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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게시판 스크랩 드라마 `선덕여왕`, 허구와 진실
조홍근 추천 0 조회 5 09.06.20 09:0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드라마 '선덕여왕', 허구와 진실

"자막이나 내레이션으로 '사실' 설명해야"

 

 

 MBC 대하사극 '선덕여왕'이 시청률 25%를 넘는 인기를 얻으면서 드라마의 내용과 역사적 사실이 어떤 점에서 어떻게 다른지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제한적인 사료를 토대로 한 드라마이기 때문에 작가의 상상력은 불가피한 요소이긴 하지만 시청자에게 잘못된 지식을 전달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김창겸 신라사학회장은 "픽션이 역사에 대한 시청자의 관심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잘못된 역사 지식을 주입할 수 있다는 위험성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며 "방영 때 정사(正史)에서는 어떻게 기록돼 있는지 자막이나 내레이션 등으로 보충 설명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선덕여왕 '덕만'은 장녀? 차녀?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덕만이 쌍둥이 동생으로 나오며 이후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의 어머니 천명은 덕만의 언니로 설정돼 있다.
그러나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덕만이 장녀라고 기술돼 있다.
"선덕왕이 즉위했다. 휘는 덕만이다. 진평왕의 장녀로서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이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똑똑했다.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국인(國人)이 덕만을 세웠다.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칭호를 올렸다" (삼국사기 권5)
반면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덕만이 차녀로 등장하지만 1989년 발견된 이 필사본은 아직 진위 논쟁이 진행 중이어서 100% 신뢰할 수 없다.

 

◇ 선덕여왕이 중국에서 모험했다고?

 드라마에선 덕만이 '미실'의 암살 계획을 피해 진평왕의 시녀 '소화'의 품에 안겨 중국으로 피신한다.
덕만은 그 곳에서 거간꾼 노릇을 하며 중국어와 로마어도 배우고 다양한 경험을 쌓는다.
그러나 이는 드라마의 극적 재미를 위해 작가의 상상력이 동원된 부분이다.
김창겸 신라사학회장은 "선덕여왕의 출생연도와 성장과정을 기록한 사료는 없지만 중국에 간 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의 '모험'은 작가가 창작한 것이며 덕만은 오히려 궁 안에서 교육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 '선덕여왕 vs. 미실'은 허구

 드라마에서 '운명의 맞수'로 그려지고 있는 선덕여왕과 미실.
권력욕의 화신 미실은 선덕여왕과 대립각을 세우며 '정치 전쟁'을 펼치고 즉위와 통치를 방해한다.
그러나 진흥왕부터 진지왕, 진평왕까지 3대 왕을 섬겼던 미실은 선덕여왕이 즉위할 즈음엔 이미 사망했을 것으로 보인다.
진위 여부에 따른 문제점은 있으나 '화랑세기'에 따르면 미실의 동생 미생이 550년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즉 미실은 549년 이전에 출생했다고 볼 수 있으며 선덕여왕이 즉위하는 632년에는 미실은 적어도 83세다.
비교적 짧았던 당시 평균수명을 감안하면 미실은 632년에는 이미 숨졌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반면 선덕여왕은 즉위 연도인 632년에는 50세가 넘었을 것으로 학계에선 보고 있다.
따라서 선덕여왕이 재위한 15년 동안 미실이 선덕여왕과 권력을 다툰다는 드라마의 내용은 허구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 허구의 인물은 누구?

드라마 속 허구의 인물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미실을 들 수 있다.
미실은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일연의 '삼국유사'에 나오지 않는다. 다만 박창화의 '화랑세기' 필사본에 언급됐을 뿐이다.
그러나 철저한 사대주의 유학자였던 김부식은 3명의 왕을 섬긴 미실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란 점에서 미실이 실존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또 미실의 암살 계획을 피해 덕만을 안고 중국으로 도망친 진평왕의 시녀 '소화'도 허구의 인물이다.
소화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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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따르면 

진평왕은 마야부인에게서 후일 선덕여왕이 되는 덕만공주와 김춘추의 어머니인 천명부인을 낳습니다.

덕만공주는 장녀로서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고, 이가 선덕여왕입니다. 

하지만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천명부인이 진평왕의 맏딸로 나옵니다. 

진평왕은 진흥왕의 장자였던 동륜태자의 아들로, 동륜태자가 개에게 물려 죽자 숙부인 금륜이 진흥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이가 진지왕입니다. 

하지만 진지왕이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당시의 집권측과 갈등이 생겨, 결국 왕이 된지 3년만에 화백회의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이에 동륜의 아들인 진평왕이 왕위에 오릅니다.

당시 진지왕에게는 두명의 아들이 있었으니, 용수전군과 용춘전군이 그들입니다. 

용수와 용춘의 존재에 대해서도 두사람이다, 혹은 한사람인데 이름이 잘못 표기된것 뿐이다라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진지왕의 장남 용수전군이 진평왕의 맏딸인 천명부인과 결혼하여낳은 아이가 바로 김춘추입니다. 

진평왕은 마야왕후가 죽은 뒤 새 왕비를 들여 아들을 낳았으나, 이 아들이 일찍 죽자,후계에 문제가생겼는데, 전통대로 왕의 사위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 권력을 쥐고 있던 화백회의측이 폐위시킨 진지왕의 아들( 당시엔 용수전군은 죽고 천명은 용춘전군과 재혼한 상태였음)이 왕이 되므로, 화백회의측은 당연히 이를 거부했고, 진지왕의 폐위로 왕위에 오른 진평왕또한 이를 용인하기는 곤란했을 겁니다. 

때문에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진평왕이 장녀인 천명을 불러 다음 왕위를 동생인 "덕만에게 양보해 줄것"을 정식으로 요청하였고, 천명이 이를 "용인"하여 궁을 떠났기때문에 덕만이 왕위에 오른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어느 기록을 믿느냐에 따라 선덕여왕을 진평왕의 장녀로 볼 수도 있고, 차녀로 볼수도 있게 됩니다.

사실, 신라의 왕위계승에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왕위계승은 기존의 관례를 깨트린 다소 이해하기 힘든 현상인 것은 맞습니다. 전통적으로 신라왕실은 복잡한 근친혼에 의해 계승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들이 없으면 사위가, 사위가 없으면 외손자가 왕위를 이어나가는 것이 당연시 되었는데, 선덕여왕의 즉위에 있어서는 이러한 원칙이 완전히 무시되었을 뿐만 아니라,선덕여왕이 죽은 뒤에는 김용춘이나 김춘추가 아닌 갈문왕의 딸인 진덕여왕이 왕위에 오르는 다소 어처구니 없는 사태까지 발생하였습니다. 

이러한 진덕여왕의 즉위가 여전히 진지왕계를 경계하던 화백회의세력에 의한 정치적 공작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무열왕 김춘추를 '최초의 진골왕'이란 기록으로 혈통적 정통성을 다소 폄훼하는 듯한 기록을 남겨놓았지만, 신라의 전통적 왕위계승의 관례나, 신라하대에 이르기까지의 왕위계승의 일반적인 원칙을 보았을때, 오히려 그 즉위의 명분이 이해되기 힘든 사람은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쪽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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