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 청산석재
망주석은 망두석으로도 불리는데 영혼이 나와 쉬는 곳 이라고 한다. 또는 밖에 나갔던 영혼이 망주석을 보고 찾아오는 표식이라고도 한다. 무덤 앞에 놓은 혼유석(魂遊石)의 좌우에 벌려 세우는 한 쌍의 8각 돌기둥을 지칭한다. 무덤의 시설형식에 따라 묘주(墓主)의 사회 신분을 나타내는데, 무덤을 지키는 수호 신앙과 기념적인 기능을 가진 석조물이다.
그 외 저승과 이승의 경계를 지키며 무덤의 이정표 역할을 한다는 주장과 풍수의 지기(地氣)를 흩어지지 않게 하면서 음양의 조화를 이루게 한다는 설 등이다. 원래는 신분에 따른 규제가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단순한 장식물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 전국에 산재해 있는 묘나 묘역들을 보다 보면 비석(碑石)과 함께 망주석(望柱石)이 세워져 있다. 망주석(望柱石)은 달리 망두석(望頭石)·망주석표(望柱石表)·화표주(華表柱)라고도 불리우며, 망주(望柱)는 준말이다. 기둥의 윗부분이 보주형두(寶珠形頭)로 되어 돌받침 위에 올린다.주로 돌받침 위에 8각기둥을 세우고, 맨 위에 둥근 머리를 얹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때까지는 전죽석(錢竹石)이라고도 불렀으나,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망주석으로 통일시키고 있다. 근래에 일반인들은 ‘촛대석’이라고도 부른다.
1. 망주석의 기원
망주석은 고대 중국인들이 해의 그림자를 관측하던 규표(圭表)와 건축 시공의 위치를 표시하던 나무인 표목(表木)에서 유래하였다고 전한다. ‘항표(恒表)’ 또는 ‘방목(謗木)’이라고도 한다. 당대(唐代)에 궁전・성벽・교량・능묘를 장식하는 대표적인 석조 건축물로 자리 잡았다. 전체 조형의 기본 구조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宇宙觀)에 따라 아래는 네모나고 위는 둥근 형태이다. 중국인들이 망주석을 능묘의 맨 앞에 세우는 까닭은 장수(長壽)를 염원하고 군주의 덕정(德政)을 희망하는 전통 때문이다.
중국의 진서 (陳書) 예의(禮儀)에 "507년 양나라의 묘제(墓制)를 바로 잡았는데 석인(石人)·석수(石獸)·석비(石碑)의 건립을 금하고 석주(石柱)만을 세워 그 위에 이름·지위를 적는 것을 허락했다"라고 한 기록을 통해 망주석의 기원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망주석의 용도와 기능
무덤의 시설형식에 따라 묘주(墓主)의 사회 신분을 나타내는데, 무덤을 지키는 수호 신앙과 기념적인 기능을 가진 석조물이다. 중국의 《진서(陳書)》 <예의(禮儀)>에 적힌 “양(梁)의 천감(天監) 6년(507)에 묘제를 바로잡되, 석인(石人) ·석수(石獸) ·석비(石碑)의 건립을 금하고 석주(石柱)만 세워 그 위에 이름 ·지위를 적을 것을 허가하였다”라는 대목에서도 망주석의 용도를 알 수 있다.
그 기능은 본질적으로 이름에 나타나 있듯이, 멀리서 바라보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표지였을 것으로 보이나, 어느 시기부터 있었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그리고 화표(華表)는 중국에서는 환표 또는 교오주(交午柱)라고 불렸는데, 네 거리에 설치하는 것과 분묘 앞에 설치한 문을 아울러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에는 분묘가 있는 곳에 세웠던 표지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3. 우리나라 망주석의 시작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망주석은 현재까지 신라 시대의 왕릉 가운데에서도 삼국통일시기 이후의 것으로 보이는 괘릉(掛陵)과 흥덕왕릉(興德王陵)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에서 전해진 망주석은 통일 신라시대에 발전하기 시작하여 8세기경에 왕릉의 석물배치가 정비됨에 따라 묘제석물(墓制石物)로 자리를 굳혀졌으며, 한국에서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현존하는 왕릉과 상류층의 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벼슬아치의 무덤에서도 거의 예외 없이 발견되고 있다. 또한 민간인의 무덤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간혹 다람쥐 등을 조각하여 민속 생활의 일면을 보이기도 한다.
