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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난해한 박태원 교수의 논문을 독파하신다고 많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부록의 글인 '고타마 싯다르타는 어떻게 붓다가 되었나?'의 논문으로
끝을 맺게 됩니다. 박교수의 불교를 보는 관점이 전체적으로 정리가 될 것으로 봅니다.
<붓다의 깨달음인 '돈오 원각'=육조혜능의 '무념의 돈오견성'=원효의 '일심'=간화선의 '견성즉불'>을
하나로 꿰어 역설한 박교수의 논문은 그 관점이 실로 탁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 핵심안 '이해수행과 마음수행' 곧 '이해'와 '마음'의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이 요망됩니다.
그래야 화두참구에 있어서의 화두의심 곧 '오직 모를 뿐'의 마음국면이 어떻게 궁극적 깨달음으로
향하게 하는지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45여년 전에 해인사 백련암 성철스님 회상에서 제가 삼일간 '아비라 기도'를 회향하고 받은 화두,
- 시심마(是甚麼-이뭣고)'?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니 그러면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오직 모를 뿐! 오직 모를 뿐! 오직 모를 뿐!
도반님들, 힘내어 정진하십시오!
분당에서 혜원 문 창 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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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타마 싯다르타(Gotama Siddhartha)는 어떻게 붓다가 되었나?
- 네 가지 성공 요인 - 박태원 교수
1. 중요한, 그러나 간과되고 있는 문제 하나
29세의 청년 고타마 싯다르타는 35세까지 6년 동안 수행했다. 그리고 붓다가 되었다. 그 6년 수행은 고타마 싯다르타/붓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보장된 사회의특권도 내려놓고, 사랑하는 가족도 뒤로 하고 강행한, 그러나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모험의 기간이다. 모든걸 걸었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길, 아무 것도 기약할 수 없는 그 길에서, 오직 구도(求道)의 열정 하나로 모든 역량을 불태웠던 기간, 성공했기에 망정이지 실패했다면 허무의 늪에 빠져들었을 도박 같은 기간이다. 그 6년은 남은 45년 생애의 내용을 더없이 특별하게 만든 전환의 시절이다.
고타마 싯다르타를 붓다로 만든 그 6년간의 체험은 고스란히 붓다 법설의 근거이고 토대였다고 보아야 한다. 붓다는 그 기간의 실패와 성공 사이에서 발생했던 사색과 수행, 체득과 재성찰의 모든 것은 설법에 반영했을 것이다. 초전법륜(初轉法輪)을 비롯한 최초기의 설법은 6년 동안의 경험이 막 정리된 것이었을 것이다. 교육을 위해 최초로 정리된 경험이 8정도(八正道)였고, 6년 수행으로 성취한 능력으로 성찰하여 12연기(十二緣起) 법설을 수립했다. 45년 간의 설법은 6년 체득의 다양한 교육적 변주이다. 붓다라는 인간과 그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대목은 6년간의 경험에 대한 붓다 자신의 회고(回顧)이다.
붓다의 법설을 탐구하려 할 때 흔히 초전법륜(初轉法輪) 등 붓다가 된 이후의 설법을 주목하지만,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고타마 싯다르타의 수행과정, 붓다 이전의 6년의 경험이다. 그 6년을 이해한 만큼 붓다가 보이고 붓다의 법문이 이해된다. 붓다와 대화하고, 그의 법설과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회고하는 6년 수생을 최우선으로 음미해야 한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수행경험과 붓다의 법설은 직결되어 있다. 6년 수행과정과 붓다의 모든 법문은 연결시켜 음미해야 한다. 필자 개인적으로 나름대로 큰 그림은 그려두고 세부 그림을 그려가고 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29세에 네 성문 밖에서 병자, 노인, 죽은 사람, 출가 수행자와 조우하면서 인생의 근원적이고도 보편적인 문제에 눈떴고, 궁극적 해답을 구하고자 출가수행의 길에 나섰다. 먼저 두 사람의 선정(禪定) 대가를 차례로 스승으로 삼아 선정(禪定)수행을 하였고, 자신도 스승들이 성취한 경지에 올랐지만 그 경지는 고타마가 추구하던 목표가 아니였다. 그래서 선정(禪定) 수행에서 고행(苦行) 수행으로 방법을 바꾸었다.극한의 고행에서도 목표 달성이 되지 않자 고행(苦行)도 그만두었다. 그리고 다시 선정(禪定)에 들어 마침내 추구하던 목표를 성취하였다. - 고타마 싯다르타에서 붓다로 바뀌는 과정을 묘사하는 일반 서사(敍事)이다.
<붓다는 쾌락주의, 선정주의, 고행주의를 모두 넘어선 중도(中道)에 의해 마침내 추구하던 깨달음을 성취하였다. 그 중도(中道)를 8정도(八正道)로 설하셨다. 선정주의(禪定主意)와 고행주의(苦行主義)는 각각 브라흐만 전변설(轉變說)과 육사 외도들의 요소취설(要素積聚說)을 배경으로 하는 수행법으로, 고타마가 선정(禪定)과 고행(苦行)을 모두 그만 둔 것은 브라흐만 전통과 사문 전퉁 모두를 극복한 것을 의미한다. 붓다의 연기설(緣起說)은 전변설(轉變說)과 적취설(積聚說)을 모두 넘어선 것이다. 붓다는 연기(緣起)를 성찰하여 깨달았다. 그러므로 논리적 성찰이 깨달음의 방법이다.> - 붓다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읽는 시선들이다.
