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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시인의 시의 뿌리를 찾아서
남송우(부경대 명예교수, 문학 평론가)
이해인 시인이 세상에 시인으로 알려지기는 1976년『민들레의 영토』(가톨릭출판사)가 출간되면서부터이다. 이후 지속적으로 얼굴을 내민 그의 시집은『내 혼에 불을 놓아』(분도출판사, 1979),『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분도출판사, 1983),『시간의 얼굴』(분도출판사, 1989),『엄마와 분꽃』(분도출판사, 1992),『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열림원, 1999).『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열림원, 1999),『작은 위로』(열림원, 2002),『작은 기쁨』(열림원, 2007),『엄마』(샘터, 2008),『희망은 깨어 있네』(마음산책, 2010),『작은 기도』(열림원, 2011).『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마음산책, 2014),『꽃잎 한 장처럼』(샘터, 2022), 『인생의 열 가지 생각』(마음산책, 2023) 등으로 적지 않은 시집을 세상에 선보였다.
50년 가까운 시력을 통해 단순히 시집을 많이 펴낸 시인으로 자리한 것이 아니라, 많은 대중 독자들을 확보하고 있는 현역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베스터 셀러가 된 시인들에 대한 평가는 평단에서는 좀은 소홀한 경향이 있다. 이해인 시인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대중에게 많이 읽히는 시는 평가가 필요 없기 때문인가? 시가 갈수록 일반 대중들로부터 멀어져 가는 시대에 아직도 대중들의 손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이해인 시인의 시들이 지닌 특성이 무엇인지, 그가 노래한 시들을 통해 그의 시의 뿌리와 시 정신을 살펴보고자 한다. 시인은 시쓰기를 시작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시인의 존재성에 대한 자기정체성을 확인한다. 시란 바로 시인의 자기 정체성으로부터 빚어지는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해인 시인도 스스로에게 「시인은」이란 질문을 통해 시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묻고 있다.
어디서나 문 열고/단 하나의 말을/찾아나선 이여//눈 내리는 빈 숲의 겨울나무처럼/봄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이여//마음 붙일 언어의 집이 없어/때로는 엉뚱한 곳에/둥지를 트는 새여//
즐거운 날에도/약간의 몸살기로/마음 앓는 이여//잠을 자면서도/다는 잠들지 않고/시의 팔을 베는//오늘도/고달픈 순례자여
「시인은」전문
이해인 시인은 「시인은」에서 시인의 존재성을 다양하게 풀어내고 있다. 우선 첫 연에서 시인을 <단 하나의 말을 찾아 나선> 이로 명명하고 있다. 이는 시인의 본질적 존재성을 드러내고 있는 언표이다. 시인이 어떤 대상이나 감정을 이미지화할 때, 그 대상이나 감정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말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 한 말을 찾아 긴 시간을 보내야 한다. 시인이란 존재성은 명명되지 않은 그 무엇에 대해 새롭고도 명확한 명명자의 역할을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인의 존재성을 시인 김춘수는 「꽃」을 통해 일찍 인식시켜주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노래했다. 시인의 존재성은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대상들에 대해 그 대상에 알맞은 이름을, 그것도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는 일에서 비롯된다. 시인의 새로운 명명에 의해 그 대상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이해인 시인이 단 하나의 말을 찾아 나서고 있는 이유이다. 대상을 드러내 줄 유일한 단 하나의 말을 찾는 자들이 시인인 것이다.
