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간 163.6]
특집 의암성사 순도 100주기(6)
의암성사와 공주 이인
희암 성주현_본지 주필, 관의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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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혈전은 이인전투, 효포전투, 우금치전투
공주 우금치 일대는 동학농민혁명 최대의 전투지로 알려져 있으며, 무엇보다도 전봉준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공주는 전봉준 외에도 의암성사를 비롯한 수많은 동학군의 혁명 열기와 희생을 품고 있다. 우금치 일대 동학혁명군의 혈전은 이인전투, 효포전투, 우금치전투로 구분된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공주 우금치 일대와 관련된 교단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갑대(甲隊)는 영동, 옥천으로부터 논산에 이르러 전봉준 포와 합세하고, 을대(乙隊)는 회덕 지명시장(芝明市)에 이르러 청주 관군과 싸워 그를 전멸하고 논산에 이르러 갑을 양대가 총합하여 행진하다가 공주 이인역에서 경군(京軍)을 만나 옥녀봉(玉女峯)에서 상전(相戰)할 세, 관병이 대패 도주하는지라. 동군이 추격하여 봉황산(鳳凰山)에 오르니, 때는 마침 관군의 원병인 일군(日軍)이 대거 내합(來合)한지라. 동군(東軍)이 공주 효포(孝浦)에서 혈전 7일에 전세 불히함을 보고 퇴각하여 논산에 이르러 일군과 교전하다가 다시 퇴각하여 전주를 거쳐 태인에서 일군과 교전하고(『천도교창건사』)
위의 기록은 공주 우금치 일대에서 동학군과 관군 및 일본군과의 혈전을 하고 있는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청산 문바위골에서 출발한 의암성사의 동학혁명군은 갑대와 을대 두 개의 부대로 나누어져 갑대는 바로 논산 초포(草浦)로 진격하였으며, 을대는 회덕의 지명시장에 이르렀을 때 청주 관군과 싸워 그들을 전멸시키고 논산 초포의 본대에 합류하였다.
논산 초포에는 의암성사가 이끄는 호서와 경지지역 동학혁명군과 전봉준이 이끄는 호남지역 동학군 수만 명이 집결하였다. 동학혁명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기세를 올렸다. 동학혁명군은 최종 목표는 이미 사발통문에서 ‘경사로 직향할 것’ 즉 서울로 가는 것이라고 밝힌 것과 같이 그 길목인 공주를 우선 점령하기로 하였다. 초포를 출발한 동학혁명군은 공주로 하였다. 의암성사가 이끄는 부대는 이인을 거쳐 공주로, 전봉준 부대는 효포를 거쳐 공주로 각각 공격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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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성사, 첫 이인전투에서 승리
10월 20일경 이인에 이른 의암성사 부대는 전투에 앞서 지형을 살피고 진세를 새롭게 갖추었다. 이인에서 공주로 넘어가는 지형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전투에서 지형을 활용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그러나 이인에서 공주로 가는 길목인 우금치 고개에는 이미 관군과 일본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순영병을 지휘하는 구완희 부대, 경리청병을 이끄는 성하영 부대, 스즈키이 이끄는 일본군이 그들이었다. 이들 부대는 동학혁명군의 동태를 살피면서 움직임에 주시하였다.
우금치 일대의 첫 전투는 1894년 10월 23일(음) 전개된 의암성사가 이끄는 동학혁명군과 관군·일본군 연합부대와의 이인 전투였다. 지형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의암성사의 동학혁명군은 관군과 일본군에 대한 선공으로 첫 전투가 시작되었다. 동학혁명군의 공격을 받은 관군과 일본군은 인근 취병산으로 후퇴하였다. 전세를 새로 갖춘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으로 몇 차례의 공방전을 주고 받았다. 처음에는 동학혁명군이 밀렸으나 점차 안정세를 유지하여 강하게 대응하였다. 날이 저물자 관군과 일본군은 공주 쪽으로 퇴각하였다. 결국 동학혁명군은 일본군이 후퇴하였던 취병산을 포함 높은 고지를 점령하였고, 관군과 일본군은 퇴각하였다.
