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6일(토)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서울 성곽길 유적지를 답사했다. 2012 중고역사 학교컨설팅장학지원단 주최로 중산고 이봉규 선생이 안내를 해주셨다. 흥인지문 앞에서 1시 50분까지 모이라고 했는데, 2시가 넘어서 도착하니 벌써 수 십명의 교사들이 모여서 안내를 받고 있다. 자료집을 받고 이동하는 안내자를 따라 옮겨가느라 흥인지문 사진을 찍지 못했다.
오늘의 일정은 다음과 같다. 흥인지문(동대문) - 서울 성곽 - 낙산 공원(전망대) - 낙산 전시관 - 이화장(이승만 대통령 사저) - 한국방송통신대학 내 공업전습소 건물) - 문예진흥원(경성제국대학 본관) -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 김상옥 의사 동상 - 혜화동 로타리(여운형 암살터) - 장면 총리 가옥 등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낙산 근린 공원으로 올라가는 초입이다. 흥인지문에서 큰 길을 건너 이대병원(목동으로 옮김) 자리를 지나 동대문교회가 나오고, 좀 더 가면 잘 정비된 공원길이 나타난다. 답사객들이 60여 명이나 몰리는 바람에 안내자의 설명도 안 들린다. 날도 더운 토요일 오후 시간에 이토록 많은 역사 교사들이 모여들다니, 요즘 서울 성곽길 답사가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는 방증일지도 모르겠다. 낙산 근린 공원으로 가는 안내판 안내자가 성곽의 총안(총구멍)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암문을 통해서 성곽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니 동대문 밖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인다. 낙산 공원길. 멀리 북한산 줄기가 보인다. 다시 아래쪽으로 얼마간 내려가니 낙산전시관이 나온다. 작년에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신 형님을 간병하다가 대학로쪽에서 올라왔던 적이 있다. 낙산은 원래 낙타산, 타락산으로 불렸다고 한다.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서울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서쪽의 인왕산(우백호)에 비하여 산세가 약하여 그것을 보완하는 의미에서 동대문을 '흥인지문'으로 네 글자로 만들기도 했다.
이화장 입구. 해방 후에 귀국한 이승만은 1947년 11월부터 이 곳에 기거하게 되었다. 이 곳은 원래 배밭이었고 이화정이라는 정자도 있어서 이화정동이라고 했다. 이화장은 중종 때의 문신 신광한의 옛 집터이며, 인근에는 효종의 잠저인 용흥궁,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석양루가 있었다고 한다. 이화장 내에는 이승만 박사 동상이 이렇게 서있다. 해방 공간에서 그가 자주 주장했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표석을 붙여놓았다. 본채 건물. 정문 오른쪽으로있어 사랑채 쯤 되는 것 같다. 조각당. 1948년 7월 20일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이 이 곳에 조각 본부를 두고 대한민국 초대 내각을 구상한 곳.
우남 리승만 박사의 양아들 이인수 박사가 나와서 우리에게 설명을 해주고 있다. 1961년부터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단독 정부를 먼저 이야기한 측은 우남 이승만 박사가 아니라 북한이었다고 하면서 남한 단정론의 비판에 대한 피해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대체로 역사의 죄인으로서의 면모는 전혀 없으며, 잘 한 부분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4.19의 혁명 정신과 독재정권으로 인한 희생자들에 대한 사죄라든가 반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아집은 나이를 먹어도 넓어지지 않고 과거의 기억, 그것도 좋은 내용만 회상하면서 살도록 디자인된 것일까? ㅎㅎㅎ 이래서야 역사의 발전이 있을까?
이인수 박사의 말씀이 끝나고 우리는 조각당으로 올라갔다. 매우 협소한 공간이어서 각료가 몇 명 앉아있을 자리도 안되었다. 본채 ㄷ 자 형 안마당 서울사대부속초교 정문의 지주돌이 탑공 공원에 세워졌던 것을 옮겨서 만들었다고 한다. 문화재는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는 것이 순리인데... 구 중앙시험소 건물[현재 방송통신대 역사관]. 구 공업전습소 자리에 세워서 안내표지판에는 구 공업 전습소라고 설명되어 있으나, 1912년 새로 지어서 중앙시험소가 되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근대 초기 유일한 목조 건물이고, 르네상스 양식에 2층으로, ㄷ자형 구조에 독일식 비늘 모양의 외벽과 중앙 첨탑 등도 있다. 한국 근대 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건물이란다.
