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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 지음 / 최민순 신부 옮김 / 바오로 딸
1. 작가소개
- 지은이 : 성 아우구스티누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믐 354년 누미디아(북아프리카) 타가스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이교도의 하급관리였고 어머니인 모니카는 열성적인 그리스도교도였다. 어머니를 통해 신의 섭리를 배우고 익혔다. 법률공부를 위해 카르타고로 유학하였는데 방탕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는 수사학(修辭學) 등을 공부하여, 당시로서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로마제국 말기 청년시절을 보내며 한때 타락생활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19세 때 키케로의 《철학의 권유 Hortensius》를 읽고 지적 탐구에 강렬한 관심이 쏠려 마침내 선악이원론(善惡二元論)과, 체계화하기 시작한 우주론(宇宙論)을 주장하는 마니교에 심취하였다. 그 후 그는 문학을 공부하면서 마니교에서 멀어지게 되었고 신(新)플라톤주의에서 그리스도교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편력을 하였다. 그의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384년에 만난 밀라노의 주교(主敎) 암브로시우스였다.
그는 개종에 앞서 친한 사람들과 밀라노 교외에서 수개월을 보내면서 토론을 벌였는데, 그 내용들이 초기의 저작으로 편찬되었다. 388년 고향으로 돌아가서 수도생활을 시작하려 하였으나 사제(司祭)의 직책을 맡게 되었고, 395년에는 히포의 주교가 되어 그곳에서 바쁜 직무를 수행하는 한편, 많은 저작을 발표하였다. 《고백록》도 그 중의 하나이지만, 대작으로서는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 《신국론(神國論)》 등이 널리 알려졌다.
만족(蠻族) 침입의 위험을 직접 당하면서 죽어간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문화 최후의 위인이었으며, 동시에 중세의 새로운 문화를 탄생하게 한 선구자였다. 그의 사상은 단순한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참된 행복을 찾고자 하는 활기있는 탐구를 위한 것으로서, 그가 살아온 생애에서 그것을 떼어놓을 수는 없다. 그 체험을 통하여 찾아낸 결론은 《고백록》의 유명한 구절 “주여, 당신께서는 나를 당신에게로 향하도록 만드셨나이다. 내 영혼은 당신 품에서 휴식을 취할 때까지 편안하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인간의 참된 행복은 신을 사랑하는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신을 사랑하려면 신을 알아야 함은 물론, 신이 잠재해 있다는 우리의 영혼도 알아야만 한다. 그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철학의 대상으로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신과 영혼이었다. 신은 우리 영혼에 내재하는 진리의 근원이므로, 신을 찾고자 한다면 굳이 외계로 눈을 돌리려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영혼 속으로 통찰의 눈을 돌려야 한다. 윤리에서는 모든 인간행위의 원동력이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은 결코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존재이며, 윤리적인 선악은 그 사랑이 무엇으로 향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하였고, 마땅히 사랑해야 할 신을 사랑하는 자가 의인(義人)이고, 신을 미워하면서까지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악인(惡人)이라고 하였다.
- 옮긴이 : 최민순 신부
전라북도 진안 출생. 1935년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을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전라북도 정읍·임실·남원 등지에서 본당신부로 근무하다가 1939년부터 전주해성학교 교장, 1944년부터 성유스티노신학교 학장으로 재직하였다. 그러나 학장취임 2개월 만에 학교가 폐쇄되자 천주공교신학교(天主公敎神學校: 聖神大學의 전신. 지금의 가톨릭대학 신학부) 교수로 전임되었다.
1951년 대구교구 출판부장 겸 천주교회보와 대구매일신문 사장으로 임명되면서 한때 교직을 떠나기도 하였으나, 1952년 다시 성신대학의 교수로 복직하였다. 그 뒤 1960년 스페인 마드리드대학에 유학하여 2년 동안 신비신학과 고전문학을 연구한 뒤, 1963년부터 경기도 부천의 소명여자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1965년부터 가톨릭공용어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다.
1966년부터 다시 가톨릭대학 신학부 교수로 재직하다가 1975년 8월 지병인 고혈압으로 사망, 용산 성직자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서로는 수필집 ≪생명의 곡≫, 시집 ≪님≫·≪밤≫ 등이 있으며, 유고집 ≪영원에의 길≫이 있다. 또한 다수의 번역서도 남겼다.
특히 단테의 ≪신곡≫>,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등은 정확한 번역으로 알려져 있다. 저작과 역서는 주로 영성과 관련된 것들이다.
이와 관련된 번역서로는 ≪예수의 데레사, 완덕의 길≫(1967), 구약성서의 <시편>(1968), ≪영혼의 성≫(1970)·≪십자가의 요한≫(1971)·≪깔멜의 산길≫ (1971)·≪어둔 밤≫(1973) 등이 있다.
이 밖에 ≪대구매일신문≫에 호교론에 관한 소논문들을 게재하였고, 가톨릭공용어위원 시절에 <주의 기도>·<대영광송> 등의 기도문을 작성하였으며 몇 편의 성가를 작사하기도 하였다.
1960년 3월 제2회 한국펜클럽번역상을 수상하였고, 1967년부터 지도신부로 재직하여 오던 성모영보가르멜수녀회의 본원인 로마 가르멜회로부터 명예회원 표창장을 받았다.
2. 간추림 또는 내 마음에 다가온 구절및 느낌
제1권 타가스테와 마다우로에서의 어린 시절(열다섯 살까지, 354-369)
당신의 한줌 피조물, 인간이 감히 당신을 기리려 드옵나이다. 당신을 기림으로써 즐기라 일깨워 주심이오니, 님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 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찹찹하지 않삽나이다. (p26)
☞ 최민순 신부님의 번역은 옛투가 많아 생소하기도 하고 포근하기도 하다. 찹찹하다: 마음이 가라앉아 조용하다.
“믿은 바 없는 그분을 어찌 부르며 전도하는 자 없이 어찌 믿으오리까?”(로마 10,14) “그를 찾는 자들이 주님을 찬미하리니”(시편 22,27) 찾는 자들이 그분을 얻고, 얻으며 그분을 찬미하리로다. (p30)
☞ 이 책의 성경구절은 새번역 성경구절의 인용이 아니라 최민순 신부님의 번역이다.
내 하느님이 내게 오실 자리가 내 안에 있기라도 하단말인가? 하늘과 땅을 만드신(창세 1,1) 하느님, 그 하느님이 오실 자리가 내 안에? (p31)
☞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으면’ 내 하느님이 내 안에 오시지 못한다.
나 아직 지옥에 있어 보지 않았어도 당신은 거기도 계시나이다. “나 지옥에 내려갈지라도 거기 당신이 계심”(시편 139,8)이니이다. 내 하느님이시여, 나는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이 내 안에 아니 계셨던들 절대 나는 존재치 않았을 것입니다. (p32)
☞ 설령 내가 지옥에 있더러도 하느님이 함께 계심다함은 그야말로 전율로 다가온다. 이야말로 실존이다.
“그한테서 모든 것이, 그를 말미암아 모든 것이, 그 안에 모든 것이”(사도 17,28) 존재하는 당신 안에 내가 있지 않았던들 애당초 있을 수 없었다 함이 차라리 낫지 않으오리까? 그러합니다. 주여, 실로 그러하옵니다. (p32)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나는 존재한다. 하느님이 없었다면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늘 계시되 헤아릴 길 없으시고, 온갖 것을 바꾸시되 바꾸지 않으시며, 새로움도 묵음도 없으신 채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p34)
당신을 들어 말하는 이 있다면 어떻다 말해야 옳답니까? 그러나 슬픈지고, 당신을 두고 침묵을 지키는 자들이여, 저들이야말로 종알대는 벙어리들인지고. (p35)
☞ 세상일에는 말이 많아도 진작 하느님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가엾은 사람이다.
뉘 있어 나를 당신 안에 쉬게 해주리까? 그 누가 당신을 내 마음 안에 오시게 해주리까? 내 마음 흠뻑 취하게 만드시면 내 죄악 모두 잊고, 오직 하나인 나의 행복, 당신을 얼싸안으오리다. (p35)
내가 당신의 무엇이기에 나 같은 것에게 당신을 사랑하라 명하시고, 아니하면 진노하시어 엄청난 비참을 내리시리라 으르시나이까?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작고 작은 비참이라도 되는 것이랍니까? (p36)
☞ 관심은 사랑의 표현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주 내 하느님이여, 당신이 나의 무엇인지 어여삐 여기심으로써 내게 말씀하소서. “내 영혼에게 말씀하소서. 네 구원이 나로라.”(시편 35,3)하고. (p36)
☞ 하느님이 나의 구원이심을 친히 말씀하셨나이다.
이리 말씀하소서. 듣겠나이다. 보소서 주여, 당신 앞에 내 마음의 이 귀들을, 이를 여사 내 영혼에게 말씀하소서, 네 구원이 나로라고. 이 목소리 뒤로 내달아 가서 당신을 붙잡고 마오리다. “당신 얼굴을 나한테서 감추지 마옵소서.” 차라리 뵈옵고 죽으리라. (P36)
☞ 이 간절함.
주여, 당신은 아시옵니다. 내 하느님이여, “내가 당신께 내 죄를 고백하였삽더니 당신은 내 마음의 악을 사하여 주시지 않았나이까?”(시편 32,5) (P37)
올바른 생활이랍시고 철없는 것에게 제시된 것은 사회에서 출세하고, 그러려면 인간의 명예와 헛된 부귀에 종노릇하는 웅변학이 뛰어난 만큼 이의 스승을 붙좇으라는 것이었습니다. (p48)
☞ 출세와 부귀영화를 삶의 목표로 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학습이 굼뜨게 되면 매를 때리는 것이었는데, 어른들은 이를 잘하는 일로 여겼고 우리 이전에 살던 허다한 사람들이 어려운 길을 갔던 것처럼 우리도 아담의 후예가 물려받은 수고와 고통을 겪으며 그 길을 가야만 했습니다. (p48)
☞ 체벌또한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체벌이 없다지만 우리 때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어린 대로 내 보호, 안식처이신 당신께 기도하기 시작했고 당신을 부름으로써 내 혀의 매듭을 풀고, 그리고 작은 애가 작지 않는 정으로 당신께 빌면서 학교에서 매 맞지 말게 해줍소사, 했던 것입니다. (p49)
☞ 어린 성인이 매맞지 말게 해주시사 기도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아무래도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내 주 하느님이시여, 난 부모와 저 스승들의 명을 거스르면서 죄를 지은 것입니다. 저들의 뜻이야 어떠하든 배우라고 한 그 글을 가지고 나는 다음에 잘 쓸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저들에게 순종하지 않은 까닭은 더 나은 무엇을 선택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락을 즐기기 때문이었습니다. (p51)
☞ 공부보다는 오락을 즐기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인 듯 하다
내가 아직 어렸을 때 어느 날 위장의 압박으로 죽는 듯 신열이 높았을 때, 내 하느님이여, 당신은 이미 내 지킴이셨으니 잘 보셨습니다. 내 어미와, 그리고 우리 모든 이의 어머니이신 당신 교회의 지성(至誠)에서 내 마음이 얼마나 감동되고, 신덕을 내켜서 내 주 하느님이신 당신 그리스도의 세례를 애원했삽더이까. (p53)
☞ 죽음 앞에서 하느님을 찾는 것은 약한 인간의 본성일게다.
주 예수여, 죄 사함을 위해 당신께 부르짖으며 생명의 성사를 받잡고 맑게 씻기기를 바라는 것이었으나 나는 금새 나았습니다. 이리하여 나의 정화는 늦추어졌으니 살면서 아직도 더 때묻어야 할 필요가 있삽는지요? 세례 후에 다시 죄악의 더러움을 쓰는 것이 더 크고 위험스런 죄이니 말씀입니다. (p53)
☞ 당시에는 세례를 받고나면 신자답게 살아야 하므로 죄악에 빠질 자유(?)를 잃는다고 세례를 미루는 것이 풍조였다고 한다. 요즈음도 세례를 권유하면 죄 다 짓고나서 죽을 때쯤 받겠다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다.
내 하느님이시여, 왜 그때 내가 세례를 못 받고 미루어야 했는지, 당신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그 곡절이 알고 싶사옵니다. 결국 죄악의 고삐가 늦추어진 것이 내게 잘된 일이었나이까, 안 늦추어진 것이 나을 뻔 했나이까. (p54)
☞ 인생의 단 맛, 쓴 맛을 다 겪은 후에야 세례를 받았으니 성인의 경우에는 하느님의 섭리였던 것 같다.
지금도 어디서든 이런저런 사람들에 대해 내 귀에 걸리는 소리는 “맘대로 하게 버려두라. 아직 세례도 받지 않았는걸.” 이러는 것이 아니옵니까. 그렇건마는 육체의 건강에 대해선 “더 상하도록 내던져 두라. 아무도 낫지 않은 것을.” 이리 말하는 사람은 없사옵니다. 이러하옵기 당신이 주셨을 내 영혼의 건강을 받게 되어서 당신 보호로 보전되도록 나와 내 아는 이들이 힘써왔던들 일찍부터 나는 얼마나 훌륭하게 나을 뻔했나이까. (p54-55)
☞ 진작 더 중요한 영혼의 건강에 대해서는 무심한 것 같다.
그들은 내게 공부를 강요하면서도 푸진 가난, 욕된 영광을 위해 채울 수 없는 욕심을 채우려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을 보지 못했사오나 우리 머리카락을 세시는 당신만은, 배우라고 성화부리던 그 모든 이의 그릇됨은 내 쓰임을 위해 쓰셨고, 배우기 싫다던 내 잘못은 내 벌을 위해 쓰셨으니, 쬐그맣고 어리지만 큰 죄인이 벌 받는 것이 부당하지 않았습니다. (p56)
☞ 무릇 그릇된 것이라도 선으로 바꾸시는 놀라우신 하느님이시다.
나는 당신을 사랑치 않고 당신을 멀리 사음했었고, 사음하는 나를 보고 온 사방에서 ‘좋다 좋다’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세속과의 사귐이 곧 당신을 떠나 사음함이오니 ‘좋다 좋다.’ 소리는 되려 이러지 않는 사람더러 부끄러워하라는 것이옵니다. (p58)
☞ 성경은 우상숭배를 간음으로 비유한다. 여기서 표현된 사음(邪淫)은 곧 간음을 일컬음이고 하느님을 떠나, 하느님을 비방하는 것은 사음이라 할 수 있겠다.
