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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선 봉
작가, 한국문인협회 고흥지회장 역임, 한국문인협회 문학사료 발굴위원, 전, 제주 나누리 라이온스클럽 회장, 제1회 詩聖 한하운 보리피리 문학상 수상. 작품 : 《소록도, 천국賤國으로의 여행》, 《곡산谷山의 인동초 사랑》, 《나의 직장암 투병기》, 《곡산谷山의 솔바람 소리》.
전시 : 《곡산谷山의 솔바람 소리》(호텔 갤러리, 고흥), 〈고독 끝에서 피어난 꽃〉(전남도청 갤러리, 무안).
1939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난 강선봉은 여덟 살이 되던 1946년 ‘한센인’이었던 어머니와 함께 소록도에 강제로 격리되었다. 그리고 열세 살때 그도 역시 ‘한센인’이 되고 만다.
강선봉의 학력은 소록도 안에 있던 소학교와 중학교를 거쳐 성실고등성경학교를 졸업하고 소록도에서 최고 교육기관인 ‘의학강습소’ 과정을 6기로 수료한다.
1962년 오마도 간척사업이 시작됐을 때 극적으로 소록도를 떠나 사회로 복귀할 수 있었고, 이후 의료인으로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개척해 나갔다. 그리하여 2006년 한센인의 인권회복과 과거 소록도의 실상과 현재를 살아가야 하는 한센인의 위치를 밝히기 위하여 《소록도, 천국賤國으로의여행》을 출간하여 세상에 알린다.
소록도는 전라남도 고흥반도 남쪽 끝에 있다. 그 지형이 사슴의 머리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옛날부터 녹도鹿島 또는 녹두鹿頭라 불렀다. 소록도의 면적은 약 3.79km2 해안선은 약 14km이며, 100여m의 완만한 구릉지대에 수목이 울창하고 토양이 비옥하여 농경에 적합하였고, 해산물 채취가 성하여 어업이 발달했다. |
나를 돌아보며 삶을 돌아보며
이제 내 나이가 고희를 넘겨 여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의 어머니를 사랑하고 감사함으로 살아 왔습니다.
일흔을 종심従心이 라 부르며 ‘뜻대로 해도 어긋나지 않는 나이’라고 하는 옛말에 기대어 내 삶을 노래한 부끄러운 시들을 엮었습니다.
나는 8살에 어머니의 손을 잡고 소록도에 왔습니다. 부산 태종대의 임시 거주시설에서 같이 지냈던 주위의 많은 분들이 ‘그 섬에 한 번 가면 다시는 육지로 나올 수 없다’하며, 가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어머니의 손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1939년에 공동묘지가 있는 산골짜기 움막에서 ‘곡산이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걸식하러 다니는 아버지의 무등을 타고 여기저기 다니는 게 좋았습니다.
5살 때 진주 반성에서 아버지의 무등을 타고 연화산 길을 넘어 고성으로 걸식을 왔습니다. 그곳에서 임시로 잠자리만 겨우 만들어 얼마간의 동냥으로 간신히 우리 세 식구의 목숨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몸이 아파 걷지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곡산이 일행이 교대로 아버지를 업고 연화산 길을 다시 넘어 돌아왔지만 그 어떤 치료도 할 수 없었습니다.
동냥으로 모은 약간의 돈이 있어도 아버지를 치료해 주겠다는 의사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좋다는 민간요법으로 정성껏 간병하였으나 동짓달 스무하루 날, 곡산이었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나를 남겨두고 눈을 감으셨습니다.
어머니의 슬픔 속에서 광복이 찾아왔습니다. 이제는 어디를 가더라도 내 나라의 땅이라고 믿었기에 부산 태종대(과거 일본군인 막사에서)에서 여름을 보내고 늦은 가을 오륙도 앞 바다에서 소록도로 가는 짐배에 올라탔습니다.
