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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智慧(지혜)의 사람’이 되기를 念願(염원)하는 ‘성령님의 侍從’, ‘殉命의 사람’ 배종부 목사의 묵상3 (650P)
지혜 - 교법사 가말리엘의 지혜, 참 믿음과 참 신자의 자세 (10P)
사도행전 5:29~42절
29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 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30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32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33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 새,
34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35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36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37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38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40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 들여 채찍질 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본문은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고 섰는 베드로와 및 사도들의 담대한 모습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몇 달 전에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신 바로 그 공회입니다. 빌라도 앞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는, 실제로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먼저 처형을 결정하고, 그리고 나서 빌라도의 이름을 빌려서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한 원흉이요 본거지인 것입니다. 지금 그 현장에 베드로와 요한과 제자들이 서 있습니다. 잘못 삐끗 하는 날이면 그들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환한 일입니다. 이렇듯 심각하고 위험한 시간입니다.
보십시오. 지금 사도들은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서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이 산헤드린 공회는 얼마 전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함으로 부끄러움을 샀던 곳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현장에 베드로가 다시 섰습니다. 그 때는 공회의 문 밖에 앉았다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재판장 안에 당당히 나서서 담대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상황이 이렇듯 바뀔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 가시기 전 재판 받으실 때에 도망 갔던 제자들이 이제 용기를 얻어 다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담대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디서 이런 담력이 생겼겠습니까?
사도행전 4장을 보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은 말씀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19절)."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 옳다고 시간 마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저들은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보다 더 큰 위안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 만이 아신다고 하는 사실이 온전히 받아 들여지지 않고 거리낀다면 그 사람은 죄인입니다.
세상 사람 다 몰라도 좋다, 하나님만 아시면 된다.
바로 이런 단순한 마음이 무서운 용기의 근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독해지고 쓸쓸해지고 약해지고 의심이 많아지고 하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는 다 내가 하나님 앞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망각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내 운명, 내 생명, 내 영원한 생명이 지금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듣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참된 의미에서의 이 같은 경건이 필요합니다. 신학적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경건 의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경건 의식이 있을 때에 용기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두려울 게 아무 것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어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사실이 용기를 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하게 분명하게 믿기에 나의 부활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저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지금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원과 만나는 시간입니다. 이제는 죽어도 좋습니다.
죽으면 부활할 것이니까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에 거칠 것이 없습니다. 부활 생명을 피부로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여기에서 용기가 비롯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사도들의 마음을 감동 시킴으로 부활 생명이 믿기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나 자신을 위한 사건이라는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저들의 마음을 충만하게 감동 시킬 때에 거칠 것이 없어집니다. 이제는 원수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오히려 핍박하는 자들을 불쌍하게 여깁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한 마음을 가지게 됨으로 사도들이 저렇듯 의연하게, 담대하게 나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지 말라고 집중적으로 협박하는 순간에 그 핍박 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그리스도 되신다고 정면으로 증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베드로와 사도들이 핍박 자들을 향하여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32절)".
이 말씀이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을 크게 격분시켰다고 본문은 증거 합니다.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33절)" -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 그 말씀을 듣고 크게 노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들은 의인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메시야이신 그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증거 합니다. 그 말씀대로 하면 저들은 의인의 피를 흘리게 한 죄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하고 크게 반박합니다. 이 위협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우리가 그 증인이라고 담대하게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당신들이 메시야를 죽였소. 당신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죄를 범한 것이오.” 하고 핍박 자들을 정면으로 정죄하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 말씀을 듣고 충격을 받은 저들은 "어찌할꼬" 하고 회개해야 마땅했습니다 마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회개는 커녕 더욱 격분하여 펄펄 뛰었습니다. 이를 갈고 부들 부들 떨며 분노했습니다. 이 분노가 극에 달한 저들은 결국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게 됩니다(행 7:54). 이렇듯 살기 등등하고 험악한 상황을 오늘의 본문은 "크게 노하여"라는 한 마디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본문을 말씀합니다. "사도들을 없이 하고자 할 새(33절)" - 분노한 저들의 마음이 사도들을 죽이겠다는 마음으로 굳어지고 있는 순간입니다.
바로 그 때에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바리새인 교법사가 이를 만류하고 나섭니다. 앞에 나아 가 지혜로운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 가말리엘에 대하여 우리가 아는 바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다만 사도 바울이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바입니다.
사도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입니다. 본래 가말리엘의 제자였습니다. 히브리사람들의 문헌에 보면 힐렐이라고 하는 유명한 율법사가 있습니다. 많은 문헌에 그의 모습이 실려 있습니다.
「탈무드」에도 그가 한 말이 많이 있습니다. 온 민족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유명한 랍비 힐렐의 손자가 바로 가말리엘입니다. 그 역시 힐렐 만큼이나 유명한 사람입니다. '율법의 영광'이라고 하는 별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좀 더 높이기 위하여 라반이라고 불렀다 합니다. 그가 죽었을 때에 사람들은 '율법의 영광은 갔고, 그 정결과 성결도 죽었도다'라고 기록하였다 합니다. 그러나 무엇 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사도 바울의 스승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전설에 따르면 그가 말년에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합니다 마는, 그 역사적 근거는 희박합니다. 어쨌든 가말리엘은 당시 대단히 존경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사두개인만 있는 자리에서 바리새인인 가말리엘이 나서서 지혜로운 말을 합니다. 아마도 그 역시 바리새인으로 베드로나 요한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을 증거하고 있으니까요. 적어도 상당 부분에서는 서로 동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신학적으로는 사도들과 의견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말리엘은 사도들을 꼭 죽여야겠다는 생각은 가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가말리엘은 "이스라엘 사람들아!" 라는 말로 말문을 엽니다. "여러분" 하지 않고 "이스라엘 사람들아!" 하고 말합니다.
이것은 선민의 특권, 선민의 영광을 내세우기 위함입니다. 먼저 선민의 긍지를 저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택함 받은 백성입니다. 그러니 소홀히 처신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는 의식을 깨우쳐 주고저 한 것 같습니다.
이어서 그는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36절)," 라고 역사적인 예를 들어 말합니다. 이것은 히브리적 방법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추상적 이론으로 설명하지 않고, 언제나 역사적 사건으로 설명을 합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사실을 들어서 설명하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가말리엘이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예로 들고 있는 역사적 사건은 두 가지입니다.
그 첫 번째 예가 바로 ‘드다’라고 하는 사람에 관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드다가 죽은 서기 4년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태어 나신 바로 그 때입니다. 드다는 자칭 메시야라고 나섰던 사람으로 그가 갑자기 죽음으로 얼마 동안의 혼란기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드다 말고도 여러 사람이 나타나서 자칭 메시야라고 하면서 선지자의 음성이 사라진지 오랜 유대에서 많은 일들을 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드다는 “나는 여호수아의 후예다. 나는 여호수아처럼 이 민족을 구할 것이다. 맨 발로 요단강을 건너게 해 줄 것이다” 하는 이야기도 서슴지 않고 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선동을 해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를 따르던 사람의 수가 약 사백이나 되었다고 오늘의 본문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드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모두 흩어져 없어졌다고 합니다.
가말리엘은 두 번째 예로 ‘유다’를 들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보는 대로 구레뇨가 시리아 지방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그 곳 거민들로 호적을 하게 했습니다. 세금을 더 많이 거두어들이기 위하여 호적을 하게 하는데, 그 때에 갈릴리 사람 유다가 나서서 이를 저지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하나님께만 세금을 바칠 것이지, 그 누구에게도 세금을 내지 못한다”라는 말로 민족 의식을 고취 했습니다.