그런데 이런 서사(敍事)의 독법에서 우리는 고타마 싯다르타의 수행경험과 붓다 깨달음의 인과적 연관을 얼마나 확보할 수 있는가? 고타마 싯다르타와 붓다 사이의 6년에 대한 이런 기술이 우리의 현재 실존에 어떤 의미로 다가오며, 어떤 유익함을 줄 수 있을까? 6년 경험에 대한 붓다의 회고에서 ‘우리의 지금 여기의 삶’에도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을 얼마나 건져내고 있을까? 너무 익숙하지만, 너무나 먼 전설로 다가오는 것은 아닌가? 가장 절실하고 요긴하게 간수해야 할 것을, 과도한 종교적 시선과 타성적 독법으로 진열장 안에 박제화(剝製化) 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전인미담(前人未踏)의 길을 걸어 성공한 인간이 자신의 성공을 타인과 공유하려고 할 때, 무엇을 교육 자료로 쓸까? <어떻게 하면 저 분처럼 성공을 할 수 있을까?> 하며 눈망울 초롱초롱한 이들에게, 그는 무슨 말을 할까? 한 사람이라도 더 자신처럼 성찰하길 바라는 그가 알려주는 성공 방법에는 무슨 내용이 담길까? 그의 가르침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실패와 성공 경험에서 나올 것이다. 자신의 경험담이야말로 가르침에서 자신의 실패와 성공 경험, 그 전 과정에 대해 자세히 일러주려고 할 것이다. 진정 제자를 사랑하는 스승이라면.
하물며 인천(人天)의 스승, 지혜와 자비의 완벽한 경험과 일관성을 기적처럼 온몸으로 증언하는 붓다일진대 어찌 했겠는가. 사람들을 가르칠 때, 6년 수행 경험을, 직접 겪었던 실패와 성공 경험을, 중요하게 자세하게, 수시로 설했을 것으로 보아야 상식이다. 6년 동안의 수행과정에서 직접 확인한 실패와 성공의 이유에 대한 회고적 증언이야말로 제자들에게도 가장 중요하고 호소력 넘치는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붓다의 제자들은 그 회고를 얼마나 그대로 기억하여 전하고 있는 것일까?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 소화 안 되는 내용은 혹 빠져버리지 않았을까? 자신의 이해나 기대를 투영해 추가하거나 변형하지는 않았을까? 또 후학들은 기록된 그 회고를 어떻게 소화하고 있는 것일까? 그 내용과 의미를 붓다의 의도에 맞게 읽어내고 있는 것일까? 붓다의 수행담 회고에서 실패와 성공의 이유를 포착하여 자신의 현재 실존에 적용하고 있는 것일까?
궁금하다. 아니, 궁금해야 한다.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청년이 붓다로 바뀐 과정이 우리 삶에 무슨 선물을 줄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 궁금증을 채우려 하는 즉시 강력한 장애물에 맞닥뜨린다. 고타마의 수행과정을 보는 시선이 너무 종교화되어 버린 것이다. 청년 고타마의 성찰과 실험은 ‘당연히 성공할 수 밖에 없는’ ‘특별한 인간의 특별한 과정’이 되어 버렸다.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사람들로서는 감히 흉내도 내보지 못할 특별한 것이 되어 버렸다. 따라 할 수 있는 모범이 아니라 그저 받들어야할 숭배와 신앙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고타마의 수행과정을 이렇게 종교화된 시선으로 보개 되면, 붓다가 제자들에게 들려주는 회고는 성자(聖者)의 특별함을 확인하는 ‘종교적 전설’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럴 때는 붓다의 회고에서 ‘지금 여기 자신의 실존’에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을 읽어내기가 원점에서부터 제한된다. 우러러 존중할 뿐 감히 넘볼 수 없는 ‘특별한 초인의 전설’은 우리의 실존과 접속하기가 불가능해진다. 실패와 성공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알려주어 자신의 성취를 개방하고 공유하려던 붓다의 회고는, 종교적 외투가 입혀질수록 본래의 생명력을 상실해 버리고 만다.
두텁게 입혀놓은 종교적 외투는 과감하게 벗겨보고, 그러나 삶의 깊은 치유력을 전수받으려는 경건한 태도는 종교적 수준으로 간직한 채, 청년 고타마 싯다르타의 수행시절을 세심하게 들추어 보아야 한다. 그 수행과정을 현재 실존의 관심으로 음미하는 것이 붓다를 제대로 대접하는 길이다. 이 글은 붓다와 그렇게 만나보려는 넘치는 의욕의 어설픈 표현이다.
