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의 성경
성경이 가진 힘 - 위클리프와 링컨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링컨(Abraham Lincoln)의 말은 현대 민주주의의 초석과도 같은 선언이다. 그러나 이 말은 성경을 처음으로 영어로 번역했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가 자신이 번역한 성경의 서문에 쓴 첫 문장을 인용한 것이다. “이 성경은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통치를 위한 것입니다”(This Bible is for the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and for the people), 1382년의 일이다. 테오도르 파커 (Theodore Parker)라는 목사가 1858년에 보스턴에서 행했던 설교문이 링컨에게 전해지면서 그의 마음에 이 표현이 담긴 것으로 보인다. 위클리프가 ‘이 성경’(this Bible)이라고 지칭한 것은 자신이 라틴어에서 영어로 번역해서 내놓은 성경을 가리킨다. 당시에는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일이 엄격하게 제한되고 그 권위가 성직자들에게만 있었다. 위클리프에게는 평민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성경을 읽고 이해하기 시작하면 세상이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라는 신념이 있었다. 비록 그는 많은 핍박을 받고, 죽고 나서도 이단으로 정죄 받아 부관참시를 당하는 비운을 겪었지만, 결국 세상은 그의 생각대로 움직여 갔다. 성경이 가진 힘이었다.
책의 승리
위클리프에게 영향받은 틴데일(William Tyndale)은 독일로 건너가 비밀리에 성경을 번역한다. 헬라어에서 영어로 번역된 성경이다. 그는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했지만, 그가 죽은 지 75년 후에 영국 왕의 이름으로 영어 성경이 출판된다. 오늘날까지 권위를 인정받는 흠정역 성경(King James Version)이다. 이 성경은 70%가량이 판테일의 번역에 의지하고 있다. 턴테일은 성경 번역을 반대하는 권력자들과 고위 성직자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하나님께서 저의 생명을 연장해 주신다면 쟁기를 가는 소년이 당신들보다 더 성경을 알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생기를 가는 소년들의 손에 성경이 들어가면서 평민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민주주의 시대가 열렸다. 위클리프가 성경의 서문을 쓰면서 밝힌 포부가 현실이 된 것이다. 칼과 창으로 무장한 권력보다 책을 번역하고 출판하여 사람들에게 읽히고 생각을 바꾸어 간 사람들이 승리한 역사이다. 그 중심에 성경이 있었다.
성경이 가져온 인권의 진전은 미국 독립선언서 첫 문장에서도 확인된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동등하며, 신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성경의 가르침에서 나온 사상이다. 물론 영국의 권력에 대항하여 이런 주장을 한 백인들이 흑인 노예들을 '모든 사람의 범주에 넣지 않았던 것은 뚜렷한 한계다. 그러나 그 억압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그리스도 신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독특한 영성을 발전시킨 것은 놀랍다. 이 역시 제도교회와 주류문화와 거리를 유지하며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할 힘을 가진 성경이 신앙의 중심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틴데일 당시 독일에서는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종교개혁의 불길을 이어가고 있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 주님이자 선생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 (마 417)고 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믿는 사람들의 삶 전체가 회개가 되기를 바라셨다. 이 논제는 ‘면벌부’ 매매를 비롯한 교회의 관행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렇지만 이 논제의 실질적인 중요성은 성경이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절대권위를 가지고 있던 제도교회의 가르침과 관행을 비판했다는 데 있다. 이 논제의 바탕에는 제도교회의 어떤 권위도 성경 위에 있을 수 없다는 루터의 사고가 깔려 있었다. 이는 교회의 어떤 구체적인 관행에 대한 비판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될 혁명의 씨앗이었다. 뒤이은 장 칼뱅(Jean Calvin)과 개혁주의 교회는 성경 중심의 신앙을 더욱 강화해 갔다.