로마 정부를 대항하여 일종의 혁명을 일으킨 것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로마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유다 역시 결국은 잡혀서 죽었습니다. 그가 죽고 나니 그 무리들이 다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두 사건에서 보는 대로 주동자가 없어지는 순간에 추종자들이 조용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따르던 그 무리들이 흩어질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흩어지기는 커녕 자꾸만 일어 나고 있단 말입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복음을 듣기 위하여,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모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섣불리 대항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에서 가말리엘은,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38-39절)”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 되고, 이것이 사람들의 광적인 운동이요 인간적인 조작으로 이루어진 운동이라면 이제는 없어질 때가 되었으니, 조용히 기다려도 답답할 것이 없지 않느냐?” 라는 지혜로운 말을 하게 됩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지도자의 말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저들이 이 말을 받아 들임으로, 베드로와 사도들이 풀려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사건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가말리엘의 설득을 따라 사도들을 풀어 주기로 결정하고도 사도들에게 계속 채찍질을 가하고 있습니다. 매질을 합니다.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 들여 채찍질을 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40절)," - 채찍질을 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음 전하는 것을 금한 뒤에 풀어 주었다고 합니다. 놓아 줄 양이면 그냥 놓아 줄 일이지, 왜 때리고 놓아 주는 것입니까?
참으로 못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잠깐 이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히브리사람들의 문헌 가운데 「미쉬나」라고 하는 책에 보면 이 체형(體刑)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해 놓은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수형자의 상반신을 벗겨서 두 손을 기둥에 묶어 놓고 가슴과 어깨를 열세 번씩 채찍으로 때리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이 태형(笞刑)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신명기 25장 을 보십시오.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과다히 때리면 네가 네 형제로 천히 여김을 받게 할까 하노라(3절)."
매는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죄를 책하기 위하여 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매가 지나치다 싶으면 그 사람의 인권은 무너지고 맙니다. 그 사람의 명예는 추락하고 맙니다. 때문에 태형을 가하려거든 40대를 넘기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따라서 저들은 39대를 때립니다. 이것이 저들의 관례입니다. 저들이 사용하는 채찍은 두 개의 가죽끈을 묶어놓은 것입니다. 그 가죽 끈 하나는 송아지 가죽으로 끝이 네 가닥으로 있고, 또 하나는 나귀 가죽으로 끝이 두 가닥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채찍으로 39대의 매를 때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 태형을 가할 때에 보면 재판장이 멀리서 "때려라" 하고 명령하면 한 사람은 때리고 한 사람은 옆에서 그 수를 셉니다. 이렇게 해서 39대를 때리는 것입니다.
특별히 재미 있는 것은 매질을 하는 동안에 제사장은 성경을 읽는다는 점입니다. 그 때에 읽는 성경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너의 재앙과 네 자손으로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신 28:58, 59)."
이것이 가장 먼저 읽는 성경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신명기 29장 9절의 말씀을 읽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그리고 "오직 하나님은 자비하심으로 죄악을 사하사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 분을 다 발하지 아니하셨으니," 라는 시편 78편 38절의 말씀을 읽습니다.
이 말씀들을 읽는 동안에 태형이 치러지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참으로 대단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4절을 한번 보세요.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니…"
사도 바울도 40에 하나 감한 39대의 매를 무려 다섯 번이나 맞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이 매를 맞았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 문제를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같은 형벌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다.'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본문 말씀을 통하여 가말리엘의 말을 자세히 살펴 보십시다.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35절)."
이 말의 내용인즉 상관하지 말자, 그대로 내버려 두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먼저 이 일은 하나님의 섭리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자는 것입니다. 이 일이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면 막을 길이 없을 것이요, 사람에게서 난 것이면 저절로 없어질 것이 아니냐, 없어질 때가 되었으나 두고 보자는 것입니다.
아주 지혜로운 말 같이 들립니다 마는, 너무나 소극적입니다. 더욱이 이 말에는 만일 우리가 이 일을 임의적으로 대하다가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걱정스러움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기회주의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가말리엘은 지금 뒤로 물러 서서 두고 보자,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자, 굳이 우리 손을 대지 말자, 하는 아주 지혜로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인간의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때로는 편견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하나님을 대신하여 재판장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나라는 더 큰 악을 막기 위하여, 사회적인 악을 막기 위하여 사형이라는 처형 제도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격히 따져 말하면 그 누구에게도 사람을 살리고 죽이고 할 권리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특별히 사람의 판단이라는 것은 아무리 잘 한다고 해 봐야 얼마 뒤에 생각해 보면 잘못한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더구나 사람을 죽이는 일입니다. 어딘가 가두어 놓았다가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그 자리에서 사도들을 죽이고자 합니다. 여러분! 이런 판단을 섣불리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가말리엘이 만류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면 됐지, 그 제자까지 죽이려고 하느냐, 한 번으로 족하다...” 라고 만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적, 인도주의적 겸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적 겸손이기에 앞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지혜입니다.
내가 누군데 남을 심판합니까?
우리는 재판장이 아니더라도, 어느 경우에 재판장이 될 때가 있습니다. “옳다 그르다,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하고 판단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어떤 때에 누군가를 나쁜 사람이라고 실컷 떠들어 놨는데, 나중에 보니 좋은 사람입니다. 아차 합니다 마는 이미 늦었습니다. 얼마나 큰 실수입니까?
그 때에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것을 왜 말을 해 버렸던가 하고 얼마나 후회를 합니까?
그러므로 가말리엘은 말합니다. "너희가 이 사람들에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참으로 지혜로운 충고입니다. 지성인의 자세입니다.
세 번째로 가말리엘은 지금 저들이 무척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든 흥분된 가운데서 처리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또한 피해 의식에 매여 일을 처리하면 더욱 큰 실수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 저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죽이자, 살리자 하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데 대한 가책 때문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이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렸습니다. 그것이 잘한 것으로 인정되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잘한 짓이 아닙니다. 더욱이 오늘의 되어지는 사건을 보니, 정말로 잘못한 것 같습니다. 이제라도 바른 자세를 취하고자 한다면 회개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저들에게는 회개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 가책 의식이 역작용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없이 하겠노라 하게 된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똑 같이 적용되는 이야기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이 사울일 때에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일입니다.
이에 대하여 어떤 분이 심리학적으로 연구해서 박사 논문을 썼는데, 그것을 제가 읽어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울일 때에,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큰 고민이 생겼습니다. 보십시오. 천하에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이 죽는데 그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이것이 사울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더구나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죽이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마 사울은 제대로 잠도 못 잤을 것입니다.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스데반은 의인이다” 하는 생각과 함께, “아니다 죽어 마땅한 놈이다” 하는 생각이 대립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의인이면 사울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의인을 죽인 죄를 범한 것이 되고 맙니다. 이 갈등 때문에 절반은 미쳤다는 것입니다. 미치지 않고야 다메섹까지 왜 가려 했겠습니까? 다메섹까지 피난 간 사람들을 잡아다가 죽이겠다고 하는 극악한 마음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심리적으로 그 마음 속에 내가 한 일이 잘못이었다고 하는 가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역작용으로 나타나서 더욱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좋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마는 가끔 보면 손찌검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손찌검을 하는 것입니까?
