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葆光의 수요 시 산책 73)
어머니의 손톱깎이
손톱깎이라는 도구를 평생 써본 적이 없다
그 한 몸 그 한평생
논일 밭일 들일 산일
칠남매 자식들까지 모두가 손톱깎이였다
뒤틀리고 주저앉은 아흔 살 손톱을
잘 드는 금속성으로 깎아드려 보려는데
돌처럼 굳은 손톱에
튕겨나간 쓰리세븐
- 서숙희(1959- ), 『빈』, 작가, 2024
**
“앞집 할머니보다 더 늙어 보이는 비구니 큰스님의 법문은 대뜸 이렇게 시작되었다.//옛날에, 중국의 한 스님이 멀리 있는 다른 스님을 찾아갔어.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날이 저물었지./저쪽 방에 가서 주무시지요./객스님이 인사를 하고 나갔다가, 도로 문을 열고 들어왔어. 이 객스님 하는 말이,/밖이 어둡습니다, 스님./한데 아, 방에 있던 스님이 촛불을 켜서 건네주었다가, 객스님이 받자마자 후욱, 불어 꺼버렸어. 바로 그때, 초를 들고 섰던 객스님의 눈에서, 깨달음의 눈물이 흘러내린 거라.”(한강, 구도소설 「붉은 꽃 속에서」 중에서, 소설집 『내 여자의 열매』 261쪽)
오늘은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불교 용어로 돈오頓悟가 단번의 깨달음이라면 점오漸悟는 점점 깊이 깨달아가는 것을 이르지요. 서숙희 시인의 시 「어머니의 손톱깎이」를 시집에서 읽은 뒤로 손톱을 깎을 때마다 “논일 밭일 들일 산일”에 “칠남매 자식들까지” 키우느라 손톱이 자랄 사이가 없었다는 “어머니의 손톱”을 노래한 이 시가 자꾸 떠오르는 건 공감을 넘어 시가 충격으로 다가와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집에서 혹 “논일 밭일 들일 산일”로 손톱이 자랄 새가 없었을 분이라면 열네 살에 민며느리로 시집와 구순이 다 될 때까지 “논일 밭일”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는 할머니가 유일한데 자라면서 할머니 손톱을 유심히 본 적이 없는지라 손톱이 자라지 않는 건 어떤 것일까 생각은 하지만 사실 상상이 안 됩니다. 지문에 대해서라면 상상이 되는 건 다 닳아서 지문이 안 찍힌다는 이의 손에 대해서 들은 적도 있고, 그 손을 본 적도 있어서입니다만, 자랄 새가 없는 손톱이라니, 거기에 손톱깎이(“쓰리세븐”)마저 “튕겨나”갈 정도로 “돌처럼 굳은 손톱”이라니, 요즘 들어서 더 빨리 자라서 더 자주 깎는 것처럼 느껴지는 제 손톱을 보고 있노라면 더 상상이 안 됩니다. 새삼스럽게 늙은 어머니의 손톱을 깎아드리려고 했다가 상상이 아닌 실제를 맞닥뜨린 이 시의 화자는 어땠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게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깨달음이었습니다. 깨달음의 순간이야 선방禪房에만 있는 것이 아니니 속세에 머물렀어도 저와 달리 놀람이 무척 컸을 이 시의 화자가 어쩌면 순간 돈오하거나 차차 점오하였을 거라는 제 생각이 그리 무리無理는 아닐 겁니다. 다만,
“용담이 그 지등의 불을 불어 껐을 때, 서울 큰스님의 법문과 달리 덕산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대신 기뻐하며 큰절을 했다. 그 불꽃이 꺼진 순간 그의 마음에 어떤 불이 켜졌을까. 어두우나 밝으나 오롯이 거기 있었던, 늘 거기 있었던 마음 한자리를 알았을까.”(한강, 구도소설 「붉은 꽃 속에서」 중에서, 소설집 『내 여자의 열매』 287쪽)
기뻐하며 큰절을 했다는 덕산 스님과는 달리 큰스님의 법문에서처럼 오늘의 시의 화자는 깨달음의 순간에 눈물을 흘렸을 수는 있겠습니다. 그래도 굳이 이것이 돈오와 점오까지는 아니라고 한다면 최소한 현타는 하지 않았을까요. 현타는 헛된 꿈이나 망상 따위에 빠져 있다가 자기가 처한 실제 상황을 깨닫게 되는 시간을 이르는 속세에서의 요즘 말로 ‘현실 자각 타임’을 줄인 말입니다. 그러니 잠에서든 꿈에서든 확 깬다는 말이지요. 제가 시를 읽다가 받은 느낌도 꽤나 강해서 역시 돈오나 점오를 들먹일 정도는 아니더라도 확 깨기는 했으니 어쩌면 현타 정도는 되겠다 싶습니다. 일상이 돈오이거나 현타이거나 하는 이런 순간, 다들 가끔 겪으시지요. 2024년 12월 3일. 혹 어젯밤은 어떠셨나요. (20241204)
첫댓글 한강 작가의 구도소설이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