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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여행1 - 긴카쿠지(은각사) 절을 나와 걸어서 철학의 길에서 만개한 벚꽃을 보다!
2019년 4월 8일 교토 시내에 히가시혼간지 (東本願寺) 와 쇼세이엔
步成園(보성원) 을 구경하고는 도지 (東寺 동사) 와 공원 을
거쳐 니시혼간지 (西本願寺) 를 본 후 니조성(二条城) 을 구경합니다.
히가시야마(東山) 에 쇼렌인 靑蓮院(청련원) 과 지온인 知恩院 절을
보고는 버스를 타고 긴카쿠지 銀閣寺(은각사) 절에 찾아 갑니다.
긴카쿠지 정원 은 흰 모래 로 만든 바다 긴샤단 (銀沙灘) 과 고게쓰다이 (向月台 향월대)
로 이루어져 있으니 소박한 긴카쿠 와 어우러져 정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 하며...
고게쓰다이 (向月台 향월대) 는 밤에 달빛을 감상 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일반 관광객은 밤 까지 이곳에 머무를 수 없어 그 풍취 를 느낄 수는 없습니다.
긴카쿠지 를 내려와 왼쪽에 수로를 따라 나 있는 길을 걷는데
오늘 10번째 방문지 인 철학의 길 哲學の道 이니.....
에이칸도에서 북쪽으로 긴카쿠지 (銀閣寺) 에 이르는 수로를 끼고 나무가
심어진 작은 길을 말하는데, 교토대학 교수인 니시 기타로 가
이 길을 걸으며 사색 하기를 즐겼으니....... 이런 이유로 저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네이버 에서 “철학의 길” 을 검색하니 당연하다는 듯..... “교토 철학의 길” 이 나와서
놀라는데... 원래는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철학자의 길 Philosophenweg 이니 헤겔,
야스퍼스, 하이데거 등 철학자들이 산책하며 명상에 잠기고 영감을 얻었다는 길이지요?
네카어강변 아름다운 길을 걸어 산책하다 보면 철학에는 문외한인 사람이라도 철학가
못지않은 사색에 잠긴다고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전철이 다니는 테오도르 호이스
다리 쪽에서 부터 시작해 카를 테오도르 다리가 있는 곳 까지 산 중턱길 이니....
남의 것이라도 좋으면 스스럼 없이 받아들여 배우는 일본인들의 자세는 놀랄만 합니다.
1653년 7월 네델란드인 하멜 은 상선을 타고 타이완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 로 가다 태풍 을
만나 선원중에 절반은 죽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36명 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漂着)
하였는데......... 제주 목사 이원진 은 "국경을 침범한 하멜 일행을 체포하여 감금" 합니다.
그 전인 1627년에 역시 나가사키로 가다가 식수가 떨어지니 물을 구하기 위해 동료 2명
과 함께 제주도에 상륙했다가 체포 되어 귀국을 불허하는 조선의 정책 에 따라...
병자호란 에 참전했다가 동료 2명은 죽고 혼자만 살아남은.... 네델란드인 박연
(얀 벨테브레이)이 서울에서 내려와서 하멜 일행을 서울로 압송 하니 정체가 파악됩니다.
이후 하멜 일행은 부모 처자가 있는 고향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그렇게 간청해도
조선 조정은 인도주의 정신 보다는 “나라의 지리등 비밀이 외국에 새나갈”
것을 염려해서는 귀국을 불허하고 군사 로 부려먹기 위해 훈련도감 에 배속
시키는데 그후 청나라 사신 이 서울에 오자 2명이 사신 앞에 나타나 간청 합니다.
조정은 선물(?)로 청나라 사신의 입 을 막은후 2명은 죽이고 나머지는 전라도에 내려보내
4곳에 분산 시켜 나무하고 풀베기등 잡역 을 시켰는데..... 흉년으로 생활은 궁핍해
부잣집에 가서 광대놀음을 해서 음식을 구걸 했으니, 하멜 은 고된 노역과 생활고에
지쳐 1666년 7명의 동료와 함께 배를 타고는 일본 히라도(平戶) 로 탈출 에 성공 합니다.
