤(Lilias Horton)이 입국해 한국의 의료 선교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영국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헤론은 14살 때 부친을 따라 미국 테네시주 녹스빌로 이주해 메리빌(Maryville) 대학과 테네시대학교(University of Tennesse) 의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는 교수 요원으로 남아 달라는 테네시 의과대학의 요청을 뒤로 한 채 1885년 6월에 입국하여 그 달 21일에 제중원 의사로 임명받았고, 1887년 9월 알렌이 선교사직을 사임한 뒤에는 제중원의 책임을 맡았다.
사무엘 마펫이‘이상적인 의료 선교사’,‘ 신실하게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평했던 헤론은 언더우드와 스크랜톤과 더불어 성경 번역위원에도 임명되었던‘가장 성공적인 의사 및 외과의사일 뿐만 아니라 동료 선교사들의 건강을 지키는 일에 깊은 책임 의식을 갖고 있었던’의사였다.
1897년 12월‘코리안 리파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에서 헤론의 사랑하는 동료 다니엘 기포드(Daniel L. Gifford)는, 헤론은 어느 누구보다도 맡겨진 의료 선교사역에 충실했던 양식 있는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왕으로부터 가난한 옹기장수에 이르기까지 많은 한국인은 숙련된 그의 손길을 통해 육체적인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외과 의사였던 그가 휘두르는 칼은 사람을 죽이는 무기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도구였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그의 헌신적인 치료와 정성을 잊지 못하고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치료가 단순히 숙련된 의술을 통한 치료에 그친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도구로 겸손히 쓰임 받겠다는 신실한 신앙에서 우러나온 헌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용감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믿음의 형제, 그것은 바로 헤론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가난한 민중에서부터 여러 공관들과 왕의 충실한 시의였던 북장로교 선교사 헤론은 5년 만인 1890년 7월 26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생명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충성하던 그가, 하루 이틀을 병석에 누워있다 갑자기 병이 악화되어 생명이 위독해진 것이었다. 둘러앉은 한국인과 여러 동료 선교사들에게 그는 희미한 의식을 가다듬으며“예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는 당신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가 함께 있습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먼저 하늘 나라로 갔다.
그러나 이 땅에는 그의 시신을 묻을 만한 단 한 평의 땅도 없었다. 서울 가까이의 양화진에 매장할 수 있도록 조정에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언더우드와 헤론의 조사들이 거주하는 선교회 소속 집 뒤뜰에 임시 매장하려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제물포에 외국인 묘지가 있었으나 한여름에 30마일이나 떨어진 그곳까지 시체를 옮겨 매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할 수 없이 그의 유해는 미국 공관안에 임시 매장되었다가 다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이장되어 고이 잠들어 있다.
헤론을 잃은 것은 참으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전후하여 여러 선교사들이 한국 땅을 밟았다.
이때 한국 땅을 밟은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은 다음과 같다.
① 길모어(G. W. Gilmore, 吉毛, 1857-?)
길모어는 미국의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한 후 신학대학을 다니던 중 북장로교의 파송을 받아 1886년 한국에 왔다가, 서울의 유력자들의 자제들을 가르치고자 설립된 육영공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이 학업에 열의가 없는 모습을 보고 실망한 뒤 귀국하였으며, 1894년엔 이 학원도 폐교되었다. 고국으로 돌아간 길모어는 전체 15장으로 구성된‘서울풍물지’를 기록하여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이 책에서 길모어는 국토, 정부, 서울의 모습, 언어, 국민, 가정생활, 복식과 장식, 여성의 생활, 놀이, 종교, 자원, 문명화로의 진보, 외교관계, 조선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들의 생활, 선교사업 등에 관해 보고, 느낀 바를 비교적 솔직하게 서술하였다.