가책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자신 만만하고 스스로 잘 했다고 생각하는 데 남들이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그럴 때에 내 말이, 내 행동이 옳았다고 말하면 그만일 것을 왜 소리가 커지고, 손이 나가느냐는 말입니다. 가책 때문입니다. 찔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없애 버리려고, 죽여 버리려고 합니다. 또 살인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죽인 데에 대한 가책 때문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이 하는 말이 정면으로 저들의 가슴을 찌르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처럼 극악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들은 지금 객관적 진리, 우주적 진리, 성서적 진리에 의하여 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재판은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들의 피해 의식에 의하여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재판은 흥분적인 재판이요, 전혀 냉정함이 없는 재판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냉정을 잃어 버리면 법은 무너지고 맙니다. 더구나 자신의 이해관계가 개입되면 그 재판은 잘못되고 맙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 가말리엘은 '지금은 때가 아니다, 이 문제는 그렇게 처리할 것이 아니다. 그러니 흥분을 가라 앉히고 냉정을 찾아라'하고 저들에게 충고합니다. 저들은 가말리엘의 말을 듣고 냉정을 찾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옳다 그르다 하고 그 당장에 다툴 것이 아닙니다. '하룻 밤만 자고 내일 다시 만납시다, 일주일 뒤에 다시 만나 좀 더 기도해 보고 만납시다'하고 흥분을 가라 앉힐 줄 알아야 합니다. 당장 그 자리에서 판단을 해 버리는 순간, 지위로부터 멀어진 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흥분을 멈추어야 합니다. 바로 이 흥분된 자세가 문제입니다. 이 피해 의식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각 가말리엘은 '냉정하십시다. 지금은 냉정을 찾아야 할 시간입니다. 객관적 진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시간입니다.' 하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가말리엘은 저들에게 역사적 의식을 가질 것을 권유합니다. 역사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과거에 되어졌던 일들을 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이렇게 흥분할 것이 아니라고 말하게 됩니다.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34절)…"
가말리엘이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가말리엘은 베드로와 요한을 밖으로 내 보낸 연후에 저들에게 말을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 받으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자유롭게 말을 주고 받으려는 데에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일대 일로 단둘이 마주할 때에는 말을 바로 할 수도, 자기 잘못을 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마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 잘못을 인정하기란 어려운 법입니다. 여기에 형제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동생 앞에서 형을 때리면서 잘못했다고 빌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죽어도 안 합니다.
그러나 일대 일로 단 둘이 있을 때에는 잘못했다고 하라면 얼마든지 합니다. 하지만 동생이 옆에 있는 상황에서는, 자신이 매 맞는 것을 동생이 지켜 보는 상황에서는 좀처럼 잘못했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및 사도들이 서 있는 그 앞에서 대제사장이 어떻게 '가말리엘 당신 말이 옳소.'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잘못한 것 같소'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일대 일로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조용한 충고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공개적으로 여러 사람 앞에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말리엘은 또 한번 냉정을 찾는 비결로 사도들을 나가라 해 놓고, 자기들끼리만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순간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아이들 앞에서 부부 싸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나 형 앞에서 동생을 나무라도 안되고, 동생 앞에서 형을 때려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때리면서 '너는 왜 동생만 못하냐' 하고 꾸중해서도 안됩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어떤 교훈도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보십시오. 오늘 가말리엘이 지혜롭게 행합니다. 먼저 사도들을 나가게 한 뒤에 감정을 가라앉히고 냉정을 되찾아서 말하게 합니다.
그런가 하면 가말리엘은 소극적인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아주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나느니라(마 5: 37)" 라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Yes면 Yes, No면 No 요,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른 것입니다. 두고 보자니요.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올바르지 못한 자세입니다. 분명하지 못합니다.
말을 똑바로 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자기의 명예와 자기의 운명을 다 걸어서라도 이것은 옳은 일이요, 저것은 틀린 일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가말리엘은 지혜로운 것 같았으나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지혜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은 신앙적인 지혜가 아닙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가 아닙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 태도입니다. 지극히 소극적이고 불신앙적입니다.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른 것이지, 두고 봅시다 라니요. 이런 미온적인 자세가 문제입니다. 말이 분명해야 합니다. 태도가 분명해야 합니다.
본문 말씀 말미에 참으로 감동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41절)."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매를 맞고 좋아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매 맞았으니까요.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몸에 채우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요, 이로써 하늘의 영광이 있는 것을 알기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 :10)"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기에, 저들은 매 맞고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들은 매 맞고 고난 당하면서 신세 타령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팔자가 기구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다 이 신세가 되었느냐고 한탄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을 특권으로 여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특권으로 여기고 감내합니다. 이것은 내게 주신 은혜입니다. 특별한 은혜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는 것도, 수고할 수 있는 것도 은혜요 특권입니다. 더구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순교하는 것은 최고의 영광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매를 맞는 것은 아주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다.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나라에 마포삼열이라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 마포삼랑 목사님도 우리 나라에 와서 일생을 한국교회를 위하여 수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포삼열 목사님의 얼굴에는 큰 활자국 같은 흉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노방전도를 할 때에 어느 술 취한 사람이 술병을 깨뜨려서 던졌는데 그것이 그대로 얼굴에 맞아 생긴 상처였습니다. 옛날에는 수술하는 재주가 좋지 않아서였든지 사진에도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큰 상처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목사님은 그 때에 자신에게 병을 던진 사람을 용서함으로 결국 그 사람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기 흉한 이 상처가 오히려 선교 활동을 하는 데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이 어디 가서 설교를 하거나 헌금을 거둘 때에는 으레 성황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상처 한번 보고 모두가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했다고 합니다. 그 상처가 훈장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감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몸에 상처가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예수님을 위하여 어느 한 쪽이 뚝 떨어져 나간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희생한 흔적이 전혀 없으면서 어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매 맞고 능욕 받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영광으로 여겼다고 말씀합니다.
이어서 본문은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42절)"라고 말씀합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가르치기를, 전도하기를 쉬지 않고 더욱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입니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도들은 방금 매를 맞고 나와서, 그 위험을 알면서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증거하기를 쉬지 아니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입니다.
지혜 - 아름다운 남는 인생의 지혜 (8P)
사람이 머물다 떠난
자리는 어떤 흔적이든
흔적이 남기 마련입니다.
결혼식이 끝난 후에는
꽃잎과 꽃가루가 남습니다.
군인들이 야영하다 떠난
자리에는 텐트 친 자리와
트럭의 흔적이 있고,
야영객이 놀다 떠난 산
계곡에는 쓰레기와 음식물
찌꺼기가 남아 있습니다.
사람이 이 땅에 머물다
떠나면 크게 두 가지로
흔적이 남게 됩니다.
구한말의 매국노 이완용은
지금까지 비참하고 더러운
이름으로 남아 있지만,
조국을 위해 제 한 몸
초개같이 불살랐던
안중근 의사는 울면서
달라 붙은 아들에게,
“아들아!
너는 나 만의
아들이 아니다.
나는 너 만의 아비가 아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상해로 떠났던 윤봉길 의사는
오늘날도
찬란하고 자랑스러운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람은 자손을
흔적으로 남깁니다.
시인은 시로 말하고
음악가는 오선지로 말을 합니다.
화가는 그림으로 말하듯
그 분이 남기신 흔적입니다.
아브라함이 머물다 떠난
자리에는 천막 친 자리와
제단 쌓은 자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떠날 텐데
어떤 흔적을 남겨야 합니까?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평소
한 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날 그를 땅에 묻고
돌아 가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말을 듣고 싶었답니다.
아브라함 링컨 그는
잡초를 뽑고
꽃을 심다 떠난 사람이다.
얼마나 멋진 인생입니까?
얼마나...
자신의 삶에만 너무
집착하지 맙시다.
삶 자체에만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문에
자신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자신을 믿읍시다.
자신감이 힘입니다.