우리의 관심은 고타마 싯다르타의 어떤 선택과 노력이 붓다로의 변환을 가능케 했는가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의 성공 요인이 궁금한 것이다. 12연기가 대변하는 연기법(緣起法)에 대한 성찰 과정은 붓다가 된 직후에 펼쳐지고 있기에, <연기법(緣起法)을 성찰해서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가 되었다>라는 이해는 타당하지 않다. 적어도 현존 기록에 의하는 한, 고타마 싯다르타의 수행과정은 <선정 수행(1, 2)➝고행➝선정(3)➝깨달음 완성>의 순서이고, 고행 이후의 선정과 깨달음 완성 사이에 세 가지 특별한 체득[삼명(三明): 숙명통(宿命通)·천안통(天眼通)·누진통(漏盡通)]]이 언급되고 있다. <선정 수행(1,2)➝고행➝선정(3)➝삼명(三明)➝깨달음 완성>의 과정에 관한 회고를 통해 붓다는 자신의 성공 요인을 알려주려 한다. 생략된 내용이 있건, 변형, 추가된 내용이 있건 간에, 우리는 현재 주어진 자료에서 그 성공 요인을 탐색해 갈 수밖에 없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수행과정은 니까야/아함 문헌에서 두 유형으로 전해진다. 붓다가 자신의 수행경험을 회고하는 유형이 하나이고, 자신의 수행과정을 구도자의 표준 모델로 일반화시켜 설하는 유형이 다른 하나이다. 특히 구조와 내용에서 정합성(整合性)을 보여주는 일반화 유형이 자주 설해지고 있다는 것은, 붓다가 자신의 깨달음을 세상과 공유하기 위해 수행과정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니까야/아함을 통해 붓다와 대화하려는 학인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문제가 있다. 현존 니까야/아함의 형성과 전승 과정에서 추가 내지 변형된 내용을 붓다의 육성과 구별해 내는 일이 그것이다. 붓다의 육성 내용은 단지 언어학적 기준과 문헌학적 방법의 적용으로 선별해 내는 것은 곧 한계에 부딪힌다. 붓다와 대면한 다양한 개인과 집단에 의해 기억으로 공유되고 암송으로 전승되던 붓다의 육성이, 제한된 사람들에 의한 1차 결집으로 완전하게 수집되었다고 볼 수도 없고, 결집된 내용이 문자기록 이전 몇 백 년 동안 원형을 그대로 유지했다고 볼 수도 없다. 또 설법 형태의 소박성이나 단순성이 육성의 근거일 수도 없으며, 고층의 언어로 먼저 기록되었다고 해서 육성이라 할 수도 없다.
기억 자체의 숙명인 ‘이해 편차에 따른 취사 선별 및 굴절’이 붓다의 육성을 직접 들은 사람들의 기억 내용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큰 것일 수 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지금도 같은 강의를 들은 학생들에게 강의내용을 기억하는 대로 적어보라고 하면, 강의 직후에도 흥미로울 정도의 편차를 확인하게 된다. 기억의 해석학적 속성, 기억 전승의 다양한 경로, 개인과 집단의 기대와 선호 등, 니까야/아함 문헌 형성에 개입한 변수들을 모두 고려하면, 현존 니까야/아함 문헌에서 붓다의 육성만을 선별해 내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게다가 예상보다 많았을 수 있는 유실분(遺失分)과 추가분 및 변형을 고려하면, 니까야/아함의 성격은 복잡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까야/아함에 붓다의 육성이 원형에 가장 가깝게 보존되어 있다는 점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학인들은 이 복잡한 변수와 다양한 가능성을 규형 있게 고려하면서 붓다의 육성에 접근해 가야 하는 난제를 안고 있다.
붓다의 육성에 접근하는 방법으로써 필자는 정합성(整合性)을 주목한다. 내용상 강한 정합성(整合性)을 보여주는 법설들을 선택하여 일정한 범주를 구성한 후, 그 범주를 기준으로 니까야/아함 문헌의 기록과 붓다 육성과의 거리를 판정하려고 노력한다. 이처럼 정합성으로 선별기준을 마련하려는 시도에는, 정합성 범주를 구성하는 해석학적 선택이 선행될 수 밖에 없다. 그 해석학적 선택의 타당성 여부는 공유지대(共有地帶)를 형성해 가는 담론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 지대가 넓다고 타당성이 높은 것도 아니고, 좁다고 타당성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겠지만.
2. 붓다가 될 수 있었던 조건들 – 네 가지 성공 요건
붓다가 연기법(緣起法)으로 알려주는 것처럼, 모든 현상은 그것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에 의해 발생한다. 현상을 볼 때는, 그것을 발생시킨 원인 조건들을 동시에 고려해야 진실에 접근할 수 있고, 또 문제를 제대로 풀 수 있다. 실존의 근원적이고도 궁극적인 문제를 풀려는 청년 고타마 싯다르타의 모헙과 도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성공할 수 있는 조건들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수행과정을 주목하는 것은, 깨달음의 발생과 인과적 연관을 맺는 조건들이 무엇인가를 읽어내려는 것이다. 붓다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수행과정을 회고해 준 것도, 자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들, 그 ‘깨달음의 발생 조건들’을, 체험적 증언을 통해 알려주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제자들의 기억과 후인들의 전승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수행 회고담의 행간을 읽어, 고타마 싯다르타의 성공 요인 네 가지를 추적해 본다. 니까야/아함이 전하는 내용을 종합해 볼 때, 네 가지 조건들을 주목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1) ‘이해/언어’와 ‘탈(脫)이해/탈(脫)언어’의 차이 및 관계에 대한 개안,
2) 조건적 발생에 대한 개안 – 이지적 연기(理智的 緣起) 깨달음
3) 모든 조건과 경험에 갇히지 않는 능력의 확보 – 새로운 선(禪)
4) ‘조건 인과적 발생’에 대한 직접지(直接知) 성취 – 체득적 연기(體得的 緣起) 깨달음이 그것이다.