② 기퍼드(D. L. Gifford, 奇普, ?-1900)와 헤이든(M. E. Hayden, 1857-1900)
1888년에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한 기퍼드는 새문안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했다. 1890년에는 정동여학당 학장 헤이든(M. E. Hayden)과 결혼했다. 그는 1892년에 창간한 The Korean Repository에 한국 선교의 활동 및 한국문화에 대한 많은 글을 기고했다. 언더우드학당에서 교사로 활동했던 그는 1900년 4월 10일 경기 남부지방의 선교 순회 도중 갑자기 사망했다.
헤이든은 1857년 미국에서 태어나 파크대학을 졸업하고 1888년 9월 29일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서울 정동여학당 2대 당장에 취임하였으며, 1890년 기퍼드와 결혼하였다. 기퍼드와 함께 여성 선교 사업에 주력하다 1900년 남편이 죽자 한 달 뒤에 그녀도 세상을 떠났다
③ 게일(J. S. Gale, 奇一, 1863-1937)
1888년 캐나다 토론토대학을 졸업한 게일은 그 해 YMCA선교사로 내한하여 조선성교문서회의 창립위원이 되었으며, 성서공회 전임번역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다 1891년 2월 토론토대학 YMCA선교부 해체로 북장로교 선교부에 소속되었다. 1900년부터 연동교회 담임선교사로 목회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듬해 조선성교문서회 3대 회장에 선출되어 적극적인 문서전도활동을 펼쳤다. 1903년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 창립위원과 초대회장을 역임했고, 1908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장에 선출되었으며, 평양신학교 교수로도 활동했다. 이후에는 주로 성경번역과 찬송가 개편에 힘써 1925년에는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의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많은 글과 저작들을 남겼다.
④ 마펫(S. A. Moffett, 馬布三悅, 1864-1939)
하노버대학과 매코믹신학교를 졸업한 마펫은 1890년 1월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그는 언더우드로부터 예수교학당을 인수하여 교육사업을 펼쳤으며, 이 무렵 그는 모두 3차례의 전도여행을 마치고 1893년 평양에 선교부를 본격적으로 설치하였으며, 전도활동을 통해 많은 교회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1901년 평양신학교 설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1904년부터 1924년까지 평양장로회 신학교 교장으로 재직했으며, 1919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대 총회장을 역임했다. 그 후 그는 숭실학교 학교장으로 시무하기도 했다. 그는 평양을 중심으로 서북지역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선교사업을 총괄한 서북기독교의 대부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⑤ 베어드(W. M. Baird, 裵偉良, 1862-1931)
미국 하노버대학과 매코믹신학교를 졸업한 베어드는 1890년 아담스(A. L. Adams Baird, 安愛理, 1864-1916)와 결혼하고 1891년 3월 25일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부산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했으며, 1895년 12월에는 대구로 선교구역을 이전하여 활동했다. 1896년에는 서울 예수교학당과 곤당골 사립학교 교사를 겸직했으며, 1897년에는 평양지역 선교회로 이전했다. 이전하자마자 그는 그의 사랑방에서 숭실학당을 시작하였다. 이 학당은 1906년 합성 숭실대학으로 발전했다. 1916년 숭실대학장직을 사임하고, 이후 공과교재 집필 및 편집과 기독교서회 편찬위원, 성서공회 성서출판위원으로 주로 문서사업과 성서번역작업분야에서 활동했다. 베어드 부인은 남편과 함께 파송되어 평양을 중심으로 여성사업, 문서전도, 육영사업에 헌신했으며, 학생들을 위한 교과서의 번역, 찬송가번역 등을 하는 한편, 문학소설을 저술할 정도로 글 솜씨가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⑥ 빈턴(C. C. Vinton, 賓頓, 1856-1936)
북장로교 선교사로 1891년 4월에 내한한 빈턴은 서울 국립병원 제중원 의사로 활동하다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1893년 11월 제중원 원장을 사직하고 개인진료소에서 치료, 복음전도에 전념했는데, 평양, 의주, 만주 등지에 이르는 전도여행을 했다. 조선성교문서회의 창설에도 관여했으며, The Christian News, The Korea Field, The Korea Mission Field 등을 발간하는 데 실제적인 책임자로 활동했다. 1904년에는 나병환자 수용소 설치에 공헌했다.
