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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산(561.2m) : 전남 강진군,장흥군 |
남해 관망하는 천혜의 요새 |
1. 개념도
2. 개요
수인산은 천혜의 요새다. 단순히 솟아오른 산이 아니다. 그리 높지 않지만 그 안에는 설악산과 지리산이 갖춘 화려함과 깊이가 있다. 절벽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정은 수인산성이 되어 웅장한 산세를 품고 있다. 산과 산 사이의 협곡만 차단하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다.
이곳은 왜란과 호란시 피난처였고, 의병항쟁과 동학농민군들의 본거지였다. 그리고 수인산은 병영성을 거느린다. 병영면 한 복판에는 하멜이 7년간 머물렀던 전라병영성의 옛터가 놓여있다. 수많은 외침과 고난 속에서도 꿋꿋하게 그 역사를 지켜본 산이 바로 수인산이다.
하늘이 천혜의 병영지세(兵營地勢)를 열어
탁 트인 들과 잔잔한 내 흐르며 사방에 산이 감싸
기암괴석 솟은 봉우리 바로 수인산(修仁山)이네
병영성 밖 기이한 장관은 요망대(?望臺)일세
조선후기 강진땅을 여행한 학자 이하곤(李夏坤.1677-1724)이 <남유록(南遊錄)>에 남긴 글이다. 강진과 장흥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수인산(561.2m)은 <남유록>에 나와 있듯 그 높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웅장하고 오묘한 산세를 지니고 있는 산이다.
수인산의 높이는 561미터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곳은 점봉산처럼 원시림을 이루는 홈골의 비경을 만날 수 있고, 북한산처럼 암릉이 도열하여 천혜의 요새를 만든 병풍바위와 수목원처럼 잘 닦인 등산로에 동백, 은행, 산죽 등과 같은 갖가지 다양한 나무들이 도열한 수덕마을에서 시작하는 등산로를 접할 수 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 산 언저리에 학이 노니는 홈골저수지, 수인산성에 둘러쳐진 정상의 거대한 분지, 그 안의 수인사 옛 터와 그곳에서 사용했던 우물, 방죽, 그리고 인위적으로 만든 듯한 수로와 봉화대, 주봉인 노적봉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치열했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산임을 알아야 한다.
전라병영성지가 놓인 병영면의 역사와 하멜의 표류기를, 왜구가 침범해 올 때마다 근처 주민들의 피난처로 이용됐던 병영성을, 그리고 동학혁명때는 관군에 대항해 패했던 동학농민군의 마지막 항쟁지인 수인산자락의 석대들판을. 또한 전란으로 비롯된 우익과 좌익의 치열한 공방전으로 때마다 불타던 수인산성 내의 수인사의 흔적들을 알아야만 한다. 수인산성은 이 많은 비경과 이야기들을 보듬은 채 오랜 세월 우리와 함께 했다. 비록 나지막한 산이지만 그 속에 새겨진 역사의 흔적을 찾아가노라면 수인산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을 듯하다.
노적봉에 올라야 비로소 수인산이 보인다
노적봉과 수인산성 수인산에는 산 위에 산이 있다. 그 산에 가야 진정 수인산의 진면목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러기에 수인산 산행을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특히 더더욱 그 높이를 헤아려서도 안 된다. 그렇게 알고 수인산에 갔던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들이 오른 것은 정상 노적봉이 아닌 병풍바위였을 뿐이다. 그리고 단지 작은 산이었을 뿐이다.
수인산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노적봉에 올라 주변의 형세를 둘러보아야 산정이 형성하고 있는 산세의 그 미묘한 형세를 파악할 수 있다. 전체를 먼저 봐야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병사들을 지휘하기 위해서 장군이 높은 망루에 오른 듯, 수인산의 정상 노적봉은 병사들을 지휘하는 망루처럼, 산 위에 또 하나의 산이 되어 서 있다. 마치 거대한 왕관의 형상이다.
