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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
불행 속에서 “기화되는 그녀들”
―이문숙의 근작시들을 읽고
장석주
시는 불행의 장르다
50여 년 째 시를 쓰고 있지만 ― 이렇게 말하면 나를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내 나이는 아직 어리다. 우주 나이 137억년, 지구 나이 45억년에 견주자면, 내 나이는 겨우 백 살도 채 못 되는, 나는 어리다 못해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 백회에 묻은 핏자국도 채 마르지 않은 어린 것이다 ―, 나는‘행복’에 대해 써본 기억이 없다. 나는 항상‘불행’에 대해 썼다. 언제나 당당하게 아주 가까운 친인척인 듯 불행을 부려먹었다. 대체 왜 그랬을까? 내 좁은 생각에 시는 불행의 장르, 어두운 기억의 장르다. 시인들은 늘 불행의 세목細目들을 모으고, 그에 대해 품평하기를 좋아한다. 시가 불행에 대한 품평이라고? 그렇다. 품평이되 좀 말랑말랑하고 독특한 품평이다. 그 품평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불행의 우발성, 불행의 처연함, 불행의 불가피함, 불행의 흔적들, 불행이 만든 자아의 천공穿孔들, 불행의 상습성, 불행의 악마성, 불행의 숭고함……. 시인들은 불행을 상습화하면서 불행을 연기演技한다. 모든 시는 불행의 들린 자들, 다시 말하면 패자들, 몰락한 자들, 죽은 자들, 도태되는 자들의 영혼을 뚫고 나온 목소리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일어나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 윤동주, 「병원」(1940.12.) 전문
80여 년 전 한 청년 시인이 쓴 시다. 이 시가 새로운 것은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이‘병원’을 문명세계의 한 이미지로 포착한 점에 있다. “살구나무 그늘 아래”에서 “흰옷 아래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하는 한 “젊은 여자”를 등장하는데, 젊은 여자는 ‘하얀 병’을 앓는 환자다. 이 젊은 여자가 않는 병은 폐결핵이다. ‘나’는 “아픔을 오래 참다” 이 ‘병원’을 찾지만,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에 대해 알지 못한다. “늙은 의사”는 ‘나’에게 병이 없다고 말하지만, ‘나’는 병자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가 그 병의 실체다. 살구나무 아래서 햇볕을 쬐던 젊은 여자와 젊은 ‘내’가 공통으로 앓는 질병은 불행의 한 현실태다. 그이들은 불행에 들린 사람들이다. 불행이 아픈 것은 불행에 들린 자만이 자각할 수 있는 아픔이다. “늙은 의사”들은 불행에 대한 감수성이 없다. 불행에 대해 모르니, 불행을 품고 잉태하고 있는 환자의 아픔을 도무지 모르고, 그것과 싸우는 환자에 대한 한 점의 연민도 없다.
그렇다면 불행이란 무엇인가? 그림자, 한숨, 상처, 슬픔, 가난, 상실 따위가 다 불행의 범주에 든다. 그것들 뒤에는 항상 아비, 민족, 이념들이란 거인이 서 있다. 거인들의 발길에 작고 약한 것들은 밟히고, 눌리고, 찢긴다. 시인들은 작고 약한 존재의 영역에 있다. 따라서 시인들은 늘 불행으로 샤워를 하고, 불행을 들이키며, 불행에 비몽사몽 취한 상태다. 심장을 관통하고 지나가는 불행들! 그러나 시는 불행이 차마 삼키지 못한 목소리들이다. 좋은 시는 불행이 내는 날것의 목소리다.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시는, 적어도 한국 현대시는, 불행의 ‘로고송’이다. 시인들은 그것을 ‘로고송’처럼 불러댈 뿐만 아니라 그것의 백년지대계를 염려하고 심사숙고한다. 그 결과 불행에 대해 심오한 견해들을 내놓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불행들은 대지 어디에나 널려 있다. 우리는 이 불행들을 빨고 핥고 애무한다. 어디 그뿐인가? 이 불행을 편애하면서 이것을 ‘종단’하고 ‘횡단’하는 것을 일생일대의 기획으로 삼는다. 시인들은 저마다 다른 불행의 ‘바이오리듬’을 살며 이 불행의 금자탑을 누가누가 더 높이 쌓았는가를 겨루고, 가장 높이 쌓은 자에게 면류관을 씌워준다. 그러니 시인들이 불행에 대해 노래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시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불행의 냄새를 맡고, 귀신같이 불행의 기미를 알아채며, 그것에게 달려간다. ‘무조건, 무조건이야!’라고 외치며. 한 젊은 시인은 “우리는 어느 해보다 더 자주 웃었고/누구보다 불행에 관한 한 열성적”(황병승,「메리제인 요코하마」)이었다고 쓴다. 시인들은 불행의 바다에서 난파를 당해 떠돈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서른 살은 온다”(최승자,「삼십세」). 불행 속에서 익사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가로등 밑에서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진은영,「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가려고 한다.