⑦ 스왈른(W. L. Swallen, 蘇安論, 1865-1954)
1892년 11월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한 스왈른은 관서지방 개척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평양지방 선교사업의 개시 및 평양주재 선교사로 위임받았다. 한 때 함남 원산선교부로 파송되기도 했으며, 1899년 숭실학당 관리책임자가 되기도 했다. 그 후 그는 1901년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 초대회장이 되어, 1903년 마펫, 베어드 등과 함께 평양신학교를 발족하고 교육활동에 전념했다.
⑧ 그레이험 리(Graham Lee, 李吉咸, 1861-1916)
시카고의 매코믹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1892년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그는 이듬해 관서지방 개척선교사로 임명되었으나 형편상 서울로 돌아와 연동교회 설립의 초석을 마련했다. 이후 1895년 한국인 조사 한석진을 대동하고 평양에서 개척선교를 시작했다. 1901년에는 평양신학교 교수로 활동했으며, 1907년 1월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한 대사경회를 개최하여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⑨ 에비슨(O. R. Avison, 魚丕信, 1860-1956)
에비슨은 1890년 캐나다 토론토대학의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892년 6월 미북장로교 선교사 자격으로 내한하여 그 해 11월부터 제중원 의사로 활동했다. 제중원에서 그는 처음으로 의학교육을 실시했다. 1890년대 이후 제중원을 실질적으로 관리하는 역할을 하던 그는 1904년 세브란스의 기금으로 병원을 준공, 병원장으로 취임했다. 1913년 병원장을 사임한 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으로 1934년까지 일하다가 은퇴 후 귀국했다.
⑩ 밀러(F. S. Miller, 閔老雅, 1866-1937)
피츠버그대학과 유니온신학교를 졸업한 밀러는 1892년 북장로교 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내한했다. 이듬해 그는 예수교학당(이후 경신학교가 됨)의 책임자가 되어 교명을 민로아학당으로 고치고 자신의 교육방침대로 발전시켰다. 1895년에는 연동교회의 기초를 마련했다. 1900년부터는 충청도 전도사업에 종사했는데, 이후 청주를 중심으로 충청도 지역을 복음화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문서활동을 통한 기독교선교를 실천했던 사람이었다.
위와 같은 선교사들의 입국으로 인해 복음 전도가 활기를 뜀으로써 북장로교 선교회는 한국선교를 주도하는 선교단체가 되었다.
한국교회사(33)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Ⅰ. 선교사들의 입국
3. 아펜젤러의 입국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는 1885년 4월 5일에 언더우드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하여 합법적으로 한국에 입국한 선교사가 되었다. 그는 제물포에 도착한 직후 본국의 선교부에 보낸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도착했다. 이날 사망의 빗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여 있는 굴레를 끊으사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
아펜젤러는 자신이 외친 이 기원을 실현하고자 최선을 다한 인물이다. 해서 그리피스는 그에게‘한국 복음의 개척자’,‘ 한국인의 사도’라는 예찬을 아끼지 않았다.
1) 아펜젤러의 성장 및 교육 배경
아펜젤러는 1858년 2월 6일 펜실베니아 소더톤에서 기드온 아펜젤러(Gideon Appenzeller)와 마리아 게르하르트(Maria Gerhart) 사이에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나, 메노나이트 출신 어머니의 경건한 신앙심과 복음주의 신앙의 가정 속에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십계명, 주기도문, 사도신경은 물론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줄줄 암송할 만큼 독실한 신앙 훈련과 경건의 훈련을 받았고, 1872년 11월 12일 임마누엘 개혁교회에서 피터 피셔(Peter S. Fisher)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개혁파 전통을 준수하는 전형적인 장로교인이 되었다.
