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통신사길 걷기(숭례문∼한강)
◇ 조선 통신사(通信使)
조선 통신사(朝鮮通信使)란 조선 후기에 일본으로 보낸 외교 사절단을 말한다. 당시의 '통신'은 '국왕의 뜻을 전함'이라는 의미였다. 일반적으로 1607년 이후 조선이 에도 막부(江戶幕府)에 파견한 사절단만 가리키나 연구자에 따라서는 조선 전기에 일본측에 파견된 사절도 포함시키기도 한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면 태종 대부터 '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에도 막부 시기인 1811년까지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회답겸쇄환사가 3번, 통신사가 9번 파견되었다. 처음에는 쇼군(장군)의 아들이 태어난 것을 축하한다는 등의 갖가지 명목으로 파견되었지만 회답겸쇄환사까지 포함하여 6회째인 1655년부터 새로운 쇼군의 취임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보내졌다.
조선 통신사 일행은 정사, 부사, 종사관 등의 삼사(三使)와 당상역관 미만의 하인 등으로 주성되어 역대 최소 인원은 1624년 사행 당시의 300명, 최대 인원은 1711년의 500명이었다. 조선 통신사는 한양을 출발해 육로로 동래까지 간 다음에 배를 타고 오사카, 강을 거슬러 교토까지 가서 에도까지 이동했다. 통신사가 한양에서 에도까지 왕복하는 데 짧게는 5개월에서 길게는 1년이 걸렸다. 기본적으로 거리만 왕복 4,000km에 달하는데다 일정에 한여름이나 한겨울이 껴있으면 시간이 더 걸렸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통신사를 보낸 것처럼 역으로 일본에서도 조선으로 사신단이 왔지만 이들은 한양까지는 오지 않고, 부산 동래부까지만 왔다 갔다.
◇ 서울 숭례문(崇禮門) : 중구 남대문로 4가 29(국보 제1호)
- 서울의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한양도성의 정문
서울 숭례문(崇禮門)은 조선시대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불렀다.
2008년에 방화로 소실되기 전까지는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1396년(태조 5)에 짓기 시작하여 1398년(태조 7)에 완성하였다. 숭례문은 그 뒤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외에 1961∼1963년 해체ㆍ수리하는 과정에서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숭례문 주변의 성벽이 결정적으로 훼손된 것은 1899년(광무 3)에 서울 시내 전차(電車) 노선의 개통으로 인하여 동대문ㆍ서대문 좌우의 성벽이 함께 헐리게 되면서부터이다. 그 뒤 통감부에 의하여 1908년에 도로 확장을 이유로 숭례문 주변 성곽이 대대적으로 철거되고 남지(南池)도 메워져서 예전 모습을 찾기 어려워졌다.
「숭례문」은 임진왜란 때 한양도성 내의 대부분 건물이 소실된 가운데 불과 몇 채 안 남은 건물 중의 하나로 비교적 고려 말 이래의 다포(多包)집 양식을 충실히 남기고 있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숭례문은 2008년 2월 10일, 방화범에 의해 문루가 소실되어 5년 후인 2013년 5월 4일에 200억원을 들여 복원하였다. 복원 공사 중에 1907년~1909년에 일제에 의해서 훼손된 좌우측 성곽 중에 동쪽 53m, 서쪽 16m 총 69m만 복구하였다.
남관왕묘
◇ 남묘(南廟) 터 : 중구 남대문로5가 530 ·
- 관우(關羽)를 모시던 사당인 남관왕묘가 자리했던 곳
남묘(南廟)는 중국 촉한의 장수 관우를 모시던 동서남북 4곳의 관왕묘 중의 남쪽에 있던 사당이다. 중국에서는 한나라 때부터 관우를 전쟁 때 도와주고 재산을 늘려주는 신으로 신성하게 여겼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병한 명나라 장수들의 주도로 관우 사당이 이곳에 처음 세워지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병한 명나라 유격장 진인(陳寅)은 일본군의 본거지인 울산성을 공격하다가 예상하지 못한 일본군의 결사항전에 오히려 명군과 조선군이 포위되어 부상을 입었다.