불행의 양상들을 징후로 드러내기
이문숙의 근작시들은 불편하고 가증스러우며 우스꽝스러운 불행의 양상들을 징후적으로 드러낸다. 불행은 모든 곳에 편재해 있는데, 인간에게 닥치는 이것을 고속 열차에서 역방향의 자리에 앉은 승객의 처지에 견줄 수도 있겠다. 불행은 불쾌하고 기분 나쁜 감정의 양상에서 경험되는 것이다. 그것이 조만간 해소되지 않을 것이란 전망 속에서 불행은 지속되며 속수무책으로 깊어진다. 그것은 실체가 모호하지만 어쩐지 지속적으로 우리 생체 리듬에 간섭하고 불쾌한 느낌을 야기한다. 우리는 망상을 품고, 이명을 앓으며 이 불행 속을 지나간다. 고속 열차의 역방향 자리에 앉은 승객이 그 불편에서 벗어나려면 거기서 내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그 불편을 견디며 종착역까지 간다.
삶의 근거에서 뿌리 뽑힌 채 거덜 나고, 파탄 나며, 소외되는 존재들, 적폐들이 만연하고 불평등이 심화되는 사회, 경제 붕괴와 당파 정치의 부정적인 여파들, 죽음이 정수리를 정확하게 겨냥하는 찰나들, 안전과 생명 보전보다 비명횡사와 재난이 덮치는 불안과 위험한 나날들이 두루 품는 것은 바로 불행의 다양성이다. 시인은 “발꿈치를 자르는 어떤 형刑에 대해 생각한다”(「어느날 발치사는 소설가가 된다」)라는 구절을 적어 넣는데, 그게 모호함을 뚫고 나오는 불행의 구체적 형상 아닌가! 발꿈치가 잘린 형을 받고 그것을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니! 이 세계에는 불행의 기미들은 널려 있다. 이를테면 “가을이 벗어버린 신발, 발톱 하나가 빠졌을 때 불균형, 마감이 잘 되지 않아 부스스 일어나는 초미의 단청, 손가락 부상에서 손가락 경화증으로 다시 재활한 피아니스트의 미혹”(「썸머드림」)들이 다 불행의 기미들을 품어낸다. 우리는 불행이 상습화되는 세계 속에서 불행이 빚은 존재들로 살아간다. “두문불출하기 위해 얼굴을 박피해 피딱지로 덮은 여자/담배를 끊기 위해 쌩니빨을 뽑은 남자/(……)/세상을 끊기 위해 망상을 하는 남자/삼십년 타임벨을 끊기 위해 이명을 앓는 여자/지문을 돌에 문지르는 그 누구 또 또/말리는 고추씨를 물고 나르는 새, 매캐하고 컴컴한 하늘에 박힌/노란 씨를 빛이라고 부르는 여자”(「어느날 발치사는 소설가가 된다」) 들은 다름아닌 불행에 들린 우리들의 초상이다. 불행의 모습은 특이하지 않다. 그것은 매우 평범해 보이기조차 한다. 평범한 불행이 일상의 계기적 시간들과 사물들을 뚫고 들어간다. “그것을 지피던 밤나무 장작의 화력이다 가난 청빈 노동 그것들을 밀봉한 주둥이 넓은 병이다 끈적거림이다 쩍 달라붙는 기차다 흔들리며 졸고 가던 수화물칸이다 세 사람이 낑겨 앉던 닳아빠진 삼인용 벨벳좌석이다 이제는 덜컹거리며 지나가는 복선전철이다//딸기쨈 속에 맑고 투명하게 졸아든 작은마리아들이다 극빈의 얼굴이다 노릇한 이마다 봉당에 껴있던 이끼다 쪼아먹던 새의 ‘흠칠’이다 자귀와 도끼로 거칠게 다듬은 되는대로 구부러진 밤나무 기둥이다”(「딸기쨈」) 시간은 불행을 배양하는데, 동시에 그것이 번성하는 기반이자 불행의 매체다. 시인은 일상의 식탁 위에 굴러다니는 ‘딸기잼 병’에서 불행의 평범한 한 양태를 적시해낸다.
