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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샤인 샬레
임솔아
눈과 사람과 눈사람
2019 6 7
스무번째 계단에서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카티가 계단 꼭대기에 앉아 울고 있었다. 한 칸을 더 내려가면 카티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카티와 나는 스무 개의 계단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나는 한 계단을 더 내려갔다. 카티는 울음을 멈추고 뒤돌았다. 긴 꼬리를 흔들며 사라졌다. 나도 계단을 계속 내려갔다.
매일 아침 이백 개의 계단을 내려갔다. 백이십번째 계단 옆에는 넓적한 바위가 있었다. 그 바위 옆에 서서 눈매를 찡그린 채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수평선 근처에서 반짝거리는 햇살은 가시권 너머의 밝기였다. 매일 바라보아도 눈이 시렸다. 롬섬의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고 있었다. 해안에는 히든 롬 빌라가 있었다. 나는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선샤인 샬레를 담당했다. 나는 이 객실을 찾는 스페셜 게스트를 위한 서버였다.
계단을 다 내려오면 우거진 수풀이 펼쳐졌다. 히든 롬 빌라 안에는 길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계절도 없어서 일 년 내내 나무와 꽃들이 제멋대로 우거졌다. 아무렇게나 뻗은 잎들이 하늘을 거의 다 가려서 허리를 약간 굽힌 채로 걸어야 했다. 바람이 불 때 나뭇잎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하늘은 유릿조각처럼 작았지만 그래서 눈부셨다. 사람들이 무슨 색 옷을 입든 나무 그림자 속에선 거무죽죽한 그림자로 보였다. 빌라를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으면 무릎까지 자라나 있는 식물 사이에서 동물들이 하나씩 튀어나왔다. 닭과 염소와 거위 들이 차례대로 나타나 졸졸 따라왔다. 빌라 안에 어떤 동물이 몇 마리나 살고 있는지는 나도 알지 못했다. 우리도 울타리도 없었다.
“풀어두면 도망가지 않나요?”
종종 물어보는 투숙객이 있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나도 서버에게 똑같이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들은 대답을 그대로 말했다.
“도망갈 곳이 없어요.”
도망갈 곳이 없다는 걸 살아보고서야 실감했다. 갈 곳이 없어서 동물들은 자유로웠다.
분주했다. 조식이 준비되고 있었다. 서버들은 각각의 접시에 객실의 이름이 적힌 라벨을 붙였다. 티셔츠의 가슴주머니에도 객실의 이름이 이름표 대신 수놓아져 있었다. 주방장이 접시에 팬케이크를 놓으며 문라이트를 불렀다. 문라이트는 문라이트 접시를 들고 문라이트 샬레로 갔다.
체크인 서류에도 투숙객의 인적사항은 적지 않았다. 샬레 이름 옆에 여권번호만을 기입했다. 이름도 나이도 국적도 묻지 않는 것이 불문율인 이곳에서,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지내고 싶어 했고 대부분 조용히 지내다 떠났다.
히든 롬 빌라의 직원들도 모두 롬섬에 사는 이방인이었다. 나는 이방인으로서 이방인을 기다렸다. 이름 없는 사람이 되어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을 기다렸다. 이름을 부를 일도, 이름이 불릴 일도 없어서 어떤 사람도 될 수 있었다.
부두 위로 쓸려온 모래알을 빗자루로 쓸었다. 아침마다 새로운 모래들이 쓸려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부두 끝까지 한 걸음 한 걸음 쓸어낸 후에, 빌라 쪽으로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허리를 펴면 빌라가 한눈에 올려다보였다. 선샤인 샬레가 언덕 위에 얹혀 있었다. 선샤인 샬레는 이 자리에서 가장 잘 보였다. 물풀이 바닷물 위까지 자라나서 검게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바다는 시커멓게 보였다. 마을로부터 흘러온 생활 쓰레기도 부유하고 있었다. 아이보리색 래시가드를 입은 스태프들이 보트를 타고 망을 드리워 쓰레기를 걷어냈다. 빌라 안에서는 서버들이 쪼그려 앉아 들꽃을 따고 있었다. 새로운 들꽃을 곳곳에 꽂아둘 것이다. 주방에서는 스태프가 리넨으로 유리잔의 물기를 닦아내고 있었다. 오늘의 투숙객을 위해 나는 냉장고에서 망고를 꺼내 깎았다. 얼음과 함께 블렌더에 갈았다. 망고주스를 유리잔에 따랐다. 섬유유연제 냄새가 피어오르는 바구니에서 핸드 타월을 꺼내 돌돌 말았다. 냉동실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꽁꽁 언 타월 한 장을 꺼내 목덜미를 닦았다. 트레이에는 두 장을 올렸다. 주스 두 잔을 담아서 부두로 돌아갔다. 입구에 핀 재스민 꽃 두 송이를 따 트레이에 담았다.