동력선이 끌고 가는 배의 좁은 방안에 남녀노소 구별 없이 짐짝처럼 구겨진 채 1박 2일 동안 파도가 출렁이는 대로 우리도 같이 출렁이며 소록도로 향했습니다. 좁은 배 안에서 싸우기도 하고 바닷물로 지은 주먹밥을 씹어 먹으면서 겨우 소록도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배에서 내리니 선창이 울퉁불퉁하게 보일 정도로 속이 울렁거렸지만, 어머니와 나는 서로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닥쳐왔습니다. 미감아동으로 분류된 나는 어머니와 함께 살지 못하고 보육원으로 끌려가게 된 것입니다.
나는 어머니의 울부짖음을 뒤로한 채 끌려가던 솔밭 길의 소나무를 스쳐지나가던 애달픈 바람소리를 지금도 기억합니다.
보육원에서의 생활은 슬픔과 배고픔의 나날이었습니다. 어느 날 땅에 굴러다니는 고롱게(멀구슬나무) 열매가 사탕으로 보여 주워 먹고, 또 반쯤 썩은 메주콩을 훔쳐 먹은 걸 들켰습니다.
눈보라치는 바깥에서 손들고 서 있는 벌을 받았습니다. 어둠과 추위와 공포 속에서 기절했다가 깨어나 보니, 양손과 양발이 동상에 걸려 있었습니다. 몇 개월 동안 치료를 해도 낫지 않아 어머니가 계시는 병사지대로 이동되어 어머니의 간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동상 끝에 찾아온 것은 한센병이었습니다. 나도 부모님처럼 12살에 곡산이가 된 것이지요.
한센병에 걸린 걸 알자마자 찾아온 자통刺痛은 죽음과 같은 고통이었습니다. 2년 동안 지속되던 통증이 가라앉자 몸에는 한센병의 흔적이 남았지만 죽음같은 통증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안도했습니다. 한센인이 되어 소록도 안에 있던 소학교와 중학교를 거쳐 성실고등성경학교를 졸업하고 녹산의학강습소 6기로 수료하여 같은 한센인의 상처를 수술하고 치료해 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오마도 간척사업장에서 의료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오마리’에 살고 있던 청년이 밤에 몸이 아파 그 청년의 집으로 가서 치료를 해주게 되었습니다. 청년의 병세가 나아지기를 기다리면서 살펴본 그 가정의 모습은 나에게 충격이었습니다. 가난하였지만 온 가족이 어울려 함께 사는 모습을 보니 나의 삶이 마치 호리병 속에 갇힌 것만 같아 소록도에서 나가 사람같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소록도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탈출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외출 허락을 받은 어느 날, 소록도를 나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무작정 소록도에서 나왔으나 고향도 없고 일가친척도 없으니 살아갈 길이 막막했습니다. 하루하루를 살기 위해 곡산이의 유산인 걸식을 반 년 정도 다녔습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소록도에서 취득한 녹산의학강습소 수료 경력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1967년 제주도로 건너가서 녹산의학강습소 수료 경력과 소록도에서 같은 한센인들을 치료했던 경험으로 무허가 의료행위로 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러다 지인을 만나 도립병원에 취직이 되었습니다.
살다 보니 의료기사인 방사선사 면허를 취득하게 되어 의원과 병원의 사무장을 겸직하면서 밤과 낮을 구별하지 않고 정성을 다해 직장에 다녔습니다.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몸으로 사회의 인정을 받으려 하니 너무나도 힘겨워 그만 삶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이 정도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이 아니냐고 스스로 위로하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백발이 된 지금 나의 삶을 돌아봅니다. 나의 인생길에는 원망도 좌절도 낙심도 자살의 실패도 가정의 파탄도 모두들 다녀갔더군요. 그때마다 나의 십자가는 왜 이렇게도 무거운지 알고 싶었습니다.
