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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새 언약의 사역자들
(2) 직임과 그 사역의 일 - ②
<고린도후서 6:1-18>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3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8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11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17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오늘 새 언약의 사역의 일에 대해서 두 번째로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는 말씀을 드리겠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하는 일은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것이다. 원수되어진 세상과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는 화목의 직책을 가진 것이 새 언약의 사역이라는 말씀을 드렸다.
오늘은 두 번째로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면 화목하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어떻게 일을 하느냐의 문제다.
B. 하나님과 함께 일함(하나님 안에서 일함)(고후6:1-13)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는 말은 하나님 안에서 일한다는 말이다. ‘함께’라는 말이 표면적으로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같이 있는 것이 함께이다. 그런데 이런 차원이 아니고, 새 언약 안에서는 ‘안에’라는 뜻이다. 저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모든 언어가 다 그렇듯이 ‘함께’라는 옛 언약 안에서는 표면적으로 공간적이고 시간적이지만 새 언약 안에서는 안으로 들어온다는 뜻이다. 생명의 연합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말은 ‘함께’이지만 내용은 그분 안에서 일한다는 뜻이다.
1) 보다 전진된 사역을 함
우리는 사역도 보다 전진된 사역이 필요하다. 구약의 사역과 신약의 사역을 비교하면 구약의 사역에 비해서 신약의 사역은 보다 전진된 사역이다.
a. 하나님을 위하여(향하여) 일함
하나님을 위하여 일한다는 것과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정도가 다르다. 하나님을 위하여 한다고 할 때는 다소간 거리가 있다. 또 객관적일 수가 있다. 그분을 위해서 내가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 그분을 위해서 내가 충성을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안할 수도 있기 때문에 주권이 그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다.
b. 하나님과 함께(안에서) 일함(은사가 아닌 생명)(갈2:20 참)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고 할 때는 주권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 안에 그분에 내 안에 있기 때문에 주권이 그분에게 있다. 이것은 은사가 아닌 생명이다. 가령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면 은사가 있어서 은사를 통해서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 은사로서 하는 것은 은사가 끝나면 없다. 나는 다시 나이기 때문에 병자를 고쳐서 사역을 했다면 병자 고치는 것이 항상 고쳐지는 것이 아니다. 언제는 고쳐지지만 언제는 안고쳐질 수가 있으므로 나와 별개의 문제다. 내 존재와 내 생명과는 별개의 문제다. 은사로서의 사역은 자기 자신으로서의 사역이 아니고, 선물로 받은 사역이기 때문에 언제 끝날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말은 생명의 문제다.
‘안에서’는 하나 된다는 말이고,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라는 말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말은 아버지와 자기가 하나이니까 ‘위하여’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아버지 안에 있다.
새 언약 안에 온 신약 안에 온 우리는 분명하게 개념을 달리해야 될 것이 시간적이고 공간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에서 생명의 차원으로 연합의 차원으로, 연합이라는 말이 함께 심겨진다는 말이라고 했는데 함께 심겨지고 함께 자란다는 뜻이니까 그런 연합 안에 있는 일이라는 것을 꼭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오늘날 기독교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지금 교회들이 새 언약 안에서 가고 있는 것인지 옛 언약을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인지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보다 전진된 사역이 필요하다. 구약에서 머물 것이 아니라, 구약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 구약에 있었지만 거기서 머물 것이 아니라 보다 전진해야 된다. 초등학교에서 끝낼 것이 아니라 보다 전진하려니까 중학교를 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초등학교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면 중학교를 가야지 초등학교만 붙들고 있으면 안되는 것이다. 우리가 구약 안에서 나온 사람들이니까 이제 신약 안으로 들어가야 된다.
보다 전진된 사역이 필요하고, 보다 전진된 믿음이 필요하다. 모든 것이 다 보다 전진된 어떤 세계로 우리가 가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하게 받게 함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받으라는 말이 나온다.
a.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했다. 헛되이 받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헛되이’라는 말은 원래 ‘비었다’는 말이다. 이것을 의미상으로 해석하면 속이 빈 것이니까 ‘어리석다’는 말도 되고 ‘실속이 없다’는 말도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어리석게 받지 말라를 하나님의 은혜를 실속 없이 받지 말라로 말할 수가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어리석게 받는가? 이렇게 생각하겠지만 우리가 구약시대에 받은 은혜와 새 언약 안에서 받은 은혜를 비교하면 구약 안에서는 신약에 비한다면 실속 없는 것이다. 모두 형상이기 때문이다. 물질적이고 시간적이고 공간적이고 역사적인 은혜를 갈구했기 때문에 이것은 새 언약 안에서 보면 실속 없는 것이다. 실재가 없는 것이다.
