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행시에 대하여
박 희 진(시인)
1행시라는 제목을 걸고 나는 다음과 같은 4행시 한 편을 쓴 적이 있다.
1행시는 單刀直入이다. 번개의 언어다.
1행시는 點과 宇宙를 하나로 꿰뚫는다.
1행시는 직관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1행시는 詩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나의 1행시관이 잘 요약되어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것을 좀 자세히 피력하려면 각행별로 해설만 붙이면 될 것이다.
① 1행시는 單刀直入이다. 번개의 언어다.
사전을 찾아보니 ‘단도직입’의 뜻을 세 가지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요점이나 본문제의 중심을 곧바로 말함. 둘째, 혼자서 한 자루의 칼을 휘두르며 적진으로 곧장 쳐들어 감. 셋째, [불] 생각 · 분별 · 말에 거리끼지 않고 眞境界진경계로 곧장 들어감. 둘째 설명은 단순한 字意자의에 그치는 것인만큼 그렇다 치고, 첫째와 셋째의 해석이 바로 마음에 와 닿는다.
얘기의 진행을 여기서 잠시 우회하기로 하자. 각종 매체 통해 매월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詩시를 접할 때, 나는 흔히 몇 줄 못 읽고 내던지고 싶은 충동을 받곤 한다. 아마 나만의 경우는 아니리라. 그래도 그냥 참고 읽노라면 머릿속이 뒤죽박죽 몽롱해져서 오리무중에 빠져들게 된다. 어느 시인 말마따나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지루하고 따분할 따름이다. 시의 언어들이 생기를 잃고 심한 경우엔 대부분 죽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볼품없이 맥빠진 채 멋대로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詩시의 公害공해’라는 비명이 저절로 치밀어 온다.
그런 맥빠진 한 편의 시에서 너절한 군더더기, 허튼 말들을 모조리 제거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단 몇 줄이라도 건지게 될 것인지, 아니면 한 줄도 안 남게 될 것인지? 만약 한 줄도 안 남게 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시 이전의 횡설수설이었음이 증명된 셈이다. 하지만 만약 겨우 한 줄쯤이 남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대로 1행시로서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은 아니겠다.
단도직입의 1행시가 되자면 寸鐵殺人촌철살인의 효과를 내야 한다. 정신이 번쩍 나는 섬광과 더불어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야 할 것이다. 독자로 하여금 어떤 깨달음이 번개처럼 스쳐가게 강한 울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짤막한 警句경구로 사람의 마음을 크게 뒤흔듦> 그것이 촌철살인의 의미이다. 그러기에 1행시엔 깊은 의미 내용의 함축이 깃들어 있어야 할 것이다. 모든 생명체에는 生體電氣생체전기가 있다고 들었다. 시의 언어에도 전기가 깃들어 있다고 여겨진다. 달리 말하자면 氣기가, 생명력이, 혼령이 깃들어 있다고 말이다. 그래야만 그것은 단도직입의 위력을 발휘하여 독자의 심혼을 근원적으로 뒤흔들게 될 줄 안다. 마치 감전이라도 된 것 같은, 깨침의 충격과 발견의 희열, 회심의 미소, 감동의 전율을 독자의 마음에 안겨 줄 수도 있는 것이라야 최선의 1행시일 것이다. <번개의 언어>란 그런 맥락에서 연유된 표현이다.
② 1행시는 點과 宇宙를 하나로 꿰뚫는다.
1행시에는 깊은 의미 내용이 함축되어 있어야 한다. 이 말은 곧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시인의 통찰력이 파악한 내용이 어떤 방법으로든 짧고도 절묘하게 표현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짧고도 절묘하게(!) 그런 표현상의 난문제를 해결해 주는 레토릭으로서 은유, 상징, 이미지, 암시, 기지, 역설, 아이러니, 해학 등등이 있음을 알고 있다. 한편 전문적인 방법과는 달리 오히려 소박하고 간명한 언어 표현, 그것이 독자의 意表의표를 찌르는 경우도 있으리라. 어쨌거나 그러한 갖가지 레토릭을 어떻게 적절히 효과적으로 구사하느냐는 문제는 시인의 자질과 기량에 속한다고 하겠으나, 더 근원적으로 중요한 점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시인의 통찰이 파악한 내용이 과연 얼마만큼 보편타당의 眞理性진리성을 획득한 것이냐에 달렸다고 할 것이다.
흔히 시의 표현은 언어의 연금술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언어는 본래 정신(=靈性영성)에서 연유된 것인만큼 시인에게는 늘 부단한 정신의 연금술이 先行선행되어 있어야 할 줄 안다. 여기서 정신의 연금술이란 시인의 심신수련, 늘 자기 극복과 정화를 통해 영혼을 갈고 닦는 구도적 정진을 말하는 것이다. 위대한 시인만이 위대한 시를 낳을 수 있다. 정신의 지향을 좀더 高次元고차원의 영성 계발과 그 진화에 설정해 볼 일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과학 기술의 무한한 신장은 신봉하면서도 영성적 진화에는 관심도 없거니와 완강하게 부인하고 있는 것이 실정이라 할 것이다. 생각건대 이것은 사람들의 영성 수준이 저하하고 위축된 나머지 거의 마비 지경에 이르러 있음을 말하는 게 아닐까? 그런 판국에서 상대적으로 돋보이는 것은 과거의 걸출했던 성자, 철인, 종교가, 그리고 시인들인 것이다.
영국이 낳은 불세출의 화가이자 천재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 그의 箴言詩篇잠언시편 중에서 자주 인용되는 다음 4행은 너무도 유명하다.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And a Heaven in a wild flower,
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Eternity in an hour.
