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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장님 작품)
(키위맨님 작품)
(도사님 작품)
(JLPicard님 작품)
이상 4개의 작품에 대한 고증은 스핏파이어의 고증 리포트가 완결되는 다음 글(2부) 맨 마지막에 시작됩니다.
2차대전 중에 영국 전투기의 최강 기종은 당연히 스핏파이어였습니다. 대전 초기에 영국 본토 항공전(1940년)에 루프트바페가 자랑하는 걸작 전투기 메서슈미트 Bf 109를 비롯하여 수많은 슈투카와 폭격기들이 영국 상공에 등장했을 때 호커 허리케인과 스핏파이어 양대 전투기들은 불과 한두달 전에 유럽 최강국 중에 하나였던 프랑스와 동유럽 국가들을 집어 삼켜 버렸던 나치 독일의 막강한 공군력을 상대로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항공전을 벌인 결과 당시 최강의 공군이라고 했던 루프트바페와 아돌프 히틀러가 더 이상 영국 상공을 넘보지 못하고 영국 본토의 지상군 상륙을 포기하게 만들었던 1등 공신들이 바로 허리케인과 스핏파이어였습니다.
생산 시기는 스핏파이어보다 허리케인이 앞섰지만 그 성능의 차이는 사실 허리케인이 스핏파이어의 비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허리케인 역시 영국 하늘을 루프트바페의 침공에서 막아낸 훌륭한 전투기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허리케인은 훗날 소개해드리도록 하고 오늘은 2차대전 기간을 통털어 연합군과 추축군을 불문하고 가장 훌륭한 전투기 3개를 꼽으라고 한다면 P-51 무스탕(미), 메서슈미트 Bf 109(독)과 더불어 스핏파이어(영)가 당연히 선정될 것입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우리 카페에서도 스핏파이어에 대한 고수님들의 애정은 각별하신 듯 무려 네분의 고수님들이 스핏파이어 완성작을 올려놓으셨습니다.
(영국에서 발간된 "Famous Fighters of Second World
War"(윌리엄 그린 著)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최고의 공격형 전투기는 P-51 무스탕이고 최고의 방어
전투기는 스핏파이어다.")
1930년대 영국 공군력
1차대전 승전국 중에 하나인 영국은 전쟁 중에 프랑스, 독일과 함께 유럽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공군력을 보유한 나라였습니다. 아직은 "신사의 품격"을 유지하는 기사도 정신의 공중전이 가능했던 복엽기와 삼엽기 중심의 교전에서 제공권의 장악의 의미는 전쟁의 사기에 관계되는 수준이었지 제공권을 잃었다고 지상군이나 시설에 치명적인 폭격을 받을 위협에 노출된다는 것은 아직 아니었으므로 2차대전의 피비린내 나는 공중전과 대량 학살이 따르는 대규모 폭격에 비하면 훨씬 느긋한 시절이었습니다.
(1차대전 중에 영국 공군의 알바트로스 2인승 복엽기의 공중전 장면, 물론 1차대전 공중전도
하늘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쟁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공권의 장악이란 의미가 엄청난 전술적
제약과 희생을 의미하는 2차대전의 공군력과는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2차대전의 전쟁의 먹구름이 서서히 끼기 시작하던 1934년으로 접어들면서 유럽 열강들은 엄청난 속도로 항공 기술이 발전해가면서 과거 1차대전 군용기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성능과 날렵한 외형을 가진 단엽기들이 개발되기 시작합니다. 그 선두주자는 독일과 이태리였고 메서슈미트,하인켈,피아트(이태리)와 같은 업체들이 주인공들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의 항공기 업체들은 독일과 이태리가 열을 올리면서 생산하는 단엽기가 향후 군용기의 향방을 결정하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실감하지 못했고 그동안 생산해온 복엽기가 이런 단엽기들과 경쟁하여 충분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2차대전 초기까지 누부신 활약을 했떤 영국 함재기 쏘드피쉬(Swordfish) 복엽기. 물론 당시 스핏파이어나
허리케인과 같은 단엽 전투기들이 RAF의 주력 전투기가 되었지만 이런 복엽기가 1941년 5월 독일 해군의
"야마토 전함"이었던 비스마르크 호를 격침시키는데 1등공신이 되는 이변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1931년에 영국 공군은 4개의 영국내 항공기 업체들에게 새로운 단엽 전투기의 개발을 위한 요구를 하였고 4개 업체들 중에 마지막까지 최종 2개 업체가 남게 됩니다. 그 하나가 훗날 허리케인 전투기의 생산업체가 되는 호커社였고 두번째 업체가 스핏파이어의 생산업체가 되는 슈퍼마린社였습니다.
