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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等山 元曉寺
광주동구 숲 문화재 해설가 최 병 남
元曉庵 重建記
원효사는 무등산 북쪽 의상봉을 마주한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원효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기록으로는 1637년 인조 15년의 佛像記,
1641년 인조 19년 의 법당중창기,
1847년 헌종 13년에 기록된 원효암중건기,
1894년 고종 31년의 원효암 중수상량문 등에 비교적 자세한 내용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여기에 원효암 중건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아래는 조선사찰자료, 조선총독부 간 1918년 상권에 나온 원효암 중건기. 서석산 북쪽에 원효암이 있으니 이는 일찍이 신라의 국사 원효스님이 산자수려함을 사랑하여 암자를 세우고 지내셨으므로 원효암이라 이름한 것이다. 창설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法興王 재위 514년~540년, 智證王, 재위500~514년 양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서석은 호남의 명산이요, 원효사는 서석의 고찰이다. 신라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천백여 년 동안 무릇 몇 차례에 중수했는지 알 수 없으나 숭정병자崇幀丙子, 인조14년, 1636년에 사찰이 노후하였으므로 비구 新元스님이 발원하여 중수하였으며 그로부터 50년 뒤에 信玉스님과 정식淨式 스님이 기와를 보수하였다. 正祖 己酉13년,1789년에 會雲스님(원효사에 회운당 부도가 있다)이 선방을 중창하고 임술년 순조 2년 1802년에 법당을 중창하였다. 純祖신묘辛卯31년 1831년에 회운의 제자 乃圓스님과 義寬 스님이 서둘러 중수함으로써낡은 서까래와 문지방이 복구되고 퇴락한 단청이 다시 보기 좋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스님들의 공임과 동시에 선문을 빛나게 한 일이라 할 것이다.
생각컨대 이와같은 勝地에 이 암자가 있은 뒤로부터 여러차례 중수를 거듭해왔으나 사적事蹟을 전하지 못하여 인멸되어 버린다면 후세 사람들이 지금의 일을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니 마치 이는 사람이 옛날 일을 모르는 것과 같으므로 이러한 사실을 기록해 두는 것이 헛된 일은 아닐 것이다. 丁未년憲宗13년 1847년에 내원스님이 칠성전을 새로 짓고 전후 사적과 아울러 重建記文을 나에게 청하여 왔는데 그가 그의 스승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가상하므로 졸렬함을 무릅쓰고 이 기문을 씀. 이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원효국사가 산자수려한 이곳에 암자를 세워 지냈으므로 절 이름을 원효암이라 했고, 창건 연대는 아마도 신라 지증왕 200-514년, 법흥왕 514-540년의 양 년대에 세워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원효대사의 실제 생존 연대는 이보다 약1백년 후(617 - 686년)가 됨으로 위의 지증, 법흥500-540년 양 왕대의 창건설은 시기가 맞지 않는다.
이 밖에 원효사의 창건 시기에 관하여 고승 대덕을 추앙한 나머지 화엄종의 한 명승이 고려 충숙왕 1314년 - 1339년 에 무등산을 찾아 여기에 절을 짓고 원효대사의 이름을 따서 원효암이라고 하였다는 설. 光州市史, 1915년과 충숙왕 때의 중건설이 있으나 1980년 6월에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 등으로 비추어 볼 때 창건 시기를 통일신라 말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따라서 원효사는 통일신라 말기에 소규모 암자로 이루워졌다가 고려 충숙왕 때 규모를 갖춘 사찰로 중건 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정유재란 때 절이 모두 불타버린 것을 증심사를 다시 세운 釋經스님이 1609년 광해군 1년에 직접 기와를 구워 중창 복원하면서 天王門 을 세우고 1636년 인조 14년에 비구 신원스님이 다시 중수를 거듭하였으며,
그로부터 50년 뒤에 信玉스님과 正式스님이 기와를 보수 하였다.
