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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에 대한 특별 보고서:황교문답(黃敎問答)〉
* 정탐이 불가한 이유1)-생략
* 천하의 형세
내가 열하에 이르러 천하의 형세를 헤아려 본 것은 다섯 가지였다.
황제는 해마다 열하에 거둥하는데, 열하는 장성 밖의 궁벽한 땅이다. 천자는 무엇이 아쉬워서 이 변방의 거칠고 황폐한 땅에 와서 거하는 것일까?
명목은 ‘피서’ 라 하지만 사실은 천자가 직접 변방을 방비하기 위한 것이다. 이로써 몽고의 강성함을 가히 알 수 있다. 황제는 서번의 승왕을 맞아 스승으로 떠받들고 황금 전각을 지어 바쳤다. 천자는 또 무엇이 아쉬워서 이처럼 도리에 어긋나는 황당한 예를 행한 것일까?
명목은 ‘스승’으로 대접하는 것이라 하지만 실상인즉, 전각 속에 가두어 두고 하루라도 세상이 태평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서번이 몽고보다 더 강성하다2)는 걸 알 수 있다. 결국 이 두 가지 일은 황제의 마음이 몹시 괴롭다는 걸 말해 주는 셈이다.<중략>
이제 타고 남은 것 가운데 반선에 관련된 이야기만 추려 보았다. 이름하여 ‘황교에 대한 특별 보고서!’
* 활불(活佛)의 보경(寶鏡)
찰십륜포에서 먼저 숙소로 돌아오니, 학성이 나를 맞으면서 묻는다.
“선생께선 잠깐이라도 활불(活佛)을 접견하셨는지요? 어떻게 생겼습디까?”
“공께서는 보지 못하셨습니까?”
“활불은 깊고 삼엄한 곳에 거처하기 때문에 아무나 접견할 수가 없답니다. 더구나 그는 신통한 법술로 사람의 장부를 꿰뚫어 본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보경을 하나 걸어 놓았는데 음탕한 마음을 먹으면 푸른빛으로, 탐내고 훔치고 싶은 마음을 품으면 검은빛으로, 남에게 화를 입히려는 마음을 지니면 흰빛으로 비친답니다. 오직 일심으로 부처를 공경하는 사람이라야 붉은 놀이 누런 빛을 띠면서 상서로운 구름과 우담바라3) 같은 것이 거울 표면에 서린다고 하는군요. 그러니 이 오색경이야말로 실로 두려운 것이지요.”
“그건 진시황의 조담경(照膽鏡)을 본떠서 만든 이야기인 듯싶습니다. 하지만 조담경 역시 야담일 뿐인데,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벽에 오색경이 걸려 있지 않던가요?”
나는 ‘오색경이야말로 실로 두렵다’에 동그라미를 치며서 물었다.
“공께서 푸르고 검고 흰, 이 세가지 마음을 지니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이 거울이 그토록 두렵단 말입니까?”
“『법화』니, 『능엄』이니 하는 모든 불경의 게송(偈頌)4)들은 사람들을 위협하여 그 책에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곧 화를 입는다고 반복해서 말하지요. 중생들이 두려움과 경외심에 사로잡혀 착한 길로 돌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는 그 거울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거울은 글자가 없는 경전이요. 경전은 또 구리로 만들지 않은 거울인 셈이지요. 내가 비록 열흘 동안 담백한 음식을 먹고, 열흘 내내 목욕을 했다고 해도, 혹시 간 한 귀퉁이나 폐한 구멍에 터럭만 한 흠이라도 있다면 어찌 세 가지 빛깔이 나타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서, 학성은 바로 종이를 찢어서 불 속에 던진다. 이어서 또 이렇게 말한다.