하지만 노적봉이란 이름은 벼 낱가리를 쌓아 놓은 것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어느 명산 못지 않다. 무등산, 지리산, 두륜산, 천관산, 흑석산, 월출산에 둘러싸는 곳이 이곳이다. 가까이는 장흥벌과 병영벌이 훤하게 내려다보인다.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장흥벌을 흐르는 탐진강이 길게 꼬리를 늘어뜨리며 다도해로 빠지고 있다. 또한 병영면은 너른 평야를 감싸 안은 듯 산세가 이루어져 비옥한 곡창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곳에 올라 주변의 형세를 바라보았을 때야 비로소 왜 전라병영성이 이곳에 주둔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산정의 수인산성은 수직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고려말부터 조선말까지는 병영성의 전략적 요충지로 왜구가 침입할 때면 장흥, 강진, 영암, 보성 주민들이 피난하여 왜구를 막을 목적으로 축성했다는 산성이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둘레가 3756척, 높이 9척, 많은 건물과 동·서·남·북문과 우물 6개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산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어 동으로 장흥 억불산, 서로 영암 갈두봉, 남으로 마량 남원포와 통하였다. 현재도 동서남북으로 절벽이 틈을 내어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을 이루고 있다. 각각의 성문은 강진과 장흥땅으로 길을 낸다.
동문은 또 다른 내동문과 외동문을 중턱에 만들어 장흥군 유치면 수덕리로 통하고, 서문은 병영면의 수인사를 거쳐 홈골저수지로 이어진다. 남문 또한 능선을 타고 홈골저수에 이른다. 북문은 등산로 외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힌 홈골을 지나 홈골저수지에 다다른다.
3. 산행길잡이
수인산은 산성문이랄 수 있는 동문(대리쪽 계곡), 서문(병풍바위쪽), 남문(성불계곡), 북문(홈골)을 통해 오를 수 있으나 강진군 병영면 홈골저수지나 장흥군 유치면 대리 원점회귀형 코스가 인기가 높다. 홈골저수지 원점회귀형 코스는 홈골저수지~홈골~정상~병풍바위~수인사~홈골저수지로 이어진다.
병영면사무소 앞에서 북쪽(영암 방향)으로 뻗은 835번 지방도로를 따라 100m 쯤 가다 도로가 왼쪽(동쪽)으로 휘는 지점에서 오른쪽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르면 산행기점인 홈골저수지가 나온다. 홈골은 저수지 들머리에서 제방을 따라 가면 입구가 나온다.
홈골로 들어서면 골짜기 안에 자리잡은 논이 보인다. 이곳에서는 산사면으로 올라붙는 산길을 따르지 말고 논을 가로질러 계곡을 건너 골짜기를 좇아 올라야 한다. 홈을 파놓은 듯 협곡을 이루고 있는 홈골 하단부는 봄이면 진달래꽃으로 물들어 화사한 빛으로 빛나고 가을철에는 머루, 다래, 어름, 산밤 등 먹을 것이 지천에 널리기도 하는 풍요로운 골짜기다.
너덜구간을 지나 홈골재로 다가설수록 과연 철옹성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골짜기 양옆은 절벽으로 자연성벽을 이루고 있다. 수인산성의 성벽 흔적이 남아 있는 홈골재에 올라서면 수인산은 산 아래에서 받았던 느낌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 홈골재 너머는 평원을 연상케 할 정도로 넓은 억새밭이고 정상인 노적봉은 마치 거대한 왕릉처럼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홈골에서 노적봉까지는 제법 가파르지만 길이 잘 나 있다. 노적봉에 오르면 사방 경관이 일품이다. 서쪽으로 기암괴봉이 들쭉날쭉 이어지는 월출산 주능선이 한눈에 들고 동쪽으로 제암산~사자산 능선이 병풍을 두른 듯 우뚝 솟아 있다. 남쪽 경관도 만만찮다. 괴바위산에서 부용산을 거쳐 천관산으로 뻗은 산줄기는 남쪽으로 힘차게 내리닫고 연이어 남해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정상에서 병풍바위로 가려면 능선 날등을 타거나 능선 동쪽 사면으로 어어지는 길을 따라도 된다. 수인산성의 흔적을 보려면 사면길을 타야 한다. 사면길을 가다보면 능선 날등으로 오르기 전 샘 입구 같은 곳이 보인다. 한 사람이 기어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높이와 폭을 유지하며 30여m길이로 이어지는 장방형의 인공굴은 옛날 성안에 자리잡고 있던 수인사의 하수구라고 하는데 왜구가 침입했을 때 성 안팎을 연결하던 비상통로거나 또는 적을 유인한 다음 양쪽 출구를 막아 생포하는 덫 같은 역할을 했을 것으로도 추측된다.