이인전투에 대해 『공산초비기』에는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내용은 조금 길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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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초비기』의 이인전투
10월(원문에는 9월로 되어 있음) 22일 밤 3경에 감사가 갑자기 군령을 발하여 내일 새벽 경천(敬川)과 이인(利仁)으로 출정하도록 하였다. 그날 밤에 부슬부슬 찬비가 내려 행군을 수고롭게 하였다. 23일 새벽 하늘이 맑게 개어 먼지가 전혀 없었다. 감사가 새벽에 장대(將臺)에서 나와 영전(令箭)과 영기(令旗)를 나누어 보내 서산군수(瑞山郡守) 성하영(成夏永), 안성군수(安城郡守) 홍운섭(洪運燮), 경리청 영관(領官) 구상조(具相祖) 등을 불렀다. 참모관(參謀官) 구완희(具完喜)는 일찍이 벌써 군사를 거느리고 기다리고 있다가 마침내 각 군사를 나누어 뽑았다. 구완희는 순영(巡營, 충청감영) 군사 4분대를 거느리고, 성하영은 경리청 군사 1소대를 거느리고 일본군 소위(小尉) 스즈키 아키라(鈴木彰)는 일본 병사를 거느리고 함께 이인(利仁)으로 향해 갔다. 홍운섭과 구상조는 각기 1소대를 거느리고 효포(孝浦)에 가서 유진(留陣)하였다. 우영장(右營將) 이기동(李基東)과 경리청 대관(隊官) 백낙완(白樂浣)은 금강진(錦江津)과 산성(山城) 모퉁이에서 주둔하였다. 백낙완이 또 강을 건너서 순시하다가 저물녁에 떠돌아다니는 동학군 십 수 명을 붙잡아서 돌아왔다.
이날 오시(午時)에 우금치(牛金峙) 파수군(把守軍)이 “이인 근처에서 총 소리가 갑자기 들렸고, 또 대포소리가 몇 발 들렸다”라고 보고하였다. 감영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며 이상하게 여겼다. 황급히 어떤 이가 급히 보고하기를, “적병이 봉황산(鳳凰山) 뒤쪽에서 몰래 와서 막 웅진(熊津)을 건넜다”라고 하였다. 감사가 영기(令旗)를 출발시켜 이인에 있는 군사를 불러 순영으로 되돌아오게 하였다, 성하영 등이 이인에 도착하여 바라보니, 숲처럼 수많은 깃발이 꽂혀있고 동학군이 가득하였다.
마침내 일본 군관과 약속하기를 “우리들이 여기 와서 만일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난다면 저들이 필시 승승장구의 기세로 곧장 쳐들어 올 것이니, 이 곳에서 한 번 결전하는 것이 좋겠소”라고 하였다. 성하영의 군사들이 산 남쪽 기슭을 둘러싸고 총을 발사하고 나팔을 불며 곧장 그 앞을 공략하고, 일본 병사는 북쪽으로 산에 올라 나무 뒤에서 몸을 숨기고 총을 쏘며 호응하였다.
구완희가 남월촌(南月村)에 주둔하였던 동학군 먼저 격파하고 큰 길을 따라 들어가 세 방면의 군사들이 모여 합동으로 연속 총을 쏘고 추격하자 동학군이 달아나 취병산(翠屛山, 이인의 뒷산)으로 올라갔다. 관군이 이인역(利仁驛)에 들어가 점거하자 동학군이 연속 대포를 발사하였는데, 탄환이 없고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날이 이미 저물자 홀연 군령을 내리는 깃발이 보여 드디어 즉시 회군하였다. 일본 병사가 앞에 있고 경리청 군사가 가운데에 있고 순영 군사가 뒤에 있었는데 감사가 병법(兵法)을 모르는 것이 애석하다. 갑자기 헛된 보고를 듣고 돌아오라는 깃발 군령을 보내 전투에 임하던 군병을 다시 불렸다. 일본 병사는 내일 한양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밤을 지새우지 않으려고 하였다. 또 동학군이 이미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평지에서 위를 보고 총을 쏘게 되어 형세가 오래 버티기가 어려웠다.
위의 기록에 의하면, 동학혁명군이 불리한 상황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이는 관군과 일본군의 불리한 것을 감추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관군의 기록에는 불리한 것은 축소하고 전과에 대해서는 과장하는 등 왜곡된 것도 상당하였다. 어쨌든 의암성사가 지휘하는 동학혁명군은 우금치 일대에서 전개된 첫 전투 즉 이인전투에서 승리를 함에 따라 동학혁명군의 기세와 혁명의 의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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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사』의 기록, 좌익은 의암성사
첫 전투에서 승리한 이인전투에 대해 오지영은 『동학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때는 10월 중순경이었다. 논산을 중심으로 집결한 각지의 동학군은 차례로 행진하여 북으로 공주성을 향하여 진격해 갔다. 그 좌익은 이인역(利仁驛 )에 들어가고, 우익은 노성읍(魯城邑)을 거쳐 무넘이고개를 넘어 효포(孝浦) 길로 들어섰다. 동학군의 형세는 참으로 굉장하였다. 양로(兩路)로 나누어 진군하는 군사들로 논산에서 공주까지 만산평야(滿山平野)에 사람 천지가 되고 말았다.
