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까닭을 알수 없는 병이 있었는데, 4월에 서도에서 죽었고, 5월에 능을 지었는데, 왜 9월에야 장사를 지냈는지 약간 의문이 듭니다.
아래의 기록을 보니. 소서노가 독을 써서 죽게 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점차 독을 써왔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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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18년 (BC20)
十月,上與<禮>后‧<類利>謁「神隧」,會群臣議正胤.<召>后見勢不利大怒,與<仇都>‧<仇賁>等退去<牛壤>,曰“依「太伯仲雍古事」,欲讓囯於<類利>太子.”上素以無何之症,又値此難,自然添病.群臣憂之. 以<觧肫>公主為皇子<貝倫>太子妃. <屛>太子爱民間女欲為妻,不愛<萱>公主,上怒欲斬之.<大房良>諫曰“子之不行,父之責也.陛下宜自省而已,何乃作<劉徹>狂事乎.”上改容謝之,廢<屛>太子為庶人.以<萱>公主為<都祖>妻,賜一品公服. 上命群臣立旗於東西,從東者為<斗근>,從西者為<類利>,而試其多少.<斗근>進曰“序長立賢之敎,臣已聞之.今,何此擧而誤此小子耶.”乃自詣立西旗之下.群臣無敢立東者而盡敀于西旗.上,大贊<斗근>曰“賢哉<斗>也.今雖讓于兄,後必自立矣.”乃命<類利>曰“善護<斗근>,使之制南而守成,然後徐徐制坤,可也.”
10월, 상께서 <예>후 및 <유리>와 함께 「신수神隧{國東大穴,天祭터}」를 알현하고 군신들을 모이게 하시어 정윤正胤문제를 상의하셨더니, <소召>후는 세勢가 불리함을 알고는 크게 노하여 <구도仇都> 및 <구분仇賁> 등과 더불어 <우양牛壤>으로 물러나 머물면서 “「태백중옹고사太白仲雍古事{周文王의 伯父와 仲父인 太伯과 仲雍이 멀리 도망하여 보위에 뜻이 없음을 보였다는 옛 얘기}」를 좇아 나라를 <유리>에게 양보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상께서는 평소 까닭을 몰라서 고칠 수 없는 병이 있으셨음에도 또 이런 난관難關에 부닥치시매 자연히 병세가 더 나빠지셨고, 군신들이 그 일을 걱정하였다. <해순觧肫>공주를 황자인 <패륜貝倫>태자의 비로 삼았다. <병屛>태자가 민간民間의 딸을 어여삐 여기어 처로 삼고자 하면서 <훤>공주를 아끼지 않았기에, 상께서 노하시어 그를 참하려 하셨더니, <대방량>이 간언하길 “아들의 행실이 바르지 않은 것은 아비의 책임이옵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자성自省하셔야 하올 것인데, 어찌 <유철劉徹{西漢世宗武帝}>이의 미친 짓을 하시려 하십니까?”라 하였다. 이에 상께서는 얼굴빛을 고쳐서 용서容恕를 빌고 <병>태자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드셨으며, <훤>공주를 <도조都祖>의 처로 삼아주고 1품 공복을 하사하셨다. 상께서 군신들에게 명하시어 동쪽과 서쪽에 깃발을 세워놓고, 동쪽으로 가는 자는 <두근>을 위하는 것으로 서쪽으로 가는 자는 <유리>를 위하는 것으로 하여서 많고 적음을 가리게 하셨더니, <두근>이 앞으로 나와서 아뢰길 “평온한 시절에는 장자長子를 세우고 혼란한 시절에는 현명賢明한 이를 세운다는 가르치심을 신臣은 이미 들었습니다. 지금, 어찌 이런 일을 하셔서 이 소자를 그릇되게 하시려 하십니까?”라 아뢰고는 스스로 서쪽 깃발 밑으로 가서 섰더니, 군신들은 아무도 감히 동쪽에 서지를 못하고 모두들 서쪽 깃발로 모여들었다. 이에 상께서는 <두근>을 크게 칭찬하시며, “현명하구나, <두근>아! 지금 비록 형에게 양보하더라도, 이후 반드시 스스로 보위에 설 것이다.”라고 이르시고는, <유리>에게 명하시길 “<두근>이를 잘 감싸주어야 할 것이며, <두근>이로 하여금 남방南方{현금 河北省南部즉涉羅와 河南省・山東省方面}땅을 제압하고 지키게 한 연후에{남쪽으로 내려가서 땅을 차지하여 즉 나라를 세워서 지킬 수 있게 도와준 연후에?}, 서서히 곤방坤方{서남방,西漢}을 제압해야 할 것이다.”라 하셨다
(BC19년)四月,<西河>人<高星>等七十五人献猉獜,五彩具備丹角而碧蹄.上,與<召>后,詣<鸞庭>観之曰“<巨娄>去而猉獜来.吾其上天者歟.”<召>后怒曰“汝,年尙少,統業未盡,何為此言.”上曰“万事如浮雲而已.”遂臥而不言一晝一夜,命<召>后傳神釼金璽于正胤,<召>后乃抱釼璽而泣.上曰“善事新主,可也.何乃泣為.”后乃如東宮傳宝.東宮不受曰“父皇無恙,何作此事.”后曰“無何之症不可測矣.權,受之,何如.”東宮乃與后謁上.上,已不能言,只抱后手加于東宮之手而崩.上弦之月将落而光.后乃掩面而抱新上曰“妾之一生,從此,在于陛下.”新上曰“母邪.妻邪.囯之宝欤.汝,無我,則何以為后.我,無汝,何以為帝.”遂登床而歓好.月色皝皝,<召>后以臂蔽目曰“何,月之皝皝.”新上曰“<女楇>之夕,白日昭昭.今,卿之夕,紅月皝皝.皝皝昭昭,皆天之賜也.何,羞之有.”后,乃歛容而起,陪上而出.<烏伊>等俯伏山呼,遂卽位於新宮「鸞坮」. <旃>后‧<大房>后‧<鵲>氏‧<平>氏等欲殉,先帝以遺詔禁殉之.