능선을 넘어서면 병풍바위 상단부가 나타난다. 삐죽 솟은 두 개의 암봉 한쪽벽에는 ‘光陽縣監(광양현감)’등 여러 사람의 이름이 멋진 필체로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옛날 수인산성을 찾았던 명사들의 이름인 듯하다.
병풍바위에 도착하면 산행종착지인 수인사가 바로 내려다보여 길을 잃을 염려는 거의 없다. 하지만 가파른 능선이므로 미끄러지거나 발목을 접질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철옹성 같은 병영쪽 산세와는 달리 대리쪽 산세는 매우 유순한 편이다. 수덕마을에서 정상까지 이어지는 산길도 병영쪽에 비하면 완만한 편이다. 대리는 장흥읍에서 나주로 이어지는 23번 국도를 타고 부산면소재지를 지나 빈재를 넘어서면 나타나는 길가 마을로 고갯마루를 내려서다 보면 수인산성 팻말이 서 있다.
23번 국도변 대리 마을 초입에서 왼쪽 길을 따르면 포장도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수인산으로 가려면 대리교회가 있는 왼쪽 길을 따라야 한다. 비포장도로로 2km쯤 가면 한우와 사슴 축사가 있는 수덕 마을이 나오고 또 다시 길이 갈라진다. 오른쪽이 수인산 길이고, 직진하면 바람골을 거쳐 수리봉(400m)으로 오르는 길이다. 이곳에서부터 수덕목장을 거쳐 수인산 정상까지는 외길로 이어진다. 23번 국도에서 수덕목장까지는 4km 거리로 승용차로도 접근이 가능하다.
수덕목장을 지나 원시림처럼 우거진 계곡 길을 따라 10분쯤 오르면 석성이 나타난다. 수인산성 외성으로 골짜기 양옆으로 석성이 쌓여 있다. 물이 흘러내리는 곳에는 장방형의 수로가 아직도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외성을 지나 가파른 산길을 따라 20분쯤 오르면 이번에는 내성이 나타난다. 외성과 마찬가지로 계곡 양옆 사면으로 석성이 길게 이어져 있으나, 골짜기 부근만 원형을 유지하고 그 이후로는 거의 허물어진 상태다.
홈골재가 보일 즈음이면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엄습하면서 대나무와 산죽숲에 들어선다. 그 위의 넓은 터는 1908년 의병전쟁과 6 ? 25때 불타 없어진 청련암 자리다. 청련암터에서 홈골재까지는 억새숲을 이루고 있다. 억새숲에서 노적봉 사면을 바라보면 중간쯤에 석축을 발견할 수 있다. 병영 주둔 군사들이 기마훈련장으로 이용하던 곳으로 전해지는 곳이다.
대리~수덕목장~청련암터~정상 왕복 코스는 4시간 정도 걸리나, 수덕목장까지 승용차로 접근하면 2시간은 줄일 수 있다.
4. 주변의 명소
(1) 전라병영성지 - 사적 제397호 (1997.04.18. 지정)
전라병영성은 조선조 500여년간 전라도 육군의 총 지휘부였던 곳으로 1417년(태종17) 본래 광산현에 설치되어 있던 병마절도사영을 이설한 곳이다.