(스핏파이어의 운명의 라이벌 루프트바페의 자존심! Bf 109)
이미 Bf 109를 소개하면서 설명했듯이 호커 허리케인 전투기의 경우는 목재 프레임에 캔버스(천)을 댄 것이므로 제조 방법은 1차대전 복엽기와 큰 차이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제작이 훨씬 간단했고 높은 생산성을 초기부터 확보할 수 있다보니 실제로 몇년 후에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이 벌어지자 영국 공군의 가장 많은 숫자가 허리케인 전투기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후에 허리케인 전투기는 따로 소개하기로 하고.....
(호커 허리케인은 최고의 전투기는 아니었지만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영국이 보유한 가장 많은 숫자의
전투기였습니다.)
한편 슈퍼마린社의 스핏파이어는 영국 전투기 역사상 최초의 전체 금속제 전투기(금속 프레임에 철판을 댄 방식)이다 보니 초반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게다가 독일의 Bf 109의 날개가 직각 형태인 것과는 달리 스핏파이어의 날개는 타원형으로 디자인 되었는데 이런 외형이 겉으로 볼 때는 매우 우아하고, 실제 성능도 우수했지만 생산 방법은 무척 까다롭고 생산성을 높히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스핏파이어 설계자 R.J.미첼(1895년~1937년),
항공기 역사상 독일의 메서슈미트 박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천재 엔지니어로 기억됩니다.)
이 "아름다운" 디자인의 단엽 전투기를 설계한 엔지니어는 R.J.미첼입니다. 동시대에 독일에서 Bf 109를 설계한 천재 항공기 엔지니어 메서슈미트 박사가 있었다면 영국에서는 바로 혁신적인 젊은 엔지니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R.J.미첼 이야기
그는 1931년 무려 시속 550km의 속도를 내는 항공기를 제작하여 슈나이더 컵 스피드 레이스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명성을 갖고 있었으며 이기체의 설계가 훗날 스핏파이어 설계의 근간을 이루게 됩니다.
(1931년 슈나이더 컵 레이스에서 우승한 R.J.미첼의 슈퍼마린 S.6B 수상 비행기)
(1936년 최초의 시험 비행을 앞두고 대기 중인 스핏파이어 시제기)
(스핏파이어를 설계한 천재 엔지니어 R.J.미첼(앉아있는 사람)이 시험 비행사들
및 정부 관계자와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1931년 자신이 설계한 항공기가 우승을 하고 얼마 안있어서 이 젊은 천재 엔지니어는 폐결핵이라는 판정을 받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유럽으로 요양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영국 공군이 같은 해에 최초의 단엽 전투기의 요구 사양을 발표하고 그의 직장인 슈퍼마린社는 이 천재의 우승 항공기의 디자인을 기본으로 단엽기 설계를 시작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마침 그가 짧은 기간 동안 요양하는 도중에 독일의 항공 기술자들과 교류를 갖게 되었는데 그는 직감적으로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독일이 전쟁을 위해서 가공할 전투기(조만간에 등장할 Bf 109)의 개발에 매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자신이 한가롭게 요양을 즐길 상황이 아님을 깨닫고 건강의 악화를 무릅쓰고 영국 공군 요구 사양에 맞는 단엽기 개발에 합류하게 됩니다.
담당 의사는 그가 일에 매달리면 병이 더 악화되어 죽을 수도 있음을 수차례 경고하였고 요양을 종용하였지만 그는 독일보다 앞서서 단엽 전투기 개발을 서두르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혹사하게 됩니다. 결국 1934년 2월 최초 시제기(스핏파이어의 최종 설계와는 전혀 다른 최초의 설계)가 제작이 완료되어서 첫 시험비행을 실시하였지만 불안정한 성능으로 영국 공군에게 거절을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에 포기하지 않고 미첼은 슈퍼마린사에게 전체가 철판으로 둘러싸인 최초의 단엽 전투기 설계를 제안했고 그의 능력을 신뢰한 회사는 즉시 제작 지원을 결정하였습니다.
