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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7월 28일 주일
[(녹)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2021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으로 고독과 죽음의 고통을 겪는 노인들을 위로하고, 신앙의 전수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에서 노인의 역할과 중요성을 되새기며 그들의 소명을 격려하고자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제정하였다. 한국 교회는 보편 교회와 함께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7월 26일)과 가까운 7월 넷째 주일을 ‘조부모와 노인의 날’로 지낸다(주교회의 2021년 추계 정기 총회).
오늘은 연중 제17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파스카 축제일인 이 주일에 우리를 부르시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을 먹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세상의 빵을 먹으며, 육신과 영혼의 온갖 배고픔을 채우고 이웃과 나눌 수 있는 마음을 가집시다.
말씀의 초대
엘리사 예언자는 맏물로 만든 보리 빵 스무 개로 백 명이나 되는 사람을 먹인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라며,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시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다(복음).
제1독서
<먹고도 남을 것이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4,42-44
그 무렵 42 어떤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 왔다.
그는 맏물로 만든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을 자루에 담아,
하느님의 사람에게 가져왔다.
엘리사는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하고 일렀다.
43 그러나 그의 시종은
“이것을 어떻게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엘리사가 다시 말하였다.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44 그리하여 그것을 사람들에게 내놓으니,
과연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이 먹고도 남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4,1-6
형제 여러분, 1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3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4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5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6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15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이가 가진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장정만도 오천 명’쯤 되는 인원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도 비슷한 상황이 나옵니다. 바알 살리사에서 온 사람이 가져온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 자루를 바라보며 엘리사의 시종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독서와 복음에서 우리의 판단과 생각을 뛰어넘는 일이 일어납니다. 모두 배부르게 먹고도 남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며, 이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가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 소용이 없어 보이는 음식으로 빵의 기적을 이루셨고, 아무 소용이 없어 보이는 십자가 죽음으로 부활의 신비를 드러내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믿음’과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믿음과 마음을 가지게 될 때, 우리 영혼에 생명을 나누는 빵의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십니다. 성체를 모실 때마다 미사 때 선포된 하느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아무 소용이 없어 보이는 우리의 삶을 예수님께 봉헌하고, 그분께 감사드립시다. 더불어 가족과 이웃에게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의 생명을 나누어 주는 “생명의 빵”이 되는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아멘.(김재덕 베드로 신부)
살려면 반응하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 많은 숫자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양인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식으로든, 특별히 감사로 아버지께 당신의 존재를 어필하셨습니다. 이것이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입니다.
감사는 진화론과 창조론을 가르는 시발점입니다. 진화론자들은 인간이 스스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감사할 수 없습니다. 이미 저절로 가지게 된 것을 잃어가기 때문에 짜증만 나고 불안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창조론을 믿는 우리는 다 잃어도 모든 것을 받은 것이기에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게 됩니다.
제가 몸에서 촌충이 나온 것을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평택 장에 어머니와 함께 갔는데 약을 파는 아저씨가 저를 부르더니 약을 하나 먹고 자리에 앉아 있으라 했습니다. 어느 정도 있으니 엉덩이가 간지러웠습니다. 다시 나오라고 해서 팬티를 내려보라고 했는데 이내 길고 흰 촌충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아저씨는 그것을 발로 밟았는데 그 안에 새끼들이 수없이 꿈틀대고 있었습니다.
‘내 몸에 저렇게 많은 벌레가 살며 피를 빨아 먹고 있었는데도 왜 난 저들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까?’
본래 혼자 살아남으려 하는 자는 더 큰 존재에게 발각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본인이 잡아먹힙니다. 진화론은 이와 같습니다. 반응을 하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진화론의 세상을 지배하는 신은 파괴의 신입니다.
영화 ‘더 사일런스’(2019)에 외계 종족들이 쳐들어왔는데 그것들은 눈은 없지만, 청각이 발달하여 있습니다. 소리를 내면 바로 죽임을 당합니다.