4월, <서하西河>사람 <고성高星> 등 75인이 기린猉獜{죽음을 암시하는 짐승?}을 바쳤더니, 5색五色을 모두 갖추고 붉은 뿔과 푸른 발굽을 지녔었다. 상께서 <소召>후와 더불어 <란정鸞庭{石鸞臺의 뜰}>으로 가시어 그 것을 보시고는 이르시길 “<거루巨婁>가 가더니 기린猉獜이 왔구먼. 내가 아마도 죽으려나 보지?”라 하셨더니, <소>후가 화를 내며 아뢰길 “당신께서는 아직 젊으시고, {천하} 모두를 아우르시는 일을 끝내지도 않으셨는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라 하였더니, 상께서 이르시길 “만사萬事가 뜬구름 같을 뿐이오.”라 하시고는, 자리에 누우시어 하루 낮과 하루 밤을 아무런 말이 없으시다가, <소>후에게 명하시어 정윤正胤{東宮,類利}에게 신검神劍과 황금옥새黃金玉璽를 전하게 하셨더니, <소召>후가 신검과 옥새를 부여안고 울고만 있기에, 상께서 “새 임금을 잘 섬겨야 할 것이거늘, 어찌 울고만 있단 말이오.”라 하셨다. 이에 <소>후는 마침내 동궁으로 가서 보물寶物들을 전했더니, 동궁이 받지 않으면서 “부황父皇께서는 몸에 병病도 없으신데 어찌 이런 일을 하신단 말이오?”라고 일렀고, 이에 <소>후는 “까닭을 몰라서 고치지 못하는 병이신지라 앞날을 예측할 수 없음이니, 헤아리시고서 받으심이 어떠시겠습니까?”라 일렀더라. 동궁이 <소>후와 더불어 상을 찾아뵈었더니, 상께서는 이미 말을 하실 수 없으신지라 다만 <소>후의 손을 쥐어다가 동궁의 손에 포개놓으시고 숨을 거두셨고, 상현上弦달도 곧 떨어지려 어른어른하여져 있었다. <소>후가 이윽고 얼굴을 가려드리고 새 임금을 품에 안고서 아뢰길 “첩의 일생이 이리하여 폐하의 손에 남게 되었습니다.”라 하였더니, 새 임금{類利}이 “어머니인지? 처인지? 나라의 보배이시오. 그대는 나 없이 후가 될 수 없었음이고, 나는 그대 없이 어찌 임금이 되었겠소?”라 말하고는 침상에 올라서 기뻐하며 정을 나누었다. 달빛月色이 황황遑遑{뿌옇다}하여 <소>후가 팔로 눈을 가리고서 “왜, 달이 황황하지요?”라 하였더니, 새 임금은 “<여왜女媧>의 밤일에는 흰 태양이 소소昭昭{밝게 빛나다}하였다지만, 지금 경의 밤일에는 붉은 달이 황황하오. 황황하건 소소하건 모두 하늘이 내린 것이니, 어찌 겁낼 일이겠소.”라 하였다. <소>후가 이에 얼굴빛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상을 모시고 밖으로 나갔더니, <오이烏伊> 등이 부복俯伏하여 임금의 만수무강萬壽無疆하시길 외쳤으며, 이윽고 새로 지은 궁{石}의 「란대鸞臺」에서 즉위하였다. <전旃>후・<대방大房>후・<작鵲>씨・<평平>씨 등이 순사殉死{따라죽기}하려 하였으나, 선제{芻牟}께서 조칙詔勅을 남기시어 순사를 금하셨다.
첫댓글 소서노가 독을 써서 추모를 죽였다는 것은 억측입니다.
추모의 사망시기와 추모의 사망사실을 알리고 유리가 즉위한 시기가 다른 것은 유리가 고구려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관련 기록이 어딘가 있을텐데 찾아 보심이 어떠한지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제 생각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편에 소서노 이름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후대 사가들이 알아차렸기 때문에, 아예 소서노와 비류, 온조조차 언급되지 않은 것이지요. 고구려사가 입장에서는 세사람이 공모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성일님은 언제쯤 연구자료들이 정리되어 책으로 내실 예정인지 궁금합니다.
연구자료들을 책으로 내신다면, 다른 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