이때 관병과 일병은 힘을 합하여 동학군의 앞을 막아 들어온다. 순무사 신정희와 선봉장 기유태 외 충청감사 박제순과 서산군수 성하영과 참모 구완희와 영관 이진호와 죽산부사 이두황과 대관 이겸재 등이 다수의 군병을 거느렸다. 이때에 동학군 부대는 이인역에서 성하영의 부대를 만나 싸워 격파하고 그길로 바로 공주 감영 뒷산인 봉황산으로 올라가 함성을 질렀다.
『동학사』에는 논산 초포에서 합류한 동학혁명군은 공주로 진격하면서 두 개의 부대로 나뉘었다고 하였는데, 의암성사는 좌익을 전봉준은 우익을 맡았다. 좌익을 맡은 의암성사는 이인역으로 진출하였고, 성하영 부대와 만난 첫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인전투에서 적장으로 만난 이진호와 이두황은 훗날 의암성사가 일본으로 망명하였을 때 서로 만나 교류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들은 의암성사의 영도로 동학에 입도하였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협력하는 인물로 전향하였다. 의암성사가 순도하였을 때 이진호는 “내가 선생을 처음으로 대하던 그날이나 근 20년 동안을 지나온 금일에 이르는 이때까지 역견(歷見)한 그 성격상 파다(頗多)하신 장처(長處) 중에서도 가장 배웠던 것은 제일 원만한 특점입니다. 그 얼굴에 나타나는 농후한 온정과 정대한 광명이며 또한 언행이 일평생을 지나도 남의 단처(短處)라는 것을 한 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다”라고 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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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전투 현장은 이인초등학교, 동학군 진압한 박제순의 비도 있어
동학농민혁명 당시 이인은 주변의 9개 역참을 관할하는 도찰방이 있었다. 도찰방은 오늘날로 말하면 ‘KTX역’ 정도 되는 규모이다. 역이 있던 자리는 현재 면사무소가 들어섰으며, 첫 전투가 벌어진 곳은 현재 이인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취병산은 면사무소 맞은편에 있는 야트막하게 뻗어있는 야산이다. 산이라고 하기에는 좀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 이인역과 취병산을 사이에 두고 동학혁명군과 관군·일본군 연합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그 현장이 이인초등학교였다.
이인은 공주혈전 중 동학혁명군의 첫 전투 현장이었지만, 이곳은 驛院(역원)이었던 관계로 이인초등학교 주변에는 역을 관리하던 찰방들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 여러 개있는데, 현재는 이인면사무소 앞으로 옮겨져 있다. 이외에도 이인에는 여러 개의 비가 더 있는데, 그 중에는 동학혁명군을 진압하였던 박제순을 기리는 비가 있다.
박제순 비의 정식 명칭은 ‘순찰사박공제순거사비(巡察使朴公齊純去思碑)’이다. 박제순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충청관찰사였으며, 일본군과 함께 동학혁명군을 진압하는데 앞장섰다. 이 비는 동학농민혁명 이듬해인 1895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거사비에는 박제순이 농민군을 토벌하고 부서진 이인역을 복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주 우금치전투를 지휘하였던 전봉준은 박제순에게 항일을 위한 민족연합전선을 제의했으나 거절당한 바 있다.
동학혁명군을 진압하는데 앞장섰던 박제순은 1905년 외부대신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하는데 참여하여 ‘을사오적’으로 불리고 있으며, 이후 일제에 나라까지 팔아먹은 경술국적(庚戌國賊), 강점 이후에는 일본으로부터 작위까지 받은 그런 매국수작(賣國受爵)의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기도 하다. 흔히 하는 말로 ‘민족반역자’라고 할 수 있다. 박제순이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한 것을 은혜라 생각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였다고, 그의 공덕을 기리는 거사비를 세웠다는 것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점에서 이제는 이런 비석은 마땅히 청산해야 할 대상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