여기 소록도로 돌아와 화장장에서 2년 동안 근무하면서 80% 이상이 연고자 없는 외로운 사람들이어서 홀로 떠나는 그들 의 마지막 길을 보며 허탈감만 느꼈습니다. 문득 그들이 누운 관이 화구로 들어가서 아물아물 하늘로 피어오르는 흰 연기 끝에 한 줌의 재로 변한 모습을 보며, 이제는 어떻게 살지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소록도에 들어와 추위와 굶주림으로 한센병에 걸려 한센인으로 살아야 했던 나의 삶을 기록한 책이 《소록도, 천국賤國으로의 여행》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내 삶을 돌아보는 시詩를 모아 세상으로 내보냅니다. 어머니를 따라 소록도에 왔던 시절부터 격리수용의 가슴 아픈 어린 시절, 어려웠지만 희망이 있었던 학창 시절을 거쳐 노년 들어 경험한 여행에서 받은 감동의 순간을 노래한 시들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부터 나의 삶이 참 소중했기에 지나간 시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더 아픕니다. 그래도 이렇게 살아 있음을 감사하며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이렇게 나의 인생에 점을 또 한 번 찍으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그리고 시집 출간이 되기까지 깊은 관심을 가지고 권면하여 주신 김성리 교수님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채규태 교수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올립니다.
2016년을 맞이하며 소록도에서
《곡산의 솔바람 소리》
自敍1
나는 운명에 숙명이 겹쳐서 태어났다. 한센인 엄마. 그 인생길이 나의 인생길이 되어 멸시와 천대의 아픔에 떠돌이로 다니면서 굶주림과 계절의 횡포에 눈물만 흐르는 삶이었다. 끝도 없는 이 길을 세월에 등 떠밀려 그렇게 살아왔다.
병명도 모르는 채 아픈 사람들과 치료약이 없는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가장 불쌍하고 가련하다. 그중에 대표적인 한센병은 감염이 되어도 빨리 죽지 않는다. 이 병은 피부와 신경에만 발병을 하니까 명대로 살아가지만 몸이 변형되는 고통을 받으니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시도한다.
8살의 나는 격리수용의 길로 끌려가는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소록도에 첫발을 디뎠다. 보육원의 악몽 속에서도 어린 나는 질경이처럼 살아남아 희망을 꿈꾸었다.
포말 인생
그 누가 그 길로 갔을까
운명이었을까
숙명이었을까
문둥이로 흘러든 길
생존경쟁의 불꽃도
이제는 불구경이 되었네
욕망도 꿈도 내려놓으니
바보 같은 내 인생
천하태평의 삶이 기다리고
세월의 파도 끝에는
허공을 가르는 포말만 남았네.
自敍 2
보육원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고 엄마 곁으로 와서 1 개월 동안만 엄마 방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하지만 몸이 완쾌되지 못한 상태에서 바로 남자부 독신 방으로 옮기게 하여 모자간의 별거가 시작되었다. 이후의 시간은 이어지는 격리 수용의 악몽을 헤쳐 나가는 슬픔의 여정이었다.
소록의 솔바람
바람의 길목 외로운 섬
엉덩이에 흉터 줄을 지은 소나무*
삼십 육년 굴욕의 증표 대신하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너만의 그 소리
강제 수용에 울부짖는 한센인
변형된 모습 여기저기에 새겨진
강제 노역의 고통
자유 잃은 조국에 대한향수
봄 여름 가을 겨울
너만의 그 소리
솔바람에 들려오네.
*엉덩이 흉터 소나무 : 일제 강점기에 송진을 채취하던 혼적.
自敍 3
세월의 흐름에 밀려서 눈물방울도 굵어지고
코흘리개가 혼자 자라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로 진학하는데 경쟁이 심했다.
10살 많은 형들과 경쟁하던 기억을 더듬으며...
진학
아픔을 동반한 가녀린 새싹
뻣속을 쑤시고 찌르는 통증
아스피린 힘 빌려가며
소학교 졸업하게 된 기쁨
아픔마저도 행복했었다
몽구리 되어 미래의 꿈 향해
중학교 진학하던 날
쓰디쓴 해부산 없이도
소리 내어 울음 터뜨렸던 그때가
순수한 추억으로 새록새록 솟아난다.
自敍 4
중학교를 졸업하고 성실고등성경학교를 거쳐서 이곳의 최고 학부인 녹산의학강습소를 수료하여 동환同患을 치료하다가 오마도 간척장에서 탈출하였다. 그리고 사회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쳤던 시간들을 다시떠올려본다.