본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형수들을 많이 본 박효진 장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던 사형수들은 결국엔 똑같이 두려움에 떨거나 오줌을 지렸다고 합니다. 누구도 자신할 수 없고 우리는 스스로 존재한다고 믿는 생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SBS 꼬꼬무 37화에서 ‘임신 거부증’에 걸린 한 엄마가 신생아 둘을 냉동실에 넣어 죽인 사건이 나왔습니다. 신기한 것은 이 엄마는 임신을 거부하였고 태아들도 그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태아는 엄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몸을 길쭉하게 늘여 배가 많이 나오지 않게 했습니다. 그리고 미동도 없이 마치 기생충처럼 어머니 뱃속에 머물다 나왔습니다. 엄마는 그렇게 두 영아를 살해하였습니다.
사실 한 몸에 기생충도 있을 수 있고 태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둘이 다른 것은 하나는 엄마가 주는 모든 것에 반응한다는 것이고 하나는 어떤 것에도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이와 같습니다. 스스로 존재하고 살아남아야 하는 이는 하늘에 반응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하늘을 원망할 수도 없습니다. 그가 믿는 하늘은 더 사일런스에 나오는 외계인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태아는 엄마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자신도 미소 짓고 엄마가 기분이 좋으면 자기도 몸을 움직입니다.
그러나 진짜 소멸의 세상에서 생성의 세상으로 넘어오는 반응은 ‘감사’입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의 선악과처럼 감사의 반응을 실현할 도구는 십일조입니다. 이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나는 나 스스로 존재하는 자, 그러나 소멸의 법칙에 속한 자가 됩니다. 이 버튼은 그냥 반응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기가 처음에 엄마, 아빠라고 했을 때 부모는 그동안 한 모든 고생을 잊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다 받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녀 베르나데트는 140년이 지났는데도 몸이 전혀 썩지 않고 죽을 때의 모습 그대로 아름답게 남아있고 지금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성모님께 순종하여 그러한 생명을 지금도 얻고 있습니다. 감사가 없으면 순종도 없습니다. 이런 현대의 5천 명을 먹이는 기적이 주님께 반응하는 이에게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살려면 반응하십시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믿음과 미신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믿음은 성당이나, 사찰에 다니는 것이고, 미신은 점을 치거나, 굿을 하는 것일까요? 믿음은 하느님 때문에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내가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미신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모욕을 받아들이고, 하느님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고, 하느님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하느님 때문에 변했기 때문입니다. 미신은 나의 욕심 때문에 하느님을 변화 시키려고 합니다. 마치 하느님을 자판기처럼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판기에 돈을 넣고, 원하는 메뉴를 선택합니다. 커피, 콜라, 물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자판기가 돈을 먹고, 아무것도 내어 놓지 않으면 우리는 짜증을 냅니다. 자판기를 흔들기도 하고, 자판기를 발로 차기도 합니다. 하느님께 기도했는데, 하느님을 위해서 봉사했는데 힘든 일이 생기면, 뜻하지 않는 불행이 다가오면 우리는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하느님께서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끄는 것은 물질의 축복이 아닙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끄는 것은 무병장수가 아닙니다. 하느님 때문에 내가 변하고, 하느님 때문에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갈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표징이 생깁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 걸까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믿는 걸까요? 그분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것, 그분이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신 것, 그분이 중풍병자를 걷게 하신 것, 그분이 풍랑을 잠재우고, 물위를 걸으신 것을 믿는 걸까요? 그것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의 대상이 보여주신 표징입니다. 정말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마태오 복음 16장 16절의 말씀입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면, 천국의 열쇠를 받았던 베드로도 믿음이 아닌 미신에 빠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참된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빵을 많게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가난한 이를 우선적으로 돕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믿음은 아닙니다. 사회복지와 믿음은 그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가난한 이를 돕는 것은 믿음의 열매이지, 믿음의 대상은 아닙니다. 사회복지는 공동선의 실현이지 믿음의 대상은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핵심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맞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가 고백한 ‘사도신경’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서 우리 믿음의 대상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표징은 없습니다. 오늘 사도신경을 같이 외워 보겠습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 부활하시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계심을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사함과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생명을 믿나이다. 아멘” 나의 믿음이 ‘무엇 때문에’라는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나의 믿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의탁하고,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입니다.