(1)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중한 은혜를 실속 없는, 어리석은 것으로 받았음
(육신적, 물질적인 것들을 구함)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중한 은혜를 실속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 이스라엘의 문제다.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하나님은 지금 은혜를 베푸실 분인데 백성들이 그릇을 준비하기를 무슨 그릇을 준비했는가 하면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그릇을 준비했다. 그 그릇을 갖고 오니까 무엇을 넣어도 다 물질적인 것이 돼버리는 것이다. 만지기만 하면 금이 되었다는 사람처럼 그릇에 따라서 주신 것이 그릇과 같이 돼버린다. 개에게 밥을 주면 먹고 개고기가 된다. 사람에게 밥을 주면 사람고기가 된다. 그릇이 다르기 때문이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결국 무엇이 문제였는가? 육신적이고 물질적이고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것만 구했기 때문에 그들은 처음에는 되는 것 같았다.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과정 등을 보면 너무나 역력하다.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해방된 것이나 홍해바다를 건너 온 것이나 광야 40년을 지나온 것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생생하다. 너무나 생생했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 사람들은 영원히 거기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주신 이유는 더 전진된 것을 주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으로는 해결이 안된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끄집어 내오고 광야를 지나오고 이스라엘 나라를 건국하면 다 될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은 이스라엘은 망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는 다 망하고 말았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결국 실패한 것이다. 이스라엘 하나님은 보다 전진된 것을 원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새 언약이 필요한 것이다. 새 언약이 없으면 옛 언약은 이미 망한 것이다. 끝난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준 모든 축복은 이미 다 끝나버리고 말았다.
(2) 오늘도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스라엘처럼 받고 있음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도 하나님 백성들이 여전히 구약시대 사람들과 같은 것을 원하고 있다. 이것이 한심한 일이고, 문제는 이것이다. 그들은 그 세대에 그 이상의 계시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지만 지금은 이미 벌써 2천년이 지났다. 새 언약이 온지가 2천년이 지났다. 말씀이 육신이 된지가 이미 2천년이 되었다. 그의 몸인 교회가 나타난 것이 2천년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은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이 꼭 하나님의 은혜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교회를 보아도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물질적이고 육신적이고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다시 말하면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하고도 실패한 그것을 지금도 하고 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에게 주신 그 은혜의 절정은 이스라엘 왕국이다. 아무리 애굽에서 나오고 홍해를 건너오고 별 것을 다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나라가 없었더라면 왕국이 없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마지막 결정체가 왕국인데, 그 왕국이 망해버리고 말았으니까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또 다시 그것을 되풀이 하고 있다. 기독교를 1세기를 지나오면서 이상하게 다시 그런 세계로 빠져 들었다. 그래서 전 세계를 지배하는 종교가 되었다. 캐톨릭은 우주적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왕국을 되풀이 한 것이다. 멸망해버린 이미 망해버린 이스라엘을 되풀이했다. 그래서 모두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에게는 관심이 없는 일이다. 이미 벌써 실험을 다 끝냈다. 멸망 받을 것으로 끝냈다. 아무리 이스라엘에 다윗 같은 왕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왕국은 결국 망할 수밖에 없는 왕국이다. 언제 망해도 망할 왕국이다. 왕들이 잘못하고 백성들이 잘못해서 망했다고 되어있지만 언제든지 망할 수 있는 나라다. 그리고 언젠가는 꼭 한번 망해야 될 나라이다. 그렇지 않으면 더 전진된 은혜를 받을 수가 없다.
이스라엘이 망한 것이 우리에게 복이 된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망하지 않고 지금까지 있었더라면 새 언약이 우리에게 올 수가 없는데, 그들이 망했기 때문에 새 언약이 오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비록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 할지라도 다시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해서는 안되겠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바울의 말은 구약시대 사람들처럼 그렇게 받지 말라,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그렇게 받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고 실속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오늘 전 세계에 있는 모든 교회에게 이것은 아주 놀라운 경고가 아닐 수가 없다. 은혜를 헛되게 받다니. 누가 은혜를 헛되이 받겠는가? 다 은혜를 옳게 받으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했다.
b. 하나님의 은혜는 온전함으로 온전하게 받아야 함
(창조 - 회복 - 완성 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
하나님의 은혜는 온전하다. 불완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는 것으로 끝났다면 그 은혜는 온전치 못하다. 우리가 다시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치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어차피 내가 아무리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축복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것은 없어질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 은혜는 헛되고 마는 것이다. 그 사람은 하나님 은혜로 죽으려다가 살았다고 하더라도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시 죽는다. 그러면 하나님 은혜는 헛되고 만다. 그 사람은 하나님 은혜로 사업이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어느 날 가면 그 물질이 없어질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 은혜가 또 헛되고 만다. 우리 자신에게는 잠시 동안 필요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에게는 모욕적인 것이다. 하나님 은혜를 헛되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온전한 은혜는 온전하게 받아야 된다.
그의 창조와 회복과 완성 안에 계신 하나님은 완성까지 가신 하나님이지 창조만 해놓고 마는 분이 아니다.
우리가 이 은혜라는 문제를 다시 생각해볼 때 구속, 즉 하나님이 우리를 바꾸어주었다, 원 자리로 물러주었다는 것이 구약시대에는 애굽에서 나온 것이다. 애굽에 뭔가를 지불하고 애굽에서 구출해 나온 것이 구속이다. 지금은 애굽에서 나온 것이 구속이 아니다. 내 인생이 자기 위치로 돌아가는 것이 구속이다. 차원이 달라졌다. 옛날식으로 지금도 생각하고 있으면 안된다.