生의 끝
숨을 멈춘 사슴섬 병상
두 주먹 불끈 쥐고 왔던 세상
이제야 운명의 덫 벗어나는구나
근심, 걱정, 시기, 질투, 미움, 탐욕, 정욕
그 아픔, 고독, 수의 입은 관에 실려
흰 연기 손짓으로 아물거리니
허공을 휘돌아
숨 쉬었던 공기 찾아가는 건가
앙상한 뼈 가루되어
흙에 은덕 입었기에
한 줌 흙으로 돌려주는구나.
自敍 5
터널 같은 삶을 벗어나자 찾아온 직장암을 이겨내고 새로운 세상을 찾아 여행을 다녔다.
새로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희망을 찾아 떠난 여행지에서의 감회를 풀어본다.
유럽으로
숨 돌릴 겨를 없이 생존경쟁
사는 일이 짐이어라
열망도 세상일도 운명 앞에 어쩔 수 없어
사는 일 서걱서걱 까닭 없이 서러운 날 잊으려
짐 부려놓고 유럽으로
몸과 마음도 공중에 날고 있다
창문 밖 은하수에 꿈도 슬픔도 세월도 흘려버리자
우뚝 솟은 산 무겁게 엎드린 산 골골이
가물가물 사람 사는 흔적들
칠흑 같은 밤
깜빡이는 아련함
실내등이 꺼진다
선잠 청하는데
미명에 나타나는 우랄산맥
유럽의 들판 한눈에
산과 들, 강, 거기서 거기구나
어느 날에나 오련가 싶던
파리국제공항.
화집 《수평선 끝에서》
화집을 발간하면서
많이 부족합니다.
배려하는 넓은 마음으로 봐주십시오.
누군들 사연이 없겠습니까?
그동안 수많은 고통과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수적천석水滴穿石의 물방울과 같이 끈기 있게 노력하며 살았습니다.
수작은 아니지만, 시詩 소설小說로 등단도 하였습니다. 그중 시집 1권과 소설 1권은 일본어로 번역, 출판도 됐습니다.
그림의 길을 찾게 된 것은 남포미술관(곽형수 관장)이 주관한 미술학교에서 우미경 교수님을 만나고부터입니다. 그렇게 팔순이 넘어서 그림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아내는 나에게 “다 늙어서 그림은 무슨 그림이요?
쓰시던 글이나 쓰세요” 라고 말합니다. 그때 저는 “아니요. 한번 해 보일 것이니 지켜보기만 하세요” 하고 대답했지요.
그리고 미술이라는 아름답고 오묘하고 신비스러운 작업에 빠져 열심이면서도 문득 혼자 극복하기 힘든 어려움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몇몇 고비를 넘기면서 고민도 있었지만 ‘가다 말면 아니 감만 못하다’는 말을 떠올리며, 새롭게 각오를 다지곤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우미경 교수님은 저의 그림을 보시고 ‘밀도감을 살려보라’고 조언하셨습니다. 밀도감을 극복하니 이번에는 ‘섬세도를 높이라’고 하십니다. 듣도 보도 못한 두 개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노인의 엉덩이에 욕창이 와 있었습니다.
몇 개의 긴 터널을 지난 어느 날, 우교수님은 “강선생님은 이제 선생님만의 길을 찾으셨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었던 그 날은 제 인생 가장 기뻤던 날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는 동안 행복했습니다. 아내를 떠나보내고 한참을 그림에 의지해 버티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림들을 모았습니다. 부족하지만 저의 인생 모든 심경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너그러이 헤아려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23. 3. 강선봉 배상
자작나무 숲. 27.5×51cm, Acrylic on canvas 2020
구라탑. 38×45cm, Acrylic on canvas 2019
화장장. 46×38cm, Acrylic on canvas 2021
철쭉(노고단) 시. 41×53cm, Acrylic on canvas 2021
노고단
산자락
분주히
빨간 립스틱 바르고
연지 찍고
노랑 저고리
오색 물결치마
동장군과 혼례 치르니
너울너울 백발의 억새꽃 너머로
기나긴 신혼 밤
열 쌍둥이 나오려나.
