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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9/ 25. 5.
칠년 대환란ㆍ천년 왕국의 위험과 구원 받은 이후의 짓는 죄의 처리 문제
(구원 받은 후에 '죄를 지어도 죄가 아니다' 라고 하는 교리)
발췌, 보완.
정말 무서운 교리 중에 하나가 구원 받았다고 해서, '죄가 없다', '죄를 짓지 않았다', '죄를 지어도 죄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실로, 예수스님 안에서 죄가 없는 것이지, 구원 받았다고 죄가 없다고 하면 자기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것이며, 또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양심이 있는 인간이 죄를 짓고도 죄 없다거나, 죄를 지어도 죄가 아니라는 것은 정말 위험한 것입니다.
7년 대환란도 깊이 들어가 보면, 육적 이스라엘에 매여서 예수스님의 보혈을 무시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나, 율법학자들이나 서기관들과 같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옵서 끝내신 육적 이스라엘을 자꾸 인간이 다시 세우려하는 것입니다. 자꾸 새 예루살엠을 잊기 때문입니다. 예수스님의 보혈로, 옛 것은 폐하고 새 것을 새우셨는데, 여전히 이 땅의 것에서 마음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대한 도전이며, 하나님께 대한 가증한 행위인 것입니다. 주님을 죽인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와 똑 같은 믿음인 것입니다. 옛 것을 완전히, 영원히 끝내고, 새 예루살엠으로 영원히 하나님의 왕국을 채우시려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가 옛 것을 폐하고 새 것을 새우시겠다는 약속이며, 또 그것을 이루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으며,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고 하신 것을 자기 생각이나 교리로 덮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새 유언, 새 언약, 새 사람,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엠, 새 피조물 등 새 것만 예수스님 안에서 영원한 것입니다. 1,000년 왕국은 더 위험한 교리입니다. 7년 왕국은 문자적 이스라엘에 일어날 미래의 일로 여겨서 통과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KJV 진영도 똑 같습니다.
그런데, 천년 왕국은 아예 주님께옵서 지금의 실제 이스라엘 땅에 재림하셔서, 영원 왕국 전에 부활한 순교 성도들과 같이 천년 동안 통치한다는 것입니다. 그 교리들도 다시 또 가지들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여전히 새 예루살렘이 아닌 이 땅의 육적 유대인의 땅에 소망을 두는 정말 무서운 성경 도전입니다. 예수스님의 피는 이 땅이나, 옛 것은 그 흔적이나 원소까지 녹이는 이 세상의 끝인데, 자꾸 이 죄의 땅으로 예수스님을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구원자로서의 사역을 끝내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의 통치를 준비하시는 주님을, 시궁창보다 더, 도시의 바닷가 속보다 더 오염된, 시골의 재래식 변소보다 더한 이 죄의 땅으로 다시 옛날처럼 모셔 내리려는 것입니다.
정말, 그것은 성경에서 전혀 허락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초림으로서 실제 그러한 죄 속에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시다가, 고통 속에서 피까지 흘리셔서 죄를 다 사하시고, 거룩한 하나님으로서, 사랑의 구원자로서의 임무를 다하셨는데, 다시 이 죄의 땅으로 끌어내리려는 것입니다. 주님께옵서는 이 죄의 땅에는 아예 오시지 않으실 뿐 아니라, 원소조차 완전히 녹이셔서 영원히 없애버리십니다. 자꾸 예수스님께옵서 이 보이는 것이나, 옛 것을 없애시기 위해 돌아가셨는데, 자꾸 주님의 피를 무시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죄만 사하셨을 뿐 아니라, 옛 것은 다 폐하신 것입니다. 율법만 폐하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새 것이 아닌 것은 예수스님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죄를 가벼이 여기는 마음 때문입니다. 얼마나 죄가 하나님과 원수라서 지옥 불, 유황으로 불타는 호수에서 영원히 태우신다고 하시는데, 그 죄의 땅으로 자꾸 주님을 모셔 내리며, 또 구원의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죄를 가벼이 여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구원의 복음을 짓밟는 것입니다. 똑 같은 맥락에서, 구원 받은 후에 죄가 없다거나, 죄를 지어도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 받았고, 죄의 심판으로부터 건져졌고, 영원한 하나님의 의를 받아서 의인이 되었고, 영원하신 성령님께옵서 영원히 구원 받은 성도들 속에서 거주하심으로서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것은 사실이며, 우리들의 영광의 신분입니다. 