“진실로 신통하긴 하답니다. 활불에게 절을 하는 자가 모자를 벗고 머리를 조아리면 활불이 친히 손으로 이마를 만져 줍니다. 이때 활불이 웃음을 머금으면 큰 복을 받게 되고, 만일 웃지 않으면 복이 그리 크지 않다는군요. 만약 활불이 눈을 감으면 절하던 사람이 크게 떨게 되는데, 이때 향을 피우면서 뼈저리게 참회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죄와 허물이 자연 소멸될 뿐 아니라, 두 번 다시 나쁜 짓을 하지 않게 됩니다. 이렇듯 활불은 말을 하지 않고 가르침을 주는데, 손 한 번 어루만지는 것만으로도 공덕이 이와 같습니다. 황제의 왕자들이나 사위들은 매일 아침 활불 앞에 절하고 모리를 조아릴 수 있지만, 외인들이나 보통 관원들이 활불을 친견하기란 실로 어렵지요.”
내가 학성에게 활불의 내력을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
“건륭 40년(1775년)에 서방 사람들 사이에서는 활불 법왕이 세상에 나타났다는 둥 이 법왕은 능히 40세 전생의 일까지도 안다는 둥의 말들이 자자했지요. 지금의 몽고 48부가 강하다지만 그들은 서번을 가장 무서워하고, 서번의 여러 나라들은 활불을 가장 무서워한답니다. 활불이란 곧 ‘장리대보법왕(藏理大寶法王)’입니다. 명나라 시절, 양삼보와 여러 고승들이 서역의 불교국을 두루 편력한 일이 있었지요. 오사장(烏斯藏)5)은 중국에서 1만여 리나 떨어져 있는 나라입니다. 거기에는 대보법왕과 소보법왕이 있어 서로 번갈아 가면서 환생6)을 한다는군요. 모두 도술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나면서부터 신성하기 이를 데 없었지요. 지금의 활불은 이미 황제의 신하들이 올 것과 그들이 북경을 떠나는 날자, 그리고 그들의 이름가지도 다 알고 있었다는군요. 거처하는 곳은 모두 황금으로 지었고 사치하고 화려한 품은 중국보다 더하더랍니다.”
* 양련진가7)
양련은 원래 서번의 중입니다. 원나라 때 중국에 들어와 송조의 왕릉을 도굴하여 보물과 구슬을 산더미 같이 모았습니다. 전쟁 때보다 더 심하게 했지요. 그는 신기한 비술에다 산을 쪼개는 보검까지 지니고 있었던 터라 주무을 외우면서 검으로 한 번 치면 비록 남산에 석곽이 아무리 깊이 묻혀 있다 해도 열리지 않는 게 없었답니다. 땅을 두드리면 금으로 만든 오리나 옥으로 만든 물고기가 절로 튀어나오고, 구슬로 짠 옷과 옥으로 된 궤짝이 어지럽게 벗겨졌으며, 심지어 시체를 달아 매고서 수은을 짜내거나 시체의 뺨을 쳐서 진주를 찾아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강남 사람들은 저주를 퍼부을 때, ‘밥을 해서 곰보 양련에게 갖다 바칠 놈’이라고 한다는군요.
* 천자만년수(天子萬年樹)
“ ‘라마’ 란 서번 말로 덕이나 지혜라는 의미로, 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지금도 몽고에서 중이 되면 모두 라마 복장을 차려입습니다. 북경의 옹화궁(雍和宮)8)에 있는 중들도 모두 ‘라마’9)라고 부릅니다. 만인이건 한인이건 라마에게 의탁하여 중이 되는 자가 많은데, 이것은 라마가 되면 의식이 풍족해지기 때문이지요.
대체로 원이나 명나라 시절에는 번승이 몸소 사신이 되어 조공을 바쳤습니다. 그때 3,4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데리고 국경에 들어오는데, 그 수행원들은 생기는 게 많아서 더러는 변방에 무문 채 돌아가지 않은 자도 있었습니다. 홍무(1368~1398년) 초년에는 번승을 높이 받들 뿐 아니라, 아끼고 사랑하기를 지극하게 하였지요. 영락 연간으로부터 무종(1506~1521년) 때에 이르기까지는 대우가 더욱 융숭해져서 수도 안에 있는 여러 절간에 머물게 하고는 극진하게 대접했습니다.
