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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스크랩 고인돌과 고조선
樂而忘憂 추천 0 조회 303 10.01.07 17: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고인돌과 고조선

 

 

고려 문신 이규보(李奎報)는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 : 호남 전주 지역의 여행기)’에서 “전북 익산의 금마면에서 지석(支石)을 구경했다.

 

이규보 (李奎報 고려 문인) 1168(의종 22)~1241(고종 28).

본관은 황려(黃驪). 자는 춘경(春卿), 초명은 인저(仁低),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지헌(止軒)·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9세 때 이미 신동으로 알려졌으며 14세 때 성명재(誠明齋)의 하과(夏課)에서 시를 지어 기재(奇才)라 불렸다. 소년시절 술을 좋아하며 자유분방하게 지냈는데, 과거지문(科擧之文)을 하찮게 여기고 강좌칠현(姜左七賢)의 시회에 드나들었다. 이로 인해 16, 18, 20세 3번에 걸쳐 사마시(司馬試)에서 낙방했다. 23세 때 진사에 급제했으나 이런 생활을 계속함으로써 출세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개성 천마산에 들어가 백운거사를 자처하고 시를 지으며 장자(莊子)사상에 심취했다. 26세 때 개성에 돌아와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 당시 문란한 정치와 혼란한 사회를 보고 크게 각성하여 〈동명왕편 東明王篇〉·〈개원천보영사시 開元天寶詠史詩〉 등을 지었다. 그뒤 최충헌 정권에 시문으로 접근하여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고 32세부터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1207년 권보직한림(權補直翰林)으로 발탁되었고 천우위녹사참군사(千牛衛錄事參軍事)·우정언지제고(右正言知制誥)를 거쳐 1219년 우사간(右司諫)이 되었다. 이때 부하의 무고로 좌사간으로 좌천되었다가 지방관의 죄를 묵인했다 하여 면직되었으나 최이(崔怡)의 도움으로 계양도호부부사병마검할(桂陽都護府副使兵馬黔轄)에 부임했다. 1220년 예부낭중기거주지제고(禮部郎中起居注知制誥)에 올랐고 국자좨주한림시강학사(國子祭酒翰林侍講學士)를 거쳐 1230년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를 지냈다. 이때 팔관회 행사에 잘못을 저지른 사건으로 한때 위도(渭島)에 유배되었다. 1232년 판비서성사 보문각학사경성부우첨사지제고(判秘書省事寶文閣學士慶成府右詹事知制誥)로 복직되었고, 1237년 수태보문하시랑평장사(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 등을 지냈다.


당시 계관시인과도 같은 존재로 문학적 영예와 관료로서의 명예를 함께 누렸다. 권력에 아부한 지조 없는 문인이라는 비판이 있으나 대 몽골 항쟁에 강한 영도력이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정권에 협조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는 우리 민족에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외적의 침입에 대해 단호한 항거정신을 가졌다. 국란의 와중에 고통을 겪는 농민들의 삶에도 주목, 여러 편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의 문학은 자유분방하고 웅장한 것이 특징인데, 당시 이인로 계열의 문인들이 형식미에 치중한 것에 반해 기골(氣骨)·의격(意格)을 강조하고 신기(新奇)와 창의(創意)를 높이 샀다. 자기 삶의 경험에 입각해서 현실을 인식하고 시대적·민족적인 문제의식과 만나야 바람직한 문학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백운소설 白雲小說〉·〈국선생전 麴先生傳〉 등의 저서와 다수의 시문을 남겼다.

 

  ▲ 이규보의 글씨

 

지석은 세속에서 전하기를 옛날 성인(聖人)이 괴어 놓은 것이라 하는데, 과연 기적(奇迹)으로서 이상한 것이었다”라고 전한다.

 

지석은 곧 고인돌이다.

 

우리나라는 고창·화순·강화의 고인돌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데서 알 수 있듯 전 세계의 절반에 가까운 3만여기가 군집한 고인돌 왕국이다.


그간 고인돌에 대해 가장 일반적인 설명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이라는 것이었다.