수행과정에 대한 붓다의 회고들에서 공통되는 내용 가운데 이와 관련된 부분을 「쌋짜까에 대한 큰 경」(M1:237)을 중심으로 음미해 본다. 같은 내용이 「왕자 보디의 경」(M2:91)에도 나온다. 대화 상대가 ‘악기베싸나’에서 ‘보디 왕자’로 바뀌어 있을 뿐이다.
【첫 번째 성공 요인: ‘이해(理解)/언어(言語)’와 ‘탈이해(脫理解)/탈언어(脫言語)’의 차이 및 관계에 대한 개안(開眼)‘】
“악기베싸나여, 나는 오래지 않아 그 가르침을 배웠습니다. 악기베싸나여, 나는 스승이 말하는 것과 똑같을 정도로 그 지혜의 이론을 말하고 그 장로의 이론에 대해 말했습니다. 나와 남이 모두 ’나는 알고 또한 본다‘라고 인정했습니다. 악기베싸나여, 그 때 나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깔라마는 자신의 가르침에 대해 ’나는 스스로 알고 깨달아 성취했다‘라고 단지 확신만으로 주장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깔라마는 이 가르침을 알고 본다.’> 그래서 나는 알라라 깔라마가 있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알라라 깔라마에게 말했습니다. <존자 깔라마여, 그대는 어떻게 ‘나는 스스로 알고 깨달아 성취했다’라고 주장합니까?‘> 악기베싸나여, 이와 같이 말하자 알라라 깔라마는 ‘아무것도 없는 세계(無所有處)’에 관해 알려주었습니다. 악기베싸나여, 그러자 나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깔라마에게만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믿음이 있다. 깔라마에게만 정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정진이 있다. 깔라마에게만 새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새김이 있다. 깔라마에게만 집중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집중이 있다. 깔라마에게만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지혜가 있다. 자, 이제 깔라마가 스스로 알고 깨달아 성취한 그 가르침을 스스로 성취하기 위해 노력해 보면 어떨까?>
그 뒤에 악기베싸나여, 나는 머지 않아 곧 그 가르침을 스스로 알고 깨달아 성취했습니다. (이어 웃다까 라마풋다의 가르침에 따라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非想非非想處)’를 깨달아 성취하는 과정에서도 동일한 내용이 반복된다.)”1)
“악기베싸나여, 그런 나는 오래지 않아 즉시에 그 법을 증득했다. 악기베싸나여, 그런 나는 입술을 두드리자마자 말하자마자 지혜로운 말과 확신에 찬 말을 했다. 그래서 나는 <나는 알고 본다>라고 선언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말했다. 악기베싸나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알라라 깔라마는 단순히 믿음만으로 ‘나는 이 법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문다’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알라라 깔라마는 이 법을 알고 보면서 머문다.> 악기베싸나여, 그러자 나는 알라라 깔라마를 만나러 가서 이렇게 말했다. <깔라마 존자여, 어떻게 이 법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문다고 선언하십니까?> 악기베싸나여, 이렇게 말하자 알라라 까라마는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악기베싸나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알라라 깔라마에게만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믿음이 있다. 알라라 깔라마에게만 정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정진이 있다. 알라라 깔라마에게만 마음챙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마음챙김이 있다. 알라라 깔라마에게만 삼매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삼매가 있다. 알라라 깔라마에게만 통찰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통찰지가 있다. 참으로 나는 알라라 깔라마가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문다고 선언하는 그 법을 실현하기 위해 정진하리라.> 악기벴나여, 그런 나는 오래지 않아 즉시에 그 법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말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물렀다.”2)
요점
고타마 싯다르타는 알라라 깔라마가 설하는 깨달음과 그에 대한 가르침을 단기간에 ‘이해‘한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확보한 이론적 이해는 동료 수행자들이 <당신도 깨달았다>라고 인정한 정도였다. 그러나 고타마 싯다르타는 ’이해(理解)‘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정직한 성찰을 일으키고 선정(禪定) 수행에 몰입한다. 마침내 알라라 깔라마의 언어가 어떤 경험적 체득을 기반으로 하는 것인지를 직접 확인한다.
‘(알라라 깔라마는) 단지 확신만으로’(전재성 번역본)/‘단순히 믿음만으로’(대림 번역본)라는 말에 대해 주석서는, “‘단순히 믿음만으로’라는 것은 통찰지(通察知)로써 실현하지 않고 단순히 청정한 믿음만으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말이다.”(대림 번역본 역주 117)라고 해석한다. 붓다와 그의 법설을 읽는 위빠사나 시선의 전형이다. 구도(求道)의 길에서 이런저런 성찰과 시도를 감행하는 고타마 싯다르타의 모습을, 붓다를 기준으로 삼아, 그것도 위빠사나 시선을 적용하여 풀이하는 방식이다. 청년 고타마 싯다르타의 행적 위에 붓다에 대한 후학의 그림을 씌우는 방식으로는 고타마 싯다르타의 수행과정이 제대로 읽혀지기가 어렵다. 필자의 소회로는, 니까야를 통해 붓다와 대화해 보려고 할 때, 주요 개념과 문장의 의미에 대한 주석서들의 해석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미 선택한 특정한 해석학적 시선, 지나친 현학화, 종교적 사변화, 맥락에 상응하지 않는 엉뚱한 이해들을 도처에서 만나게 된다. 주석서들의 해석학적 타당성은 생각보다 훨씬 제한적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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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타마 싯다르타(Gotama Siddhartha)는 어떻게 붓다가 되었나?