자신은 이 세상에
하나 뿐인 존재입니다.
자기 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를 합시다.
인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사랑을 자신의 것으로 만듭시다.
참 다운 나로 살아 갑시다.
나 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열심히 노력합시다.
체면을 벗어 던지고
눈치를 보지 말고
내 길을 가면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자신의 삶을 영위합시다.
삶을 배우기 위해
슬픔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고통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좌절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슬픔도 인생의 일부입니다.
고통도 인생의 일부입니다.
좌절도 인생의 일부입니다.
슬픔을 가슴에 안아 보세요.
그리고 버리세요.
고통도 가슴에 안아 보세요.
그리고 잊으세요.
좌절도 가슴에 안아 보세요.
그리고 지우세요.
신을 슬픔으로,
고통으로,
그리고 좌절로 구속하지 마세요.
슬픔이나 고통이나 좌절을
마음에 담아 두면 안됩니다.
기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슬픔이고 고통입니다.
좌절은 삶을 어긋나게 하여
인생을 포기하게 하는 암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을 합시다.
사랑을 주는 데 인색하지 맙시다.
사랑 한다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사랑은 간단합니다.
복잡한 것은 우리들입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사랑한다,
고맙다,
수고했다,
미안하다,
괜찮다... 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시다.
사랑은 이웃과 기쁨을
나누는 일입니다.
기쁨을 나누는 삶
얼마나 아름답고
축복 받을 일입니까?
기쁨을 나누며 일하고,
사랑을 나누며 사는 인생!
얼마나 멋진 인생입니까?
지혜 - 관계
저 사람은 나와
틀린 게 아니라
다만 다를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 들인 순간부터
나는 관계에서 더욱 자유로워진다.
한 하늘 아래 함께 숨 쉬고 있는 걸
받아 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지...
돈이 많다는 사실 하나로
원죄인 자본가,
권력을 휘두르는 자와
빌 붙은 자,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
남의 아픔에
무관심한 개인주의자,
가족에 안주해 버리는
종족 번식 주의자,
욕망을 쫓아 인생을
낭비하는 쾌락주의자,
카드를 긁고 다니는
무절제한 사람,
감성하고는 거리가
먼 감맹 인간,
말 보다는 주먹이
앞서는 폭력가,
행동은 않고 말만
앞서는 사람,
인간미가 없는
냉정한 실리주의자,
자기 생각 만이 옳다고
우기는 사람......
모두가
또 다른 내 모습이고
숨겨진 열등감의 표현인 걸...
단지 그는 나와 다를 뿐.
부모는
큰 가시고기를 닮아 버렸다
큰 가시고기는
해 마다 초봄이 되면
우리 나라 동해와
남해 일부 강 하구에서
볼 수 있는 무리들
일 년에 한 번씩 강을
거슬러 올라 와
물의 흐름이 잔잔한 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알을 낳지요.
수컷 큰 가시고기는 알들이
부화하여 자랄 때까지
먹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새끼들만 돌보다
죽음을 맞이합니다.
자연이 가르쳐 준 대로
자신을 희생하여
자식을 키우는
큰 가시고기들의 사랑법!
사람들도 부모는 자식들에게
큰 가시고기가 되어
죽을 힘 다해 뒷바라지 하다가
큰 가시고기 처럼 죽어서도
자식에게 봉사를 하는 사회
부모는 이제 큰
가시고기가 되어 버렸다.
부모는 큰 가시고기를
닮아 버리고 말았다.
젊은 사람들아!
생각 좀 해 보자.
생각 해 보자.
부모들이 자네들을 낳아 기를 때
마른 자리 진 자리 갈 눕히느라
동짓달 긴 밤도 그렇게도
짧았는데...
남 보다 잘 가르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마음 놓고 먹고
놀지도 못하고
대학 뒷바라지,
결혼 걱정까지,
그리고 취직 밑천까지
다 대 주다 보니...
허~어! 어느 새 머리는 반백 되고
눈 귀도 잘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아서
후휴 한숨 쉬니,
인생 환갑 나이
축 없이
내려 앉았구나
직장 퇴직 절로 되고
남은 재산 긁어
모아 보니 텅빈 둥지 뿐...
반찬 없는 아침 저녁
그래도 끼니는 넘기지만
노후 준비란 숙제가 눈 앞에 닥쳐
이 문제 풀 길이 없구나.
부모가 큰 가시고기를 닮은 게 아니라
자식들이 큰 가시고기 새끼 닮아
부모를 다 뜯어 먹었는데...
이 빈 둥지를 채워 줄 사람은
사람은 자식들 뿐인데,
모른 체 하는 내 자식들
마음 속을 알고 싶구나.
사람들아!
큰 가시 고기
닮은 아들이거들랑
둥지에 있는 노후 식량은
절대 털지 말고
꼭꼭 숨겨 뒀다가
노후가 섧지 않도록
밥은 먹어야 하네~!
이 말 뜻 모르면 자네는
영낙 없는 큰 가시고기
꼴 되네
詩庭 박 태훈의
‘해학이 있는 아침 중에서...’
지혜 - 사랑을 얻는 지혜
지은이: 발타자르 그라시안
단테, 신곡
만토바의 다정한 분이여!
그대의 명성은 아직까지도 그대로 남아 있고
세상이 존속하는 한 오래 오래 전해질 것입니다.
소중한 내 벗이여!
이제 운명의 적을 만나 황량한 산허리에서
길을 잃고 헤매이다가
사나운 맹수에게 쫓겨서 돌아 서려고 합니다.
고귀한 말씀과 영혼의 구원을 위한
모든 방법으로 그를 구하시어
나에게 위안을 베푸소서.
사랑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습니다.
신 앞에 설 때, 나는 그대를 칭송 하겠습니다.
사랑에 대하여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걸어라. 사랑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사랑은 수 많은 미덕들
중에서 가장 눈부신 빛을 가지고 있으며, 그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 사랑을 귀중하게 여기고
지혜의 초석으로 삼아야 한다.
명예의 왕관을 차지하기 위해 미덕들 사이에서 분쟁이 벌어졌다. 명예의 왕관은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했다. 그곳에 모인 미덕들은 완벽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모두 왕관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했다. 고결한
정신, 위엄, 권능, 관용, 찬미, 호감, 인내심, 정보, 지식, 사랑, 판단력, 운명, 공정함, 진지한
태도, 평화, 정의, 너그러운 마음, 운둔, 명성, 신중한 행동, 현명, 예리함, 모범, 실용성, 용기,
실천력, 광명, 경계심,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마음, 자비, 희생, 용서를 비롯한 위대하다고 할
수 있는 모든 자질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처음에는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경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분위기가 점점 달구어지자
미덕들은 후견인까지도 경쟁에 끼여 들었다. 그들의 후견인들은 한 때 명성을 날렸던
영웅 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장점을 앞세우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경쟁을 벌였다. 현인은
이성을, 용사는 용기를, 군주는 권능을 앞세우면서 왕관을 얻기 위해 논쟁을 벌였다. 모든
미덕들이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누가 왕관을 차지하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분쟁은 혼란의 아들이므로 그들은 지혜로운 재판관에게 맡기자고
결정했다.
이 재판의 적임자는 바로 진실이었다. 그들은 진실이 머무르고 있는 동굴로 찾아 갔다.
수 많은 미덕들의 요청을 받게 된 진실은 무척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진실은 만인의 존경을
받았다. 먼저 진실은 그 자리에 모인 미덕 들을 칭찬했다. 그들은 모두 저마다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진실은 판결을 내리기 시작했다.