깨끗해진 바다의 표면이 휴양지다운 청명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부두에 앉아 저 멀리에서 힘차게 다가오는 보트를 주시하고 있었다. 선원으로부터 밧줄을 넘겨받아 부두의 기둥에 묶었다. 손님은 어린아이의 어깨를 한 손으로 끌어안고 서 있었다. 손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님의 호박색 눈동자에 햇빛이 통과했다. 망고주스와 핸드 타월을 건네며 손님들에게 눈인사를 했다. 호박색 눈동자는 핸드 타월을 받아들었고, 나는 호박색 눈동자의 캐리어를 향해 팔을 뻗었다.
“괜찮아요.”
호박색 눈동자는 고개를 저었다.
“덥죠?”
나의 젖은 앞섶을 본 그는 내 빈손 위에 핸드 타월을 도로 올려놓았다. 호박색 눈동자에게서 돌려받은 핸드 타월로 나는 이마를 닦았다. 호박색 눈동자는 손수 캐리어를 끌고 걸어갔다. 몇 번이나 다가가 캐리어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호박색 눈동자는 매번 사양했다. 숲을 지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호박색 눈동자는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고, 아이는 느리게 그 뒤를 따라갔다. 계단을 오르며 아이는 자주 멈추었다. 뒤를 돌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호박색 눈동자와 아이는 오전 내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샬레 문 앞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로 올라온 카티를 쓰다듬었다. 내가 하는 일은 이 의자에 앉아서 손님의 부름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잠깐 조는 사이에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아 대답을 해보았다. 손님들이 나누는 대화, 샤워를 하는 소리, 잠꼬대 소리 따위를 나는 나를 부르는 소리로 자주 착각했다. 다른 곳에 가서 쉬라고 부탁하는 손님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 방으로 갔다. 부르는 소리를 듣기 위해 창문을 열어두었다. 하루에 한 번이나 이틀에 한 번 정도, 손님들은 나를 찾아 체크아웃 시간을 물어보거나 주스 한 잔을 주문하는 사소한 부탁을 했다. 사소한 부름을 하루 종일 기다렸다. 열린 창문 아래로 산양이 찾아와 한참 동안 나를 올려다보기도 했다. 곱슬곱슬한 털로 뒤덮인 입을 오물거리던 산양은 귀를 쫑긋거리더니 다른 데로 갔다. 손님의 부름을 기다리는 동안 사소한 것들이 이런 식으로 다가왔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아무 까닭 없이 머물렀다. 다가왔던 것들이 다시 또 다가왔다가 지나가고, 다시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기다렸다.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었기에 아무것도 아닌 것들과 마주칠 수 있었다.
카티가 자기 발바닥을 핥고 있었다. 아이가 밖으로 나와 카티 앞에 쪼그려앉았다. 내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카티를 골똘히 바라보았다. 카티가 무릎에서 내려가 아이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아이는 카티를 뒤따라갔다. 카티를 따라가는 아이를 나는 뒤따라 걸었다. 카티가 가는 대로 아이 뒤를 따라 걸었고, 카티가 멈추는 대로 아이 뒤에 멈췄다.
“비밀인데요.”
아이가 까치발을 들고서 다가와 속삭였다. 들을 사람이 없는데도 아이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금통의 배를 가르지 않고서 감쪽같이 동전을 꺼낼 수 있는 비법이라든가, 자물쇠로 잠겨 있는 엄마의 서랍을 몰래 열어 담배 냄새를 맡아보았다든가 하는 이야기들을 아이는 하나씩 하나씩 귓속말로 전해주었다. 목소리가 숨소리만큼이나 작아서 몇 번이고 다시 물어보아야 했다. 그럴 때마다 아이는 폴짝 뛰면서 내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댔다. 비밀이랄 것도 없는 이야기인데도 비밀이라고 말했다. 나는 아이를 향해 허리를 숙여주었다. 나는 아이가 쓰는 비밀이라는 단어가 재미있었다. 비밀인데요, 할 때마다 아이의 입술은 조그마한 자물쇠가 열릴 때처럼 동그랗게 오므라졌다가 퍼졌다. 쉬운 비밀을 말하는 아이와 함께 있는 동안, 바닥을 굴러다니는 담배꽁초나 돌멩이 따위가 모두 앙증맞은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카티가 지붕 위로 올라가 낮잠을 자기 시작하자, 아이도 하품을 하며 샬레로 돌아갔다.
