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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죽음의 길로 가심(요11;1-44)
a. 죽음의 길에서 나사로를 깨우러 가심
2012년 05월 27일(일,가창)
(요11:1~16)
1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2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생각하는지라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지난 번에는 ‘베다니의 전환’에 대해서 말씀드렸다.
10장에서는 생명의 길로 전환되기 때문에 베다니의 전환은 아주 중요한 일로서 크게 말하면 구약에서 신약으로 전환되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그 전에도 다 신약이지만 사역이 ‘생명의 사역’이기 때문에 ‘신약적인 사역’이라 할 수 있다.
그 길에서 첫 번째 가는 길이 ‘나사로를 살리러 가는 그런 길’이었다. 요한복음 10장이 ‘생명의 목장’ ‘생명을 주는 선한 목자’를 말씀했으니까 ‘어떻게 생명을 주는가?’, ‘어떻게 사람을 살리는가?’, ‘누가 사람을 살리는가?’ 이런 문제로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사도요한은 이렇게 순서를 배열해 놓았다. ‘주님은 죽음의 길로 가시는 분이다. 생명을 주러 가는 길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죽음의 길에 서서 나사로를 깨우러 가셨다.’ 이렇게 말씀할 수 있다.
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요단강 저편에 있을 때 나사로가 병들었으니 와 달라는 전갈을 받으셨으나 예수께서는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그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신 후 “유대로 다시 가자” 하셨다.
그런데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하신 말씀이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고, 하나님의 아들로 그로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얼른 들으면 ‘사람이 살 것이니까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렇게만 생각하지 말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틀을 더 유하신 후에 다시 유대로 가셨다는 것이다. 이것도 ‘이틀을 더 유하신 것은 완전히 죽어서 사람들이 이의가 없도록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너무 각본적인 것 같다.
주님 앞에는 무엇이나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아들로 영광을 얻게 하는 일이었다.
‘주님 앞에는 무엇이나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또 아들로 영광을 얻게 하는 일이다’ 이것이 중요한 일이다. 우리 앞에 다가오는 모든 일들이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이고 아들의 영광, 인생의 영광을 위한 길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우리 앞에 많은 일들이 다가온다. 여기서는 죽음이 왔는데 인생에서 뭐니 뭐니 해도 죽음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 문제를 놓고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이것이 인생으로 하여금 영광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이 된다면 만사가 다 해결된 것이다. 이렇게 큰 문제가 해결되었으니까 다른 문제는 다 해결된 게 아닌가? 김정운과 우리 이명박 대통령이 만나서 ‘38선 없애고 무조건 통일하자.’ 이렇게 해 버리면 다 끝나는 것이고 아주 자잘한 문제는 따로 하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일이 이렇게 해석되면 그 인생은 아주 완전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 즐거운 계절이 된다.
하나님께 바쳐진 인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기 때문에 모든 일이 다 축복이 된다.
죽음의 길이지만 살리는 길이 된 것이다.
건강한 사람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 좋다. 봄은 봄대로 좋고, 여름은 여름대로 좋고, 가을은 가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다 좋다. 여러분 중에서도 대부분은 다 그럴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가야산도 가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건강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봄은 봄대로 안 좋고, 여름은 여름대로 안 좋고, 계절마다 다 안 좋을 뿐더러 또 계절 넘어갈 때마다 어렵기 때문에 아주 힘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병약한 사람인가?
하나님께 바쳐진 인생은 무엇을 해도 해석하기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되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된다. 그러므로 건강한 사람이 아닌가? 일이야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데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가, 아니면 무슨 출세를 위해서 사는가? 사람은 다 무엇을 위해서 사는 것이 있는데 다 거기에 따라서 해석한다. 그래서 누가 대학 입시에 가서 떨어졌다고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이 끝난다. 그 시험을 안 본 사람은 아무 상관이 없다. 자기와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각자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모든 것을 해석한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영광만 위한다.’ 고 하면 어떻게 해석되는가 하면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구나!’ 이렇게 해석되니까 이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해석이 된다면 이 사람은 병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육체적으로도 ‘우리 몸에 들어온 모든 것이 내 건강을 위한 것이다, 힘내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해석되면 우리 몸은 건강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것은 왜 들어왔어? 이것을 왜 먹었어? 왜 배추는 이래? 상추는 왜 이래?’ 하면 이것은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인생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그 문제가 있다. 내가 A라는 것을 위해서 살면서 B라는 것을 바라면 안 된다. 사람이 왜 복잡한가 하면 두 가지를 다 가지려니까 복잡하다. 두 가지 뿐인가? 세 가지, 네 가지, 다섯 가지 다 가지려고 하니까 복잡하다. 한 가지만 가지려면 간단하다. 모든 것을 우리가 어디에 맞춰서 해석하는 것이다. 사상이나 이념을 가진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모든 일을 거기에 맞춰서 해석한다. 여러분들이 신문이나 라디오 같은 것을 보거나 들으시면 똑 같은 일인데도 자기 목표가 다르니까 다 시각이 다르고 다 다르게 해석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된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러면 그냥 건강하게 되어 있다. 자기 무엇을 위해서 살면 분명히 무엇이 걸려서 못 넘어간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되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모든 일을 그렇게 받아들이면 다 해석이 된다. 자동차는 아무리 좋은 자동차라도 물 위로 갈 수는 없으니까 육지에 갈 때는 좋지만 물에 가면 가라앉아 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벤츠 몇 천 만원짜리가 물에 빠졌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몇 만 톤짜리 배가 물에 가라앉았다면 이상한 일이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된다면 모든 일이 다 축복이 되니까 죽음의 길이지만 살리는 길이 된다. 