탁월한 자질들이여! 참으로 존경 받을 만한 미덕들이여!
진솔하게 고백하건대 나는 당신들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진실을 밝히지 않을 수는 없겠지요.
왕관의 주인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만 얻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다이아몬드도 깨뜨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바꿀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랑은
다른 모든 것의 목적입니다. 한 마디로 사랑은 완전무결한 것입니다.
사랑의 가치보다 더욱 고귀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사랑은 그대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그대의 인생 속으로 조금씩 파고 들어 온다. 마치 새벽의 여명이 밝아 오는
것처럼, 어두운 밤과 밝은 낮의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는 새벽은 언제 찾아 오는지도 모르게
다가 와서 순식간에 세상을 밝힌다. 사랑은 형체가 없지만 그것의 존재를 인식한 후에는
이미 그대의 삶에서 영원히 분리시킬 수 없도록 만든다. 사랑의 지혜를 믿어라. 그대의
인생에 기적을 선물할 것이다. -발타자르 그라시안-
불사조는 그 자체가 미덕이다. 임종의 순간 다시 태어남으로써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도 그대의 영혼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은 두 개의 몸 속에 들어 있는 하나의 영혼. 진실한 사랑은 서로의 영혼을 나누는
일이다. 사랑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은 지혜롭다. 타고난 지적 능력이나 성품 보다는
사랑하는 이에 대한 뜨거운 정열과 변하지 않는 헌신이 더욱 그 사랑을 깊고 아름답게
만든다.
가장 귀중한 재산이 바로 그대의 마음 속에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황금과 권력이 사랑 보다 하찮은 것이라고 믿는다. 사랑은 자기 희생의 동반자. 사랑이
그대에게 선물하는 지혜를 통해 영혼의 눈을 뜨게 된다면 반드시 행복의 성으로 들어갈 수
있다. 사랑이란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이 모든 것의 완벽한 조화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그 어느 덕목 보다도 소중하다. 사랑은 미래에 밝은 희망의 빛을 던진다. 그리고
쓰러지는 영혼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응시하는 것은 마치 나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바라 보는 것과 같다. 비록 지금 그대의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사랑은
언제나 그대의 곁에 있다.
빛과 사랑. 진실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진실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해 맑은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 사랑과 사랑을 이어 주는 가교는 진실이다. 사랑은 진실의
힘으로 향기로운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의 영혼은 환한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
사랑은 언제나 진실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마음이 조화를 이룰 때 자연스럽게 생겨 난다.
봄이 찾아 오면 아름다운 장미가 정원을 가득 채우는 것처럼.
먼저 사랑하라. 사랑은 또 다른 나를 만드는 일이다. 사랑을 인생의 지침으로 삼아라.
사랑이 없는 인생은 시들기 마련이다. 인생의 왕도는 바로 사랑이다. 오직 사랑 만이 그대의
인생을 고귀하게 가꿀 수 있다.
사랑의 기적. 사랑의 힘은 아주 크다. 그대의 인생을 새벽처럼 밝히고 행복하게 만들 수도
있다. 한 줌의 빛도 비치지 않는 어두운 동굴로 만들 수도 있다. 인생의 행복은 전적으로
사랑에 달려 있는 것이다. 때로는 사랑이 병을 치료하거나 건강을 회복하는 일에 커다란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사랑은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행복의 묘약이다. 다양한 방법으로
그대의 감정에 건강을 선사하는 치료제인 것이다.
사랑의 비밀을 풀어라. 진정한 용기를 가지고 있는 자 만이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다.
때로는 사랑의 바다에서 거센 풍랑이 몰아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불완전성을
인식하고 완전을 향해 나아 가는 과정이 바로 사랑의 완성이다. 고통의 뿌리가 아무리
깊다고 해도 사랑의 힘이라면 충분히 캐낼 수 있다. 사랑은 이미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만들어 가는 것이다.
사랑은 행복과 불행이라는 두 개의 가면을 가지고 있다. 행복한 사랑을 하려면 가장 먼저
호감이나 동정심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해서 섣불리 가까이 접근해도 좋다는 판단을 내리지
않는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미리 경주에 나갈 좋은 말들을 고르기 위해 시험하는 것처럼
운명의 상대가 될 사람의 성향과 기질을 먼저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사랑을 쌓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그러한 사람은 오직 노력에 의해서만 찾을 수
있고 또한 그러한 노력은 실제적인 사랑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평등한 사랑. 사랑을 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사랑 위에 존재하는 자도
없고 사랑 밑에 존재하는 자도 없이 모두 평등하다는 것이다. 만약 평등하게 대하지 않고
복종을 강요하거나 차별을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단지 사랑의 가면을 쓰고 있을
뿐이다.
지혜와 사랑은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한다. 사랑이 깊어지면 지혜도 더욱 깊어진다.
진리의 빛을 밝혀라. 지혜로운 사람은 사물의 진실을 정확하게 이해할 뿐만 아니라
날카롭고 빠르게 그 진실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따라서 진리란 사물을
귀중한 자료로 취급하면서 그 속에서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 만이 발견하는
것이다. 종종 지혜로운 사람의 위대한 정신은 자신과 자신에게 딸린 가족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부와 유익함을 증대시키는 과정에서 보여지기도 하고 때로는 부와 유익함을
경멸하는 과정에서 훨씬 크게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질서와 일관성, 절제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들은 정신적인 활동만이 아니라 육체적인 활동과도 결부된다.
왜냐하면 일상생활을 지속하면서 예의범절과 질서를 지키기만 한다면, 우리는 도덕적으로
선한 것과 명예로운 것을 보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서로에 대한 선의와 애정이 함께 결합된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바로 사랑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사랑보다 재산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건강을 또한 어떤 사람은 권력이나 명예를 더욱 소중하게 여길 것이다. 심지어
정신적인 사랑보다 육체적인 쾌락을 더욱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육체적인 쾌락은
오직 동물들 만이 최고의 목적으로 추구한다. 그리고 재산이나 건강, 명예 등은 운명의
변화에 따라 쉽게 변한다.
품어라. 세상은 그대의 것이다. 실천하지 않고 언제나 생각만 하는 사람은 삶을
비관적으로 만들고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행동하는 사람은 함정에 빠진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익살만 부린다면 경멸을 자초하거나 위험에 빠지게 된다. 인생의 지혜는 계획과
실천을 적절히 조화시키는 일에 달려 있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사람의 수칙. 반드시 욕망을 이성에 복종하도록 해야만 한다. 욕망이
이성을 압도하거나 혹은 나태함이나 게으름으로 인해 이성이 둔감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
언제나 마음을 평온하게 하면서 정신이 혼란에서 벗어나도록 한다면, 사랑의 광채가 더욱
빛나게 될 것이다. 욕망이 너무 강해서 고삐 풀린 말처럼 마구 날뛰거나 이성의 힘으로
충분히 통제되지 않는다면, 분명히 그 한계와 정도를 넘어서게 된다. 욕망은 순종의 미덕을
저버리도록 만들고, 이성을 마비시킨다. 과도한 욕망은 정신을 혼란시키고 신체에도 상처를
입힌다. 어떤 충격을 받았거나 지나친 쾌락에 빠진 사람들은 그 얼굴만 보아도 단번에 알
수 있다. 그들의 안색과 목소리, 행동과 태도 등 모든 것이 위태롭게 변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성과 욕망 중에서 어느 것을 따를 것인가? 욕망은 마음을 충동시켜서 욕구를
행하도록 만드는 것이고 이성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것은 이성이 행동을 주도하고, 욕망이 이성에 복종하는 것이다.