 

청동기시대 (靑銅器時代 고고학)

인류물질문화 발전단계 중 청동으로 연모를 만들어 쓰기 시작한 때로부터 철기를 만들어 쓰기 직전까지의 시기.

이 시대가 시작된 연대는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데, 예를 들면 그리스에서는 BC 3000년 이전에 시작되었으나 중국에서는 BC 18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기의 초기는 금석병용기(金石倂用期)라고 하며, 순동(純銅)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구리는 매우 귀하여 작거나 아주 귀중한 것만 만드는 데 사용했다. 동부 아나톨리아에서는 BC 6500년경 구리가 알려지게 되면서 곧 널리 확산되었다. BC 4000년대 중기가 되면 주조된 연모·무기와 함께 급속히 발달한 구리 야금술이 메소포타미아의 도시화를 가져온 요인이 되었다. BC 3000년 무렵 구리는 중동지방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서쪽으로는 지중해지역까지 퍼져나갔고 유럽에도 전파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순동문화의 단계에서 비록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청동이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청동기시대의 일부라고 보고 있다. BC 2000년대에 청동의 사용이 매우 증가했는데, 그 이유는 영국 콘월의 주석광이 크게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대규모로 생산된 청동기의 상당부분은 이 주석광에서 채굴된 것을 이용했다. 그러나 BC 1000년경부터 새로운 금속인 철이 보다 쉽게 구해져 사용되면서 청동기시대는 끝나게 되고 철기시대가 시작되었다.



한국에는 청동기시대가 없었고 석기시대로부터 금석병용기를 거쳐 초기 철기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주장이 일제시대에 있었다. 그러나 8·15해방 이후 왕성한 발굴조사와 연구성과로 청동기문화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민무늬토기와 간석기를 중심으로 이룩된 문화를 민무늬토기문화[無紋土器文化]라고 하는데, 이것은 앞시기인 신석기시대를 가리키는 빗살무늬토기문화와 구분되며 넓은 뜻으로는 청동기시대를 포함하고 있다. 청동기 분포지역은 대체로 동검을 기준으로 문화권을 나누고 있다. 이 구분에 의하면 비파형동검이 많이 나오는 랴오닝[遼寧] 지역까지를 포함하여 예맥문화권(濊貊文化圈)으로 설정하고, 이 지역을 고조선 영역으로 보고 한국 청동기문화에 넣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범위는 넓은 뜻으로 해석하여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청동기라도 그것이 사용되기 시작한 때를 청동기시대로 보고, 하한연대에 대해서는 청동기가 나오는 많은 유적들이 대부분 후기에 속하면서 철기와 함께 출토되므로 청동기 후기는 초기 철기시대와 겹친다.