다음 연에서 시인이 <봄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자>로 시인을 노래하는 이유는 단 하나의 말을 찾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순간적인 영감으로 시가 씌어지는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 편의 시의 탄생은 오랜 시간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라 깨어 있는 자로서의 기다림을 강조하고 있다. 다음 연에서 나타나는 재미나는 발상은 <마음 붙일 언어의 집이 없어/때로는 엉뚱한 곳에/둥지를 트는 새>에 비유하고 있는 점이다. 유일한 단 하나의 말을 찾고 기다리지만 많은 경우 그 말은 한 번에 당장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말의 홍수 속에서 단 하나의 말을 찾아 헤매다 보면, 엉뚱한 말을 찾아 언어의 집인, 시의 집을 짓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를 엉뚱한 곳에 둥지를 트는 새집이 되기도 한다고 비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단 하나의 말을 찾아 오래 동안 기다려야 하는 시인의 삶은 <즐거운 날에도/약간의 몸살기로/마음 앓는 이>가 될 수밖에 없다. 마음 앓이는 시인의 의식을 <잠을 자면서도/다는 잠들지 않고/시의 팔을 베는> 상태로 나아가게 한다. 그래서 이해인 시인은 시인을 <오늘도/고달픈 순례자>로 규정하고 있다. 결국 이해인 시인이 자신을 규정하는 한 마디는 순례자이다. 단 하나의 말을 찾아 순례자의 삶을 사는 자가 시인이란 것이다. 이 순례자라는 한 마디에 다른 일반 시인들과는 변별되는 그만의 시인의 길이 있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순례자의 글쓰기는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라, 구도자(수도자)의 글쓰기임을 「살아 있는 날은」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마른 향내 나는/갈색 연필을 깎아/글을 쓰겠습니다//사각사각 소리나는/연하고 부드러운 연필 글씨를/몇 번이고 지우며/다시 쓰는 나의 하루//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깎이어도/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나는 당신의 살아 있는 연필/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말로/당신이 원하시는 글을 쓰겠습니다//정결한 몸짓으로 일어나는 향내처럼/당신을 위하여/소멸하겠습니다
「살아 있는 날은」 전문
<당신이 원하시는 글을 쓰겠습니다>라는 언표는 그의 시 쓰기가 단순히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선이 아님을 분명히 선언함이다. 수도자로서 하늘의 뜻을 좇아 사는 삶을 구가함이다. 글쓰기의 도구로 향내 나는 연필을 등장시켜 <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라고 삶의 자세를 드러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는 당신의 살아 있는 연필>이라는 인식을 통해 절대자의 전적인 손아래에 놓여있는 수도자의 자세를 내보이고 있다는 점이 순례자로서의 시인의 길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한다. 결국 한 자루의 연필이 예리한 칼끝에 다 깎여 사라지듯 자신도 소멸되길 원하는 시인의 글쓰기에 대한 근원적 사유는 남달라 보인다. 그러나 구도자의 시 쓰기란 그렇게 용이한 것이 아니다. 단순한 기도시가 구도자가 나아가야 할 시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 시 쓰기의 과정은 또 다른 구도의 길이 되고 있다.
시가 별건가요 뭐/느낀 대로 적되/말의 순서를 바꾸고/길이를 줄이고/상징 언어 몇 개 넣으면/시가 되는 거지……라고/말하는 이들에게/고개를 끄덕이다가도/정말 그럴까?/속으로 반문하네//다른 시인의 시가/맘에 들어 외우기도 하고/노트에 옮겨 적으며/흉내를 내보지만/흉내만으로는/도저히 될 수 없는 그 무엇이/나를 아득하게 하네//시를 쓰면서도/시를 잘 모르겠네/분명 아름답지만/갈수록 더/어려운 시 쓰기/그래서/더 많이/더 오래/시를 읽고 또 읽으며/시를 배워야겠다
「시 쓰기」전문
시를 쉽게 생각하고 있는 자들의 시에 대한 편견을 넘어 서서, 시 다운 시를 쓰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체득하고 있다. 시를 쓰면서도 시를 잘 모르겠다는 고백은 솔직하면서도 시 쓰기의 과정이 결코 단순하지 않음을 깨달은 결과이다. 그래서 시를 쓰면 쓸수록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 앞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체득한 시 공부의 길은 <더 많이/더 오래/시를 읽고 또 읽>는 것이다. 시를 통해 자신의 시의 길을 찾아나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렇게 다른 시인들의 시를 통해 자신의 시를 써나가는 시 쓰기의 공부는 무수한 시행착오의 길을 걷게 된다. 시인의 삶이란 어쩌면 평생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있을 단 한 편의 시를 위해서 수천 편의 습작을 남기는 형국인지도 모른다. 이런 시 쓰기 과정의 한 모습을 이해인 시인도「시가 익느라고」에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오 그랬구나//내가 여러 날/열이 나고/시름시름 아픈 건//내 안에서 소리 없이/시가 익어가느라고 그런 걸/미처 몰랐구나//뜸 들일 새 없이/밖으로 나올까/조바심하느라고/잠들지 못한 시간들//그래 알았어/익지 않은 것은/내놓지 않고 싶어//그러나 이왕 내놓은 걸/안 익었다고/사람들이 투정하면/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지?