아이가 잠이 들었을 즈음에는 호박색 눈동자가 객실 밖으로 나왔다. 호박색 눈동자는 비치 체어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인중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처럼 의자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았다. 수영장 주변을 빙글빙글 돌아다니기도 했다. 아이와 함께 걷던 때와 달리 호박색 눈동자와 나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호박색 눈동자는 말을 짧게 했다. ‘콜라요’라고 말하는 정도가 다였다. 콜라를 들고 오면 호박색 눈동자는 콜라를 따서 그것을 내게 돌려주었다. 무표정한 얼굴 때문에 고맙다는 말도 잇지 못하고 엉겁결에 나는 콜라를 받아 마셨다.
계단 아래 샬레들에 차례차례 불이 켜졌다. 나는 샬레를 한 바퀴 돌았다. 처마 등과 외벽 등을 켜기 시작했다. 밤이 되면 작은 소리도 계단을 타고 샬레까지 올라왔다. 검은 바다에서 올라오는 파도 소리가 더 잘 들렸다. 나는 의자에 앉아 객실 안의 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실내에 불이 꺼지면 실외등을 차례차례 끄고서 방으로 돌아왔다. 유니폼을 벗고 샤워를 했다. 서랍을 열었다. 투숙객들이 두고 간 스킨과 로션을 꺼내 얼굴에 발랐다. 손님들은 한두 가지 물건을 흘린 채로 떠났다. 그 물건들로 내 방이 가득했다. 작은 물건들은 책상 서랍에 들어 있었고, 큰 물건들은 방 여기저기에 내 물건처럼 놓여 있었다. 돌고래가 그려진 튜브는 벽에 장식품처럼 걸려 있었고, 구형이 되어버린 몇 대의 노트북은 책꽂이 위에 올려져 있었고, 꽃무늬 원피스와 야자수가 그려진 셔츠들은 옷장에 들어 있었다. 책상 서랍에는 수첩과 엽서, 아동용 손목시계와 카메라 몇 대, 휴대용 스피커와 내용물이 조금밖에 남지 않은 화장품 용기가 칸칸이 가득했다. 손님들이 남기고 간 것들을 나는 선물처럼 간직했다. 친구는 한 명도 없었지만 선물은 방안에 가득해져갔다. 책꽂이에도 그들의 책이 꽂혀 있었다. 다른 나라의 글자여서 읽을 수 없는 책이 더 많았다. 여행책과 그림책과 소설책 옆에는 내 책도 있었다. 경찰학개론 총론, 경찰공무원 영어 문법 모의고사, 경찰공무원 한국사…… 경찰공무원 한국사를 꺼내보았다. 앞쪽은 손때가 묻어 있었다. 빈 공간마다 메모가 빽빽했고 색색의 형광펜으로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여기저기 포스트잇이 붙어 있고 귀퉁이가 접혀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머지 페이지는 새 책처럼 새하얬다. 한국사 책을 다시 책꽂이에 꽂았다. 읽을 수 없는 그림책을 꺼내 한 장씩 넘겼다. 그림을 보며 책의 내용을 지어냈다. 서랍에서 카메라들을 꺼냈다. 각기 다른 조작법을 가진 카메라의 전원을 켜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카메라 속 사진 들을 넘겨보았다. 다녀간 손님들 몇몇이 액정 안에 남아 있었다. 정이 들 것 같을 때면 손님들은 떠났다. 질릴 것 같을 때에도 손님들은 떠났다. 한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또 다른 한 사람이 찾아왔다. 사람이 떠날수록 이런 식의 선물이 쌓여갔다.
