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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2세의 장제전 라메세움
람세스 2세가 세운 룩소르 신전의 탑문과 오벨리스크. 원래 오벨리스크 한쌍이 있었는데 1819년 프랑스가 그 중 하나를 가져가 버렸다
람세스 2세의 제 1 정비 네페르타리 (왕비의 계곡 QV 66 묘)
람세스 2세의 건축물 중 걸작으로 손꼽히는 아부심벨 암굴 사원
람세스 2세의 미라
고대 이집트 9. 왕中왕 람세스 2세(제 19왕조 3대왕)
“(카르나크 신전에서) 거인들의 도시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오랜 전쟁으로 멸망한 거인들이 자신들이 존재했었노라고 남긴 신전 같았다.”
“드로베티(프랑스를 위해 일했던 유물사냥꾼)의 부하들이 룩소르를 향해 서둘러 가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발굴권을 얻기 위해서라도 그들보다 룩소르에 빨리 도착해야 한다. 자칫하다간 탐험할 권리도 드로베티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
“룩소르(고대의 테베)를 떠나 필레의 신전에 가기로 했다.”
“(누비아, 아부심벨에서)우리는 가장 웅장한 신전으로 들어갔다. 이런 신전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신전 내부의 열기는 대단했다. 손에서 배어나오는 땀 때문에 우리는 금방 젖어버렸다.”
“신성한 계곡(현재의 왕들의 계곡)은 크루나에서 시작해서 남서쪽으로 이어지다 정남쪽으로 뻗어간다. 이 계곡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오직 2가지다. 관문처럼 생긴 바위를 통과하여 들어가거나 울퉁불퉁한 산길을 따라가야 한다.”
“(람세스 2세의 아버지 세티 1세의 암굴묘에서) 눈앞에 아름다운 방, 아름다운 벽화 그리고 히에로글리프(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보였다. 안으로 들어 갈수록 벽화들의 보존 상태는 점점 좋아졌다. 묘실 중앙의 석관 앞에서 넋을 잃었다. 설화 석고로 만든 석관은 매우 정교하고 아름답다. 이런 것은 세상에 다시없을 것이다.”
-영국을 위해 일한 19세기 전설적인 탐험가, 지오반니 벨조니(1778~1824), <벨조니의 여행> 중에서-
만일 당신이 이집트에 가게 된다면 당신은 람세스 2세라는 인물과 매우 자주 마주치게 될 것이다. 나일강 하구 델타 삼각지에 위치한 피람세스(람세스의 집이라는 뜻으로 세티 1세가 세우기 시작한 새 수도. 그의 아들 람세스 2세 때 완성된다.)의 유적지로부터 이집트 최남단에 있는 아부심벨 신전까지, 답사하는 내내 당신은 람세스 2세의 엄청난 자기과시에 질려버릴 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새 그에게 세뇌된 당신의 모습을 발견할 런지도.
“고대 이집트하면 람세스 2세지.”
이쯤해서 장본인을 만나러 카이로에 있는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 2층으로 간다. 이집트 고고학이 흥미진진한 이유는 역사적인 인물들을 실제로 대면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특유의 매부리 코, 뼈를 감싸고 있는 섬세한 근육, 헤나로 염색한 붉은 머리카락, 그리고 단정히 채색된 손톱.......67년간(재위기간 90년이었던 6왕조 페피 2세 다음으로 장기집권)의 정력적인 정사(政社)를 마치고 이제 막 잠든 듯하다.
18왕조 최후의 왕 호렘헤브는 생전 그의 측근의 자녀였던 피람세스를 군사령관에 임명하는 한편 그가 왕위를 계승하도록 했다. 호렘헤브 사후 피람세스는 즉위와 동시에 그의 이름을 람세스로 개명했는데, 그가 바로 19왕조 초대 파라오 람세스 1세이다. 보위(寶位)에 오른 람세스 1세는 이미 고령이었던지라 고작 20개월 군림하고는 아들 세티 1세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세티 1세의 통치는 약 12년간 지속되었는데, 전술했듯이 파라오가 되자마자 수도를 피람세스로 이전하였고 영토 확장을 위해 군사원정도 나갔으며 오시리스 신을 위한 아비도스의 신전과 카르나크 신전의 열주실 그리고 왕들의 계곡에서 가장 화려한 자신의 암굴묘(KV17)를 건축하는 등 이집트의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 전심전력을 다했다. 요컨대 세티 1세가 19왕조의 기반을 다졌기 때문에 그의 아들 람세스 2세가 고대 서아시아의 태양왕(Le Roi Soleil)으로 위세를 떨칠 수 있었던 것이다.