그때 관우가 나타나 포위망을 풀어주어 목숨을 건졌다고 생각하였다. 진인은 서울 숭례문 밖에서 부상 치료를 위해 머물었는데 거처하던 후원 위쪽에 관우의 조각상을 모셔 놓고 제사를 지냈다.
그는 명나라로 귀국한 후에 신종(神宗)에게 조선에 관우의 사당을 건립할 것을 진언하여, 신종과 선조의 명령으로 관왕묘, 즉 남묘가 아곳에 세워지게 되었다.
1601년(선조 34)에는 왕명으로 흥인지문(동대문) 밖에 동묘(東廟)가 세워졌다. 이후 1883년(고종 20)에는 성균관 뒷산에 관우 사당을 만들어 북묘(北廟)라 했고, 1902년(광무 6)에는 서대문구 천연동에 서묘(西廟)를 건립하였다. 북묘와 서묘는 일제강점기에 동묘로 합쳐졌다.
남묘는 광복 이후에 6.25전쟁 때인 1952년에 불타 없어진 것을 1957년에 다시 지었다. 그 후 남묘는 민간단체에 불하되어 본래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1979년 1월, 도심 재개발사업으로 대우빌딩과 힐튼호텔이 건립되는 과정에서 동작구 사당로 23길 283(사당동)으로 이전되었다.
◇ 전생서(典牲署) 터 : 용산구 후암로 4길 70 (영락보린원 자리)
- 궁중의 각종 제사 때 쓸 가축을 기르는 일을 맡았던 조선시대의 관아 터
전생서는 조선시대에 궁중의 각종 제사 때 쓸 가축을 기르는 일을 맡았던 관아이다.
조선은 1392년(태조 1)에 고려 제도를 계승하여 전구서(典廐署)를 설치하였다. 1460년(세조 6)에 전구서의 명칭을 전생서로 바꾸고,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폐지하였다.
전생서는 대사(大祀 : 종묘 · 사직 · 영녕전), ․중사(中祀 : 풍운뇌우 · 역대 시조 · 문선왕 등), ․소사(小祀 : 노인성 · 마조 · 사한 · 여제 등)로 등급이 나누어진 국가 제사를 거행할 때 희생으로 쓰는 소, 양, 돼지 등을 기르는 일을 맡았다.
전생서는 가축을 길렀지만, 전국 각지에 선정해서 가축을 키우게 한 다음에 상납하게 하기도 하였다. 대동법을 실시한 조선후기에는 공인(貢人)에게 값을 주고 가축을 납입하게 하기도 하였다.
전생서는 가축을 기르기 위해 넓은 공간이 필요하여, 도성 밖 남산 남쪽의 둔지방(屯芝坊 : 현재의 용산구 후암동 일대)에 위치하였다.
특이한 일로는 조선시대에 가축을 기르는 전생서를 호랑이가 습격한 소동이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8월, 전생서 터에 최초로 근대식 고아원인 가마쿠라 보육원 경성지부가 설립되었다. 당시 가마쿠라 보육원이 설립된 곳은 후암로 동쪽에서는 유일하게 한인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한국 근대식 고아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광복 이후에는 서울 영락교회의 영락사회복지재단이 이 보육원을 인수하여 영락보린원을 운영하고 있다.
◇ 이태원(梨泰院) 터 : 용산구 용산동2가 1( 서울용산고등학교 정문 앞)·
- 조선 초기 공무수행 관리와 여행자가 머물던 숙소
이태원은 서울의 홍제원, 보제원, 전관원[한양의 4원(院)]과 같이 조선초기부터 공무수행 관리와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숙소로 설치된 4곳 중의 하나였다. 여기서 ‘원(院)’이란 고려시대 전성기를 맞았던 사찰들이 운영하는 노변 숙박시설을 일컫는다.
‘이태원(梨泰院)’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효종 때 이 지역에 배밭이 많아 명명한 데에서 유래하였다고 전한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이곳에 귀화하여 살았다는 점에서 어원으로 ‘이타인(異他人)’에서 출발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게 치욕을 당한 이 지역의 사찰 '운종사'의 여승들과 부녀자, 그리고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위한 보육원을 지어 정착하게 했다고 해서 ‘이태원(異胎院)이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이태원은 조선시대에 남대문~이태원~서빙고~한강 · 동작진~과천을 거쳐 3남지방에 이르는 길목이자 ‘영남대로’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첫번째 원(院)이다.
