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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 사로잡힌 조선 여인, 강완숙
지난 달 경가회 모임에서 순교자 강완숙 골롬바에 관한 심포지움 팜플렛을 받고 그날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7월 1일 오후 1시 20분, 명동성당 마당 곳곳에는 교우들과 수녀님들 의 모습이 보이고, 코스트홀에 들어서니 10분 전 인데도 빈 자리가 거의 없어보였습니다. 사회를 맡은 노길명 교수는 이처럼 강당을 가득 메운 심포지움은 몇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며 매우 만족스러워 하셨고, 대구에서 오신 분들도 있다고 하시니 서울 살면서 가까운 서소문 성지에도 다녀오지 못한 것이 마냥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가톨릭 여성연합회 오덕주 회장님은 개회사에서, 한국 교회 200주년과 한국의 순교자 성인 시성을 위한 행사가 있었던 1984년 10월 이후, 비록 이때에 성인품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같은 여성으로써 강완숙 골롬바의 믿음, 선교활동 그리고 순교에 이르는 그 장렬한 모습이 가슴깊이 파고들어와, 시대와 사회, 그리고 남녀 양성을 뛰어넘어 교회 역사 안에 우뚝 솟은 이 분을, 한국 뿐 아니라 세계 신앙인의 모델로 기리고 싶은 염원이 자리 잡게 되어 오늘의 심포지움을 개최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진석 대주교님께서는 “강완숙은 6년간 주문모 신부님을 모셨는데 6년이 얼마나 긴 세월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6.25때 대학에 다니던 내가 친척들 집을 전전하며 숨어 지내던 3개월을 견디기가 그렇게도 힘들고 고통스러웠는데... ” 9.28 당시 피아노 뒤 좁은 공간에 함께 숨어 있던 동생 미카엘이 폭격으로 사망했는데, 그날이 미카엘 축일이었다고 회상하시며, 말씀을 잇지 못하셨습니다. 동생을 그리는 老 대주교님의 아픈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시작기도를 마치고 <한국 역사 사료가 전하는 강완숙- 조광 교수>의 첫 번째 주제 발표와 <조선 여성 강완숙이 받아들인 천주교- 장정란 교수>의 두 번째 발표가 있은 다음, 10분간의 휴식시간이 있었습니다. 간식으로 마련된 절편과 차(茶), 음료수가 점심을 거른 이들에게는 요기가 되기도 하였으니, 세심한데 까지 신경을 써주시느라 가톨릭여성연합회 간부님들 너무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강완숙의 믿음살이와 그 동료들- 김정숙 교수> 그리고 <하느님께 사로잡힌 조선 여인, 강완숙- 송종례 수녀>의 네 번째 발표가 끝나고, 김진소 신부, 서종태 교수, 원재연 교수, 그리고 김기화 신부님이 토론자로 함께 단상에 올랐습니다. 강완숙을 알고 그녀의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는 이러한 심포지움이 지식인의 말잔치이거나 한번의 행사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공동연구와 문화산업을 통해 순교자들의 신심과 활동, 그리고 그들의 면모를 모든 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이 토론의 핵심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침기도로 <강완숙 골롬바 시복 시성을 위한 기도문>을 합송하고 오후 6시에 심포지움을 마쳤습니다. 우리 경가회 오덕주 회장님이 너무도 자랑스럽게 느껴졌던 하루였습니다. 사소한 핑계로 유적지 순례에 함께하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됩니다. 휴식 시간에 만난 한경자 총무님의 권유로 경가회에 올릴 글을 쓰려니까 무엇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망설여졌습니다. 그래서 그날 배포된 ≪조선여인 강완숙 역사를 위해 일어서다≫ 라는 책자에 실린 귀한 자료들을 일일이 요약하기 곤란하여, 달레(1829~1878)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강완숙 관계 자료를 발췌한 조광 교수의 발표내용의 일부를 선별하여 간단히 옮겨보았습니다.
1. 강완숙의 생애 신부를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 놓은 이 新人교우는 강완숙 골롬바라는 여자였다. 골롬바는 그 시대 천주교 역사에 큰 역할을 하였으므로 필자는 그의 생애를 좀 자세하게 이야기 하고자 한다. 골롬바는 덕산 고을에 사는 홍지영이라는 상처한 庶族에게 시집갔다. 골롬바가 결혼 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남편의 친척 바오로라는 사람에게서 천주교 이야기를 들었다. 이 말은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골롬바는 “천주라면 하늘과 땅에 주인일 것이다. 이 종교의 이름은 옳다. 그렇다면 그 교리는 진리일 것이다.” 하고 생각하였다. 그가 책을 청하여 그것을 읽는 중에 그의 마음은 복음의 위대함과 아름다움과 진리를 깨달았다. 골롬바는 그의 영혼의 모든 능력을 기울여 천주교에 열중하였고 신자생활의 첫 걸음부터 영웅적인 덕행을 갈망하였다. 그는 자기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을 입교시키는데 골몰하였고, 그의 열성은 이웃 동네에까지 미쳤다. 1791년 박해가 일어나자 골롬바는 음식을 만들어 옥에 갖다 줌으로써 신앙 증거자들을 도왔다. 그는 붙잡혀 洪州 牧使 앞에 끌려갔다. 석방되고 얼마 안 되어 그는 남편에게 전답을 보살피라고 맡기고 그와 헤어져 시어머니를 모시고, 자기 딸과 남편의 전실 아들 홍필주 필립보를 데리고 서울로 와서 살았다. 주문모 신부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그렇게도 헌신적인 보조자를 만난 것이 매우 기뻐서 주 신부는 그에게 聖洗를 주고 여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모두 맡는 회장의 직책을 맡겼다. 그는 자기 집 장작광에 신부를 숨기고 아무도 자기 시어머니와 아들 필립보 까지도 모르게 석 달 동안 그리로 음식을 갖다 드렸다. 그런데도 그는 신부에게 좀더 편한 피신처를 마련하여 드릴 수 없는 것을 매우 괴로워하였다. 자기의 용감한 심경과는 딴판인 시어머니를 설득하기 위해 고민하고 애쓰던 그녀는 마침내 “너하고 떨어지기는 싫다. 너하고 싶은 대로 하여라” 라는 시어머니의 대답을 듣고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신부가 숨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안사랑에 모셔드렸다.