그러다 18세 때인 1876년 10월 1일 뚜렷한 회심을 경험하고, 며칠 후인 10월 11일부터 무려 3년 동안이나 장로교에서 감리교로 옮기는 문제를 고민하다 감리교로 이적했다.
1879년 경에 그의 교회생활에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것은 그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랭카스터에 있을 때 그는 감리교도들과 많은 교제를 하면서 여러 교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4월 5일자 일기가 증명하듯이, 이때 그는 한동안 정신적 불안상태에 빠져 있었고, 동시에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불만이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는 보다 풍부한 체험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는 제일감리교회에서의 기도 모임과 조모임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으며, 4월 16일에는 필라델피아 연회의 회의록을 검토하고 감명을 받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선택한 교회가 하고 있는 선한 사업은 나에게 기쁨을 준다.”또 그 다음 주일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개혁교회에서 감리교회로 옮기는 문제에 대한 이전의 모든 생각과 논쟁들이 오늘 모두 끝났다. 나는 감리교회의 완전한 신도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택한 일이다. 이 일은 한동안의 기도와 묵상 끝에 이루어진 것이다. 1876년 10월 1일 회개한 이래 나는 주로 감리교도들과 함께 지내면서 개혁교회에서 보다 훨씬 편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감리교회에 가입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하며, 오늘 내가 한 일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아펜젤러는 1879년 4월 20일 스미드 목사가 목회를 하던 랭카스터 소재 제일감리교회에 정식으로 가입하여 감리교도가 되었다.
아펜젤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그리스도를 위한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봉사를 의미했다. 그는 고귀한 영혼을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에 단지 소극적으로 선하다는 데 자족하는 것을 지독히 싫어하였다. 신약을 읽으면서 그는 주님이, 유혹에 넘어간 자나 버림받은 자, 혹은 소위‘죄인’들을 경멸하시는 것이 아니라, 경건한 체 하면서 실제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나 선한 사마리아인과는 정 반대 되는 사람, 즉 자기가 정통임을 주장하는 게으름뱅이들을 당장 꾸짖으신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아펜젤러는 행동과 유리된 지식이란 질병이나 죄악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명령은 주후 33년 경에 하신 말씀이 아니라 주후 1870년에 바로 그의 면전에서 하신 말씀인 것처럼 그에게 실감나게 들려왔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고 하신 인자되신 주님의 말씀은 거룩하고 위엄 있어, 그 자신에게 들려오는 절대적인 명령과도 같았다. 아펜젤러는 이러한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영혼의 목자와 설교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어떻게 하면 가장 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가를 배우기 위해 랭카스터에 있는 작은 예배당에서 설교를 시작하였다.
아펜젤러는 음악적 재능을 포함한 많은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예리한 유머 감각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농담의 요점을 재빠르게 파악하며 사물의 즐거운 측면을 판별해 냄으로써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흥겹게하여 많은 짐들을 가볍게 만드는 윤활유 같은 사람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이러한 하나님의 은사가 후에 한국인들의 마음을 여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2) 아펜젤러의 한국 선교 준비
아펜젤러는 지방의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랭카스터의 개혁교회 계통의 프랭클린 마샬대학(Franklin and Marshall College)을 마친 후, 뉴저지 주에 있는 두루신학교(Drew Seminary)에 갔다. 아펜젤러는 제임스 스트롱(James
Strong) 박사, 크룩스(G. R. Crooks) 박사, 업햄(S. F. Upham) 박사, 커목크(R. L. Cummock) 박사, 윌리(J. Wiley)박사, 실버맨(J. P Silverman) 박사 그리고 1912년까지 학장직을 맡았던 헨리 부츠(H. R. Butz) 박사 등 영향력 있는 교수들 밑에서 신앙과 지적인 훈련을 쌓는 한편, 당시 미국 신학생들에게 일고 있던 해외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처음에는 일본에, 다음에는 한국에 복음선교사로 갈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신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아펜젤러는 1883년 10월 24일부터 28일까지 하트포드에서 열린 신학교 연맹대회(The Americal Inter-seminary Alliance)에 참석해 선교사로서의 비전을 다짐했고, 그곳에서 장차 함께 한국선교를 위해 젊음을 불태울 총명한 청년 언더우드를 만났다.
