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upload.wikimedia.org%2Fwikipedia%2Fcommons%2F7%2F76%2FYoshinori_Shirakawa.jpg)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 義則). 다름 아닌 윤봉길 의사의 폭탄에 숨을 거두었던 인물입니다.
일본은 곽송령의 거병에 예민하게 반응했습니다. 이 싸움의 승자가 동북의 주인이 될것은 자명한 일이고, 일본 제국주의가 동북에서 힘을 쓰려면 누가 동북의 주인이 되는지가 중요했습니다. 우선 요시노리는 참모 등을 보내 곽송령을 만나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버려 했습니다. 그런데 곽송령의 반응은 뜻밖에도 차가웠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일본 측 인사들은 제법 위협적인 태도까지 보이면서 곽송령의 반봉에 대한 생각을 바꾸려고 했지만, 이제 와서 곽송령이 그런 소리를 들을 리도 만무합니다. 4시간 동안 서로 입만 아픈 끝에 회의는 끝나버렸고, 일본 측 인사들은 떠나기전 넌지시 협박같은 소리를 했습니다.
"앞으로 군사 행동 때 본국에서 여러 가지 경고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에 반하지 말 길을 바랍니다."
곽송령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무력 만능만을 믿으면 안될 일이지요."
만나본 결과 곽송령은 고분고분한 맛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일단 일본은 양측의 싸움에 중립 의사를 표시하면서 조금 더 간을 보는 형태로 나갔습니다. 일본의 시데하라 키쥬로(幣原喜重郞) 외상은 이렇게 발표했습니다.
"현 시국에 대하여 제국 정부는 절대 불간섭주의를 견지할 것이며, 어떤 변화도 없을 것이다."
중요한 부분은 일본이 장작림과 맺은 여러 조약이, 만약 곽송령이 승리한 후에도 유효하냐는 것입니다. 만약 곽송령이 집권 후에 전혀 없던 일로 만들자고 하면 일본 입장에선 난감한 일입니다. 곽송령은 일본 공사에게는 "장작림과 맺은 조약이 계속 유효하다" 는 식으로 말을 했지만, 정작 발표하는 성명에서는 전혀 다른 소리를 했습니다.
"오로지 우리 군이 기의한 때부터, 봉천에 올 때까지 동삼성 정부와 장씨 개인이 외국인과 맺은 일체의 계약은 모두 무효로 한다. 또 이번 의군의 행보에 있어서 만일 항거하는 자가 있으면 부득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차관을 공급하거나 군 장비를 공급하여 상대방을 이롭게 하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 양국의 친선 관계를 해칠 수 있다."
이 말대로라면 이전의 불평등 조약은 모두 무효가 되고, 더구나 내정 간섭을 하지 말라고 경고까지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곽송령의 기세가 너무 좋으므로 일본은 좀 더 참고 곽송령을 회유하려고 계속 시도했습니다. 일본은 곽송령에게, 그를 지지하고 장작림을 하야 시켜 버릴테니, 이전의 매국적인 밀약을 계속 유지하자고 권했습니다. 하지만 곽송령은 이 모든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시데하라 키쥬로
만약 곽송령이 매국적 조건을 승낙했다면, 장작림이 무슨 짓을 하던 양쪽에서 위협받는 입장이 되어 몰락은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곽송령이 애국심을 불태운것이 오히려 득이 되었습니다. 곽송령이 방법이 없는 인사라는것을 깨닫자, 일본은 다시 장작림에게 돌아왔습니다. 장작림을 구해 주고, 더욱 많은 이득을 취하는 쪽으로 전략을 수정해버린 겁니다.
일본 관동군 참모장 사이토와 장작림은 심양의 여관에서 서로 만났습니다. 사이토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현재 곽송령군의 선봉 부대는 금성을 지나 신민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각하께서 관동군의 도움을 요청하면 우리는 모든것을 사양하지 않고 협조해 드리겠습니다."
장작림이 대답했습니다.
"지금 성안이 허술해 이미 전보로 길림성과 흑룡강성의 부대를 불러 놓았습니다. 그러나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당장 오기가 힘들어 그게 걱정입니다. 만일 곽송령 놈의 군대가 성안으로 밀려오면 나는 잠시 여순으로 몸을 피할 생각압니다. 관동군은 좋을 대로 하시지요."
"각하께서 여순에 잠시 가신다면 저희로서도 매우 환영입니다. 지금 모든 걸 준비해 놓았으니 각하의 안전에 대하여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별일은 없으리라고 보지만…… 곽송령의 군대가 신민현을 공격해 들어 오면 관동군은 조약 규정에 따라 그들에게 통지하려고 합니다. 즉, 중국 군대가 남만철로 부지에서 작전을 할 순 없습니다. 필요시 일본 관동군은 조약아 따라 출병해서 막을 수가 있지요. 그들의 성내 진입은 불법입니다. 우리 관동군은 몇 개의 요구 사항을 고려하고 있으니 만일 각하께서 괜찮다고 여기시면 서류 위에 서명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이토는 자기가 사용하는 타자기에 5개 조항의 요구를 적고 통역으로 하여금 읽어주게 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일본 신민은 동삼성과 내몽고 동부 지역에서 상조권을 갖는다. 즉, 당 지역 주민들과 같이 거주와 상공업에 종사 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2) 간도 지구 행정구를 양도한다.
3) 길돈 철로를 연장하고 도문 이동의 조선의 철로와 연결한다.
4) 각 현의 일본 영사관 개설을 허가한다.