조선에서는 하멜 일행에게서 서양의 문명이나 기술 을 배울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은
저들이 “공맹의도(儒學 유학)” 를 전혀 모르는 서양 오랑캐 야만인 이라고
생각했으니... 저들에게서는 유익한 아무것도 배울게 없다고 여기고는 전라도
구석으로 보내 풀베고 나무하는 잡역 일만 시키는등 노비 로 부려 먹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은 1543년에 가고시마 남쪽 다네가시마에 표류한 포르투갈인 들을
절로 인도해 숙식을 제공 하며 배를 수리해 주고 부상자를 치료해 귀국 을
돕는데..... 그전에 거금을 주고 조총 2자루 를 구입하니 기술 책임을 맡은
대장장이 는 총신의 비밀 을 풀기 위해 16세 난 딸 까지 서양인 에게 바쳤습니다.
일본은 난파된 배를 수리해 포루투갈 선원들을 고국으로 귀국 시켰으며 사위(?) 가 된
포르투갈인으로 부터 조총 제작법 을 알아내 서양 무기로 무장 했으며, 포르투갈과
스페인 및 네델란드인들을 받아들여 천주교를 수용 하고 임진왜란 을 일으켰는데...
쇄국정책 으로 문을 닫기도 했지만 데지마를 열어 서구문명을 받아들여 강국 이 되었지요?
하멜의 귀향 을 생각하다 보니 문득 이광표씨가 쓴 “교토 고려 미술관과 재일동포의 망향가” 가
떠오르니..... “1955년 교토 산조의 골동거리를 걷던 재일동포 정조문 은 조선시대 백자
달항아리 에 넋을 잃었으니 보면 볼수록 떠나온 고향 이 떠올라 가격을 물으니 200만엔으로
집 두채 값 이었다는데 1년 할부로 손에 넣습니다.” “그는 일본에 건너와 부두 노동자로
막일 하다가 성인이 되어 사업을 시작했고 조금씩 돈을 모으자 고향은 더욱 그리워졌으니....
백자 달항아리와 만남후 일본에 유출된 문화재를 모으기 시작하니 도자기 회화 불상 금속공예품 목공예품
민속품에..... 고려 석탑이 고베 논바닥에 뒹구는 것을 보고는 논을 통째로 사들입니다.”
“ 우리 문화재 1700여점 을 모아 1988년 교토 북쪽 시치쿠(紫竹) 한적한 주택가 에 고려미술관 을
세웠으니 다른 재일동포들과 공유하고 싶어서 였다” 라는데.... “외할아버지는 늘 청자와 백자를
쓰다듬으셨습니다. 고향을 그리워한 것 이었지요. 일본에 끌려온 조선 도공 들의 얘기도 많이 하셨어요.”
일본인은 진취적 이어서 임진왜란 훨씬 이전 부터 배를 타고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말레이
및 인도네시아 에 진출해 저팬타운 을 건설하고 무역 을 했었는데... 19세기 말에 들어서도
하와이나 미국 본토는 물론이고 브라질과 페루등에 수많은 일본인들이 이민 을 떠났습니다.
조선은 500년간 단 한척의 무역선도 띄우지 못했으며 단 한 사람의 상인도 해외로 무역을 다녀온
사람이 없으니 "신체발부는수지부모" 라! 죽거나 다쳐 부모님 걱정시키는걸 불효로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그런데 도쿠가와씨의 에도 막부는 아메리카, 아프리카 및 아시아 국가들이 예수교 를
앞세운 서양 국가들에 침략을 당해 망하고 식민지 가 되었다는 사실에 두려움 을
느껴서는..... 일본에 있던 선교사와 예수교인들 중에 배교 하지 않는자들은 모두
죽이고 쇄국정책 에 들어가니 동남아 저팬타운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귀국조차 불허
했지만 네델란드인 에게 나가사키 데지마를 개항해 중국과 유럽 상품 은 계속 수입합니다.