그것은 믿음이며, 예수스님 속에서이며, 우리가 대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이며, 우리들 속에 계시는 성령님으로 인 쳐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스님께옵서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세상 죄를 제거하셨는데, 이 세상에 죄가 없습니까? 구원 받았다고 해서-죄로 인정하거나 않든 간에-죄 짓는 사람이 없습니까? 죄 없다 하거나, 죄를 지어도 죄가 아니라는 분들은 빼더라도, 구원 받은 성도 분들은 완전히 죄를 짓지 않습니까? 정말, 양심에서, 생각, 말, 행동으로 단 한 번의 죄도 짓지 않았다고 하나님께 자백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저 전쟁, 싸움, 사기, 간음, 사기, 절도, 살인 등의 일들은 죄가 아니라, 이미 용서된 죄의 그림자입니까? 그것들은 죄가 아니라 태워진 죄로서 심판에서 제외됩니까? 정보화 사회인 이 세상의 문명 속에서, 몇 초만 되면 다 알게 되는 추악하고 가증하며, 음란한 저 죄들이 죄가 아니라면 무엇이 죄입니까? 과거로 돌아가서 율법을 어겨야만 죄입니까?
양심은 무엇입니까? Romans서 2: 12 이후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성경에는 율법 이전에 양심의 죄를 강조하십니다. 그 누구도 핑계대지 못하도록 양심의 기록 장치가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들 중에서 마지막 날이 되면, 그 누구도 핑계치 못할 양심은 무엇입니까? 구원의 목적은 죄사함으로 하나님의 성령님께옵서 들어오셔서 영생을 주시기 위하심이지만, 죄를 짓지 않게 하시려고 하심입니다. 죄의 몸을 죽여서 속사람이 자라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하심도 있습니다. Romans 6: 6과 6: 15에는 구원 받는 이후에 죄를 짓지 않고 이기게 하려 하심이 있습니다. 이어 7장에서는, 사도 파울은 옛사람과 새사람, 곧 속사람과 겉사람의 싸움으로 괴로워한 것을 봅니다. 오죽하면 매일 매일 죽는다고 하였겠습니까? 십자가에 주님과 못 박혀 이 죄의 몸을 멸하여(Romans 6: 6)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구원 받은 이후의 죄와의 싸움을 성경에서는 Romans서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싸움 그 자체입니다. 구원 받은 후에도 죄와의 전쟁입니다. 죄는 우리 육신이 살아 있는 날까지 악한 생각으로 끈질기게 끌며,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 생애에서의 자랑 등으로 끈질기게 잡아당기고 있습니다. 안과 밖으로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악한 생각은 죄로 이끕니다.
그런데, 구원 받았다고 해서, '죄가 없다', '죄를 지어도 죄가 아니다', '죄를 지을 수도 없다,' 라고 하는 것은 정말 성경적인 죄의 구분에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얼마나 죄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마음에 심판이 임해서 구원을 받았는지, 자기 구원을 점검해봐야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성경적으로 자기 죄를 돌이켜보고 구원 받았을 때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구원 받기 전이나, 구원 받은 후나, 죄는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했구나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드리게 되는데, 아예 죄를 치워버리고 자유롭게 죄에 대해서 감각이 없다면, 구원을 반드시 점검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복음 공식일 수 있으며, 머리로 단순히 깨달은 지식적인 복음일 수 있으며, 성경 지식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속의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 중의 많은 수의 사람들이 성경 지식이 없어서 주님을 부인하고 지옥으로 갔습니까? 구원 받은 이들이 성경 지식이 많아서 구원 받았습니까? 그들은 양심으로, 성경으로 죄인인 것을 깨닫고 믿고 감히 성전-그 당시는 성전-에서 감히 머리도 들지 못한 분들입니다. 성경 지식과 구원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구원은 반드시 양심의 법에 걸린 지은 죄와, 성경의 법에 완전한 죄인인 것을 깨닫고 심판, 곧 자신이 지옥에 간 마음에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죄로 인한 회한의 마음의 눈물과 통회로부터의 회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로부터의 통회와 회개가 없는 것은 구원을 점검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빠진 성경 지식은 논쟁만 낳게 되고, 구원이 빠진 성경 지식은 교만으로 인해서 남의 위에 서게 되는 것을 봅니다. 구원이 제대로 이루어져도 믿음이 자라지 않으면 종종 육신의 것으로 말씀을 흉기로 사용하는 것을 저나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봅니다. 수술하다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는 것과 같이 말씀의 검이 흉기로 돌변하는 것을 봅니다.