무모하거나 부주의한 행동은 일체 하지 말아야 하며 정당한 이유가 없는 행동도 해서는 안
된다. 사랑은 광란의 골짜기에서 평화의 초원으로 나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친절한 행동을 통해 더욱 강해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애정의 증거를 보여 줄 때
그리고 다정한 손길로 친밀감을 표시할 때 사랑의 충동은 놀라울 만큼이나 뜨겁고 커다란
애정으로 변모한다. 작은 불씨가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로 변하는 것이다. 만약 사랑이
고독을 치유하기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자신에게 부족한 점을
다른 누군가를 통해 얻고자 하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여신을 모욕하는 일이다. 게다가 사랑의 여신을 궁핍과 이기심의 노예로 만드는 일이다.
사랑의 근본을 그렇게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바로 그 수준에 걸맞는 사랑 밖에는
얻을 수가 없다.
지혜로운 사람은 기꺼이 고행의 길을 걷는다. 때로는 가시발길을 걷는 고행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고행의 길이 끝나면 향기로운 꽃이 만발한 정원이 기다리고 있다.
인생을 즐겨라. 그대의 인생은 몹시 귀중한 것이다. 만약 지금 하는 일이 너무 많다면
일을 약간 줄이고, 인생을 느긋하게 보내야 한다. 야심가는 대부분의 경우 외면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지만 내면적으로는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다.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정신적인 활력을 희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향해 맹목적으로
돌진한다. 여유를 즐기는 행복한 생활이 시간에 쫓기면서 살아 가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라는 사실 조차 고려하지 않는다. 지나친 노동은 탐욕의 어머니이자 욕망의
대역이다. 일단 욕망의 손아귀에 사로잡히게 되면 몸의 기능이 쇠약하게 될 때까지
빠져 나갈 수 없게 된다. 성공에 짓눌리지 마라. 선망에 억압 당하지 마라. 명예에 이끌리지
마라. 그것들은 인생을 짓밟고 정신을 질식시키는 일이다. 적당하게 일하고 좀 더 느긋하게
쉬어라. 현명한 사람은 느긋하게 인생을 보냄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아무리 궁핍해도 사랑의 창고는 넉넉하다. 비록 육체는 허약해도 사랑은 강하다. 허약한
육체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이 병이나 혹은 그 밖의 다른 이유로 인해 죽음을 당한다고 해도
사랑은 언제나 그대의 가슴 속에 살아 있다. 신비한 사랑의 힘으로 인해 그 시절의 따스한
추억과 뜨거운 그리움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남기는
추억은 화상 만큼이나 강렬하다. 그리고 그 추억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사랑은
두 사람을 갈라 놓은 죽음을 오히려 행운으로 보이도록 만들며 살아 남은 사람의 삶을 찬미의
대상으로 만든다.
사랑은 대화를 통해 그 날개를 펼친다. 금속은 소리로 그 재질을 알 수 있지만 사랑은
대화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이 세상을 가득 채울 듯한 만족감을 선사할 뿐만 아니라 동반자가 되어서 서로의
짐을 덜어 주기도 한다. 사랑은 그대가 살아 가는 힘이다. 사랑이 없는 것보다 적막한 삶은
없다. 사랑은 기쁨을 두 배로 만들고 슬픔을 절반으로 줄인다.
재능은 별처럼 빛나는 보석이다. 그대의 재능을 계발하라. 그대의 매력이 되는 재능은
사회에서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마법이기 때문이다. 매력을 더욱 발전시켜서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 잡아라. 매력은 당장 손에 쥘 수 있는 물건 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에
사용하라. 그리고 항상 잊지 말고 부단히 사용하라. 성의는 매력이 첨가됨으로써 더욱 빛을
발한다. 유능한 사람은 잘 생긴 외모로 인해 더욱 눈에 뜨인다. 비옥한 토양에 거름을 주면
더욱 풍성한 수확을 거두는 이치와 같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재물이나 아름다운
외모가 재능을 따라 잡을 수 없다. 그대의 재능과 매력을 더욱 발전시켜라.
빛을 발하라. 길을 잃고 방황하는 자에게 친절한 태도로 길을 알려 주는 사람은 마치
자신의 등불로 다른 사람의 등잔에 화한 불을 밝혀 주는 것과 같다. 다른 사람에게 불을
붙여 주었다고 해서 자신의 불빛이 덜 빛나는 것은 아니다.
예절은 진귀한 보석처럼 빛난다. 예절의 힘을 인식하면 두 배의 가치가 되돌아 온다. 모든
교제에서 예절이라는 것은 조용한 그림자의 역할을 한다. 예의 바른 사람은 예절을 만나면
거기에 매료되지만 천박한 사람은 그 반대로 커다란 혼란에 빠진다. 상대방이 조용히
말하고 있는데 혼자 큰 소리로 소란을 떨면 천박하게 보인다. 경솔하게 행동하면 비난을 살
뿐이다. 물건을 팔 때에도 예절 바르게 행동하면 두 배의 가치가 되돌아 온다. 물건 값과
더불어 손님의 감사한 마음까지도 돌려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분별력이 있는 사람은
예절을 세련된 호의와 배려의 징표로 삼는다. 예절의 기술은 모든 사회적 관계를
향상시킨다.
사랑하는 사람을 죄의 늪으로 이끌지 마라. 죄를 짓도록 만드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목에 빠져 나올 수 없는 단단한 올가미를 씌우는 일이다. 일단 죄의 늪에 빠지게 되면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면서 고통과 후회를 겪게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일은 사랑을
파괴하게 된다.
사랑은 그대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그대의 인생 속으로 조금씩 파고 들어 온다.
마치 에오스가 다가 오는 것처럼. 새벽은 언제 밝아 오는지도 모르게 다가 온다. 처음에는
어렴풋이 빛나지만 나중에는 온 세상을 빛으로 가득 채운다. 어느 한 순간 형체도 없는
그것의 존재를 인식한 후에는 이미 그대의 삶에서 분리시킬 수 없게 된다.
* 에오스: 새벽의 여신, 태양신 헬리오스와 달의 여신 셀레네의 형제. 바람과 별들을 낳은
어머니이기도 하다.
기적을 낳는 사랑. 사랑은 그대의 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을 순식간에 연인으로 바꾸어
놓는다.
세상은 더불어 살아 가는 것이다. 독불장군은 혼자 고독하게 살다가 쓸쓸한 최후를 맞이할
수 밖에 없다. 타인을 무시한 자기 만족은 초라한 자기 위안일 뿐이다. 타인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자신의 목소리만 듣는 사람은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다. 더구나 다른 사람의
말은 미처 못들은 척하고 자기의 말한 잔뜩 늘어 놓는 사람은 어리석어도 보통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지나친 자부심은 다른 사람들의 경멸로 인해 그 대가를 받는다. 이런
사람에게 연설을 시키면 정말 듣기 괴롭다. 잘난 척하는 자는 오직 자기 말만 떠벌리는
버릇이 있다. 게다가 덤으로 자기의 말에 도취되어서 듣는 사람들의 곤혹스러움을 느끼지도
못한다.