수탄장
엄마 품에서 끌려온 아이들
큰아이 보육선생의 폭력과 갈취에
피골에 새겨지는 상흔들
울음 삼키다 패인 작은 웅덩이에서
몸부림치며 엄마 젖무덤 찾는다
기한 정해진 모자 상봉
‘배고프나…’ 묻는 어머니의 한마디에
금언의 교육 잊고
무심코 ‘네’ 한 마디에
벌 밥에 국 폭력으로 사경 헤맨다
흙 묻은 고롱게 열매 알사탕으로
썩은 콩 고소하기에 훔쳐 먹다
북풍한설 뜨락에서 손들고 벌서다
졸음에 못이겨 깨어보니 동상 결렸었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
찢어지는 가슴 안고 못내 울음 터뜨린다.
수탄장. 53˟45cm Acrylic on canvas 2020
농부. 53˟45.5cm Acrylic on canvas 2020
포말인생
그 누가 그 길로 갔을까?
운명이었을까?
숙명이었을까?
문둥이로 흘러든 길
생존경쟁의 불꽃도
이제는 불구경이 되었네
욕망도 꿈도 내려놓으니
바보 같은 내 인생
천하태평의 삶이 기다리고
세월의 파도 끝에는
허공을 가르는 포말만 남았네.
소록도 기와.
소록도 자혜의원은 1916년에 소록도의 서북부 일부 지역을 매수하여 설립되었다. 1934년에는 소록도 전체를 병원 부지로 확보하여 본격적인 확장공사를 시작하게 되는데, 이때 건축된 대부분 건물의 지붕은 소록도에서 생산한 시멘트 기와로 지붕을 얹었다. 지금도 1930년대 기와를 이고서 있는 건물이 남아 있으나 대부분은 스러져 폐허가 되었다.
옛 집터에서 뒹구는 기와를 가져다 나의 기억과 감정을 담아 그림을 입히니 내 나이와 비슷한 늙은 기와가 생명을 얻고 웃고 있다.
강선봉 작가
-1939년 경남 함안 출생
-2004~5년 제주 나누리 라이온스클럽 회장
-2012년 〈억새꽃〉 외 4편으로 작가 등단
-2017~8년 《100년 한센병 그리고 사람, 백년의 성찰》 편찬위원
-2019~현재 한국문인협회 문학사료 발굴위원
-2019 한국문인협회 고흥지회장 역임
-2021넌 제1회 詩聖 한하운 보리피리 문학상 수상
*작품
소설 : 《소록도, 천국賤國으로의 여행》(2006), 일어판 출간(2023),
《곡산谷山의 인동초 사랑》(2016),
수기 : 《나의 직장암 투병기》(2009),
시집 : 《곡산谷山의 솔바람 소리》(2016), (일본어번역본 출간(2020)
*전시경력
개인전 2022. 7. 15 ~ 8.15 《곡산谷山의 솔바람 소리》(호텔 갤러리, 고흥)
2022. 2. 3 ~ 3. 4 〈고독 끝에서 피어난 꽃〉(전남도청 갤러리, 무안), 단체전 다수.
바티칸 포럼 초청
▲ 바티칸 포럼 초청장
여보, 잘 있었지요.
나는 당신 그리워서 바지락 캐던 언덕에 가서 “정자야, 정자야!” 한없이 불러보아도 메아리도 돌아오지 않고 파도만 일렁이고 있었지요.
힘없이 돌아보는 세 발의 노인, 그래 이 언덕 뒤에서 당신 손수레 밀어주던 곳인데… 중얼거리기를 셀 수 없었는데… 당신 떠난 1주기가 되었구려!
잊으려 애를 써도 잊어지지 않는 당신, 그래 편히 있었는지?
당신 만나서 흐른 세월 주마등같이 스치는구려.
빈손으로 철구 데리고 당신을 만나서 제주도립 서귀분원 엠브란스로 신부인 당신을 모시고 제주시에서 5.16 도로로 한라산을 넘으며 손을 꼭 잡고 있을 때 내 가슴은 한없이 울고 있었지요.
당신은 어땠는지 지금까지도 말이 없구려.
냉방인 서귀포 다세대 방 철구와 둘이서 한겨울을 당신과 또 한겨울을 보내면서 딸을 순산하고 많은 고생 불평 없이 참아 주었지요.