- 네 가지 성공 요인 - 박태원 교수
【세 번째 성공 요인: 모든 조건과 경험에 갇히지 않는 능력의 확보 – 새로운 선법(禪法)의 수립】
“이제 나는 단단한 음식이나 끓인 쌀죽을 먹어 힘을 얻어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어,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롤 가득한 첫 번째 선정(禪定)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악기베싸나여, 나의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유와 숙고가 멈추어진 뒤, 내적인 평온과 마음의 통일을 이루고, 사유를 뛰어넘고 숙고를 뛰어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두 번째 선정(禪定)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악기베싸나여, 나의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나는 희열이 사라진 뒤,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평정하게 지내고 신체적으로 행복을 느끼며, 고귀한 님들이 명징하고 새김 있는 행복한 삶이라 부르는 세 번째 선정(禪定)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악기베싸나여, 나의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나는 즐거움과 괴로움이 버려지고 만족과 불만족도 사라진 뒤, 괴로움을 뛰어넘고 즐거움을 뛰어넘어, 평정하고 새김 있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禪定)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악기베싸나여, 나의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악기베싸나여, 그런 나는 덩어리진 음식을 먹고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심]과 지속적인 고찰[伺,사]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물렀다. 악기베싸나여, 내게 비록 이러한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지만 그것이 내 마음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그런 나는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은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을 구족하여 머물렀다. 악기베싸나여, 내게 비록 이러한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지만 그것이 내 마음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그런 나는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렀고, 마음 챙기고 알아차리며[正知,正念]으로 행복을 경험했다. 이 [禪 때문에] ‘평온하고 마음 챙기며 행복하게 머문다’고 성자(聖者)들이 묘사하는 제3선(三墠)을 구족하여 머물렀다. 악기베싸나여, 내게 비록 이러한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지만 그것이 내 마음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그런 나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소멸하였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 제4 선정(四禪)을 구족하여 머물렀다. 악기베싸나여, 내게 비록 이러한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지만 그것이 내 마음을 제압하지는 못했다.“1)
요점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나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와는 관계가 없는 즐거움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라는 자각 다음에는 어떤 노력이 이어졌을까? 기록에는, 고타마 싯다르타가 적절한 식사를 통해 단식고행으로 허약해진 체력을 회복한 후, 네 가지 선정(禪定) 경험의 변화를 성취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생략 내지 유실된 내용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부분을 추정으로라도 채워보아야 맥락이 통한다.
‘감관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서 발생하지 않는 즐거움, ‘해로움’과 무관한 즐거움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과정이 이어졌을 것이다. 달리 말해, 그러한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을 탐구했을 것이다. 그것은 ‘더 좋은 즐거움’ ‘더 유익한 즐거움’ ‘더 수준 높은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의 탐색이다. <‘어떤 조건’을 선책했더니 ‘어떤 즐거움’이 발생한다. ‘다른 조건’을 선택했더니 ‘그보다 더 좋은/유익한/수준 높은 즐거움’이, 혹은 ‘덜 좋은/덜 유익한/수준 낮은 즐거움’이 발생한다.> - 이런 성찰 실험이 이어졌을 것이다.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의 선택과 비교, 성찰의 과정이 한동안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더욱더 좋은/유익한/수준 놓은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에 대한 개안(開眼)과 체험이 계속 향상되었을 것이다. 맥락으로 볼 때 이런 정도의 추정은 무리가 아니다.
음미
즐거움이라는 경험은 윤리적 조건들의 선택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는 비윤리적 조건들에서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타인을 칭찬하면서 즐거워하기도 하지만, 비방하고 험담함으로써 즐거워하기도 한다. 칭잔하며 즐거워랄 때도, 자기 자식만 칭찬해서 즐거워하기도 한다. 칭찬하며 즐거워할 때도, 자기 자식만 칭찬해서 즐거운 경우와 남의 자식을 칭찬하면서 즐거워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두 즐거움은 질이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진행했을 <더욱 더 좋은/유익한/수준 높은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에 대한 모색·실험·비교·성찰은, 후일 붓다가 되어 설한 법설에 그대로 반영되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설법은 단적인 사례로 보인다.