구원 받았다고 해서, '죄가 없다', '죄를 지어도 죄가 아니다', '죄를 지을 수도 없다', 하는 것은 정말 적용에 신중하게 그 의도나 상황에 따라 잘 구분해야지, 무조건 주장하면 위험하고 양심을 속이는 일이 될 것입니다. 구원 받은 이후에 죄를 지어 하나님의 존함에 먹칠을 하는 뉴스를 종종 봅니다. 그들은 원래 구원 받지 않았다고 몰아 부치겠습니까? 사도 Peter의 많은 실수. 사도 Peter와 Barnabas의 논쟁. Ananias와 Sapphira의 거짓으로 인한 죄 등 수없이 많고, 사도 파울은 1 Corithians서 12: 21에서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코린트흐 교회에 대해서 강한 질책을 하기도 합니다. 구원 받은 성도는 비로소 죄에 대해서 심각함을 알고, 악함을 알고, 죄의 결과가 무서운 것을 압니다. 구원 받았다는 것은 영원한 심판에서 해방된 것이지, 이 땅에서의 고통과 징계로부터도 해방 받은 것은 아닙니다.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죄를 지을 수 없다고 경고하십니다. Romans서 뿐 아니라, 많은 신유언 말씀에서 구원 받은 이후의 죄에 대해서 많은 경고를 하시는 것을 알 것입니다.
사실, 구원 받기 전에는 죄에게 지는 것이 삶이었으므로, 죄를 즐기는 것이 삶이었으므로, 죄와의 싸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양심으로 버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죄와의 전쟁은 사실 구원 받고 나서부터 시작입니다. 그런데 아예 죄를 폐기하여, 외면한다면 죄를 가벼이 여기는 것은 고사하고, 죄를 적당히 숨어서 남에게 들키지 않을 만큼 즐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어도 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발각되지 않을 만큼 적당히 지으며 죄에 대해서 친교를 나눌 것입니다. 죄가 없고, 죄를 지어도 죄가 아닌데 무슨 거리낌이 있습니까? 정말 무섭고 무조건적인 적용이며, 정말 위험한 죄의 정당화이며, 정말 잘못된 구원일 수 있습니다. 죄를 가벼이 여기는 것은 구원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자기 양심과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성경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1 Corinthians 5장에서 보면, 교회에 아주 사악한 간음의 죄가 있을 때에, 이방인조차 거론 않는 죄를 적당히 두는 것을 경계하는 말씀을 봅니다. 오죽하면 육체를 사탄에게 내어주어 파멸하게 하고, 그 영을 예수스님의 날에 구원 받게 한다는 두려운 경고를 하겠습니까? 위의 구절의 내용으로 봐서는 구원 받은 성도의 죄인 것입니다. 구유언에서도 하나님의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을 많이 봅니다. 그들은 그것을 죄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도, 유다흐도, 레우벤도, 심지어 다브흐이드도 죄를 지었습니다. 징계도 받고 심한 통회의 회개도 하였습니다. 구원 받은 후에 얼마나 죄를 많이 지을 수 있는가는 솔오몬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생활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는 수많은 우상 신전을 짓게 하는 등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구원 받은 후에 비로소 죄와의 싸움입니다. 말씀을 먹고 자라서 죄를 이기라는 것이 성경의 말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죄를 이겨야 하나님의 성품이 나오고, 그래야 빛과 소금이 되며, 그래야 양심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그 크고 귀한 구원의 희소식을 전할 것입니다.
그런데, 죄 자체를 아예 무시하고, 죄를 가벼이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치되는 것입니다. 예수스님 안에서 범죄가 유죄 판결을 받지 않고, 예수스님 안에서 의인이지, 실제 육신을 입고 있는 날까지 죄와의 기나긴 싸움인 것입니다. 의인이지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제, 1 John 1장을 보겠습니다.