호박색 눈동자와 아이는 한 달이 지나도록 샬레에 머물렀다. 첫 일주일 동안은 여느 투숙객들처럼 그들이 떠날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하고 아침마다 체크아웃을 준비했다. 식사비와 숙박비를 계산한 다음, 영수증에 금액을 적었다.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문 앞에 앉아 있었다. 호박색 눈동자는 나를 부른 적이 없었다. 식사시간에 나는 노크를 하고 메뉴판을 넣어주었고, 호박색 눈동자와 아이는 손가락으로 메뉴 하나를 짚었다. 청소시간마다 호박색 눈동자와 아이는 내 의자에 앉아서 청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가끔 짧은 대화가 있기도 했다. ‘우유 부탁합니다’ 같은 말이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매일 아이와 쉬운 비밀을 나누며 산책을 하게 되었다. 아이는 미세하게 다리를 절었다. 아이의 두 걸음은 내 한 걸음이었다. 나는 천천히 걸었다. 산책로는 매번 같았다. 호박색 눈동자가 아이를 부르면 답할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수영장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수영장의 비치 체어 아래에 카티가 납작 엎드린 채 아이와 나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수영장에 하루살이들이 떠 있으면 아이와 함께 하루살이에 대해 얘기했고 플루메리아 잎이 떠 있으면 플루메리아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이는 수영장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귀고리 같은 것을 찾아냈다. 그러다 벌레 먹어 구멍이 숭숭 난 낙엽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아이는 그런 것들을 소중하게 다뤘다. 소소한 보물을 찾아내는 아이와 함께 있으면, 소소한 보물들이 내게도 쉽게 눈에 띄었다. 가끔은 수영장 어귀로 구관조가 날아왔다. 가까이 다가가면 날아갈 거라는 걸 아이는 알고 있었다. 아이와 나는 열 발자국 정도 떨어진 자리에서 구관조에게 말을 걸었다. 구관조는 분명 구관조였지만 사람의 말을 따라 할 줄 몰랐다. 수영장에서 구관조를 발견하는 투숙객들은 구관조에게 몇 번이고 자기 나라 말로 말을 걸었다. 아이는 새의 소리를 따라 했다. 구관조는 새의 소리로 답했다.
“뀌엑.”
“뀌엑.”
사람의 말이 아닐 때에만 말이 통했다.
아이의 비밀은 날마다 늘어갔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 매일 새로운 비밀이 되었다. 아이의 양말 바닥이 반나절만 지나도 새까매진다는 것과 브로콜리는 머리가 바글거려 무섭다는 것과 무지개 기름이 떠 있는 웅덩이를 보면 밟지 않고 지나쳐야 한다는 것. 그것들이 왜 비밀이냐고 물으면 아이는 가던 걸음을 멈춘 채로 턱을 괴고 서 있다가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며 입을 삐죽였다. 아이가 하품을 하면 샬레에 아이를 데려다주었다. 호박색 눈동자는 아이를 객실로 들여보내며 지폐 한 장을 팁으로 건네고는 다시 문을 닫았다. 나는 책상에 앉아 석양에 지폐를 비쳐보았다. 지폐의 하얀 부분에서 위조방지장치가 드러났다. 연필을 들었다. 빛 속에서만 드러나는 지폐의 얼굴 아래에 이름을 적었다. 호박색 눈동자. 지폐를 서랍에 넣어두었다. 서랍 속에 지폐가 쌓여갔다. 돈을 쓸 일이 없었으므로 서랍 속의 다른 물건들처럼 내가 모으는 선물이 되어갔다. 지폐의 위조방지장치마다 글씨를 적었다. 느리게 걷는 아이, 뾰족한 발, 커다란 앞니.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깔깔거리고 꺽꺽거렸다. 웃음소리처럼 들리기도 했고 울음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객실 앞으로 걸어갔다. 샬레 안에서 나는 소리인지, 지붕 위를 돌아다니고 있을 카티가 내는 소리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새까만 숲에서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도 들려왔다. 된바람이 불었고 나뭇잎들이 박쥐 떼처럼 날아다녔다. 깊숙한 어둠 속에서 짐승의 눈알이 번쩍였다. 시간과 날씨에 따라 숲은 쉽게 얼굴을 바꾸었다. 연일 폭우가 쏟아지는 때면 늪처럼 변했다. 낮에도 밤처럼 사위가 어두웠고, 온갖 벌레들이 땅속에서 기어 나와 나무줄기에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덩굴도 한나절 만에 자라나 계단을 조금씩 뒤덮어갔다. 연일 땡볕만 쏟아지는 때면 숲은 금세 늙어갔다. 코코넛이 우그러들었고, 야자나무 잎이 누렇게 변색됐다. 말라비틀어진 도마뱀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변화무쌍했지만 변하지 않았다. 이상한 소리가 멈출 때까지 나는 샬레 앞에 서 있었다. 그 소리에는 이상한 박자가 담겨 있었고 나는 그 박자를 따라 숨을 쉬었다. 소리가 잦아들면 숨이 막혀왔고 소리가 커지면 크게 숨을 쉬었다. 사람인지 카티인지, 소리의 정체는 알 수가 없었다. 소리가 완전히 그치고 나자, 내가 실컷 웃고 실컷 운 것처럼 후련했다. 샬레 안에서 며칠이고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날마다 나는 나를 부르는 소리로 착각했다. 몇 번씩 귀를 기울였다.