그리고 신원스님이 중수한 이등해인 1637년 9월 인조 15년에 옥견玉堅 스님이 화주승이 되어 32불상을 조성하여 법당에 봉안 했다. 그로부터 약 1백년이 지난 1789년 정조 13년에 會雲大師가 선방을 중창하고 13년 뒤인 1802년 순조 2년에 다시 법당을 중수.
그리고 30년 뒤인 1831년 순조 31년 회운스님의 제자인 乃圓스님과 義寬大師가 힘을 모아 중수를 계속하고 단청까지 완료하였으며, 1847년 헌종 13년에는 내원대사가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함명태선函溟太先 1824-1902년 화순 출신 이 지은 '무진주 무등산원효암 중수상량문'에 의하면1894년 (광서 20년) 7월 학산대사가 관가에 호소하여 백금의 재물을 시주 받았고 고을의 公兄들도 호응하여 승려등과 함께 사찰을 중건하였다고 했다.
이로써 비록 규모는 크지 않지만 비교적 탄탄한 가람으로 조선조 말기를 거쳐1950년 대에 이르렀으며, 한국전쟁으로 원효사가 전소되기 전까지는 이 지방 신도들의 불심으로 건물의 보수를 거듭하면서 절을 유지해온 것이다. 참고로 육당이 '심춘순례'에서 한국전쟁의 전화를 입기 이전 원효사의 모습을 적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법당(대웅전)과 범절凡節이 당당한 사찰의 풍모를 갖추었다.
본존인 석가여래상이 거룩하시고 사자 등에 지운 대법고大法鼓는 다른 데서는 못보던 것임.
대웅전 오른편에 있는 影子殿에는 정면에 달마로부터 원효, 淸虛내지 瑞月까지의 대탱(大幀대정)을 걸고 따로 1774년 영조 50년 에 담양 서봉사에서 옮겨 모신 원효화탱(元曉畵幀화정)을 걸었다. 나한전, 명부전, 선방, 칠성각 같은 것은 다 있고 불상도 볼만하니 그래도 원효의 창사 이래 오랫동안 명찰이던 자취가 남아 있다. 1977년 신법타新法陀 주지스님이 새로 부임해 와 1980년부터 1984년 까지 약 5년에 걸쳐 현재의 대웅전을 비롯하여 지장전, 요사채 등 3동을 중창 복원하였고 1989년 현지스님이 부임해 와 원효대사의 영정을 모시는 개산조당, 삼성각, 원효사 출토 유물을 보존할 성보각, 누각(무등각)등이 신축되었다.
또 요사채인 신검당은 2층 현대식 건물로 지어졌으며 그밖에 종각, 수각, 봉향각, 5층 석탑 석등이 건립되어 새로운 면모를 갖추었다.
元曉寺의 遺物
원효대사의 원효사 창건이나 창건연대를 뒷받침할 만한 공증자료는 없다. 그러나 최근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어 원효사의 옛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불, 기와조각이 발견되었고, 그밖에 고려시대 말 조선 초기로 추정되는 부도와 조선 후기에 조성된 부도, 그리고, 강희년명(康熙年銘)의 범종, 그밖에 석탑조각 등이 여기저기에 보임. 또 1980년 5월 대웅전을 해체 복원하기 위하여 그 터를 정리하던 중 뜻밖에 승방을 일렬로 배치하였고, 대웅전 앞 가운데 뜰의 남북에 지장전과 요사채(無等禪院)를 배치하였는데, 요사채 뒤의 동북쪽에도 또 하나의 승방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 전각들은 대부분 1954년에서 1960년 또는 1980년을 전후하여 세워진 건물들이다. 원효사의 출토유물 가운데에는 불상류가 가장 많은데 금동불과 청동불이 12점, 소조불(塑造佛, 흙으로 만든 부처) 파편은 무려 200여 점이 쏟아져 나와 우리나라 소조불 편년(編年)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뿐만 아리라 쌍룡문동경(雙龍文銅鏡) 및 소문동경(素文銅鏡)과 더불어 수많은 도자기조각, 기와조각이 출토되어 원효사의 지난 역사는 물론 우리나라 불교미술 연구에 많은 보탬이 됨.