(1936년 5월 최초의 스핏파이어 시제기의 시험 비행을 위해서 시험 비행사 조셉 서머즈 대위가
탑승을 마친 상태. 이날 스핏파이어의 안정적인 성능은 RAF 관계자들을 크게 만족시켰고 초기
300대의 발주를 하게 되면서 영국 공군의 전설, 스핏파이어가 탄생합니다.)
(드디어 스핏파이어의 최초의 시험비행이 시작되다!)
새로운 단엽기의 설계는 미첼이 혼자서 전부 창조해낸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유선형의 얇은 주익의 설계는 캐나다 출신 엔지니어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동체의 골격은 미국에서 설계가 진행되었습니다. 또한 Bf 109와 유사한 주익 아래의 통풍구의 디자인은 영국 다른 회사에서 설계되었습니다. 하지만 미첼의 천재성은 이런 설계 작업들이 일관성 있는 그의 지휘에 이루어졌고 그 결과물들을 모아서 훌륭하게 결합시키는 능력은 그가 갖고 있던 초고속 단엽기 설계 경험 (S.6B 수상기)아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런 최신 기술이 모아진 단엽 전투기에 대해서 영국 공군도 즉각적으로 관심을 가졌고 설계는 박차를 가했습니다.
(스핏파이어 Mk I의 금속 골격 구조. 당시만 해도 금속으로 뼈대를 만들어 그위에 철판을 씌어 전투기를
만든다는 것이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호커 허리케인 전투기의 경우 목재 골격에 천을 뒤집어
씌운 날개만 단엽이었지 1차대전 쌍엽기의 생산 방식과 상당히 유사한 탓에 스핏파이어보다 훨씬 높은
생산성으로 공급 물량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1936년 3월에 드디어 스핏파이어의 원형이 되는 최초의 시제기가 시험비행을 실시하였는데 1931년 레이스에서 S.6B가 세웠던 시속 550km보다 12km 올라간 시속 562km를 기록하며 시험 비행을 보기위해 모였던 영국 공군 관계자들을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스핏파이어와 비슷한 시기에 생산이 시작된 Bf 109E형의 최고 속도가 시속 560km였습니다.
마치 짜고 하는 것처럼 스핏파이어와 바다 건너 Bf 109와의 속도 경쟁은 근소한 차이로 계속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놀라운 결과를 거둔 미첼의 몸속에서는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서 대장암이 발병한 상태였습니다. 시험 비행 후에 영국 공군은 그가 그의 육체를 불사르며 제작했던 혁신적인 전투기에게 스핏파이어라는 이름을 붙히고 310대의 최초 주문을 하였지만 미첼은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습니다. 결국 1937년 그는 조셉 스미스에게 일을 넘기고 치료를 위해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하지만 입원한 후 불과 몇달 후에 그는 그곳에서 42세의 짧은 인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스핏파이어의 독특한 디자인 - 설계 비화
1930년대 중반 영국에서 스핏파이어의 개발이 한참 진행되던 싯점에 전체가 철판으로 덮히고 단엽/저익의 새로운 세대의 전투기의 개발은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독일과 같은 유럽 열강들에게 향후 제공권을 장악하기 위한 최우선 과제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독일의 경우는 여러분들 모두 잘 아시듯이 Bf 109의 개발이 스핏파이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진행 중이었고 프랑스의 경우 Dewoitine D 520이라는 전투기가 개발 중이었습니다.
스핏파이어의 디자인에서 미첼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점은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최고의 성능을 발휘할 수 있는 요격 능력과 전투기 임무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롤스로이스社의 멀린 엔진의 강력한 파워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사항은 스핏파이어의 개발 당시에는 아직 Bf 109와 같이 엄청난 속도와 무장을 갖춘 공중전의 상대가 출현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므로 좀 더 무게를 두었던 것은 적 폭격기들의 요격을 위한 신속한 고도 상승 능력이었습니다.
