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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백광현’ 외과술은 허구가 아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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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백광현(白光玹)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마의’가 50회의 기나긴 여정을 마쳤다. 조선 후기 실존인물인 백광현은 현종과 숙종 대에 내의원 안팎에서 활약하면서 종1품 숭록대부에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지금까지 그의 의학 행적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었기에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안 많은 궁금증을 낳았던 것이 사실이다. 만약 드라마라는 장르 때문에 추가된 여러 허구와 극적장치를 뺀다면 그의 의학 행적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그의 행적과 치료사례는 「지사공유사 부경험방(知事公遺事 附經驗方)」(작은 사진)이라고 하는 고서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은 현재 일본의 행우서옥(杏雨書屋)에 원본이 남아 있고 한국의 국립중앙도서관에 사본이 보관되어 있다. 백광현의 후손 혹은 제자가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이 책이 전하는 백광현의 실제 행적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자. 18센티 길이의 사골(死骨)을 꺼내다 “선비 정씨가 여러 날 동안 다리가 아팠는데 어떤 의사는 각기(脚氣)로 보고 치료하였고, 어떤 의사는 담종(痰腫)으로 보고 치료하였다. 공이 진찰하고서 말하기를 ‘가히 기이한 병이로다’ 하고서 마침내 기문(箕門)혈 아래를 침으로 째고서 손으로 6치 정도 길이의 사골(死骨)을 꺼내니 통증이 즉시 그쳤다.” 1치(寸)가 약 3cm에 해당하므로 6치는 18cm 정도에 해당한다. 사골(死骨)을 꺼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대퇴골의 골수염으로 인한 부골(腐骨)을 적출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구강에서 결석을 꺼내다 “한 의사가 홀연히 이문(耳門) 혈 부위에서 마치 벌레가 기어가는 듯 하더니 혼절하여 깨어나지 못하였다. (중략) 공이 진찰하여 보니 맥이 모두 화평하였다. 또한 그 입 속을 살펴보고서 이에 말하기를 “이는 석종(石腫)이다”라고 하였다. 침으로 혀 아래의 이어진 부분을 째고서 돌덩어리를 꺼내니 마치 은행 크기와 같은 것이 여러 개가 나왔다. 이에 환자가 곧 깨어났다.” 여기서 혀 아래의 이어진 부분(舌下縫)이란 설소대(frenulum linguae)를 말하는 것이고 석종(石腫)이란 악하선관 결석(Submandibular duct calculus)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백광현은 악하선관 부위를 침으로 째고서 결석을 적출했다는 얘기가 된다. 폐옹(肺癰)을 침으로 배농하다 “공이 말하기를 ‘형색을 살펴보니 폐옹의 병이 들었고 이미 고름이 차 있다’라고 하였다. 신이헌이 말하기를 ‘나는 자는 것과 먹는 것이 평소와 똑같고 별다르게 아픈 곳도 없다’라고 하니 공이 맥을 짚은 후에 말하기를 ‘오늘 밤 반드시 크게 통증이 생길 것이고 만약 며칠이 더 지나면 반드시 치료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하였다. (중략) 그날 밤이 되자 정말로 크게 통증이 생겼고 이경석이 크게 놀라 공에게 와서 치료를 구했다. 공이 마침내 침으로 째서 고름을 뽑아내니 한 달 여 후에 병이 나았다.” 폐옹이란 폐와 부속기관에 고름이 차는 병으로 폐농양이나 흉막염 혹은 이로 인한 농흉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백광현이 신이헌의 흉부를 침으로 째서 고름을 뽑아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신이헌의 질병은 농흉으로 추측된다. 또한 백광현의 치료법은 현대에도 실시되는 흉관삽입술을 통한 배액 시술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복부를 절개하여 이물질을 꺼내다 “여러 달 동안 배에 병이 있었는데 침과 약이 모두 효과가 없었다. 