구원은 무엇인가? 그 사람들에게는 홍해바다에서 건져내었을 때가 구원이다. 아말렉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것이 구원이다. 블레셋을 이기게 하신 것이 구원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구원은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차원이 다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과정을 거친 하나님, 삼일 하나님, 우리에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생명이다. 이 생명이 그분의 은혜의 절정이다.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 최종적으로 새 예루살렘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온전한 것이다. 만일 하다가 끝나버렸으면 헛일이다. 노아시대에 홍수가 나서 여덟 식구를 방주를 만들어 구원했지만 그 다음에 죽지 않는가? 다 죽는다. 그 자손들이 모두 퍼져서 무엇을 하는가? 다시 바벨탑을 쌓는다. 그것만이 구원이라면 구원이 헛되고 만다.
만일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이 오늘 우리에게서 완성되지 않으면 모두 헛일이 되고 만다. 타이어를 아무리 좋은 것을 많이 만들어놓으면 무엇 하겠는가? 자동차 공장이 없어져버린다면 타이어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 소용이 없다. 3만 가지의 부품을 만드는 모든 부속품 공장들이 자동차 공장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가 알았던 모든 것이나 받았던 모든 것, 우리 인생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 만일 하나님의 목적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최종적인 완성 안에 들어오지 못한다면 모두 다 헛것이 된다.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잘났느니 못났느니 해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 마지막에 아무것도 되지 않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 폐기처분되고 말 것이다.
구원의 날!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구원의 날이다. 이 구원의 날도 구약시대에 있는 말을 인용한 말이다. 그때 구원의 날이라는 말은 이방으로부터의 구원, 외부의 침략으로부터의 구원이 된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구원의 날은 화목의 날이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날이다. 하나님과 원수되어진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날이다.
은혜의 목표는 무엇인가? 생명나무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다. 연합하는 것이다. 왜 생명나무가 필요한가? 한 생명이라야 화목이 된다. 생명이 다르면 화목이 될 수가 없다. 개와 원숭이 사이를 견원지간(犬猿之間)이라고 하는데, 요즘은 개와 원숭이를 같이 키우면 둘이 친구가 되어 잘 산다. 지난번에 TV를 보니까 둘이 친하게 지내 견원지간이라는 말을 바꾸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개는 개고 원숭이는 원숭이다. 그것은 연합이 아니다. 그것은 미합중국처럼 United다. 함께 심겨지고 함께 자라는 것이 아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와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했다. 말은 구약시대에 있는 말이지만 지금 할 때는 이것이 차원이 달라진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라고 함은 그때는 무엇이었겠는가? 그때는 물질적이고 육신적이고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아니다.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적이다. 새 언약의 은혜는 구약의 은혜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런 시대에 와있는 것이다.
c.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이 받은 만큼 남에게 전가시킴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이 받은 만큼 남에게 전가시킨다. 육신적인 은혜를 받은 사람은 육신적인 은혜를 전가시킬 수밖에 없고, 물질적인 은혜를 받은 사람은 또 그것밖에 전가시킬 수가 없다. 병 고침 받은 사람은 병 고침 받은 것밖에 전가시킬 수가 없다. 받은 대로 밖에는 안된다.
나도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다. 왜냐하면 죽을 형편이 되어서 병원에 갔는데 검사를 해보니 결핵균이 우글우글하다고 한다. 직접도말검사라고 하는데 바로 염색해서 보면 보이는 검사를 말한다. 그 병원에서 제일 심한 기침을 하는 사람이 나였다. 광주기독병원인데 결핵환자만 요양하는 병원이다. 그런데 병원에 가서 약을 쓸 것이 없는 것이다. 이미 집에서 약을 다 썼다. 더 이상 약에 대한 내성이 생겨 쓸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 해 준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냥 침대에 누워있었다. 두달 동안 누워있었는데 균이 안나온다는 것이다. 의심이 되어 하루 종일 담을 모아서 하는 집균검사를 해도 균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결핵균이라는 것이 다른 균처럼 한달이나 두달 만에 없어지는 균이 아니다. 이 균이 구균인데, 달팽이처럼 생겨서 약이 들어오면 쏙 들어가버려 껍데기가 두꺼워 약이 침투를 못하는 것이다. 최소한 1년 산다고 한다. 그래서 결핵에 걸리면 최소한 약을 1년 이상 먹어야 된다고 한다. 이 균이 배가 고파 나올 때까지 약을 먹어야 된다. 이 균이 오므리고 있으면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는다. 약 효과가 안난다. 그런데 어떻게 두달 만에 없어지겠는가? 분명하게 이것은 그렇게 밖에 해석할 수 없다. 그렇지만 내가 만일 그것을 계속 전한다면 혹시 병든 사람에게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하나님 은혜를 온전하게 전하는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내가 전하고 있다면 하나님 은혜를 헛되이 전하는 것이 되고 만다. 내가 보기는 육신적인 것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전할 때는 다른 것을 전해야 되는데 육신적으로 받은 사람은 육신적으로 밖에 전할 수가 없다.