초대 병사인 마천목 장군이 축조한 것이며, 꿈속에 계시를 받아서 눈의 자국을 따라 축조 하였다고하여 설성이라고도 하는데 평지에 축조된 성으로 남북으로 약간 긴 장방형이며,총 연장은 1,060m이다.
1599년(선조 32) 도위수 권율의 상소로 일시 장흥으로 이설되었다가 1604년 다시 당초의 위치로 옮겨 왔으며,제주도에서 표류 중이던 네델란드인 하멜이 이곳으로 압송되어 8여년 동안을 억류되어 있기도 했다.
조선후기에 들어와서는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으로 병영성이 함락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 으며 이듬해인 1895년(고종 32) 복구가 되지 못하고 폐영되었다. 전라 병영성지는 당초 1992년 3월 9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140호로 지정되어 보호관리되어 오다가 1997년 국가사적으로 다시 지정되었다.
(2) 병영홍교 - 지방유형문화재 제129호 (1986.2.7.지정)
병영은 조선 태종 17년(1417)에 남해 지역의 외침을 방어하기 위하여 병마절도사영이 설치되어 500여년 동안 호남을 지켜온 군사 요충지였으며 홍교는 병영의 관문이었다.
이 홍교는 일명 “배진강(背津江)” 다리 라고도 하는데, 폭 6.75m. 높이 4.5m이며, 장방형 화강석재 74개를 26열로 정교하게 무지개처럼 쌓고 잡석을 채워 보강한 다음 점토로 다리 위를 다졌다. 홍예의 상단 중앙에 돌출시킨 용두는 여의주를 입에 물고 풍운조화를 일으키려는 듯 머리를 치켜들고 있다. 그 모습은 매우 해학적이며 그 의장 또한 만인월교의 외경 신앙을 함축성 있게 시사하고 있는 듯 하다. 축조연대는 숙종 무인(1698년)에 가선동추 경술(1739년)에 숭록대부가 된 류한계(劉漢啓)의 금의 환향을 기념하여 양한조가 감독, 준공하였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18세기에 건축된 것 으로 추정되는데 건축의 수작이다.
(3) 병영면 비자나무 - 천연기념물 제39호(1962.12.3. 지정)
강진군 병영면 삼인리 376번지의 이 비자나무는 수령 약 400년으로 높이가 10m이고 가슴높이 둘레가 5.2m이다. 북향 경사지에 있으며 주위에는 대나무 숲이 있고 밑에는 자주괴불 주머니가 자란다. 앞에서 볼 때에는 지상 1.87m에서 커다란 가지가 길게 뻗었으며, 뒤쪽에 가지는 짧고 양쪽 가지는 비슷하게 자랐다. 가장 큰 가지의 밑부분 둘레는 2.6m나 된다.
태종 17년에 전라 병마절도사영을 이곳으로 정했을때 쓸만한 나무는 모조리 다 베어 버렸으나 이 나무는 굽었고 키가 작아서 쓸모가 없었기 때문에 남게 되어 현재에 이르렀다고 전해오기도 한다. 조선 500년 동안 호남지방의 방어 진지였던 병영성이 갑오동란으로 동학군에 함락되어 마침내 폐영될 때가지 이 근처에는 많은 병사가 있었으나 열매를 촌충구제에 사용하기 때문에 잘 보호되어 온 것 같아 보인다.