비렌즈(A. F. Behrends), 뉴톤(Richard Newton), 핫지(A. A. Hodge), 타운센드(L. T. Townsend), 고든(A. J. Gordon)등 신학과 선교 분야에서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지도자들이 대거 하트포드 선교 대회의 강사들로 참여했다. 그리피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들은“모두가 당대의 저명한 인물들이었고 여러 교단들을 대표하는”“영감어린 강사진들”이었다. 이미 이 대회가 열리기 이틀 전인 10월 22일 친구 워즈워드(J. S. Wadsworth)와 선교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선교를 결심했던 차였기 때문에 아펜젤러는 전에 없는 선교 열에 불타고 있었다.
언더우드와의 역사적인 만남은 아펜젤러에게 한국에 대한 깊은 관심을 불어넣었다. 본래 아펜젤러가 가려던 선교지는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었으나 한국선교를 지망했던 친구 워즈워드가 어머니의 중병으로 한국행이 불가능해지는 바람에 친구를 대신하여 한국선교를 결심한 것이다.
아펜젤러는 1884년 12월 17일 랭카스터의 제일감리교회에서 엘라 닷지(Ella Dodge)와 결혼식을 올렸다. 닷지란 이름을 가진 미국인들은 그 대부분이 영국의 체스터(Chester)에서 1629년에 배를 타고 매사추세츠의 살렘으로 건너온 청교도 윌리엄 닷지(William Dodge)의 후손들이다. 이 가문 출신의 엘라 닷지 역시 가문의 이름에 손색이 없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의 아내와 동반자가 되어 그를 땅 끝까지라도 쫓아갈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 해외로 갈 준비가 되어 있던 여인이었다. 아펜젤러 부부는 결혼 후 곧바로 수더튼의 오랜 농가를 방문하였다. 이곳 고향에서 크리스마스 주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는 그의 한국 선교가 확정되었으며 곧 떠나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친지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모든 준비를 하여 집을 떠나기까지 한 달 밖에 시간적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지만, 아펜젤러는‘교회의 부르심은 곧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생각하고 순종하였다.
1885년 1월 14일 드루신학교 교수와 학생들이 아펜젤러 부부의 한국행을 축하하는‘대단히 감동적인 파송예배’를 드렸고, 거의 전 신학교 교수와 학생이 역까지 나와 이들의 한국행을 축복해 주었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에 젊은 학생들은 그가 먼 이국땅에서 자신들을 대표하여 그리스도의 사신의 직무를 감당할 것이라고 생각하며‘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사귐은’과‘우리 그 강에서 만날까’라는 찬송을 불렀다.
1885년 2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북감리교 파울러 감독(Bishop Fowler)에게 안수받은 아펜젤러는 아내와 함께 그 다음날인 3일, 이미 1884년에 미 감리교 선교사 후보생으로 지명된 스크랜톤(William Benton Scranton, 1856-1922) 내외, 스크랜톤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톤(Mary Fitch Scranton, 1831-1929)과 함께‘아라빅’(S. S. Arabic) 호에 몸을 싣고 한국을 향해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발했다.
명문 예일대학과 뉴욕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스크랜톤은 1882년부터 1884년까지 오하이오 주에서 개업하다 아펜젤러보다 앞서 1884년 12월 북감리교 한국선교 후보생으로 내정을 받고 같이 한국을 향해 출발한 것이다.