CHAPTER 1
1 장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which we have heard,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ich we have looked upon, and our hands have handled, of the Word of life;
그 시작[처음]으로부터 있은 그것, 그것은 우리들이 들었던 것이며, 그것은 우리들이 우리들의 눈들로 본 것이며, 그것은 우리들이 생명의 그 말씀에 대해서 바라보았으며, 또 우리들의 손들을 대었다는 것인데;
2 (For the life was manifested, and we have seen it, and bear witness, and sho[e]w unto you that eternal life, which was with the Father, and was manifested unto us;)
2 (왜냐하면 그 생명은 명백하게[분명하게] 되어졌으며, 또 우리들은 그것을 보았고, 또 증거 하며, 또 그 영원한[영구한] 생명을 그대들에게 보이는데, 그것은 그 아버지와 함께 있으며, 또 우리들에게 명백하게[명백하게] 되었기 때문이니;)
3 That which we have seen and heard declare we unto you, that ye also may have fellowship with us: and truly our fellowship is with the Father, and with his Son Jesus Christ.
3 우리들이 보았으며 또 들었던 것을 우리들은 그대들에게 분명히 하였는데[밝혔는데], 그것은 그대들도 또한 우리들과 함께 교제[친교]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그리고 참으로[진실로] 우리들의 교제[친교]가 그 하나님과 함께, 또 그분의 아드님[아들] 예수스 크흐리스트님과 함께 있습니다.
4 And these things write we unto you, that your joy may be full.
4 그리고 이(것)들 것들을 우리들은 그대들에게 썼는데, 그것은 그대들의 기쁨이 충만한 상태로 있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5 This then is the message which we have heard of him, and declare unto you, that God is light, and in him is no darkness at all.
5 이것은 그때에[그 위에] 우리들이 그분께로부터 들었으며, 또 그대들에게 분명히 하는 그 전언인데, 그것은 하나님께옵서는 빛이시며, 또 그분 안[속]에는 어떤 어두움도 전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6 If we say that we have fellowship with him, and walk in darkness, we lie, and do not the truth:
6 만일 우리들이 우리들은 그분과 교제를 가지고 있다고[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런데 어두움 안[속]에 걸으면, 우리들은 거짓말을 하며, 또 그 진리를 행하지 않습니다.
7 But if we walk in the light, as he is in the light, we have fellowship one with another, and the blood of Jesus Christ his Son cleanseth us from all sin.
7 그러나 만일 우리들이 그 빛 안[속]에서 걸으면, 그분께옵서 그 빛 안[속]에 계시는 것같이, 우리들은 서로에 대하여 교제를[사귐을] 가지게 되며, 또 그분의 아드님[아들] 예수스 크흐리스트님의 그 피가 우리들을 모든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십니다.
8 If we say that we have no sin, we deceive ourselves, and the truth is not in us.
8 만일 우리들이 우리들은 어떤 죄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면,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들을 속이며, 또 그 진리가 우리들 안[속]에 있지 않습니다.
9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to forgive us our sins, and to cleanse us from all unrighteousness.
9 만일 우리들이 우리들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옵서는 우리들에게 우리들의 죄들을 용서하시기까지, 또 우리들을 모든 불의로부터 깨끗하게 하시기까지 신실하신 상태와 또 의로우신 (상태)로 계십니다.
10 If we say that we have not sinned, we make him a liar, and his word is not in us.
10 만일 우리들이 우리들은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면, 우리들은 그분을 한 거짓말하시는 이로 만들며, 또 그분의 말씀이 우리들 안[속]에 있지 않습니다.
2006. ~. ↑. 영.
2008. 2/ 26. 3. ↑.
위의 말씀은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으로서, 우리들이라는 인칭을 사용함으로서 구원 받은 이후의 하나님과의 교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빛과 어두움의 문제로서, 죄 문제로 인한 하나님과의 사이에 회복하는 교제인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 구원 받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구원과 교제의 구분이 반드시 필요하며,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뼈 속 깊숙이 늘 생각하고 죄로부터의 해방을 맛보는 교제인 것입니다. '구원 받았는데, 왜 죄가 있느냐?' 하는 것은 정말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의 문제이며, 예수스님 안에 있을 때인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몸을 입고, 죄의 세상에서, 죄에 물든 혼적인 것들에 늘 노출되어 살고 있습니다. 우리 영이 거룩하다고 해서 우리 몸이나, 옛사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파울의 탄식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Romans 7: 21 ~).