”수행승들이여, 잘못된 사유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매인 사유, 분노에 매인 사유, 폭력에 매인 사유이다. 이것이 잘못된 사유이다.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사유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사유에 대하여 나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사유가 있고, 수행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고 고귀한 것의 경지에 드는 올바른 사유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지만, 일정한 공덕이 있고, 집착의 대상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 과보가 따르는 올바른 사유는 어떠한 것인가? 욕망을 여의는 사유, 본노를 여의는 사유, 폭력을 여의는 사유이다. 이것이 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대상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 과보가 따르는 올바른 사유이다.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고 고귀한 길의 경지에 드는 올바른 사유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마음,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는 마음, 고귀한 길을 갖추고, 고귀한 길을 닦은 결과로서 탐구, 사고, 사유, 전념, 몰두, 마음의 지향, 언어적 형성이 생겨나는데, 이것들이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는 고귀한 길의 고리인 올바른 사유이다.2)
<더 좋은/유익한/수준 높은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에 대한 일련의 탐구는 마침내 ‘새로운 선정(禪定)의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의 확보로 이어진 것으로 본다. 정형구로 전해지는 ‘네 가지 부류의 선정(禪定) 경험’[四禪]의 원형이 이때 확보된 것으로 보인다. 붓다는 이 선정(禪定)의 즐거움이 감관적 쾌락/행복감보다 수승한 ‘즐거움/행복감’이며, 선정(禪定)의 즐거움들 가운데서도 수준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즐거움’을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것’으로 보게 되었다. 곧이어 ‘더 놓은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을 상향적으로 탐구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선정(禪定)의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이때의 선정(禪定)은 출가 직후에 배우고 체득했던 전통 선정(禪定)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정의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새로운 조건들을 알게 되었고, 그 새로운 조건들을 확보함에 따라 새로운 내용의 선정 수행법을 확보한 것이다. 전통 선정 수행법과는 차별화되는 붓다의 선(禪), 새로운 선법(禪法)의 기초가 마련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더 수승한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의 탐구를 <멈추지 않고 지속했다>라는 점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즐거움이라 부르는 경험현상은 ‘조건에 따라’ 발생한다. 특정한 내용의 즐거움은 그것을 발생시키는 특정한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특정 즐거움에 머물지 않고 더 수승한 즐거움을 탐구했다>라는 것은, 어떤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특정 조건을 붙들어 그것에 머물려고 하지 않았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대개 특정 즐거움에 쉽사리 안주한다. 다시 말해, 특정 즐거움을 발생시킨 ‘어떤 조건들’에 안주하고자 한다. 트럼프를 지지해서 즐거움을 누리던 사람이 그 즐거움에서 떠나 샌더스를 지지해서 발생하는 즐거움으로 옮아가는 일이 쉽겠는가? 지금 경험하는 즐거움을 붙들고 그것의 발생 조건들에 머물려는 것이 보통 인간의 본능적 경향이다.
그런 점에서 고타마 싯다르타의 경우는 매우 특별하다. 현재 경험하는 특정한 내용의 즐거움에 머물지 않으려면, 그 즐거움 현상과의 밀착을 스스로 거부하고 거리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자발적 거리두기 능력은 주 가지 조건에서 생겨난다. 하나는, 그 즐거움의 속성과 그것을 발생시킨 조건들을 성찰하는 ‘이해능력’이다. 다른 하나는, 그 주거움과 발생조건들을 붙들지 않는 ‘마음능력’이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특정 즐거움에 머물지 않고 더 수승한 즐거움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다시 말해 ‘더 수승한 줄거움을 발생시키는 새로운 조건들’을 지속적으로 탐구하는 과정에서, 이 두 가지 능력에 눈떠 발전시켜 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봇다가 된 후의 설법은 이러한 ‘이해능력’과 ‘마음능력’을 열어주는 데 초점을 두었고,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그 내용과 방식이 갈수록 풍요로워졌을 것이다.
이 ‘이해’와 ‘마음’의 문제는, 붓다의 모든 법설뿐만 아니라 붓다 이후 불교의 모든 교학과 수행을 관통하는 요추(腰椎)라고 생각한다. 연기(緣起) 깨달음과 연기(緣起) 구현, 혜학(慧學)과 정학(定學), 위빠사나와 사마타, 관(觀)과 지(止), 선종의 무념(無念), 돈오견성, 화두 참구, 보살행 등 모두 이 문제와 직결된다고 생각한다. 니까야/아함을 통해 붓다와 대화하는 작업, 남전(南傳)과 북전(北傳)의 대화, 북전 내부의 대화, 붓다의 정학(定學)과 선종(禪宗) 선학(禪學)의 연관을 통섭적(通攝的)으로 탐구하여 불교 고유의 문제 해결력을 확인·발전·구현해 가는 전망도, 결국 이 문제로 수렴하고 이로부터 발산된다. <‘이해능력’과 ‘마음능력’에 의한 거리두기>가 무엇을 의미하며, 삶의 근원적 치유와 행복, 깨달음의 개인적·사회적 구현과 어떤 인과적 연관이 있는지, 그에 대한 관점과 탐구과정을 언어에 담아보는 것이 필자 개인의 최고 관심사이다. 나름대로 가꾸어가는 생각을 기회 되는대로 피력하면서 지혜공동체와 상호작용해 보고 싶다. 붓다가 알려준 ‘이해능력’과 ‘마음능력’ 그리고 그에 수반하는 ‘행위능력’이야말로, 인간 진화(進化)의 궁극, 그 마지막 진화(進化)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이전의 수행으로는 확보할 수 없었던 새로운 ‘이해능력과 마음능력’에 개안(개안)했으며, 그 핵심은 <모든 경험현상과 그것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을 만나고 보면서도, 그것들에 갇히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었다. ‘어떤 즐거움도 붙들지 않는 이해와 마음’ ‘어떤 즐거움에도 갇히지 않을 수 있는 이해와 마음’을 포착하여, 그 지평에서 모든 즐거움과 관계 맺는 새로운 국면을 연 것이다. <어떤 즐거움도 붙들지 않고 어떤 즐거움에도 갇히지 않는다>라는 것은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그 어떤 조건들도 붙들지 않아 그것들에 안주하거나 갇히지 않는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경험/체험과 그 발생 조건들을 붙들어가 그것들에 갇히지 않는 지평을 확보하는 것이 선(禪) 수행이고 해탈(解脫) 수행이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모든 해탈(解脫) 수행과 선(禪) 수행은 특정 현상/경험/체험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마침내 기존의 선정(禪定) 수행법과 차별화되는 붓다의 선법(禪法)이 완성되었다. 붓다의 선(禪)은 <그 어떤 경험/체험과 그 발생 조건들에도 갇히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이해와 마음의 지평에서 열어주고 확립시켜 주는 길>이다.