예수님을 바닷가에서 만났던 사람은 여전히 바닷가에서 만난 예수밖에 모르고, 물위로 걸어갈 때 만난 사람은 여전히 물위를 걸어가는 것밖에 모르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던 자리에서 본 사람은 여전히 그 예수밖에 모르고, 사마리아 사람을 이야기할 때 만난 사람은 여전히 그것밖에 모른다. 지금도 예수님을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비유한다. 어떤 사람은 베스다 광야에서 만났으니까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던 기적을 만났다. 지금도 그 예수 그대로다. 왜냐하면 모두 십자가에서 예수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다 헛되이 보았다. 빈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하면 예수는 누구인가? 베스다 광야에서 5천명을 먹인 사람으로 전하게 된다. 예수는 누구인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으로 전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헛되이 하는 것이다. 어리석게 하는 것이고 실속 없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새 언약 안에 있는 이 은혜 안에 들어와야 다른 사람에게 영원한 은혜를 전할 것이다. 새 언약의 은혜는 결국은 새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는 은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의 은혜이기 때문에 씨가 새 예루살렘으로 가도록 된 씨다. 지금 비록 두 잎밖에 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은 배추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비록 두 잎밖에 안되지만 소중하게 생각해야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소중하게 생각해야지 화 한번 내고 나면 없어져버리고 신경질 한번 내고 나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고 누구에게 한번 걸렸더니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가 되면 안되는 것이다. 걸렸던지 말았던지 화가 났던지 말았던지 씨가 심어진 것은 확실하다.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된다. 나도 마찬가지로 처음에 받을 때는 조그마한 씨 하나 받았는데 그 이외에 많은 문제들이 있을 것이다. 무시할 만한 많은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 아무리 무시할만한 많은 문제가 생겨도 씨는 씨다.
우리가 이 씨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된다. 새 언약의 씨, 성육신의 씨, 말씀이 육신이 된 씨, 하나님이 사람이 된 씨, 죽고 다시 산 씨, 이 씨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된다. 이것을 무시하면 안되는 것이다. 이것을 무시한 사람은 농사를 짓지 못한다. 처음에 조그마한 싹이 나면 어설프다. 그리고 벌레가 먹으면 금방 먹어버린다. 큰 배추는 뜯어먹으려면 시간이 걸리지만 작은 것은 붙었다하면 없어져 버린다. 그렇게 무시를 당한다. 볼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무 좋은 것이 없어서 우리가 다 그를 업수이 여겼다. 그렇지만 그것을 누가 소중히 여기느냐에 따라서 가을에 배추를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받은 은혜만큼 전한다.
d. 하나님의 은혜는 이스라엘의 생각을 초월하였음(예수를 주심)
하나님의 은혜는 이스라엘의 생각을 초월하였다. 그들은 생각할 때 왕국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메시아가 오면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엉뚱하게 예수라는 나사렛 사람을 주었다. 다윗이라는 왕 대신에 말을 타고 온 임금 대신에 그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독립 대신에 예수라는 초라한 한 사람을 주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더군다나 십자가에 매달아 놓았다. 이것은 이스라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어제 저녁에 말하던데 모르면 먼저 외우고 이해하자는 식으로 선암기 후이해도 좋은 방법이다. 이스라엘 생각대로 되리라고 생각하여,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을 측량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교회에 대해서도 교회는 이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 우리는 모른다. 초월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 모르기 때문에 교회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어젯밤에 그랬는데 오늘은 어떻게 하실 것인지를 모른다. 어젯밤에는 300도의 기름에 튀겼지만 오늘은 냉장고에 히야시할지 모르는 것이다. 모르니까 그냥 받아들여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사람의 생각으로 예수 믿는 사람은 이래야 돼, 30년 되면 이래야 돼, 20년 되면 이래야 돼, 10년 되면 이래야 돼,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안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스라엘의 생각을 초월했다. 얼마나 이것이 엉뚱한가! 그들의 민족적인 소원은 나라를 다시 얻는 것이다. 망한지가 600~700년이 되었다. 로마의 식민지(속국)가 되었다. 그 속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부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가진 백성, 모세에게 약속했던 그 백성, 다윗을 통해서 다윗의 홀이 영원하리라고 언약했던 그 하나님을 가졌던 백성들이 나라를 잃어버렸으니까 어찌 되겠는가? 언제나 메시아가 와서 하나님의 이 말씀들을 회복해 줄 것인가를 기다리고 있는데, 서른 살 먹은 청년을 보내와서 이것이 대답이라고 하니까 정말 화가 나지 않겠는가? 화나는 것이 당연하다. 예수를 죽이면서 이를 갈았다고 하는데, 당연한 것이다. 알고 보면 공연히 아무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고 자기들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 사람인데 그렇게 이를 갈면서 죽일 일이 있겠는가? 바로 이런 배경 때문이다. 그들은 이를 갈 수밖에 없다. 우리가 너를 기다린 줄 아는가라는 것이다. 너 같은 것을 기다리고 우리가 통곡의 벽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운 줄 아느냐는 것이다. 얼마나 그 사람들은 분노했겠는가? 그렇게 기다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예수를 주신 분이다. 우리가 그렇게 알면 하나님은 엉뚱해도 보통 엉뚱한 것이 아니구나.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구나. 우리가 어리석음을 인간의 생각과 머리로 받아서는 안된다. 받을 수가 없다.
e. 하나님의 은혜는 성육신에서 새 예루살렘까지를 완성하는 하나님의 선물임
(우리와 연합된 하나님 자신)
하나님의 은혜는 성육신에서 새 예루살렘까지를 완성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와 연합된 것은 하나님 자신이다. 이것을 받아야 실속 있게 받는 것이다.