벚꽃이 핀 수로 를 보노라니 문득 이 도시 교토에서 태어난 무라카미 하루키 를
떠올리는데..... 그는 1983년 잡지 ‘앙앙’ 7, 8월 특별호의 '남자와
교토에' 편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으니.... "지금 교토에 간다면
바로 산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게 낫다. 맛있는 음식 이나 먹으면서."
이 글귀는 무라카미 하루키 의 팬들에게는 힌트 가 되었으니 일본에서 2009년 8월까지
1천만부가 판매된 “상실의 시대 (노르웨이의 숲)”에서 나오코 가 입원해 요양을
하고 있는 정신 치료 시설 (阿美寮) 이 교토 근교의 산 속에 있는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장소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추리 를 만들어 내니...
그리하여 소설 속에 나오는 여정을 찾아간 일본의 어느 독자는 교토 북쪽의 산속
에 있는 들풀 요리점 미야마소 (美山荘) 가 바로 그 모델이 되는 장소라고 주장합니다.
1985년 ‘인 포켓’ 10월호에 실린 '무라카미 하루키 vs. 무라카미 류' 에서 하루키가
이 요리를 좋아한다고 말해 그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는데, 미야마소 는 인기 요리
만화 ‘맛의 달인’ 에 등장하는 명소라지만 철학의 길 도 배제할 필요는 없을 테지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좀 걷다 보니... 여기 철학의 길도 교토의 동쪽 이거니와 교토시
동쪽 에 ‘百濟寺(백제사)’ 란 사찰이 있으니 일본인들은 ‘햐쿠사이지’라고
발음하지만‘백제’라는 행정 지명을 간직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라고 합니다.
곧 비와호의‘히가시오우미시 햐쿠사이지초 (東近江市 百濟寺町) ’이니 비와코 호수
스즈카산(鈴鹿山) 등성이에 있는 유서 깊은 사찰‘샤카산 햐쿠사이지 (百濟寺)’
에서 비롯되었으니 일본에서는 ‘百濟寺(백제사)’를‘구다라데라’ 라고 하는데
이 사찰만은 ‘百濟寺’ 의 한자어를 소리 나는 대로 읽어 ‘햐쿠사이지’ 로 부릅니다.
“구다라는 대국” 이르는 뜻이니 1910년 일제의 조선 침략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 각지에
‘구다라고우리(百濟郡)’, ‘구다라손(百濟村)’, ‘구다라강(百濟川)’ 나아가
‘구다라대교(百濟大橋)’,‘구다라평야(百濟平野)’같은 행정 지명이 널리 쓰였습니다.
1098년에 제작된 일본 고대 지도‘팔랑화도(八浪華圖)’는 오사카 난바(難波) 를
‘구다라스 (百濟洲 백제주)’ 라고 표기했는데... ‘구다라스’,‘난바지
(難波寺)’, ‘구다라리 (久太郞里·‘백제리’의 이두식 한자 표기)’
등은 2007년 현재 까지도 오사카 시내의 지명 으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구다라고우리(百濟郡)’ 지역은 지금의 오사카 중심 시가지인 히가시나리구(東成區)
이며 1937년에 편찬된 일본고어 대사전’은‘구다라고우리(くだら こうり)’
의 ‘고우리’가..... “한국어의 고을에서 파생된 말이다”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오사카 중심지 일대는‘기타구다라손(北百濟村)’‘미나미구다라손(南百濟村)’
으로 분류 되었다는데.... 그러나 일제가 조선을 강제 점령한 후,
백제(百濟) 와 관계된 대부분의 일본 지명들이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고는 철학의길 을 뒤로 하고 아래쪽으로 걸어 대로로 접어들어 길가에 버스 정류소를
살피는데, 노선이 하나 뿐인데다가 배차 간격이 너무 길어 망설이노라니 길을 가던
왠 아주머니가 한블록 더 내려가서 타라는데...... 말씨로 보아 조선족 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도로는 일방 통행 이라 저 버스를 탄다고 해도 긴카쿠지 3거리에 가서 되돌아
오지 싶은지라.... 아주머니에게 고맙다는 인사말을 하고 내려와 큰 도로 금림차고전
이라는 정류소에서 5번 버스 를 타고는 산조 거리와 시조를 지나 고조 에 이르러 내립니다.
