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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및 자료실 스크랩 東漢에서 西晉시대 서예 미학 사상의 개황
청운 추천 0 조회 35 09.08.03 15: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1편 중국 서예 미학 사상의 탄생과 자각

제1장 法象을 숭상한 東漢에서 西晉시대의 서예 미학 사상

제1절 東漢에서 西晉시대 서예 미학 사상의 개황

한(漢)나라 시대는 춘추전국(春秋戰國)이나 진(秦)나라 시대와 비교할 때 정치적으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상대적 안정기였다고 할 수 있다. 문화적으로도 유교 문화의 부흥과 함께 여러 방면에서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서예의 영역에서도 새로운 서체가 정립되기도 하고 문자의 사용이 통일되거나 정비되었을 뿐 아니라 창작과 이론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진한(秦漢)을 거치면서 서예는 고급 지식인 계층에서 중시하는 예술의 한 영역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으며 동시에 문자를 기록하는 실용적 차원에서 심미적 감상의 대상으로까지 인식되었다. 서체 변천의 측면에서도 고체(古體)에서 금체(今體)로의 전환인 예변(隸變)이 정립되었다. 예서의 필획 가운데 파책(波磔)의 성분이 증가되었으며 초서가 성숙하고 해서와 행서의 출현하는 등 서예는 다양하면서도 급속하게 발전하였을 뿐 아니라 서예의 심미적 가치도 중시되었다.

서예 미학 사상은 서체와 서예 창작의 급속한 발전과 더불어 성숙하였으며 동시에 당시의 학술과 문예 미학의 성숙과 함께 발전하였다. 학술과 문예 미학 가운데 서예 미학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양웅(揚雄)의『법언(法言)』과 허신(許愼)의『설문해자(說文解字)』에 나타나 있는 미학 사상이다.『법언』과『설문해자』는 본래 서론 저술은 아니지만 서예의 미학 이론이 정식으로 탄생하기 이전의 서예 미학 사상을 유추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양웅은『법언(法言)․문신(問神)』에서 ‘언(言)’과 ‘서(書)’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言’은 마음의 소리이고, ‘書’는 마음의 그림이다.”라고 하여 음성 언어인 ‘言’과 문자 언어인 ‘書’의 심미적 특징을 분석하였다. 여기서 양웅이 언급한 ‘書’는 서예의 개념이 아니라 ‘言’ 즉 ‘말’과 상대되는 ‘글’로서 문자를 조합하여 뜻을 표현하는 문장을 말한다. 청(淸)나라 시대의 유희재(劉熙載)가 “양자(揚子)가 ‘書’를 마음의 그림이라고 한 것처럼 서예라는 것은 마음의 학문이다.”라 한 것과 같이 양웅의 ‘심화(心畵)’론은 비록 서예 미학 이론의 문장은 아니지만 후대의 서예 미학 이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역대 서예 미학의 중요한 논점 가운데 하나인 작가의 개성과 서풍과의 주관적 관계를 다루는 ‘신채(神彩)’ 미학의 이론은 양웅의 ‘심화(心畵)’론을 바탕으로 한다.

또한 허신은『설문해자(說文解字)․서(敍)』에서 한자의 탄생이 자연 만물의 형상을 근본으로 한다는 ‘상형(象形)’의 관점을 기초로 “서자여야(書者如也)”라는 학술 관점을 제시하였다. 청나라 시대의 문자학자인 단옥재(段玉裁)가『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에서 “‘여(如)’라는 것은 그 사물의 형태이다. ……각각의 문자는 모두 그 사물의 형상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를 근거로 하면 허신이 ‘書’를 ‘如’라고 한 것은 문자 탄생의 ‘상형(象形)’ 관점을 표현한 것으로 한자는 곧 사물의 모양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양웅의 ‘심화(心畵)’ 미학과 허신의 ‘상형(象形)’ 사상은 역대의 서예 미학 이론이 중점적으로 토론한 서예의 ‘표정(表情)’ 미학과 ‘조형(造形)’ 미학 사상의 근원으로 매우 큰 의의가 있다.