청동기문화의 시작에 대해 BC 2000~600년에 걸쳐 여러 견해가 있는데, 이것은 문화권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할 것이냐 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데 최근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활발한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이에 대한 관심이 주목되고 있다. 랴오닝 지방에 있는 우가촌(于家村) 유적의 위층에서 발견된 청동단추·청동날개촉·청동낚싯바늘 등은 의주 신암리유적의 위층에서 나온 청동유물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청동기문화의 기원에 관해 시사하는 바 크다. 이러한 청동기문화의 기원문제는 중국 문화(商文化)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견해도 있지만, 청동기 성분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아연이 섞여 있는 점으로 보아 중국과는 다르고 시베리아 청동기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청동칼의 자루머리에 동물 모양의 무늬가 장식된 점, 꼭지달린 단추 모양 장식, 안으로 굽은 청동손칼 등 청동기의 모양과 무늬에서도 시베리아 카라수크 문화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청동기시대에 생업은 대체로 농경생활을 주로 하면서 물고기잡이와 짐승사냥·열매따기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탄화된 쌀을 비롯하여 기장·수수·조·보리 등의 곡식과 곡물의 이삭을 따는 데 쓴 반달돌칼·돌낫 및 수확된 곡물을 가공하는 데 이용한 갈판 등의 유물이 나오는 것을 보아 농경이 활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대전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진 농경무늬청동기[農耕紋靑銅器]에는 따비로 밭을 일구는 사람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청동기시대의 집터가 거의 대부분 낮은 구릉지대에서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 시대에는 논농사보다 밭농사 위주로 농경이 꾸려진 것 같다. 수확에 쓰인 반달돌칼이나 돌낫은 우리나라 전지역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현재까지 찾아진 이 시기의 곡식을 보면,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된 잡곡농사가 전보다 활발해졌고 벼농사도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장·수수·콩·팥·조·보리 등의 잡곡은 평양 남경과 회령 오동, 무산 범의구석, 송림 석탄리와 여주 흔암리유적에서 나왔는데, 남경과 흔암리유적에서는 여러 가지의 잡곡이 함께 출토되어 주목된다. 또한 남경유적을 비롯하여 여주 흔암리, 부여 송국리에서 탄화된 쌀이 나왔고 부여 소산리·번곡리, 광주 궁뜰, 산청 강루리 등 여러 곳에서는 토기의 바닥에 나 있는 볍씨자국이 확인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집터는 대부분 강언저리나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낮은 구릉지대에서 발견되고 있으나 드물게 보령 교성리유적처럼 바닷가 산 정상부에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집들이 한 곳에 10~100여 채까지 발견되고 있는데, 송림 석탄리유적에서는 약 10만㎡의 범위에서 100여 채가 넘는 집터가 발굴되었다. 무산 호곡동에서는 1,200㎡ 범위에 몇 겹으로 서로 겹쳐 있는 상태로 50여 채의 집터가 나타나 큰 마을을 이루면서 지속적으로 같은 곳에서 살았음을 알게 해준다(→ 호곡동유적). 집터 평면은 송국리, 흔암리, 서산 해미유적에서처럼 둥근꼴도 있으나 거의 네모꼴이나 긴네모꼴이며, 움집을 이루고 있다. 크기는 한쪽 길이가 4~7m인 것이 많지만, 파주 옥석리유적에서는 3.7×15.7m나 되어 보기 드물게 긴 것도 있다. 이렇게 큰 집은 대가족이 공동으로 살던 집이거나 연모를 제작하던 곳으로 추정된다. 집터는 기둥을 세우기 위해 팠던 기둥구멍과 화덕자리, 배수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바닥은 단단하게 다져져 있다. 화덕은 대부분의 집터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돌을 돌려 만들거나 흙으로 쌓은 것도 있다. 바닥은 맨 땅을 다진 것도 있지만 찰흙을 깐 다음 불에 구워 단단하게 만든 것이 많으며, 남경유적에서는 갈대를 엮어 깔았던 흔적도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유물은 크게 석기·토기·청동기로 나누어진다. 석기는 간석기가 대부분이며 종류가 여러 가지이고 만든 수법도 매우 뛰어났다. 쓰임새에 따라서 공구용·농경용·사냥용으로 나누어진다. 공구용으로는 돌도끼와 홈자귀가 있다. 돌도끼는 날이 양쪽에서 갈라진 조개날에 몸통의 단면이 네모난 것, 볼록 렌즈 모양, 긴네모꼴 등이 있는데, 조개날도끼는 주로 나무를 자르는 데 이용되었다. 홈자귀는 나무를 다듬거나 구멍을 뚫는 데 사용한 연모이다. 농경용 연모에는 반달돌칼·돌괭이·갈돌 등이 있다. 반달돌칼은 곡식의 이삭을 자르는 데 쓴 연모로 끈을 꿰어 손에 잡아맬 수 있도록 2개의 구멍이 나 있으며, 지역에 따라 세모꼴·긴네모꼴 등으로 생김새에 차이가 있다. 사냥용 무기인 화살촉은 슴베가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무기에 속하는 간돌검은 처음에는 실용적으로 쓰이다가 뒤에 손잡이에 단(段)이 생기는 등 의기(儀器)의 기능을 지니게 되었던 것 같다.