금년 봄에는 금으로 궁궐을 세우고 활불을 맞아다 거기에 살게 했지만 옛날 원이나 명나라 때에 비하면 좀 미흡한 편이지요. 서번의 여러 법왕들의 궁전은 황금 기와와 백옥 층대로 되어 있는 데다, 문과 난간에는 침향이나 강진(향나무의 일종)·오목(화류)같은 목재를 쓰고, 창에는 수정과 유리를 달았으며, 벽은 모두 화제(운모의 일종)나 슬슬(구슬의 일종)로 만든답니다. 거기에 비하면 지금 거처하는 곳은, 흙으로 된 계단에 가시나무 집인 셈이지요. 따라서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기를 즐기지 않고, 굳이 돌아가기를 청한다고 합니다. 황제는 내년에 오대산으로 거둥을 할 때 법왕을 친히 산서까지 전송해 주기로 약속하고, 기일가지 정해 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활불은 음률에 밝아 팔풍을 점치고 10개국 말에도 능하답니다.”
“10개국 말에 능한데, 무엇 때문에 이중으로 통역을 할까요?”
“비록 소리엔 밝다 해도 즉석에서 뜻이 바로 통하기야 하겠습니까? 법왕은 여기로 올 적에 신령스러운 나무 한 그루를 뽑아 화분에 담아 가지고 왔답니다.”
“신령스러운 나무라니, 그게 무엇인가요?”
“이름을 천자만년수라고 합니다. 엇갈린 줄기와 뒤엉킨 가지가 모두 천자만년이란 글자 모양을 이루고 있습니다. 장자가 말한 3천 년으로 봄을 하고, 3천 년으로 가을을 한다는 ‘명령’이 바로 이 나무라고 합니다.”
베이징 중심가에 있는, 역대 티베트 법왕들의 거처인 옹화궁의 정문
거대한 목조미륵불상이 있는 만복각
티베트어, 만주어, 몽골어로 써 있는 만복각의 현판
* 비를 내리게 하다
“또 일찍이 활불이 황제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다가 갑자기 남쪽을 향하여 찻물을 획 뿌리더랍니다. 황제가 놀라서 그 연유를 물었더니, 방금 700리 밖에서 큰불이 나서 1만 호나 되는 인가가 불타고 있기에 불을 끄기 위해 비를 조금 보낸 것이라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부신이 달려와 이렇게 아뢰는 게 아니겠습니까? 정양문 밖 유리창에서 불이 나서 누각까지 타 버릴 정도였는데, 불기운이 어찌나 세던지 인력으로는 도저히 끄지 못하겠더랍니다. 그런데 문득 한낮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홀연히 동북방으로부터 큰비가 몰려오는 바람에 순식간에 불이 꺼졌다는 겁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차를 뿌려 비를 보낸 시각과 꼭 맞더랍니다.”
* 윤회와 환생
윤가전과의 필담 중에서....
“법왕이 남의 몸을 빌어 태어나는 것과 윤회는 어떻게 다릅니까?”
“남의 몸을 빌려 태어나는 것은 환생이라고 합니다. 이 몸뚱아리란 바람과 비, 더위와 추위에 시달리는 까닭에 머리털은 학처럼 희어지고 가죽은 닭처럼 쭈그러져 늙어 사그라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흙이나 물, 바람, 비 등으로 화해 버리게 마련이지요. 하지만 밝게 빛나는 지혜와 금강의 보체10)는 본디 젊지도 늙지도 않는 것입니다. 장작 하나가 다 타고 나면 다른 나무로 불이 옮겨 붙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비유컨대, 천 리를 가는 자가 집을 짊어지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라, 반드시 숙소를 옮겨 가면서 길을 가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천하에 다정한 사람이라 해도 주막집에 정이 들었다고 그대로 눌러 앉았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불이 장작에 인연하여 일어나면 잠시 동안은 불과 나무가 서로 뒤엉켜 뜨겁게 타오르지만, 불이 다른 나무로 옮겨 붙고 나면 이미 타버린 재를 연모하는 법은 없지요. 법왕이 다른 몸에 태어난다는 것도 이런 말일 겁니다.