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전설의 대왕 람세스 2세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는데, 그의 67년간의 방대한 치적을 모조리 여기에 실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굵직굵직한 업적 몇 가지 소개하는 정도에서 그치더라도 부디 노여워하지 마시길.
“나는 전차를 타고 나섰다. 나는 혼자서 적군을 헤치고 들어가 긴 칼을 휘두르며 적들을 향해 돌진했다. 나는 불길 같았다. 화가 나는 매 같았다. 먹이에 달려든 사자 같았다. 나는 그 누구도 멈출 수 없는 대단한 전사였다. 나의 근처에 있는 것은 모조리 불에 탔다. 나는 수백만의 적군에 맞서 싸웠고 그들을 무찔렀다. 보병과 전차병들의 목이 잘려 나갔다. 나는 죽이고 또 죽였다. 적들은 모두 피 웅덩이에 쓰러졌다. 나는 강렬한 호흡으로 외세의 모든 영토를 삼켜버렸다. 나의 무용에 힘입어 이집트는 승리했다.”
-아부심벨 등등 모든 사원 부조에 적힌 람세스 2세의 기록-
즉위 5년, 이 혈기왕성한 젊은 파라오의 이집트는 무와탈리가 이끄는 호전적인 히타이트(현재 터키 남동쪽 지방)와 카데쉬에서 맞붙게 된다. 카데쉬는 근동 지역의 무역 중심지면서 동시에 시리아 진출의 요충지로, 카데쉬를 차지하는 자는 BC 13세기 서아시아 전체 지배자로 부상하게 될 터였다. 싸움이 가까워졌을 때 람세스 심복들은 사막에서 망을 보고 있던 2명의 베두인 족을 체포하여 히타이트 왕의 행방을 물었다. 히타이트 첩자들은 파라오에게 무와탈리는 멀리 있으니 안심해도 좋다고 했고 람세스는 이 말을 그대로 믿고는 느긋이 휴식을 취했다. 얼마 후 람세스의 부하들은 두 명의 첩자를 더 생포했는데 이때는 벌써 히타이트군이 바로 강 건너에서 공격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몹시 당황한 파라오는 지원부대를 요청했다.
“히타이트 군대는 카데쉬 남쪽의 강을 건넜다. 적의 공격에 대해 꿈에도 생각하지 않던 람세스의 군대는 깜짝 놀라 혼비백산하며 줄행랑 쳤다.”
-람세스쪽 서기의 기록-
람세스는 운이 좋았다. 이집트의 군대가 전멸 직전 상태에 몰려 있을 때 증원부대가 도착하여 히타이트에 반격을 가했고 이집트군은 가까스로 패배를 면했다.
아마도 독자들은 어리둥절할지도 모른다. 부조의 기록은 승리했다고 전하지 않은가?!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왕도 결국은 정치가인 셈이다. 그는 역사를 왜곡하여 자신이 전쟁에서 이겼노라 모든 사원에 기록했다. 무와탈리 역시 사실을 날조하여 히타이트군이 압도적으로 승리했다고 알렸다.
그러면 카데쉬 전투의 실상은 어땠는가?! 무승부 혹은 이집트군의 약간의 열세 정도?! 명확한 승패를 내진 못했던 것 같다. 이집트와 히타이트, 양측 모두는 매우 지친데다 더 이상의 싸움이 부담스러워진 나머지 평화협정을 체결하게 되었고, 이후 람세스 2세가 하투실 3세의 장녀를 4번째 아내로 맞이함으로써 양국은 사태를 매듭짓는다.