토기는 흔히 민무늬토기라고 일컬어지지만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민무늬토기는 빗살무늬토기와 다르게 무늬가 없으면서 대부분 적갈색을 띠고 있으며 낮은 온도에서 구워졌기 때문에 흡수성이 강하다. 비짐에는 굵은 모래알이 많이 섞여 있고 바닥은 거의 납작밑이다. 생김새에 따라 팽이형토기·구멍무늬토기·화분토기·가지무늬토기·붉은간토기·검은간토기로 분류된다. 팽이형토기는 적갈색이나 흑회색을 띠며, 서북지역의 고인돌·집터에서 많이 나온다. 구멍무늬토기는 입술 가까이에 구멍이나 굼이 있는 토기이며, 가지무늬토기·붉은간토기·검은간토기는 무늬나 색을 넣은 다음 토기의 겉면을 곱게 간 것으로 특수한 목적에 쓰인 토기이다. 청동기는 처음에는 청동단추나 청동손칼처럼 크기가 작은 것들을 만들어 쓰다가 비파형동검, 부채꼴 청동도끼 등이 만들어지고 그 다음에 한국식동검·청동투겁창·청동꺽창·거친무늬거울 등을 만들었다. 비파형동검은 주로 랴오닝 지역과 한반도의 남부지역에서 나오는데 다른 청동기보다 구리가 많이 섞여 있으며, 몸통에 있는 돌기의 위치와 아랫부분 곡선의 팽창 정도에 따라 여러 형식으로 분류된다. 청동도끼는 날부분이 부채꼴이고 머리 쪽에 수평으로 자루를 끼우는 자루투겁이 있는데 여기에 무늬를 새겼다. 한국식동검은 비파형동검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동검인데 몸통의 허리가 팬 점, 등대의 가로마디가 뚜렷한 것이 특징이다.



이 시기의 무덤으로는 고인돌무덤을 비롯하여 돌널무덤·돌무지무덤·돌깐무덤이 있으며, 늦은 시기가 되면 독무덤·널무덤도 나타난다. 고인돌은 주변 지역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많이 있으며, 덮개돌과 굄돌에 따라 탁자식·바둑판식·구덩식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무덤의 껴묻거리는 거의 민무늬토기와 간돌검·화살촉 등으로 무덤의 규모가 큰 것에 비하면 그렇게 많이 나오지 않는 편에서 가끔 붉은간토기나 청동기가 나오기도 한다. 돌널무덤은 넓적한 판돌을 가지고 벽·바닥·뚜껑을 짜맞춘 것으로 대부분 서해안지역의 낮은 구릉지대에서 찾아지며 동검을 비롯한 많은 청동기가 껴묻기되어 있다. 돌깐무덤은 무덤방의 언저리에 돌을 깔아서 묘역을 이룬 것으로 많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 청동기시대의 유적분포

 

동검, 청동기문화를 대표하는 유물, 길이(왼쪽) 32.6cm

검은간토기, 청동기·초기철기시대에 사용된 민무늬토기, 대전

괴정동 출토, 높이 22.5cm

 

 

고창 고인돌에 대해서는 기원전 400∼500년쯤 이 지역을 지배했던 족장들의 가족 무덤으로 설명한다.

 

각지에 산재했던 부족사회의 유물이지 고조선 유물이라는 설명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고인돌은 만주의 요하(遼河) 동쪽에서 한반도와 일본 규슈 지역까지 분포한다.

 

랴오허 (遼河 중국 강. 요하)

중국 랴오닝 성[遼寧省]과 네이멍구 자치구[內蒙古自治區] 둥베이 지구[東北地區:만주]의 남부를 흐르는 강.

랴오허 강 수계는 중국 둥베이 중부 지구의 랴오허 평야와 쑹화[松花] 평야 남부지역의 배수로이다. 강 유역은 완만한 융기작용을 받은 띠 모양의 고지대를 사이에 두고 쑹화 분지와 분리되어 있는 반면, 평야지역은 중생대부터 전체적으로 서서히 침강운동을 계속했다. 강 유역은 최근 지질시대에 격렬한 융기작용을 일으켰으며, 분수령의 남쪽 부분에서는 이 융기작용과 더불어 화산활동이 일어났다. 평야는 대체로 두꺼운 침전물로 이루어져 있어서 매우 평평하며, 일부 지역은 늪지대를 이루고 있다.