「시가 익느라고」 전문
한 편의 시가 탄생하기까지는 오래 동안 또 많은 사유의 굴곡을 통과하기에 그렇게 쉬운 과정은 아니다. 그래서 한 편의 시가 탄생하기까지 시인이 겪는 내면의 고통은 자신만의 몫이다. 그러한 과정을 시인은 <내가 여러 날/열이 나고/시름시름 아픈 건//내 안에서 소리 없이/시가 익어가느라고 그런 걸/미처 몰랐구나>라고 노래하고 있다. 고통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는 시란 있을 수 없다. 문제는 그 고통이 빚은 완성도이다. 원석이 용광로에서 그 뜨거운 열을 견디고 정금이 되어 나오듯이 온전히 익은 결정체가 나와야 한다. 시인의 염려는 여기에 있다. 나의 고통의 시간에 걸맞는 온전한 한 편의 시가 탄생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까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이 시인의 마음을 조리게 한다. 시인은 누구나 자신이 쓴 시 작품들이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수용되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들은 고통의 터널을 통과해 나온 한 편의 시가 세상으로 나왔을 때, 그 시의 탄생에서 오는 희열과 행복도 경험하게 된다. 「내 안에 흐르는 시」에서 이해인 시인도 그런 경험을 노래하고 있다.
내 안에 흐르는/피와 물처럼/보이지 않게 감추어둔/생명의 말들//어느 날 시가 되어 쏟아지면/밖으로 쏟아진 만큼/나는 아프고/이로 인해 후유증이 심해도/나는 늘 행복하고/내 마음의 바다 위에/해초(海草)처럼 떠다니는/푸른 시상들/힘껏 건져올리고 나면/이미 퇴색하는 그 빛깔//끝내 햇볕을 보지 못하고/남아 있는 언어들이/하도 많아서//나는/가난하게 살아도/항상 넉넉하구나
「내 안에 흐르는 시」 전문
이해인 시인에게 시 쓰기가 힘들고 고통스런 이유 중의 하나는 <내 안에 흐르는/피와 물처럼/보이지 않게 감추어둔/생명의 말들>을 찾아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시인들이 찾아 나서는 시의 언어가 생명의 언어이지만, 이해인 시인의 경우는 좀은 그 차원이 다르다. 그의 삶은 구도자의 삶이고, 구도자가 찾아 나서는 생명의 말들은 영혼을 춤추게 하고 영혼을 깨우는 말들이어야 하기에 더 깊은 영혼의 생수가 되어야 한다. 그 깊은 샘에서 건져올리는 언어의 탐색은 쉼없는 기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기도는 순례자이며 수도자인 시인에게 있어서는 가장 힘든 영적인 싸움이다. 그래서 생명의 말들이 <어느 날 시가 되어 쏟아지면/밖으로 쏟아진 만큼/나는 아프고/이로 인해 후유증>에 시달린다. 그러나 수도자의 행복은 그 고통을 통해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건져올려야 할 생명의 언어들이 남아 있기에 마음은 항상 넉넉함을 노래하고 있다. 시인이 경험하는 이런 고통 이후의 순례자의 심정을「시를 쓰고 나서」에서도 엿보이고 있다.
밤새/뜬눈으로 시를/쏟아낸 다음 날 아침//나의 몸은/무겁고 힘이 든데/나의 마음은/눈부신 날개를 달고/어디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네//시는 나를 데리고/나는 시를 데리고/마침내는 하늘로 갈 것인가
「시를 쓰고 나서」 전문
고통의 시간을 통해 완성된 한 편의 시를 쏟아낸 다음 날 아침 시인은 몸은 무겁지만 마음은 눈부신 날개를 달고 어디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노래한다. 그런데 시와 내가 하나가 되어 지향하는 곳이 하늘이다. 순례자이면서도 구도자인 시인이 시와 함께 가고자 하는 궁극적인 지점을 가늠케 한다. 하늘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에게 시가 동반자 역할을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마침내 하늘까지 함께 갈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시인이「시에게」에서 시를 두고 그의 첫사랑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연유이다.