지금 자기는 죽음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나사로의 집’으로 간다는 것은 유대 땅 가까이로 가는 길이고 유대 땅이라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가까이 간다는 뜻이다. 약 3킬로 밖에 안 되는 가까운 곳으로 가는 길이니까 지금 위험한 길로 가는 것인데 살리는 일이 생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면 내가 가는 길에 좋은 일이 자꾸 생기고 내가 할 일이 자꾸 생긴다. 남에게 좋은 일 할 일이 자꾸 생긴다. 그런데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면 가는 곳마다 방해꾼이 생긴다. 이 사람은 이래서 방해가 되고 저 사람은 저래서 방해가 되고 모든 것이 다 방해가 된다. 왜냐하면 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다 자기를 위해서 살고 있는데 나를 위해서 기다리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러므로 다 방해꾼이다. 반에서 1등을 하려면 그 반의 모든 학생들이 다 방해꾼이 아닌가? 2등이 제일 방해꾼이고. 2등 때문에 밤에 잠을 못 잔다. 2등만 없으면 밤에 쉬고 잠 좀 자겠는데 2등이 언제 쳐 올라올지 모르기 때문에 못 자고 적이 되어 버린다. 우리 영관이처럼 편안하게 생각하면 상관이 없다. 자기는 자랑스럽게 3등이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죽음의 길이 나쁜 것이 아니고 거기서 할 일이 없는 것이 나쁜 것이다. 길이 나쁜 것이 아니고 할 일이 없는 것이 나쁜 것이다. 더 나쁜 것은 가는 길에 모든 사람이 다 자기의 길을 방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 불행한 일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 적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사람이 불행하게 되어 버린다. 그런데 가는 데마다 자기 할 일이 있는 사람, 자기가 도와줘야 될 일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지금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살리려고 가는 것이니까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이 길은 자기가 죽으러 가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죽으러 가면서도 살리는 일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그렇다. 꼭 누가 다 환영하는 것만은 아니고 그렇다고 꼭 재미있는 것만도 아니다. 내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복음을 전하는데 누가 사니까 재미가 있고 기쁨을 느낀다.
⑵ 하나님의 손이 일하심
하나님께 드려진 것마다 거룩하다. 특별한 용도에 사용되고 비밀하게 쓰여진다.
하나님만 아시고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인생의 모든 일은 하나님께 드려진 것마다 다 거룩하다’고 한 것처럼 ‘성전에 사용된 모든 기물(器物)은 다 거룩하다’고 해서 성물(聖物)이라고 한다. 왜 그런가 하면 특별한 용도 즉 하나님을 위해서만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물로 막걸리도 마시고 하나님 앞에 술잔도 드리고 하면 거룩한 것이 아니다. 딱 하나님께 드리는 물건으로만 사용되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한다.
이 특별한 용도! 이것은 비밀(秘密)하게 쓰여진다. 왜냐하면 우리가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닌데 그것이 특별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 쓰여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시고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말씀이 로마서 8장 28절에 있다. 우리가 볼 때는 어떻게 될지 모르고 불안한 것도 있는데 특별한 용도에 사용되어지면 그 속에서 하나님이 이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룩하게 만들어 준다는 말이다. 이것을 경험하게 되면 하나님께 맡기게 된다. ‘아~ 하나님이 일하시는구나!’
누가 예수님의 죽으심이 인류의 구속이 될 줄을 알았던가?
아담 이후 그 누구도 그의 죽으심이 그렇게 쓰일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이것은 하나님만 아시는 비밀한 일이었다. 그의 비밀한 손은 인간의 생각과는 완전하게 다른 일을 하신다.
누가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인류의 구속이 될지 알았겠는가! 다 저주라고 생각했지 누가 그것을 인류를 구속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겠냐는 것이다. 아담 이후에 그 누구도 그의 죽음에 대한 것이 이렇게 쓰여질 것이라는 것은 생각지 못했고 이것은 하나님만 아는 비밀이었다. 그의 비밀한 손이 인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일을 했다. 우리가 예측했던 것도 아니고 상상했던 것도 아니고 계획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의인이 화를 당하고 악인이 형통한다고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인생은 잠잠히 그 비밀한 손이 하시는 일을 기다려야 한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생각하기를 “의인이 화를 당한다. 저 사람이 왜 화를 당할까? 저 사람이 왜 재난을 당할까? 저 사람이 왜 궁색한 일을 당할까? 왜 어려운 일을 당할까? 저 사람은 저렇게 되면 안 되는데 왜 저 사람이 저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하는 일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악인이 형통하는 일도 있다. ‘저런 사람은 망해야 될 사람인데 왜 저 사람은 잘 되어서 있는가?’ 이런 것이 의문이 된다. 하나님을 우주를 섭리하는 분이라고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안된다. 하나님은 당연히 의인의 길을 형통케 하고 악인의 길은 망하게 해야 되는데 이것이 반대로 될 때는 혼란이 생기게 된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도 큰 혼란을 가져온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진실하던 장로님이 재난을 당했다고 하면 해석이 안 된다. 그런데 못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잘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둘다 해석이 안 되게 된다. 이것을 교리적으로 “저 사람이 잘못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잘못 해석해 버리면 사람을 죽이는 결과가 생기게 된다.
그러니까 거기서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아니고 인생은 잠잠히 비밀한 손, 하나님의 손이 일을 하시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 그것을 아는 체 하면 안 된다. ‘의인은 화를 당하면 안 돼! 악인은 형통하면 안 돼!’이렇게 아는 체하고 있으면 안 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기다려야 한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을 믿어야 하고 여기서 우리에게 신뢰가 필요하다.
이것을 경제용어로 설명하면 아담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이다. 시장에 가면 참 예측이 어렵다. 가락동 시장에 가면 전국의 모든 채소가 밤차로 새벽에 몰려드는데 그 날 배추 한 포기에 얼마인지 싣고 온 사람도 모르고 시장에서 배추 파는 사람도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차가 도착하면 무슨 손인지가 와서 가격이 결정되는데 이것을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한다. 이것이 시장경제의 원리이고 아담 스미스는 이 원리를 가지고 자본주의를 설명했다. 자본주의는 시장경제의 원리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있고 그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모든 것이 조정되어 나간다. 물론 값은 정부에서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손이 정해준다는 것이고 거기에 맡기자는 것이 자본주의다.