랴오허 강은 상류에서 크게 2줄기의 수계로 나뉜다. 동(東)랴오허는 중국 둥베이 지구의 동쪽 산맥 기슭을 따라 흐르는 반면, 서(西)랴오허는 라오하[老哈], 잉진[英金], 신카이 강[新開河] 등의 상류 지류들과 함께 네이멍구 자치구 남동부의 메마른 청더[承德] 고원을 흐른다. 수량은 계절에 따라 큰 변화를 보이는데, 여름에 최대로 늘어난다. 평야의 경사도는 아주 낮아서 랴오허 강 하류는 옛날부터 광범위한 제방을 쌓았는데도 불구하고 해마다 여름만 되면 홍수를 겪는다. 이 강은 또한 많은 양의 토사를 운반한다. 이 지역은 1년중 약 3개월 동안은 얼음에 갇히기 때문에 해빙기에도 홍수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랴오허 강의 길이는 1,345㎞, 유역 면적은 21만 5,000㎢에 이른다.



랴오허 강은 수로로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잉커우[營口] 항구 근처에 있는 강어귀는 항상 토사로 막혀 있지만, 작은 기선을 타면 동랴오허와 서랴오허가 갈라지는 싼장커우[三江口]까지 항해할 수 있다. 주요지류는  훈허 강[渾河]으로, 이 강은 랴오둥[遼東] 반도와 창바이 산맥[長白山脈] 기슭에서 흘러내려 랴오닝 성의 선양[瀋陽]을 지나 랴오허 강으로 흘러든다.

 

 

 

이 광대한 지역에 고인돌이라는 같은 무덤을 사용했지만 정치권력은 이상하게도 독립적이었던 수많은 부족사회가 존재했다는 이상한 설명이다.


이는 고조선의 강역을 대동강 일대로 국한했던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1만4000여기나 되는 대동강 유역의 고인돌에 대해서도 고조선 무덤이라고 설명하지는 못하고 있다.

 

대동강 유역은 고조선 유물이지만 다른 지역은 고조선과 무관한 독립적 족장 무덤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는 까닭일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한(漢)나라 무제가 고조선을 정복하려고 5만7000명의 대군을 보냈고, 고조선 태자(太子:세자가 아님)는 사신 위산(衛山)을 만나러 패수(浿水)를 건널 때 1만명의 군사를 거느렸다고 전한다.

 

패수 (고조선 때의 강 이름)

〈사기 史記〉 조선전(朝鮮傳)에 의하면, 한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뒤 요동(遼東) 지방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로써 요동과 고조선의 경계를 삼았다고 되어 있다. 이 패수는 17세기초 한백겸(韓百謙)이 〈동국지리지 東國地理志〉에서 오늘날의 청천강(淸川江)에 비정(比定)했고 최근에는 이병도(李丙燾)가 〈패수고〉(靑丘學叢 13, 1933)에서 이 설을 상세히 고증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설(異說)이 많아서 이를 압록강이나 요서(遼西)지방의 대릉하(大凌河)로 보기도 한다. 삼국시대에도 패수의 명칭은 계속 쓰였으나 그것이 청천강을 지칭한 것은 아니었다.

 

 

당대인(當代人) 사마천이 황제국가로 보는 고조선에 대해 우리는 족장사회라고 보는 것이다.

 

고인돌은 고조선의 강역이 만주와 한반도 전체를 아울렀던 대제국임을 나타내는 유물의 하나로 시급히 자리 잡아야 한다.

 

그리고 고조선인들에 대해 ‘기적(奇迹)을 만든 성인(聖人)’으로 본 고려인들의 인식도 되찾아야 한다.

 

그것이 선조에 대한 예의이다.(이덕일·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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