주여, 당신을 기림, 당신을 기림이 당신 글(성경)을 통해 내 마음 덩굴에 열렸던들 어이없는 허탕질로 새들의 더러운 밥이 되어 쪼아 먹히지 않았으오리다. 실로 반역한 천사들에게 희생되는 길이 하나만이 아니로소이다. (p67)
☞ 성경을 읽더라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더러움의 심연 속으로 “당신 눈에서 멀리 굴러떨어졌어도”(시편 31,23) 나는 그런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생각하면 나 자신도 불쾌하게 느끼면서 하는 짓보다 더 더러운 일이 또 있사오리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거짓말로 부모와 선생과 가정교사를 속인 것이 결국 놀고 싶고 되잖은 구경이 하고 싶고 애바르게 그따위를 본뜨고 싶어서가 아니었나이까. (p70)
☞ 애바르게: 이익을 좇아 덤벼드는 데 재빠르게
더구나 나는 부모의 식량고방과 식탁에서 훔쳐내기까지 했습니다. 탐식이 시키기도 했거니와 아이들에게 줄 것을 마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p70)
나 자신은 곧잘 딴 아이들에게 하는 짓이라도 남들이 그런 것을 보게 되면 이보다 못 참는 일이 어디 있으며, 모질게 꾸짖는 것이 아니더이까? 그러면서도 나 자신이 들켜서 비양을 듣는 때는 지기는커녕 도리어 덤비는 것이었습니다. (p70)
☞ 인간의 이중 심리가 아닌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이듯.
속기 싫어하는 성미에 기억력은 초롱초롱하고 말씨도 다듬어졌습니다. 우정에 부드럽고 비애와 비굴과 무지를 멀리했습니다. 나 같은 놈이 그랬다는 것이 놀랍고 기림직한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러하오나 이 모든 것이 내 하느님이 베풀어 주신 것이요 내가 나에게 준 것은 아니온즉 다 좋은 일이요 그 모두가 곧 나였습니다. (p72)
그때 내가 죄를 짓기는 즐기기와 높기와 참스런 것을 그분 아닌 그의 피조물과 나와 여남은 것들에서 찾은 때문이었고, 그로 말미암아 슬픔과 어지러움과 그릇됨으로 굴러떨어지게 되었습니다. (p72)
☞ 죄란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구함으로부터 시작된다.
제2권 타가스테에서 보낸 한 세월(열다섯 때, 369-370)
산산이 조각나 흩어졌던 나를 당신이 거두셨으니, 하나이신 당신한테서 떨어져서 여럿으로 나는 스러져 버렸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한때 나는 지옥을 누림으로써 젊음을 불살랐고 온갖 그늘진 사랑을 우거지게 하면서 부끄럼이 없었고 이리하여 내 아름다움은 가시어 스스로 즐기고 사람들 눈에 들기를 꾀하면서도 당신 눈 앞엔 썩어 문들어지고 말았습니다. (p76)
진흙 같은 육욕과 사춘기의 용솟음에서 안개가 자욱이 일어나 내 마음을 흐리고 어둡게 해주는 바람에 사랑의 맑음을 흐리터분한 정욕과 분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두 가지는 흐리마리 내 가날픈 나이에 열을 뿜고 정욕의 낭떠러지로 끌어가서는 죄악의 깊은 못 속으로 잠그는 것이었습니다. (p76-77)
☞ 흐리마리: 생각이나 기억이 분명하지 아니한 모양. 성인은 회심하기 전 정욕의 낭떠러지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고백록’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겨우 열다섯 때의 일이다.
당신의 분노가 내 위에 세찼어도 나는 그런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죽어야 할 내 운명의 쇠사슬이 철그렁거리는 소리에 나는 귀가 메어(이는 교만했던 내 영혼의 벌) 멀리멀리 당신을 떠나갔어도 당신은 그냥 계시고, 사욕에 흔들리고 들까불리고 나둥그러져 들볶여도 당신은 잠자코 계시었사오니, 아, 더디신 내 즐거움이시여! 침묵만 지키시던 그때인지라 나는 자꾸만 당신 멀리 메마른 비애의 씨앗으로 씨앗으로 가고 있었나이다. (p77)
☞ 들까불리고: 매우 흔들어서 까불까불거리고. 모르는 단어가 너무나 많이 나온다.
당신은 항상 내 곁에 계시면서 인자로이 잡도리하시고, 옳지 못한 내 흥미 위에 쓰디쓴 거리낌을 뿌리시와 즐거움을 찾게 하셨고, 이리 되는 때 당신 이외에 그 무엇도 차지하게 못하게 하셨나이다. (p78)
☞ 잡도리: (잘못되지 않도록) 엄중하게 단속함.
주여, 그러하옵니다. 당신이야말로 괴로움을 주시는 체 엄명하시고, 때리시며 낫게하시고, 죽이시면서 우리를 당신 떠나 아니 죽게 하시나이다. (p79)
내 육체의 나이 열여섯 되던 해, 나는 어디 있었으며 당신 궁궐의 환락을 떠나 귀양살이가 얼마나 오래더니이까. 인간의 파렴치 따라 좋아도 당신 법으로 좋지 아니한 정욕의 광란이 내 위에 홀을 쥐어 나는 그에게 두 손을 다 들어버린 그 시절이 아니었나이까. (p79)
☞ 열여섯 이면 성적으로 조숙했던 것 같다.
고백하는 마음, 그리고 믿음을 말미암은 삶보다 당신 귀에 더 가까운 것이 또 무엇이오리까. (p80)
정욕의 가시덤불이 내 머리에 뻗어 올랐어도 뽑아줄 손이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아비가 목욕탕에서 자칫하면 큰일 날 사춘기의 젊은 내 육체를 보고는 어느새 손자라도 본 듯 기뻐하면서 어미에게 알렸던 것입니다. (p80-81)
어미 가슴에 이미 당신의 궁전과 당신 거룩한 처소의 밑절미(기초공사)를 착수하셨으니 그는 벌써 예비신자였고 그것도 오랜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직 믿음을 갖지 않은 나였지만 “당신께 얼굴 아닌 등을 대고”(에페 2,27) 걷는 빗근 길을 걸을가 하여 내 어미는 거룩한 두려움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습니다. (p81)
☞ 빗근 길: 잘못된 길
철없던 나! 내 주여, 나 당신을 떠나 멀리 갔었거늘 당신이 말 없으셨다고 감히 이르오리까. 정말, 그때 당신이 나한테 침묵만 지키고 계셨더이까. 그렇다면 당신을 믿던 내 어미를 통해 내 귓전에 노래하신 그 말씀들이 당신 것 아니고 누구의 것이었답니까. (p81)
어미는 행여 내가 음행을 범할세라, 누구의 아내를 간음할세라, 제발 그러지 말라고 혼자서 여간 가슴을 태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훈계가 내게는 여자스럽게 보여서 고분고분한 것이 쑥스럽기까지 하였습니다. 그게 모두 당신이 하시는 일이었건만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당신은 침묵하신 채 그만이 말하는 줄로 여겼습니다. 실상 당신은 그를 거쳐 내게 말하시고 그이 안에서 나한테서, 그의 자식, 당신 종의 자식, 바로 당신 종놈한테서 업신여김을 당하셨던 것이었습니다. (p82)
☞ 요사이로 치면 대단한 문제아였다.
아둔한 채 나는 청맹과니로 곤두박질치는 것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같은 또래들이 저희네 죄악을 자랑삼아, 더구나 추잡할수록 더 우쭐대며 얘기하는 것을 듣고는 파렴치 모자람을 부끄러이 여기고 음행을 실천할뿐더러 기려주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p82)
흉잡힐까 두려워 나는 못된 짓을 더하고, 무엇이 빠져서 방탕아들과 겨눌 수 없을 성싶으면 하지 않은 짓까지 한 듯이 꾸며서, 깨끗할수록 못난이, 조촐할수록 얼간처럼 보이지 않으려는 것이었습니다. (p82)
하롱하롱 놀기 위해 내 굴레는 절제 있는 엄격의 도를 넘어 온갖 허랑한 감정으로 늦추어졌고 이리하여 주여, 어둠이 사뭇 내 앞에서 당신 진리의 맑고 깨끗함을 가로막아 내 죄악은 비계에서처럼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p83)
☞ 하롱하롱: (말이나 하는 짓이) 차분하지 않고 달떠서 가볍게 행동하는 모양,
허랑한: 말이나 행동에 거짓이 많고 착실하지 않은
나는 도둑질을 하려 들었고 사실 범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군색에서가 아니오라 정의가 없고 싫고 불의에 배불러서였습니다. 내 가진 것이 넉넉하고 남의 것보다 훨씬 나았건만 이를 도둑질하기는 훔친 물건을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도둑질 자체 그 죄악이 좋아서였기 때문입니다. (p84)
☞ 군색해서가 아니라 도둑질하는 그 쾌감때문에 도둑질을 한 것이다.
이제 내 마음이 당신께 아뢰옵나니, 거기서 찾는 것이 무엇이더이까. 상 없이 못된 놈 되는 것, 내 못됨의 까닭이야말로 못된 뜻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더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그것을 사랑했습니다. 스스로 망하는 것을 사랑하고 내 결함을 사랑하되, 결핍한 것을 사랑함이 아니오라 내 결함 자체를 사랑했습니다.
☞ 술, 도박, 음란 등 스스로 망하는 것을 사랑하는 사랑이 얼마나 많은가!
더럽던 내 마음, 당신의 조임새에서 멸망으로 내달아 파렴치로 무엇보다 파렴치 자체를 욕구했던 것이옵니다. (p85)
하찮은 이런 것들도 즐거움 없는 것이 아니로되, 모든 것을 내신 내 하느님 같진 아니하니 그분 안에 의인이 기뻐하고 그이라야 올바른 이들의 즐거움이옵나이다. (p86)
☞ 요즈음 자주 보는 드라마에도 분명 즐거움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즐거움은 될지언정 올바른 즐거움은 될 수 없다.
죄짓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위에 덧없다고 이른 그 선들 중 어느 것을 얻으려는 의욕이든, 아니면 잃어버릴까 두려워함에서라고 믿어도 좋을 것이옵니다. 이런 것들이 고차적이고 행복을 주는 선에 비겨 하잘것, 보잘것없는 것이기는 할지라도 아닌 게 아니라 아름답고 매력이 있는 까닭입니다. (p86)
☞ 모양이 그를사하게 예쁜 독버섯에 독이 있듯, 죄로 이끄는 것들은 인간을 유혹하는 즐거움이 있다.
나 이제 그 훔치기에서 무엇이 그리도 좋았더냐고 물어봅니다. 그러나 실상 아무런 아름다움도 없습니다. 정의나 예지에 있는 아름다움은 고사하고 인간의 정신 · 기억 · 감각 · 목숨에 있는 그런 것도 없고, 저마다의 자리에서 반짝이는 별들의 아름다움이나 끊임없이 가고 오는 생명의 씨앗이 푸짐한 땅이나 바다의 아름다움이 없을뿐더러 호리내는 죄악에 있는 외지고 이지러진 고움마저 있지 않사옵니다. (p88)
☞ 성인에 따르면 그저 훔질 적의 ‘쾌감’ 그것 뿐이었다.
우악스러운 권력자들은 남들이 두려워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니 그 권능을 무엇이 어느 때 어디서 어디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으오리까. (p89)
☞ 두려워할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시다
무해로운 것 당신 말고 무엇이 또 있으오리까. 악한 자들에겐 그들 행위가 제물에 원수로울 따름입니다. 느리광이는 언필칭 휴식을 안달하나 주님을 두고 실다운 휴식이 어디 있나이까? (p89)
☞ 진정한 휴식은 주님 안에서의 쉼이다.
당신을 등지고, 당신께 돌아감 없이는 얻지 못할 맑고 깨끗함을 당신 밖에서 찾을 때 영혼은 외도를 하게 되는 것이옵니다. (p90)
아, 썩고 썩었음이여! 아, 흉물스런 삶이여! 아, 죽음의 깊음이여! 해서는 안 될 일을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닌 다만 해서는 안 될 일인 그 때문에 한다는 것이 그토록 즐거울 수가 있었겠나이까? (p91)
☞ 전율!
이런 일을 되새기면서도 다시는 두렵지 않은 내 영혼! 내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오리까. 주여, 당신을 사랑하오리다. 당신 이름에 고마이 절하고 기리오리다. 하고많은 내 죄악, 그악스런 내 행실들을 사해 주셨음이니이다. 내 행실을 얼음같이 녹여주신 것이 당신 은혜와 자비요, 다른 죄는 저지르지 않았음 또한 당신의 은혜이니이다. (p91)
☞ 자신이 지은 죄를 고백할 수 있음도 하느님의 은혜이다.
내 영혼의 생생한 추억이 당신 앞에 있으옵니다. 아뢰옵건대 훔친 물건이 아니라 훔치는 그것이 즐거워서 한 짓인 만큼 나 혼자로선 도둑질을 아니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따로 혼자만 즐기는 일이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p94)
당신 안에 지극한 안식과 흔들림 없는 생명이 있사옵니다. 당신 안으로 들어가는 이, “제 임자의 즐거움”(마태 25,21) 속으로 들어가나니 두려워하지 않고 위 없는 행복 속에 더없이 행복하게 머무르리다. 내 주시여, 나는 멀리 길을 잃고 헤매었나이다. 젊던 시절, 당신 든든하심에서 벗어나 스스로 굶는 땅이 되었습니다. (p95)
제3권 카르타고의 학생(열일곱부터 열아홉 살까지, 371-373)
사랑을 주고받음이 내겐 달콤했고 사랑하는 이의 육체를 누릴 수 있으면 더욱 그러했습니다. (p100)
☞ 성인은 어릴 때부터 성에 탐닉한 듯하다.
결국 사랑에 사로잡히려다 그리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나의 하느님, 날 어여삐 여기심이여, 당신은 내 쾌락에 얼마나 좋이 쓸개를 뿌려주셨나이까. 나는 사랑을 받았고, 남몰래 맛보는 사슬에까지 닿아 훗훗한 매듭에 기꺼이 옭혔습니다만 그것은 결국 질투 · 미심 · 공포 · 분노 · 쟁탈 등으로 달구어진 쇠채찍에 얻어맞는 것이었습니다. (p100)
☞ 내연관계에 들어갔음을 말한다.
인간이란 내가 몸소 당하면 질색을 하면서도 슬프고 애달픈 것들을 구경할 제면 거기서 서러워지고 싶은 까닭이 무엇입니까? 구경꾼은 연극에서 오는 서러움을 실감하려 들고, 또 그 설음이 그의 쾌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참 이상야릇한 미침이 아니고 무엇이오니까? (p101)
이 이름! 주여, 당신 아드님, 내 구속자의 이 이름이야말로 당신의 어여삐 여기심으로 내가 아직 어미의 젖을 먹을 때부터 여리고 여린 내 마음이 정성스레 마시고 속 깊이 새겨두어서 이 이름이 없는 것이면 제 아무리 박학 · 세련 · 진실된 것이라도 나를 오롯이 심취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p108)
☞ 어머니 모니카로부터 어릴 적부터 들어 온 그 이름이다.
이러구러 나는 거만하게 미쳐 날뛰는 사람들, 너무나 육체적인 말쟁이들한테 빠지게 되었는데 그들의 입안에는 당신과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를 위로하시는 파라클리토 성령의 이름자를 뒤섞어 얼버무린 끈끈이와 악마의 덫이었습니다. (p109-110)
☞ 성인은 마니교에 빠지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사이비는 온갖 종교의 좋은 것을 그러싸하게 포장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것이다.