그런데 칼 마르크스는 반대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의지한 것이 아니고 ‘보이는 손’을 만들었다.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계획을 해서 ‘배추 한포기에 생산비는 얼마고 운송비는 얼마고 이렇게 해서 한 포기에 얼마다’ 라고 정가(定價)를 매겨서 팔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성공했는가? 아담 스미스가 성공하고 칼 마르크스는 실패했다. 물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도 문제가 많아서 그 후로 몇 번 수정을 했고 늘 수정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한번 실패하고 나도 수정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했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손으로 하면 그것을 고칠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손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일하셔야 우리는 모르지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게 되는 것이지 손이 보여 버리면 안 되는 것이다. 교회도 누구의 손이든 손이 보이면 안 되고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여야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보통 교회에서 ‘성령이 역사(役事)한다’고 말한다. 사실 알고 보면 그 성령이 보이지 않는 손이다. 그런데 성령이 역사한다고 해 놓고 하기는 자기가 다 계획을 해 놓고 성령보고 도와달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까 그렇게 하면 성령이 끌려 다니기 힘들다. 잠잠히 그 비밀한 손을 기다릴 수 없기 때문에 자기가 다 해놓고 일만 해달라고 하니까 힘든 것이다. 결국은 보이지 않는 손이 일하는 것을 기다릴 수 없기 때문에 막스는 손을 댔고 그래서 칼을 대고 총을 대고 해야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산주의가 안 된다. 그래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교회도 두 가지다. 하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일하는 교회가 있고 다른 하나는 보이는 손이 움직이는 교회가 있다. 보이는 손이 움직이는 교회는 공산주의하고 똑같은 인위적인 계획이라는 것이다. 인위적인 힘이 많을수록 생명은 죽는다. 자연의 힘에는 살게 하는 힘이 있지만 인위적인 힘은 죽게는 할 수 있는데 살게는 못한다. 그래서 교회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큰 손이 움직이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법이 작용하기 때문에 교회는 공산주의(사회주의)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법이 없으면 안 되게 되고 강압이 있어야 되고 이렇게 돼 버린다.
그러므로 인생은 잠잠히 비밀한 손이 일하도록 기다릴 줄 알아야 된다. 하나님의 사람은 반드시 ‘비밀한 손이 일한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확신을 가지려면 비밀한 손이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가 성령이 인도한다는 것을 안다면 잠잠히 비밀한 손이 하신 일을 기다려야 한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일이며 우리 교회에서는 특별히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는 처음부터 잠잠히 보이지 않는 손을 의지해 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만일 보이는 손이 불거지면 안 되는 것이다. 다른 교회들은 보이는 손이 했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길들어져 있으니까 하다보면 맨날 싸우는 것이다. 손이 나오면 이 손이 하다가 저 손이 하다가 싸울 것 아니겠는가? 내 손만 불거지면 좋지만 다른 손이 나오지 않겠는가! 손이 어디 한 사람 손만 있겠는가! 그렇게 되면 의견이 많아지게 되고 생각이 많아지게 되고 그래서 싸우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손 비밀한 손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지금 내가 생각할 때는 의인이 복을 받고 악인이 화를 당하는 것이 당연하고 진리이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 어찌할지 지금 나는 모른다. 우선 당장 보면 분명히 잘못 되었지만 내가 그것을 고치려고 하면 더 잘못된다. 잘못된 것처럼 생각이 되어서 내가 손을 대면 더 잘못되어 버리니까 우리는 잠잠히 그 분이 하시는 일을 기다려야 한다.
⑶ 배정된 시간에 배정된 일을 하심
유대로 가는 길은 죽음의 길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고 합니까?” 했지만 주님은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낮에 다니면 실족하지 않는다.” 하셨다. 이것은 비유로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유대로 가는 길은 죽음의 길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말하기를 “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고 가시려고 합니까?” 그렇게 했다. 그런데 주님은 “낮이 열두시가 아니냐? 낮에 다니면 실족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비유니까 그냥 해석을 하면 해석이 참 어렵다.
유대인들은 하루를 12시간으로 정해서 사용했다. 이 시간은 인생에게 확실하게 배정(配定)된 시간이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 배정 받은 일을 하면 빛 가운데서 걸어간 것처럼 앞이 막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내가 깨우러 가야 한다” 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하루를 12시간으로 정해서 사용했다. 이 시간은 인생에게 확실하게 배정된 시간이므로 이 시간에 배정받은 일을 하면 빛 가운데서 걸어간 것처럼 앞이 막히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내가 깨우러 가야 한다.” 는 것이었다.
낮이 열두시라고 하면 우리 시간으로는 정오 대낮이니까 빛이 밝다고 해석을 하면 되는데 유대인들은 하루를 열두 시간으로 생각을 한다. 옛날 우리나라도 하루를 열두 시간으로 갈라서 사용하였는데 유대인들도 그렇게 열두 시간으로 갈라서 사용한 사람들이니까 낮이 열두시라는 말은 ‘하루가 열두시’라는 뜻이다. 이 낮이라는 단어가 낮이라 할 수도 있고, 날이라 할 수도 있고, 하루라고도 번역을 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하루가 열두시다’ 하는 뜻과 같다. 그런데 뒤에 빛이라는 말이 나오니까 정오 열두시라고 번역을 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비유다.