4. 조선 시대 망주석
조선시대 사대부 묘에는 경제적인 여유가 있으면 누구나 세울 수 있었고 특별한 규제도 없었다. 그래서 묘표(墓表)・상석(床石)과 함께 사대부 묘에 반드시 설치하는 석물의 하나로 인식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망주석의 수량이 매우 드물었으나 15세기 후반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크게 유행하였다. 그러나 1698년(숙종 24) 편찬된 『수교집록(受敎輯錄)』에 의하면, 서인(庶人) 묘의 망주석 높이는 2척을 넘길 수 없다는 제한이 있었다.
5. 망주석의 형태
오래된 망주석에는 도롱뇽이 디자인되어 있다. 도롱뇽은 양서류로 물과 육지에서 활동이 가능하다. 민간에서 영혼은 육지보다는 물을 좋아한다고 믿는다. 때문에 영혼이 무덤을 빠져나와 속세를 구경할 때 수륙을 넘나드는 도롱뇽을 타고 다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망주석은 사각이나 팔각형의 대석(臺石) 위에 팔각형의 주신(柱身)을 꽂고 상부에 염우(廉隅)와 운각(雲角)을 조각한 후 원수(圓首)를 올리는 기본 구조로 세워졌으며, 시기별로 규모와 장식 문양이 다양하게 변화・발전하였다. 운문(雲紋)과 당초문(唐草紋) 등으로 운각과 염우를 장식했을 뿐만 아니라 주신도 다양한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 16세기 후반까지 주신 한쪽 면의 볼록한 부분에 원공(圓孔)이 뚫린 망주석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원공은 둥근 철제 고리를 달던 부분이다. 성묘하며 햇빛을 가리는 차일을 칠 때 망주석을 지주로 삼고 끈을 둘러 철제 고리에 매듭을 지었던 것이다. 후대에는 이런 기능이 점차로 퇴색하여 끈을 묶었던 모습만 문양으로 새기거나 둥근 고리만 양각으로 표현하였다.
16세기 후반부터는 주신에 다람쥐, 청솔모, 호랑이 등의 동물 문양을 장식하였다. 특히 호랑이는 『춘관통고春官通考』(1788)를 비롯한 각종 의궤에서 작은 호랑이라는 의미의 ‘세호(細虎)’라고 표기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귀(耳)라고도 하였다. 세호는 사실적으로 조각하기도 했지만, 더욱 장식화하면서 호랑이 모습을 벗어난 서수(瑞獸)의 형태로 변화하였다. 좌우 망주석 중에서 한쪽에 위로 올라가는 세호를 조각하면, 다른 한쪽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을 조각하여 율동감을 주었다. 17세기 후반에는 일체의 문양을 배제하고 기본적인 구조의 외형만 갖춘 망주석이 등장하면서 주류를 이루었다. 망주석의 장식성보다는 기능성을 더 선호하던 시기의 문화 양상을 반영한 결과로 추정된다.
6. 망주석의 풍수지리적 이해
망주석은 음양의 조화와 풍수상의 사신사(四神砂)에 해당하는 장치물로서 수구막이의 역할을 합니다. 망주석을 세우는 위치에 대하여는 왕릉이나 사대부가의 곡장이 있는 무덤을 살펴보면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봉분 앞 상석과 곡장의 끝부분 사이에 터져있는 공간에 망주석을 세웁니다. 이른바 壙中(穴자리)에 맺힌 생기를 밖으로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는 막이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망주석의 구조와 세호를 자세히 살펴보면 기둥은 팔각형으로 주역의 사방팔방을 의미하며, 그 팔면 중 세호가 붙어 있는 한 면이 상석을 향해 있습니다. 소위 망주석과 상석을 연결하는 선을 그어 경계벽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한국문화대백과사전, 한국문화와 역사의식(유봉학, 신구문화사, 2005). 국조오례의,『상변통고(常變通攷)』(유장원), 『가례증해(家禮增解)』(이의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