1907년 구 공업전습소 본관을 지으면서 고종이 향나무를 심고 기념하였다.
경성제국대학 본관. 1928년 건립. 해방 후에 서울대학교 본부로 이용되었다. 철근 콘크리트에 벽돌로 벽체를 쌓고 황갈색의 스크래치 타일로 마감했다. 1975년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본관을 제외한 건물은 철거되었다. 현재는 '예술가의 집'으로 쓰이고 있다. 동숭동 서울대학교 캠퍼스의 유일한 흔적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 본부이자 대학로라는 이름의 근원을 알려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안에서는 전시회가 있어서 구경도 하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얼마전에 방송에서 본 '팝핀현준'이 떠올라서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그 역시 공연을 앞두고서 안무 구상과 구성, 그리고 연습을 철저히 하는 모습을 보고 춤이 그저 춤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부인은 국악 전공자이어서 부부가 함께 공연하는 과정 또한 예술이었다. <춤은 움직이는 사색, 무상이다>라는 귀절이 귀에 새롭다.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김상옥(1890~1923) 열사의 동상. 구한말 군관의 아들로 태어나 1910년 경성영어학교를 다니고, 3.1 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친일 반역자 서모씨외 수 명을 총살하였다. 총독 사이토 마코토 총도글 암살하려다가 발각되어 상해로 망명. 김원봉이 조직한 '조선의열단'에 가입하여 전문적인 테러 훈련을 받는다. 1923년 1월 12일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다수의 일경을 죽이고, 도피하던 중, 1월 17일 새벽 은신처에서 일경 20여명에게 포위된다. 다시 뚫고나와 은신하던 중, 경기경찰부장의 지휘로 기마대와 무장 경관 1천명이 겹겹히 포위망을 좁혀오자, 두 손에 권총을 들고 3시간여 총격전을 벌이다가 10여명을 살상하고 결국 중과부족으로 33세의 나이에 자결, 순국하였다. 동성고등학교 정문 옆에 놓인 4.19 기념비. 동성고 학생들이 여기서 4.19 의거에 참여하였음을 알려준다. 동성고 학생들의 6.25 참전 기념비. 혜화동 로터리. 몽양 여운형이 1947년 암살된 곳. 아무런 표지석이 없다. 차량들만 바삐 지나가고... 평생을 조국 독립과 근대화 운동에 헌신하다가 1947년 7월 19일 대낮에 극우파 청년 한지근이 쏜 총탄에 맞아 운명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되었다.
장면 총리 가옥. 일제 강점기 천주교의 교육운동과 문화 운동을 이끌었고, 광복후에는 국무총리 및 부통령을 역임한 장면 총리가 5.16 군사쿠데타로 죽을 때까지 가택 연금을 당한 곳. 관리사무소와 안내인이 있다. 일반에게 공개된다. 거실 마루에 놓인 장면 총리 흉상 안방에는 이러한 안내판이 여럿 붙어있다. 1949년 초대 주미대사 시절의 장면
답사의 끄트머리가 되니 다리도 피곤하고 앉아서 안내인의 설명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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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nature&love 원문보기 글쓴이: 나무사랑
첫댓글 주최즉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니 대박이네요. 서울 성곽길 걷기가 요즘 한창 유행인 것 같더니, 서울컨설팅장학지원단이 이런 기획을 하였군요. 이렇게라도 많은 선생님들이 현장으로, 현장으로 선생님들을 인도해서 교실에서 힘들고, 지겨운 공부보다 현장을 뛰는 교사들이 넘쳐나는 교육이 이 시대의 혁신 교육의 방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좋은 체험 부럽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의 양아들의 안내하는 내용은 그러네요. 이승만은 미국에 망명해서부터 귀국한 후 보인 여러 처신들이 비판받을 부분이 많은 사람이죠. 특히 해방공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간 사건들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제대로 밝혀져야 한다고 봅니다.
언제 시간내서 초록교육사람들에게 전달 연수 기회 만들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