(4) 수인산성 - 도지정기념물 제59호(1982.10.15. 지정)
동쪽은 장흥 유치면 대리 수덕동과 서쪽으로는 강진 병영면에 걸쳐 산마루를 이어 쌓은 성이다. 사방 둘레가 약 6km, 높이 4?5m, 너비 4m, 남문, 북문, 동문이 있다. 성의 축조는 산세를 이용하여 돌로 쌓았는데, 성내에는 봉수대와 수인사터, 군창고터(軍庫址)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수인산성이 언제 어느 정도의 규모로 축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세종실록지리지』에 입암산성(笠岩山城)과 금성(나주)산성(錦城山城)과 함께 기록되고 있고,『신증동국여지승람』에『본도강고현시성 본조개축고려말도강탐진보성장흥영암지민개피왜구우차(本道康古縣時城 本朝改築高麗末道康耽津寶城長興靈岩之民皆避倭寇于此)』라는 내용으로 보아 고려때에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 같은 기록에 의하면 「동북쪽으로 30리에 있으며 병영(兵營) 동쪽으로 10리이다. 둘레가 3.756척이고 병영에서 남문까지는 매우 좁은 길이 빙 돌아서 문밖의 성세(城勢)가 핍박(逼迫)하여 두사람이 함께 설 수 없으며, 북문은 더욱 험절(險絶)하고 동문은 적을 막을 수 있는 곳으로 문밖은 절벽져 있다」했다. 이로보면 당시 석성(石城)의 상태를 대략 짐작할 수가 있다.
축조방법은 협축(夾築)으로 “물림쌓기”를 하였는데, 어느 곳을 헐어도 헐리지 않게 단단한 접착제를 사용하였다. 접착제는 조개껍질과 생석회에 모래를 섞어 만든 것으로 오늘날의 시멘트에 못지않은 부착력을 갖고 있다. 또 좁은 골에는 철문을 달아 성벽에 연결하였고 입구쪽은 일정한 간격으로 성벽에 구멍을 두어 성 밖의 동정을 살피게 했다. 석재(石材)도 직사각형 또는 정사각형으로 다듬어 정교하고 치밀하게 쌓아 올렸는데, 다른 산성에서 볼 수 없는 우수한 기법임을 알 수 있다.
평상시에는 병영 병사가 수성별장(守城別將)을 임명하여 상주케 하고 유사시에는 장흥, 병영의 관원과 병사, 그리고 주민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켰던 곳이다.
한편 한일합방시 함평출신의 심남일, 장흥출신의 이교민 등이 의병을 일으켜 이 산성에서 분전하다 전사하기도 하였다.
(5) 보림사 -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45번지(가지산 계곡)
이 사찰은 동양 3보림 (인도/중국/한국)의 하나로 우리나라에 선종이 가장 먼저 들어와 정착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원표대덕(元表大德)이 터를 잡을 당시인 759년에는 초암(草庵)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듯 하며, 연기설화(緣起說話)가 이곳을 찾는 이들을 흥미롭게 하고, 곳곳에 그와 관련된 땅 이름이 남아 있다.
옛 모습의 보림사는 웅장하고 수려한 모습이었으나 조선시대 숭유억불책(崇儒抑佛策)으로 쇠락하다가, 한국동란 병화(兵火)를 겪기도 하였다.
현재 보림사에는 철조비로사나불 (鐵造毘盧舍那佛)등의 국보와 보물, 지방문화재가 남아 있어 역사의 흐름과 우리나라의 불교 미술사를 엿볼 수 있다.
또한 보림사에는 선승들이 즐겨 들었던 작설차가 특산품으로 전하고, 비자림과 약수를 비록, 1일 코스의 가지산 등반로가 개발되어 찾는 이의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6)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 국보 제117호(1963.2.21. 지정)
신라하대부터 고려시대에 걸쳐 철조불상의 유행을 보았는데 이 불상은 그 중에서도 대작으로 당시의 조법이 잘나타나있는 대표작이다. 나발(螺髮)에 육계(肉?) 는 크고 원만상인 얼굴에 두 귀는 길게 늘어졌으며 눈은 정안정시(正眼正視)에 콧등은 우뚝하고 굳게 다문 입 등 위엄이 넘치고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손은 지권인(智拳印)을 맺어 대일여래 상을 보인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인데 가슴에는 치마을 입은 것이 보이고 전신을 덮은 의문(衣紋)은 평행 융기선(隆起線)으로 표현되었다.