기적이 먼저가 아닙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먼저입니다. 표징이 먼저가 아닙니다.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 점을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모두 주님 안에 하나라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는 넘치도록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눈길>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은
보셨답니다
당신을 찾아온
기댈 곳 없는
가엾은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당신의 고운 눈길을
타고 건너와
당신의 마음에 닿을 수 있게
그분은
보셨답니다
당신을 찾아온
보잘것없지만 귀한
벗들이 보고 있는
지치고 주린 벗들
차마 물릴 수 없는
따스하고 넉넉한 품을
늘 그렇게
곱게 간직하고 있는
당신 스스로를
그들은
보았답니다
고단한 삶의 여정에
빛바랜 꿈마저 사라진
퀭한 눈길로
무언가 있으려나
실낱같은 바램
애써 그러모아
다만 그분만을
뚫어지게
그들은
보지 않았답니다
그분의 고운 눈길이
머무는 그 곳에 있던
스스로를
그분의 따스한 마음이
품는 그 곳에 있던
스스로를
그분의 애틋한 부르심이
울리는 그 곳에 있던
스스로를
한 아이가
보았답니다
여느 사람들처럼
저 멀리 그러나 바로 곁에서
나를 보고 계시는
그분을
여느 사람들과 달리
그분이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스스로를
그분이 바라보시니 그분처럼
그분을 바라보니 그분처럼
어느덧 새로 피어난
스스로를
그분은
보셨답니다
한 아이가
그분처럼
보았답니다
오늘의 성인
성 베드로 포베다 카스트로베르데(Peter Poveda Castroverde)
신분 : 순교자, 설립자, 신부
활동연도 : 1874-1936년
같은이름 : 까스뜨로베르데, 베드루스, 뽀베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성 베드로 포베다 카스트로베르데(Petrus Poveda Castroverde)는 1874년 12월 3일 에스파냐 남부 리나레스(Linares)의 독실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사제직에 대한 성소를 느낀 그는 1889년 하엔(Jaen)에 있는 교구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학비를 감당하지 못해 장학금을 제공하기로 약속한 그라나다(Granada) 주(洲)의 과딕스 교구 신학교로 소속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1897년 4월 17일에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후 성 베드로 포베다 신부는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다른 여러 방면에서 교구의 직무를 맡아 봉사하였다. 그는 1900년 세비야(Sevilla)에서 신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과딕스 외곽 언덕에 있는 대피소에서 살던 일명 ‘동굴 거주자’들 속에서 사도직을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건립하고 어른들을 위한 연수회를 열어 전문적인 훈련과 예비신자 과정을 제공하였다. 하지만 그는 오해를 받아
이 특별한 사도직에서 떠나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북부 에스파냐의 산간벽지에 있는 코바동가(Covadonga)로 향했고, 그곳에서 1906년 아스투리아스
(Asturias)에 있는 코바동가 대성당의 참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코바동가에서 그는 더 많은 시간을 기도에 쏟아 부었고, 에스파냐의 교육 문제에 대해 특별히 심사숙고했다.
그는 주님께서 그 시대의 교회와 사회에 새로운 길을 열도록 자신을 초대하셨다고 이해했다. 그는 전문적으로 교사들을 양성하는 일에 대한 논문과 소책자를 출판하기 시작했고,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현존과 활동의 필요성을 느끼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도 접촉했다.
신앙과 과학의 대립은 그 시대의 문화 안에서 더욱더 분명해졌고, 이는 공교육 제도 안에서 탈(脫)그리스도화를 야기했다. 성 베드로 포베다 신부는 과딕스에서의 사목적 체험과 코바동가에서의 몇 년에 걸친 반성과 기도 후에 공교육 제도 하에 근무하는 교사들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양성해야 할 필요성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굳건한 신앙과 전문적인 자격 둘 모두 복음의 메시지를 살아있게 하는데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했다.
1911년 그는 학생들을 위한 거주시설인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아카데미를 개설했는데, 이는 교사들을 영성적 · 사목적으로 양성하기 위해 헌신하는 테레지안 연합회(Teresian Association)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에 그는 교구 사제들의 사도직 연합회와 함께 새로운 교수법 센터를 시작하였다. 그 후 그의 작업은 신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던 하엔으로 이어져 ‘창조적 교리교수법 센터’(Los Operarios Catechetical Center)의 영성 지도자와 사범대학의 교수로 활동했다. 1914년 그는 마드리드(Madrid)에서 기숙사 시설을 갖춘 에스파냐 최초의 여자 대학교를 개교하였다.