그런 이름들이 저들의 입에서 떠나지는 않았지만 혀로 하는 소리, 군소리일 뿐 마음은 참에서 비어 있었습니다. 말로는 줄창 ‘진리 진리’하고, 내게도 으레 그랬지마는 언제 한 번 그들에게 진리가 있지 아니했고 오히려 거짓말을 말하기는 진실로 진리이신 당신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당신의 피조물, 우주의 원소들에 대해서까지 그러했습니다. (p110)
☞ 오늘날 사이비 이단들도 말로는 자기들이 ‘진리’라고 외친다
그즈음 내 안 어디에 계셨길래 나는 당신한테서 멀리멀리 떠돌아다녔고 “내가 깍지로 먹이던 돼지의 깍지까지 거절을 당한 것”(루카 15,16)이더이까. (p113)
☞ 하느님께서는 어버이의 마음으로 늘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하오나 당신은 높은데서 손을 드리우사 깊은 이 어둠 속에서 내 영혼을 끌어내 주셨으니 그때가 바로 당신께 충성된 내 어미가 초상난 집 어미들이 우는 것보다 더 애절하게 나를 위해 당신께 부르짖을 때였습니다. 그는 당신한테서 받았던 신앙과 정신으로 나의 죽음을 보고 있었으니 주여, 당신이 그를 들어주셨나이다. (p125)
당신이 그를 들어주시와 그가 비는 곳마다 울려서 땅을 적시던 그 눈물을 없애지 않으셨으니 진정 그를 들어주셨나이다. (p125)
☞ 어머니의 끊임없는 기도는 그의 영혼을 어둠 속에서 끌어낸 것이다.
당신은 우리 하나하나를 오직 한 사람뿐인 양, 그리고 모든 이를 낫게 하시되 마치 한사람처럼 하시나이다. (p126)
☞ 우리는 키에르케고르의 말대로 ‘하느님 앞에 선 단독자’인 것이다.
그동안 나는 진흙수렁 거짓의 어둠 속에서 일어나려고 애를 쓸수록 더욱 무겁게 갈앉으며 뒹굴었지만, 조촐하고 정성되고 찹찹한 저 홀어머니(이런 이들을 당신은 사랑하시나이다)는 희망이 더욱 싱싱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눈물과 한숨을 늦춤없이 기도할 때마다 나를 두고 당신 앞에서 울기를 그치지 않을 적에 그의 기도는 당신 어전으로 들어갔어도 당신은 아직 그 어둠 속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나를 그냥 두시었나이다. (p127)
☞ 기도의 응답은 때가 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가장 적합할 때 응답해 주시는 것이다.
어미가 울며불며 그저 한 번만 만나서 말해 보라고 치근거리니, 드디어 그는 참다 참다 어이가 없어 하며 “그만 가오, 잘 되겠죠. 설마 이렇게도 눈물을 짜내는 자식이 죽을라고.” 이러더러는 것입니다. 어미는 나와의 대화 가운데서 그때 그 일을 가끔 회상하면서 하늘에서 내려온 소리와 같이 여기곤 했나이다. (p128)
☞ 모니카 성녀와 어떤 주교와의 예화이다. 눈물로 기도한 자식은 그릇된 길로 가지 않는 것이다.
제4권 타가스테와 카르타고의 수사학 교사(열아홉부터 스물여덟 살까지, 373-382)
주여, 스스로 높이는 자들과 아껴 치시는 당신의 매에 상기 아니 맞아 숙이지 않는 자들이 나를 두고 비웃어도 좋삽나이다. 나는 다만 당신을 기리며 내 부끄러운 짓들을 당신께 아뢰나이다. 빌건데 현재의 기억으로 과거의 그릇된 편력을 회상하며 내 당신께 감사의 희생을 드리게 하소서. (p132)
바로 그럴 무렵 나는 한 여성을 두고 있었습니다. 떳떳하게 결혼으로 안 여자가 아니오라 지각없이 들뜬 내 정욕이 찾아낸 사람인 것이 사실이었습니다만 그 사람 하나뿐, 그리고 그에겐 신의를 지켰습니다. (p133)
☞ 내연의 여인을 둔 것 같다. 정욕은 그의 가시같다.
진정한 우정이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어진 사랑”(로마 5,5)으로 당신이 사랑으로 매어주셔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P138)
☞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우정 역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만 가능하다
내 마음의 귀를 당신의 입에 대고 진리이신 당신한테서 말씀을 들을 수 있으오리까? 가엾는 자에겐 울음이 위로가 되는 까닭을? (P141)
나는 불행했습니다. 어찌 나뿐이오리까. 무릇 없어질 것에 정을 붙여 사로잡힌 마음은 다 불행하오니 그것을 잃고 갈래갈래 조각난 마음은 그제야 비로소 제 비참을, 잃어버리기 전부터 비참을 깨닫는 것입니다. (p142)
☞ 없어질 것에 정을 주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미래의 비참도 모른채.
아니 죽을 사람처럼 내가 사랑하던 그가 죽었건만 나에게 인간은 죽을 운명이면서도 살아 있는 것이 이상하고, 또 하나 다른 그였던 내가 그이는 죽어도 살아있다는 것이 더욱 이상했습니다. 누군가 제 벗을 들어 ‘제 영혼의 반쪽’이라 한 말은 옳사옵니다. (p144)
나도 내 영혼과 그의 영혼을 두 몸에 안에 있는 하나로 여겼었고, 그러기에 목숨이 두려워졌습니다. 반쪽으로 살기가 싫었고, 따라서 내가 매우 사랑하던 그가 온으로 죽을 까 두려워 아마도 나 죽기가 무서웠는지 모를 일입니다. (p144)
☞ 죽마고우인 친구를 잃고 성인은 비통해한다. 아마도 많이 사랑한 듯하다.
애타며 한숨지으며 울며 몸부림치느라 안정도 분별도 없었으니, 찢기어 피 흘리는 마음을 안고 있어도 그 맘은 나를 뿌리치기에 어디다 맘 둘 자리를 얻지 못했나이다. 경치 좋은 숲에도, 놀이나 노래, 그리고 향수 풍기는 자리에도, 푸짐한 자니나 아기자기한 안방과 침대며, 심지어는 책들과 시가(詩歌)에도 마음 쉴 자리는 없었습니다. (p145)
☞ 기막힌 표현이다.
주여, 당신께 들어 올려야 나을 영혼인 줄 어찌 몰랐으리까마는 그럴 힘도 그럴 마음도 없었습니다. 당신을 두고 생각할수록 어쩐지 실속 없고 든든치 못한 건만 같았습니다. 그도 그럴 일이, 내 하느님이란 당신이 아니시고 거짓된 꼭두와 내 그릇됨이었던 것입니다. (p145)
☞ 마니교를 신봉하던 때라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았다. 꼭두란 마니교의 헛깨비를 가르친다.
시간이란 그저 턱없이 하염없이 우리 감각을 거쳐 흐르는 것이 아니니, 마음속에 기기묘묘한 일을 해놓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날에 날을 이어 시간은 왔다 갔다 하면서 색다른 희망, 색다른 추억을 내게 심어주고, 이리하여 허전한 나를 그 옛날의 기쁨으로 메워놓아 어느듯 또 다른 슬픔은 가시게 되었습니다. (p146)
☞ 결국 인간에게는 시간이 약인 것이다
당신을 사랑하며 당신 안에서 벗을, 당신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는 이가 복되오니 그이만이 여윌 수 없는 그분 안에서 모든 이를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이를 하나도 아니 여의나이다. 그분이 우리 주이신 당신 아니시고 누구이옵나이까. (p148)
☞ 하느님 안에서 사랑할 때 여윔없이 영원히 그를 사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당신을 버리는 자 말고는 여의는 법이 없사오니, 버리는 자, 그 갈 곳이 어디 오니까. (p148)
☞ 우리가 하느님을 버리지 않으면 하느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만군의 하느님이시여, 우리를 돌이키사 당신 얼굴을 보여주소서. 우리 곧 살으오리다.”(시편 80,4) 그러하옵니다. 인간 영혼이 제 어디로 향하든 당신 아닌 거기에선 괴로움과 마주치게 되옵나니 당신 밖에, 자신 밖에 있는 아름다움에도 그러하옵니다. 실상 당신을 말미암지 않은 아름다움이란 도시 있지 아니한 탓이오니이다. (p149)
☞ 내 영혼은 하느님 없이는 다 허무로다.
나고 죽고 하는 그 아름다움은 나면서 있어지고, 제 한도까지 자라다 도가 차면 늙고 죽삽나니, 죽기는 다 하여도 늙기는 저마다 하는 것이 아니옵나이다. (p149)
☞ 어떻게 이런 번역이 가능할까!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이시여’ 내 영혼으로 하여금 이것들(피조물)로 당신을 찬미하게 하소서. 그러하오나 육체 감각 탓으로 그 사랑의 끈끈이에 달라붙게는 마옵소서. 그것들 가는 곳이 제 죽는 자리옵고, 독기있는 욕망으로 영혼을 찢어놓는 것입니다. 영혼이 그 사랑하는 것들과 있고 싶어하고 그 안에서 쉬고자 하는 탓이옵니다. (p150)
☞ 하느님보다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내 영혼아, 헛된 짓을 그만두거라. 수선스런 자랑으로 마음의 귀를 어둡게 마라. 듣거라. 저 ‘말씀’께서 돌아오라 외치신다. 고요한 안식의 자리가 바로 이곳이니 여기선 스스로 버리지 않는 한 사랑이 여의어지지 않느니라. (p150)
☞ 우리의 구원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주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 ‘말씀’이 말씀하시나니 여기다 네 자리를 잡아라. 여기다 너 지닌 모든 것을 맡겨두라. 영혼아, 속고 또 속아서 오죽이나 지쳤느냐. 진리에게 받은 온갖 것을 진리에게 맡기면 다시 여윌 무엇이 없고, 썩음에서 꽃이 피고, 모든 병이 말짱히 낫고, 약한 데는 새 기운이 돌아 알찬 너를 만들어 주리니, 다시는 너를 저들 고장으로 끌지 않을 것이요, 오직 너와 더불어 꿋꿋이 버티고 있어 항시 계시며 영원하신 하느님 곁에 살리라. (p151)
☞ 우리가 진정 쉴 곳은 하느님 품 안이다. 그 외에는 한탄 헛것에 지나지 않는다.
너 어찌하여 네 살을 쫒느냐? 살이 도리어 너를 좆게하라. 살로써 느끼는 것은 오직 부분일 따름, 너는 그 전부를 알지 못하느니라. 비록 그 부분들이 너에게 쾌락을 주기는 할지라도. (p151)
☞ 진정한 삶은 육이 아니라 영을 따라 사는 삶이다.
죄지은 자들아, 어디 어디로 가고들 있느냐? 덧거친 곳으로? 너희가 사랑하는 선이 그이로 좇아오고 그분께 달렸기에 좋기도 맛나기도 한 것이니, 옳도다. 사랑이 그분을 말미암지 않은 바 없거늘 그분을 버려두고 아니 옳게 사랑하기에 쓰거워 옳도다. (p13)
☞ 사랑이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기에 삶이 쓰라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찌하여 여태껏 그 어렵고 수고로운 길을 걷는 것이냐? 너희가 찾는 거기엔 안식이 없다. 찾을테면 찾아라만 너희가 찾는 곳엔 있지 아니하느니라. 복된 살이를 죽음의 고을에서 찾고 있으니 어찌 거기 있을쏜가? 생명조차 없는 곳에 복된 생활이 어찌 있을쏜가. (p153)
☞ 영원한 안식과 복된 삶은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참 ‘생명’이 이리로 내려오사 우리 죽음을 받아 안으시고 넘치는 당신 생명으로 죽음을 죽이셨느니라. (p153)
☞ 우리의 죽음을 주님께서 받아 안으셨구나!
“사람들아, 고집스런 마음을 언제까지 지닐 것인가?”(시편 4,3) 생명이 내려오셨거늘 너희는 올라가 살고 싶지 않으냐? 그러나 이미 높다랗게 앉아서 “하늘을 거슬러 너희 입을 마구 놀리거늘”(73,9) 오를 자리가 어드매겠느냐, 하느님께 오르내려거든 먼저 내려오라. 그 하느님 거슬러 오르다가 너희는 떨어졌느니라. (p154)
☞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거든 하느님 앞에 겸손해야 한다
무릇 충동의 바탕인 마음의 움직임이 외되서 오만불손하게 거칠어질 때 죄악이 생기고 육적 쾌락의 샘이 되는바, 영혼의 정념이 고르지 못할 때 부끄러운 죄를 범하게 되는 것과 같이 이성적 정신이 흐려질 때 오류와 사견이 도덕생활을 더럽히게 되는 것입니다. (p160)
☞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를 해야되는 것이다.
나는 기 쓰고 당신께 가려 해도 죽음을 맛보기 위해 당신한테서 배척을 당했습니다. ‘당신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스스로 계시는 분 당신 하나뿐이거늘 어리석기 짝이 없게도 내가 그렇노라 하는 것보다 더 교만한 노릇이 어디 또 있으오리까. (p161)
☞ ‘하느님이 어디 있어, 하느님을 믿느니 내 주먹을 믿지’하고 교만을 부리는 자 얼마나 많은가. 하느님은 교만한 자를 가장 싫어하신다.
헷갈리는 내 소리 탓으로 나는 밖으로만 끌려가고, 내 교만의 무게 탓으로 구렁으로만 가라앉는 것이었습니다. 내 귀에 기쁨과 즐거움을 당신이 아니 주시었고, 뼈들이 용약하지도 않았사오니 꺾이지 아니한 탓이었습니다.(시편 51,10) (p162)
이해의 재빠름과 분별의 날카로움이 당신이 내려주신 것이어늘 나는 이것으로 내게 이롭기는 커녕 해가 되고 말았으니 그토록 좋은 재산을 내 것으로만 삼으려고만 애썼을 뿐, “내 힘을 당신 위해 간직하려 아니했삽고”(시편 59,10) 당신을 떠나 먼 지방으로 가서 창녀스런 육욕에다 탕진하려 했던 것입니다.(루카 15,13) (p165)
☞ 주님이 주신 재능을 주님을 위하여 사용할 때 가장 복된 것이다
좋게 쓰지 못할 바에야 좋은 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더이까. 과연 저 학예들이 학문에 힘쓰는 수재들도 깨치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내가 안 것은 그들을 직접 가르치면서였으니 그들 가운데 뛰어나다는 사람이라야 겨우겨우 내 설명을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하와도 이게 내게 무슨 소용이더니이까. (p165)
☞ 하느님이 주신 재능을 옳게 사용하지 못하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좋은 재능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재능을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쓰야한다.
한때 나는 사람들 앞에서 드러나게 모독을 하고 당신께 들이대고 짖어대기를 부끄리지 않았사오나 사실 그렇던 몸, 내 주여, 내게 베푸신 당신 자비를 아뢰고 당신께 비는 것이 이제 새삼 부끄러울 수 없삽나이다. (p165)
☞ 성인이 마니교를 믿었던 시절 하느님을 모독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자비하시고 용서하시는 분, 잘못을 고하는 자에게 용서를 베풀어 주신다.