이 불상이 신라불의 조형을 따르고 있으나 지나치게 작아진 손과 또 상체에 비해 하체인 무릎이 너무커 상하 비례의 불균형을 보여 약간 퇴화된 조형감각을 느끼게 한다. 옷무늬(衣紋)또한 도식화된 과정을 보여 고려불에 접근하고 있어 일부 조화되지 않은 점이 있으나 신라하대의 철조불상으로서 대표작일 뿐 아니라 그 조성연대를 확실히 알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시 되고 있다.
이 불은 왼팔 후면에 「대중(大中)12年」이란 명기(銘記)가 양각되어 그 조성이 신라 헌안왕 2년(858) 임을 알 수 있다. 명문의 내용은 「불상을 조성한 때는 석가여래 입멸 뒤 1808년이다. 이때는 정왕 즉위 3년이다. 대중 12년(헌안왕2, 서기858년) 무인 7월 17일 무주장사 부관 김수종이 진주(陳奏)하여 정왕은 8월 22일 칙령을 내렸는데□몸소지으시고 피곤함을 알지 못하셨다.(當成佛時釋迦如來入滅, 後一千八百年耳比時, 情王卽位 第三年也, 大中十二年 戊寅七月十七日武州長沙副官 金遂宗聞秦□ 情□王乙八月甘二日 勅下令 □躬作不, 覺勞困也)
보림사는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가지산파(迦智山派)를 이룬 대선문 도량으로서 보조선사(普照禪師)가 주석한 사찰이기도 하다.
(7) 보림사 삼층석탑 및 석등 - 국보 제44호(1962.12.20. 지정)
대적광전(大寂光殿) 앞에 나란히 비슷한 규모와 구조의 쌍탑이 있으며 그 가운데에 석등(石燈)이 있다. 2층기단의 구성은 모두 통식(通式)을 따르고 있으나 갑석(甲石)이 얇아 매우 평판적(平板的)인 느낌을 준다. 상하 기단 탱주(?柱)의 수(數)도 하층기단에 2주, 상층기단에 1주를 모각(模刻)하여 간략화된 양식을 보이고 있다.
탑신부는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을 각각 한돌(一石)로 하고 탑의 몸에는 우주(隅柱)를 각출(刻出)하였으며 옥개석 받침은 각층 5단이다. 이 탑은 1933년 겨울 사리장치(舍利藏置)를 도취할 목적으로 파괴하였으나 미수에 그쳤고 그 다음해 가을 양탑을 복원하였는데 당시 초층탑신(初層塔身) 상면 중앙에 사리공(舍利孔)을 마련하고 장치한 사리와 함께 탑지가 발견되었다.
건립에 관련된 북탑지 명문은「탑을 조성한 때는 함통 11년 경인 5월 어느 날이다. 그 때가 경문왕이 된 지 10년이었다. 즉 헌안왕의 왕생(往生)을 위하여 삼가 만든 탑이다. 서원부 소윤 나말 김수종이 아뢰었고 칙명을 받들어(탑을 조성한) 우두머리는 급간 진뉴이다」(造塔時, 咸通十一年, 庚寅五月日, 時, 凝王卽位, 十年矣, 所由者, 憲王往生, 慶造之塔, 西原部小尹奈末, 金遂宗聞秦 奉, 勅伯士及珍紐)라는 내용이다.
이 명문으로 보아 양탑의 건립이 신라 경문왕 10년(870년, 咸通11)의 일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891년(진성여왕5, 大順2) 1층 탑신석 상면 중앙에 사리 7과를 봉안하였고 1478년(성종9, 성화14), 1535년(중종30, 嘉靖14), 1684년(숙종 10, 崇禎 기원후 57)에 각각 증수(重修)되었다.
또 석등은 석탑과 함께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상하의 각부는 팔각으로 기본형을 삼았고 지대석(地臺石)만은 방형(方形)으로 상면 중앙에 팔각괴임이 돌출(彫出)하여 하대석을 받고 있다. 하대석 8각 각면에는 안상(眼象)이 조각되고 그위에 귀꽃이 붙은 우뚝한 복련석(伏蓮石)을 얹었다. 8각 간석(竿石)은 비교적 짧고 앙련석(仰蓮石)에는 중판단엽(重瓣單葉)의 연화(蓮花)를 새겼는데 판내에 다시 화형(花形)을 넣었다. 화사석(火舍石)은 높직하고 4면에 화창이 뚫렸으며 그 위에 팔각개석을 얹고 다시 연화가 양각된 보주(寶珠)가 있다.