자기 완성의 길. 정신은 육체라는 깨어지기 쉬운 그릇에 담겨 있지만 하루 하루 자기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면 머지않아 정상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달착지근한
유년기와 떫은 맛을 내는 청년기를 거치면서 성장한다. 환락만 추구하는 나쁜 버릇, 보잘
것은 없는 것 만을 추구하는 경향, 경박한 취미를 가지는 시기가 있는 것이다. 비록 드물기는
하지만 청년기의 행동에서 가끔씩 성숙의 싹을 찾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시 아직은
시간이 되지 않았기에 미숙한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경험과 나이에서 오는 불완전성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진지한 척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긴장을 풀어도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고 만다. 진정한 성숙의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은
연륜과 경험이라는 약을 사용할 줄 아는 위대한 의사라고 할 수 있다. 젊음의 잘못된
습관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의사가 바로 시간이다. 장년기에 이르면 생각은 보다
넓어지고 취향이 변하고 사고는 정화되며 판단력은 완숙의 단계에 이르고 바람직한 의지를
갖게 된다. 마침내 자기 완성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깨달음을 서로 나눔으로써 더욱
바람직한 인격을 갖춘다. 연륜이 주는 충고로 용기를 내어 유려한 사색으로 참다운 기쁨을
맛볼 수 있다. 따라서 성숙한 향기를 발산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명제. 이 세상에서 사랑 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을
누리고 있는 사람 보다 더 훌륭한 사람도 없다.
모든 욕망의 대상들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부는 소비를 위한 것이고
권력은 영향력을 얻기 위한 것이며 자선은 존경을 받기 위한 것이다. 예술은 명예를 부르고
쾌락은 육체적인 즐거움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건강은 고통으로부터 벗어 나고 신체의 모든
기능을 완전히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유익한 목적에 사용된다. 그대가 어떻게 변해도 사랑은 언제나 그대의 편이다. 어떠한
장애물도 사랑을 막을 수 없다. 사랑은 결코 늦는 법은 없으며 결코 부족한 법이 없다.
그러므로 사랑은 인생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랑은 날개가 달린 태양이다. 황금빛 태양은 날개를 달고 어디로든지 날아갈 수 있다.
오직 순수한 영혼만이 사랑할 수 있다. 내 영혼의 보석, 사랑.
사랑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기꺼이 봉사하며 거만한 마음으로 배척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맞서는 한이 있더라도 그 사랑을 아끼고 보호하며 두 사람을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시작보다 아름다운 끝을 선택하라. 새벽을 알리는 여명의 빛을 받으면서 태어나
낙조의 비탄에 싸여 무덤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무거운 슬픔에 가슴을 친다. 부드러운
미소가 고통스러운 눈물로 바뀌는 것이다. 날이 밝아 올 때에는 새들이 달콤한 노래로
인사하지만 해가 질 때에는 밤새들이 야유로 작별을 고하는 법이다. 비록 시작은
초라하더라도 칭송과 존경을 받으면서 끝을 맺어야 한다.
감미로운 포도주를 빚으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수 많은 정성과 시간을 들어야
명주를 만들 수 있다. 처음 빚은 포도주는 너무 달아서 첫 모금부터 불쾌한 기분을 주거나
떨떠름한 맛을 낸다. 왜냐하면 포도주가 제대로 숙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고 서서히 발효되면 초기의 거친 맛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감미로운 맛으로 변한다.
그리고 점차 아름다운 색과 유혹적인 향기를 풍기게 되는 것이다. 시간과 정성을 들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결실은 없다.
기꺼이 사랑에 그대의 몸을 내던져라.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는 말이다. 날마다 사랑의 바다를 항해하기 위해 노력하라. 거칠고 험한
파도가 지나가면 잔잔한 바다가 얼굴을 내미는 법이다.
빛이 세상을 가득 채운다. 어둠은 다만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세상을 비관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어두운 그늘이 있는 사람을 경계하라. 불을 우주의 근원으로
생각했던 헤라클레이토스처럼 언제나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면서 살아 갈 수는 없다. 어린
시절부터 침울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가 결국에는 빛의 땅에서 스스로 달아 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혼자 있는 곳에서 위안을 찾는다. 누군가 관심을 보이거나 애정을 기울이면
몹시 부담스럽게 여긴다. 그들은 모든 것들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다. 감정이 흥분하면 극단적인 행동으로 치닫는 것이 그들의 습관이다. 그들의
냉정한 성격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괴롭게 만들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더욱 학대하게
된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떨쳐 버릴 수 있는 방법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둠의 운명은 얼마든지 빛의 운명으로 바꿀 수 있다. 그 열쇠는 바로 이해심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나 처지를 이해하면서 서로 배려한다면 어둠은 물러 갈 수 밖에 없다.
* 헤라클레이토스: 그리스의 철학자. 독학으로 사유의 체계를 세웠으며 이오니아
학파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고독한 생활을 즐겼고 난해한 학설로 인해 어둠의 현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자유를 향한 의지는 자유로운 정신에서 태어 난다. 모든 것들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는 다양한 취향은 그 자체가 아름답다. 과거를 밑거름으로 삼고 현재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라. 그것은 자유로운 사람 만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결코 한 가지
일에 얽매이지 않는다. 다양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 단 하나의 요소에 이끌리지 않는 것과
같다. 그들은 일정한 경계가 없는 무한한 영역을 향해 달려 간다. 위대한 사람에 대해서는
함부로 정의를 내릴 수 없다. 다양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반면에 한계가
아주 분명한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의 행동은 언제나 예측할 수 있다. 일정한 범위를
넘어서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숨을 쉬고 있는 한 사랑은 있다. 사랑은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정열이자
희망이다. 사랑은 어둠을 걷어내고 빛으로 세상을 가득 채운다.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정상에 올라 서면 세상의 모습이 한 눈에 보인다. 세상의
풍경을 바라 본 후에는 다시 계곡으로 내려 가야 한다. 어느 누구라도 정상에서 오랫 동안
머무를 수는 없다. 어떤 것이든지 정상에 오른 순간부터 조금씩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는
것이다. 꽃도 활짝 피어 나면 시들기 위한 준비를 한다. 그리고 시들면서 후대를 위한 씨앗을
마련하는 것이다.
지혜 - 삶의 행복을 주는 114가지 지혜
저자: 곽광택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살아 가고 있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만 할까요?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행복은 하늘 높이 있을까요?
그것도 아니면 땅속 깊이 있을까요?
혹자는 행복은 저 산 너머 있다기에 쫓아 갔지만,
결국 헛고생만 하고 돌아 왔다 라고 단언했습니다.
행복은 자기 마음 속에 있고, 남을 위해 주는 곳에 있고, 기쁨을 선사하는 웃음 속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자유를 원하지만, 그러나 자유가 인간 최후의 목적은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는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누구나가 추구하는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요, 자유는 다만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갖습니다. 따라서 행복은 만인의 바람인 것입니다.
황무지에서도 장미꽃은 핀다
물 위에 뜬 나뭇조각은 물이 흐르는 대로 흘러 갈 뿐이지만, 생명력이 있는
물고기는 그 물을 열류해 거슬러 올라 갑니다. 그렇듯 인간은 도전과 응전을 겪을
때 힘은 들지만, 그것을 뛰어 넘었을 때 사회와 역사를 창조하는 밝은 별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쉬지 않고 걷는 사람 만이 산의 정상에 도달해 그 기쁨의 희열을
맛볼 수 있으며, 부단히 노력하는 자 만이 승리의 왕관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현실과 이상의 현격한 차이에서 오는 상황을 고민하여,
그것에 맞부딪혀 해결하려고 하기도 전에 포기해 버립니다. 세상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아 낭만주의에 빠져 들어서도 안되겠지만, 비관적으로 흘러
허무주의의 무기력한 삶을 살아서도 결코 안됩니다. 황무지에서 장미꽃이 필수
있다는 희망과 그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자기 희생이 뒤따라야 합니다.