“나 위대한 히타이트의 왕은 이집트 왕 람세스와 평화협정을 맺고 형제애를 나눌 것이다.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모든 백성들도 우리처럼 영원히 평화롭게 지내야 함을 명심하라.”
-카르나크 신전에 기록된 협상 필사본-
왕가의 평화, 난민의 본국 송환, 사면 그리고 상호방위 등등을 다룬 이집트와 히타이트 간의 협정은 오늘날 세계 최초의 강대국 간 평화조약이라 일컬어지며, 현재 그 복사본은 UN에 있다 한다.
카데쉬 전투로 전쟁에 신물이 난 람세스 2세는 이후 모든 군사 원정을 관두고 건축에 정력을 기울인다. 타고난 정치가였던 그에게 건축은 그야말로 최고의 선전도구였다. ‘새로운 사원을 짓는 한편 기존 유적의 외관을 유지 보수하며 나의 위대함을 보이리라. 그러면 백성들은 나를 칭송하리라.’ 파라오의 건축 사업의 의도는 이랬다. 그의 계획대로 북쪽의 나일강 삼각주에서 남쪽에 누비아에 이르기까지 전 이집트는 람세스 2세의 홍보물로 뒤덮였다. 그는 테베 서안 쿠르나에 있는 세티 1세때 짓기 시작한 장제전을 마저 완성했고 기존의 신전들을 능가하는 라메세움(람세스 2세의 장제전)을 세웠으며 카르나크 신전과 룩소르 신전도 대규모로 중축했다. 현존하는 룩소르 신전의 절반은 18왕조 아멘호테프 3세가 세운 것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람세스 2세가 지었다.
주옥같은 건축물 중 역시나 불후의 명작은 누비아에 있는 아부심벨 사원일 것이다. 이 아부심벨을 서구 사회에 처음으로 소개한 이는 오늘의 이야기 초반부에 등장했던 그 지오반니 벨조니이다.
“룩소르(고대 이집트의 테베)를 출발한 지 5주 만에 우리는 아부심벨에 도착했다. 수천 년간 쌓인 모래 더미가 입구를 막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을 몽땅 불러다 일 시킨다 할지라도 족히 12달쯤 걸리지 않을까 싶다.”
-1817년 6월 29일 지오반니 벨조니-
벨조니는 대대적인 청소작업에 돌입했다. 그는 우선 신전 입구에 장벽을 설치하여 모래가 더 이상 유입되지 않도록 했으며 인부들을 불러 모래를 파냈다. 1817년 8월 1일, 파라오 시대 이후 처음으로 신전의 내부가 드러났다. 벨조니 일행은 천천히 아부심벨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재빨리 횃불을 끄고 정오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한낮의 태양이 신전 안을 고루 비추자 엄청난 규모의 석상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일행은 대열주, 전실을 지나 아부심벨의 가장 깊숙한 곳인 지성소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신이 된 람세스 2세가 태양신 라호라크티, 신들의 왕 아문라, 그리고 멤피스 신학의 창조신 프타와 함께 앉아 있었다. 벨조니는 이 기상천외한 암굴 신전을 빠짐없이 기록하여 세상에 알렸고 이후로 아부심벨은 유명한 유적지가 된다.
“태양도 네페르타리 그대를 비추기 위해 존재 하나니.......”
람세스 2세는 일평생 정실부인 4명 외에 측실 6명을 두었고 그의 하렘엔 언제나 500여명이 넘는 후궁이 있었다.(그는 15세에 처음으로 하렘을 받았고 그의 하렘엔 이집트 여인, 누비아의 흑인, 바빌로니아와 리비아의 백인 등등 미인들이 즐비했다한다.)그러나 그가 가장 총애한 여인은 그의 나이 14살에 결혼한 제 1 왕비 네페르타리(아름다운 여인이라는 뜻)였고 그래서인지 그가 남긴 건축엔 심심치 않게 그녀가 등장한다. 아부심벨 북쪽에 있는 네페르타리를 위한 소신전이 이에 대한 강한 방증이 되리라. 소신전 입구에는 태양신 라의 딸이자 사랑, 음악, 기쁨의 아름다운 여신 하토르 즉 람세스의 왕비 네페르타리에게 바친다는 문구가 적혀져 있다. 신전 정면엔 6개의 조각상이 있다. 2개는 네페르타리이며 4개는 람세스 자신인데 왕과 왕비의 조상(彫像) 크기는 동일하다. 고대 이집트에서 이토록 왕의 사랑을 받는 왕비는 없었다.