수십 년 동안/한 번도 나를/배반한 적 없는 너는/나의 눈물겨운 첫사랑이다//밤새/파도로 출렁이며/나를 잠 못 들게 해도/반가운 얼굴//어쩌다 터무니없는 오해로/내가 외면을 해도/성을 내지 않고/슬며시 옆에 와서 버티고 섰는/아름다운 섬//아무리 고단해도/지치지 않는 법을/내게 가르쳐주는/보물섬이다, 너는//네가 있음으로 하여/더욱 살고 싶은 세상에서/이젠 나도/더 이상 너를 배반하지 않겠다
「시에게」 전문
시인은 시가 자신에게는 첫사랑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 첫사랑은 <어쩌다 터무니없는 오해로/내가/외면을 해도/성을 내지 않고/슬며시 옆에 와서 버티고 섰는/아름다운 섬>으로 명명되었다가 <아무리 고단해도/지치지 않는 법을/내게 가르쳐주는/보물섬>으로 다시 격상되고 있다. 이렇게 시가 자신과 함께 있기에 시인은 <더욱 살고 싶은 세상>에 존재하게 되며, 더 이상 시를 배반하지 않겠다고「시에게」맹세하고 있다. 평생 시와 더불어 구도자의 삶을 살아온 시인의 시에 대한 헌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와 삶이 동거하면서 언제나 완전한 합일체를 이루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일반 시인들에게서 시와 삶의 일치를 보여주고 사는 시인들을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시는 시대로, 시인은 시인대로, 분리해서 바라보라는 시와 삶에 대한 이원화의 담론이 일상화되어 버렸다. 시 작품이 보여주는 진선미를 시인의 일상적 삶에서 찾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시와 삶을 하나로 일치시켜나가는 시인의 삶이란 참으로 구현하기 힘든 경지이기 때문이다. 삶을 노래한 시처럼 살아가고자 했던 별의 시인 윤동주도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쉽게 씌어진 시」)라고 고백했다. 노래한 시처럼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임을 반증함이다. 이해인 시인도 「삶과 시」를 통해 자신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시와 삶의 불일치를 아파하고 있다. 시와 평생 동반자로 살고 있는 수도자로서는 더욱 자신을 괴롭히는 가시가 될 수밖에 없다.
시를 쓸 때는/아까운 말들도/곧잘 버리면서//삶에선/작은 것도 버리지 못하는/나의 욕심이
부끄럽다//열매를 위해/꽃자리를 비우는/한그루 나무처럼//아파도 아름답게/마음을 넓히며
열매를 맺어야 하리//종이에 적지 않아도/나의 삶이 내 안에서/시로 익어가는 소리를 듣는/
맑은 날이 온다면//나는 비로소/살아 있는 시인이라고/감히 말할 수 있으리
「삶과 시」 전문
시인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바는 <종이에 적지 않아도/나의 삶이 내 안에서/시로 익어가는 소리를 듣는> 경지이다. 삶이 시가 되는 상태를 말한다. 이는 감히 평범한 시인들이 근접할 수 없는 삶의 높이다. 그러나 이해인 시인은 그런 지경에 이르기를 기도하고 있다. 이를 위해「작은 소망」에서 한 톨의 소금 같은 시를 갈구하고 있다.