공이 진찰하고서 말하기를 ‘이는 예부터 말하던 발하(髮 )의 병이다. (중략) 옛사람들이 이 병을 치료할 때에는 단지 참기름을 먹고서 위로 토하고 아래로 설사시키는 방법을 썼는데 지금 이 경우에는 사용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마침내 종침(腫鍼)으로써 배꼽 옆을 째고 곡침(曲鍼)으로 하얀 벌레를 꺼내니 길이가 1자 정도 되고 모양은 마치 뱀과도 같았으며 뜨거운 식초에 담그니 이에 하나의 머리카락이었다. 병이 마침내 나았다.” 종침(腫鍼)이란 피침을 말하는 것이고 곡침(曲鍼)이란 끝이 갈고리 형태로 굽어있는 침을 말한다. 그렇다면 복부를 절개하여 1자(尺, 30센티) 길이의 이물질을 적출한 것이다. 김연(金演)이라는 이의 아내가 앓았던 병을 치료한 방식도 이와 유사하다. “우측 하복부가 찌르듯이 아팠는데 한 달 가량을 의사들이 치료해도 효과가 없었다. (중략) 공이 진찰한 후 말하기를 ‘이는 충(蟲)으로 인한 병이다. (중략)’ 하고서 마침내 종침(腫鍼)으로 째고 곡침(曲鍼)으로 한 마리의 벌레를 꺼내니 형체가 크고 길이가 1자 가량 되었다.” 이 역시 종침(腫鍼)과 곡침(曲鍼)을 써서 기생충으로 의심되는 어떤 벌레를 복부 절개를 통해 적출한 사례이다. 이 사례들로 미루어 보아 비록 절개의 길이를 정확히 알기는 힘들지만 백광현이 개복을 하여 복부의 이물질과 기생충을 적출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절름발이 환자를 치료하다 “한 시장 사람이 다리를 절뚝거리는 병에 걸려서 똑바로 걸을 수가 없었다. (중략) 공이 그 병이 환도(環跳) 혈에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서 침을 놓았다. 수십 일 동안 다리를 절뚝거리던 사람이 침을 맞은 후에 다리를 굽히고 펴는 것이 마음대로 되고 똑바로 걸어서 시장으로 걸어가게 되니 시장 사람이 모두 놀랐고 공의 침법을 따랐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환도 혈에 병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환자는 고관절염을 앓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환도 혈의 위치나 깊이로 미루어 보건대 상당한 정도의 침습을 행하여 치료한 것으로 보인다. 인선왕후의 발제종을 12센티로 절개하다 “인선왕후가 발제(髮際) 부위에 종기를 앓았는데 창양의 뿌리가 매우 컸고 독기의 증후가 나날이 심해졌다. 약간의 죽도 삼키지 못한 것이 수일이 넘었다. (중략) 공이 마침내 거침(巨鍼)을 써서 각 4치 정도 길이로 천(川)자 모양으로 종기의 뿌리를 쨌다. 상이 옆에서 지켜보다가 어수를 들어 침술을 멈추게 하였으나 공은 꿋꿋이 침술을 다 마쳤다. (중략) 상이 일러 말하기를 ‘아! 자전께서 침을 맞은 후에 바로 미음을 드실 수가 있도다!’ 하였다. (중략) 공이 돌아와 집안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오늘 수명이 10년은 줄어들었다고 하였다.” 4치란 12cm를 말하는데 그렇다면 뒷목 부위를 12cm 길이로 세 군데를 절개하여 크기가 매우 큰 근(根)을 적출했다는 얘기가 된다. 12cm 절개라야 적출이 가능한 어떤 큰 종양이 아니었을까 싶다.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과 서양 의학의 유입으로 한의학이 억압되는 과정에서 한의학의 외과술 역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지금 한의사들에 의해서 외과술이 시행되고 있지 않다보니 과거에 분명히 시행되었던 외과술 역시 상상에 의한 허구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사장되어 있는 인물을 발굴하지는 못 할망정 실제로 있었던 역사마저 부정해서야 되겠는가? 백광현이 의관이라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적이 책으로까지 남겨져 있다는 것은 조선 시대에 매우 특이하고 드문 일이다. 이는 그가 당시의 사람들에게서 큰 존경을 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우리 역사 속의 인물을 발굴하고 그의 행적을 조명한다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뜻 깊은 일임에 틀림이 없다. 더군다나 그 인물이 한의학 역사 속의 인물이기에 더욱 반겨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선 시대에 한 의인에 의해 걸출한 외과술이 시행되어졌다는 사실이 지금의 한의사들에게 어떤 의미와 효용이 있을지는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라고 본다. 방성혜 /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원 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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