위의 1 요흔서 말씀에서 우리들은 구원을 받고 난 후 죄를 지으면, 그 즉시 하나님을 떠나 동굴 속에 들어간 것입니다. 죄로 인해서 교제가 끊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움에 숨은 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믿음과 자백의 기도로 다시 빛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죄에는 반드시 아픈 회한, 곧 통회의 마음과 하나님께의 솔직한 자백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죄임을 깨닫고 자백하고 다시 예수스님의 보혈의 공로로 하나님과 교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현재형으로 죄가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현재형입니다. 주님께옵서 한 번 피 흘리심으로 영원히 죄 문제를 해결하셨지만, 영원히 죄의 심판이 용서되었지만, 구원의 안전에는 변함이 없지만, 누구든지 그것을 듣고 믿는 그 순간 죄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믿지도 않는데 죄가 약 2,000년 전에 모두 용서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예수스님 안에 들어오는 순간 개인별로 용서되는 것입니다. 시간과 상관없이 영원한 대속으로서(Hebrew 9: 12), 듣고 믿는 순간이 구원이 이루어지는 시점인 것입니다. 결국은 2,000년 전에 죄가 완전히 용서되었지만, 누구든지 듣고 믿지 않으면 그 시기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스님의 피는 영원한 효력이 있고, 시기의 구애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구유언 시대의 분들은 하나님께옵서 보내신다는 구원자를 믿고 구원 받은 것입니다. 육신에 관계된 것을 옛유언인 짐승의 피로 씻고, 양심의 죄는 오실 구원자의 피를 믿고 구원 받은 것입니다(Hebrew9: 9). 양심의 죄는 짐승의 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직 오시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기다리고, 믿음으로 죄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양심은 율법과 상관없이 Adam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누구에게나 하나님께 인도하는 율법 같은 훈육 선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는 어떤 기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듣고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에 이르기까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Romans 10: 10).
Jesus[예수스님: 예수님]께옵서 육신을 입으시고 오셨으므로, 역사적으로 약 2,000년 전에 저주의 십자가 위에서 많은 사람들의 죄사함을 위하여 대속의 피를 흘리셨지만, 그것은 듣고 믿어야만, 시기나 위치에 관계없이 마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구원은, 말씀을 듣고 믿는 순간 순간적으로 일어나서 성령님께옵서 들어오셔서 영원히 거주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으로서, 죄 용서함을 하신 것을 믿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제도 마찬가지로, 구원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이후에, 늘 지을 수밖에 없는 죄를 깨달은 후에 즉시 죄를 인정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솔직히 자백하고 예수스님의 피를 의지해서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스님의 피는 구원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이후에도 항상 죄를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나가기만 하면 그 순간 하나님께옵서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라는 것이 어려우면서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그것은 양심이 하나님께 솔직해야 하는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스님의 피의 효력을 믿는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다 용서하셨으므로 다시 죄를 정결케 하는 것은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닌 것입니다. 구원 받은 이후에는 교제가 반드시 지속되어야만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잘못 적용하면 대치되는 말씀이고, 또 어떤 면에서는 가장 두렵고 어려운 말씀이 1 John 3장 말씀일 것입니다.
1 John서 3장을 보면,
5 And ye know that he was manifested to take away our sins; and in him is no sin.
5 그리고 그대들은 그분께옵서 우리들의 죄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명백히[나타나게] 되신 것을 아는데; 그런데 그분 안[속]에는 어떤 죄도 있지 않습니다.
6 Whosoever abideth in him sinneth not: whosoever sinneth hath not seen him, neither known him.
6 그분 안[속]에 거주하는[머무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죄를 짓지 않으니: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분을 뵙지 못하였으며, 그분을 알지도 또한 못하였습니다.
7 Little children, let no man deceive you: he that doeth righteousness is righteous, even as he is righteous.
7 어린 자녀들(이시여), 한 (명의) 사람도 그대들을 속이지 못하게 하십시오: 의[의로움]을 행하는 그는 의로운 자[상태]로 있는데, 바로[마침] 그분께옵서 의로우신 분[상태](으)로 계시는 것과 같이[것처럼].
8 He that committeth sin is of the devil; for the devil sinneth from the beginning. For this purpose the Son of God was manifested, that he might destroy the works of the devil.