그리고 돈이 무엇인지 공직 6급을 접고 개인 병원에 몸담으면서 제주시로 옮겨와서 낮과 밤 구별 없이 뛰었지요.
그렇게 좋아하는 술인데, “영동병원 사무장은 막걸리만 마신데, 아니 막걸리 밖에 못먹어” 하는 소문이 나게 만들었지요. 난들 소주에 계란후라이 못 먹겠냐마는 내 집 마련하기까지는 100원이면 막걸리 한 사발에 김치 깍두기까지 해결되는데 싶었다오.
그 후 내 집 대출금 정리가 끝나는 날 계란후라이에 소주를 마시니 당신 나에게 첫 말이 “지독한 사람이요” 하면서 눈시울 적셨지요. 나도 그랬고요. 그런 남편 덕에 당신 가슴에 맺힌 응어리도 풀어지게 해주었잖소!
그래요, 당신과 나 팔순을 넘겼으니 말인데 우리 그 험한 태평양도 대서양도 인도양도 모두 건너면서 웃어도 보고 울어도 보았지요.
그러면서도 당신은 철구의 열렬한 팬이었지요. 무슨 일이 있으면 적극적이었지요. 그래서 이렇게 성인이 되었고 박사가 나오는 가정이 되었지요.
당신 살아생전 보지 못한 기쁨 글로 전하니 기뻐하세요.
그리고 잊지 못할 추억은 당신과 둘이서 KTX 여행으로 서울을 거쳐서 정동진에서 해돋이를 보고 노후를 설계하던 추억 생생하구려. “자식들 건강하게 성장해주어서 하나님께 감사기도 드리고 이제는 우리 두 사람, 자식들 짐이 되지 않고 죽음 준비를 해 나갑시다” 하니, 당신 나에게 성질내면서 “그런 소리가 무슨 말이요”했지요.
그래서 자세한 설명을 하고 또 했지요. 그래서 내 뜻에 따르겠다고 해서 내가 지금 사는 곳까지 왔고 내가 당신 먼저 갈려고 했는데 당신이 복 좋게 사랑하는 딸 곁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내 앞에 갔어요. 참 복 좋은 부름이었어요.
2023. 2. 13 강 선 봉
《한센병 그리고 사람, 백년의 성찰》
국립소록도병원 역사
국립소록도병원이 설립된 지 100년이 되었다. 현재의 병원은 일제강점기인 1916년 설립이 결정되고 이듬해인 1917년부터 한센병 환자를 수용하였던 소록도 자혜의원으로부터 기원하였다. 100년이 지나는 동안 기관의 명칭은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소록도에서 우리나라 한센병 치료의 중심적 역할을 해온 것은 변하지 않았다.
소록도의 역사를 정리하는 노력은 1970년대 신정식 원장이 재임하던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79년 이곳에 입원 중이던 심전황 선생께서 최초의 소록도 역사서인 《소록도 반세기》를 출간하였다. 이 책은 소록도에 거주하는 한센인 공동체에 전해지고 있던 소록도의 일화를 정리하여 입원자의 입장에서 서술한 것이다.
심전황은 1993년 이 책을 증보하여 《아으 70년-찬란한 슬픔의 소록도》를 발간하였다. 심전황의 책들은 소록도의 역사를 최초로 정리했다는 데 의의가 있지만, 아쉽게도 당시 자혜의원과 소록도갱생원에서 발행되었던 연보 등의 자료를 충분히 활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소록도 자혜의원과 소록도갱생원 시기의 연보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었는데, 1994년 최정기(현 전남대학교 교수, 소록도 100년사 감수자) 교수에 의해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이 연보들은 일제하의 소록도 역사를 보다 정확하게 밝힐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모두 병원의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어서 당시 조선인 환자들의 사정을 충분히 알려주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소록도병원은 1996년에 이르러 병원의 역사를 공식적으로 서술한 《소록도 80년사》를 발간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일제강점기 작성된 연보가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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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한센병에 관한 보다 본격적인 연구는 『소록도 80년사』를 발간할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일제하의 소록도병원에 관한 자료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이 기록한 자료들이 새롭게 발굴되었고, 일본이나 대만의 상황이 시야로 들어왔다. 정근식(현 서울대학교 교수, 소록도 100년사 집필책임자) 교수의 일련의 연구들은 소록도병원의 역사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자극을 주었다.