주 신부는 거기서 외부 사람들에게 양반집에 들어오는 것을 금하는 조선 관습의 보호로 3년 동안 계속하여 머물렀다. 하느님께서는 그가 하는 일을 축복하시어 언제나 성공하게 해 주셨다. 골롬바는 견실한 지식에 크나큰 말재주를 겸하였으므로 여자들을 많이 입교시켰는데, 그 중에는 높은 양반집 부인들도 상당히 있었다. 처녀들도 많이 모아서 단단히 교육을 시켰다. 그 처녀들이 결혼한 다음에는 각기 열성 있는 사도가 되어 그들이 새로 들어간 집안에서 천주교 신앙을 전하여 부모 친척과 친지들을 입교시키는 일이 자주 있었다. 골롬바는 힘차고 슬기롭게 모든 일을 권고하고, 이를테면 모든 일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비록 남자들 중에 열심한 교우가 많았으나 모두가 기꺼이 그의 敎化를 받고, 망치로 종을 치면 소리가 따르는 것과 같이 정확하게 그의 의견에 따랐다. 그는 불이 짚에 붙듯 열심한 그의 애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복잡한 일과 크나큰 어려움을 당할 때에 그는 마치 뒤엉킨 뿌리 뭉치를 확실하게 끊고 가르는 손과 같이 능란하게 처리하였다. 주신부가 오기 전에는 조선의 천주교인이 약 4천명이었는데 몇 해 후에는 그 숫자가 1만 명에 이르렀다. 2. 강완숙의 순교 1801년 7월 3일 새 순교자 9명이 서소문 밖으로 끌려가 참수 되었다. 그중 5명은 양반집 부인들인데....이 영광스러운 첫머리에 신부를 헌신적으로 보좌해드린 강 골롬바가 있었다. 그가 잡힌 후 관리들은 그에게 신부가 숨어 있는 곳에 대한 비밀을 알아내려고 여섯 차례나 무서운 주리를 틀었다. 그 혹형 가운데서 골롬바는 입을 열지 않고 마치 감각이 없는 사람 같아 형리들이 자기들끼리 “저건 여자가 아니고 귀신이다.”하고 말할 지경이었다. 조금이라도 나약한 표를 보이기는 고사하고, 옥중 관리들 앞에서까지도 그의 사도직을 계속하여, 천주교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끊임없이 주장하며, 老子와 그 밖에 가장 유명한 철학자들의 글에서 증거를 끌어내어, 자기 말을 뒷받침하였다. 관리들도 감탄하여 골롬바를 “유식한 여인네, 비길 데 없는 여인네” 라는 말로만 그를 표현하고 기가 막힌다고 말하였는데, 이 말은 비상한 놀라움으로 생기는 망연자실을 뜻하는 조선식 표현이다. 그들은 그 때문에 더욱 그에게 배교를 시키려고 더 열중하여, 가장 심한 잔인으로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형벌을 그에게 썼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그 희생의 초자연적인 인내에 지고 말았다. 골롬바는 옥에서 주신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그는 자기 옷자락을 찢어서 거기에 선교사의 사도적 업적을 썼다. 한 성인을 그렇게도 잘 알던 성녀에 의하여 옥에서 쓰여진 그 성인의 행적은 그 비단 조각을 맡았던 여교우의 소흘로 불행히도 없어지고 말았다. 골롬바와 함께 갇혀 있던 동료들의 열심은 그 몸쓸 옥을 기도의 처소로 바꾸어 놓았다. 신심 행사에 충실하면서 그들은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그들의 천상배필에 합당하게 되려는 생각뿐이었다. 천상배필은 그 갚음으로 그들을 명백히 보호해 주셨다. 제헌의 시간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들은 더욱 기뻐하였고, 특히 그들이 죽기 전날은 기쁨에 취한 것 같았다. 드디어 그렇게도 오랫동안 기다리고 그렇게도 열렬히 바란 날, 승리와 보답의 날이 밝았다. 5월 23일 (7월 3일), 골롬바와 동료 4명이 수례를 타고 형장으로 끌러 갔다. 길을 가는 동안 그들은 기도하고 서로 격려하며 하느님의 찬미를 노래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군중은 그들의 얼굴에 거룩한 기쁨이 빛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형장에 이르러 골롬바는 사형을 주재하던 관리에게 몸을 돌려 말하였다. “법에는 사형을 받아야 하는 자들의 옷을 벗기라고 명해졌으나, 여자들은 그렇게 다루는 것이 온당치 않을 것이니, 우리는 옷을 입은 채로 죽기를 청한다고 상관에게 알리시오.” 그 허락이 내려져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배필은 크게 만족하였다. 그 때 골롬바는 십자성호를 긋고 맨 먼저 머리를 형리에게 내밀었다.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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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 요약 : 백종혜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