고조 거리를 둘러보다 어제 지하철 고조역에서 내렸을때 본 체인 이자카야 漁民 (어민) 이
생각나 찾아가니 주문을 직원이 직접 받는게 아니라 태블릿 PC 를 주며 PC 를 이용
하라기에 태블릿 PC로 주문해 닭꼬지와 군만두 에 생맥주 나마비루를 시켜 저녁을 떼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저녁을 따로 먹지 않고 오늘 처럼 이자까야에서 맥주 한잔 을 하며
안주로 저녁을 떼우는 것인데.... 술을 한잔 들다 보니 문득 성균관대 이준식 교수가
D일보‘이준식의 한시 한수’칼럼에 쓴 “백거이의 中隱(중은)” 이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능숙하니 서투니, 잘났니 못났니 서로 시시비비하지만 / 흠뻑 취해 세상만사 다 잊은들
어떠리 그대 아실 테지, 천지는 공교롭게도 넓고 또 좁아서 / 보라매든 봉황이든
제 흥대로 떠난다는 걸. (巧拙賢愚相是非, 何如一醉盡忘機. 君知天地中寬窄,
雕岳鸞皇各自飛.) ―‘술을 마주하고 (대주·對酒)’(백거이·白居易·772∼846)》
“유능한 인재 가 산림에 은거하면 소은(小隱), 혼잡한 시정 속에서 담담하게 살아가면
중은(中隱), 관직에 있되 세파에 휘둘리지 않고 여유로운 삶 을 누리는 것,
그걸 대은(大隱) 이라 했다. ” “도가 에서 말하는 진정한 은자의 모습은
대은의 삶 이었다. 백거이 는 관직에 있으면서도 ‘속세로 나온 듯 초야에
묻힌 듯, 바쁜 듯 한가한 듯 살겠노라’ 천명하면서 그것을 중은 이라 명명했다.”
“대은이란게 원래 도가 사상 의 산물이니, ‘중용되면 벼슬을 하되 그렇지
않으면 자기 수양에 힘쓴다’ 는 유가적 관료 입장에서는 차마
대놓고 대은을 표방하지는 못했으리라. 이 시는 쉰여섯쯤, 백거이 가
관직에 있을 때 지은 것인데...... 그 후에도 근 20년을 더 관직 에 머물렀다.”
“길조든 흉조든 세상이 넓든 좁든 제 방식대로 살아가는 법. 시인은 얕은 능력과 지혜
를 다투는 것이 제대로 된 삶인지를 자문자답 처럼 되뇌고 있다. 세상살이란
어쩌면 알량한 재주를 겨루며 아등바등 밑도 끝도 없는 싸움터를 헤매는
일 이 아닐까.” “ 그렇게 허방지방 나대면서 분주히 세월을 흘려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 억지로 수식을 욱여넣거나 관념적 시어를 동원하지 않고......."
"달관의 철리(哲理) 를 시구에 담아내는 재주, 이게 백거이 시의 미덕 이다.
이 시는 전체 5수로 된 연작시 가운데 제1수, 제2수에서도 시인은 “달팽이
뿔 같은 공간에서 무얼 다투랴. 부싯돌 번쩍하듯 순간에 맡겨진 이 몸,
부유한 대로 가난한 대로 즐기면 그만, 허허 웃어넘기지 못하면
이자가 바보”라 했으니, 부박 (浮薄) 한 우리네 삶 을 문득 되짚어 보게 한다.“
그러고는 고조 카라스마도오리 (五条 烏丸通) 에 있는 호텔에 돌아와서 샤워를 한
후에 텔레비젼을 트니 음악 프로그램 인데... 노래를 부르는 중간에 선전이
나오니 평성연가 CD 로 6개 CD 에 모두 96곡이 담겨있다는데... 며칠후 5월 1일
일왕이 퇴위 하니 이제 헤이세이 시대도 가는지라 그 추억을 CD 로 담았는가 봅니다?