그녀는 아주 명랑하다
배변이 어렵다면서
어제도 피 한 그릇은 쏟았다면서
언제나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운다
남은 환자들이 깨작거리다 남긴 밥을
봉지에 담아
냉동실에 꽝꽝 얼려둔다
누가 병문안이라도 오면
전자렌지에 돌려
갓 밥을 지어 내온 듯 먹으라 권한다
그녀의 배에는 관이 박혀 있다
창자 일부를 잘라낸 그곳에
호른 같은 게 박혀 있다
사람들은 거기서 그녀의 명랑함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녀도 한밤중이 되면
침상 사이 커튼을 치고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자고 있니
나는 지금 나는 옥상에 가는 중이야
걱정 안해도 돼
나는 아주 맘이 편하다
그녀는 침상에 그렇게 누워 있다
주차장 바닥에 누워 있던 하얀
윤곽의 사람
동이 트자마자
부리나케 쫓아온 자식들에게
그녀는 밤과는 달리
아주 아름다운 호른의 말을 건넨다
다른 병자들의 밥을 거두어 얼린
밥을 다정하게 나눠 먹는다
그것이 간밤에 말한 옥상이라는 듯이
가끔은 의사 몰래 환자복을 벗고 외출을 한다
그곳이 명랑함의 무도회인지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니
시멘트 바닥의 하얀 사람이
일어나서 걸어 나간다
-「호른이라는 악기」
「호른이라는 악기」는 불행의 한 양상을 구체적으로 펼쳐낸다. ‘그녀’는 아주 명랑하다. 하지만 ‘그녀’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다. “그녀의 배에는 관이 박혀 있다/창자 일부를 잘라낸 그곳에/호른 같은 게 박혀 있다”. ‘그녀’는 배변 장애를 앓으며, 더러는 하혈을 한다. 행복이 건강과 안전의 항구성 위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그녀’는 이미 불행하고, 불행의 조건 속에 관여된 삶에 포박되어 있다. 하지만 ‘그녀’는 늘 명랑하다. 아니, 명랑한 척 위장하며 살아간다. 가족에겐 “걱정 안해도 돼/나는 아주 맘이 편하다”라고 말하지만 ‘그녀’는 “주차장 바닥에 누워 있던 하얀 사람”, 혹은 “시멘트 바닥의 하얀 사람”이다. ‘그녀’는 타자의 시선이 비껴난 곳에서는 불행의 바닥에 허물어지고 널브러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가족이 병원을 찾아올 때 다시 “아름다운 호른의 말”을 건네는 사람으로 바뀐다. ‘그녀’는 “명랑함의 무도회”에 초대받은 사람인 듯 명랑해지는 것이다. ‘그녀’가 아픈 것은 선택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시인은 불행을 짊어지고 가는 ‘그녀’를 통해 불행의 편재와 그 속의 슬픈 감정생활을, 매우 절제된 표현으로 제시한다. 시인은 ‘이것이 불행이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어떤 쌍것이 나를 꼬질러 받쳤다고
고작 화장실에서 담배 한 대 태웠다고
맹세코 그런 적 없는 내가
그 흘끔거림과 동시에 링거를 매달고
간다 댕그랑 간다
누구 만나러 가는 척
목 마른 척
오물 처리실에 볼일 보는 척
그렇게 했다면
단연코 내가 그렇게 했다면
그녀의 입 끝에서 기꺼이 타들어가는 담배가 되어도 좋아
다짐하던 내가
누가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피피네요
지금 당장 가서 현장을 발발발각하자고
그렇게 당직 간호사와 급습한
화장실 뿌연 연기 속
변기에 쪼그리고 앉아 조금씩 세계 밖으로
지워지는 그녀가 있다
이미 반은 딴 세상에 가 버린
기화되는 그녀를
불 나서 죽고 싶어요
몇 번 경고했어요
여기가 어디라고
지금 당장 짐을 싸요 싸
단언컨대 그럴 리 없는 내가
덜 닦인 핏자국 선명한 벽인 척 아닌 척
잠에 빠진 척
약봉지 속 안정제인 척
척척척척척
아무런 근거 없이 나를 지목하는
그녀 앞에선
나는 쉽게 고발자가 된다
결단코 그럴 리 없는 내가
단연코 내가