더구나 출토된 소조불 머리의 모양은 일본나라(奈良)의 아스카사 (飛鳥寺) 에서 발굴된 소조불 머리의 모양과 거의 흡사하여 나라박불관의 요청을 일본에서 해외전시까지 하였다.
이에 전라남도에서는 1985년 2월 25일 원효사의 출토유물 가운데 보존 상태가 양호한 금동불 및 청동불 12점과 불상편년에 크게 도움이 될만한 소조불 머리 18점, 그리고 銅鏡 2점을 포함한 총 32점을 전라남도 지정문화재 제 100호로 지정하였는데 다시 광주시로 이관되어 유형문화재 제 8호로 지정되었다. 불상들은 대부분 고려시대의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이 가운데 몇 구의 금동불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조사되어 매우 귀중한 유물로 평가 되기도 하였다. 그밖에 원효사 발굴조사를 통해 발견된 통일신라에 고려, 조선시대에 걸치는 기와조각과 '元曉寺' 銘文이 보이는 조선 초기의 명문 기와조각들은 절의 역사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浮屠
원효사 경내에는 모두 4기의 浮屠가 있다. 그중 1960년재의 春谷居士 宋和植의 부도를
제외하고는 고려 말에서 조선조에 걸쳐 조성된 것이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부도는 법당 터에 출토된 유물을 빼놓고는 가장 오래된 유물로써 사찰 경내에서 동북쪽에 있다.
東浮屠
전체 양식을 보면 전래의 팔각 圓堂型으로 기단과 탑신, 지붕돌을 모두 갖춤. 총높이가 201cm로 기단부는 상, 중, 하대로 이루어졌는데 원형의 상대석은 양련대로 8잎의 앙련을 2중으로 둘렀다. 중대석은 8각인데 조각이 매우 장식적이면서 화려하고 그 표현기법이 특이하다. 하대석은 8각 복련대와 방형지대석으로 나누어지는데 지대석 위에는 네마리의 사자상을 조각하였다. 탑신은 엔타시스(배흘림)를 한 8각형이고 지붕돌은 아랫면에 副椽(부연)을 나타내고 윗면은 내림마루가 보이며 기왓골을 선명하게 나타냈다. 또 귀꽃에는 용, 다람쥐, 비둘기, 두꺼비, 거북이 등을 조각하였는데 마치 살아 움직이는 동물들을 보는 것 같아 우주만물이 허공에 떠있는 듯한 느낌이다. 특히 이 부도에서 주목되는 것은 기단부 중석의 각 4면에 새긴 연꽃무늬로 정면에 보이는 연꽃은 이제 막 피려는 찰라에 있고 그 다음 면에서는 약간 더 만개한 상태이며, 뒷면으로 돌아가서는 연꽃이 활짝 피는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연꽃이 피어가는 과정을 통해 온 우주만물의 순리를 깨닫게 하고 한 인간이 각고의 수도로써 오도의 경지에 접어들어 열반에까지 도달하는 행로를 침묵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조성시기는 조선초기로 추정된다.