엔카 노래 를 듣다 보니 문득 D 일보 김범석 특파원이 쓴 “日록밴드 ‘X저팬’ 리더
요시키, 산불 성금 1억원” 이라는 기사가 떠오르는데 “작지만 주민들에게 힘
되고 싶다”, “일본 SNS 에서도 ‘멋지다’ 칭찬 이어져” 라는 부제를 달았습니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일본 록 밴드 ‘X 저팬’의 리더 요시키 (54) 가 4일
강원 고성군과 속초시 등에서 발생한 산불 피해 구호금으로 1억원 을
기부했다. 요시키가 기부금을 전달한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측은
10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이틀 전 재단 측에 1억 원을 입금했다”며....
“요시키 는 평소 친분이 있는 배우 이병헌 씨가 1억 원을 기부한 것에
공감해 ‘작지만 재해를 입은 지역 주민들에게
힘이 되고 싶다’는 메시지와 함께 기부금 을 보내 왔다고 말했다."
“요시키 는 1980년대 일본 5인조 비주얼 록 밴드 ‘X저팬’ 을 결성해
1989년 정식 데뷔했다. ‘엔드리스 레인’ ‘티어스’ 등 록 발라드 곡을 히트시켰다."
" 요시키는 무려 1,000만 장 이상의 음반을 판매 할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NHK 교도통신 등 일본 언론들도 그의 기부 소식을 잇달아 보도했으니
일본 내 소셜 네트워크서비스(SNS) 에서도 “좋은 결정이다” “멋지다” 등
최근 악화되고 있는 한일 관계 속에서 모처럼 훈훈한 반응 이 이어졌다고
하는데, 내일은 교토에서 기차를 타고 남쪽에 우지와 후시미 를 다녀올 생각입니다.
첫댓글 선생님 어제부터 일본 쿄토여행기 들어가셧군요.제가 하루 늦엇습니다.
금각사(긴자쿠지)정원은 흰 모래바다 (긴샤단)과 향월대(고게쓰다이)가 어울어진 정적인 아름다움이 있군요.
금각사 아래로 철학의 길이 있군요.저도 여기까지보고는 서유럽여행갔을때 하이델베르그에서 테오도르다리 건너편이
철학자의 길이라고 가이드한테서 들엇던 기억이 났습니다.산책하면서 사색하기에 좋은길이군요.
우리나라도 네덜란드인 하멜이 표류해왓을때 극진히 대우해주면서 앞선 서양문물 좀 배웟으면
좋으련만 너무 안타깝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서양인들에게 자식도 내어주면서 극진히 환대하는데 너무 비교가 되어서 속상합니다.
날씨가 흐려 벚꽃 사진이 선명하지 않은게 유감입니다.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 주자학을 전한 조선 선비이자 관리
강항의 글 간양록에 보면 일본인들이 호기심이 많다고 했습니다.
적이든 외국인이든 가리지 않고 배우고자 하는 욕구가 대단하더군요?
괜찬습니다.벛꽃사진 잘 보앗습니다.역시 벚꽃의 고향답데 벚꽃이 보기 좋습니다.
일본사람들은 호기심이 많은 민족이군요.
일본인들은 임진왜란 이전에 무역선을 타고
중국 영파와 베트남 호이안, 태국 아유타야, 말레이지아
말래카와 캄보디아와 필리핀이며 인도네시아로
진출해 저팬타운을 건설하고 무역했습니다.
임진왜란 이전에 소년들을 머나먼 로마까지 보내 교황을 알현했고
1620년경에는 범선을 만들어 태평양을 건너고 맥시코를 횡단해
다시 대서양을 건너 스페인왕을 알현했고
다시 지중해를 건너 로마교황을 알현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