그녀의 흘끔거리는 눈길이 시키는 대로
그녀가 담배를 태태태태태
어서 와서 현장을 덮쳐쳐쳐쳐
당장 내쫓좇쫓
-「기화되는 여자」
이 시에서 여자는 ‘나’를 “꼬질러 바쳤다고” 고발자로 지목한다. 여자는 금지된 구역에서 흡연하다가 당직 간호사에게 적발당한 사실에 분노하는데, ‘나’는 고발자가 아니면서도 고발자로 지목당한 채 그 여자 앞에서 주눅이 든 모습을 보인다. ‘나’는 맹세코, 단연코, 단언컨대, 결단코, 그럴 리가 없다고 자신이 고발자라는 혐의를 부인한다. 화자를 고발자라고 의심하고 분노하는 여자나 고발자라는 막무가내의 의심 속에서 주눅이 든 ‘나’의 공통점은 다 환자라는 사실이다.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도락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개인의 습관이다. 병원 권력은 그것을 금지한다. “불 나서 죽고 싶어요/몇 번 경고했어요/여기가 어디라고/지금 당장 짐을 싸요 싸”. 금지를 위반하는 환자에게 병원에서 쫓아내겠다는 협박을 한다. 이 부조리극 같은 소동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병원’을 현실에 대한 은유라고 추측하는 것은 면, 이 시가 제시하는 것은 내재적 불행으로 얼룩진 묵시록적 세계-풍경이다.
여기 선보이는 다섯 편의 시 중에서「기화되는 여자」「호른이라는 악기」두 편은 ‘병원’을 배경으로 삼는다. ‘병원’이 배경이니 당연히 ‘환자’들의 얘기가 펼쳐진다. 건강이란 항상 잉여적인 활력을 가리킨다. 건강한 자들은 그것을 남용하며 사는 것을 자랑삼는다. 반면 환자들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불확실성에 대응하는데 최소한도의 생체 에너지를 아끼며 살아간다. 그것이 만성적으로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이다.「기화되는 여자」에서는 맹세코, 단연코, 단언컨대, 결단코와 같은 부사어가 도드라진다. 엉겁결에 “고발자”라는 누명을 뒤집어쓴 ‘나’는 그것을 부정하는 맥락에서 그 부사어가 솟구친다. 화장실 변기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는 그 여자는 “세계 밖으로 지워지”는 중이다. “기화되는 그녀”란 불행의 지배 메커니즘에 포박된 삶에 진절머리를 친다. ‘그녀’는 나름 그 삶에 저항하지만 그 저항이란 얼마나 미약한 것인가!
불행으로 빚은 시들
시인은 자기가 겪은 사소한 불행을 채집하고 그것으로 불행의 시를 빚는다. 좋은 시가 항상 잘 빚은 불행인 건 그런 까닭이다. 사람은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불행한 게 아니라 불행하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 불행은 그 개별성에서 구체적 실감을 얻는다. 이문숙 시인은 근작시를 통해 불행을 냄새맡는 남다른 후각과 그것을 향해 직격하는 감수성을 펼쳐서 보여준다. 삶의 내부에 도사린 불모와 고갈을 외시하며, 불행의 유의미한 형상을 부여하는 것이다. 시인의 경우 그 불행은 노골적이지 않고 생을 향한 말랑말랑한 의지, 존재하려는 꿈틀거림 반하는, 무심히 무의식에서 흘러나온 듯한 ‘시멘트’나 ‘철사’의 이미지들로 나타난다. “시멘트 더께진 마당”(「어느날 발치사는 소설가가 된다」), “시멘트 바닥의 하얀 사람”(「호른이라는 악기」), “마른 수로에 철사 토막이 수없이 널려 있다”(「썸머드림」) 따위 시구들이 품은 것은 문명의 반생명적 억압에 대한 암시다. 생명이 말랑말랑하다면 ‘시멘트’나 ‘철사’는 딱딱하다. ‘시멘트’나 ‘철사’는 생명이 없는 것, 고갈과 경화(硬化)의 표상들이다. 불행은 생명의 본성을 거스르는 반생명적인 문명의 억압에서 비롯된다는 무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장석주 | 시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