8 죄를 범하는 그는 그 마귀에 속하는 자이니; 왜냐하면 그 마귀는 그 처음[시작]으로부터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목적으로 하나님의 그 아드님[아들]께옵서 명백하게[나타나게] 되셨는데, 그것은 그분께옵서 그 마귀의 그 일들을 멸하셨을[멸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9 Whosoever is born of God doth not commit sin; for his seed remaineth in him: and he cannot sin, because he is born of God.
9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누구든지 정녕 죄를 범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분의 씨가 그의 안[속]에 머무르기 때문이며: 그리고 죄를 지을 수도 없는데, (그 이유는)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위 말씀을 1장과 비교하면 상당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상반되는 면이 있지만, 다 진리로서 우리들이 깨닫지 못하는 부분이 있고, 또 많은 부분 논쟁이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3장 5절 말씀을 보아야만 합니다. 예수스님 안에서는 죄도 없고, 죄를 지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스님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Romans서 8장 말씀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분이 거룩하지만, 우리들은 죄를 지어서 육신에 속한 삶을 사는 것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믿음과 현실, 신분과 현실을 구분하지 않으면, 구원 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죄를 짓는 그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였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스님께옵서 오신 목적이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을 압니다. 우리는 늘 죄에 질 수 있으므로 예수스님이 매시, 매 순간 숨 쉬는 것과 같이 필요한 것입니다. 늘 변호자 되시고 위로자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늘 교제가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3장 말씀만 적용하고 1장 말씀을 외면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죄를 지을 때는 하나님과 상없이 육신에 속하거나 마귀에게 속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마귀의 자식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스님의 보혈이 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번 구원 받으면 영원하신 성령님께옵서 계심으로 취소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옵서 우리 속에 계시고, 또 우리가 주님 속에 계심으로 영원히 돌이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늘 주님께 속한 삶을 살면 죄와 상없지만, 늘 죄에 지기 쉬운 우리들은 늘 1장에서의 교제를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제로서 구원과는 상없는 것입니다. 죽기 직전에 죄를 자백하지 않고 죽었다고 해서 그 죄가 남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미 모든 죄는 용서되었고, 하나님의 씨가 우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1장과 3장 사이의 적용의 문제는 쉽게 단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문맥과 여러 공부를 통해서 더 공부해야 합니다. 1 장을 중심으로 하였으나, 3 장을 해결하지 못하면 또 하나의 논쟁이나, 자의적 해석이 될 것이므로 정말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같은 고민을 부탁드립니다. 어려운 문제입니다. 사실과 현실. 교제와 구원. 주님 안에서 죄 없음과 죄를 지을 수 없음과, 육신을 입고 죄를 짓는 문제. 우리는 신분이나 사실로는, 믿음 속에서 3장 말씀대로 완전하며, 거룩하며, 의롭습니다. 마귀의 일들을 멸하신 예수스님 안에 있기 때문에 절대 죄도 없고, 죄를 짓지도 않으며, 지을 수도 없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시고 없으신 예수스님 안에서는 죄와 완전 상관없습니다. 예수스님 안에,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옵서 우리들 속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믿음이고 사실이지만, 1장에서의 삶에서의 문제는, 실제 죄의 몸을 입고, 죄의 세상에 사는 삶은 늘 죄와의 싸움입니다. 반드시 1장과 3장은 구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 있습니다(Gal. 2: 20). 죄도 예수스님 안에서, 믿음과 사실로는 이 세상 죄를 통째로 제거하셨지만, 우리는 여전히 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는 완전한 의인이지만, 생활에서는 우리들은 여전히 죄를 가지고 있고,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완전히 용서된 죄이지만, 우리들은 죄 문제를 늘 껴안고 살고 있습니다. 크흐리스트님의 재판석에서의 상급과 관계된 삶과 더불어 늘 죄 문제를 교제로 해결해야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다시 1장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실제 삶에서 죄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미 심판과는 상관이 없고, 다 용서된 죄이지만, 이 땅에 살면서 구원 받은 이후에는 더욱더 죄에 대해서 하나님과 양심에 예민하며, 솔직해야 합니다. 구원 받은 이후의 죄 문제 해결, 곧 교제도 역시 예수스님의 피로 해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솔직하게 자백하고, 예수스님의 보혈로 나가기만 하면 그 순간 현재형으로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어떤 시기와 관계없이 예수스님의 대속의 보혈을 믿는 순간 구원 받는 것과 같이, 짓고 짓는 죄는 현재형으로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예수스님께옵서는 약 2,000년에 한 번 돌아가심으로서, 그 시점은 영원히 구원의 죄 문제 해결이나, 구원 받은 후의 죄 문제의 해결이나, 동일하게 나아가는 시점인 것입니다. 그 시점은 영원히 변치 않는 것입니다. 마치 영원히 우리들 옆에서 흘러가는 강물과 같으며, 지구를 벗어난 하늘에서 항상 비추는 햇빛과 같습니다. 항상 그 시점에 있으므로 구원이나 교제나 항상 주님의 보혈로 나가면, 하나님께옵서 그 순간 정결케 해 주십니다. 구원 받은 후에 믿음과 교제를 구분하지 못하므로, 짓는 죄를 죄가 아니라고 하거나, 죄 없다고 해서 하나님과의 양심의 교제가 흐려지는 것입니다. 햇볕이 따사로이 내리쬐는데 동굴 속에 들어가서 눈부시다고 나오지 않는 격입니다.