한 알 모래 속에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 속에 천국을 본다,
손바닥으로 무한을 움켜쥐고,
시간 속 영원을 놓치지 말라.
이쯤에서 자연히 연상되는 것이 신라의 고승, 義湘의상(625~702) 대사의 法性偈법성게인 것이다. 법성게란 의상이 당나라에 건너가서 佛典불전 중 백미인 화엄경을 연구하고 그 진수를 불과 210자에 담은 偈頌게송의 걸작이다. 그 중 몇 구절만 인용해 보자.
一微塵中含十方 일미진중함시방
一切塵中亦如是 일체진중역여시
無量遠劫卽一念 무량원겁즉일념
一念卽是無量劫 일념즉시무량겁
한 알 티끌 속에 우주가 들어 있고
낱낱의 티끌이 다 그러하다
한없는 긴 시간이 곧바로 일념이고
일념이 다름 아닌 영겁이라네
一念일념이란 이제 今금 아래 마음 心심자이니, 지금의 마음이다. 지금의 마음은 시간이 아니라 永劫영겁인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의상이 말한 無量遠劫卽一念무량원겁즉일념 一念卽是無量劫일념즉시무량겁은 블레이크의 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 / And Eternity in an hour 와 거의 같은 생각인데 표현에 있어서만 個性差개성차를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의상의 경우는 추상개념의 直訴的직소적 표현이나, 블레이크는 역시 시인답게 가시적인 구상의 이미지와 불가시적인 추상개념을 결부시킨다는 레토릭을 쓰고 있다. 또한 인용된 블레이크 잠언시의 전반 두 구절과 의상 게송의 전반 두 구절은 완전히 상통하는 동일한 사상의 비슷한 표현이라 할 만하다. 사물의 진상을 꿰뚫어 봄으로써 어떤 구경의 깨달음을 얻고 보면 동서가 이렇듯 하나로 통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행시는 점과 우주를 하나로 꿰뚫는다> 내가 쓴 이 구절도 상술한 두 경우와 별로 다를 바 없다고 여겨진다. 요컨대 1행시엔 어떤 깨달음이 담겨 있어야 1행시다운 면목과 효용을 갖추게 될 것이다.
③ 1행시는 직관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나는 직관적 상상력보다는 靈性的영성적 透視力투시력이라는 말을 훨씬 더 좋아한다. 하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좀 낯설게 다가가지 않을까 싶어 전자를 택했다.
서양 지성인들이 곧잘 쓰는 말에 비젼(vision)이 있다. 나는 그 말뜻을 영성적 투시력이라고 파악한다. 단순한 육안의 시력으로는 사물의 피상만 볼 뿐이지, 그 아래 숨어 있는 진상을 꿰뚫어 볼 수는 없다. 육안이 아닌 慧眼혜안의 투시력이 요청되는 바다. 본질 탐구자인 시인을 두고 a man of vision, 즉 見者견자라고 말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시인은 영성적 투시력의 소유자다. 영성과 투시력은 밀접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光源광원과 光線광선이 분리될 수 없는 것과 같다. 무궁무진 작열하는 에너지 덩어리인 광원이라야 광선은 순식간에 사방팔방으로 멀리 구석구석 퍼져 나가듯이, 시인이 지닌 영성 능력도 늘 부단히 연마되어야 사물을 접했을 때 이내 그 본질을 꿰뚫어 보는 놀라운 투시력을 발하게 된다. 비단 낱낱의 사물이 지닌 독자성뿐 아니라 ―단독으로 존재할 수 있는 사물은 없으므로― 늘 전체와의 상호의존적 연관성 안에서의 위상과 본질까지 그 안팎을 환히 보게 된다. 본질을 직관하는 시인의 상상력은 바로 이런 때 그 최선의 기능을 발휘한다. 그것은 단순한 공상이라든가 환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하여, 얽히고 설킨 萬像만상의 실상을 밝혀내는 것이 상상력이라면 그것은 곧 고차원의 지적 능력, 영성적 투시력에 다름이 아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의상의 법성게 중 한 구절을 떠올려 음미해 보자.
一中一切多中一 일중일체다중일
一卽一切多卽一 일즉일체다즉일
하나 속의 모든 것 모든 것 속의 하나
하나 곧 전체이고 전체 곧 하나
④ 1행시는 시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한 편의 시엔 길건 짧건 간에 한 편의 드라마가 내재해 있다. 사건의 발단, 전개, 전환, 결말의 순서에다 갖가지 우여곡절을 첨가하면 드라마가 성립된다. 시도 마찬가지다. 서사시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서정시의 경우라 하더라도 사상이나 정서의 흐름을 살펴보면 이른바 起기 · 承승 · 轉전 · 結결이라는 극적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다면 1행시는 어떠한가? 나는 거기에도 기·승·전·결의 원리는 적용되고 있다고 본다. 승이 기 안에, 전이 결 안에 포함될 수도 있고 승·전이 하나로 합쳐질 수도 있다. 또는 그밖에도 갖가지 은밀한 방식에 의한 변화를 분석해 낼 수 있으리라. 그러나 적어도 분명한 것은 발단과 결말, 알파와 오메가다. 시작과 끝, 그것만 분명하면 그 중간의 온갖 우여곡절, 그것이야 독자의 추리나 상상에 맡기면 그만이다.
1행시는 시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그래서 1행시는 비록 짧지만, 자기충족적 簡明直截性간명직절성과 斷乎性단호성을 갖는다. 의미 내용은 농축될 수밖에 없고 그 표현은 최소한도의 언어를 동원하여 고도의 상징성, 암시, 은유, 또는 선명한 이미지 등이 갖는 시적 효과를 도출하는 것이 요체인 것이다. 1행시는 1행으로 끝내주는 시다.우이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