인생은 자신이 생각한 대로 되어진다
사람의 인생은 결국 자기가 생각한 대로 되어지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무엇을
믿고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신념에 넘쳐 아름다움과 희망,
격려, 용기, 열의를 불러 일으키는 메시지를 계속적으로 불어 넣어, 회의, 절망,
낙심, 의심이 들어 찰 공간이 없도록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을 굳게 지켜 마음 속에 다질 때 우리의 가슴은 아름다움과 희망,
격려, 용기, 열의로 파도칠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 가는 우리의 생활은 분명
풍요롭고 충만한 삶이 될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심고 노력한 만큼 거둘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서도 무릇 지킬 만한 물건보다 마음을 더욱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라는 귀중한 충고를 해 주고 있습니다.
자신을 상대방의 거울에 비춰보라
너와 나의 관계-사람은 태어 나면서부터 가정이란 인간 관계 속에 놓이게
됩니다. 본래 사람이라면 인자 하나로 족합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어휘를 쓰게 된
것은 사람과 사람의 의존 관계를 뜻합니다. 내 생명이 귀하면 다른 사람의
생명도 그 만큼 귀하고, 사람은 서로 기대어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에서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즉 상대방의 거울에 비추어 볼 때 자기
자신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일과 남의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해서 서로 도우면, 결국 자기의 일이 잘
풀리게 됩니다. 사람들의 할 일은 의미 있는 역사를 심고 가꾸는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생각하고, 행하고, 마음을 굳게 하여 역사를 빛낼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우리들 모두가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불안과 공포는 무서운 파괴자다.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 최대의 적은 공포감이나 불안감입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소극적인 사람이 되며, 밝고 적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인간에게 있어 불안이나 공포는 그 어떤 것보다도 참으로 무서운 파괴자 입니다.
따라서 당신의 생활을 불안감이나 공포가 지배하도록 그대로 놓아 둔다면,
당신의 힘은 쇠잔해지고 보람 있는 일을 해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일을
시작하면 무슨 일이든지 반드시 해 낼 수 있다 라는 이 말을 언제나 머릿 속에
기억하고 있다면 항상 의욕이 넘칠 것입니다. 이 말은 당신에게 놀라운 영향력을
주고, 승리의 개가를 올리게 해 주고, 잠재적인 마음의 영역으로 스며 들어 모든
소극적인 세력에 맞서서 불안감과 공포감을 물리칠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담력을 가진 과감한 실험과 확장과 번영이라는 새로운 불꽃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인생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만일 오늘을 아무런 의미 없이 흘려 보낸다면 다음 날, 또 그 다음 날도 역시
일정한 계획 없이 무의미하게 보내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일에 대한 결정을 빨리
내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연히 미루어지게 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희미해져서 나중에는 기억 속에서 조차 사라질 것입니다. 어떤 일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 거기에는 커다란 용기가 뒤따르게 됩니다. 당신이 계획한 일은,
그것이 비록 자신의 힘으로 어렵고 힘든 일일지라도 다 당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과감하게 시작해야 합니다. 망설임에서 벗어나 일단 시작만 하면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마음이 불붙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곧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장차 미래의 밝은 빛을 맞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력이 뒤따르지 않는 용기는 성공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패배의 쓴 맛을 보게
됩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라
작게 시작하십시오. 결코 서두르지 말고 정확하고 분명하게 기초를 닦아야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과정이 성공했을 때, 두 번째
과정으로 확대하면 실패 없이 꾸준히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항상 작은 것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잊지 말되, 계획은 되도록 굳고 단단하게 세우십시오. 기초를
굳게 다지는 원리를 무시하면 계획은 목표에 도달하기 전에 곧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이제 게으름의 잠에서 깨어나 활기 있게 움직이고, 무능과 무력함의
쇠사슬을 과감히 끊고 망설임의 늪에서 나오십시오. 그리하여 계획을 지금
곧바로 행동에 옮기기로 결심하였다면 즉시 시작하십시오. 그러나 당신이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을 먼저 하십시오. 이 때 한꺼번에 완성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한 번에 돌 한 개씩을 부수어서 점점 크게 헐되 모든 일에 적극적인
사고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행동하십시오.
눈물 젖은 빵은 인생의 안내자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믿음이 있고, 믿음이 있는 곳에 정이 쌓이게 됩니다. 사랑,
정, 믿음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들은 서로 손을 잡고 대화를 하며, 또한 오랫 동안
못보면 보고 파져서 그리워 하며 그 문안을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사람 인자는
서로 기대어 선 모습, 즉 결코 혼자서는 살아 갈 수 없는 사람이 사는 세상입니다.
자기만 혼자 뽐낸다거나 자기 혼자만 편하다고 남의 짐을 덜어 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마침내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소외 당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자신이 귀하면 남도 귀하다는 인간 존중의 사상으로 항시 상대방을 존중해야
합니다. 집을 떠나 오래 여행을 할 때는 집이 더욱 그립고, 조국을 떠나서야
조국의 고마움을 느낍니다. 괴테가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사람이 아니면 참
인생을 모른다 라고 했듯,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서로가 서로를 아끼며
사랑하며 서로가 돕는 일입니다.
작은 기쁨을 큰 기쁨으로 생각하라
일생을 사는 동안 권위 있는 상들이 자신에게 주어진다면 진정으로 깊이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들이 비록 당신을 지나치더라도 그것에 대해
서운해 하거나 괴로워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삶 중에 존재하고 있는 작은
기쁨들을 마음껏 누리면 오히려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과거의 영웅들이
망각 속에 묻혀 버리듯, 삶을 살아 가면서 받은 상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곧
잊혀집니다. 그러나 생의 작은 보화들은 계속 이어집니다. 날마다 이 커다란
기쁨들로만 가득 채워질 수는 없지만, 작고 미세한 기쁨들로는 항상 채워질 수
있습니다. 단지 눈을 크게 뜨고 내 주위의 낮은 곳을 돌아 보십시오. 그리고
언제나 작은 기쁨을 큰 기쁨으로 생각하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고통스런 삶 속에서도 내일이라는 희망의 삶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괴로움과 좌절, 실패를 극복해 가며 살아 갑니다.
마음의 꽃을 피워라
인간은 진정한 삶을 추구하려고 하며 그 가치를 인식하면서 사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인간 외의 다른 동물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지혜와
영혼이 있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늘 깨어 있으면서
고귀한 생각을 하며 살아 가는 사람에게는 발랄하고 신선하게 그 영혼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생각은 곧 생산이요, 유산입니다. 자신보다
처지가 못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현재의 자신 생활에 만족해 하는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마음은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살아 있는
사람은 육신도 살아 있으며, 육신이 건강한 사람은 마음의 꽃을 세상에 활짝 피울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의 꽃이야 말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의 영혼을 소생하게 하고, 병든 이 땅이 아픔들을 감싸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시대의 노예가 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인간이란 나날이 발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발전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 반성이 중요합니다. 반성은 새로운 것으로 나아 가기 위한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 누구나 언제든지 새로운 것을 희구하면서
살아 갑니다. 이때 마음의 눈이 밝은 자는 사물을 바로 인지할 줄 알고, 눈의
초점이 흐린 자는 사물을 명철하게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시대를 극복하는
자는 자성하는 삶을 살아 가는 사람이요, 시대의 노예가 되는 자는 멸망의 길을
재촉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 가는 자입니다. 생각하는 사람, 즉 항상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사함은 오늘의 시대를 시대성이라 방임하는 자세에 머물지 않고 그
시대성 속에 숨어 있는 참다운 삶을 찾아내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치가 자신과 이웃에게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생각해 역동적으로 시대와 맞서
싸웁니다.