【네 번째 성공 요인: ‘조건인과적 발생’에 대한 직접지(直接知) 성취 – 삼명(三明), 체득적(體得的) 연기 깨달음】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전생의 기억에 대한 앎으로 향하게 했습니다.[숙명통(宿命通)] 이와 같이 나는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에 관하여 ‘한 번 태어나고 두 번 태어나고 세 번 태어나고 네 번 태어나고 다섯 번 태어나고 열 번 태어나고 스무 번 태어나고 서른 번 태어나고 마흔 번 태어나고 쉰 번 태어나고 백 번 태어나고 천 번 태어나고 십만 번 태어나고 수많은 세계가 파괴되고 수많은 세계가 생성되고 수많은 세계가 파괴되고 생성되는 시간을 지나면서, 당시에 나는 이러한 이름과 이러한 성을 지니고 이러한 용모를 지니고 이러한 음식을 먹고 이러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맛보고 이러한 목숨을 지녔었고 나는 그 곳에서 죽은 뒤에 나는 다른 곳에서 태어났는데, 거기서 나는 이러한 이름과 이러한 성을 지니고 이러한 용모를 지니고 이러한 음식을 먹고 이러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맛보고 이러한 목숨을 지녔었다. 그 곳에서 죽은 뒤에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기억했습니다.
악기베싸나여, 이것이 내가 밤의 초야(初夜)에 도달한 첫 번째 앎입니다. 참으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그것이 나타나듯, 무명(無明)이 사라지자 명지(明知)가 생겨났고 어둠이 사라지자 빛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악기베싸나여, 나의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뭇 삶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앎으로 향하게 했습니다.[천안통(天眼通] 이와 같이 나는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눈[天眼]으로 뭇 삶들을 관찰하여,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천하거나 귀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업보(業報)에 따라서 등장하는 뭇 삶들에 관하여 ‘어떤 중생들은 신체적으로 악행(惡行)을 저지르고 고귀한 님들을 비난하고 잘못된 견해를 지니고 잘못된 견해에 따라 행동했다. 그래서 그들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난 것이다. 그러다 다른 중생들은 신체적으로 선행(善行)을 하고 고귀한 님들을 비난하지 않고 올바른 견해를 지니고 올바른 견해에 따라 행동했다. 그래서 그들은 육체가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난 것이다.’라고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 눈[天眼]으로 뭇 삶들을 관찰하여,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천하거나 귀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업보(業報)에 따라서 등장하는 뭇 삶들에 관하여 분명히 알았습니다.
악기베싸나여, 이것이 내가 밤의 중야(中夜)에 도달한 한 후 두 번째의 앎입니다. 참으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그것이 나타나듯, 무명(無明)이 사라지자 명지(明知)가 생겨났고 어둠이 사라지자 빛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악기베싸나여, 나의 안에서 즐거운 느낌이 생겨나더라도 그것이 나의 마음응ㄹ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번뇌의 소멸에 대한 앎으로 향하게 했습니다.[누진통(漏盡通)]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번뇌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번뇌의 발생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내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자,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의한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고 존재에 대한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고 무명(무명)에 의한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습니다. 해탈되었을 때에 나에게 ‘해탈되었다’는 앎이 생겨났습니다. 나는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알았습니다.
악기베싸나여, 이것이 내가 밤의 후야(후야)에 도달한 세 번째 앎입니다. 참으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그것이 나타나듯, 무명(무명) 사라지자 명지(명지)가 생겨났고 어둠이 사라지나 빛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악기베싸나여, 나의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그것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3)
“그런 나는 이와 같이 마음이 집중되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활발발하고, 안정되고, 흔들립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전생(前生)을 기억하는 지혜[宿命通, 숙명통]로 마음을 향하게 했습니다. 그런 나는 한량없는 전생(前生)의 갖가지 삶들을 기억했다. 즉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십만 생, 세계가 수축하는 여러 겁(劫)을 기억했다. 어느 곳에서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이런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서 다른 어떤 곳에 다시 태어나, 그곳에서는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이런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다시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 특색과 더불어 상세하게 기억해냈다.
