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11 강진 다산초당
▶다산과 혜장
아암 혜장은 다산 정약용, 대흥사 동다송의 초의선사와 차에 의해 깊은 인연을 맺은 선사로 다산이 혜장에게 차를 구걸하는 ‘걸명소’라는 시로 널리 알려졌다.
다산은 강진에 유배되던 당시 백련사의 주지 혜장스님과 수시로 만나 차를 즐기며 인간적인 대화에서부터 학문적인 토론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또한 혜장은 다산에게 경학을 배우고 차를 권유하여 다산으로 하여금 차 생활을 알게 하였다.
다산과 아암은 나이가 열 살이나 차이 나고 유가의 경학자와 불가의 수도승이라는 입장 차이도 있었지만 나이와 종교의 벽을 훌쩍 뛰어넘어 진솔한 만남을 이어갔다.
●걸명소
나그네旅人가 요사이 차를 탐식貪食하고, 겸하여 건강의 약藥으로 충당합니다.
독서 중의 묘한 버릇은 육우陸羽의 다경茶經 삼편을 완전히 통달하였고,
병 중에도 건강한 누에처럼 드디어 노동盧同의 일곱잔 차七碗을 다 마셨습니다.
비록 정척기精瘠氣가 침범하였으나 기모경의 말은 잊지 아니하고,
옹파반壅破瘢은 녹였으나 마침내 이찬황李贊皇의 버릇은 남았습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욕심이 없을 때, 아침 햇살이 처음 빛날 때,
흰 구름이 맑게 갠 하늘에 둥실둥실 떠 있을 때,
낮잠에서 처음 깨었을 때, 밝은 달이 푸른 시냇물에 맑게 비출 때,
작은 구슬같은 눈발이 날릴 때
산사에서 등불 켜고 자순차紫筍茶의 향기를 맡았고, 활활타는 불活火로
새 샘新泉의 물을 끓이어 들여서, 상서로운 맛白兎을 보았다.
꽃 무늬 자기花瓷와 홍옥紅玉의 화려함은 비록 로공潞公이 무색했고,
돌솥에 푸른 연기가 담소 澹素하기가 한비자韓非子와 같구나.
해안蟹眼과 어안 魚眼은 옛 사람이 무척 좋아 하였고,
용단龍團과 봉단 鳳團은 궁중에서 보배스레 나눠줌을 이미 다 했다.
이에 채신采薪의 병이 있어 걸명乞茗의 정을 편다.
내가 듣건데 고해苦海의 좋은 양식은 시주의 보시가 가장 중하고,
명산名山의 차는 초단艸端의 으뜸을 가만히 보낸다고 하였다.
마땅히 내가 목마르게 바라는 것을 생각해서 은혜 베풀기를 아끼지 마시오.
▶노동盧仝의 칠완다가七碗茶歌
첫째 한잔은 목과 입술을 적시고
둘째잔은 혼자의 번민과 외로운 고독을 없앤다.
세째잔은 메마른 창자 살펴주니 오직 책 5천권의 문장이 떠오르네.
(세째잔에 마른 창자에 담겨 있던 쓸데없는 지식이 흩어지며)
네째잔은 몸속에 깊이 박혀있던 한평생 편평치 않아 불편한 것 다 털구멍으로 흩어진다.
다섯째잔은 살과 뼈을 맑게하며
여섯째잔은 신선과 바로 통하여 맑은 바람이 솔솔 일어남을 느낀다.
일곱째잔은 마시지도 않았는데, 느끼노니 두 겨드랑이에 맑은 바람이 솔솔 일어나네
●다산 정약용
1762년 영조 38년 남양주 조안면에서 출생.