다시 아뢰옵거니와 그적의 내 재주가 아무리 학예에 재빠르고, 마디마디 헝클어진 책들을 어느 스승 하나 없이 풀어놓았다 해도 경신의 진리에 있어선 볼썽사납고 추잡한 모독에 빠져 있었으니 그게 무슨 소용이더이까. 오히려 당신의 작은 이들이 비록 재주는 둔할망정 당신을 멀리 떠남이 없이 당신 교회의 보금자리에서 안온하게 그 깃이 돋아나고, 건전한 신앙의 영양으로 사랑의 날개를 키워간다면야 손해될 바 무엇이오리까. (p166)
☞ 재주보다 소박한 믿음이 영혼에는 더 유익한 것이다.
오, 우리 주 하느님이시여, “당신 날개 그늘 아래 우리 바라오니 우리를 감싸주소서. 우리를 안으소서.”(시편 63,8) 안아 가시리다. 당신이 안아 가시리다. 작은 이들을 그 머리 휠 때까지 당신이 안아 가시리니 당신이 계셔야만 우리 굳셈이 굳셈이요, 우리 홀로 있을 제면 연약함뿐이로소이다. 우리의 좋음이 당신 안에서만 항시 살거늘 이에서 떠났삽기에 악스럽게 되었나이다. (p166)
☞ 작은 이들을 더 보살피시는 당신의 자비.
돌아가오리다. 주여, 다시는 돌아섬이 없으오리다. 우리의 좋음은 바로 당신, 당신 안에 살고 있어 모자람이 없으리다. 돌아갈 데 없을까 두려워하지 않사오니, 두고 온 자리가 바로 그 곳! 우리 비록 아니 있대도 우리 집 무너지지 않사오니 오, 그 바로 당신의 영원하심이여. (p166)
☞ 주님, 언젠가 돌아갈 곳, 영원한 그 곳을 생각하면 마음이 든든합니다
제5권 카르타고 · 로마 · 밀라노의 교수, 마니교와 결별(스물여덟부터 서른 살까지, 382-384)
당신 이름을 찬미하라고 만들어 놀려주시는 내 혀, 이 혀의 손으로 바치는 내 고백의 향화를 받으소서. (p169)
불안한 죄인들 당신을 떠나 멀리 갈지라도 당신은 저들을 보시며 헤쳐 보시나니 저들과 같이 있는 모든 것이 아름다워도 저들은 더러울 따름이니이다. (p170)
☞ 하느님을 떠나가는 것, 이것이 죄다.
저들이 돌이켜 당신을 찾을진저, 저들이 제 창조주를 버렸으되 당신만을 그 피조물을 버리지 않으셨나이다. (p171)
☞ 어버이가 어찌 자식을 버릴 수가 있을까.
마땅히 돌이킬진저, 이에 거기 저들 마음 안에 당신이 계시옵나니 당신께 아뢰는 이들 마음, 따분한 살이 끝에 당신께 뛰어들어 당신 품 안에서 우는 이들의 마음 안에 당신이 계시나이다. 저들의 눈물을 고이 닦아주실 제 울음은 더욱 북받치고, 그럴수록 울음 속에 즐거움이 있삽나니 주여, 당신은 그 어느 혈육 같지 아니하사 저들을 내시고 고치시고 위로하심이니다, 주여. (p171)
☞ 얼마나 사랑 넘치신 하느님인가!
아, 내 당신을 찾았을 때 나는 어디 있었던고! 내 앞에 당신이 계셨거만 난 나 자신을 떠나 나를 발견하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당신이야 … ! (p171-172)
☞ 자신도 찾지 못하고 하느님도 찾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주여, 당신이 크시오며 낮은 자를 굽어보시되 교만한 자는 멀리서도 아시나이다.”(시편 138,6) 또한 마음이 으스러진 이들만을 가까이 하시고, 거만한 자들에게는 보이지 않으시나니 비록 묘한 재주를 써서 별들과 모래를 낱낱이 세고 천체를 측량하며 성좌의 길을 관측한다 할지라도 당신만은 발견할 수 없나이다. (p173)
일어날 일식을 미리 보면서 현재 있는 제 일식은 보지 못하나니 그런 것을 연구하는 그 재주가 어디로 좇아 오는지를 경건하게 생각지 않는 까닭이옵니다. (p173)
☞ 비록 태산만한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모든 것을 안다 해도 당신을 모르는 사람이면 가엾사오며 알지 못한다 해도 당신만 알면 복된 사람입니다. (p176)
☞ 주님, 당신만 안다면 다른 것 아무 것도 몰라도 복되나이다. 당신만이 모든 것이나이다.
비록 그 높이가 몇 자인지, 폭이 얼마나 넓은지 모를지라도 나무를 간수할 줄 알고 잘 씀으로써 당신께 감사드리는 사람이, 깔축없이 가지를 세고 나무를 재되 이를 차지하지 못하고 그 내신 분을 알지도 섬길 줄도 모르는 이보다 나은 것처럼, 믿는 사람도 이와 같으옵나니 온 천하가 그의 것, 북두칠성이 어찌 도는지는 모를망정 만물이 시종하는 당신께 의지함으로써 그는 아무 것도 아니 지니는 양 모든 것을 가지나이다. (p176)
☞ 인간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가진다 해도 세상을 내신 하느님을 모른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내게 하신 일이 실로 오묘하오니 주여, 이를 당신 친히 하셨나이다. “주께서 사람의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그의 길을 좋이 여기심”(시편 37,23)이오니 손수 만드신 것을 고쳐주시는 당신 손길을 떠나 구원을 얻을 때가 또 어디 있사오리까. (p184-185)
던적스런 때에 찌든 나를 바닷물로부터 당신 은총의 물에 이르기까지 살려두시어, 이 물에 씻기자마자 내 어미, 그 눈물의 강이 마르게 해주셨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당신을 우러러 얼굴 아래 땅을 나 위해 적셨주던 그 눈물이 아니더이까. (p187)
☞ 자식을 위한 어미의 기도는 꼭 들어주시는 자비스러운 하느님이시다.
그는 딴 어머니들처럼, 아니 이보다 훨씬 훨씬 나와 같이 있기를 좋아했고, 내가 없음으로 해서 당신이 어떠한 즐거움을 그에게 마련하실는지 그것을 모르고 있던 것입니다. 모르기에 울고불고하면서 그 고통으로 자신이 하와의 후예임을 보였주었사오니, 울며 낳은 자식을 울음으로 찾고 있었습니다. (p188-189)
그가 얼마나 내게 마음을 쓰고, 또 몸으로 낳아준 것보다 정신으로 그 얼마나한 정성을 기울여 나를 낳아주던가를 좋이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p191)
사실 당신께 올리는 기도가 그렇듯 정성되고 끊임없이 잦을 수가 어디 또 있겠사오리까. (p191)
자비하신 주여, 조촐하게 수절하는 홀어미의 “바숴지고 낮추어진 마음을 업신여기시리까”(시편 51,19). 가난한 이에게 자주 은혜를 베풀고 당신 성인들을 받들어 섬기며 당신 제단의 봉헌에 하루도 빠짐이 없고 날이면 날마다 조석으로 두 번씩 당신 성당으로, 그것도 횡설수설이나 노파의 잔소리가 듣고 싶어서가 아니오라 당신 강론으로 당신을 듣고, 그의 기도로는 당신이 그를 들어주시기 위하여 꼭꼭 나아갔던 그가 아니었나이까? (p191)
이러한 이의 눈물이거늘, 금을 주시라, 은을 주시라, 또는 다른 하찮고 덧없는 복을 주시라 함이 아니요, 오직 하나 제 자식의 영적 구원을 비는 눈물을 당신이 업신여기시리까. 당신으로 해 그러한 사람이 되었거늘 그를 뿌리쳐 아니 도우시리까. 주여, 아니오이다. 오히려 그 곁에 계시와 들어주시고, 미리부터 정하신 일을 차례대로 해주셨나이다. (p191-192)
☞ 성인의 회심은 그의 어머니의 기도의 공덕이다.
죄인들한테서 먼 구원! 그때의 내가 그런 신세였으나 차츰차츰 나도 모르게 그에게 가까워지는 것이었습니다. (p200)
☞ 암브로시우스 성인에게 이끌려 간다
나는 이른바 아카데미파들의 식대로 모든 것을 회의하고 모든 것 안에 들까불리면서 마니교도를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미 몇몇 철학자를 저들보다 월등하다고 본 이상, 잠시나마 의혹을 품은 채 그런 종파에 눌러 있을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 이리하여 나는 내 갈 길을 바로 인도할 어느 확실한 것이 비치는 날까지 내 부모가 당부했던 가톨릭교회의 한 예비신자가 되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p202)
☞ 오래동안 몸담았던 마니교를 떠나 어머니가 그렇게 기도했던 대로 가톨릭교회로 돌아온 것이다.
제6권 밀나노의 교수(서른부터 서른 두 살까지, 384-386)
“내 어릴 때부터 내 희망이여”(시편 71,5) 나에게 당신은 어디 계신 분이더이까. 어디로 가셨더이까. 나를 내신 분이 당신 아니시오며 길짐승과 구별하사 하늘의 날짐승에서 더 지혜로운 나를 만드신 분이 당신 아니시오니까. (p205)
그렇건마는 나는 어둠 속과 살얼음 위를 돌아다니며 나 밖에서 당신을 찾았으나 내 마음 안의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사오니 바다의 심연에 빠진 것이었습니다. (p205)
☞ 하느님은 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밖에서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이승을 뜨기 전에 네가 가톨릭 교인이 되는 것을 볼 것이다. 난 이를 믿는다.” 이것이 그가 내게 한 말이었습니다만 당신께는, 자비의 샘이시여, 기도와 눈물을 곱절 더하여, 어서 나를 도우시고 내 어둠을 비춰주시라 했습니다. (p207)
☞ 죽는 날까지 자식의 회심을 위한 기도, 얼마나 간절한 마음인가.
어미가 암브로시우스를 극진히 위하기는 내 구원 때문이었고, 한편 암브로시우스도 이에 못지않았던 것은 지성으로 성당에 쫓아다니며 선행하는 그 열렬한 신앙태도 때문이었습니다. (p209)
☞ 나는 사제를 얼마만큼 위하고 있는가.
주교는 나를 볼 적마다 연신 그를 칭찬하며 그런 어미를 모시는 내가 복되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만 그의 자식이 어떠한지(일체를 회의하며 생명의 길을 발견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믿던 나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p209)
“인간이 당신 모습을 닮아 당신한테서 창조되었다.”(창세 9,6) 함을 당신께서 인간 육체 형태에 국한되신 것처럼 생각하거나 믿는 것이 아니람을 내가 깨닫게 되었을 때, 비록 신령적 본체가 무엇인지는 조금도 모르고 수수께끼를 더듬는 듯했지만 오랜 세월을 두고 내가 멍멍 짖어오던 일이 가톨릭 신앙이 아닌 육감적 환상에 대한 것이었음에 부끄럽고도 기뻤습니다. 물으면서 배워야 할 일을 헐뜯으며 그렇다 했으니 나는 그만치 무엄하고 못된 놈이었나이다. (p212)
☞ 오늘날 타 종파에 대하여 헐뜯으며 찢어대는 사람들이 귀담아 들을 말이다.
나는 멍청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기뻤습니다. (p213)
하고많은 일이 내가 보지 않고 내 앞에서 된 일이 아니건만 나는 그걸 믿지 않는가. 세계 역사에 있는 그 많은 일들, 내가 보지 않은 고장과 도시에 대한 그 숱한 일, 그리고 친구들, 의사들하며 이런저런 사람들에 대한 무수한 일을 내가 믿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런 부모한테서 태어났다는 것, 들어서 믿지 않고는 알아낼 수 없는 이 사실을 틀림없이 확실하다고 하는 것은 믿음 때문이 아닌가…. (p215-216)
☞ 세상 일은 보지도 않고 믿으면서도,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다고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보지않고 믿기 때문에 믿음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나에게 당신이 확신을 주셨으니 만백성에게 그토록 높은 권위를 띠게하신 그 성경을 안 믿는 자들이 잘못이요, 믿는 자들은 아무 탓이 없다는 것과, 따라서 혹자가 내게 묻기를 이 성경들이 참되고, 조금도 거짓이 없는 하느님의 성령께서 인류에게 내리셨다는 것을 무슨 근거로 아느냐고 하더라도 들어줄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확신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p216)
어느 때는 강하게, 어느 때는 약하게 믿는 것이 사실이었으나 당신이 계셔서 우리를 보살피신다는 것만은 당신의 본체가 어떠한지, 당신께 가는 길, 돌아가는 길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해도 늘 믿어왔던 것입니다. (p216)
☞ 하느님을 믿는 것, 때로는 의심이 들 때도 있지만 그것은 믿음의 과정이다. 성인들도 다 그것을 겪고 극복한 것이다.
맨 이성으로 진리를 찾아 얻기엔 인간이 약하고, 이 때문에 성경의 권위가 필요하고 보면 세상에서 뛰어난 권위를 당신이 성경에서 붙여주신 것은 그로써 당신을 믿고 그로써 당신을
☞ 그러기에 성경에 대한 끊임없는 묵상이 필요한 것이다.
늘 마음에 거슬리던 성경의 불합리한 대목도 이치에 맞게 주석하는 것을 듣고는 그윽한 신비로 받아들였습니다. 누구든 손쉽게 읽을 수 있으면서 이와 동시에 더 높은 지성에겐 심오한 체통을 지니는 그 권위에 더욱 머리 숙여지고, 거룩한 신앙으로 받들어야 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p217)
☞ 권위있는 주석이 필요한 이유.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제 당신은 내 곁에 계시었고, 한숨지을 때 들어주셨고, 흔들릴 때 붙들어 주시며 세속 넓은 길로 갈 때에도 당신은 버리지 않으셨나이다. (p217)
☞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예수님이시다
주여, 이제 나의 회상과 고백을 원하시오니 이 마음을 굽어보소서. 그토록 차지던 죽음의 끈끈이에서 빼주신 내 영혼, 이젠 당신께만 붙게 하소서. 오죽이나 가엾은 내 영혼이었으면 당신께서 그 상처를 아프게 건드려서 모두 팽개치고 당신께 돌아가게 하셨으리까.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시고, 그 아니면 모든 것이 있을 수 없는 당신께 돌아가 낫게 하셨으리까. (p218)
이따위 쓰잘 데 하잘 데 없는 없는 것일랑 다 집어 치우고, 다만 한 가지 진리 탐구에만 마음을 쓰자구나. 인생은 비참이요, 죽는 때는 모르는 것, 때 아닌 때 덮쳐오면 나갈 몸이 어떠할까. 이승에서 게을리한 것을 어디 가서 배운단 말이냐. 오히려 게을렀던 탓으로 벌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p234)
☞ 이제 내 나이 육십 초입, 내가 할 일은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신앙이 세계에 이렇듯 우뚝한 권위를 떨치고 있음이 터무니없고 까닭 없는 일일순 없다. 육체의 죽음과 함께 영혼의 생명이 끝나는 것이라면 이 놀라운 일들을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실 리가 없다. (p234)
☞ 만일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난다면 인류는 엄청난 사기를 당한 것이 아닌가!