元曉國師塔과 會雲堂 浮屠
다음 2기의 부도는 원효사로 들어가는 입구 계단을 미처 못가서 왼쪽의 언덕 위에 있다. 이 부도는 원래 법당 오른쪽(向左)으로 약 150m 떨어진 도로가에 있었는데 사찰을 복원하면서 현 위치로 옮김. 이들 부도는 모두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부도 정면에 元曉國師와 會雲堂이라는 銘文 字徑 7cm이 음각되었다. 높이는 원효국사 부도가 130cm, 회운당 부도는 115cm이다. 2기 모두 자연석을 지대석을 깔고 종 모양의 탑신 위에 1석으로 보주만을 조각한 지극히 형식화된 작품이다. 회운당 스님은 1789년정조 13년에 원효사의 선방을 건립하고 1802년 순조 2년에 대웅전을 중창한 분으로 정확한 생몰년대는 알 수 없으나 18세기 말에서 19새기 초반에 원효사에 주석했던 스님인 것 같다. 원효국사의 부도는 그 양식으로 보아 회운당 부도를 조성하면서 원효국사를 추모하는 뜻에서 동시에 제작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圓潭和尙塔
원효사의 부도밭 안에 탑비가 하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원담화상탑. 이 탑은 그 외모로 보아 탑비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총높이 166cm로 기단은 부도에서처럼 대좌와 둥근 중석을 놓고 그 위로 앙련석을 올려놓았으나, 장식은 거의 없다. 그 위에 탑신과 팔작지붕혀의 지붕돌을 올려놓았는데 지붕의 처마 곡선은 날렵하게 치켜 올려졌다. 비신 앞면의 중앙에 '圓潭和尙塔, 字徑 13cm'이라 새겨졌고 그 좌우에는 '削髮本寺 元曉遺墟 受法會雲 圓潭承勳 道旣超 蹟則然 塔斯訖難結' 이라 새겨져 있다. 오른쪽(向左) 모서리에 崇禎記元後5丁卯 11월 일 이란 건립 년대를 새겼는데 이때는 1927년임을 알 수 있다. 원담화상은 원효사를 중창한 회운대사의 법을 받은 제자로 1831년 (순조31년) 義寬大師와 함께 원효사를 중창하고 단청까지 완료하였던 내원스님을 가리키며 원담은 그의 호이다. 원담대사는 선사로서 당대에 宗風을 떨쳤던 스님이라 여겨진다. 대흥사의 13대 종사이며 선암사에서 크게 정진하여 구름 같이 모여든 제자들에게 추앙을 받았던 상월 대사의 5세 법손임. 그의 재자로는풍곡, 덕인의 두 스님이 있었고, 그 밑으로 함명태선 등의 스님을 두었던 대선객(큰스님)이었다. 이 원담화상탑은 원효사에 남은 석조물로는 유일하게 조성시기가 확실한 유물이며, 더욱이 원효사를 중창한 회운당 법손의 유물로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
梵鐘
이 범종은 원효사 대웅전 안에 보관되어 오다가 현재 요사채인 무등선원에 옮겨져 있다. 최근에는 새로운 종을 만들어 사용하고 이 범종은 실제로 사용하지 않는다. 종의 형태는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형식으로 높이 86cm, 지름63cm, 몸통 73cm로 윗부분에는 꼭지통이 없이 두마리이 용이 서로 얽힌 듯한 고리를 하고 어깨에는 梵字가 양각됨.
몸통 중앙으로 내려와 4면에 보살상을 새기고, 그 사이에는 네모진 乳廓에 9개의 연꽃 봉오리가 돌출해 있으며 몸통 중앙에 주조 연대와 소속 사찰을 새겨놓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金善奉 蘇X昌 性勒 XX性宗比丘宗忍別座善行 信彦 供養主 可勒宗福 康熙 49年 강寅 四月 日玉訓 秋月山 萬壽寺 崔渚斤者大鐘鑄成也 匠人秩金成元 위 기록에 의하면 1710년 숙종 36년, 庚寅에 추월산 만수사에서 性宗비구들이 이 범종을 주성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재 광주와 전라남도 내에 전해지고 있는 범종 가운데 대흥사의 탑신사종이 보물 제 88호로 지정되었고, 곡성 태안사 天順銘 銅鐘1581년, 고흥 능가사 범종1608년, 담양 용흥사 順治 원년명 범종1644, 함평 보광사범종(1767년 추정)이 각 전라남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광주 원효사 범종은 광주시로 이관되어 유형문화재 제 15호로 지정되었다. 지금까지 광주, 전남지방의 범종으로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은 모두 22개가 확인 되었다.