호박색 눈동자는 언젠가부터 팁을 직접 주지 않았다. 청소를 하려고 객실에 들어가면 침대 위에 지폐가 놓여 있었다. 간단한 청소도 미리 돼 있었다. 침대와 베개 커버를 벗기고 사용한 수건과 함께 침대 옆에 쌓아놓았다. 배수구의 머리카락도 쓰레기통에 넣어두었다. 유리잔도 쟁반 위에 모여 있었고, 실내용 슬리퍼도 한 편에 놓여 있었다.
아침식사를 하고 나면 내가 테이블을 정리할 때까지 호박색 눈동자와 아이는 샬레 바깥으로 나가서 의자에 앉아 나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다음, 아이와 호박색 눈동자는 정원을 걸어 다녔다. 그다음, 계단을 내려와 먹던 빵을 동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다음, 해변으로 내려가 조개껍데기 하나를 주워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다음, 옆 마을까지 해변을 따라 산책을 했다. 나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뒤를 따라다녔다. 투숙객들은 늘 내가 언제고 가까이 있다는 점에 감동하며 내 직업의식을 칭찬해주었다. 그러나 투숙객을 따라다니는 건 내게 업무가 아니었다. 다른 생활이 없었으므로 그건 내 생활일 뿐이었다. 누군가는 이런 곳에서 지내는 게 부럽다고 했고, 누군가는 젊은 사람이 왜 이런 곳에서 지내느냐고 했다. 그러면 나는 이런 곳이 어떤 곳이냐고 되물었다.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잖아요.”
대답들은 대부분 비슷했다. 나는 웃어 보였다.
“왜 웃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이루어진 이곳을,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고 말했다. 이곳에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는 그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나는 할머니가 떠올랐다. 집을 떠나오기 전에, 혼자 있다가 할머니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엄마를 찾았고 나는 나 혼자 있다고 대답했다. 할머니는 지금부터 자신이 하는 얘기를 잘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꼭 그대로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항아리에 검은 모래를 채워넣고 그 위에 속옷을 넣어라. 빨간 실과 파란 실로 항아리를 묶고 옷장에 넣어라. 그래야 집안에 나쁜 사고가 닥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엄마에게 할머니의 말을 전달했고, 엄마는 그대로 따랐다. 내가 수능을 볼 때 엄마는 뱃속에 지니고 있으라며 배냇저고리를 꺼내줬다. 동지 때에는 커다란 냄비 가득 팥죽을 쒀서 반드시 싹싹 먹어야 한다고 말했고, 정월 대보름에는 부럼을 깼다. 이사를 갈 때마다 천장에 부적을 붙여놓았고, 내 지갑에도 부적을 접어 넣어주었다. 할머니와 엄마의 세계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나에게는 당연할 리 없는, 이상한 일들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들의 삶을 단단하게 지배했다. 그런 단단한 것들이 이곳에는 없었다. 당연했던 어떤 것들도 이곳에는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질 수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 있는 많은 것들을 그러나 반갑게 즐기다가 떠났다. 아무것도 없다는 곳에 있는 것들을 그들에게 굳이 설명할 이유는 없었다. 그건 부러워할 일도, 안타까워할 일도 아니라는 것도.
손님들은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체크아웃을 했다. 나는 그들이 남기고 간 물건을 상자에 넣고 그들이 버리고 간 슬리퍼를 빨았다. 세탁기에 침대 시트를 집어넣고, 새하얀 시트 위에 표백제를 부었다. 누군가 다녀간 흔적을 표백하면서 또다시 누군가를 위한 준비를 했다.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는 손님도 있었지만 누구도 다시 오지는 않았다. 그 약속은 믿을 필요도, 기대할 필요도 없었다. 다시 만나는 일이 없다는 게 약속이라면 약속이었다.