3) 마음을 넓히게 함
다음은 마음을 넓히게 한다. “우리 마음은 넓어졌습니다. ∼여러분도 마음을 넓히십시오.”(고후6:11,13)고 했다. 이 마음은 ‘속(내장)’에서 나온 말이다. 결국 생각이다. 생각을 넓히라. 그러면 좁아지면 어떻게 되는가? 곤경에 처하게 된다. 우리 생각이 좁으면 곤경에 처하게 된다. 사람이 다 곤경에 처하게 되고 번민하고 고뇌하고 탄식하고 참지 못하고 죽을 지경인 것이 왜 그런 줄 아는가? 속이 좁아서다. 다른 것이 아니다. 너희가 너희 사정으로 인해서 좁아졌다는 것이다. 우리가 언제 너희에게 그렇게 했냐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 속사정으로 인해서 좁아졌다는 것이다. 속이 좁으면 세상을 곱빼기로 어렵게 살게 된다. 속이 넓으면 세상에서도 어지간하면 그냥 넘어간다. 속이 좁으면 온갖 것이 다 걸린다. 그러면 곤고해지고 고뇌가 되고 탄식이 오고 번민하게 된다. 이 말의 어원을 찾아가면 ‘한숨 쉰다’는 말이 나온다. 좁다는 말이 한숨 쉰다, 번민한다는 뜻이다. 한숨을 왜 쉬는가? 좁아서 쉰다. 좀 넓게 생각하면 한숨을 쉬지 않아도 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넓어지는가. 한숨 쉴 일이 없어진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가 잘못 생각하면 너무나 좁아져서 자기가 거기에 갇히는 것이다. 너희가 좁아졌다는 말이 갇힌다는 말이다. 결국 좁은 것이 갇힌 것이다. 내가 운신할 폭이 좁아지면 갇힌 것이다. 자기 스스로 갇히는 것이다. 누가 나를 포박해서 억지로 갇히는 것만 갇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마음이 좁으면 스스로가 갇혀 버린다. 누가 가두어서 갇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혼자 사는 데도 괜히 좁고 우겨쌈을 당하니까 모든 것이 다 좁다.
하나님을 향해서 좁아지면(to make narrow) 곤고해진다. 하나님을 향해서 넓어지면 편안해지지만 하나님을 향해서 좁아지면 곤고해진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 하나님께 향하는 길, 하나님이 내게로 오시는 길은 항상 넓게 해놓아야 한다. Broad way, 넓은 길을 만들어놓아야 된다.(to make broad) 좁은 길을 만들어놓으면 옹색해진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거래가 옹색해진다. 하나님이 내게 오시더라도 옹색해진다.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더라도 옹색해진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그런 줄 알면 하나님이 마음 놓고 말을 못하고 옹색하게 말해야 된다. 어떻게 말을 해야 걸리지 않을까를 생각하시는 것이다. 그러다가 보면 진짜는 다 놓치고 껍데기만 남는다. 길이 좁으니까 통로가 너무 좁으니까 하나님도 오시기 어렵고 나도 가려고 하니까 어렵게 된다. 통로를 넓게 만들어놓으면 이렇게 갈 수도 있고 저렇게 갈 수도 있다. 차가 많이 오면 비켜갈 수도 있다. 외길에 들어서면 꼼짝도 못한다. 옛날에 충주에 있을 때 엑스폴러 동원하느라고 단양 영춘에 간 적이 있다. 요즘은 도로 사정이 좋아졌지만 단양에 내려서 그곳을 들어가는데 논길이다. 버스가 들어가기는 들어가는데 만일 건너편에서 차가 오면 큰일이다. 오도가도 못하고 둘 다 후퇴를 하여 하나 먼저 가고 하나가 나중에 가야 된다.
하나님과 우리의 거래가 그렇게 되면 곤란하다. 큰 길을 만들어서 내가 하나님께 가더라도 쉽게 가야 되고, 그분이 내게 오더라도 쉽게 올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좁아졌는가? 사람이 좁아지려고 해서 좁아졌겠는가?
a. 환란으로 인하여 마음이 좁아졌음
환란으로 인해서 마음이 좁아졌다. 조금 어려운 일이 생기면 좁아진다. 어려운 것을 너무 신경 쓴 사람은 마음이 넓어질 시간이 없다. 항상 어려운 일은 있는 법이다. 세상 사는데 어려운 일이 없는 법이 없다. 쉬운 일은 아무것도 없다. 다 어렵다. 어려운 일이 있는데 조금 어려우면 마음이 좁아져버린다. 그러면 곤고해진다.