악기베싸나여, 이것이 내가 밤의 초경(初更)에 증득한 첫 번째 명지(明知)이다. 마치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무는 자에게 무명(無明)이 제거되고 명지(明知)가 일어나고 어둠이 제거되고 광명이 일어나듯이, 내게도 무명(無明)이 제거되고 명지(明知)가 일어났고, 어둠이 제거되고 광명이 일어났다. 악기베싸나여, 내게 비록 이러한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지만 그것이 내 마음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그런 나는 이와 같이 마음이 집중되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활발발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중생들이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天眼通, 천안통]로 마음을 향하게 했다. 그런 나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天眼]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천박하고 고상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善處]에 가고 나쁜 곳[惡處]에 가는 것을 보고, 중생들이 지은 바 그 업(業)에 따라 가는 것을 꿰뚫어 알았다. ’이들은 몸으로 못된 짓을 골고루 하고 말로 못된 짓을 골고루 하고 또 마음으로 못된 짓을 골고루 하고, 성자(聖者)들을 비방하고, 아주 나쁜 견해를 지니어 사견업(邪見業)을 지었다. 이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처참한 곳[苦界], 불행한 곳[惡處], 파멸처 지옥(地獄)에 태어났다. 그러나 이들은 몸으로 좋은 일을 골고루 하고 말로 좋은 일을 골고루 하고 마음으로 좋은 일을 골고루 하고 성자(聖者)들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니고 정견업(正見業)을 지었다. 이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善處], 천상세계에 태어났다‘라고 이와 같이 나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천박하고 고상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善處]에 가고 나쁜 곳[惡處]에 가는 것을 보고, 중생들이 지은 바 그 업(業)에 따라 가는 것을 꿰둟어 알았다.
악기베싸나여, 이것이 밤의 이경(二更)에 내가 증득한 두 번째 명지(明知)이다. 마치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돌겨하여 머무는자에게 무명(無明)이 제거되고 명지(明知)가 일어났고 어둠이 제거되고 광명이 일어나듯이, 내게도 무명이 제거되고 명지가 일어났고 어둠이 제거되고 광명이 일어났다. 악기베싸나여, 내게 비록 이러한 즐거움이 일어났지만 그것이 내 마음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그런 나는 이와 같이 마음이 집중되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활발발하고, 안정되고, 혼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漏盡通, 누진통]로 마음을 향하게 하였다. 그런 나는 ‘이것이 괴로움이다’(苦)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았고,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集)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았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滅)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았고,‘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인도하는 도닦음이다’(道)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았다. ’이것이 번뇌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았고,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았고,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았고, ’이것이 번뇌의 소멸에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았다. 내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볼 때 나는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欲漏]에서 마음이 해탈했다. 무명(無明)에 기인한 번뇌[無明漏]에서도 마음이 해탈했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겼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淸淨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알았다.
악기베싸나여, 이것이 밤의 삼경(三更)에 내가 증득한 세 번째 명지(明知)이다. 마치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여 머무는 자에게 무명(無明)이 제거되고 명지(明知)가 일어났고 어둠이 제거되고 광명이 일어났다. 악기베싸나여, 내게 비록 이러한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지만, 그것이 내 마음을 제압하지는 못했다.4)
요점
수승한 즐거움과 그 발생 조건들을 향상적으로 포착하는 동시에, 모든 즐거움과 발생 조건들에 갇히지 않는 능력을 확보해 가던 고타마 싯다르타. 그는 그 과정의 정점인 궁극경지에서 문득 과거생(過去生)으로 관점을 기울인다. 그러자 과거생의 개별화된 삶들을 관심가는 대로 추급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숙명통 宿命通>. 이어서 수많은 개별 과거생들의 상호 연관으로 관심을 기울이자, 삶의 연속적 전개 사이에 인과적 연관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천안통 天眼通>.
그렇게 ’직접 알게된 앎‘(直接知)으로써 성취한 ’조건 인과적 발생에 대한 통찰‘(緣起 깨달음)을 현재 실존에 적용하였다. 그러자 ’삶의 괴로움 및 그것과 맞물려 있는 번뇌라는 현상‘(苦) ’그 현상을 발생시키는 인과적 조건들‘(集) ’고통과 번뇌를 발생시키는 인과적 조건들에서 풀려난 지평‘(滅)이 확연해졌다. 이어서 ’더 이상 고통과 번뇌의 발생 조건들에 매이지 않는 지평‘(解脫)이 완벽해졌고, ’그런 성취가 구현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는 능력‘(解脫知)이 밝아졌다.<누진통 漏盡通>
이 모든 과정에서도 그런 능력들을 조건으로 즐거움이 발생했지만, 그 즐거움도 붙들지 않고 그 발생 조건들에 갇히지 않을 수 있었다. ’풀려남‘(解脫)의 상위(上位) 지평이 완벽하게 현현이다. 붓다가 되었다.
음미
이른바 ’세 가지 특별한 능력이 밝아졌다’(三明:숙명통·천안통·누진통)는 회고이다. 세 가지 가운데 숙명통(宿命通)과 천안통(天眼通)은 과거 전생의 삶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경험의 일상성을 벗어난다. 그런 점에서 고타마 싯다르타에게 실제로 이런 능력이 생겼는지, 아니면 붓다에 대한 존경과 숭배의 념(念)이 입혀놓은 신비의 옷인지 의견이 분분하게 된다. 모두 열어두어야 할 가능성이다. 기록이 전하는 내용과 같은 숙명통과 천안통을 직접 체득하여 경험으로 증언하는 사례가 재현된다면 결정적일 것이다. 그런 증명은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누구나 자발적 노력으로 성취 가능한 능력이라 해도, 또 이런저런 유사 사례를 인정한다 해도, 붓다의 경우와 같은 사례의 반복은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특별한 것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