중국의 서예 미학은 학술 사상과 문예 미학의 성숙과 동시에 서체의 변천과 함께 발전하여 전서와 예서가 완성되고 초서에 대하여 새로운 심미적 인식이 싹트는 것과 동시에 탄생하였다. 동한(東漢)시대의 서예가들은 초서에 대하여 풍부한 예술적 매력을 느낀 것과 동시에 서예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을 달리하여 서예를 예술의 한 영역으로 조금씩 자각하기 시작하였다. 현존하는 최초의 서예 이론으로 알려지고 있는 최원(崔瑗)의『초서세(草書勢)』는 바로 이와 같이 초서에 대한 예술적 자각을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다. 그 뒤를 이어 저술된 조일(趙壹)의『비초서(非草書)』는 당시 사람들이 초서의 창작에 열광적으로 심취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초서의 예술성에 푹 빠져 있었음을 잘 대변하고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하여 당시 서학자들이 문자의 기록이라는 서예의 실용적 가치에서 예술성의 표현이라는 서예의 예술적 가치를 중시하고 있으며 서예 미학에 대한 매우 급속한 인식의 전환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예에 대한 예술적 인식과 미학 사상의 성숙은 많은 서론 저술이 탄생하는 동기가 되었으며 동시에 서예 미학이 발전하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동한(東漢)의 중기까지는 진(秦)나라 시대 이전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시대이었으나 한(漢)나라 말기와 삼국(三國)시대는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 이후 중국 역사상 정치는 물론 사회적으로 가장 혼란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이합집산(離合集散)이 매우 격렬한 시대였던 반면 문화와 사상적으로는 춘추전국시대에 버금가리만큼 활발한 활동이 전개된 시대였다. 사상과 문화 전반에 걸친 문예 부흥은 서예의 창작과 미학 사상의 성숙에도 직접적이 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며 많은 서예 이론 저술이 탄생하였다.

한위(漢魏)시대의 서론으로는 최원(崔瑗)의『초서세(草書勢)』를 비롯하여 조일(趙壹)의『비초서(非草書)』와 채옹(蔡邕)의『구세(九勢)』,『필론(筆論)』,『전세(篆勢)』등과 종요(鍾繇)의 ‘유미론(流美論)’, 황상(皇象)의 ‘일예론(逸豫論)’ 등이 있다. 서진(西晉)시대의 서예 이론으로는 성공수(成公綏)의『예서체(隸書體)』, 삭정(索靖)의『초서세(草書勢)』, 위항(衛恒)의『사체서세(四體書勢)』, 양천(楊泉)의『예서부(隸書賦)』, 유소(劉劭)의『비백세(飛白勢)』등이 저술되었다. 이와 같이 많은 서론이 탄생한 것은 당시의 서학자들이 서예를 예술의 한 영역으로 자각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과 동시에 서예 미학이 자각기(自覺期)에 진입하였음을 상징한다.『초서세(草書勢)』,『전세(篆勢)』,『구세(九勢)』,『초서세(草書勢)』,『자세(字勢)』등의 제목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듯이 한위(漢魏)와 서진(西晉)시대의 서론에서 집중적으로 이야기한 것은 ‘서세론(書勢論)’이다. 당시의 서학자들은 서예와 자연 만물의 관계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토론하였다. 그들은 서체의 심미적 범주를 천지 만물의 형상과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동태적 심미 정수에서 찾았다. 이는 사물의 형태에 내재된 미학을 추구한 ‘법상(法象)’ 미학을 서예 창작의 근본으로 이해한 미학 사상이다. ‘법상(法象)’은 창작 주체가 인식한 자연 만물의 형상에 내재된 심미적 의의를 체현할 때 비로소 미학적 가치가 부여된다는 것을 주장한 미학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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