(1) 육신 안에서는 환란과 고뇌와 번민과 탄식을 가져옴
어떤 환란을 당하면 육신 안에서는 고뇌와 번민과 탄식을 가져오게 된다. 내 육신을 편하려다 보니까 내 마음에 원하는 대로 하려다 보니까 내가 목적한 대로 살려고 하다 보니까 모든 것이 환란이 된다. 세상은 나를 위해 있지 않다. 누구도 나를 위해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 내가 나를 위해 살려고 하면 다 적이 된다. 왜냐하면 다 자기를 위해 살지 남을 위해 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육신 안에서는 자기를 위해 살려고 하면 환란이 저절로 닥쳐오고, 환란이 오게 되면 더욱 좁아져서 고뇌와 번민과 탄식이 오게 되고 심하면 원망이 오게 되고 저주가 가게 된다.
(2) 새 생명 안에서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가져옴(롬5:3,4)
그러나 새 생명 안에서는 환란은 인내를 낳게 되고, 인내는 연단을 낳게 되고, 연단은 소망을 가져온다. 로마서 5장 3절, 4절에 보면 환란은 인내를 가져오고, 인내는 연단을 가져오고, 연단은 소망을 가져온다고 되어있다. 이것이 생명이 차이다. 옛 생명 안에서는 오기만 오면 좁아지는데, 새 생명은 오기만 오면 더 넓어진다. 우리 교회에서도 보니까 오늘인가 내일인가 모르고 살던 사람들이 환란이 오니까 정신이 바짝 나서 간증하는 것이 당장 달라지는데 그런 사람들은 조금 편안해지면 다시 돌아간다. 속으로 생각하기를 저런 사람은 환란을 적당하게 당해야 되겠구나. 왜냐하면 그래야만 정신을 바로 차리고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아내가 조금 잘해주면 좋아하므로 그런 경우는 아내가 긁어야 제대로 된다. 그래도 새 생명이기 때문이다. 옛 생명 같으면 난리가 날 것인데 그래도 새 생명은 괴로우면 정신이 난다. 갈 곳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최소한 망하지는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피할 곳이 있기 때문이다. 안되면 갈 곳이 있다는 것이 큰 복이다. 안되었을 때 갈 곳이 없다는 것이 저주다. 안되어도 갈 곳이 있다는 것은 안전보험을 들어놓은 것이다. 새 생명 안에 있는 사람들, 하나님 말씀을 한번 들은 사람들은 안전보험에 가입해놓은 것이다.
b. 환란 중에도 마음이 넓은 사도의 본 많은 인내, 환란, 궁핍, 곤경, 매 맞음, 감옥에 갇힘,
난동 당함, 수고함, 자지 못함
환란 중에도 마음이 넓었던 사도의 마음을 지금 열리게 하고 있다. 너희는 그렇게 좁아졌지만 나는 환란이 올수록 이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많은 인내, 환란, 궁핍, 곤경, 매 맞음, 감옥에 갇힘, 난동 당함, 수고함, 자지 못함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사실 우리 중에 누가 이렇게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명함도 못 내민다. 나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다. 우리가 곤란하거나 괴롭다 할 명분이 없다. 이렇게 했지만 성실함과 참된 지식과 오래 참음과 인자와 거룩한 영과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과 의의 무기를 가졌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그냥 온 것이 아니고, 반대로 생각하면 반대급부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새 생명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려움이 오면 반대급부가 온다. 우리가 꼭 편안하기만을 기대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환란이 온다고 해서 손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광과 모욕, 악평과 호평을 받았다. 어떤 사람은 좋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모욕을 한다. 어떤 사람은 악평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호평을 한다. 우리 교회가 지금 어떤 사람들은 바람직한 교회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단이라고 한다. 자기들 마음대로이지만 그렇게 하고 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진실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것 같으나 살아있고, 징계를 받은 것 같으나 죽지 않고 있고, 슬퍼하는 것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것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넓어지면 문제가 없다. 모욕을 주면 악평을 하면 그것으로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겉은 속이는 자 같아도 진실하다. 무명한 자 같아도 유명하다. 새 생명 안에는 환란은 오히려 인내가 되고,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가져온다. 왜 그런가? 오직 주님이 주신 목표, 하나님의 새 언약의 목표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내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느냐에 따라서 환란에 대한 나의 해석이 달라진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왜 넓어졌는가? 나도 나의 이러한 환경에서 마음이 넓어졌는가?