구텐베르크-금속활자의 기술, 그리고 기독교의 문화
1999년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입은 인류 역사 1,000년을 정리하면서, 지나간 천년을 대표하는 인물(Man of the Millennium)로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를 꼽았다. 금속활자 발명이 1,000년을 대표하는 결정적 순간이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금속활자의 발명과 사용에 있어서 한국과 중국이 서양보다 훨씬 앞섰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구텐베르크가 인류 역사 천년을 대표하는 인물이 된 것은 ‘기술’만이 아니라 ‘문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구텐베르크가 독일의 마인즈에서 금속활자를 활용한 책을 처음 찍어 낸 해가 1440년인데 불과 15세기 말에는 인쇄시설이 유럽의 270개 도시로 퍼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나 한국에서 인쇄술의 발달은 이런 폭발적인 문서 유포로 이어지지 않았다. 한자가 표의문자여서 너무 많은 활자가 필요했다는 기술적 한계가 지적되곤 한다. 그러나 아시아에서는 그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인쇄된 소수의 문서도 폭넓게 유통되지 않았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이 폭발적으로 확산한 이유는 성경과 기독교의 문서문화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가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 것을 영어로는 ‘The Reformation’, 독일어로는 ‘Die Reformation’이라고 한다. ‘종교’라는 말은 없다. 종교에 한정된 것이 아닌,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제 계층 간의 관계 등을 포함하여 세상 모든 것의 개혁을 일컫는 말이다. ‘The’라는 정관사로 충분한 이유는 역사 속에 유례가 없는 독보적이고,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개혁이기 때문이다. 이 개혁의 중심에 성경이 있었다.
회당과 교회-다른 듯 같은 모습
사도 바울의 선교 역시 유대교를 중심으로 볼 때 하나의 개혁운동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은 자기가 살았던 시대의 유대교 회당과 교회 모임을 이렇게 비교한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낭독할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후 3:15,16)
교회도, 회당도 '함께 모여서 책을 읽는 공동체'였다. 히브리 성경의 한 대목을 낭독하고 해설하는 것은 당시 회당 예배의 핵심이었다. 기독교의 예배도 이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바울은 같은 책을 읽으면서도 다른 해석을 한다는 점에서 두 공동체를 구별하지만, 두 공동체가 모두 책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유지되고 발전되어 나갔다는 사실은 중요한 공통점이다. 그리스도 교회는 구약의 헬라어 번역인 칠십인역을 경전으로 받아들이고, 그 성경을 함께 읽었다. 그 성경의 어휘와 신학적 주제, 사고의 틀, 논리 전개 방식, 이미지 등을 활용하여 자기들의 이야기를 해나갔고, 자기들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 내용이 문서로 기록된 것이 신약성서다. 그리고 이내 자기들이 생산한 문서를 유대인들이 구약성서를 읽듯이 읽기 시작했다. 바울이 보낸 편지가 도착하면 고린도와 빌립보, 데살로니가의 교인들은 모여서 한 명이 낭독하고, 모두가 경청했다. 주후 40-50년경부터 형성된 관습이다. 20-30년 후부터는 예수의 생애 이야기들이 기록되었고, 비슷한 방식으로 전달되고, 경청했다. 이 책들에 복음서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나의 성경의 탄생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칠십인역을 읽던 방식으로 사도들의 서신과 복음서를 읽으며 예배했다. 자신들이 산출한 문서에 구약과 비슷한 권위를 부여했으며, 자신들의 ‘성경’이 구약의 내용을 제대로 계승했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레 구약과 신약이 같은 내용을 말하는 책이라 여기게 되었다. 역사학자 펠리칸(Jaroslav Jan Pelikan)은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역사 최대의 사건이라 말한다.
구약과 신약을 포괄하는 하나의 성서라는 개념의 출현은 결과적으로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종보다도 거대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성서, 역사와 만나다, 중).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인정하면서 기독교는 박해받던 종교에서 권력의 종교로 바뀌었다. 그러고 나서 모든 것이 변했다고들 생각한다. 아니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모든 것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콘스탄티누스 이후에도 권력을 지향하지 않고 반대쪽으로 움직인 사막의 교부들이 있었다. 대도시의 주교 자리에 있으면서도 권력과 선명하게 선을 그은 암브로시우스, 크리소스토무스 같은 지도자들이 있었다. 대중들의 눈에는 그들이 그리스도교를 대표했다.