이 하루라는 이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 인생에게 확실하게 배정된 시간이다. 나한테 확실한 시간은 오늘 하루 밖에 없다. 어제도 지나가 버렸기 때문에 내 것이 아니고 내일도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내 것이 아니고 올지 안 올지 모른다. 오늘밤에 내가 죽으면 내일은 없으니까 오늘만 나에게 확실하게 배정된 시간이기 때문에 그 시간에 그 배정받은 일을 하면(오늘 배정받은 일이 있으니까 그것을 행하면) 빛 가운데서 걸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내가 배정을 받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배정해주신 일이니까 그 일을 한다면 마치 빛 가운데서 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배정도 안 해준 일을 자기 멋대로 하면 그것은 어둠 가운데 한 일이다.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배정해준 일은 하지 않고 배정해 주지 않은 일을 열심히 해버렸다면 틀림없이 쫓겨난다. 왜냐하면 그것은 낮에 한 일이 아니고 어둠에서 한 일이다. 배정된 시간에 배정된 일을 하면 막히지 않고 실족하거나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우리도 우리 인생에 배정된 시간이 있고 나에게 배정된 일이 있으니까 그것만 하면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가 없다. 그런데 지경을 넘어가서 월권(越權)을 해서 내 일이 아닌 것을 해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내가 할 일은 하지 않고 내가 하지 않을 일을 해서 문제가 생긴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아주 중요한 비유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자기 일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어느 때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앉고 서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때를 아는 것도 더욱 중요하다.
영웅 여세출(英雄 與世出)이라고 영웅은 때가 만들어준다고 한다. 아무 때나 박정희가 나오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때에 맞춰서 그 사람이 나왔기 때문에 성공을 한 것이지 지금 같으면 되지 않는다. 때를 아는 사람, 이것이 내 때인지 남의 때인지를 아는 사람, 지금 앉을 때인지 설 때인지를 아는 사람이라야 된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천방지축(天方地軸)이 되는 것이다. 앉을 때는 서고 설 때는 앉고 하면 방안에서 모두가 앉아있는데 자기 혼자 서 있으면서 앉으라고 해도 하지 않고 혼자 서 있으면 그 사람은 참으로 거추장스럽다. 그런데 다 서있는데 자기혼자 앉아있다면 자기가 답답하다. 앉을 때 앉고 설 때 서야 하는데 그 때를 잘 모르면 인생이 답답해지고 어리석어지고 천방지축이 된다. 말도 할 때가 있고 안 할 때가 있는데 안 할 때 해버리면 문제가 생긴다. 또 할 때 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 “난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말을 해야 할 때 하지 않으면 삐지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그러니까 “지금 낮이 열두시가 아니냐? 한 날이 열두시간이 있지 않느냐? 이 날에 내가 배정받은 일을 하면 마치 빛 가운데서 일하는 것처럼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으니까 내가 지금 깨우러 가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아니면 누가 깨워주겠냐는 것이다. 친구 나사로가 병들었는데 내가 안가면 누가 가겠냐는 것이다. 누구 보러 가라고 하면 자기가 아니면 누가 가겠냐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이것이 나에게 배정된 일이고 오늘 이것이 내가 해야 될 일이라는 것이다.
오늘 할 일을 오늘 하는 사람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오늘 할 일을 오늘 하는 사람, 아이들도 그 날 할 일은 그 날 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 날 숙제는 그 날 하게, 그 날 일기는 그 날 쓰게 해야 한다. 조금 있으면 여름 방학이 오는데 다 일기를 숙제로 내는데 밀리고 밀려서 개학날이 오면 거짓말로 지어서 써야 한다. 그렇게 하면 안 되고 귀찮아도 매일 쓰게 해야 한다. 요즘 중심부 까페에서 매일 출석체크한다고 하는데 왔다가 갔다는 출석을 찍으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날 할 일을 그 날 하는 것, 그 날 할 일을 그냥 놔두면 계속 미뤄진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 할 일을 오늘 하지 않으면 그 날은 없을 수도 있고 그 일은 없을 수도 있다. 영어 공부를 왜 못하냐 하면 아주 간단한 것이 그 날 할 일을 하지 않아서 못한다. 영어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려면 아주 쉽다. 교과서를 만들 때 그 날 할 일을 그 날 하도록 단어 배정을 해놓았다. 한 과정에 열개 스무 개 넣거나 한두 개 넣거나 그렇게 배정해 놓은 것이 아니고 새로운 단어를 다섯 개면 다섯 개, 네 개면 네 개 이렇게 배정을 해놓고 문장을 만들어 놓았으니까 매일 일만 그대로 하면 누구든지 다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는데 대부분 게을러서 못한다. 그러니까 중학교 1학년 교과서를 받으면 실력이 다 똑같은데 하루 이틀 3일 4일이 지나면 실력이 차이가 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매일 한 사람하고 매일 하지 않은 사람이 다르다. 오늘 할 일을 오늘 하지 않으면 내일은 10개가 되어 버린다. 내일도 안하면 그 다음날 가면 15개가 되어 버리니까 질려서 못하고 외우려고 해도 너무 많아서 못 외운다. 그러다보면 질려서 영어공부를 포기하게 된다. 하나를 외우든지 두 개를 외우든지 매일 똑같이 외우면 되는데 하지 않아서 그렇다.
인생에게는 누구나 배정된 시간이 있고 배정된 일이 있다. 그 일은 그 시간에 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일을 하는 동안을 지켜주신다.
주님은 죽음이 앞에 있었지만 자기에게 배정된 일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 일은 양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히 얻게 하는 일이었고, 하나님은 그 길을 열어 놓으셨고, 사단과 세상은 그 길을 막지 못했다.
인생에는 배정된 시간이 있고 배정된 일이 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인생) 안에 내게 배정된 일이 무엇인가? 그 일은 그 시간에 해야 한다. 그 일은 그 시간에 하지 않으면 다음에 할 수 있느냐 하면 못한다. 그러면 그 일을 하는 동안은 주님이 지켜주신다. 하나님이 나에게 배정해준 일은 하면 하나님이 지켜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일을 배정시켰으니까 하나님이 지켜줘야 한다.