두물머리가 건너다 보이는 곳에 다산 유적지가 있다. 그가 태어나던 해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다. 조정은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시파(남인)와 반대하는 벽파(노론)로 나뉜다. 시파와 벽파의 싸움은 그후 조선 정치사와 정약용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776년 15세에 결혼. 정조 즉위 후 남인을 등용하면서 아버지가 벼슬을 하게 되자 자주 서울에 드나들게 되었다. 그 무렵부터 매형인 이승훈, 큰형수의 아우인 이벽과 사귀었고 그들을 따라 이가환 등과 교류했다. 이가환은 실학자인 성호 이익의 종손이다. 이익이 남긴 책들을 읽으면서 정약용은 평생을 통해 추구할 학문의 방향과 뜻을 세웠다.
1777년 아버지를 따라 화순, 예천에서 생활
1782년 서울에 정착. 과거 공부와 학문 연구에 몰두
1783년 22세에 소과에 급제. 이 때부터 정조의 총애는 계속된다.
1784년 고향에서 큰형수의 제사를 지내고 서울로 돌아오던 배 안에서 이벽으로부터 처음 천주교에 대하여 듣고 한동안 몰두.
1789년 28세에 대과에 급제.
1794년 33세에 경기도 암행어사를 역임. 조선 말기 하던 농민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목격.
1795년 34세로 동부승지에 오를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는데 그 사이에 정조의 명령으로 배다리를 만들거나 수원성을 설계하고 기중기를 만들어 성 쌓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긴다.
1795년 주문모 신부 밀입국 사건을 계기로 공서파가 정약용을 천주교 관계자라고 탄핵하자 정조는 그를 홍주목에 있는 금정도찰방으로 좌천 피신시킴.
1797년 좌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또다시 비방이 일어 정조에게 자기와 천주교의 관계 시말서를 올리고 사직. 그해 정조는 다시 그를 황해도 곡산 부사로 내보낸다. 2년 가량 곡산 부사로 일하는 동안, 그는 군포를 감하고 호적을 고치고 교육을 일으키는 등 오랫동안 생각해온 바를 실행했다.
1799년 38세에 형조참의를 맡은 것을 마지막으로 그의 벼슬이 끝난다. 다음해 여름, 정조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1801년 순조 즉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 천주교를 빌미로 반대파 숙청 신유박해. 셋째 형 정약종 사형, 둘째 형 정약전 흑산도 귀양, 정약용 장기→강진으로 귀양 동문밖 주막 사의재
1805년 고성암 보은산방
1806년 제자 이청의 집
1808년 다산초당(윤선도의 증손 윤두서의 손녀인 어머니 해남윤씨 일가 윤단의 산정)
여유당전서 집필. 조선 최고의 대학자로 완성.
1818년 유배가 풀려 여유당(고향집의 당호)으로 귀향. 목민심서 등 500여권의 여유당전서 발간
1836년 75세 사망.
●다산초당(사적 제 107호)_초당이 아니고 와당의 아쉬움
다조, 연못, 정석(단산 암각자), 동암, 서암, 천일각
1958년 다산유적보존회 재건. 다산동암은 다산 글씨 집자, 다산초당 보정산방은 추사의 글씨.
▶서암
▶다산초당
▶정석_다산이 직접 쓰고 새겼다. '정약용바위'라 새기고 정을 붙였을 게다.
▶연못_다산이 스스로 파고 꾸몄다.
▶동암_보정산방. '보물같은 정약용 산방'이겠다. 추사의 글씨다.
▶천일각_물론 다 새로 지은 것이다. 그래도 다산이 여기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형 정약전을 그리워했을 모습을 그려본다.
▶해월루
▶다산과 혜장이 수도 없이 걸었을 길을 걷는다.
▶이 큰 상처가 아무는데 얼마나 많은 인고의 세월을 보냈을까...
▶나무 사이로 멀리 보이는 백련사와 차밭, 동백림과 만덕산
▶백련사에서 점심 공양을 하지 않아서 식당을 찾아 헤맸다. 장흥읍사무소 근처 식당을 찾았다. 금고를 식자재 창고로 쓰는 식당이다.
▶정남진 장흥 토요 시장
▶탐진천
▶칠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