내가 죽기 전/한 톨의 소금 같은 시를 써서/누군가의 마음을 하얗게 만들 수 있을까/한 톨의 시가 세상을/다 구원하진 못해도/사나운 눈길을 순하게 만드는/작은 기도는 될 수 있겠지/힘들 때 잠시 웃음을 찾는/작은 위로는 될 수 있겠지/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나는 행복하여/맛있는 소금 한 톨 찾는 중이네
「작은 소망」전문
자신의 쓴 시가 소금 한 톨이 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소금 한 톨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정말 미미한 것이다. 넓고 복잡하고 거대한 세상 속에서 소금 한 톨이 기능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 어떤 다른 대상으로 자신의 시를 은유하지 않고 소금으로 명명했다. 이유는 무엇인가? 소금은 자신이 녹아질 때 썩어질 것들을 온전하게 보전해주는 방부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늘 부패하기 마련이다. 그 부패함을 조금이라도 멈추게 하는 것이 소금이다. <누군가의 마음을 하얗게 만들 수 있을까> 라고 자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해인 시인은 자신의 시가 한 톨의 소금이라도 되어 부패하기 쉬운 인간의 마음을 지키는 방부제가 되길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 거대한 세상을 구원하지는 못할지라도 <사나운 눈길을 순하게 만드는/작은 기도는 될 수 있겠지>라고 자문한다. 그는 시를 통해 사회를 개혁하거나 바꾸어 보겠다는 거창한 의욕보다는 한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 그를 위로하는 매개가 되길 소원하고 있다. 시가 지닌 치유의 기능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이 「시 읽기」를 통해 경험한 내적 체험의 소산이기도 하다.
이 땅의 시인들이/오랜 시간/공들여 짜낸/시의 즙을/단숨에 마셔버리는 건/아무래도 미안하다//좋은 것일수록/아끼며 설레이며/조금씩 마시다 보면/나도 어느 날은/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은/포도주빛 황홀한 예감//시의 음료에/천천히 취해/잠이 들면/시는 내 안에서/어느새/피와 물이 되어/내 영혼을 적신다
「시 읽기」 전문
시를 공들여 짜낸 즙으로 명명한 시인은 그 즙을 한꺼번에 다 마시지 않고 조금씩 마신다고 노래한다. 그 이유는 공들여 짜낸 즙을 단숨에 마셔버리기에는 뭔가 마땅하지 않다는 생각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즙의 맛을 제대로 맛보기 위함이다. 시의 맛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갖고 오래오래 묵상하며 사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특히 공들여 씌어진 시일수록 그 깊이와 넓이를 온전히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서는 공들여 쓴 시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를 읽을 때 시는 내 안에서 <어느새/피와 물이 되어/내 영혼을 적>시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해인 시인이 한 톨의 소금 같은 시를 갈망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공들여 씌어진 다른 시인의 시를 읽을 때, 그 시들이 자신의 몸에 들어와 피와 물이 되어 영혼을 적시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추구하는 시의 세계는 인간의 영혼을 적시는 시 쓰기에 있다는 것을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 이해인 시인이 이 땅에 펼쳐놓은 수많은 시편들은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적셔 줄 수 있는 영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이 그 동안 많은 대중들의 손에서 이해인 시인의 시집이 오래 머문 이유이다. 그 힘은 단순히 시적 언어의 정갈함이나 순수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특별나다. 순례자임과 동시에 구도자로서의 그의 삶에서 우러나는 깊은 기도의 사유는 어둔 곳을 밝히는 촛불과 허물어져 가는 정신 가치를 곧추세우는 한 톨의 소금 같은 언어를 시를 통해 펼쳐놓았기 때문이다. 갈수록 시와 멀어져 가고 있는 이 시대, 영혼 없는 인간들이 갈 길을 잃어버린 이 시대, 정신을 내팽개쳐버린 이 시대에 영적 사유의 깊은 샘물에서 길어 올린 이해인 시인의 시편들이 지니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것이 이해인 시인의 시의 뿌리를 간략히 살펴본 근본적인 이유이다.
첫댓글 수녀님은 시가 하늘로 데려간다고 하시는데 저도 따라갑니다ㅎㅎ
천천히 꼼꼼히 정독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글 읽어보고 남송우교수님과도 연락을 다시 해봤네요
수녀님의 울이 이렇게 넓습니다^^
잘하셨네요
그 쪽 분야의 학자들께서
우리수녀님의 문학을
교우하면서 감사인사 전하면서 또 연락하게되고
참 흐뭇한 일입니다
시대의 큰 어른 그늘이
이렇게 큽니다
수녀님의 울에 망설임없이 응답하시는
풀꽃진주님 멋짐을 장착하셨네요 ㅎㅎ
늘 이곳에 오면
저는 조그마한 미물에 불가함을 느끼지만
덕분에 수녀님을 향한 마음이
깊어집니다 💜
이제야~~~천천히 정독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