거듭났을수록 죄에 예민해야 하며, 또 죄를 이기기 위해 늘 하나님께 자백으로 나아가서 죄 문제로 하나님과의 사이에 구름이 끼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죄를 지어도 심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징계와 어려움을 당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될 때까지 단절될 수 있습니다.
다시 1 John 1장을 보면,
7 But if we walk in the light, as he is in the light, we have fellowship one with another, and the blood of Jesus Christ his Son cleanseth us from all sin.
7 그러나 만일 우리들이 그 빛 안[속]에서 걸으면, 그분께옵서 그 빛 안[속]에 계시는 것같이, 우리들은 서로에 대하여 교제를[사귐을] 가지게 되며, 또 그분의 아드님[아들] 예수스 크흐리스트님의 그 피가 우리들을 모든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십니다. 위의 말씀에서 어두움 가운데 걷는다면, 다시 빛으로 나오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지면 그 때도 예수스 크흐리스트님의 보혈을 통해서 하나님께옵서 정결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뿐 아니라, 교제 회복도 예수스님의 보혈인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9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to forgive us our sins, and to cleanse us from all unrighteousness.
9 만일 우리들이 우리들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옵서는 우리들에게 우리들의 죄들을 용서하시기까지, 또 우리들을 모든 불의로부터 깨끗하게 하시기까지 신실하신 상태와 또 의로우신 (상태)로 계십니다.
또 위의 말씀에서 보면, 하나님께 자기의 죄들을 솔직히 자백하면, 그분께옵서는 모든 죄들을 용서하시기까지, 또 모든 불의로부터 정결케 하시기까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to 부정사를 잘 적용해 문법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한 번 구원 받은 칭의의 믿음은 영원하지만, 구원 받은 후의 짓는 죄도 늘 예수스님의 보혈로 나아가서 정결케 되어 늘 빛 속에서 걸어야 할 것입니다. 죄에 지는 부끄러운 삶일수록 더더욱 하나님께 자백하여 예수스님의 보혈로 맑게 씻어 빛 가운데 걸어야할 것입니다.
'죄 없다', '죄를 지어도 죄가 아니다',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은 항상 믿음인지, 현실인지 잘 구분해서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무조건 구원 받은 후에 '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정죄해서 구원 받지 않았다고 하거나, 또 '죄 없다, 죄 짓지 않았다' 한다고 하는 분들을 무조건 비성경적이라고 정죄하고 비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둘 다 맞는 것입니다. 그 말의 의도와 상황에 따라서 분별하여야할 것입니다. 함부로 조롱하거나 비난하고 마귀와 연관시켜버리는 우리들 육신의 성품들이 서로 싸우고, 정죄하고 분열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구원 받은 이후에 죄에 예민하고 하나님과 양심에 솔직하며, 또 구원의 복음을 전할 때에도, 죄 문제를 정말 심각하게, 곧 정확하게 전해야 할 것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랐고, 죄가 지옥을 가게하고, 죄가 수많은 이 땅의 죄악을 낳았고, 죄가 불호수로 가게하고, 죄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서 예민하고 하나님과 자기 양심에 솔직해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이 중요하고,그래서 성경 KJV가 중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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