그 동안에 테레지안 연합회는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해 다양한 집단과 지역으로 전파되었고, 그를 통해 하엔에서 교회와 시민사회의 인정을 이끌어냈다. 성 베드로 포베다는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평신도들을 위해 그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복음화의 새로운 길로써 테레지안 연합회를 제시했고, 자신의 체험에 근거해서 그들이 복음의 증거자가 되도록 양성해갔다“굳건히 믿는 것과 침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처럼 그는 모든 이들이 신앙을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투신하기를 원했고, 스스로도 그러한 소망을 실현하며 살았다.
1921년 그는 마드리드로 이동해 왕실 담당사제로 임명되었다. 다음해에 그는 문맹 퇴치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테레지안 연합회를 위해 많은 시간을 헌신해 1924년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다. 그는 비록 직접 지도하지는 않았지만 설립자로서 테레지안 연합회가 후에 칠레와 이탈리아로 전파되었을 때 테레지안 연합회의 사명을 더욱 공고히 하고 촉진하기 위해 힘썼다.
1936년 발발한 에스파냐의 내전으로 인해 종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고, 마드리드에 있던 성 베드로 포베다 신부 역시 순교의 위험에 놓였을 때 그는 기꺼이 순교할 것을 다짐했다. 1936년 7월 28일 새벽, 박해자들이 그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물었을 때 그는 당당히 대답했다. “나는 그리스도의 사제이다.” 그는 결국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자로서 총에 맞아 순교하였다. 그는 1993년 10월 10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3년 5월 4일 에스파냐 마드리드의 콜론(Colon) 광장에서 100만여 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다른 네 명의 복자들과 함께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식을 갖고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성 삼손(Samson)
신분 : 수도원장, 주교
활동지역 : 돌(Dol)
활동연도 : 485-565년
같은이름
웨일스(Wales)의 글래모간 출신인 성 삼손은 아기 때에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으로 글래모간 란위트에 있던 성 일투드 수도원에 맡겨졌다.
그 후 그는 사제로 서품되고, 웨일스 지방 펨브룩셔(Pembrokeshire) 연안의 캘디 섬에서 한동안 은수자 생활도 하였다.
이때 그는 피로(Piro)라는 분의 지도를 받았는데, 그의 부친 아르논과 삼촌 엄브라펠까지 함께 생활하였다고 한다.
원장이던 피로가 서거한 후 삼손이 원장으로 승계하였으나, 아일랜드를 둘러본 후에는 즉시 사임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다시 성 두브리키우스(Dubricius) 수도원의 원장으로 선출되었고, 또 그 지방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잉글랜드(England) 남서부 콘월(Cornwall) 지방을 다니는 순회 선교사로서 활동하면서 사우스힐과 골란트 지방의 여러 교회와 수도원을 세웠으며, 쉴리 섬 역시 방문한 듯 보인다.
그의 선교활동은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Bretagne) 지방까지 계속되었는데, 그는 돌이란 곳에 수도원들을 세웠고, 노르망디(Normandie)의 펜탈 지방에도 수도원을 세웠다.
마침내 그는 칠드베르트 왕에 의하여 돌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성 나자리오 (Nazarius)
활동년도 : +68년경
신분 : 순교자
지역
같은 이름 : 나자리우스
성 나자리우스(또는 나자리오)의 부친은 이교도였고 로마(Roma) 군대의 장교였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열렬한 신자였기 때문에 그는 성 베드로(Petrus)나 성 바오로(Paulus)의 제자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다른 사람을 구원하려는 열망으로 불타던 성 나자리우스는 자기 고향인 로마를 떠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사도들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다가 밀라노(Milano)에 도착하여 활동하다가 그를 도와 거의 항상 함께 다녔던 성 켈수스(Celsus)와 함께 참수 치명하였다.
이 두 순교자는 네로 이후의 첫 번째 순교자로 꼽힌다. 이들의 유해는 그 도시 근교에 각각 매장 되었지만, 395년경에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12월 7일) 주교가 찾아내어 잘 모셨다. 성 나자리우스의 무덤에서는 순교 당시 흘리던 것과 똑같은 성인의 피가 붉고 신선하게 묻어날 때가 있었다고 한다. 성 암브로시우스는 이 성인들의 유해를 자신이 건립한 사도들의 성당에 안장하였고, 여기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전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