미첼의 천재성을 후세의 항공 전문가들이 인정하는 부분은 바로 이런 뛰어난 성능을 확보하기 위해서 매우 복잡한 곡선의 구조를 갖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스핏파이어의 실루엣을 쳐다보면 라이벌이었던 Bf 109보다 훨씬 오묘한 곡선 디자인의 주익고 기수 밑에서 유연하게 흐르는 유선형 "턱" 구조가 매우 아름답다는 표현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정말 너무 아름다운 곡선의 스핏파이어 날개 디자인)
미첼이 이렇게 아름다운 유선형 주익을 디자인한 이유는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위해서가 아니었고 기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두가지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필수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 첫번째는 비행시 최고의 스피드를 내기 위해서는 날개가 얇아야 했습니다. 비행시 저항을 최소화하여야 했고 동시에 이 날개에는 개폐식 랜딩 기어와 총 8정의 기관총 (후에 2정의 기관포) 및 그에 필요한 탄약들이 들어가야 하는 구조여야 했습니다. (Bf 109를 설계한 메서슈미트 박사도 주익을 최대한 얇게 만들려는 노력으로 인해서 기관포의 주익 장착이 필요하게 되자 기술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최고의 비행 성능을 위해서 주익을 얇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혁신적인 비행기를 설계하는 선구자들에게 항상 가장 어려운 과제가 되곤 했습니다.)
(일부에서는 스핏파이어의 주익을 설계할 당시에 미첼이 당시 개발이 완료되어 비행 중이던
독일 하인켈社에 He 70의 유선형 주익을 본따서 설계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첼의
설계팀의 일원으로써 주익 설계에 참여했던 엔지니어의 설명은 겉의 모습은 유사할지 모르나
성능적으로 추구하는 목표가 틀렸고, 그런 탓에 내부 구조는 He 70과 전혀 다르다고 이런 주장을
일축했습니다. 위에 그림은 He 70의 구조)
스핏파이어의 공기 역학적인 유선형 디자인은 미첼이 스핏파이어의 콘셉트를 잡을 때부터 이미 결정해놓고 이 전투기에게 요구되는 성능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최적의 디자인임을 확신하였습니다. 미첼의 이런 디자인은 전체 주익의 두께는 얇았지만 동체와 연결되는 부분은 급격히 두꺼워지면서 주익과 동체의 연결을 견고하게 잡아주는 합리적인 디자인임이 입증됩니다.
한편 스핏파이어의 무장은 초기에 총 8정의 브라우닝 기관총이 좌우 주익에 4정씩 장착되었습니다. 하지만 1934년 최초 시제품 제작때에 RAF에서 브라우닝 기관총의 숫자가 부족하여 오직 4정만 장착하고 후에 나머지 4정을 마져 장착하게 됩니다. 최초 시험 비행시에 저고도에서 기관총 사격은 완벽한 결과를 얻었지만 고고도에서 비행시에는 바깥쪽 기관총이 얼어버려서 오동작이 발생하는 현상이 발견됩니다. 이문제는 1938년 양산 직전까지 해결이 안되다가 내부 구조를 수정해서 기관총의 냉각을 막는 뜨거운 공기의 유입을 가능케함으로 해서 문제를 해결하게 됩니다.
(스핏파이어 Mk. I의 라인 드로잉, 총 8정의 기관총의 위치가 보입니다.)