1885년 2월 27일 요코하마에 도착한 아펜젤러 일행은 3월 5일, 한국선교의 장을 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맥클레이 선교사 자택에서 열린‘제1회 한국 선교사회의’에 참석했다. 이날 회의가 열린 야오야마 에이와 학원(英和學院, Anglo Japanese College) 구내에 있는 맥클레이 집에는 맥클레이 부부, 아펜젤러 부부, 스크랜톤 부부, 메리 스크랜톤 등 7명의 선교사와 박영효와 이수정 등 2명의 한국인이 참석했다. 아펜젤러와 스크랜톤이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감리교 한국 선교회가 정식으로 조직되었으며, 아펜젤러 일행은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틈나는 대로 한국어를 습득하고, 한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한국선교를 준비하였다. 아펜젤러와 언더우
드 일행이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1885년 3월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화파 지도자들이 일본에 망명하고 있었던 기간이었다. 자연히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이들 일행 중 스크랜톤은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피신해 와 있던 박영효를 만나 그로부터 한국선교를 촉구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맥클레이 선교사도 박영효와 함께 일본에 망명해 와 있던 김옥균을 만나 유사한 말을 전해 들었다. 비록 오랜 기간은 아니었지만 아펜젤러는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박영효로부터 한국어도 배웠다.
한국선교는, 한국선교의 때가 무르익도록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의해 한국인들로 하여금 선교를 요구하게 하시고, 선교사들로 하여금 한국선교에 불타게 하시며, 모국 선교부와 교회들 또한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지원을 아끼지 아니하게 하셔서 성공적인 출발을 하게 하셨다.
한국교회사(34)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Ⅰ. 선교사들의 입국
3. 아펜젤러의 입국
3) 아펜젤러의 한국 입국
1885년 3월 31일 아펜젤러는 미스비시사의 트세리오(Tserio)호를 타고 한국을 향해 떠났다. 같이 여행한 승객 중에는 언더우드, 스커더(Scudder), 테일러(Taylor) 등의 선교사와 조선 왕의 고문인 묄렌도르프(von Molendorf), 지난 12월의 살인 및 폭동(갑신정변으로 인한)에 대해 사과하러 서울로부터 토쿄에 파견되었던 한국 사절단들이 있었다.
1885년 4월 2일 오전 8시 15분, 항도 부산이 시야에 들어왔고, 얼마 후 그들을 태운 배는 부산항에 도착해 잠시 체류하였다. 아펜젤러에게 부산에 대한 첫 인상은‘덥수룩하고 거칠며 헐벗고 쭈글쭈글하며 닳아빠진 것’처럼 보였으며,‘ 가난 그 자체를 보는 것’같았다. 그럼에도 아펜젤러는 부산의 모습에 실망하지 않았다. 다시 남해안과 서해안을 돌아 4월 5일 부활 주일 오후 3시, 제물포에 도착했다. 이들의 입국을 축하라도 해주는 듯 그날 봄을 재촉하는 4월의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아펜젤러는 그의 일기에서 한국 땅에 첫발을 디딘 사람은 아펜젤러 부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3개월 전 발생한 갑신정변으로 국내 정치는 수없이 불안정했고, 기득권을 장악하려는 청·일간의 정치, 군사적 대립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갔다. 그로 인해 서울 민심은 흉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주한 미국 대리공사 폴크(George C. Foulk)가 미혼인 언더우드만 입국을 허락하고 신변의 안전을 위해 아펜젤러 내외는 허락하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제물포의 한 호텔(Harry''s Hotel)에 머물면서 공식적인 입국허락을 기다리던 아펜젤러는 얼마 후 폴크로부터“한국의 실정이 외국 여자가 들어와 살기에는 아직 때가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인은 잠시 일본에 돌아가 그곳에 있다 오는 것이 좋겠다.”는 전갈을 받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4월 13일 국내 입국 약 일주일 만에 아펜젤러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아펜젤러는 4월 18일 미국에 보내는 편지에서 아마 일 년 동안은 일본에 숙소를 정할 것 같다고 써 보내면서 “한국에는 복음 선교사보다 의사가 더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나가사키에 두 번째 체류하는 동안에 그는 인력거를 타고 히고를 거쳐 쿠마모토까지 여행하였다.