(1) 이 사역이 비난 받지 않게 하려 함으로
첫째는 이 사역이 비난받지 않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어찌하든지 이 귀중한 사역이, 하나님의 최종적인 이 사역이, 새 언약의 사역이,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되게 하는 그래서 새 예루살렘을 완성하는 이 소중한 사역이 비난받지 않게 하려고 내가 마음을 먹으니까 어떤 어려움이 와도 그것이 오히려 나에게 풍요로움을 가져오더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 살려는 사람에게는 불만이 절대로 없다. 자기를 위해 살려고 할 때 불만이 생기지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면 불만이 없다. 참 이상하다. 세상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살려고 하면 불만이 생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잘해주고 나면 그 다음은 꼭 문제가 생긴다. 왜냐하면 내가 잘해준 것만큼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도 너에게 이렇게 했는데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는가가 된다. 세상에서는 남을 위해주고 자기는 더 좋지 않은 사람이 된다. 또 받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받을 때는 좋다하고 받는데 시간이 지나서 잘못되면 그때 나를 차라리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망하지 않았을 것이 돼버린다. 내가 아쉬워서 남의 돈을 빌렸는데 그때는 고마웠다. 누가 그냥 돈을 빌려주지 않는데 빌려주어 참 고맙다고 생각했다. 그 돈을 가지고 장사를 잘 되었으면 다행인데 장사를 하다가 돈이 없어져 버리면 그때는 차라리 그때 나에게 돈을 빌려주지 말지 돈을 빌려주어 또 망하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생각이 이런 것이다. 처음에는 이자를 얼마 내라고 하면 감사하다고 했는데, 자꾸 이자를 내다보면 본전을 다 냈다는 생각이 든다. 100만원을 빌려서 다달이 5천원씩을 내는 것은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내다보면 결국 100만원이 되는데 그 다음에는 본전 갚고 싶은 생각이 안난다. 본전 달라고 찾아오면 다 받아먹고 또 받으러 온다고 생각한다. 사람 마음이 그렇게 간사하다. 그런데 이자로 100만원만 갚으면 되는데 100만원 보다 이자를 더 갚았으면 돈 빌려준 사람의 생각으로는 원금은 아직 받지 않았고 이자만 받은 것인데 원금을 돌려주려고 하면 아까운 생각이 드는 것이 사람의 생각이다. 이자 받고 절대로 돈 빌려주지 말기 바란다. 이자를 받고 돈 빌려주면 다음에 욕 얻어먹는다. 차라리 그냥 주던지 아예 빌려주지 말던지 해야 한다. 빌려주지 않으면 그때만 섭섭하고 끝나버리는데 빌려주고 나면 두고두고 섭섭해 한다. 세상이란 그런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 살면 전혀 반대다. 하나님을 위해 살려는 사람은 절대로 좌절이 없다.
(2) 자신을 하나님의 사역자로 드러나게 하려 함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사역자로 드러나게 하려고 했다. 내가 하나님의 사역자다. 내가 하나님의 이 신약의 사역을 신약 경륜을 드러낼 자다. 그런 사람으로 자기를 자청했다는 말이다. 그것을 더 자기가 확실하게 하면 할수록 하나님 일이 더욱 잘될 것이다. 그렇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는 어떤 환란이 와도 그것이 자기에게 더욱 영광스러운 것이 되었다.
(3) 죽은 가운데서 산 생명으로 삶으로(비난-흠 잡다)
세 번째는 죽은 가운데서 산 생명으로 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것이 내 것을 가지고 살면 억울한 것도 있고 여러 가지가 많다. 내가 죽은 것을 가지고 살면 내 것이 아니니까 억울한 것이 없다. 원래 내 것이 아니고, 죽었던 것을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 쓸모도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이 없으면 그런 발견을 할 수가 없다. 세상에 나가면 그래도 다 가치가 있다. 어디에 써먹어도 써먹을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이 나를 평가하는 것과 내가 나를 평가하는 것이 차이가 있어 문제가 되지만 좌우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하나님을 만나야 그리스도를 만나야 내가 하나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자구나. 나는 밥 먹는 데는 능수지만 하나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을 만나고 만나지 않고가 이런 차이가 생기게 된다.
하나님 앞에 가야 내가 피조물이구나.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내가 뭔가를 할 수 있을 줄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는 방해거리만 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런 사람이 내가 그분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무엇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영광인가! 죽었던 생명이 지금 살아 움직이는데, 다른 차원에서 살아 움직이는데, 그 얼마나 축복인가! 한번 사람이 꼭 죽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죽을 방법이 없다. 죽었다가 살아날 방법이 없다. 방법만 있다면 한번 장사지내고 그 다음에 무덤을 파서 살려놓을 수 있다면 진짜 좋을 것 같다. 그러면 그때 묶어놓은 것을 풀 때 그 감격이 얼마나 크겠는가! 내가 살았구나. 내가 다시 햇빛을 보다니... 이렇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기술이 없다. 그것만 있다면 꼭 한번씩 다 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묘한 방법으로 우리를 죽게 하고, 장사지낸바 되게 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게 했다. 이것이 참 놀라운 일이다. 죽은 사람을 살려냈다는 것보다 놀라운 일은 없다. 그리고 이 보다 신기한 일은 없다. 우리 교회에서도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보다 신기한 일이 없다. 정말 쓸모없는 자가 자기라고 알고 산 사람, 자기가 정말 쓸모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높인 사람, 그보다 신기한 사람은 없다.
