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에는 때가 없다고 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또는 여자라는 이유로 배움의 기회를 놓쳤다가 뒤늦게 꿈을 이어나가는 어르신들이 있다. 소박하지만 큰 꿈, 초등학교 졸업장을 향한 어르신들의 도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글 이한나 기자 / 사진 이윤상 작가
평균 70세 어르신 초등학생들
도립거창대학교 평생교육원 2층 강의실. 나이 지긋한 학생들이 한글 쓰기 수업에 한창이다. 희끗희끗 흰머리에 주름이 가득한 60~80대 어르신들이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은 손자뻘 학생들에 뒤지지 않는다.
강사의 말을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는 쫑긋, 책에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온 신경을 수업에만 집중한다. 주름진 손으로 또박또박 글씨도 써본다.
이곳 어르신들은 그렇게 2년을 공부했다. 지난 2015년 학력인정 문해교실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한 음절 쓰는 것조차 버거워 '내 이름 석 자 쓰는 법이라도 제대로 알고 가자' 했던 분들이 이제는 받아쓰기도 척척 해낼 정도로 일취월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의 어르신들은 현재 초등학교 과정을 밟고 있다. 입학 첫해 초등학교 1·2학년을 거쳐 지난해 3·4학년, 올해 5·6학년까지 무사히 진급한 고학년생이다. 내년 2월이면 정식으로 초등학력이 인정돼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는다.
성실히 수업에 참여하면 졸업 가능
어르신 초등학생들은 한글만 배우는 게 아니다. 국어를 비롯해 사회, 수학, 과학, 영어, 특별활동, 재량학습 등 교과 과정을 따라야 한다.
졸업을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하는 시험은 없다. 그저 성실히 수업에 참여하고 배우고자 하는 의지만 보여주면 된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입학 당시 52명이었던 학생이 지금은 35명만이 남아 학업을 이어가고 있다.
대부분 70대 이상 어르신이라 건강상의 문제가 가장 크지만, 남들이 아는 답을 자신만 모를 때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고 영영 수업에 나오지 않는 분들도 제법 있다 한다.
어르신들이라고 해서 꼭 모범생만 있는 것도 아니다. 지각도 종종하고, 수업 중 휴대폰 벨소리가 울리기도 한다. 발표 도중 참견하는 친구에게 "왜 쓸데없는 훈수를 두냐"며 옥신각신 다투기도 한다.
하굣길에 인근 시장에 들러 약주 한잔 주거니 받거니 하는 등 소소한 일탈도 학교 다니는 재미란다.
'가난해서, 여자라고' 배움의 기회 포기
거창군은 지난 2015년 도립거창대학 평생교육원을 시작으로 북상초등학교와 신원면복지회관, 거창도서관 등 4곳에서 학력인정 문해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입학생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유교 관습과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남자 형제들에 밀려 배움의 욕망을 접고 희생을 강요당했던 우리네 어머니와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재학생 중 최고령인 신판림(83) 할머니는 "일제강점기 때 초등학교를 다녔지. 일본말은 배웠는데 정작 우리말을 못 깨친 채 광복을 맞았다"며 "열여덟 살 꽃다운 나이에 시집가 그동안 애들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한다고 제때 못 배웠는데, 그게 한으로 남더라"고 털어놨다.
반장 최경자(74) 할머니의 사연도 콧등을 시큰하게 만든다. "부모님이 아프셔서 내가 동생을 업어 키웠어. 책가방 메고 학교 가는 친구들이 어찌나 부럽던지, 동생 업고 10리 길을 걸어서 학교 구경 가고 그랬어. 다른 애들 눈에 띄지 않게 숨어서 수업을 지켜보고 그랬지."
늦게나마 못 배운 한을 풀기 위해 학교를 찾은 어르신들. 남은 기간 동안 학창시절에 누릴 수 있는 것은 다 누려보고 졸업할 생각이다. 그러면서 "건강이 허락한다면 중학교, 고등학교까지도 진학하고 싶다"고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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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인정 성인문해교실은
기초학력 부족으로 가정과 사회생활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성인을 대상으로 문자해득능력과 기본소양을 갖출 수 있도록 돕는 3년 과정 프로그램이다. 공인 기관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을 이수하면 초등학교 졸업장에 해당하는 학력 인정서를 교부한다.
최근 3년간 경남에서는 2014년 70명, 2015년 25명, 2016년 133명 등 모두 228명의 도내 어르신이 학력인정 문해교실을 통해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올해는 거창을 비롯해 창원과 김해, 양산, 의령, 고성, 함양, 합천 등 8개 시·군에서 학력인정 성인문해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수업료와 교재비는 전액 무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