나는 주님께 돌아가기를 늦추고 당신 안에 살기를 하루하루 미루면서 날마다 스스로 죽는 길은 미루지 아니했으니 행복한 생활을 사랑하긴 하나 그 있는 자리만은 꺼려하고, 이를 피하면서 찾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p235)
☞ 현세의 복과 내세의 복, 두 마리의 토끼를 찾고 싶은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인지도 모르겠다. 성인도 그런 마음인 듯 하다.
말하자면 여성의 포옹을 거부당한다면 나는 비참하리라 여기고, 이 열악함을 치료하시는 당신 자비의 약은 경험한 바가 없어 생각조차 못한 것입니다. (p235)
나는 그들의 위대한 정신과는 동떨어진 몸이었습니다. 육욕의 병에 걸린 채 치명적인 그 감미에 끌려 사슬에서 풀려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p236)
결혼하여 집안을 다스리고 자녀를 낳아 기르는 신성한 의무에 대해서는 관념이 희박했던 것입니다. 차라리 나는 물릴 줄 모르는 정욕을 채우려는 버릇에 흠뻑 빠져 허덕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p237)
☞ 성인이 육욕의 쾌락에 빠져 있었음이 고백록에 여기 저기에 나온다.
내 죄악은 늘어만 갔습니다. 동거해 오던 여자를 결혼에 지장이 된다는 이유로 곁에서 떼놓고 보니 떨어진 내 마음은 찢어져 상처를 입고 피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당신께 두 번 다시 남성을 알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자기가 낳아준 내 자식을 남겨둔 채 아프리카로 돌아갔습니다. (p240-241)
☞ 그의 아들의 이름은 ‘아데오다투스’다.
그러하오나 이 여자도 따를 줄 모르던 불쌍한 놈은 약혼자를 맞아들일 그 이 년이 지루하고 참을 수 없어 딴 여자를 상관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이 좋아서가 아니오라 육욕의 노예가 된 탓이오니, 그녀를 아내로 들인 것이 아니라 다만 결혼할 때까지 사뭇 계속될 악습의 방패로 내 영혼의 고질이 고스란히 지탱되고 더욱 도수를 높이기 위함일 따름이었습니다. (p241)
갈수록 불쌍해지는 놈은 나였고, 그럴수록 더 가까이하시는 분은 당신이셨으니 진작부터 당신의 오른팔이 나를 진구렁에서 건져내시려 함을 이놈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나이다. (p241)
☞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구렁이에서 건져내려고 하신다.
아, 하고한 길 굽기도 한지고! 당신을 떠나기만 하면 나은 무엇이 얻어질까 바라던 무엄도 했던 내 영혼이여! 등으로, 배로, 옆구리로 엎치락뒤치락해 보아도 모든 것이 고통일 뿐, 오직 당신만이 안식이로소이다. 당신이야말로 늘 곁에 계시사 처절한 방랑에서 우리를 구하시고, 당신 길 위에 우리를 세우시고 말씀하시나이다. “내닫거라. 내가 너희를 안아다 주마. 내가 너희를 데려다 주마. 거기 가 내가 안아주마.” (p243)
☞ 참 안식은 오직 하느님 뿐이다.
제7권 밀라노의 교수, 네오플라토니즘, 사도 바오로(서른 살 때, 384)
한 가지, 나를 당신 빛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란 내가 의지를 지니고 있음이 살아 있음과 같이 분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무엇을 하고 싶거나 말고 싶어질 때, 그 하기와 말기를 남이 아닌 내가 하는 것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느니만큼 여기에 내 죄악의 원인이 있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p253)
☞ 모든 것은 자신의 책임인 것이다.
주여, 분만을 하던 나의 그 진통, 그 안간힘! 당신은 그것을 듣고 계셔도 난 그런 줄 몰랐습니다. (p264)
당신의 귀에만은 내 마음의 울부짖음이 고스란히 다다랐고, 당신 앞에 내 소망이 있어도 내 안광은 나와 함께 아니 있었으니 그것은 안에 있거늘 나는 밖에 있었음이니다. (p264)
☞ 안광: 눈빛
무엇보다 당신께서 내게 보여주고자 하신 것은, 당신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총을 베푸신다는 것과 “당신 성자가 인간이 되사 인간 가운데 사시기”(요한 1,14)까지 겸손의 길로 당신 자비가 사람들에게 드러난다는 것이었습니다. (p266)
☞ 하늘 나라는 겸손한 자들의 것이다.
“당신께서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이를 감추시고, 미천한 자들에게 드러내신”(마태 11,25) 까닭이오니, 수고하고 짐진 이들이 그에게 오면 그이 저들을 쉬게 해주시기 위함이옵니다. 그분은 마음이 겸손하고 양순하기에 유순한 자들을 정의로 이끄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당신 길을 가르치시며 우리 비천함과 수고를 보시고 우리의 온갖 죄악을 사해 주십니다.(p269)
☞ 비천함이 우리를 하늘나라로 이끌 것이다
학식이 높다고 뽐내는 자들은 “너희는 내 마음이 양순하고 겸손함을 내게 배우라. 이에 너의 영혼에 편안함을 얻으리라.”(11,29)는 분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하느님을 알기는 하되 하느님으로 알아 모시지도, 또한 그에게 감사하지도 아니하였으며 오히려 제 허망한 생각에 빠져 그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으니 스스로 지혜롭다 일컽으면서 어리석은 자들이 되어버렸나이다”(로마 1,21-22).
☞ 학식과 교만이 그들을 죽음으로 빠뜨린 것이다.
그것은 나를 만들었기에 내 위이고, 나는 그의 지음을 받았기에 그 아래였습니다. 무릇 진리를 아는 이 그를 알고, 그를 아는 이 영혼을 알며, 그를 아는 것이 곧 사랑이로소이다. (p271)
☞ 하느님을 아는 것, 사랑이다.
‘진리란 도무지 없는 것인가. 유한 · 무한의 공간에 펼쳐 있지 않으니?’ 그때 그대는 먼 데서 외쳤더니라. ‘그럴 리 없도다. 나는 있는 자, 그로다’ 나는 마음에 울려오는 그대로 들었노라. 의심할 여지가 조금도 없었노라. 차라리 내가 살고 있음을 의심할지언정 진리가 아니었다고는 의심할 수 없으리라. 창조된 모든 것을 통해 지성 앞에 보이는 그 진리를.(p272)
☞ 진리란 무엇인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이다.
그대 아래 있는 모든 것을 내 보아하니 아주 있는 것도 아니요, 또 아주 없는 것도 아니더라. 그대로부터 있으니 있는 것이요, 그대가 아닌 것들이니 없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있는 것은 변함없이 있는 그것. 하느님께 의지하여 나는 좋구나. 그대 안에 아니 살면 내 안에도 못 사는 것, 그러나 그대는 그대 자신 안에 살며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도다. 내 좋음이 아쉽지 않으시니 그대 내 님이시로다. (p272-273)
나는 보고 깨달았노라. 그대가 창조한 건 모두 좋은 것, 그대가 내신 것은 본체 아닌 것이 없도다. 모든 것을 같지 않게 내셨기에 모든 것이 저마다 따로 좋고, 한꺼번에 다 좋으니 하느님께서 이 모든 것을 좋게 만드셨음이로다. (p274)
☞ 보시니 모든 것이 좋았도다
성할 제 맛있던 빵도 병든 입엔 고역이요, 맑은 눈에 상쾌한 빛도 앓는 눈엔 싫어짐을 겪어서 아는 바이옵니다만, 이와 같이 삿된 무리는 당신의 옳으심을 싫어하나이다. (p278)
이상도 한 일! 나는 어느덧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당신 대신 꼭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 내 하느님을 누리는 기쁨이 줄곧 오래인 것은 아니었으니, 당신의 아름다우심에 마음에 쏠렸다가도 모르는 사이에 내 무게로 해 당신한테서 미끄러져 나오고, 동시에 비명을 올리며 낮은 데로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무게란 곧 육욕의 버릇이오이다. (p279)
나 겸손치 않아 겸손하신 내 하느님인 예수님을 모시지 못했으니 하물며 그의 약하심이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알 까닭이 없었습니다. (p281)
제법 아는 체 지껄이기도 했습니다마는 우리 구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길을 찾지 아니한다면 나는 알기는커녕 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p285)
주여, 당신이 의로우시거늘 우리는 죄짓고, 악을 행하고, 무엄한 짓을 하여 “당신 손이 우리를 짓누르신”(시편 32,4)탓이오니 우리는 의당히 저 묵은 죄인, 죽음의 왕자에게 부쳐졌습니다. (p287)
가엾은 인간이 이제 무얼 하오리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당신의 은총이 아니고 그 누가 저를 이 죽음의 육체에서 구원하리까?”(로마 7,23-25)
제8권 회심(서른두 살 때, 386)
내 주여, 내게 베푸신 자비 고맙게 되새기며 기리나이다. 당신 사랑이 내 뼛속에까지 “주여, 당신에 견줄 이 누구이리까? 내 사슬을 끊어주셨사오니 찬미의 제사를 올리리이다.”라고 말하나이다. (시편 35,10; 116,16)
당신 말씀이 내 마음 속 깊이 새겨져 어디에서나 나는 당신께 싸여 있더이다.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 대해 나는 비록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일망정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p293)
내가 바라는 바는 당신께 대한 확신보다는 차라리 당신 안에 더욱더 뿌리를 박고자 함이었나이다. (p294)
‘길’이신 나의 구세주, 그분이 내 마음에 즐거웠으나 좁은 문으로 간다는 것이 그리 내키지 않았습니다. (p294)
☞ 정말 솔직하다
너무나 큰 당신의 맛과 내가 사랑하던 당신 집의 아름다움 때문에 다시는 그런 것들이 달갑지 않은 것이었나이다. 그러하와도 여성에게만은 끈질기게 얽혀 있었습니다. (p295)
“하느님의 지식이 없고, 실재하시는 그분을 좋이 보이는 것들에서 발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실로 다 헛되느니라”(지혜 13,1)하셨습니다. (p295)
“하느님을 알되 하느님으로 알아드리지 아니하고, 감사드리지 아니한“(로마 1,21) 불충한 종락이 있사옵고, 나도 한때 여기에 떨어졌사오나 당신의 오른팔이 나를 거두사 건져주시고 낫게 하셨으니, 당신은 ”보라, 효경이 곧 슬기이니“(욥기 28,28), ”슬기로운 자처럼 보이고 싶어 말라“(잠언 3,7). ”저들이 스스로 지혜로운 자라 일컽으면서 어리석은 자가 되었느니라“(로마 1,22)라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나이다. (p296)
☞ 종락: 종자
☞ 하느님을 모른다면 지혜로운 것이 모슨 소용이 있으랴! 모든 것이 다 헛될 뿐이다.
나는 이미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가진 바 모든 것을 팔아서 이를 사들여야 했건만 아직도 망설이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p296)
☞ 그리스도교가 좋다는 것을 알았으나 성인은 아직도 입교를 망설이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병을 앓아 맥박이 불행을 예고할 때, 그를 살리고 싶은 사람마다 마음으로 같이 앓게 되옵나이다. 그가 나아서 다니게 되면 힘은 비록 전만 못할망정 그 기쁨이야말로 성하여 씩씩하게 걸을 때에 비길 바가 아닌 것이옵니다. (p303)
주리고 목마르는 괴롬이 없이 먹고 마시는 쾌락이 있지 않을 것입니다. (p303)
☞ 고통을 통하여 얻는 기쁨은 배가 되는 것이다. 즉 고통이 크면 기쁨도 크다.
아, 그 얼마나 당신은 높음 위에 높으시고, 깊음 안에 깊으시니이까. 언제나 우리한테서 멀리 계실 적 없건마는 당신께 돌아오기 하 어렵도소이다. (p304)
☞ 하느님께 돌아가기란 어렵다. 그러므로 돌아온 사람을 잘 챙겨드려야 한다
주여, 어서 하소서. 우리를 깨워 일으키소서. 불질러 황홀하게 하소서. 향기 풍기사 훈훈하게 하소서. 곧 사랑하리이다. 달려가리이다. (p304)
가난한 이보다 돈 많은 사람이, 천한 이보다 귀한 사람이 당신 집안에서 우대를 받아서야 절대 아니 될 이옵니다. 차라리 당신은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천한 것들, 멸시받는 것들,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없이하려 하셨음”(1코린 1,27-28)이니이다. (p305)
☞ 교회는 가난한 이, 약한 이를 우선으로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은 교회에서조차 소외받고 부유하고 강한 이가 교회 안에서 행세하는 것이 현실이다.
악마가 내 마음을 쥐고 있으니 그것이 쇠사슬이 되었고 나를 묶어놓은 것입니다. 이를테면 삿된 마음에서 육욕이 생기고, 육욕을 따르다 보면 버릇이 생기고, 버릇을 끊지 못하면 필연이 생기게 되는 것이옵니다. 이렇게 서로 뒤얽힌 고리들에 묶이듯이 나는 모진 종살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p307)
☞ 성인을 묶어놓았던 육욕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쇠사슬이 되어 성인을 꽁꽁 묶어놓은 것이다.