죽음을 이긴 생명이니까 죽음에서 나온 생명이니까 모든 환경에서 승리한 생명이다. 죽음에서 승리한 이 생명으로 살면 생각(마음)이 한없이 넓어진다. 우리가 가난했던 것을 기본으로 해서 살면 현실이 넓어진다. 나는 한번도 현실에 대해 불평이 나오지 않는다. 너무나 가난했던 때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다. 나는 엄동설한 마루바닥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아무리 못해도 그것보다는 낫다. 그것도 다른 사람에게 밀려나서 나는 12월 20일에 맨 마루바닥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늘 내가 태어나고 난 후부터 조금씩 좋아졌다고 말씀 하셨는데, 그것보다 더 나쁠 수가 없기 때문에 어머니 생각에는 이 아들을 낳고 난 후부터 점점 나아졌다고 하셨다. 나아진 것이 별 것이 아닌데도 어머니에게는 굉장히 나아진 것이다. 오죽했으면 엄동설한에 맨 마루바닥에서 애기를 낳았겠는가. 평생 등이 시리다고 하셨다. 0점에서 출발하면 사람은 너무너무 풍부하다. 나는 한번도 더 잘살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갈수록 더 잘 살아왔다. 더 잘살려고는 노력하지 않았다. 우리가 0점에서 살면 항상 하나님께 감사가 된다.
죽음이라는 것은 0점이다. 우리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았다는 말은 0점에서 살았다는 말이다. 요즘 아이들은 옛날 사람들보다 더 불행하다. 왜냐하면 0점이라는 것이 없다. 우리 0점과 지금 0점은 차원이 다르다. 우리 0점은 맨발인데 지금 0점은 나이키 신발이다. 0점 기준이 다르다. 그래서 훨씬 더 많아져야 된다. 우리는 국수만 먹어도 감사가 되는데, 요즘 아이들은 국수로 안된다. 태어나기를 국수 위에서 태어났다. 이제는 점점 높아져서 점점 행복지수가 반대로 낮아지게 되었다. 갈수록 만족이 없다. 왜? 0점에서 출발해야 만족이 생길 텐데 높은 데서 출발했기 때문에 얼마를 더 올라 가겠는가? 부잣집 아이들이 행복할 것 같은데 절대로 그렇지 않다. 높은 데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 이하로 내려가면 못산다. 우리는 그 이하로 내려가도 감사하다. 0점에서 올라온 사람은 그것도 감사하다. 그런데 위에서 내려온 사람은 천길 낭떠러지기다. 어려서는 좀 가난해 볼 필요가 있고, 돈도 좀 없어 볼 필요가 있다. 남에게 무시를 좀 당해볼 필요도 있다. 멸시도 좀 당해볼 필요도 있다. 그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렇게 하면 그 다음에는 누가 조금만 잘해주어도 감사할 것이다. 만일 내가 무시만 당한 사람이라면 우리 대구교회에 오면 감지덕지다. 간증만 해도 다 박수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 행복한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치수가 높아지는 것은 외적인 환경에 달려있지 않다.
죽음을 이긴 생명! 이것이 모든 환경에 승리하게 된다. 이 생명으로 살면 우리 마음은 넓어진다. 넓어져야 하나님의 은혜를 넓게 받을 수가 있다. 왜 마음을 넓히라는 말을 했는가? 나는 처음에 오랫동안 생각했다. 속(마음) 좁은 사람이 얼마나 있길래 왜 마음을 넓히라고 하는가? 너희가 속이 좁아진 것은 너희 때문이지 우리 때문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이것이 넓어지지 않으면 통로가 좁아서 하나님이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다. 맨날 불평불만만 하고 있으면 이 좁은 골목으로 어떻게 들어오겠는가? 길이 넓으면 한쪽에서 불평을 하더라도 다른 한쪽으로 갈 수가 있는데 길이 좁으면 오지 못한다.
은혜를 헛되이 말지 말라. 은혜를 실속 있게 받아라. 온전하게 받아라. 그러려면 마음을 넓혀라. 우리 마음을 넓히면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이스라엘이 완전히 땅바닥에 떨어졌을 때 예수님이 오셨다.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소망이 없어졌을 때 예수님이 오셨다. 그 자리를 생각하면 예수님이 감사할 텐데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행복이 되겠는가? 안된다.
우리가 마음을 넓히면 하나님 은혜가 온전하게 들어올 수가 있다. 마음을 넓히자. 속 좁은 사람들은 타고난 속 좁음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속이 좁은 사람들은 마음을 넓히자. 오직 우리가 하나님만 위해서 살려고 하면 그리고 우리가 죽은 자라는 것을 알고 살면 우리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서 넓어지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온전하게 우리에게 전달되게 된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당신의 은혜가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져서 당신도 만족하고 우리도 만족하는 영원한 세계를 두시고 우리를 부르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속이 좁아서 단지 육신적이고 물질적이고 시간적이고 임시적인 것을 갈망했지만 당신은 우리에게 마음을 넓히라 하시고 더 원대한 것을 더 높은 것을 더 영원한 것을 주시려고 우리 마음을 넓히신 것을 감사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 살게 하심으로서 우리가 모든 환경에서 자유하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게 하심으로서 우리 마음을 넓히신 것을 감사합니다. 당신의 은혜가 무궁한데 그 무궁한 은혜가 우리 안에 다 들어오도록 우리 마음을 넓혀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