우리는 왕비들의 계곡에 위치한 네페르타리의 무덤(QV66)에서 람세스 2세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다시 한 번 엿볼 수 있다.
아래는 일전에 우연히 보게 된 다큐에서 여성 고고학자가 남긴 감상이다.
“전체적인 규모는 소박하지만 벽화의 화려하고 풍부한 색조에 감탄을 자아내게 되지요. 무덤의 주인은 마치 화가와 결혼한 것 같습니다. 이는 왕이 왕비에게 바치는 사랑의 헌사일 겁니다.”
그렇다면 네페르타리는 어떻게 바람둥이 람세스 2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남편의 무분별한 여성편력에 속내인들 편했겠냐마는 그녀는 한 번도 질투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이 여자를 고를 때마다 성대한 연회를 베풀며 품평까지 해 주었고 왕의 여인들과도 사이좋게 지냈다. 이러니.......람세스 2세는 네페르타리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현명한 처신 덕분에 그녀는 사후에도 누비아의 훌륭한 장제전과 왕비의 계곡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안식처를 소유할 수 있었다.
람세스 2세의 엄청난 여복(女福)에 대해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는 그의 어마어마한 자녀들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25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을 때 이미 10명의 아들과 딸 2명을 둔 람세스 2세는 그 뒤로도 수많은 여인들을 연중 임신시켰다. 그의 아들과 딸이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下) 누비아의 와디 에세바 신전의 부조에는 54명의 자녀들의 이름들이 열거되어 있으며, 룩소르 신전 벽화에는 개소식에 참석한 자녀들의 행렬이 그려져 있다. 이렇듯 람세스 2세는 자녀들의 모습뿐만 아니라 이름까지도 기록하여 후대에 전했다.
그의 장자의 이름은 아멘히르케페셰프로 재위 14년에 죽었다. 4번째 아들은 케무아세트인데 전술했듯이 그는 고대 이집트의 4대 현인(4대 현인은 3왕조 제세르의 재상 임호텝, 4왕조 쿠푸의 재상 헤몬, 18왕조 아멘호테프 3세의 재상 하프의 아들 아멘호테프 그리고 19왕조 람세스 2세의 아들이자 재상인 케무아세트이다.) 중 한 사람으로 고고학에 관심이 많아서 왕명표를 작성했고 기자의 피라미드를 보수했으며 모래 더미에 파묻힌 스핑크스를 끄집어내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또한 그는 주요 건축물 감독자로 멤피스의 프타 신전의 대사제로 아버지를 섬겼으니....... 4째 아들에 대한 람세스 2세의 사랑은 각별했다. 그러나 그도 재위 55년 만에 죽었다. 13번째 아들 메렌프타하는 재위 40년에 장군으로 임명되어 람세스 2세의 뒤를 이었다.
따지고 보면 람세스 2세에게 장수는 축복인 동시에 저주였다. 오래 살았기에 자식을 많이 낳을 수 있었지만 한편으론 아흔이 넘도록 사는 바람에 자녀들을 먼저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아부시르 남쪽에서 안식중인 4번째 아들 케무아세트와 왕들의 계곡 KV8에 누워있는 13번째 아들 메렌프타하를 제하고, 람세스 2세의 대부분의 아들들은 왕들의 계곡에서 가장 큰 무덤KV5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1825년 영국인 탐험가 제임스 버튼이 이 대형묘를 발견했을 때 세간의 반응은 싸늘했고 의기소침해진 그는 대략적인 고분도만 남기고는 곧 즉시 발굴을 중단했다. 이후 이 암굴묘는 투탕카멘 묘의 발굴자 하워드 카터에게 다시금 과소평가를 받으며 발굴 파편을 쌓아두는 장소로 이용된다. 그러나 그 덕분에 KV5는 1987년 미국 고고학자 켄트 윅스가 탐사할 때까지 도굴되지 않은 채 남을 수 있었다. 무덤은 매우 특이하게도 여러 층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150여 개가 넘는 방들이 문어발처럼 사방으로 뻗어 있었으며 3층 복도 끝에는 하계의 신 오시리스가 된 람세스의 실물크기 석상이 있었다.
