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놀이터
김회직
“쌔-울 쌔-울, 쌔-울 쌔-울…”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미소리가 귀 따갑게 요란했다. 연일 30도를 웃도는 한낮의 폭염이 주춤주춤 꺾이는가 싶더니 처서가 지나고 백로를 넘기고부터는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하기까지 하다. 지겹도록 무덥던 여름이 드디어 끝난 모양이다.
그리고 비가 내렸다. 보슬비였다.
몇날며칠 쨍쨍한 햇볕에 바짝 마른 밭두렁, 흙가루 폴폴 날리는 메마른 땅에 초가을 비는 농부의 근심걱정을 덜어주는 보약같은 비다. 그렇게 고마운 약비가 가을농사를 돕겠다며 땅을 후줄근히 적셔주는데 왜 반갑지 않겠나.
아무리 보슬비라고 해도 하루 이틀이면 해갈이 충분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기상예보가 심상찮다. 뒤늦게 시작된 장마라며 다음 주에도 비가 또 내릴 것이라니 은근히 걱정된다. 이러다가 보약비가 도를 넘어 낭패비로 바뀌면 이를 어쩌지?
때를 놓치면 절대로 안 되는 것이 가을채소농사다. 서둘러 김장배추를 심었다. 다른 집보다는 사나흘 늦었지만 아직은 철이 지난 게 아니어서 포트모종 150포기를 약 35cm 간격으로 심어나갔다. 뽀얀 보슬비가 안개처럼 날리는 싱그러운 아침이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기껏 텃밭 한 뙈기 가꾸면서 거창한 문구까지 떠올린다는 게 꼴같잖아서 우습기도 하다. 그러나 해마다 배추모를 키워 열네 식구가 겨우내 먹고도 남을 김치를 충당하고 있다면 그게 농자(農者)가 아니고 무엇인가?
“김치걱정일랑 아예 없게 할 것이구먼…”
포트모판구멍에 배추씨앗을 한 개씩 밀어 넣을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자란 무 배추여서 이렇게 고소하고 맛이 있나?” 라며 활짝 웃어줄 다 큰 손자손녀가 여섯이나 되니 말이다.
날이 부옇게 밝아오기 무섭게 텃밭으로 나간다. 파릇파릇한 행복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다. 밤새 참 많이도 컸다. 이슬에 촉촉이 젖은 초록잎사귀들이 지금 막 목욕을 끝내고 나온 것처럼 새치름하고 산뜻하다.
첫 번째 고랑부터 한잎 두잎 살피기 시작한다. 벌레가 갉아먹은 것은 없는지, 시들시들한 잎사귀는 없는지, 여린 배추속잎이 흙덩이에 눌려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은 없는지, 고양이가 헤집어놓고 가서 실뿌리가 하얗게 드러난 곳은 없는지, 바람결에 치어 기우뚱하게 넘어진 것은 없는지, 배추 잎을 조심스럽게 들춰가며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이다.
맛있는 김치를 먹으려면 무배추가 좋아야 하고, 무배추가 좋으려면 밭 흙이 좋아야 한다. 좋은 흙을 밟으면 스펀지처럼 푹신푹신한 탄력이 느껴진다. 좋은 흙에서 자란 채소는 때깔부터가 다르다. 투명하고 탱탱한데다 향이 깊어 그냥 생것으로 먹어도 입맛이 달다.
잘 발효된 친환경퇴비를 한 두렁에 네 포대씩 두 두렁에 깔아 폈다. 토양개량제 유박퇴비와 웃거름용 복합비료도 뿌렸고, 토양소독제까지 골고루 뿌렸다. 연작장해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붕사를 뿌려주는 것도 물론 잊지 않았다. 비릿하고 구릿한 퇴비냄새가 울안을 맴돌았지만 냄새마저도 구수하고 향긋했다. 건강한 밭을 만들어야 한다는 농부의 투박한 욕심 때문이리라.
밭두렁이 달랑 두 개뿐인데 그 작은 텃밭에다 경운기나 관리기 같은 농기계를 댈 수는 없다. 힘에 좀 부치더라도 쇠스랑질로 흙을 파 엎어야 한다. 빗물이 젖어든 땅이라 일하기는 수월했다. 그러나 허리가 무지근히 아파오는데다 숨까지 가빠서 몇 고랑 파헤치지 못하고 한 차례씩 쉴 수밖에 없다.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고속으로 치닫는 가파른 세월이 그렇게 만든 것을.