5) 이상 4개 항의 상세한 실시 방법과 이 밖의 사항은 일중 외교 기관이 공동으로 협의 결정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장작림은 깊게 생각도 안하고 즉석에서 대답했습니다.
"좋소, 좋아."
그리고 즉석에서 초안에 시원스레 서명했습니다. 장작림은 일본이라는 패가 필요했습니다. 목숨을 구하는 것이 급했기 때문에 다른 조건을 따지지 않고 죄다 서명한 것입니다. 밀약의 내용은 주로 만주에 있는 일본인의 토지와 점포 소유 및 거주에 대한 권리를 누리는것, 그리고 중요 도시에 일본 영사관을 설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환 조건은 일본 관동군이 곽송령에게 경고를 보내는 것인데 곽군이 일본군이 머무는곳의 20리 이내로 들어올 수 없으며, 아울러 일본 관동군이 필요시엔 즉시 출병해서 장작림을 보호하고 봉천의 성내 치안 질서를 담당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일단 조건이 체결되자 일본은 곽송령과 장작림 모두에게 공식적으로 경고를 했습니다.
"제국의 부속 토지는 물론 인근 부근에서의 전투 발생은 제국의 이익에 중대한 손신을 가져올 수 있으므로 군인의 직책상 당연히 좌시할 수 없다."
경고 자체는 쌍방에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만철 부속 토지를 뚫고 심양으로 진격하는 곽송령에게 한 것입니다. 일본은 그러는 와중에도 곽송령을 설득하는 작업은 계속 했습니다. 관동군의 대좌 한명이 곽송령을 면담하면서 이런 소리를 했습니다.
"각하께서 심양으로 들어오게 된다면 먼저 대일본 제국이 만몽에서 누리고 있는 특수 권리를 인정하셔야 합니다. 일본의 동삼성 투자에 대한 이익을 보호하고, 장작림과 일본이 맺은 밀약을 준수하셔야 합니다. 장은 이미 밀약을 체결했습니다. 만일 각하께서 이 조건을 모두 승낙하시면 제국은 각하 군대의 편리를 제공할 것입니다."
"우리 군이 회군하는것은 중국의 내정 문제입니다. 귀국의 간섭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무엇이 일본의 특수 권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즉 아무런 소득이 없었습니다. 결국 일본은 무력 간섭 행동을 확고하게 결정했습니다. 즉시 중국과 조선 주둔군 두 개 사단 병력이 봉천에 투입되었고, 일본 남만철로 부근에 일본군 병력이 4만명 가량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이 주둔하는 곳 곳곳에 깃발을 내걸고 곽송령의 진입을 막아버렸습니다.
곽송령은 극단적인 태도로 나왔습니다.
"비록 금지 구역을 설정해 놓았지만, 만일 우리의 진입을 막는다면 일본군 역시 공격을 감행하겠다."
그는 협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강경하게 나섰습니다. 12월 21일 밤, 마침내 곽송령 군이 총공격을 감행했고,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장작림이 믿는 대상은 포병 14사단이었습니다. 이 부대가 현재 장작림의 중심 병력이었습니다. 장작림은 보병 부대에 있는 포병 인원을 모조리 끌어다가 미친듯이 포탄을 쏴대며 시간을 끌었습니다. 일본군은 포병을 지원했고, 또한 대량의 군 장비와 탄약을 2개월치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이틀의 낮과 밤으로 전투가 매우 치열하게 벌어졌지만, 장작림 군대의 물자는 끝이 없었고 곽송령은 쉽사리 장작림을 몰락 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귀중한 시간이 흐르고 이틀 뒤, 12월 23일 새벽의 어스름, 곽송령 군대의 후방에서 두 무리의 기병 사단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오준승의 흑룡강성 부대가 드디어 도착한 것입니다.
장작림에게 있어 흑룡강성 부대의 등장은 로한 군대의 등장만큼이나 극적이었습니다. 그들은 곽송령 군대의 후방을 바로 공격했고, 곽송령은 모든 군량미와 군 장비, 탄약을 빼앗기거나 불태워버렸습니다. 눈 깜짝할 순간에 곽송령의 수만 군대는 모든 전투력을 상실했습니다. 12월 24일 전투에서 곽송령은 마침내 패망했습니다. 일본의 간섭이 시간을 벌어준게 승리의 원인이었습니다.
당시 장작림의 승리는 말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1925년 12월 29일 동아일보 기사는, "장작림의 몰락으로 최종의 막을 지으려던 전쟁이 일본 출병으로 형세 급변해서 패배로 기정되었던 부대가 승리했다." 고 보도했습니다. "기적적 전승"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기적" 이라는 표현도 보입니다. 그만큼 장작림은 최악의 상황에 놓였있었고, 곽송령은 승리가 눈 앞에 있었지만 너무나 허망하게, 또는 극적이게 단 한순간에 이 모든 상황은 뒤집어졌습니다.
하지만 당일 동아일보 기사는 장작림의 승리를 말하는 동시에, 이런 언급도 했습니다.
"장작림의 승리에는 일본의 조종설이 있다. 즉 장작림이 일본의 은혜에 감읍하게 하는 철두철미한 일본의 책략이다. 일본의 이익을 위하여 어느 정도나 할 것인지 이해 관계가 다대한 우리로서는 극히 주의 되는 사실이다."
"풍옥상이 곽송령에 대한 의리도 의리이거니와, 장차 그 지반 공고 도모 필요상 봉천 군벌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일부의 관측은 장작림과 풍옥상이 내년 봄에 개전할 것으로 보고 있다."
첫댓글 우와...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