이 석등이 손상없이 완존한 점은 매우 희귀한 일이며 각부의 비례가 알맞아 조화를 보이고 있다.
(8) 부사골로 승격시킨 공예태후 임씨(恭睿太后 任氏)
고려 17대왕 인종(仁宗)의 비(妃)이다. 1109년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당동마을에서 태어났다. 성은 임(任)씨이고 중서령 원후(元厚)의 딸이며 문하시중 이위(李瑋)의 외손녀이다. 태후가 탄생하던 날 저녁에 이위의 꿈에 황색의 큰 깃발이 집의 중문에 세워져 깃발의 끝이 궁궐의 용머리에 걸쳐 나부끼므로 외조부가 태후를 몹시 사랑하였다. 태후가 15세에 이르자 평장사 김인규(金仁揆)의 아들에게 시집가게 되었으나 혼인하는 날 저녁 갑자기 중병에 들어 죽어가게 됨으로 혼인하지 못하였다.
이후 1126(인종4) 이자겸(李資謙)이 물러나고 그의 딸이 폐비가 되자 태후가 연덕궁주(延德宮主)로 추천되었다. 태후가 추천된 것은 폐비이씨가 친정으로 가던 날 인종왕이 꿈을 꾸니 폐비가 참깨(壬子) 5되와 노란 해바라기씨(黃葵) 3되를 주고 가더라는 것이다. 이에 축준경(拓俊京)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후비(后妃)로 임시를 들일 징조요, 다섯이란 아들을 말하고 누런 해바라기씨는 그중 세아들이 왕이 될 것"이라는 상서로운 꿈이란 해몽이 있어 태후로 추천되었다.
1127년 태후가 의종(毅宗)을 낳으니 왕이 기뻐하며 태후 집에 은기(銀器)들을 하사하고 태후를 극히 총애하여 1129년 왕비로 책봉하였다. 이후 왕자 경(暻)과 명종(明宗)을 잇따라 낳으므로 인종은 왕비를 위해 수시로 은전을 베풀었으며 왕비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왕이 소복을 입는 예를 갖추었다.
태후는 의종(毅宗).경(暻).명종(明宗).충희(沖曦).신종(神宗) 다섯형제와 승경(承慶).덕령(德寧).창락(昌樂).영화(永和) 네공주를 낳았고 의종이 왕에 즉위하자 태후를 왕태후(王太后)로 삼았다.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며, 순능(純陵)에 장사하고 시호를 공예태후(恭睿太后)라 하였다.
이듬해 금(金)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제사를 지냈다. 인종왕은 왕자가 탄생될 때마다 태후에 대한 은전을 베풀어 우리 고을 명칭도 "길이 흥할 고장"이라하여 "長興"이라 이름지어 하사했다고 전한다.
(9) 장흥댐(탐진강댐)
댐 규 모 : 길이 403m, 높이 53m/ 콘크리트표면 차수벽형 석괴댐
총저수용량 : 191백만㎥(유효저수량 / 171백만㎥)
용수공급 : 350천㎥톤/일(생활200, 공업76, 농업21, 하천유지53)
공급지역 : 1시 8군(목포, 장흥, 강진, 해남, 영암, 완도, 진도, 무안, 신안)
침수지역 : 2군 3면 12개리 679세대 2,121명
장흥 유치 664세대 2,030명 / 부산29세대 77명 / 강진 옴천 4세대 14명
전기시설 : 발전량 800kw/일
사 업 비 : 6,363억원(공사비 1,472 / 보상비 4,724 / 관리비 167)
사업기간 : 1996 ~ 2005.12월
시 행 청 : 한국수자원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