이렇게 장착한 8정의 기관총이 스핏파이어의 무장의 표준으로 확정될 무렵 독일 스파이에 의해서 루프트바페에 이런 스핏파이어의 정보가 누출되었는데 이를 들은 메서슈미트 박사는 Bf 109에 기관포를 장착하기로 결정합니다. 기관총으로만 무장된 스핏파이어와 기관포가 장착된 Bf 109의 무장의 차이는 1940년 8월부터 본격화된 영국 본토 항공전 초기에 영국 조종사들에게 큰 어려움을 안겨주는데 무려 8정의 기관총에서 발사하는 탄환이 독일의 폭격기에 명중되더라도 격추를 시키거나 최소한 폭격을 못하도록 고장을 일으키게 하기에 부족한 화력이었던 것입니다. 전투 보고에 따르면 한대의 적기를 격추시키기 위해서 평균 4,500발의 탄환이 발사되곤 한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따라서 화력의 보완을 위해서 최소한 20mm 기관포가 장착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게 되었고 1939년 6월에 히스파노 20mm 기관포 2문이 장착되는 보완 대책이 결정됩니다. 하지만 이 기관포는 초기에 빈번하게 사격 중단 오동작이 발생하였고 이런 문제의 해결은 영국 상공에 루프트바페의 폭격기와 Bf 109들이 출현하기 시작하던 8월까지 완벽하게 해결되지 못하였습니다. 초기에 RAF 조종사들은 불안정한 히스파노 기관포를 장착하느니 차라리 화력이 빈약해도 성능이 안정적인 기관총 8정을 장착한 Mk.I을 몰고 전투에 임할 수 밖에 없었고 이런 화력의 열세는 항공전이 시작된 후에 한달 정도 후에야 안정적인 기관포를 장착한 Mk.II 가 공급되면서 해결을 모색할 수 있게 됩니다.
스핏파이어 MK I & MK II (1938년~1940년)
(최초의 스핏파이어 생산버전, 마크(Mk) I )
스핏파이어 Mk I 은 최초의 양산 버전입니다. 1,030마력의 롤스로이스 멀린 II, III 엔진을 기본으로 장착하여 1938년 RAF(영국 공군의 약자 : Royal Air Force)에 배치되었습니다. 1939년 스코틀랜드 상공에 나타난 독일 Ju 88 폭격기를 격추시키면서 최초의 교전을 기록합니다. 1940년 6월에 프랑스가 독일에게 점령되고 드디어 7월에 영국 본토 항공전을 앞두고 스핏파이어의 엔진은 1,175마력의 머린 XII 엔진으로 교체되면서 Mk. II 라고 부르게 됩니다. Mk. I과 비교하여 엔진의 교체뿐만 아니라 방탄 유리 캐노피와 조종사 보호를 위해서 조종석에 방탄 장갑판을 설치하였습니다.
(마크 II 마킹의 예 : 기체 측면에 "EB"는 영국 공군(RAF) 제41편대을 의미하는
이니셜입니다. 또한 P7666은 기체 번호입니다. 조종사는 1940년 당시
제41편대장을 맡았던 도날드 핀레이 대위입니다. 그는 1940년 11월 23일
사진의 스핏파이어를 지급받은 첫날 임무에서 두대의 Bf 109를 격추시키는
전공을 세우고 기념 사진을 찍은 것입니다.)
Mk. I과 Mk.II가 1940년 8월부터 시작된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Bf 109E를 상대로 눈부신 활약을 벌인 기종들입니다. 당시 Bf 109E에 비해서 수평속도에서 시속 592km로 무려 30km 빨랐으며 수평 선회 성능이 우수하였습니다. 하지만 Bf 109E의 효과적인 연료 분사 장치로 인해서 Bf 109E는 급강하 공격이 가능하였는데 스핏파이어를 제외하고 현존하는 전투기들 중에서 Bf 109E의 급강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전투기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Bf 109E는 급강하 공격 후에 급선회를 하는 경우에 기체 후미 주익이 파괴되는 결함이 종종 발생하였는데 급선회 성능이 우세한 스핏파이어가 급강하 공격을 피하고 도주하는 경우 Bf 109 조종사는 무리하게 급선회를 하여 추적하지 못하고 쳐다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성능상 스핏파이어와 Bf 109E는 장군, 멍군 식으로 강점과 약점을 하나씩 갖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루프트바페의 Bf 109와 RAF의 스핏파이어는
숙명의 대결을 펼칩니다. 전투의 결과는 독일의 패배였지만 이 두 전투기 중에서
누가 더 뛰어난 전투기인가는 쉽게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두 전투기들은 당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전투기들이었습니다.)