땅에 붙매여 있는 탓으로 당신을 섬기기가 싫었던 것이요, 온갖 장애물을 꺼려해야 할 것을 그에서 벗어나기가 무서웠던 것입니다. (p308)
나 또한 당신 사랑에 통째로 나를 바치는 것이 내 욕정에 맡기느니보다 월등 나은 줄을 빤히 보면서도 이것이 좋고 승한가 하면 저것이 즐겁고 나를 묶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p309)
“잠자는 이여 일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깨어나라. 그리스도 너를 비추시리라.”(에페 5,14)하시는 당신, 진리만을 말씀하심을 보여주시는 당신께 대답이 드릴 것이 없었고, 진리에 정복된 몸으로 다만 잠꼬대처럼 느린 소리로 “예, 곧, 이제 곧…잠깐만 참아줍소서.”하고 아뢸 수밖에 없었습니다. (p309)
하지만 그 ‘곧, 곧’은 대중이 없고, ‘잠깐만 참아줍소서’는 오래만 끄는 것이었습니다. 내 육체 안에 있는 법이 내 정신의 법에 항거하고, 내 지체에 있는 죄악의 법으로 나를 잡아 끌어가거늘 인간 내면에서만 당신 법을 즐긴다는 노릇이 헛된 것이었습니다. (p309)
새록새록 번민은 커가도 그렁저렁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당신이 그립기에 성당을 자주 찾았습니다. (p310)
내가 가장 주의 깊게 다루는 것이 그 성경이라고 대꾸했을 때, 그가 이집트의 수도승 안토니우스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대화는 그리로 옮겨졌습니다. 이미 당신 종들에겐 그 이름이 뛰어나게 알려져 있었건마는 그때까지도 우리는 까맣게 몰랐던 것입니다. 이런 줄을 알아채자, 그는 여태 모르는 우리를 이상한 듯 보면서 캄캄한 자들에게 위대한 인물을 길게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깜짝 놀랐습니다. (p312)
저들은 이리저리 걷다가 어느 움집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엔 몇 사람 당신의 종들, “천국이 저들의 것인,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마태 5,3)이 살고 있었는데, 거기서 그들은 안토니우스의 생애를 베낀 책 한권을 보게 되었더랍니다. 그중 한 사람이 읽으면서 감탄 ‧ 감격하기 시작했습니다. (p313-314)
그가 말하는 동안 주여, 당신은 나를 나 자신 안으로 돌이키게 하였습니다. 자신을 살피기가 싫어서 여태 내가 있던 내 등 뒤에서 나를 떼쳐서 바로 내 얼굴 앞에 세워놓으셨습니다. 얼마나 추하고 일그러지고, 더럽고 때 끼었고, 종기투성이인지 보아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자신을 보는 나는 소스라치며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p316)
철딱서니 없고 가엾은 젊은 이놈은 청년기로 접어들면서부터 당신께 빈다는 소리가 “순결을 주소서. 절제를 주소서. 그러나 지금은 마옵소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p317)
당신 뒤를 좇고자 무진 애를 쓰는 나에게 내 영혼이 굽히도록 논리의 채찍을 들어 얼마나 매질했더이까. 하지만 영혼은 듣지 않았습니다. 마다했습니다. 그렇다고 변명을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p318)
도대체 이게 뭐냐? 무식꾼들이 불쑥 일어나서 하늘을 쟁취하는데, 그래 우린 학식을 가지고도 마음 하나가 없어서 이렇게 피와 살 속에 뒹굴고 있구나! 앞서 간 자들을 따라가기가 부끄러워서냐? 따라라도 안 간 것이 부끄럽지 않단 말이냐? (p319)
☞ 하늘 나라를 차지하는 데에는 지식의 많고 적음은 상관이 없다. 오히려 지식이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마음이 육체에게 명령할 때 곧 따르지마는 마음이 제게 명할 제면 듣지 아니합니다. 마음이 손더러 움직이라하면 명령과 복종이 구별되지 않으리만큼 그렇게 쉽습니다. (p322)
내 주 하느님을 섬기고자 오래전부터의 계획대로 내가 해야할 때 하고자 한 것도 나, 말고자 한 것도 나, 결국 나 하나였습니다. 하나고자 오롯하지 않고, 말고자가 또한 오롯하지 못했삽기 나와 싸우고 나 자신이 갈라지게 된 것이니, 본의 아닌 분열이 생기기는 했어도 그것은 나의 영혼의 본성이기보다 차라리 내 영혼의 벌임을 증명해 준 것이더이다. (p324)
그런즉 “이를 행하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사는 죄”(로마 7,17)였습니다. 아담의 후손인 만큼 더욱 자유롭던 죄악의 벌이었던 것입니다. (p324)
나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대는 것이었습니다. ‘자, 이제 하자꾸나, 이제 하자꾸나…’ (p327)
나는 거듭 기를 썼습니다. 행여 바로 거기일 듯, 그리고 닿을 듯 잡을 듯했습니다마는 내가 거기 있는 것도, 닿거나 잡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죽음에 죽기와 목숨에 살기를 망설였던 것입니다. (p327)
내가 사귀어 오던 옛날의 헛된 일, 어리석은 일들이 내 육체의 옷자락을 붙들고 소곤대는 것이었습니다. “우릴 버리고 갈 텐가?” 또 “이제부터 그대와 있기는 영원히 그만이란 말인가?” “이제부턴 이것도 저것도 영영 그대에겐 당치 않단 말인가?” (p328)
결국 그것들은 내 발걸음을 더디게 했으니 내가 몸을 빼쳐 저들한테서 빠져나와 부름 받은 데로 줄달음쳐야 했을 것을, 끈덕진 습관이 나를 향해 “이런 것 없이 네가 살 것 같으냐?”하는 바람에 나는 머뭇거렸던 것입니다. (p328)
어쩌자고 너는 설 힘도 없는 주제가 너에게 기대고만 있느냐? 어서 그분께 너를 내맡겨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네가 넘어질까 저어하여 그분은 몸을 떼실 리 없다. 마음 놓고 너를 던져버려라. 너를 받아 고쳐주시리라.“ (p329)
나는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저 어리석음의 속삭임이 아직 귀에 쟁쟁하여 어리둥절 머뭇거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다시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극기를 하려거든 ‘너 지상의 더러운 네 지체에 귀머거리가 되라’(콜로 3,2). 그것들이 네게 얘기하는 ‘쾌락이란 네 주 하느님의 법과 같지 아니하리라’(시편 119,85) (p329)
깊은 상념이 내 그윽한 속으로부터 나의 비참을 들추어 마음의 얼굴 앞에 쌓아놓자 눈물의 소낙비를 실은 대폭풍이 일어났나이다. 소리라도 내어 실컷 울어보려고 나는 알리피우스를 두고 벌떡 일어섰습니다. (p330)
나는 어느 무화과나무 밑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저 울음보를 터뜨려 놓기가 무섭게 눈에선 강물이 콸콸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p330)
"주여,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주여, 끝내 진노하시려나이까? 행여 우리 옛 죄악을 기억지 마옵소서.“ 나는 그 죄들에 얽혀 있는 것만 같아 애처로운 목소리로 부르짖는 것이었습니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내일 또 내일이오니까? 지금은 왜 아니랍니까? 어찌하여 내 더러움이 지금 당장 끝나지 않나이까?“ 이런 말을 하며 내 마음은 부서져 슬피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p331)
때마침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소년인지 소녀인지 분간이 가지 않으나 연달아 노래로 되풀이되는 소리는 “집어라, 읽어라, 집어라, 읽어라.”는 것이었습니다. (p331)
금새 내 안색이 변하면서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어린이들이 무슨 놀이에 저런 노래를 부르는 일이 있느냐고. 그러나 아무 데서고 들어본 기억이라곤 전혀 없었습니다. 나는 울음을 뚝 그치고 일어섰습니다. 이는 곧 하늘이 시키시는 일, 성경을 펴들자 첫눈에 띄는 대목을 읽으라 하시는 것으로 단정해 버린 것입니다. (p331-332)
집어들자, 펴자, 읽자, 첫눈에 들어오는 구절은 이러했습니다. “폭식과 폭음과 음탕과 방종과 쟁론과 질투에 (나아가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을지어다. 또한 정육을 위해 육체를 섬기지 말지어다.”(로마 13,13-14) 더 읽을 마음도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 말슴을 읽고 난 찰나 내 마음엔 법열이 넘치고 무명의 온갖 어두움이 스러져 버렸나이다. (p332)
☞ 그를 평생 지배하였던 정욕에 대한 주님의 권고 말씀이다. 왜 이 구절이 성인의 회심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는지 ‘고백록’을 읽기 전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고백록을 읽으면서 그가 얼마나 정욕에 빠진 사람이었는 지를 알고는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그 길로 어머니한테 가서 얘기했더니 그는 기뻐해 마지않았습니다. 어찌어찌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그는 즐거워 못 견디며 승리를 노래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빌거나 깨닫는 것보다 더 초월하사 만사를 능히 아시는”(에페 3,20) 당신께 찬미를 드렸습니다. 매양 그가 애처로운 눈물과 한숨으로 빌어 마지않던 그 이상으로 당신이 내게 내리신 은혜를 역력히 보는 까닭이었습니다. (p333)
☞ 평생을 아들의 회심을 위하여 기도해온 어머니의 기쁨은 어떠하였을까!
드디어 당신은 나를 당신께 돌아가게 해주셨으니 나는 아내도, 세속의 어떠한 욕망도 다시는 찾지 아니하고, 다만 당신께서 그 몇 해 전에 나를 들어 어미에게 보여주신 그 믿음의 법강에 꿋꿋이 서 있었습니다. (p333)
그러하옵니다. 당신이 “그의 통곡을 즐거움으로 돌이키셨사옵니다”(시편 30,12) (p333)
제9권 세례, 모니카의 생애와 죽음(서른세 살 때, 387)
주여, “나는 당신의 종, 당신의 종, 당신 계집종의 아들, 당신이 내 사슬을 끊어주셨으니 찬미의 희생을 당신께 바쳐드리오리다”(시편 116,16). 내 마음, 내 혀가 당신을 기릴지며, “내 모든 뼈가 이르되 주여, 당신과 비슷한 자 뉘니이까 할지니”(35,10) 이들의 말에 화답하시고 내 영혼에게 말씀해 주시옵소서. “내가 네 구원이로라.”(35,3)하고. (p337)
아, 내가 누구, 어떤 놈이더이까? 내 한 일에 죄 아닌 것이 무엇이며, 일이 아니면 내 말들, 아니, 말이 아니었으면 내 마음 속에 죄 아닌 것이 무엇이더이까? 그렇건마는 주여, 당신만은 좋으시고 자비로우시고, 당신의 그 오른손은 내 죽음의 깊이를 굽어보시사 내 마음 그 속에서 부패의 심연을 드러내 주시고…한마디로 이것은 곧 내 하고자 하는 바를 하기 싫어하고,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바를 나도 하고자 함이었나이다. (p337-338)
하치않은 맛을 여윔이 뜻밖에도 얼마나 맛스러웠던지, 놓칠까 저어했던 것을 놓아버림마저 벌써 즐겁더니이다. 위 없이 참된 맛 당신께서 그것들을 나한테서 몰아내시고 그 대신 들어오신 때문이오니 혈육에겐 아닐만정, 온갖 진미에서 더 맛스러운 당신, 모든 비밀보다 깊으시면서 모든 빛에서 더 밝으신 님, 스스로 높이는 자에겐 아니실만정 일체의 높이보다 높으신 당신이로소이다. (p338)
☞ 저어하다: 두려워하다
이미 내 마음은 지위를 탐내고 돈을 모으려 하고 쾌락의 옴딱지를 긁으며 뒹구는 들쑤시는 법석에서 자유로웠고, 내 영광, 내 부요함, 내 구원이신 당신, 내 하느님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p338)
당신께서 우리 마음에 사랑의 화살을 쏘아주시매 우리는 당신 말씀을 폐부에 새겨 지녔으니, 캄캄하다 밝아지고, 죽었다가 살게 하신 당신 종들의 모범이 우리들 사색의 품 안에 모여들어 활활거리며 다시는 궁지에 떨어지지 않도록 깊은 잠을 불살라 주었습니다. 그것들은 다부지게 우리를 태워주었습니다. 간교한 혀에서 불어오는 온갖 거슬리는 바람이 우리 불꽃을 더욱 싸게는 할망정 꺼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p340)
나는 무서움에 떨고, 한편 당신 자비에 기꺼하면서 희망에 벅차 있었습니다. 이 모든 감정은 당신 성령이 우리를 보고, “사람의 종락들아, 언제까지 고집하려느냐? 어찌하여 헛됨을 좋아하고 거짓을 말하려느냐?”(시편 4,3)라고 말씀하실 때, 눈과 목청을 통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나이다. 사실 내가 헛됨을 좋아했고 거짓말을 찾아 헤맨 때문이었습니다. (p347-348)
☞ 기꺼하면서: 기뻐하면서
“너희는 치를 떨어라. 죄짓지 말라.”(시편 4,5)를 읽었을 때, 주여, 내 감격이 어떠하더이까? 다시는 죄짓지 않으려고 과거에 대해 나는 치를 떨었습니다. 스스로 옳게 분노할 줄도 배웠습니다. (P349)
내가 나 자신을 한하며 잠자리에서 스스로 뉘우치고, 묵은 나를 죽여 바치며 당신께 바라 새로운 내 삶을 묵상하기 시작했을 때, 그때 바야흐로 당신은 맛스러워지시고 “내 마음 속에 기쁨을 주셨나이다.”(4,8) 나는 이런 말씀을 겉으로 읽고 속으론 깨달으면서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소모하고 시간에 소모될 뿐인 지상의 행복을 다시는 더 키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P350)
당신이야말로 진정 바뀌지 않는 ‘같으신 분!’ 당신 안의 안식은 온갖 수고의 잊음이오니 아무도 당신과 견줄 이 없고, 당신 아닌 다른 하고한 것들을 애써 찾을 것도 없사오니 그러하옵기 “주여, 오직 당신께서 나를 희망 안에 두셨나이다”(시편 4,9) (P351)
그즈음 당신께서 치통으로 나를 괴롭히시어 어찌나 아프던지 말을 못할 지경이 되었을 때 문득 마음에 떠오르기를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일체 건강의 임자이신 당신께 나를 위해 빌어 달라 부탁하고 싶은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납지에 적어 그들에게 주어 읽게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성을 모아 무릎을 꿇자 아픔이 가시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고통이 가셨는지 내 주 하느님이시여, 정말 나는 놀랐음을 여쭈어 드립니다. (P351)
☞ 우리는 한낱 약한 인간일 뿐이다.
당신 교회에서 아름다이 울려 나오는 송가와 찬미가에 몹시 감격하여 울었더니이까! 그 소리와 소리는 내 귀에 스며들고, 진리는 내 마음 안 속속들이 들이배어 경건의 정이 타오르며 눈물이 쏟아져 흐르며 이와 더불어 나는 행복했던 것입니다. (P354-355)
아첨하는 벗들이 우리를 망치는 것처럼, 욕하는 원수들이 흔히 우리를 고쳐주나이다. (p361)
☞ 삶의 아이러니다.
남편은 사랑이 지극한 그만치 성깔도 불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분노하는 남편에게 행위는 물론 언사로도 대항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혹시 남편이 까닭없이 성깔을 부렸을 경우, 그의 성이 갈앉아 조용해진 틈을 엿보아서 비로소 그가 한 짓을 가려내는 것이었습니다. (p362)
☞ 성인의 아버지에 대한 묘사다. 모니카 성녀야말로 현모양처의 대표인 듯.
그의 시어머니도 처음엔 몹쓸 계집종의 수군대는 말질 때문에 그를 못마땅히 여겼으나, 인내와 양순으로 한결같이 받드는 바람에 그만 지고 말았습니다. (p363)
그이는 또한 제 남편을 이승살이 끝판에 당신께 이끌었습니다. 그가 아직 신자가 아닐 제는 참고 기다리다 신자가 된 이상 다시는 울 것이 없었습니다. (p364-365)
그이는 당신 종들의 종이기도 했습니다. 그이를 아는 이마다 당신을 기리고 높이며 사랑했습니다. 거룩한 생활의 결실이 증명하듯 그의 마음 안에 당신이 계심을 느꼈던 것입니다. (p365)
☞ 생활을 통하여 하느님이 드러나야 한다. 그것이 선교다.