사병들에게 적진을 향해서 각개전투를 하라고 명령을 내리면 뒤에서 엄호사격을 해준다. 진군하는 군대 앞에 엄호사격을 해줘서 적군이 오지 못하도록 막아준다. 왜? 그 임무를 수행해야 하니까 그렇다. 앞에 보병이 진군을 하는데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니고 보내고 뒤에서 포를 가지고 엄호사격을 해서 적군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고 가라고 하지 그냥 가라고 하지 않는다. 유명한 상륙작전도 다 그렇게 한다. 상륙 보트가 가는데 적군이 사격을 하면 다 죽어 버리니까 엄호사격을 한다. 인천 상륙작전 때도 보트를 타고 상륙을 하는데 그 앞에다 포를 쏘아서 적군이 꼼짝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배정된 시간에 배정된 일을 주었을 때는 하나님께서 당연히 엄호사격을 해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배정된 일을 하시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었다. 지금 앞에는 당연히 두려움이 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그런데 하루라도 더 당겨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섭지만은 내가 할 일이 있는 동안까지는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신다. 나사로를 살리기 전까지 잡아가면 안 된다. 나사로를 살려야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데 나사로를 살리러 가는데 중간에 잡아가면 안 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사로를 살리려면 중간에 못 잡아 가도록 막을 것이니까 담대해졌다. 뒤에서 엄호사격을 해줄 거라고 생각하니까 담대하게 가는 것이다. 그냥 가라고 하면 가겠는가? 못 간다.
그 일이 무엇인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다. 양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이 얻게 하는 일이 자기 인생에게 주어진 일이다. 살리는 일보다 자기에게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살리는 일을 할 동안 하나님은 자기를 살려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 길을 항상 열어 놓고 있고 사탄을 그 길을 항상 막으려고 하지만 생명을 주는 일은 절대 막지 못 한다. 왜냐하면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이니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꼭 해야 될 일은 엄호사격을 해 주신다’ 이렇게 알아야 된다. 다른 길은 막았어도 그 길은 열어 놨다. 돈은 못 버는데 이 길은 열어 놨고, 공부는 못 하는데 이 길은 열어 놨고 하여튼 이 길은 꼭 열어 놨다. 누구라도 이 길은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열어 놓은 길이니까! 막아 놓은 철조망을 뚫고 가는 것은 어렵지만 이것은 열어 놓은 길이다. 하나님의 길은 열려진 길이다.
⑷ 죽음의 길에서도 살리심
주님은 나사로를 살리려고 그 집에 가시려는 것이었다.
죽음으로 가는 길에서도 사람을 살리러 가신 것이다.
죽음도 하나님의 뜻이고 나사로를 살리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었다.
그 분 앞에는 무엇이나 다 하나님의 일이었다.
죽음의 길에서도 살렸다. 주님은 나사로를 살리려고 그 집에 가려는 것이다. 죽음으로 가는 길인데도 사람을 살리러 가는 길이 되었다. 한편에서는 죽으러 가는 것인데 다른 한편에는 살리러 가는 것이다. ‘당신은 어디 갑니까?’ 물으면 ‘나는 살리러 간다’그렇게 말한다. 묻는 사람이 볼 때는 죽으러 가면서 살리러 간다니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누가 봐도 다 죽음으로 가는 것인데 ‘나는 살리러 간다’고 하니까 죽음도 하나님의 뜻이고, 죽으러 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나사로를 살리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고 이래도 하나님의 일이고, 저래도 하나님의 일이다. 이렇게 되면 다 하나님의 일이 된다.
죽으러 가는 것도 하나님의 일! 살리러 가는 것도 하나님의 일! 세상에 이런 일만 있다면 그 인생은 한 오라기도 유실이 안 될 것이다.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고 안 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이렇게 해도 하나님의 뜻이 되고, 저렇게 해도 하나님의 뜻이 되고, 이래도 하나님의 일이고, 저래도 하나님의 일이 된다면 어떤 사람이 이렇게 행운아가 있겠는가! 하나님께 드려지면, 하나님의 일을 할 것으로 알면 그러면 된다.
항해사 앞에는 풍파만 있고, 전사 앞에는 전쟁만 있는 것같이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의 일만 있는 것이다. 또한 싸움쟁이가 있으면 싸움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의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하나님의 일만 있고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만 나타나는 사람은 얼마나 복된 사람인가!
바다를 항해하는 항해사 앞에는 언제나 풍파만 있다. 배타고 가는 사람에게는 풍파가 없는 날이 없고 언제나 풍파가 있다. 아무리 바다가 고요해도 바다를 가다보면 풍파가 있는 곳가 있는데 해협(海峽)을 건너갈 때는 반드시 놀(바다의 사나운 큰 물결)이 있다. 노화도에서 해남으로 건너 갈 때는 해협을 건너가야 하는데 우리 집에서 갈 때는 바다가 아주 조용한데 그 날은 아무리 좋은 날도 놀이 있다. 그 해협을 건너 갈 때는 반드시 놀이 있어서 나는 꼭 멀미가 나서 기억을 하고 있다. 제주도나 현해탄을 건너가려면 중간에 꼭 한 번 풍파가 있다. 고요할 때는 거울처럼 그 물이 고요한데 가다보면 거기에는 놀이 있다. 항해사 앞에는 항상 풍파가 있고 풍파가 없는 날은 없다.
마찬가지로 전사 앞에는 항상 전쟁만이 있는 것이지 평화란 없는 것이다. 공연히 놀고 있는 평화상태는 전쟁하는 사람들에게는 괴로운 것이다. 우리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칼 놔두고 쉬면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이 사람들은 몸이 근질근질해서 못 견디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일만 있다. 항해사에게 항상 풍파가 있고, 전쟁하는 사람에게 항상 전쟁만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항상 하나님의 일만 있다. 무슨 일이든 하나님의 일이 된다. 싸움쟁이에게는 항상 싸움만 있지 어디 가서는 싸움을 하고 어디 가서는 싸움 안하고 이것이 아니다. 그 사람만 있으면 언제나 싸움이 생긴다. 하나님의 사람만 있으면 언제든지 하나님의 일만 일어난다. 개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짖는 소리만 나고 소가 있는 곳에는 움메하는 소리만 난다. 사람이나 만물이나 다 똑같다.
