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에 태어나 2차 세계대전 때인 1939년에 전국적 스타덤에 오르기 전까지 피아프의 인생은 비참했다. 그가 태어난 직후 서커스곡예를 하던 아버지는 군대에 소집되었고 홀로 딸을 양육하기 버거웠던 어머니는 아기를 자신의 어머니에게 맡기고 멀리 떠나버렸다. 외할머니는 술꾼들 틈에서 손녀를 키웠고 제대해 돌아온 아버지는 다시 아이를 노르망디에서 사창가를 운영하고 있던 자신의 어머니에게 맡겼다. 파란만장한 생애의 시작이었다.
에디트 피아프는 열다섯 나이에 파리의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1990년대의 여가수 리앙 폴리의 코멘트는 적절하다. “피아프는 안락과 돈이란 조금도 없이 시작해 길거리에서 노래했다. 흑인 랩 가수들과 다를 게 없다. 진실로 사랑의 이야기와 세상의 곤궁을 노래했다는 점에서 그녀는 혁명적이었다.” 루이 레플레는 트로용 거리의 마크 마옹 대로 귀퉁이에서 노래하는 에디프 피아프를 보고 단번에 가능성을 확신했다.
동료가수 이브 몽탕, 헤비급 복싱 챔피언 마르셀 세르당, 자크 필 그리고 26살 연하의 청년 테오 사라포 등 잇단 남자들과의 실연과 결혼실패로 고통을 당했으며 내내 술과 마약에 의존해 살아갔다. 이지러지고 얼룩진 인생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드라마틱한 삶이었다.
이 가운데 권투선수 마르셀 세르당과의 애달픈 로맨스는 잊혀지지 않을 전설로 남아있다. 1983년 클로드 르로슈 감독은 이것을 영화화했으며 둘 간의 러브스토리를 소재로 한 무수한 책이 발간되었다. 2005년 <마르셀 세르당과 에디트 피아프의 편지>라는 책은 발렌타인 데이를 앞두고 프랑스 젊은이들 사이에서 초콜릿보다 더 많이 팔릴 만큼 주문이 쇄도했다고 한다. 동시대에 활약한 샹송의 대부 샤를르 아즈나부르(Chareles Aznavour)의 회고.
“피아프는 복서 마르셀 세르당을 열렬히 사랑했지요. 세르당은 경기를 위해 뉴욕으로 떠나 있었고 피아프는 베르샤이유에서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세르당은 피아프와 같이 있기 위해 일찍 떠났고 비행기는 아조레스 해협 위에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피아프는 이틀 아니면 사흘 자기 방에 꼭 박혀 있더니 삭발하고 나타나 '사랑의 찬가(Hymne a l'amour)'를 불렀지요. 방에서 가사를 완성하여 죽은 세르당을 위해 노래한 것입니다.”
'사랑의 찬가'는 피아프를, 아니 샹송을 대표하는 불후의 걸작이다. 또 다른 고전 '장밋빛 인생'도 이브 몽탕과의 핑크빛 사연이 빚어낸 곡이다. 에디프 피아프의 곡은 실제 연애사가 만들어낸 곡이 부지기수다.
1963년 48살의 길지 않은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가 역사에 남긴 자취는 거대하다. 우선 나중 여가수의 텃밭이 된 '팝 발라드'의 영역을 크게 넓힌 존재로 평가된다. '여가수는 노래를 이렇게 해야 감동을 부른다'는 패턴을 시범하고 확립한 것이다. 그가 출현한 이후로 사람들은 비로소 샹송을 세계의 주류 대중음악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1963년 파리의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4만 명의 인파가 운집한 이래 그곳에는 43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도 에디 피아프를 추모하는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그들이 되새기는 것은 한 여인의 드라마인생에 담긴 '프랑스의 얼'이다.
<에디프 피아프가 남긴 명곡>
La vie en rose(장밋빛 인생) 1947년
Hymne a l'amour(사랑의 찬가) 1950년
Padam...Padam(빠담 빠담) 1951년
Johnny tu n'es pas un ange(자니, 넌 천사가 아니야) 1953년
La goualante du pauvre Jean(가엾은 장의 노래) 1954년
L'accordeoniste(아코디언 연주자) 1955년
Mon manege a moi(나의 회전목마) 1958년
Milord(주인님) 1959년
Non je ne regrette rien(난 후회하지 않아요) 1960년
A quoi ca sert l'amour(사랑이란 그런 거지) 196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