이태원의 본래 위치는 현 용산중고등학교 자리였다. 그런데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이태원 부근의 이태원동 마을은 현재 이태원 2동 중앙경리단 주변으로 이전하였다. 이 부근에는 지금도 이태원부군당이 있어서 매년 당제를 지내고 있다.
광복후 서울시 도시계획으로 인해 남산 순환도로에서 이태원로가 개통되면서 이태원동 마을은 지하철 이태원역의 해밀턴 호텔 부근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조선시대부터 용산일대는 군기시 등 군사관련 시설이 많았으나, 군사지역으로의 색채가 본격화 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이다. 용산역 일대, 남영동 등이 군용지로 책정되어 조선 주둔 일본군사령부가 들어섰고(전 미8군 주둔 자리), 구 군인아파트(현 남산2호 터널 입구, 대림아파트단지)가 일본군의 사격장으로 사용되었다.
광복 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이태원동 지역은 서울 주둔 미군기지로서 군사지역의 면모를 강화하였고, 미군 위락지대로 변모하게 되었다. 또한 북한에서 피난온 월남민들이 집단 거주하면서 인근에는 ‘해방촌’이 형성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 이태원동, 한남동에 외국공단이 들어서고, 1963년 사격장 터에 군인아파트가 건설되는 등 외국인 집단거주지가 형성되면서 본격적인 도시화가 시작되었지만, 당시에는 생활용품과 잡화류 위주의 상가들이 존재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1970년대 초반에 121후송병원이 부평에서 미8군 영내로 이전된 이후에는 1만 여명의 미군과 관련 종사자 및 기지촌 상인들(현 상인의 30% 차지)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현재 모습의 이태원동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이곳은 섬유산업의 호황과 더불어 값싸고 특색있는 보세물품을 살 수 있는 쇼핑가로 발달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에 들어서 각종 국제회의가 서울에서 개최되고,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이 개최되면서 이태원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여 많은 관광객들의 몰려와 쇼핑관광명소와 유흥업으로 번성하게 되었다.
1990년대 후반 이후에는 미군 중심의 거리에서 세계인의 거리로 변모하였고, 1997년에 서울시 최초의 관광특구로 지정되면서 전통과 현대, 세계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이 혼재하는 ‘퓨전’의 장소로 변모하고 있다.
◇ 남단(南壇 : 풍운뇌우단) 터 : 용산구 용산기지 내
- 남단(南壇)으로 오인한 일본군의 군마(軍馬) 위령탑
남단(南壇)은 남방토룡단(南方土龍壇)의 준말로 조선시대 도성 내의 종묘, 사직단과 더불어 도성 밖의 성저십리(城底十里)에서 가장 오래된 국가 제례시설로 비, 바람, 구름, 우레를 맡은 신에게 제사 지내던 단이었다.
원래 남단은 산천단으로 불리다가 1406년 둔지산(屯芝山)으로 옮기면서 1411년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2005년에 문화재청에서 용산기지 내의 이곳을 답사하고, 1941년까지 이곳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야포병연대의 군마(軍馬) 위령비인 석물(石物), 「애마지비(愛馬之碑)」를 조선시대의 남단 석물(남단 터)로 지정(임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최근에 발견된 1940년대 사진엽서를 보면 아래부분에 馬魂碑 朝鮮第26部隊(마혼비 조선 제26부대)’라고 인쇄되어 있다. 즉 군마(軍馬) 위령탑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愛馬之碑(애마지비)’라고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고, 비석 주위에는 철 난간을 둘러놓았다.
이 위령탑은 당시 일본군 야포병연대가 대포를 운반할 때 동원했다가 죽은 군용 말들을 위해 세운 추모비인데 이를 문화재청에서 남단으로 오인한 것이다.
*자료 : 조선일보, 2021년 6월 2일, [박종인의 땅의 歷史] 260. 용산공원 역사 왜곡 대행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