아래는 네셔널 지오그라피 다큐에 나온 미국 고고학자 켄트윅스의 인터뷰 내용이다.
“통치기간동안 람세스 2세는 자신을 지상의 신이라 선포했고 왕위 계승자에게 자신이 해오던 세속의 모든 권한을 넘겨주었습니다. 이제 왕위 계승자는 세속의 파라오인 셈이었고 언젠가 신의 위치에 오를 람세스 2세의 권능을 물려받을 사람이었지요. 말하자면 나이어린 실제의 왕이었던 겁니다. 따라서 그들의 무덤은 특별해야 했지요. 후계자의 자리에 올랐던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 람세스 2세보다 먼저 사후 세계로 떠났고 모두 여기 KV5에 묻힌 겁니다.”
람세스 2세 자식들의 무덤에 이어서 이번에는 그 자신의 무덤(KV7)에 대해서 소개하겠다. 사실 람세스 2세는 보위에 오르자마자 자신의 무덤을 짓기 시작했다. 이집트 역대 왕들의 묘는 하루 아침에 완성되는 건축물이 아니었다. 고왕국 시대 피라미드도 신왕국 시대 암굴묘도 기나긴 인내의 시간이 만들어낸 훌륭한 작품이었다. 그렇게 공을 들였건만, 애당초 묘 터를 잘못 잡아서였을까? 그의 무덤은 매년 나일강의 범람에 휩쓸리기 일쑤였고 그 때문에 한때 화려했을법한 벽화는 완전히 사라져 현재는 적막한 장소가 되어 버렸다. 만일 제3중간기(중간기란 이집트 통일왕조가 부재중인 혼돈의 시기를 뜻함)에 그의 미라가 데이르 알 바호리의 왕들의 은닉처로 옮겨지지 않았더라면?!....... 십중팔구 오늘날 람세스 대왕의 모습을 보지 못했으리라.
사실 여태껏 연재물 중에서 오늘이 가장 길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전설의 람세스 대왕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독자들에게 람세스 2세의 치적 대부분을 훑었노라고 감히 말하지 않겠다. 앞서 미리 양해를 구했듯이 그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여기선 단지 람세스 2세의 업적 중 극히 일부를 다뤘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람세스 2세는 엄청 많은 건축물을 지었네!” 하고 감탄하는 독자가 있을는지 모르겠는데.......아무래도 람세스 대왕의 엄청난 만행 두 가지를 고발한 후 오늘의 이야기를 마무리 하는 게 나을 듯싶다. 람세스 2세는 선대 파라오의 공적을 가로챈 왕이기도 하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는 선왕들이 남긴 카르나크 신전과 룩소르 신전을 개보수하면서 은근슬쩍 선대 파라오의 이름을 긁어내고 그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선왕들의 업적은 우아한 양각 구조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긁어내기 쉬웠던 것이다. 용의주도한 람세스 2세는 자신의 치적을 깊게 새기도록 했다. 이는 후대 파라오의 도둑질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처사였다. 또한 그는 문화재 파괴자였다. 자신의 건축물을 최대한 빨리 그리고 많이 번식(?)시키기 위해 기존 신전을 부수고 그 돌로 새신전을 지었다. 따라서 그의 손에서 상당수의 건축이 탄생했지만 상당수의 기존 건축이 소멸되었다.
람세스 2세 말년 그는 13번째 아들 메렌프타하에게 정치를 맡기고 왕궁에서 유유자적 하다가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한다. 기원전 1213년의 일이었다.
다음 시간에는 19왕조 4대 왕 메렌프타하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는 신왕국(18왕조~20왕조) 시대 묘 건축 인부들의 촌락 데이르엘 메디나를 둘러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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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본것처럼,
세월을 거슬러
역사속 인물들과
대화하는 듯해요~^^ㅋ
늘 감사해요 맵시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