환생은 윤회와 다릅니다. 사실 이 윤회설이란 불가의 율법입니다. 저들이 말하는 윤회설은 당시 임금들이 제장한 규범으로, 오복과 오형의 조항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상을 주는 것과 사형에 처하는 바가 각기 공교로운 문장을 이루고 있어 마치 거울에 비추는 듯합니다. 공과 죄가 나타나기도 전에 우선 법조항부터 갖춘 셈이지요. 불교를 믿는 자들은 세상의 공과 죄가 정당하지 않고 상과 벌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발로 밟을 수 있고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겨, 깊고 어두워 가늠하기 어려운 곳으로 옮겨,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는 상황에서 권면하고 벌을 주려는 것이지요. 옛사람들이 말한, “임금의 권세를 은밀히 조종한다.” 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유가에서 반드시 그들을 원수처럼 공격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인이 도를 펼치고 도를 전하는 것 역시 이와 같은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천지는 한없이 크고, 풍속 또한 제각기 다를 뿐 아니라, 기운도 각기 다르고 편벽된 바가 있습니다. 하여, 이치 또한 경우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물이 그릇의 모양에 따라 둥글기도 하고 모나기도 한 것과 같은 셈이죠. 따라서 고금 천하에 윤회 또한 없다 할 수 없고, 환생 또한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화식을 끊는 사람도 없지 않고, 장생불사하는 사람 또한 없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치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도 미혹에 빠진 것이요, 이런 이치를 전적으로 긍정하는 것 역시 미혹에 빠진11) 것입니다. 간혹 이 같은 이치가 있을 수도 있는데, 이 간혹 있을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만 가지 이치를 다 꿰어 맞추려 하거나 천하를 온통 바꾸려 한다면, 그건 더욱 미혹에 빠진 것입니다.
* 황교
윤가전은 눈을 감고 한참 동안 입속으로 뭔가 중얼거리는데, 마치 염불을 하는 것 같았다. 얼마 후에야 눈을 뜨더니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선생의 도가 지극히 옳습니다. 이단과 우리 도(儒家)를 비교해보면 비록 삿됨과 올바름, 순수함가 잡스러움의 차이가 있지만, 이로움을 일으키고 어짊을 행하며 잔악함을 물리치고 살육을 없애려는 점에 대해서는 서로 통하는 면이 없지 않습니까?”
“법왕의 법술을 무슨 도라고 합니까?”
“소위 ‘황교’라고 합니다.”
“황교란 황제와 노자의 도를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황백 비승의 법술을 말하는 건가요?”
“천지간에는 별난 세상, 별난 사람이 다 있어서 이 도는 무명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에 따르면, 맑고 참되고 편안하고 즐거운 것이 생이라면, 때에 맞추어 돌아가는 것이 죽음이랍니다. 산다고 해서 특별히 즐거울 것도 없고, 죽는다고 해서 특별히 슬플 것도 없습니다. 계속 몸을 바꾸어 가며 환생하기 때문에 억만 겁을 겪어도 변함이 없지요. 벼슬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으며, 아는 것도 모르는 듯이 하고, 모르는 것도 다 깨달은 듯이 합니다. 전쟁과 살생을 좋아하지 않으며, 이 세상은 한낱 꿈으로, 사물은 헛되고 망령된 것으로, 언어는 거짓된 것으로, 고정된 것들은 허탄한 것으로,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걸림돌로 간주합니다. 부처도 아니고 선도 아니며 생각도 없고 걱정도 없으니, 이야말로 천지간의 별세계이자 별종의 학문인 셈입니다. 옛날의 지인이나 신인들의 도라 할 수 있죠. 그래서 자신을 위함도 없고 공적도 없는 학문입니다.
<반선시말(班禪始末)>12)
내가 열하에 있을 때 몽고 사람 경순미(敬旬彌)가 나를 위해 말하기를,
“서번(西番)은 옛날 삼위(三危:나라 이름) 땅으로 순(舜)이 삼묘(三苗)를 쫓아 보냈다는 곳이 바로 이 땅입니다. 이 나라는 셋13)으로 되어 있으니, 하나는 ‘위(衛)’라 하여 달라이라마(達賴喇嘛)가 사는데 옛날의 오사장이요, 하나는 ‘장(藏)’이라 하여 반선라마(班禪喇嘛)가 사는데 옛날의 이름도 역시 장이요, 하나는 ‘객목(喀木)’이라 하여 서쪽으로 더 나가 있는 땅으로서 이곳에는 대라마(大喇嘛)는 없고 옛날의 강국(康國)이 바로 이곳입니다.