언덕 아래 샬레에서 투숙객들은 수차례 빠져나갔고 새로 들어왔다가 다시 빠져나갔다. 더할 나위 없이 산뜻한 작별이었다. 망고트리 서버가 망고트리 샬레를 떠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왜 떠나느냐고 묻는 사람도 없었고, 어디에서 어떻게 살 거냐고 묻는 사람도 없었다. 작별 파티를 하던 밤에 수고했다는 말과 잘 가라는 포옹을 하면서도, 투숙객이 떠날 때 그랬던 것처럼 그냥 보냈다. 오면 환영했고, 가면 배웅했다. 매일 아침 보트를 맞이했고 그 보트를 타고 떠나는 사람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을 했다. 스타라이트의 투숙객이 망고트리의 서버가 되었다. 그날 나는 떠나간 손님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아이가 아끼는 인형을 두고 온 것 같다는 전화였다. 나는 물론 그 인형을 알고 있었다. 쓰레기봉투를 들고 소각장에 가다가 메추리 새끼들이 옹기종기 웅크려 졸고 있는 걸 보았었다. 얼룩덜룩한 메추리 새끼들이 커다란 하마 인형의 배 위에서 포근하게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새끼 메추리들은 내가 다가가자 배에서 뛰어내려 잽싸게 도망을 갔다. 베에 메추리 똥이 범벅된 채 하늘색 하마 인형은 활짝 웃고 있었다. 나는 그 인형을 그 자리에 내버려두었다.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올 때에는 다시 메추리 세끼들이 숲에서 튀어나와 쫑쫑거리며 하마의 배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는데요. 다른 곳에서 잃어버린 것 아닐까요.”
나는 손님에게 거짓말을 했다. 하마 인형은 메추리의 오줌똥으로 나날이 더러워졌다. 메추리 새끼들처럼 얼룩덜룩해져서 한 식구처럼 보이게 되었다.
호박색 눈동자는 오전 산책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간을 객실 안에서 보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호박색 눈동자는 수영장으로 나왔고, 내려앉은 공기 속에서 비치 체어에 누워 노을이 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나는 침대 위에 놓인 팁을 매일매일 챙겨 매일매일 다른 이름을 적었다. 씹어놓은 빨대. 우렁찬 재채기. 냅킨으로 접은 종이배. 삼십 분의 딸꾹질…… 호박색 눈동자는 항상 그대로 있었고, 아이의 걸음은 시간이 갈수록 더 느려졌다. 한쪽 날개가 파열된 장난감 비행기처럼 심하게 기울어져갔다. 내가 침대를 정리해주는 사이, 아이는 객실 안으로 들어와 속삭였다.
“언니 방에 가보고 싶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는 내 팔에 매달려 볼멘소리를 했다.
“언니는 우리 방에 매일 오잖아요.”
곤란해졌다. 아이는 나와 단둘이 있게 될 때마다 방에 데려가 달라고 졸랐다. 나는 매번 고개를 저었다.
“저녁 먹고 언니 방에 갈게요.”
아이는 내 팔을 끌어안았다. 나는 아이를 슬그머니 밀어냈다. 아이는 금세 울상이 되었다. 굵은 눈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오믈렛과 소시지가 담긴 접시와 생과일주스와 우유를 쟁반에 담아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거위에게 쫓기며 아이가 계단을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거위는 날개를 펼친 채로 아이를 향해 돌진했다. 뒤뚱거리는 건 거위였고 아이는 날쌨다. 땅을 박차는 아이의 두 다리는 정확하게 다음 계단을 조준했다. 두 계단씩 점프를 하며 내려갔다. 거위가 꽥꽥거리며 아이의 다리를 향해 주둥이를 내밀었다. 아이는 나를 발견하고 나를 향해 달려왔다. 아이는 느리게 걷지도 않았고 다리를 절지도 않았다. 아이는 내 뒤에 숨었고, 거위는 날개를 접고 숲으로 방향을 틀었다.
“거짓말이었구나.”
아이가 자기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고개를 들어 나를 노려보았다. 입을 굳게 다물고 휙 뒤돌았다. 한 발 한 발 씩씩하게 걸어 아이는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갔다. 숲으로 들어갔던 거위가 튀어나와 혼자가 된 아이를 향해 달려갔다. 아이는 계단 옆에서 커다란 돌멩이를 집어 거위를 향해 던졌다. 거위가 물러서자, 아이는 나를 향해서 돌멩이를 던졌다.