이러나 저러나 하나님의 일만 있고,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만 나타나는 사람은 얼마나 복된 사람인가! 여기가도 하나님의 일이고, 저기 가도 하나님의 일이고, 집에 가도 하나님의 일이고, 직장을 가도 하나님의 일이고, 무엇을 해도 하나님의 일이다. 이러면 얼마나 복이 있는 사람인가!
복이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어떤 일을 해도 하나님의 일이 아닌 일만 한다. 이 사람은 정말 복쪼가리 없는 사람이다. 그런 것만 고르고 있으니까 정말로 참 가난하고 복이 없는 사람이다. 뷔페 식당에 가서 꼭 식중독 걸릴 것만 골라먹고 있는 사람과 같다. 참 복쪼가리 없는 사람은 정말 어쩔 수 없다. 망할 사람은 정말 망할 일만 골라서 한다. 자세히 그것을 검토해 보면 꼭 망할 일만 골라서 했다. 증권해서 망한 사람을 보면 꼭 망할 주식만 산다. 그것도 자기가 천재인 줄 알고 머리 써서 열심히 골라서 하는데도 꼭 망할 것만 고른다. 잘 될 사람은 잘 될 것만 고른다. 참 이상하고 이치가 참 묘하다. 하나님의 영광만 나타나는 사람 이 사람은 복둥이다.
우리는 모두 그의 죽으심의 길에서 구원을 받고 살아난 사람들이다. 주님에게는 죽으심의 길이 곧 살리심의 길이었다. 요한은 이 점을 마음에 두고 이 사건을 여기에 배열한 것 같다. 다른 복음서에는 이 사건이 기록되지 않았다.
우리 모두 그의 죽으심의 길에서 구원을 받고 살아난 사람들이다. 그 분은 죽으러 갔는데 우리는 살림을 받았다. 그 분의 죽으심의 길에서 우리는 살림을 받은 사람이다. 죽으심의 길이 꼭 살리는 길이었다. 요한은 이 점을 마음에 두고 이 사건을 여기에다 배열한 것 같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마르다의 집에 가서 나사로를 살린 사건이 없는데 요한만 이것을 딱 넣어 놨다. 왜냐하면 생명의 사역이니까 요한은 치밀하게 여기에다가 이 사건을 배열해 놓았다. ‘살리는 것! 생명을 주는 것!’ 그것이 뭔가를 보이느라고 여기다 넣어 놨다.
⑸ 신뢰와 사랑은 주님의 보좌를 움직임
나사로는 주님의 발에 값진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발을 씻었던 마리아와 늘 극진히 대접했던 마르다의 오라버니요, 주님께서도 친히 사랑하시는 자였다. 믿고 사랑하는 자들이 부른 것이다. 이 일이 아니었다면 주님은 요단 저편에 조금 더 계셨을지도 모른다. 죽음을 찾아가는 일이 그렇게 바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신뢰와 사랑은 죽음의 길이라도 가볍게 해준다.
다섯 번째는 신뢰와 사랑은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인다. 나사로는 누굽니까? 주님의 발에 값진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발을 씻었던 마리아와 늘 극진하게 대접하느라고 분주했던 마르다의 오라버니다. 마라다는 때로는 대접하느라고 너무 분주했던 사람이라고 나올 만큼 지성으로 대접을 했다는 것이다. 나쁜 의미로만 해석할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오라버니니까 그리고 주님께서도 친히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도 나사로를 사랑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족인데 그 가족과 친한 사이인 것 같고 자주 가는 가족 같다. 믿고 사랑하는 자들이 부른 것이다. 아무나 부른 것이 아니고 자기를 믿고 자기를 사랑하는 그런 집안에서 그를 부른 것이다.
(내 생각인데) 이 일이 아니었다면 주님은 요단강 저 편에서 조금 더 계셨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지금 죽으러 가는 길인데 누가 급히 서둘러 가겠는가! 아무리 하나님이 부르신다고 하더라도 죽음으로 부르시면 시간을 좀 지체하고 싶지 누가 빨리 달려가고 싶겠는가! 사형대로 걸어 가는 것이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한 발자국 걷기가 천근만근 무겁다는데 예수님이라고 거기서 달려가겠는가? 만일 이런 부름이 아니었다면 조금 더 있다가 갈 수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죽음을 찾아가는 일이 그리 바쁜 일이 아니었을 거니까! 신뢰와 사랑은 죽음의 길이라도 가볍게 해준다. 거기서 부르니까 지금 무거운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것이다.
주님이 가시는 길에는 늘 핍박이 있었다. 그러나 반면에 환영하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님은 그들에게서 힘을 얻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마르다와 마리아는 각별히 주님을 대접하고 사랑했던 것이다(뒤에 그들은 십자가 밑에서 울고 있었던 여자들이었고 맨 먼저 부활의 복음을 들었던 여인들이다). 주님은 그들의 사랑으로 인하여 깊이 위로를 받으셨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구조요청에 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주님이 가시는 길에는 늘 핍박이 있었으나 반면에 환영하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지 다 핍박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주님은 환영하고 믿는 사람들에게서 힘을 얻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마르다와 마리아는 각별히 주님을 대접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주님은 그들의 사랑으로 인하여 깊이 위로를 받으셨을 것이니까 그들의 구조요청에 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집에서 부르는데 안 가겠는가? 자기가 신세진 것도 있는데 인간적으로라도 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움직이려면 우리가 그 사람에게 그만큼 뭔가를 해야지 그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지 안 그러다가 갑자기 와 달라고 하면 잘 안 가게 된다. 맨날 욕만하고 있다가 어느날 급하다고 오라고 한다면 가겠는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런 식이다^^)
우리 교회에 의사 선생님들이 많은데 의사 선생님한테 평소에 잘하기 바란다. 평소에 잘해놔야지 급해서 부르면 오지 평소에 시큰둥하다가 급하다고 오라고 하면 가겠는가! 의사의 사명을 가지고 가겠지만 가기가 좀 싫을 것이다. 좀 친해야 침이라도 놔 줄려고 변경룡형제가 뛰어가기라도 할 것 아닌가? 하여간 의사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 생명이 걸린 문제니까 잘 보여야 한다. 주님에게도 잘 보여야 한다.
