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 재 지: 경산남도 창원시 동읍 석산리 432 ❏문화재지정: 김명윤유품쌍검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63호(1997.12.31지정) ❏배향인물: 김명윤(金明胤) ❏창건연도: 1713년(숙종 39) ❏향 사 일: 3월 13일 |
원래의 위치는 잘 알 수 없고 아파트 공사 시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이다. 도봉서원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김명윤(金明胤)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713년(숙종 39)에 사당을 짓고 숙사재(肅事齋)라고 하였고, 1775년(영조 51) 도봉사(道峰祠)를 건립, 1844년(헌종 10) 도봉서원으로 승격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되었고, 1887년(고종 24)에 다시 별묘와 재실을 중건하고 1903년에 재실을 재로 지었으며, 1974년에 서원으로 복원되었다. 별묘에는 선조의 하사품인 長刀 등 동산공 김명윤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1)주벽-김명윤(金明胤, 1493~157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회백(晦伯). 철산(鐵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겸광(謙光)이고, 아버지는 좌참찬 극핍(克愊)이며, 어머니는 이철동(李哲仝)의 딸이다. 1513년(중종 8) 진사시에 합격, 1519년 현량과(賢良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의 부정자(副正字)·저작(著作) 등을 지냈다.
기묘사화 후 현량과가 무효로 된 뒤에 음직(蔭職)으로 남아 있다가, 다시 152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때 모든 현량과 출신들이 쫓겨났으나 홀로 조정에 남아 있어서 사림의 비난을 받았다. 그 뒤 1525년 형조좌랑에 이어 예조참의·도승지·경기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명종연간에 윤원형(尹元衡)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킨 주역으로 윤임(尹任)이 봉성군 원(鳳城君魄)을 추대하여 대위(大位)를 엿본다고 무고하여, 이른바 을사추성정난공신(乙巳推誠定難功臣)이 되어 광평군(光平君)으로 봉해졌고, 개성유수·형조참판·평안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호조참의·우참찬을 역임하였다.
그 뒤 다시 병조판서·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의정부좌찬성·지경연사·판돈녕부사 등을 지냈다. ≪중종실록≫에는 “오직 시의(時議)에 따라 붙는 것으로 발신(發身)의 발판으로 삼았다.”고 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사림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조가 즉위하자마자 대간의 탄핵을 받아 1567년(선조 즉위년)에 삭탈관직의 주장이 있었고, 죽은 뒤에 충훈부(忠勳府)에서 대신의 예에 따라 장례를 치르도록 함으로써 또다시 그 부당함을 주장하는 논란이 일어났다.
강당은 5칸으로, 전면에는 도봉서원, 안쪽에는 도봉서당이라고 현액하였다. 묘우는 3칸으로 강당의 서쪽에 위치하고 충현사라고 현액하였다. 서묘동학의 구조를 이룬다. 동재인 숙사재 (肅事齋)는 3칸이다. 그리고 별묘 3칸이 있는데 여기에 선조의 하사품인 장도 등 김명윤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그 외 신문과 외문을 갖추었다.
1)김명윤유품쌍검(金明胤遺品雙劍)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3호(1997.12.31지정)
임진왜란 때 일등공신이 된 김명윤 선생의 검 2점이다. 김명윤(金明胤)은 임진왜란 때 파주목사로 큰 전공을 세웠다. 선조가 직접 내려준 것으로 전해지는 이 검은 한쪽 날만 가진 칼(刀) 형태를 하고 있으나 양날을 가지고 있으며, 검의 등 쪽에 가지가 붙어 있다. 손잡이는 나무로 만들었으나 훼손되었고, 나무 손잡이가 없는 검은 길이 73㎝, 폭 5.2㎝이며, 다른 검은 62㎝이다. 검은 현재 경남 의창군에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도봉서원에 보관중이다.
참고-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 경남의 서원, 선인, 2008
창원시사, 199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