오전 산책이 시간이 되어도 아이는 샬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이는 객실 안에 남고, 호박색 눈동자만 밖으로 나왔다. 아이와 셋이서 걷던 길을 호박색 눈동자와 둘이서 걸었다. 호박색 눈동자는 내게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오후 산책 시간에도 아이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거짓말로 빼곡하게 적어나갔던 자기소개서들이 생각났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면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으로 간주되어버린다는 점이 그 시절 나의 고난이었으나, 어떤 자기소개서에도 그런 고난을 적을 수는 없었다. 거짓 고난과 거짓 깨달음과 거짓 열정을 지어냈다. 사람을 만날 때에도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 거짓 아픔을 좋아해줬다. 몇몇 사람에게 그러나 내 거짓말은 간파당했다. 그들과 다시 만나야 할 때마다 나는 눈치를 살폈다. 내가 입을 열 때마다 그들은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나를 가짜라고 말하고 있었다. 실은 그렇게 아픈 적이 없었다는 것을 누구도 반가워해주지 않았다. 나는 거짓으로 아팠지만 그 아픔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아이의 아픔이 거짓말이어서 다행이었다. 아이가 나온다면 아이를 따라 걸을 테지만, 아이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호박색 눈동자는 한밤중에 테라스에 나와 의자에 앉아서 별이나 섬을 바라보았다. 나는 내 의자에 앉아 손님이 바라보는 것을 함께 보았다. 나무의 테두리들이 차례대로 어두워졌다. 안 보이던 별들이 하나하나 뚜렷해졌다. 나는 물잔에 담긴 얼음을 달그락거렸다. 따갑다는 걸 알면서도 얼음을 집어 들고 손 위에서 녹아내리는 얼음을 바라보았다. 배들이 불을 밝히고 출항해 있었다. 배들은 별자리처럼 띄엄띄엄 자리를 잡았다. 배들은 각자의 어둠이 필요해 보였다. 각자 확보한 어둠이 있어야 물고기 떼가 모여들었다. 저 배들 중 어느 하나가 이른 아침 히든 롬 빌라에 생선을 납품할 것이다. 그 생선들 중 하나는 카티가 차지할 것이다. 어두워서 검은 얼룩의 카티는 하얀 얼룩만으로 돌아다녔다. 호박색 눈동자는 두 손을 모아 입김을 불었다. 나는 무릎담요 두 장을 가져와 한 장을 호박색 눈동자에게 건넸다. 호박색 눈동자는 담요를 받아들고는 무릎에 담요를 덮었다. 담요 위에 자기 손을 놓아 두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지우고 싶어요.”
호박색 눈동자가 손톱을 보여주며 말했다. 코발트빛 매니큐어가 볼썽사납게 벗겨진 손톱은 여기 머문 시간만큼 자라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오래 머무는 여자들 몇몇은 리무버를 찾았다. 처음 이곳에서 머물 때 나도 서버에게 리무버를 부탁했다. 방으로 가서 서랍 속 리무버와 화장솜을 꺼내 돌아왔다. 호박색 눈동자는 화장솜에 리무버를 묻혀 하나씩 손톱을 닦아냈다. 손톱을 다 닦아내자 조용히 웅크렸다. 말갛게 지워진 손톱에서 본래의 피부색이 비쳤다. 왼쪽 넷째 손톱이 까맣게 멍들어 있었다. 무언가에 부딪힌 흔적일 것이다. 지우고 나서야 볼 수 있는 흔적이었다. 호박색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각각 앉아 있었다. 섬도 그렇게 미동 없이 검게 제각각 떠 있었다. 달과 별들은 오른쪽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호박색 눈동자가 팔을 뻗어 먼바다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름이 뭐예요?”
손가락을 따라 바다를 보았지만 캄캄했다. 캄캄한 바다 위에 캄캄한 섬들이 떠 있었다. 호박색 눈동자가 묻는 것이 내 이름인지 저쪽 섬의 이름인지 헷갈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어둠을 바라보았다. 섬은 많았다. 수면 위로 튀어나온 바위들과 몇 사람이 겨우 서 있을 만한 모래 지대와 어부가 던져놓은 부표와 새들이 사는 몇몇 섬.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섬의 이름이 됐든 내 이름이 됐든 대답할 게 없었다.
“이름이 뭐예요?”
호박색 눈동자의 말을 나는 호박색 눈동자에게 돌려주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호박색 눈동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먼바다를 응시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나도 호박색 눈동자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날 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때, 호박색 눈동자는 주머니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내게 건넸다. 방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그 책을 꺼내보았다. 손바닥만한 책이었다. 덮어놓아도 저절로 열릴 정도로 너덜거리는 책이었다. 페이지마다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하나같이 우스꽝스러운 삽화였다. 유머집이었다. 나는 유머집을 한 장씩 넘기며 깔깔거리고 꺽꺽거리며 웃었다. 밤마다 샬레 안에서 흘러나왔던 이상한 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산책시간에 맞추어 문 앞 의자에 앉아 있는데 호박색 눈동자가 캐리어를 끌고 나왔다. 내가 정산을 하는 동안 호박색 눈동자와 아이는 문밖에서 카티에게 꽃잎을 먹여주며 기다렸다. 호박색 눈동자는 캐리어를 손수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이번에는 아이가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고, 호박색 눈동자가 느리게 그 뒤를 따라갔다. 스무번째 계단에서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카티는 여느 때처럼 뒤돌았고, 긴 꼬리를 흔들며 사라졌다.