유대로 가시는 발걸음은 무거웠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부름은 그 발걸음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주지 않았을까? 말씀에 응답하면 말씀하는 자가 힘을 얻고, 간증에 응답하면 간증하는 자가 격려를 받는다. 애기는 먹는 대로 자라고 사랑을 주는 대로 응답하기 때문에 키우는 자가 수고를 모르는 것이다.
주님께서 유대로 가시는 발걸음은 무거웠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부름은 그 발걸음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주었다. 이것은 내 생각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인데 그까짓 것이 문제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겠지만 나는 생각할 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히 발걸음이 무거웠을텐데 이렇게 부르니까 빨리 갈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해보면 안다. 말씀하면 응답하는데 응답하면 말씀하는 자가 힘을 얻게 된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했는데 맹맹하게 앉아있다든지 옆사람하고 이야기하고 앉아있다든지 하면 김이 빠져서 말씀할 생각도 안나고 속에 있던 것들도 다 들어가버린다. 여러분도 해 봤기 때문에 알 것이다. 여러분이 간증해보면 아멘도 하고 그러니까 힘이 나는 것이다. ‘아멘’이라는 말은 ‘그렇습니다’ 이런 뜻이니까 말씀하는 자가 신이 난다. 그래서 내가 말씀을 1시간할 것을 2시간 하고 그런다. 오늘은 꼭 1시간만 해야지 했다가 시간을 넘어가게 된다. 정령자매는 ‘왜 오늘 1시간 넘어갔냐’고 하는데 내 속을 모르니까 답답하다.
우리 교회는 간증에 화답을 정말 잘 한다. 쑥떡같이 간증해도 찰떡같이 화답해주니까 간증한 사람이 간증을 한번 하고나면 굉장히 격려를 받는다. 좀 시원찮으면 나와서 간증을 해보라! 그러면 형제자매들이 그 간증을 확 살려줘서 격려를 받기 때문에 간증하러 나올때 보다 훨씬더 좋아지게 된다.
애기 키우는데 왜 힘이 안 드는 줄 아는가? 먹이는대로 자라고 사랑으로 대해준 대로 응답을 하기 때문에 키우는 자가 수고가 되는지 안 되는지를 모른다. 귀엽고, 잘 자라고, 잘 놀고, 방긋방긋 웃고, 응답을 하고 이렇게 아이와 부모가 서로 교통이 되니까 수고를 모르게 된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무거운 발 걸음이지만 그 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부르니까 격려가 된다. 지금 죽으러가는 사람에게 살려달라고 그러니까 이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죽으러 가는 사람에게 아궁이에 불이나 좀 떼러 오라고 한다면 얼마나 절망하겠는가! 하지만 죽으러 가는 사람에게 살려 달라고 그러니까 이보다 좋은 것이 없다. 지금 다 핍박을 해서 몰려오는 판에 ‘좀 살려주시오!’ 하는 사람이 나오니 얼마나 그것이 감사한 일인가! 우리가 궁지에 몰렸을 때 누가 와서 ‘안됐다 어쨌다’ 이런다고 위로가 안 된다. 같이 울어준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누가 와서 이런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야 한다. 아니 지금 내가 죽게 생겼는데 누가 와서 ‘살려달라’고 하니까 얼마나 힘이 나겠는가! 이렇게 우리는 주님을 격려시킬 수가 있고 위로할 수가 있다.
주님이 나사로의 집으로 가는 것은 죽음 앞으로 가까이 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사랑의 힘이 주님을 이끌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보좌(통치)를 유발시킬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이 나사로의 집으로 가는 것은 죽음 앞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었다. 저 강 건너 있으면 좇아오기가 어렵지만 바로 2~3km밖에 안되니까 한 20분이면 금방 좇아올 수 있는 거리니까 점점 가까이 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힘이 주님을 이끌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보좌(통치)를 유발시킬 수 있다. 옛날에는 양을 잡아서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야 법궤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통치를 유발시켜서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하나의 상징일 뿐이었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헌신을 가지고 주 앞에 가면 그 안에 있던 하나님의 통치의 뚜껑이 열릴 것이다.
한편 제자들은 주님이 가시는 길이 죽으러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두려워하고 망설였을 것이다. 그런데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가서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뒤에 끝까지 주님을 따르지는 못했지만 당시로서는 외로우신 주님에게 크게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제자들은 주님이 가시는 길이 죽으러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두려워하고 망설였을 것이다. 그런데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가서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했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이제보니까 별 말 아닌 것 같아도 주님에게는 큰 격려가 되는 말씀이었다. 옛날에 나는 이 말을 들었을 때 ‘죽으러 가지도 못하면서 도망갈 놈들이 죽으러 가자고 한다’ 고 해석되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게 아니고 주님이 지금 궁지에 몰려 가는데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이렇게 말했다는 것은 나중에 따라오다가 도망치더라도 이때는 하여간 위로가 될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지금 그렇게 생각이 든다. 옛날 녹음한 것을 들어보시면 아시겠지만 그 때는 아마 내가 그렇게 제자들이 빈소리 헛소리를 했다고 해석했을 것이다.
‘디두모(Didymus)’라는 말은 히브리말이고 ‘도마(Thomas)’라는 말은 히랍말이다. 유대인들도 알고 희랍인들도 아는 이름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디두모’라는 말은 쌍둥이라는 뜻이니까 ‘쌍둥이 도마’라는 말이라고 하는데 어느 말이 정확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좌우지간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했다. 끝까지 그들이 주님을 따르지는 못하고 다 도망쳤지만 당시로서는 극도로 외로우신 주님에게 크게 위로가 되었다. 보통 때는 이런 말 해봐야 별거 아니고 ‘너 빈소리 하지 마라’ 하겠지만 극도로 외로운 상태에 있을 때는 이 말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요한은 이 일을 빠뜨리지 않고 기록했다. 이유는 이들이 이렇게 해놓고도 배신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로했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이다.