그이는 “한 남편의 아내”(1티모 5,9)였으며, 두 어버이를 효도로 섬겼으며, 집안을 신앙으로 다스렸으며, 착한 일에 명망이 높았삽고, 그의 자식들이 당신한테서 멀어짐을 볼 때마다 산고를 겪으며 그들을 길러냈습니다. (p365)
어미는 말했습니다. “아들아, 내게 있어서 세상 낙이라곤 이제 아무것도 없다. 현세의 희망이 다 채워졌는데 다시 더할 것이 무엇인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 세상에서 좀 더 살고 싶어했던 것은 한 가지 일 때문이었다. 내가 죽기 전에 네가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을 보겠다고…, 그랬더니 하느님께선 과남하게 나한테 베풀어 주셨다. 네가 세속의 행복을 끊고 그의 종이 된 것을 보게 되니 그럼 내 할 일이 또 무엇이겠느냐.” (p369)
"내 몸뚱이야 어디다 묻든 그 일로 해서 조금도 걱정들 말거라. 한 가지만 너희한테 부탁한다. 너희가 어디에 있든 주님의 제단에서 날 기억해 다오.“ (p370)
☞ 미사 안에서 잊지 않고 빌어주는 것이 주님의 제단에서 기억하는 것이다
내가 그에게 드린 공경을 그가 나를 섬긴 것에 비기면 무엇이겠나이까? 결국 그의 크나큰 위로를 여의게 된 나이기에 영혼은 쓰라린 상처를 받고, 그와 나와의 하나였던 생명이 찢겨 나가는 듯했습니다. (p372-373)
죄악을 꼬치꼬치 캐지 않으시기에 당신 곁의 한 자리를 믿고 바라는 우리니이다. 누가 있어 정말 제 잘한 일을 당신 앞에서 헤아린다면 당신이 주신 바를 헤아림이 아니고 무엇이겠나이까. 아, 인간은 인간임을 제 알지어다.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할지어다.”(1코린 1,31) (p377)
☞ 주님의 자비를 믿기에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어미가 자비를 베풀고, 그 빚진 자들에게 진심으로 빚을 삭쳐준 줄 아오나, 혹시라도 세례후 오랫동안 진 빚이 있삽거든 당신도 그의 빚을 삭쳐주소서. 삭치소서, 주여, 비나니 삭치소서. 그를 데리고 “심판으로 들어가지 마옵소서”(시편 143,2). (p377)
"자비가 정의를 이길지니“(야고 2,13) 당신 말씀이 참되고, 자비로운 자들에게 당신 자비를 약속하셨음이니이다. 당신이 저들에게 주셨기에 자비로운 자들 되었사오니 당신이야말로 ”어여삐 여기고자 하는 자를 어여삐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고자 하시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나이다.“(탈출 33,19) (p378)
어미로 말씀하오면 그의 해방의 날이 다가왔을 제…우리에게 청한 것이라곤 다만 한 가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가 참여했던) 당신 제단에서 자기를 기억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p378)
제10권 주교가 되고 나서 하느님을 인식하기까지(마흔다섯 살 때, 399)
나를 아시는 분이시여, 내가 당신께 알려졌음같이 나도 당신을 알았으면 싶사옵니다.(1코린 13,12) 내 영혼의 힘이시여, 당신이 이 안으로 들어오사 이를 당신께 맞추시와 때 없고 구김살 없는 영혼을 가지시고 차지하소서. (p383)
이승의 나머지 일들은 더 슬플수록 덜 슬퍼해야 하고, 덜 슬플수록 더 슬퍼해야 하나이다. (p383)
당신 눈앞엔 인간 양심의 심연조차 환히 드러나 있거늘 설사 내 고백하고자 아니한단들 당신 모르실 무엇이 내 안에 있으오리까. 내게서 당신을 숨길 수는 있을만정 당신한테서 나를 숨길 수야 없지 않사옵니다. (p384)
내 한숨이 증명하듯 내가 내게 싫어진 지금에 와선 당신이 내 빛, 내 기쁨, 내 원이실 뿐, 나는 자신이 부끄러워 나를 버리고, 당신을 붙들고는 오직 당신만으로 나와 당신을 기껍게 하고 싶사옵니다. (p384)
신앙과 당신 성사로 내 영혼을 변화시키사, 당신 안에 내가 행복되기 위해 지나간 내 죄악을 이미 씻어시고 감싸주셨사오니, 이 참회록이 읽히고 들리는 때면 마음이 벌컥 일어나서 ‘나는 할 수 없다’고 절망 속에 굴러떨어지는 대신 도리어 당신 자비의 사랑 속에, 그리고 그로써 스스로 약함을 알고, 그로써 약자가 강자 되는 바 당신 은총의 감미로움 속에 깨어나게 되나이다. (p386)
나를 드러내고자 하오니 내 잘한 일에 한숨 돌리고, 잘못한 일에 한숨 짓게 하소서. 내 잘한 일은 모두가 당신의 일, 당신의 은혜, 잘못한 일은 내 죄요, 당신의 심판, 저 일에 숨 돌리고 이 일엔 한숨짓게 하실지니, 송가와 울음소리가 당신 대전에 마치 향로인 듯 형제들 마음에서 올라가게 하소서. (p389)
나를 낳아주시고 돌보시는 분이 바로 그분, 그 당신께서 나의 행복이시며 전능하시며 내가 있기 전부터 나와 함께 계시나이다. (p390)
나는 당신이 섬기라 명하신 그들에게 내가 누구였는지가 아니오라, 현재의 나, 아직 되고 있는 나를 보여주겠습니다. (p390)
흔히 사람들은 높은 산봉우리, 망망한 바다의 물결, 넓은 강의 흐름, 끝없는 대양, 별의 운행을 구경하러 여행을 떠납니다만 자신들에 대해선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p401)
☞ 진작 알아야할 것은 자신이다.
주여, 말게 하소서. 아뢰옵는 당신 종의 마음이 어떤 낙을 누리든 그로써 행복한 줄로 여기지 말게 하소서. (p424)
불신자들에겐 아니 주시는 한 가지 기쁨이 있어 오로지 당신만을 섬기는 이들의 것이오니 그들의 기쁨이 곧 당신이시니이다. 당신을 들어, 당신을 위해, 당신 때문에 기뻐함이 이 바로 행복, 행복이란 이뿐이요, 다른 것은 아니니이다. 다른 것을 행복인 줄 아는 자는 참 아닌 다른 낙을 좇는 것이니이다. (p424-25)
☞ 믿는 이의 참 행복은 ‘주님’이시다.
행복은 곧 참을 즐김이요, 이는 곧 진리이신 당신을 즐김이옵니다. (p425-426)
진리가 반짝일 때 사랑하나 꾸짖을 땐 미워합니다. 속기는 싫고 속이고 싶어하는 그들인지라, 진리가 절로 드러날 제는 사랑하다가 자기네들을 드러낼 제는 미워하는 것입니다. (p427)
내가 당신을 안 적부터 내 기억 안에 계시옵고, 따라서 내가 되새기고 주님 안에 즐거울 때마다 당신을 뵈옵게 되나이다. 이는 당신이 내게 주신 거룩한 법열! 내 가난을 굽어보시는 당신의 자비로소이다. (p428)
내 얼의 임자는 당신이신지라, 이 모든 것이 변해도 주님은 모든 것 위에 초연히 언제나 변함이 없으시고, 내가 당신을 알기 시작한 때부터 황송하옵게도 내 기억 안에 살고 계시나이다. (p429)
☞ 나의 주님은 하느님, 당신이십니다
제 하고 싶은 것을 당신께 듣기보다 당신께 들은 바를 하고 싶어하는 그 종이야말로 충직한 종이니이다. (p430)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p430)
☞ 아마도 ‘고백록’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고, 가장 아름다운 구절일 듯.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 밖에서 님을 찾아 당신의 아름다운 피조물 속으로 더러운 몸을 쑤셔 넣었사오니!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 (p431)
☞ 이 얼마나 진솔한 고백인가!
님과 하나 되면 고생도 쓰라림도 다시 없고, 님으로 찬 내 목숨은 사는 것! 님으로 가득 차야 가벼이 뜨는 것을, 내 아직 차지 못하여 스스로 짐이 되는 것. (p431)
무릇 당신을 덜 사랑하는 자는 당신과 함께 무엇을 사랑하되 당신 때문에 하지 않는 자이옵니다. (p434)
☞ 하느님 때문에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오 사랑이여, 언제나 타며 꺼지지 않는 사랑 내 하느님이시여, 나를 태워주소서. (p434)
습관으로 인이 박힌 온갖 쾌락의 영상들이 생시엔 별 힘없이 덮쳐옵니다만 몽중이면 즐겁다 못해 동의까지 하는 것이 생시와 비슷합니다. 이 환상이 내 육체와 심리에 주는 영향이 어찌나 큰지, 생시 같으면 어림도 없는 허깨비들이 몽중에는 곧잘 유혹하는 것입니다. (p435)
정욕의 끈끈이에서 해방된 영혼이 당신을 향하는 나를 좇게하사 당신을 거스르지 말게 하소서. 꿈에라도 짐승의 환상이 일으키는 더러운 짓을 하지 않고, 더구나 동의함이 없게 하소서. “우리가 구하고 깨닫는 것보다 훨씬 더 주실 수 있는지라”(에페 3,20) 그러한 것, 그까짓 것쯤(이 나이뿐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잠결에도 순결한 감정을 지니게 해 주심이 큰 일이 아닐 것이오이다. (p436)
내 아직 이런 따위의 사증(邪症)이 있음을 아뢰오매 좋으신 님이여, 베푸신 은혜 기쁘다가 두려우며, 다 되지 못한 인간이 섦기만 하오이다. 한갓 바라옵기는 오롯한 평화가 올 때까지 님의 자비가 나를 완성해 주심이니 “죽음이 승리로 빨려들어가 버릴 그때”(1코린 15,54) 나의 안팎 모든 것이 당신과 더불어 그 평화를 얻으리이다. (p436)
☞ 이미 육의 쾌락을 끊었지만 꿈 속에 나타나는 쾌락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자유의지가 아닌 꿈 속의 유혹이야 어찌하겠는가?
세상에 사는 동안은 모두가 시련이라 할 수 있는지라, 설사 누가 나빴다가 좋아졌다 하더라도 좋았다가 나빠지지 않으리라고는 안심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오직 하나 희망, 하나 믿음, 하나의 든든한 약속은 주님의 자비로소이다. (p442)
종교에 있어서 영혼의 구제보다도 다만 알아볼 욕심으로 기적을 바랄 경우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도 이 때문인 것입니다. (p451)
☞ 우리는 얼마나 더 믿음보다는 기적에 솔깃해지는가!
그러나 주 하느님이시여, 내 당신을 겸손되고 순수하게 섬겨 마땅하거늘 ‘원수’는 갖은 암계와 책략을 써서 기적을 청해 보라고 안달하니! 우리 임금님과 우리 고향, 깨끗하고 티 없는 예루살렘을 통해 당신께 비나이다. 지금 내가 그에 동의할 리 만무한 것처럼 매양 멀리, 더 멀리하여 주소서. (p452)
☞ 신앙은 기적을 좇는 것이 아니다. 마귀는 우리 귀에다 속삭이는 것이다. 기적을 좇아라고.
주여, 우리는 당신의 연약한 양 떼이오니 당신이 우리를 차지하소서. 님의 나래를 펴소서. 그 아래 우리 숨으리이다. 오직 당신만이 우리 영광이 되시와, 우리가 남의 사랑과 두려움을 받음이 오직 당신 때문이게 하소서. (p455)
제 아무리 사람의 기림을 바라는 자이기로 당신만 싫어하신다면야 심판하실 제 사람의 변호를 받지 못하고, 벌주실 제 모면해 줄 누구도 없는 것입니다. “죄인이 그 영혼의 원욕에 있어 기림을 받지 못하고, 악을 짓는 자 축복을 받지 못하나이다.”(시편 10,3) (p455-456)
☞ 아무리 세상이 떠 받들고 환호한다고 해도 하느님의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간은 당신이 내려주신 그 무엇 때문에 기려지나이다. 내리신 것을 가지기에 기림을 받는 것이어늘 이보다도 제 자신이 기려지기를 더 즐겨 한다면 그는 당신이 싫어하시는 채 기림을 받는 것입니다. (p436)
주여, 비옵나니 나 자신을 알게 해주소서. 그리하여 나를 위해 비는 형제들 앞에 나의 모자람을 고백하게 하소서. 다시 한 번 나 자신을 깊이 성찰하오리다. (p459)
입에서 나오는 말과 남에게 알려진 일들은 기림을 받고자 하는 마음에 위험하기 짝이 없는 유혹이 되는 것이오니 이것이야말로 제 잘남을 알아 달라고 구차스러운 구걸을 하는 것입니다. (p460-461)
☞ 남에게 기림을 받는 것을 늘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님께 묻자오면서 내가 두루 살피는 이 온갖 것에서 영혼의 안식처라곤 님 안에서밖에 얻지 못합니다. 거기면 흩어졌던 내 모든 것이 거두어지고, 어느 내 것도 당신을 떠남이 없습나이다. (p463)
때로는 아주 엉뚱한 느낌 속으로 나를 끌어들이기도 하시는데 헤아맇 수 없는 그 참맛! 그 맛이 내 안에 옹골차게 되는 날엔 어떠할는지, 그것은 정녕 이승은 아니오리다! (p463-464)
☞ 성인은 탈혼의 상태를 맛본 것이다
인간과 더불어 죽으시되 하느님과 더불어 의로우신 분. 이로써 그분은(의로움의 삯이 생명과 평화인지라) 하느님과 이어진 의로 의화된 죄인들의 죽음을 쳐부수고자 그들과 공통된 죽음을 받기 원했던 것입니다. (p467)
좋으신 아버지시여, “당신 외아드님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죄인들을 위해 내주시기까지”(로마 8,32)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p468)
그는 당신 앞에 우리를 위한 승리자요 희생, 희생이기에 승리자! 당신 앞에 우리를 위한 사제요 제사, 제사이기에 사제! 당신께로 좇아 나시어 우리를 섬김으로써 우리를 종에서 자식으로 당신께 바치신 그분이시니이다. (p468)
☞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신가!
당신 오른편에 앉아 우리 위해 비시는 그분을 보아 내 모든 병을 고쳐주시리, 하는 여기에 진정 내 희망이 굳사오니, 그렇지 않으면 절망하고 말 것이니이다. 크고 많은 병, 그렇습니다. 크고 많사오니 더더욱 큰 당신의 약이 있는 것이옵니다. (p468-469)
당신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살지”(요한 1,14)않으셨던들 인간과는 동떨어지신 줄로 알아 우리의 희망이 끊어질 뻔했습니다. (p469)
하고한 내 죄악, 내 비참에 몸이 떨려 마음속으로 헤아리기를, 광야로 도망이나 쳐볼까 했으나 님은 내 힘을 돋우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를 위해 죽으심은 사는 이들이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말고, 자신들을 위해 죽으신 그 분을 위해 살게 하시기 위함이니라.”(2코린 5,15) (p469)
☞ 앞으로의 내 삶은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함이고 싶다
주여, 내 걱정일랑 당신께 맡기고 “당신 법의 묘함을 생각하오리다”(시편 119,18). 내 둔하고 병든 줄을 님이 아시오니 가르치소서. 낫게 해주소서. 당신의 외아드님,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춰있는”(콜로 2,3) 그분께서 그 피로써 나를 속량해 주셨나이다.(p470)
“오만한 자들이 내게 하리놀지 말 것이니”(119,122) 나는 내 몸값을 생각하고 먹고 마시고 나누어 주며, 저 먹고 배부른 그들 가운데서 나 가난할망정 그분으로 배부르려 하노라. “그분을 찾는 이들이 주를 찬미하리로다.”(시편 22,27) (p470-471)
제11권 창조의 말씀, 시간의 철학
힘껏 마음껏 여러 가지를 아뢰었삽기는 내 주 하느님이시여, 아뢰라 하심이 당신 뜻이었기 때문이오니 “님은 좋으시니이다. 그 자비가 영원하심이니이다”(시편 118,1) (p474)
진작부터 내 소원이 당신 법을 묵상하는 일이었삽기에 나의 아는 것, 모르는 것, 곧 당신 비추심의 첫물과 내 어둠의 끝물을 당신께 아뢰려 했삽나이다. (p475)
☞ 성인의 소원은 성경을 묵상하는 것이었다.