《소록도 100년사》는 정근식 교수를 중심으로 한 집필팀에 의해 쓰여졌고, 여러 차례의 검증과정을 거쳤다. 먼저 의료사 및 한센병사 전문가인 김옥주 교수, 최원규 교수, 최정기 교수 그리고 채규태 교수의 감수를 받았으며, 100년사 편찬위원회의 조원래 교수, 최인선 관장, 김인덕 교수, 여인석 교수, 강선봉, 이남철 님과 국립소록도병원의 꼼꼼한 검토 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훨씬 더 공신력 있는 역사책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사진으로 보는 소록도
▲ 수탄장 | ▲ 옹벽벽화 | ▲ 구라탑 |
① 치유의 길 ② 고흥소록도 자혜의원 본관 ③ 국립소록도병원 중앙공원 ④ 수탄장 ⑤ 식량창고 ⑥ 소록터널 ⑦ 소록대교 ⑧ 소록도성당 ⑨ 소록도 해수욕장 | ||
▲ 비로봉 정상에서 바라본 소록도 노을 | ||
▲ 화장장 1937년 건축 | ▲ 화장장 1980년대 | ▲ 화장장 1990년대 |
◀개원 50주년 기념비 | ||
▲ 개원 50주년 기념 축구, 배구 우승기념 촬영(1966년) (세번째줄 좌3 심전황, 두 번째줄 좌4 박종일, 두번째줄 좌3 박순암) | ||
▲ 경계선 표시도 |
일제강점기 소록도는 직원지대와 환자지대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직원지대’를 ‘무독지대無毒地帶’, ‘환자지대’를 ‘유독지대有毒地帶’로 칭한 경계선을 구획하였다.
남북으로 이어지는 철조망을 쳤으며, 병사지대로 통하는 도로 입구에 문을 만들어 달고 출입구 앞에는 출입자를 감시하는 감시소와 면회실, 탈의실 등을 두었다. 광복 이후에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아 경계선을 넘지 못하도록 환자들을 엄격하게 다루었다. 한센병 환자를 소록도 안의 ‘또다 른 섬’안에 가두어 두었던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 경계선 감시소 1935년
▲ 순바구길 기념비 | ▲ 순바구길 기념비 | ||
◀고 육영수 여사 공덕비 (1974.11. 27) |
1907년 일본에서 ‘나예방에 관한 건’이 공포되어 나환자에 대한 격리수용이 시작되었다. 1913년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나환자 실태 조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 의성환자가 3천 명 이상인 것으로 나타나자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총독부 위생고문 야마네는 위생강연에서 조선의 나환자도 격리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테라우치 조선총독은 제생원 기금 일부를 사용한 부랑 환자 수용 계획을 수립했고, 총독부의원장인 요시가에게 부지선정을 명했다.
총독부가 부지 선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했던 기준은 환자를 적절히 격리할 수 있는 장소로 남해안의 여러 후보지가 고려되었고 최종적으로 소록도가 낙점되었다.
◀ 소록도 자혜의원 진료소 및 부속건물 신축공사 설계도 | |
1918년 소록도 지도(1/50000), 소록도의 1918년 당시의 지도를 보면, ‘자해의원’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 |
◀ 1971년 제9기 간호보조원 선발 면접, 1986년 |
다미안재단 송별 기념사진 ▶
(1971.04.15.)
▲ 다이안재단 공적비 | ▲ 간호보조원 양성소 전경, 1984년 |
1982년 이름을 바꾼 국립소록도병원은 이전의 노력의 결실을 바탕으로 병원의 시설, 인원, 그리고 치료 및 재활 프로그램까지 모든 면에서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한다. 특히 1983년 도입된 복합화학요법인 MDT(Multi-Drug Therapy)로 인하여 한센병 치료는 획기적인 효과를 보게 되었다. 그 결과 1990년대 중반에 이르면 소록도병원에 한센병 환자가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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