주님에게는 무슨 일이라도, 누구라도 힘을 실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요한은 이 일을 빠뜨리지 않고 기록했다. 이유는 이들이 이렇게 해놓고도 배신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로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이 말을 꼭 빼놓지 않고 써놓은 것 같다. 주님에게는 무슨 일이라도 누구라도 힘을 실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 때 당시의 상황을 보면 그렇다. 우리가 어려울 때는 조금만 힘을 싣어줘도 크게 느껴진다.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용기는 그것이 비록 불변의 것이 못 된다 하더라도 주님에게는 필요하다. 우리는 변할 수 있다. 인간에게 불변이란 없다. 그러나 진실은 언제나 그 때 주님에게 필요한 것이다. 베드로는 맹세하고서도 배신했다. 그러나 그의 진심은 주님에게 위로와 격려를 드렸을 것이다.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용기는 그것이 비록 불변의 것이 못 된다 하더라도 주님에게는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꼭 불변한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다 변하기 때문에 베드로처럼 맹세하고도 변한다. 인간이기 때문에 변할 수 있다. 인간에게는 불변이란 것이 없다. 다 변할 수 있다. 지금 어떤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영원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언제 어떻게 바꿔질지 모른다.
이번에 우리 정우영 형제가 이야기 하는 것을 보니까 “아이고~ 저 사람 저래도 되는가? 저러다가 어쩌려고 저러는가? 너무한 것 아닌가?” 사람이 바꿔지니까 확~~ 바꿔져 가니고 놀라게 했다. 사람이라는 것이 언제 바꿔질지 모르지 않겠는가? 우리는 변할 수 있지 불변한 것은 없다. 그 때 그 때 그 사람으로서는 진실이다. 그것이 주님에게 필요한 것이지 꼭 ‘변하지 않는 약속을 한다’ 이렇게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진심으로 했지만 죽으러 가서도 베드로도 마찬가지였다. 진심으로 말했지만 어느 날 가서 모른다고 했다. 모른다 할 것이라고 미리 생각하고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예수님께 겉발림으로 한 소리가 아니고 진심으로 한 말이었으므로 베드로의 사랑과 진심은 핍박받고 계시던 주님에게는 위로와 격려가 됐을 것이다.
나는 약 20년 동안을 전국을 순회하고 다녔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하루도 쉬지 않았다. 주일날 오후 3시에 새마을호 타고 출발하면 서울 가서 서울저녁 집회하고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강원도 춘천으로 간다. 동부정류장 터미널로 가서 거기서 하루저녁 또 자고 그다음에 내려오다가 원주에 낮에 들렸다가 거기서 집회 하고 그 다음에 저녁에 충주에 와서 집회를 하고 하루저녁 자고 그 다음날 문경으로 내려온다. 그 다음날 아침에 문경에서 집으로 내려오면 그날이 목요일이 된다. 그러면 목요일부터 여기서(대구) 또 목,금,토로 집회를 했으니까 하루도 안 쉬고 집회를 했다.
그렇게 한 것이 무슨 힘이 있어서 그렇게 했겠는가? 젊은 형제들이 따라와 보고 하는 말이 ‘빌빌거리면서 못 따라 다니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는 판에 내가 어떻게 이 체력을 가지고 했겠는가! 결국 “격려”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 사람들이 오라고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내가 가면 반가와 하고 좋아 한다. 아무튼 말씀을 듣는지 안 듣는지 모르지만 좌우지간 좋아해서 힘을 얻어 간 것 같다. 그 힘으로 다녔지 내 힘으로 간 것 같진 않다. 내 힘으로 갔다면 못 갔을 것이다. 20년 동안 어떻게 그렇게 다녔겠는가! 그 후로 그것만 가지고 안되어서 남도 쪽으로 돌았다. 한 주는 남도로 돌고 한 주는 북쪽으로 돌고 그렇게 했다. 하루도 쉬지 않고 한번도 아파서 쉰 적도 없었으니 초인적인 사람이다. 그 힘이 어디서 나왔겠는가? 그 힘은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믿음과 사랑 그것이 그렇게 하게 했다. 그리고 다음에 안 될찌라도 용기있게 격려해주는 말 “나는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 살겠습니다” 다음에 안 되더라도 이런 말들이 힘이 됐다. 아까 양문회 용철이가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부르심에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기 원합니다.” 이런 말이 아주 격려가 되지 않는가! 우리 양문회 청년들에게서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것은 대단한 격려가 된다. 용환수 형제가 이 아이들을 따라다니면서 일을 하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얼마나 힘이 나겠는가! “나는 교회의 부르심에 최선을 다해 살겠습니다.” 이 말은 지금 막 제대하고 나서 밖에 이런 말을 못 한다. 그래도 얼마나 힘이 있는가!
우리가 주님의 통치를 유발시킬 수가 있고 주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가 있다. 예수님도 그랬을 것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된다. ‘예수님은 신이니까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고 나는 생각할 때 인간적으로 생각을 해서 예수님도 거기서 큰 위로를 받으면서 전진해 갔을 것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가는 길을 열어놓으시고 주님께서 합당한 일을 배정해 놓으셔서 그 날의 일을 그 날로 하도록 이렇게 축복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의 가신 길에 우리가 동행할 수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하고 당신의 마음속에서 우리가 당신을 알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비록 변할 수밖에 없는 사람일지라도 주님께서 받아주신 것을 감사하고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사랑이 가변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그것을 인정해주시고 위로를 받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사랑과 격려를 오히려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죽으심의 길에서까지라도 우리를 살려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