이 열성적인 선교사는 황국(皇國)의 해변에 오래 살게 되지는 않았다. 곧 한국의 지평선에는 구름이 걷히고 폭풍우의 기운은 장밋빛 고요로 바뀌었던 것이다. 한국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열정적인 순례자들을 초대할 수 있는 고요한 아침으로 돌아갔다. 스크랜튼 박사는 5월 1일 서울에서 진료에 임하고 있었고, 4월 5일에 도착했던 언더우드는 그 땅에 거주하는 최초의 복음 사역 선교사로 있었다.
6월 16일 아펜젤러 부부는 헤론(John W. Heron) 의사 부부, 스크랜톤 박사의 모친 및 처자와 함께 전과 같은 기선을 타고 일본을 떠나 다시 바다를 건넜다. 오랜 옛날 중국의 선원 시인들이 처음으로 시를 지은 이래 이 바다는 폭풍우의 바다로 유명하였다. 이 오랜 명성에 어울리게 파도가 높이 솟아 배는 심신을 혼란하게 할 정도로 흔들렸다. 그 사람이 가득 들어찬 배에서 멀미를 하지 않은 사람은 아펜젤러와 스크랜튼 박사의 아기뿐이었다. 6월 20일 배는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아펜젤러 부부는 수도에 선교사 거주지가 마련되는 동안 7월 29일까지 제물포에 머물러 있었다. 그동안에 그들은 항구에 있는 집에 거주하였는데, 그곳에 머무는 동안의 상황을 아펜젤러의 전기 작가인 그리피스는 아주 재미있게 묘사하였다. ‘그곳은 가게에서 구입한 포장지로 (벽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만 집이라는 구실을 해주는 것뿐 아니라 읽을거리까지 제공하였다. 아펜젤러 부인은 벽에서 여러 상업상의 암호나 부호뿐만 아니라, 사업자의 주소 혹은 “건조한 곳에 보관하시오”라든가 “고리를 사용하지 마시오”라는 경고문까지 읽을 수 있었다. 때는 우기였는데, 지붕은 그물처럼 비가 샜기 때문에 다만 침대라도 젖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서울을 향해 떠났다. 남자는 말을 타고 여자는 남자들이 어깨에 짊어지는 가마를 탔다. 숨을 헐떡이며 옛날이야기와 우스개 소리를 해주는 이야기꾼의 이야기에 가마꾼들은 길가는 데 힘드는 것을 잊었다. 한국은 전설의 나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하는 노동은 대개 노래나 이야기로 흥겨워지며 사교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여 성문이 닫히기 전에 성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서울에서 그들은 스크랜튼 박사의 환영을 받았으며 알렌의 집에 임시숙소를 정하였다.
아펜젤러는 정동에 집을 사서 깨끗이 수리하고 청소하여 선교관으로 사용하였다. 그리피스는 당시의 상황을 ‘한국의 주택은 일본의 것보다 훨씬 튼튼하고 따뜻하며 중국의 것보다 훨씬 안락할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 온 보통의 근대적 크리스천이 세내어 사는 것도 간편했다. 공간이나 목욕탕, 벽난로 등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것들과 같은 부수적인 혜택뿐만 아니라 산소나 산소와 수소의 복합체(물을 가리킴)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풍요하게 공급해 주시는 것에 대해서 충분히 감사한다면’한국에서의 생활은 꽤 견딜만한 것이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미국 사절로서 서울을 다녀온 한 외교관이 워싱턴에서 다음 발령을 기다리며 유럽지역 요직으로는 발령이 나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교수형을 당하는 것보다는 사이암(태국의 옛 이름)에 가는 것이 낫다. 그러나 한국에 다시 가는 것보다는 교수형을 당하는 것이 낫다”고 한 것에 대해 처음으로 한국에 온 사람은 공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나라에서 사랑스런 사람들과 오래 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