동시에 Bf 109E에 무장된 기관포의 위력은 기관총만 보유한 스핏파이어 Mk II A형까지는 화력의 열세를 겪게 합니다. 왜냐하면 Mk II의 A형까지는 주익에 총 8정의 7.7mm 기관총으로 무장되어 있었는데 막상 공중전을 하면서 급강하로 공격하는 Bf 109가 발사한 한두발의 기관포탄이 기체에 명중하는 경우 스핏파이어는 곧바로 격추되버리지만 무려 8정의 기관총이 발사하는 탄환을 제법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Bf 109E는 쉽게 격추되지 않는 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곤 하였습니다. 이문제 Mk II B형부터 주익에 20mm 히스파노 기관포 2문을 4정의 7.7mm 기관총과 함께 장착하면서 Bf 109E와의 화력의 열세를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스핏파이어 주익에 총 8정이 장착된 브라우닝 기관총)
(스핏파이어의 화력의 열세를 해결한 히스파노 20mm 기관포)
(스핏파이어 Mk.II B형부터 위에 도면에서 보는 바와 같이
좌우 주익에 각각 1문의 기관포와 2정의 기관총이 장착되어
총 2문의 기관포와 4정의 기관총이 장착됩니다. 사진은
스핏파이어 주익에 장착된 기관포의 모습)
한편 이미 Bf 109 스토리에서 언급했듯이 유럽 대륙에서 바다 건너온 Bf 109E의 경우 항속 거리가 짧은 탓에 공중전을 벌일 시간이 불과 10여분밖에 안될 정도로 극심한 연료 부족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실제 성능을 떠나서 이 약점이야말로 수많은 Bf 109E를 연료가 바닥 나서 영국 해안에 추락하든가 더욱 끔찍한 상황은 바닷물 속에 추락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1940년 영국 서섹스 지방에 추락한 Bf 109E 전투기를 신기한 듯 구경하고 있는 주민들)
즉,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Bf 109E는 극히 한정된 연료를 걱정하면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영국 공군과 교전을 할 수 없을 뿐더러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호위해야 하는 폭격기들을 제대로 보호하는 것도 무척 힘겨운 일이었습니다. 이런 Bf 109E의 약점을 알아차린 RAF의 전투기들은 Bf 109E가 귀환할 연료만 간신히 남았을 정도의 타이밍에 공격을 시작해서 루프트바페 조종사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곤 하였습니다.
(스핏파이어의 조종석, 햇빛을 사용한 조준경의 모습이 보입니다.)
도버 해엽을 건너 날아온 Bf 109의 주요 임무는 함께 날아와서 영국에 폭격을 가하게 될 루프트바페의 폭격기 편대를 호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발견 즉시 폭격기들을 격추시키기 위해서 출격한 RAF의 스핏파이어 Mk.1과 Mk.2 그리고 호커 허리케인을 상대로 공중전이 시작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Bf 109를 상대하는 것은 주로 스핏파이어들이었고 허리케인은 그 사이에 폭격기들을 공격하여 격추시키는 전술이었습니다. 이유는 당연히 성능적으로 Bf 109에 비해서 열세인 허리케인이 폭격기 격추를 담당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영국 본토 항공전은 루프트바페의 폭격이 사실상 한풀 꺾인 1940년 10월말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불과 3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영국 상공에서 벌어진 대규모 공중전은 현대에 이르기 까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하늘에서 벌어진 살육전이었고 아래 한국 위키피디아 백과사전에 나온 영국 본토 항공전의 전투 규모와 피해 상황을 보더라도 얼마나 엄청난 상황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영국측 전투기와 폭격기의 피해 규모가 독일측보다 큰 이유는 루프트바페가 영국 공군 비행장을 공격하여 이륙도 하지 못하고 활주로나 격납고에 대기 중이던 기체들을 파괴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슈투카의 공격으로 직격탄을 맞은 영국 비행기지의 건물 속에 있던 수십명의 영국 조종사들이 몰살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스핏파이어 Mk. V (1941년~1942년)
영국 본토 항공전이 영국의 승리로 끝나갈 무렵부터 영국은 독일이 영국에게 했던 것처럼 독일에 대한 폭격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미 독일에게 점령된 프랑스 상공에서는 독일 치하에 프랑스 지역을 폭격하는 영국공군(RAF) 전투기들과 나치 독일의 루프트바페 전투기들 간에 공중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1940년 8월부터 시작되었던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Bf 109E와 스핏파이어 Mk.I/Mk.II의 대결이었다면 1941년 프랑스 상공에서는 Bf 109F가 등장하게 됩니다. 109E에 비해서 다시 한번 성능이 향상된 109F는 신형 엔진 적용으로 속도가 향상되었는데 RAF는 이런 달라진 성능의 109F를 보고 놀라서 스핏파이어 제작사인 슈퍼마린社에 스핏파이어의 성능 향상을 급히 요구하게 됩니다.