내 생각, 내 혀를 당신께 바쳐 섬기고자 하오니 당신께 바쳐드릴 것을 내게 주소서. 나는 아쉽고 가난한 자, 당신은 비는 모든 이에게 부유하시니 걱정이 없으신 채 우리 걱정을 맡아 하시나이다. (p475)
무엄함과 거짓말에서 내 안팎 입시울을 할례해 주소서. 당신 성경이 맑은 내 낙이 되게 하소서. 그에 내 속지 아니하고 그로써 내 속이지 않으리이다. (p475)
☞ 주님, 저도 같은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님의 법, 그 그윽함을 잠잠히 생각하도록 틈을 주시옵고 두드리며 찾는 이들 앞에 굳이 잠그지 마시옵소서. 허다한 구절들에 투명치 않은 깊이가 있도록 쓰라 하셨음이 결코 뜻없는 일이 아닌지라, 그 숲속에 들어 깃들이며 거닐며 풀 뜯으며 누워서 새김질하는 사슴들이 있지 않사옵니까. 주여, 나를 온전하게 해주시옵고 당신 책의 비밀을 계시해 주시옵소서. (p476)
님의 소리는 곧 나의 기쁨, 그 소리야말로 온갖 낙에서 초월한 것! 주소서 내 사랑하는 바를. … 나는 사랑하고 있습나니 이것마저 당신이 주신 것이니이다. 님의 주심인 것을 버리지 마시옵고 님의 풀을 던져두지 마옵소서. (p476)
님을 실컷 마시며 당신 법의 오묘함을 곰곰이 생각하오리다. 천지를 내신 태초로부터 님과 함께 영원할 나라, 거룩한 그 도시에 이르기까지. (p476-477)
☞ 나도 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 말씀을 묵상하고 싶다. 기쁨에 취하여.
주여, 내 소원이 여기 있사오니 보소서 아버지여, 보시고 살피시고 가상히 여겨주소서. 자비하신 주 대전에 은총을 입사와 당신 말씀의 깊은 뜻이 두드리는 내 앞에 열리게 하소서. (p477)
그분은 당신의 ‘말씀’, 그로써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나도 그 하나. 그분은 당신의 외아드님. 그로써 믿는 백성을 양자로 부르셨으니 나도 그 하나. (p477-478)
☞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느님의 양자가 되었다. 물론 나도 양자가 되었다.
하늘과 땅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그것들은, 우리는 창조되었노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p479)
☞ 우리는 자연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당신이 만들어 내신 것이오니 그것들이 아름답기는 님이 아름다우신 때문, 님이 좋으시기에 그것들도 좋아진 것, 님이 있으시기에 그것들도 있는 것이니이다. (p480)
"당신의 세월은 단 하루.“(2베드 3,8) 님의 날은 나날이 아닌 다만 ‘오늘’! 그 오늘은 내일로 옮지도 아니하고 어제 뒤에 이어지지도 않는 날이니이다. (p492)
님의 오늘은 곧 영원! 이러기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시편 2,7) 말하셨을 때 함께 영원하신 그분을 낳으신 것이니이다. 모든 시간은 당신이 내신 것, 영겁 이전에 당신이 계시오니 시간이 없던 적에 어느 시간도 아니 있었나이다. (p492)
☞ '지금‘이 내가 가진 유일한 시간이다
흘러가는 무엇이 없을 때 과거의 시간이 있지 아니하고, 흘러오는 무엇이 없을 때 미래의 시간도 있지 아니할 것이며, 아무 것도 없을 때 현재라는 시간도 있지 아니할 것이니이다. (p493)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요 현재의 현재는 목격함이요 미래의 현재는 기다림입니다. (p501)
“주님의 자비가 (인간의) 생명보다 크시오니“(시편 63,4) 나의 생명은 덧없는 것, 당신의 오른 손이 나를 오직 한분이신 당신과 여럿인 우리의 중재자, 곧 사람의 아들이신 우리 주 안에 받아들이셨습니다. (p517)
알아듣는 자 당신을 기리게 하시고, 못 알아듣는 자도 기리게 하소서. 당신은 얼마나 높으신고! 겸손한 마음이 당신 집이로소이다. 넘어진 자를 당신이 일으키시매 그들은 넘어짐이 없사오니 그들의 높음이 당신이신 까닭이니이다. (p520)
제12권 창세기 1장1절과 2절의 풀이
미천한 내 혀가 당신의 높으심을 찬미하오니 하늘과 땅을 당신이 만드셨음이니이다. 우러러보는 하늘, 딛고 선 땅, 내 지니는 흙덩이가 좇아 나온 땅, 이게 다 당신이 만드신 것입니다. (p524)
어둠 속으로 굴러가 나는 어두워졌어도 그 속에서, 그 속에서도 당신을 애톳이 사모했습니다. 길을 잃었을 적에도 당신을 생각하고, 등 뒤에서 돌아오라시는 당신 소리를 들었건만 소란한 것들의 법석 탓으로 간신히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p533)
허덕이고 할딱이며 이제야 샘이신 당신께 돌아가오니 아무도 나를 막을 자 없나이다. 이 물을 마시고 내 살리이다. 나 스스로 나의 목숨이 되지 말아야 하올 것이, 나대로 사는 것이 잘못이었고, 내가 곧 나의 죽음이었으니 당신 안에서 지금은 다시 사나이다. (p533)
말씀하소서. 당신께서 내게 말씀하소서. 내 당신의 성경을 믿사오나 그 말씀이 너무나 신비스럽나이다. (p533)
☞ 신비스러운 성경 말씀을 일생 한 번은 꼼꼼히 읽어보아야 한다.
주여, 당신은 세찬 목소리로 내 마음의 귀에 말씀하셨나이다. 당신이 영원하시고 당신만이 불멸을 지니신다고. (p533)
심오한지고 당신의 말씀, 그 거죽은 우리가 보기에 어린이들조차 솔깃해지는 것 같으나 주여, 오묘한 길이니이다. 깊은 오묘함이니이다. 엿보기조차 두려운 일입니다만 이는 존영에 떪이요, 사랑에 떪이로소이다. (p539)
우리의 노력이 얼마나 하고, 시간이 얼마라야 당신의 책을 모두 풀이할 수 있으오리까? 그러기에 나로 하여금 그저 짤막하게 당신 말씀을 풀이하게 하소서. 가지가지 의견이 나올 수 있는 대목에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온다 해도 당신이 참되고 확실하고 좋다고 감도해 주시는 오직, 하나만을 고르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 고백이 진실되게 해주심으로 내가 당신의 종이 느낀 것을 말할 수 있다면 옳고 매우 좋은 일! 이것이 바로 내 힘써야 할 일인 것입니다.(p573)
제13권 창세기 1장2절과 3절의 상징적 풀이
나를 내신 당신, 나의 자비시여! 나는 당신을 잊었어도 당신은 나를 저버리지 않으시나이다. (p577)
주여, 당신은 나의 모든 죄업을 씻어주시어 당신을 배반한 나의 손에 벌을 내리지 않으셨고, 오히려 나의 모든 선업에 앞서 나를 만드신 당신 손으로 갚음을 내려주셨나이다. (p577)
나 있기 전에 당신이 계시고, 당신께 존재를 받을 가치가 전혀 없던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건마는 나를 있게 하심은 오로지 당신의 자비, 그 자비가 나를 내시기 이전에, 내실 제 쓰시던 것 이전에 있었던 것이니이다. (p578)
☞ 내가 있음은 오로지 주님의 자비 덕분이다
당신을 섬김이 무슨 땅을 가꿈이나 같아서 내가 아니 가꾸면 당신이 묵게 되시는 바도 아니오이다. 오직 당신을 섬기고 받들고자 함은 당신으로써 내 행복이 있으라 함이오니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바탕이 당신이시기 때문이니이다. (p578)
언제나 당신께 가까이하는 자 복되오니, 귀의로 얻은 빛을 당신을 등짐으로 잃지 아니하고, 캄캄한 심연과 같은 생활로 두 번 다시 떨어짐이 없으오리다. (p580)
우리의 빛이신 당신을 등짐으로 한때는 그 생활에서 어둠으로 있었나이다. 그리고 오직 당신 안에서 하느님의 뫼들인양 당신의 정의가 되기까지 스스로의 어둠의 찌꺼지 속에서 싸우고 있으오니 옛날의 우리는 깊은 심연처럼 당신의 벌감이었음이니이다. (p580)
산다는 것, 복되게 산다는 것은 오로지 당신 은총에 달렸을 뿐, 곧 좋게도 나쁘게도 더 변할 리 없으신 그분께로 돌이켜 좋아짐인 것이니 그분이 오직 당신 한 분, 홀로 순일하시기에 산다는 것, 복되게 산다는 것이 따로이 없으시어 바로 행복 자체이시니이다. (p581)
내가 이미 믿었듯이 하느님을 삼위이신 줄 믿으면서 당신 성경에서 찾아보니 이에 당신의 ‘성령이 물 위에 움직이시더라.’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하느님이야말로 성부·성자·성령 삼위시오,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이신 것입니다. (p583)
당신을 내게 주소서. 나에게 당신을 도로 주소서. 보소서. 사랑하고 있나이다. 그러나 모자라면 더더욱 사랑하리이다. 이 목숨 있는 날까지 당신 품으로 달려가고, “당신 얼굴의 그윽함 속에 묻히기까지”(31,21) 물러서지 않으려면 그 사랑이 얼마라야 하고, 얼마가 모자라는지 나는 알아서 잴 수 없나이다. (P586-587)
한 가지 다만 아옵기는 당신을 멀리하고는 내 안에서 나 밖에서나 나는 불행한 것, 내 하느님 아닌 어느 푸짐도 내게는 아쉬움인 것이니이다. (p587)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 어디로 이끌던 그리로 내가 가오니 당신 은혜에 타는 우리, 위로 자꾸만 타오르나니, 타면서 가면서 마음의 오름길을 올라가며 참예(參詣)의 노래를 부르나이다.
☞ 참예(參詣): 하느님에게 나아가 뵘
당신의 불, 좋으신 당신의 좋은 불에 타면서 가오니 예루살렘의 평화를 향해 위로 가기에 ‘주님의 집으로 가리라.’ 말하는 그것이 기쁘기에 그러하니이다. 거기 좋으신 뜻이 우리를 두시리니 무궁토록 거기에 머무는 것 외에 아무것도 더 바랄 것이 없으리이다. (p588)
우리는 봄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빛이 된 것이니 희망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보이는 희망은 희망이 아닌 것.”(로마 8,24) (p592)
주여, “어린이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당신의 찬미를”(8,3) 다하소서. 이렇듯 교만을 쳐부수는, 이렇듯 제 죄를 두둔하면서 당신과 화해에 맞서는 원수와 변호자를 쳐부수는 책을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p596)
주여, 이다지도 나의 고백을 강요하고, 내 목덜미를 당신 멍애 아래 숙이게 하고, 바라는 것 없이 당신을 섬기게 하는 순수한 말씀은 딴 데서 보려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p597)
비록 영적 인간이 되어 그를 내신 분의 모습을 따라 하느님의 인식으로 새 인간이 되었을지라도 법을 지킬 따름이요 심판관이 아니어야하므로 그는 영의 인간, 육의 인간을 가려내는 심판도 하지 아니합니다. (p615)
영의 인간은 이 세상의 시끄러운 족속도 판단하지 아니하오니 밖에 있는 이들을 심판함이 어찌 그의 일이오리까. 이들 중에는 누가 당신 은총의 감미로움에 다다를는지, 또 누가 불신의 영원한 쓴맛에 머무를지 모르지 않나이다. (p615-616)
☞ 심판은 하느님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
"아, 사람아, 성경의 말이 곧 내 말이다.“ (p629)
우리가 하는 일은 당신 은총으로 좋은 것, 그것은 영원하지 못하오나 그것 다음에 우리는 크옵신 당신 성화 속에 안식하기를 바라나이다. (p638-639)
당신은 아무런 선도 아쉽지 아니한 지선, 항상 고요하시니 고요함이 바로 당신이심이니이다. 그 누가 그 누구에게 이를 깨우쳐 주오리가. 어느 천사가 천사에게, 어느 천사가 인간에게 이를 깨우쳐 주오리가. 당신께 빌어야 할 일, 당신 안에 찾아야 할 일, 당신께 두드려야 할 일이오니 오직 이럼으로써 받아지리이다, 얻어지리이다, 열리리이다. (p639)
☞ 하느님은 궁극에는 내가 찾아야 한다
3. 이 책을 읽고 앞으로 내 삶에서 실천할 것
- 창세기부터 요한묵시록까지 읽고 묵상하는 것을 내 일생의 소원으로 삼겠다.
첫댓글 "오직 당신을 섬기고 받들고자 함은 당신으로써 내 행복이 있으라 함이오니,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바탕이 당신이시기 때문이니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 기념일에 좋은 글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을 올리고 보니 성인의 축일이네요..^^*
" 진리를 아는 이 그를 알고, 그를 아는 이 영혼을 알며, 그를 아는 것이 곧 사랑이로소이다."
하느님은 아는 것은 모든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인간은 결코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존재이며
당신을 등지고, 당신께 돌아감 없이는 얻지 못할 맑고 깨끗함을 당신 밖에서 찾을 때 영혼은 외도를 하게 되는 것이옵니다. (p90)
당신은 우리 하나하나를 오직 한 사람뿐인 양, 그리고 모든 이를 낫게 하시되 마치 한사람처럼 하시나이다.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지기님 수고 하셨습니다. 두번이나 준비해서 올리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책은 어렵습니다. 어머니의 간절함을 묵상합니다. 감사합니다.
예, 중간에 파일이 날라가는 바람에 다시 작업하느라 힘은 들었지만 '고백록'을 좀더 깊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힘드셨겠네요^^
그만큼의 보람된 작업이셨고
나눔을 통해 큰 기쁨 얻으셨으리라 미루어 짐작이 됩니다^^
짧은 시간에 읽으려는 욕심은
버리고 두고 두고 음미하며
되새김질 해야 될 마음의
양식이네요.
한번 더 노고를 치하드립니다^^
이 유명한 책을 이제야 읽었다는 부뜻한 마음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