해안으로 이어지는 빌라 입구에서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지도에 없는 곳. 아무도 찾아낼 수 없는 자유. 히든 롬 빌라. 빌라 입구에 적혀 있는 글귀를 처음 보았을 때,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도 찾아낼 수 없기를 바랐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무도 찾아낼 수 없는 곳에서라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찾아올 이유도 찾아갈 이유도 없는 곳을 찾아내고 싶었다. 미래가 없는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가 필요 없는 미래에서 살고 싶었다.
스태프들이 보트를 타고 부유물을 걷어내고 있었다. 물풀은 검게 흐느적거렸다. 보트는 제 시각에 도착했다. 나는 호박색 눈동자에게 악수를 청했다. 호박색 눈동자는 악수 대신 지폐 한 장을 내 손에 올려놓았다. 아이는 부두로 이어진 나무다리를 깡충거리며 지나갔고, 가볍게 뛰어서 배 위로 건너갔다. 나는 손을 흔들었다. 호박색 눈동자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이는 다른 데를 보고 있었다. 나는 계속 손을 흔들었다. 호박색 눈동자와 아이를 실은 채로 보트는 출발했다. 떠나가는 보트가 하얀 물길을 만들었다. 물결이 바다를 뒤적거렸다. 부표가 출렁였고 바닷속에서 모래가 일었다. 부두 한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사람이야.”
사람들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익사체의 티셔츠는 반쯤 추켜 올라간 채 살점을 파고들고 있었다. 터질 듯 물에 불어 관절의 윤곽이 사라져 있었다. 머리카락은 부표에 듬성듬성 낀 이끼 같았고, 눈과 콧날도 부풀어 오른 얼굴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 얼굴은 누구도 쉽게 식별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흩어졌다. 누군가는 경찰에 신고를 하러 갔고, 누군가는 사라진 투숙객이나 직원이 있는지 주변을 수색하러 갔다.
샬레는 깔끔했다. 호박색 눈동자와 아이는 아무것도 놓고 가지 않았다. 유리잔도 제자리에 있었고, 쓰레기통도 비워져 있었다. 아무도 지낸 적 없는 방 같았다.
누군가 다녀간 흔적을 말끔하게 지울 것.
그러나 누군가 살고 있는 방처럼 아늑하게 매만져놓을 것.
체취는 제거하고 향기는 남길 것.
매일 새로운 들꽃을 꽃병에 꽂아둘 것.
히든 롬 빌라의 청소 원칙이었다. 나는 침대 시트와 베개 커버를 걷어냈다. 샤워실에 표백제를 뿌리고 솔로 타일 사이사이를 닦았다. 깨끗한 유리잔을 다시 한 번 부셨다. 깨끗한 바닥을 걸레질하기 시작했다.
“민주?”
부두에서 들은 소리가 떠올랐다. 익사체를 둘러싼 사람들 속에 있을 때, 그 소리가 뒤에서 조그맣게 들려왔다. 그 말이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알아챘다. 그 소리는 내 이름이었다. 현기증이 일었다. 나는 걸레를 더욱 꼭 쥐었다. 다시 걸레질을 했다. 바닥을 더 세게 닦아냈다. 신문지를 구겨 샤워실 거울에 말라붙은 물방울 자국을 아득바득 지워냈다. 샤워 커튼 아래 스며 있는 물기를 힘껏 짜내고 세면대와 바닥을 싹싹 훔쳐냈다. 창가의 꽃병에서 들꽃을 뽑아 버리고 새 들꽃 한 송이를 꽂았다. 미니바에 음료를 가지런히 채워 넣었다. 방으로 돌아와 호박색 눈동자가 준 마지막 지폐를 햇빛에 비춰보았다. 이번에는 연필을 들지 않았다. 적어야 할 이름이 너무 많았다. 그 자리는 비워두어야 맞았다. 창문을 열었다. 창에 찍힌 내 지문을 닦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