땅을 다 파 엎은 뒤에는 흙덩이를 부숴가며 밭고랑을 돋우고, 배추 모를 옮겨 심을 때 헷갈리지 않게 일정한 간격으로 표시를 해놓는다. 밭 꾸미는 일이 힘들고 더뎌서 그렇지 실상 심는 것은 금방이다. 심은 다음에는 들뜬 흙을 가라앉히고, 뿌리가 마르지 않도록 포기마다 물을 준다. 그렇게 마무리를 해놓아야 배추모종정식이 모두 끝나는 것이다.
포트에서 밭으로 옮겨 심은 지 어느새 보름이 다 된다. 떡잎위로 손바닥보다 더 큰 본 잎들이 일고여덟 개씩이나 붙어 팔랑거릴 만큼 많이도 자랐다. 마음이 흐뭇하다. 밤새내린 이슬을 맞고 더욱 신선해진 잎사귀들, 한 나절 강한 햇볕에 주눅이 들어 축 늘어졌다가도 저녁때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살아나는 싱싱한 생명력. 너무 신비롭지 않은가?
초록 방아깨비 한 마리가 초록 잎사귀에 마치 죽은 것처럼 찰싹 붙어있다. 얼핏 보아서는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저물녘 바람결에 배추 잎이 살랑거리는 텃밭,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거리는 텃밭. 이 가을 다 할 때까지 희망과 즐거움을 안겨줄 작은 텃밭이야말로 내 유일한 가을놀이터가 아닐는지.
첫댓글 텃밭 배추가 마냥 행복해 보입니다.
주인을 잘 만나 식탁에서도 대우 받겠어요.
듬으로 배추농사 비법까지 배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찾는 곳이랍니다.
밤새 쑥쑥 자란 배추가 그저 신비스러울 뿐입니다.
농사초보쟁이인 저에게 배추농사를 배우셨다니
저보다 더 초보인 분도 계셨군요. 어쨌든 고맙습니다.
김선생님이 텃밭에서 가꾸시는 정성스러운 배추는 농사라기 보다 예술의 경지입니다. 양질의 토양 만들기와 날씨 걱정, 그리고 가족이 맛있게 먹으면서 나누게 될 덕담까지 예술이 아닌 대목이 없습니다. 초록 배추잎에 달라붙은 방아개비까지 '수필예술' 카페에 걸맞는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셨습니다.
코로나 핑게를 대지 않더라도 이제는 갈곳이 없습니다. 집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일, 그 일을 해가며 스스로 즐길 수 밖에 없다 보니
이런저런 일거리를 만들게 되는군요.. <낡은 장구>도 그렇고, <색깔놀이>도 그래서 나온겝니다. 늘 좋게 봐주시고 읽어주시는 윤회장님께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추석이 며칠 남지 않았군요. 명절 잘 보내시고, 내내 행복하세요.
김 선생님의 가을 놀이터가 참으로 평화롭고 한가롭습니다.노년을 김 선생님처럼만 보낼 수 있다면 누가 늙음을 서럽다 하리오.ㅎ
그림과 글 쓰기, 두 가지 모두 재능을 보이시는 김 선생님은 타고난 예술인...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한가롭다 못해 따분할 때가 훨씬 더 많지요. 그 따분함을 견디기 위한 방편으로 일 만들기를 더 하게 되는지도 모르지요. 강선생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가슴 훈훈해지는 정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꼭 한 번씩을 더 읽게 된답니다. 많이 부럽습니다.
손자손녀들이 부럽습니다. 직접 농사 지은 배추를 먹은 아이들은 시골 할아버지집이 남다르겠지요.
두 고랑의 채마밭을 저도 한참 들여다 봅니다. 이번 김장도 풍성하겠네요~^^*
시골 노인들은 채마밭 가꾸는 일로 살아갑니다. 갈곳이 그곳밖에 없거든요. 세월이 더 흘러 이것마저도 못하게 되면 자식들 곁으로 가야할 테지만요. 그 동안 만이라도 재미를 붙여보려 하는데 벌써부터 힘에 벅찹니다.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명절 잘 보내시고 행복한 나날 되세요.
좋은글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