(스핏파이어 Mk.V의 가장 큰 변화는 멀린 45 엔진 탑재로 Bf 109F와의 성능에서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등장한 것이 스핏파이어 Mk.V입니다. Mk. V는 1,440마력의 롤스로이스 멀린 45 엔진을 탑재하여 Bf 109F와 대등한 성능을 갖게 됩니다. 무장은 Mk.. II B형과 마찬가지로 히스파노 20mm 기관포 2문과 브라우닝 기관총 4정으로 무장되었습니다. 이제는 Bf 109에 비해서 더 강혁한 무장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영국과 독일의 항공전은 몰타 섬을 둘러싼 공방전과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옮겨져서 진행되었습니다. 총 생산대수 6,479대의 Mk. V는 스핏파이어 기종 중에서 가장 많은 숫자가 생산되었던 버전으로 전쟁 중반에 RAF의 주력 전투기로써 활약을 합니다. (여전히 허리케인 전투기도 함께 전투에 임하였지만 1년 전에 스핏파이어의 생산성이 극히 저조한 이유로 Bf 109와 대비해 성능이 열세였던 허리케인이 RAF의 주종을 이루었던 것과 달리 이제는 충분한 스핏파이어의 공급으로 RAF의 상황이 훨씬 더 개선된 셈이었습니다.
(1940년 6월~1942년 11월까지 지중해 한복판에 떠있던 몰타 섬을 놓고 추축국과 영국 공군간에 벌어진 공방전은
2차대전 공중전 역사에서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 다음으로 큰 의미를 갖는 명승부입니다. 다음 글은 몰타 공방전
에 등장한 스핏파이어 Mk.V의 활약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사진은 몰타 전투 당시 RAF 스핏파이어 Mk.V 편대)
첫댓글 오늘도 흥미진진한 이야기였습니다. 글 서두의 2차대전 4대 프롭기 일러스트를 보면서 언젠가는 이 녀석들을 개인 플젝으로 한번씩은 만들어야 할 것 같은 숙명을 느끼게되네요. ㅎㅎ
다음글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전 프롭기 중에서 선이 가장 '아름다운' 기체가 스핏파이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종합 선물 상자 같이 풍부한 형님 글들은 항상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한 것 같아요. *^^*
(제 스핏파이어 사진이 다른 분들과 같이 떡하니 자리 잡는 다는 것이 민망할 따름입니다. ^^;)
원 천만의 말씀! JLPicard님의 작품 항상 황홀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는 1인입니다! 제가 말이죠!
제가 카페만들고 후회하지 않은것중에 한가지가 형님께
게시판 하나를 그냥내드린 사건입니다.
정말잘한일중에 하나 입니다
덕분에 제가 취미 활동이 더 보람있어졌지요.
자칫 아무런 생각없이 모델만 만들고 지나가기 쉬운데 따블오남편님 덕분에 역사를 아는 모델러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아이고. 제가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셔서 더 감사하지요!
형님글 읽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모랐네요.
재미있는 글로 일주일을 시작하니 좋네요, 다음글인 몰타공방전 무척 기대 됩니다. ^^
감사합니다. 몰타 공방전 내용 하나만 놓고도 너무 장황한 이야기라서 이걸 스핏파이어 이야기에 넣어야 할까 따로 얘기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스핏파이어 이야기에서는 간단하게만 설명하고 넘어가고, 아예 따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지금 만들지 못하고 책장위에 올려져 있는 스핏파이어가 울고 있습니다. 취미에 이리 무한한 지식을 제공해 주셔서 그저 감사 드립니다. 우리카페는 김작가님때문에 수준이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응원 큰힘이 됩니다.
모형도 멋지지만 실물사진이 더 멋지내요. 생각한거보다 화려하내요
아름다운 전투기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허리케인은 싼티 나는 디자인이지요.
매우 흥미있고 유익한 글 잘 보았습니다.
그럼 2편 보러 갑니다....감사합니다.^^*
3편도 커밍 쑨!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