우리가 콘스탄티누스 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는 것은 좋으나 지나치게 비관적인 평가도 조심해야 한다. 물론 교회와 정치의 결탁이 끼친 영향은 심대하다. 그러나 교회는 한순간도 지배체제와 이데올로기에 일사불란하게 포섭되었던 적이 없다. 언제나 다른 목소리가 있었고, 타협할 수 없는 진리에 대한 지향이 있었다. 그 해에는 결코 어떤 체제나 지배문화에 의해 용해될 수 없는 ‘기록된 말씀’, 성경이 있었다. 종교개혁도 기록된 말씀이 갖는 힘이 땅속에서 면면히 흐르다가 표층으로 올라온 사건이라고 보아야 한다.
성경과 합리적 사고
펠리칸의 말에 첨언하자면 구약과 신약이 하나의 성경으로 인식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그 성경이 공동체를 형성해 가는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낭독된 말씀을 듣는 것이 예배였고, 그 말씀의 뜻을 함께 헤아려 보는 것이 서로를 세워 가는 과정이었다.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공동체 내에서 가치 있고 존중받는 삶으로 여겨졌다. 예수를 따르는 삶은 기록된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분별하고 행하는 예배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갔다. 바울과 그의 청중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합리적 예배'(롬 122) 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합리적 예배’라는 뜻의 헬라어 ‘로기케 라트레이아’가 개역개정에는 ‘영적 예배’로 번역되어 있다. 합리적이라는 말과 영적이라는 말을 정반대의 위치에 놓고 생각하는 현대인은 이를 의아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역사 전체를 통틀어 보면 성경의 신앙이 합리적 사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의 발흥』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로드니 스탁(Rodney Stark)의 이성의 승리 역시 주목할 만한 저작이다. 이 책에서 그는 헬라의 경험적 합리적 사고와 그리스도교의 신비적, 관념적 사고를 대비시키는 이분법에 도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 낙하 시 ‘무거운 것은 빨리 떨어지고 가벼운 것은 천천히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간단한 실험으로 참인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예들은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 위대한 스승의 사변적 결론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도전하려 하지 않았다.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했을 때 가장 완고하게 반대한 그룹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중심 교리'를 신봉하는 이들이었다. 스탁은 철학자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의 1925년 하버드 대학교 강연을 인용하면서, 합리적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믿음이 자연계에 일관성 있는 법칙을 기대하는 세계관을 만들었고, 이런 세계관이 서구의 과학발전을 가능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스타에게 있어서 이성의 승리는 기독교의 승리였다. 그 중심에 합리적인 사고를 주문하고 배양해낸 성경의 역할이 있었다.
이런 사고를 따라가면 중세 암흑시대(Dark Age)라고 하는 익숙한 주장을 만난다. 그러나 과학기술, 경제발전, 문화예술 면에서 중세는 꾸준한 발전을 해왔다. 근대의 과학혁명은 그 축적의 연장선상에서 보아야 한다. 르네상스를 빛으로, 중세를 어둠으로 이해하는 낡은 이분법은 엄정한 사료의 도전 앞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제도적인 고등교육과 학문연구가 성경을 연구하는 스콜라학자들에 의해 중세에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이 없었다면?
성경이 없었다면 지금 이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기 어렵다. 본 연재는 정치와 사회, 과학과 기술, 예술과 문화, 인권과 민주주의, 여성과 아동의 삶 등 각 분야에 끼친 성경의 영향을 가늠해 보려는 시도다. 우리는 성경이 정보(information)가 아닌 ‘변화와 형성’(transformation)을 위한 책임을 알고 있다. 이 성경이 신자 개인뿐 아니라, 어떻게 공동체를 형성하고 오늘의 인류문명을 만들어 왔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이 작업은 오늘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유산이 무엇이며, 우리가 여전히 꿈꿀 수 있는 내일이 어떤 모양인지를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여정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한다.
글/ 박영호 목사
미국 예일대학교(STM)와 시카고대학교(PhD)에서 신약과 초기 기독교 문서를 연구했으며 현재는 포항제일교회 담임목사, 미래목회와말씀연구원 원장으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빌립보서』(홍성사), 『다시 만나는 교회』(복있는사람), 『우리가 몰랐던 1세기 교회』(IVP) 등이 있다.
출처
매일성경 2023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