이 땅들은 사천(四川) 마호(馬湖)의 서쪽에 있어 남으로는 운남(雲南)으로 통하고 동북으로는 감숙(甘肅)에 통하여 당의 현장법사(玄奘法師)가 삼장(三藏)으로 들어갔다는 곳이 바로 이 땅입니다."
<끝>
<미주>
1. 외국 정탐의 어려움에 대한 견해를 밝힌 탁견이지만, 우리의 주제와는 조금 거리가 있어서 통째로 생략하였다.
2. 중원의 왕조인 元, 明, 淸나라가 얼마나 티베트를 두려워하였나를 조목조목 열거한 부분은 연암의 역사관이 얼마나 예리했는가? 를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니까 청나라의 역대 황제들이 티베트의 활불을 스승으로 예우한 것은, 너무 멀고, 험하고, 크고, 거세서, 어찌 할 수 없는 ‘鷄肋’같은 나라를 “간접적으로 감시통치하기 위한, 天子國이라고 자처한 청나라의 고도의 전략적인 목적이다.” 라는 냉철한 지적인 것이다.
3. 3천년 만에 한번 핀다는 전설상의 상서로운 꽃이다.
4. 연암은 앞의 경전과 게송을 동일 시 하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만, 이는 엄연히 구분된다.
5. 티베트의 명나라 때의 호칭이다.
6. 여기서 대보법왕은 달라이라마이고 소보법왕은 빤첸라마를 말한다.
7. 원나라 때의 승려인데 송나라 때의 역대 황제의 능을 전부 도굴하였다는 사악한 요승으로 민간에 膾炙되는 인물이다.
8. 북경 시내에 있는 황교사원으로 역대 티베트의 활불들의 북경내의 거처로 사용되는 곳이다. 원래는 옹정제가 황위에 오르기 전 강희제로부터 하사받아 머물던 왕부(王府)로서 1723년 옹정제의 등극과 함께 옹화궁으로 불린다. 1744년 건륭제의 명으로 사원으로 개조되는데 이는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티베트불교를 신봉하는 티베트·몽골의 소수민족을 회유하기 위해서였다. 현판은 모두 한자와 만주어, 몽골어, 티베트어가 나란히 병기되어 있다. 특히 만복각은 건륭13∼15년(1748∼1750)에 세워진 것으로 사원 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세계최대의 목조불상으로 유명한 곳이다.
9. 이「열하일기」에서도 흔히 ‘라마’ 또는 ‘라마교’라는 표현이 눈에 자주 보이는데, 엄격하게 따진다면 ‘라마’는 활불 또는 린뽀체같은 최고의 고승에게만 붙일 수 호칭으로 아무 스님에게나 붙일 수 없는 표현이다. 또한 ‘라마교’라는 표현 또한 티베트불교로 바꿔 불러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라마는 있지만, 라마교는 잘못 쓰이고 있는 단어라는 말이다.
10. 연암의 불교에 대한 지식은 윤가진이라는 친불교적인 사람과의 필담을 거처가면서 뒤로 가면서는 상당한 경지에 들어가는데, ‘지혜와 금강의 보체’라는 밀교의 핵심적인 단어를 완전히 구사하는 것을 보면 이를 알만하다.
11. 이 구절 역시 연암의 달관한 생사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비록 어떤 보편타당한 진리가 아니더라도 완전히 부정하거나 긍정하는 것은 모두 迷惑에 불과하다라는, ‘서로 상반된 원리의 합일’로 불교, 특히 티베트밀교의 구경점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니 과연 대학자 연암이 아닐 수 없다.
12. 구미숙 역 열하일기에는 이 <반선시말>의 번역이 생략되었기 때문에, 다른 자료를 대본으로 간략히 부친다.
13. 티베트를 ‘위(前藏:라싸)’ 와 ‘짱(後藏:시가쩨)’ 그리고 ‘응아리(獅泉河)’의 3구역으로 나누는 전통적인 구별법을 사용하고 있으나 喀木을 청해성의 걸무(?)라고 본다면... 이는 잘못된 정보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