石塔, 石燈 破片들
현재 원효사 경내에는 석탑의 지붕돌 조각과 석등 대좌로 보이는 석조물이 남아 있다. 우선 지붕돌 조각을 보면 층급받침이 4단이며 처마 곡선의 반전이 심하지 않고 물받이면의 경사도 밋밋하여 통일신라 말 혹은 고려 초기에 볼 수 있는 양식으로 보여 1980년 대웅전 복원 때 출토된 유물들과 함께 주목되고 있다. 또한 석등 대좌 조각에서도 비록 규모는 작으나 복련장식 등으로 보아 고려 초기의 유물로 추정되고 있어 앞으로 원효사의 연혁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라 하겠다.
吳之湖 탱화
원효사에는 화순, 동복 출신 서양화의 거봉인 吳之湖가 그린 탱화=佛畵=禎畵가 있다. 오지호는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원효사의 복원불사가 진행되던 1954년 독실한 불교신자인 그의 장모(金桂)의 간청으로 이 불화를 그렸는데 가로 198cm, 세로 152cm의 거작이다.
가운데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뒤쪽에는 부처님의 10대 제자들을 그린 전형적인 불화이다. 명주베 바탕에 식물성 특수 안료와 아교를 섞은 물감을 사용한 작품으로 서양화가인 오지호 특유의 강렬한 색조가 나타나 있는 그림이다. 그는 불교도는 아니지만 언제나 작업에 앞서 향을 피우고 경건한 예를 갖추어 3개월여 동안 정성을 다하여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石造地臟譜薩立像
현재 지장전 뒤쪽의 축대 위에 불상과 광배가 1매의 돌로 조성된 석조보살입상이 1구 세워져 있는데, 총높이 1.24m, 불상높이 1m, 최대폭 0.5m의 불상이다.
현재는 자연 암반 위에 올려놓았는데 곁에는 이전에 대좌로 쓰였던 네모형으로 된 4단의 층급받침을 갖는 석탑의 屋蓋石옥개석이 놓여 있다. 불상의 세부를 보면 삭발의 머리와 왼손에 받쳐든 寶珠 그리고 오른손에 쥐고 있는 戒杖계장으로 보아 지장보살로 보인다.
법의는 통견인데 X자 모양으로 묶인 매듭이 보인다. 양팔에 걸쳐서 내려뜨린 옷자락은 매우 단정하게 대칭을 이루나 비교적 무겁게 느껴진다. 광배는 舟形주형이며 원형의 굵은 띠와 같은 頭光을 돌렸다. 주형광배의 상단은 머리 부분의 조각이 깊이 앞을 굽은 모습이다.
몸에 비해 다소 작은 머리와 찡그린 상호, 가냘픈 어깨와 무겁게 처리된 衣習의 표현 등으로 보아 근래 에 조성된 작품임을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
금동비로자나불
이 금동비로자나불은 1954년 원효사 대웅전을 중수할 때 주춧돌 밑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 뒤 이 금동불은 대웅전에 오랫동안 봉안되어 오다가 어느 개인집을 전전하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광주시립 박불관으로 옮겨져 보관되어 왔었는데 1974년 7월 15일 아깝게도 도난당하고 말았다. 불상의 양식을 보면 나발의 머리에 육계가 약간 솟아 있고 얼굴은 원만상인테 얼굴 표정이 좀 굳은 상태이다. 법의는 양 어깨를 덮었으며 가슴 밑에서 V자형으로 세겹이 겹쳐 있고 손가락은 왼손의 엄지를 오른손이 쥐고 있는 智拳印을 맺(結)음.
가부좌한 다리가 좁아져 어색하고 대좌는 민무늬인 겹연꽃이 새겨 졌다. 등쪽에 光背를 부착했던 흔적이 보인다. 이 불상은 얼굴에 비해 어깨가 좁아지고 목이 짧아 균형이 잡히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조성 연대는 고려 하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